역사

전쟁의 시작과 끝 : 예브게니 할데이

소련의 해군장교이자 사진작가인 예브게니 할데이는 독보적인 예술감각으로 역사의 곡절을 필름에 담아낸 사람이다. 특히 피사체의 구도와 배경을 적절히 조화시켜 당대의 역사ㆍ사회ㆍ정치적 바탕을 옮겨낸 그의 사진들은 그야말로 필름 위에 쓰여진 역사책이라고 할 법하다.

 

1941년 6월 22일, 독ㆍ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한 나치 독일 국방군은 일제히 소련 국경을 넘었다. 일요일 새벽 0400시였다. 곤히 잠들어 있던 소련 인민들은 물론 소련 수뇌부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채 파악하지 못하던 때였다. 최전방에서는 국경을 방어하던 소련군이 포화 속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지만, 후방의 모스크바는 조용하기만 했다.

 

출장차 잠시 모스크바를 떠나있던 할데이는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새벽에 급히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아직도 이게 무슨 일인지 긴가민가하던 차, 날이 밝자 길거리의 확성기에서 비상방송이 흘러나왔다. 모스크바 중앙 라디오 방송국 아나운서 유리 레비탄은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는 사실을 짤막히 알렸다. 이후 외무상 몰로토프가 나치 독일과의 전쟁 상황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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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데이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담았다. 일어난 시민들이 거리의 라디오로 개전 소식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는 장면을 포착한 위의 사진은, 훗날 1941년 6월 22일 역사적인 대조국전쟁의 개전 당일 촬영된 유일한 사진으로 드러났다. 이는 할데이의 선견지명이기도 하지만, 얼마나 소련이 전쟁을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조국전쟁 내내 전선에서 소련군의 전투를 필름에 담아내는데 몰두한 할데이는, 전쟁이 종결되는 기념비적 순간도 담아냈다. 1945년 5월 2일 한밤중에 나치 독일의 심장 베를린의 제국의회는 소련군의 손에 떨어졌다. 최후까지 제국의회를 방어하던 무장친위대 노르트란트 사단은 전멸했다. 피로 제국의회의 복도와 방을 씻어내며 승리한 소련군은 의회 지붕에 붉은 식탁보로 급조한 깃발을 꽂았다. 다음날 아침, 선전국은 그 병사들에게 제대로 된 소련 국기를 지급하며 다시 꽂고 사진을 찍으라고 지시했다. 할데이는 그 순간을 찍었다. 오늘날 그 사진은 인류 최대이자 최악의 전쟁이 끝나던 순간을 묘사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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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수정'이 들어가기는 했다. 소련 국기를 꽂는 병사를 잡아주는 장교는 손목시계를 두 개나 차고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할데이의 사진에 담겼다. 독일인으로부터 약탈한 시계였다. 소련 당국이 발표한 공식 사진은 물론 시계 하나가 지워진 상태였다.

 

할데이가 겪은 일화를 소개하며 마친다. 대조국전쟁이 시작되고, 전장의 모습을 찍으러 전선으로 떠나는 할데이에게 선전국은 필름을 조금밖에 지급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조금만 주느냐고 할데이가 따져묻자 선전국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몇 주면 끝날 전쟁인데 뭐하러 필름을 많이 가져가나?" 그 '몇 주면 끝날 전쟁'은 5년 동안 3000만명의 사망자를 내고서야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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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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