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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감성에 보다가 눈물흘림....

 

https://youtu.be/msNkEDVIps8?feature=shared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옮을까봐 선수들은 이것을 '그것' 혹은 '괴물'로 부릅니다. 그것에 씌인 선수는 마음먹은 대로 공을 던질 수 없게 되죠.

정교한 컨트롤을 자랑하던 다니엘 바드는 2011년 괴물을 맞닥뜨린 후에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가 돼버렸습니다. 명문구단의 유망주에서 마이너리그를 떠도는 저니맨으로 추락하는 건 한 순간이었습니다. 반면 그것을 극복하는 데 꼬박 7년의 세월이 걸렸죠.

다니엘의 컴백은 성공적이었습니다. 30대 중반이 되어서 빅리그 마운드에 복귀한 다니엘은 유망주시절에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활약을 선보였죠. WBC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영광도 안았습니다. 2023 wbc 베네수엘라와의 8강전. 위태로운 리드 가운데 다니엘이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내 지켜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죠.

공이 스트라이크존에서, 터무니없이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공은 타자 머리를 향했고 결국 상대 엄지손가락을 부러뜨렸죠. 다니엘의 7년을 앗아간 괴물이 돌아온 듯합니다. 관중들 입에서, 다니엘의 머릿속에서, 괴물의 이름이 맴돕니다. 
"입스" 

 

입스의 가장 대중적인 정의는 운동선수가 특정 기술을 수행하는 능력을 상실한 현상입니다. 특히 수년간의 훈련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흔히 마스터했다는 동작들이 그 대상이 되죠. 눈앞에 퍼팅을 놓치고 스윙할 때면 버퍼링이 발생합니다. 테니스 선수는 좀처럼 서브를 하지 못하고 다트 선수는 다트를  쉽사리 던지지 못하죠. 포수는 투수에게 공을 돌려 주는 걸 주저하고 투수는 포수의 싸인대로 공을 던지지 못합니다.

입스는 대게 한순간에 발생하고 그 증상은 만성적으로 지속됩니다. 입스가 무서운점은 원인과 해결책 모두 불분명하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선수들은 입스를 어떤 질환으로 보기보다 지독한 슬럼프, 저주나 미신으로 여겼죠.

입스의 가혹함을 2000년대 최고유망주 중 한 명이었던 릭 앤키엘의 몰락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릭은 고등학교 졸업 2년만에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른 천재형 선수였습니다. 데뷔 첫 해 두 자릿수 승을 거두고 신인왕 2위에 올랐습니다. 기세등등한 스무살 루키는 플레이오프 1차전 선발 자리까지 차지했죠. 2000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릭은 수비의 도움을 받으며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습니다. 카디널스 타선은 1회 6점을 내며 루키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모든 게 순조로웠습니다. 44번째 공을 던지기 전까지는 말이죠. 3회초, 무사 1루에서 상황. 릭의 커브볼이 땅에 바운스되면서 포수 옆구리로 벗어납니다. 지극히 평범한 폭투였는데, 놀랍게도 그 공은 괴물을 소환했습니다. 이후 제구가 급격하게 흔들렸고 공은 릭의 의지를 무시한채로 제멋대로 날아가며 포수의 순발력을 테스트했죠. 같은 이닝, 강판당하기 전까지 릭은 총 5개의 폭투를 던졌는데요. 한 이닝에 릭보다 많은 폭투를 기록한 선수가 20세기 이후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최악의 퍼포먼스입니다. 경기가 끝난 후 릭은 그래도 역사의 이름을 남겼다며 기자들에게 쿨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릭은 그 날의 부진이 해프닝이었다는 걸 자신에게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주변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9일 후에 마운드에 다시 올랐죠. 3개의 볼넷, 4개의 폭투. 1이닝도 못 채우고 교체됐습니다. 3번 연속 일리는 없다고 다시 등판했지만 또다시 폭투를 기록하고 강판 당했습니다. 그리고 복귀한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죠. 그날의 44번째 공 이후 '세기의 재능'이라고 여겨지던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고장난 투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입스의 원인과 해결책은 불분명하지만 입스가 악화되는 과정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당혹스러운 선수들은 문제가 되는 동작을 작은단위로 해체하고 교정합니다. 그러다보면 무의식적으로 수행했던 기술이 단계별로 인식되기 시작하죠. 특정 단계에 주의를 기울인다 딜레이가 발생하며 버벅거리고 결국 밸런스와 메커니즘이 무너집니다. 심한 경우 초보자 수준으로 리셋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에 무작정 자세를 교정 하는 건 입스의 기름을 붓는 격이죠.

2010년 다니엘 바드는 리그에서 가장 치기 힘든 공을 던지는 선수였습니다. 날카로운 제구와 강심장으로 팀의 위기상황을 전담했죠. 그런데 2011년 시즌 후반기부터 갑자기 제구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뭐 특별한 계기도 없이 말이죠.

답답하고 불안헸던 다니엘은 훈련 시간을 늘리고 자세를 면밀하게 교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공은 스트라이크존에서 멀어졌고, 20년 동안 몸에 배 있던 동작을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습니다. 이후 5년 동안 다니엘은 마이너리그와 해외리그를 오가며  괴물과 싸웠습니다.

물리치료부터 심리치료, 최면치료, 유사과학. 그리고 마운드에 오르기 전에 독한 술을 마시는 것까지 온갖 것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기 시작했죠. 이러다 자신이 괴물이 돼버릴 것 같았습니다.

결국 2017년 다니엘은 자신의 정신건강과 가족을 위해서 패배를 인정하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릭 엔키엘과, 피츠버그 파이리츠 1라운드 픽, 헤이든 허스트도 결국 입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은 마운드에서 내려오자마자 곧장 배트와 미식축구공을 집어 들었죠. 릭의 강력한 어께와 타고난 운동능력을 눈여겨본 코치는 그에게 중견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 만에 리그 메이저 리그의 타자로 복귀하는, 그것도 첫 경기에 홈런을 날리며 한편의 영화를 찍었죠. 이후 릭은 레이저 송구로 명성을 얻으며 외야에서 준수한 커리어를 이어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 유망주였던 허스트는 대학교에 돌아가 미식축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같은 학번보다 3살 많은 나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경기에 임했죠. 그리고 2018년 FA 드래프트에서 25번째로 이름이 불리면서 MLB, NFL 두 스포츠에서 1라운드에 지명되는 역사적인 운동선수가 되었습니다.

두 선수의 드라마틱한 컴백은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죠. 하지만 입스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 했습니다. 평생을 바친 스포츠를 뒤로하고 새로운 스포츠에서도 성공한다는 것은 입스를 극복하는 것만큼의 기적적인 일이 없기 때문이죠.

운동 천재들만 누릴 수 있는 기회였고 다니엘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은퇴 후 다니엘은 마이너리그 코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다니엘은 아들과도 캐치볼을 안 할 정도로 입스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는데요 선수들을 코치하기 위해선 캐치볼은 물론이고 마운드에서 공을 던져야만 했죠. 스코어보드, 야유하는 팬, 자신의 투구를 평가하는 코치와 감독도 없는 연습장에서 다니엘은 불안감을 물론이고 입스의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범으로 던진 공은 전성기 공을 연상시켰습니다.

동료들은 고장 다니엘에게 컴백을 부추겼는데요. 다니엘도 내심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죠. 그리고 2020년봄 다니엘 코치직을 그만두고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 복귀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괴물을 맞닥뜨린 지 7년이 지난 후에 다니엘 바드는 콜로라도 로키스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 마운드에 다시 올랐습니다. 다니엘의 컴백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첫째 올해 제기 상을 받았고 다음해는 약간의 부침이 있었지만 2022년에는 방어율 1.7, 세이브 34개로 커리어 통틀어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했죠.  2023 WBC 미국 대표팀에 선발되는 영광도 안았죠. 다니엘에게 입스는 느닷없이 찾아왔고 불현듯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기쁜 날에도 다니엘과 팬들에게 불안감이 미세하게나마 존재했습니다. 괴물이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말이죠.  2023 WBC 베네수엘라와의 8강전, 3점차 리드를 하고 있는 5회말, 긴장감과 압박감 속에 다니엘이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첫 타자는 볼넷으로 내보냈는데, 심상치 않은 볼넷이었습니다. 공은 포수 사인을 가볍게 무시했고 타자 머리를 향했죠. 아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입안에 입스를 머금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사 1루, 타석에는 작은 거인 호세 알투베. 큰 거 한 방이면 동점이 되는 상황. 공은 포수 옆으로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불안이 뒤엉킨 다섯 번째 공은 알투베 머리를 향해 날아가다 결국 오른손 엄지를 부러뜨리는 부상을 입힙니다. 팬들을 안타까운 실수였길 바랬지만 다니엘이 다음 타자에게 곧바로 폭투를 던지자 모두들 확신했습니다. 괴물이 돌아왔다는 것을 말이죠.

미국에 돌아온 후에 WBC의 여파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습니다. 스프링캠프에 퍼포먼스는 들쑥날쑥했고 이번 괴물은 얼마나 더 악랄할지 걱정하며 다니엘은 불안감에 사로잡혔죠. 2023시즌 개막을 일주일 앞둔 시점, 다니엘은 몸과 마음이 시즌을 치를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며 자진해서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죠. 그리고 사유란에 금기된 단어를 적습니다.
"불안증세" 


2022년 메이저리그 오프닝 로스터에 올랐던 선수는 총 975명, 그 중 불안증세나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을 이유로 병가를 낸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엘리트 운동선수들이 건강한 환경에 살고 있어 보이지만 브리티시 스포츠의학 저널에 따르면 그들도 일반인 비슷한 비율로 정신질환을 경험한다고 하죠. 미국에서는 매년 성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다고 합니다. 

선수들이 정신질환을 입스만큼이나 말하기 주저하는 이유는 이를 터부시하는 스포츠 문화때문입니다. 스포츠세계에서 정신질환은 기질과 태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죠. 숨이 가빠 오고 가슴이 떨린다, 기분이 다운되고 의욕이 없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할 거 같아 불안하다. 이렇게 말하면 '유난떤다', '정신력이 약하다'는 소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질환은 정신력과 무관하죠. 그 누구도 7년 동안 정체 모를 질환과 끈질기게 싸웠던 다니엘에게 정신력이 약하다고 말할 수 없죠.  정신질환은 충격적인 사건이나 일련의 경험 그리고 유전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발생하곤 합니다. 이는 충돌과 혹사, 그리고 고질적인 부상처럼 외부적인 요인이 원인이 되고 예기치 못하고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신체 부상과 유사하죠.

하지만 불안증세를 고백하는 순간 단순히 성격이나 변덕스러운 감정의 문제로 치부합니다. 2010년 전까지 메이저리그는 정신질환으로 부상자 명단에 오른 선수들의 연봉을 보장하지 않았고 팀들은 그들의 재계약 고려 대상에서 제외헸죠. 슈퍼맨을 원했던 팬들은 공황장애를 겪는 선수들을 원하지 않았죠. 그래서 선수들은 정신질환을 숨긴채로 필드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안 증세와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시애틀 매리너스의 롬 웰런 구단으로부터 일주일 휴가를 받았지만 얼마인가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로스터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받았고 공황 장애를 겪고 있던 J.P. 알렌시비아는 생애 첫 장기계약에 영향을 줄까 터질 듯한 심장을 숨기고 경기에 나섰다고 했습니다.
다니엘 바드, 릭 앤키엘, 헤이드 허스 모두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엎은채로 훈련장에 나가 입스와 싸워야만 했죠.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어깨나 팔꿈치부상이라고 핑계 대고 부상자 명단에 오르며 급한 불을 끄는 게 관행으로 자리잡기도 있습니다. 이처럼 치료에 골든타임을 놓칠 수 밖에 없었던 선수들은 증상이 악화되어 결국 리그에서 사라지게 되죠.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입스만큼이나 가혹했습니다.


불안증세로 부상자 명단에 오른 날, 다니엘은 100명이 넘는 메이저리그 선수들로부터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며 '힘내라', '공론화해줘서 고맙다'는 등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9일 뒤 올스타 출신의 외야수 오스틴메도우스도 사유란에 '불안증세'를 적어냈습니다. 이어서 오클랜드의 트레버 메이, 미네소타의 호르헤 로페즈도 공개적으로 정신질환에 토로하며 부상자 명단에 올랐죠. 리그와 팀도 이참에 케케묵은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국은 메이저리그 선수전용 24시간 전화상담서비스와 선수들의 경험담을 공유하는 플랫폼을 시작했고 팀들은 5월 메이저리그 정신건강의 달에 경기 전후로 관련 업계에 종사자를 초대하며 공로를 축하하고 정보를 공유했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행보는 캔사스시티 로얄스가 리그 최초로 덕아웃에 멘탈코치의 자리를 마련한 것인데요. 경기장 구석에 있는 방에서 몰래 고민을 토로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필드에서 선수들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조언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죠.

덕분에 정신적으로 힘든다는게 부끄러워하거나 쉬쉬할 게 아니라는 것을 선수와 팬들에게 알릴 수 있었죠. 이 같은 변화의 물결 속에서 다니엘은 동네 공원에서 아이들과 낚시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습니다. 입스를 두 번 겪으면서 괴물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도 좀 더 달라졌는데요. 혈기 왕성할 때는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면 30대 후반의 다니엘은 괴물과 공존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섣불리 자세뜯어고치기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입스에 뒤따라온 불안감을 잠재우는 것이었죠.


보건복지부의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성인 4명 중 1명은 정신장애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10명 중 오직 1명만이 전문가의 도움을 찾는다고 하죠. 우리의 삶도 메이저리그와 별반 다를 바 없네요.

무한 경쟁 속에서 공황, 강박, 불안, 우울증세는 역류성식도염과 더불어 직장인의 필수 질환이 돼가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정신질환의 이유로 병가를 내기에는 일정이 벅찹니다. 주위의 시선도 두렵죠. 이따금 비슷한 증세를 토로하는 사람들도 없기에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오히려 사실이 되어 애꿎은 자신의 탓하게 되죠. "아 나는 왜 이럴까." 끝없는 자책에 증상은 악화되지만 출근은 해야합니다. 

다니엘의 두 번째 컴백까지는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로키스는 다니엘의 락커룸을 비우지 않았습니다. 또 의료, 심리치료를 아낌없이 지원했죠. 팀 내 멘탈 코치는 수시로 그와 대화를 나누고 동료들은 서로 나서서 불펜에서 다니엘의 공을 받았습니다. 첫 등판 이후 차근차근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끌어올려 시즌 막바지인 지금 4승 2패 방어율 3.54. 충분히 괜찮은 기록이죠. 비록 괴물이 언제 다시 나타나지 모르지만 이제는 터놓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공감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죠. 그래서 입스와 불안증세는 더는 삶을 파괴하는 괴물이 아닌 자연스러운 인생의 부침인 셈이죠. 다니엘 바드의 여정은 우리에게 말힙니다. 문제를 들여다보고 도움을 찾는 용기에 사회적 공감이 곁들여진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고 말이죠.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https://youtu.be/11dh7kX0aAw?feature=shared

 

88 올림픽 남자 농구 준결승전, 소련은 우승후보 미국을 꺾고 결승에 올라갑니다. 분명 많은 사람이 결과에 놀랐겠지만 이를 역대급 업셋이라고 하기에는 붉은군대의 전력이 막강했습니다. 유럽산 유니콘 사보니스는 골밑을 지배했고 유로스텝 창시자 사루나스는 유려하게 상대를 농락했습니다. 유럽 최고의 슈터 리마스는 빈틈을 놓지지 않았고 더 캡틴 발데마라스는 경기를 완벽하게 조율했습니다. 소련이 득점한 82점 좀 62점이 이 네 명의 손끝에서 나왔는데요.

그렇다면 미국을 이긴 건 소련이 아니라 리투아니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날 승리 주역들은 반세기전 소련에 강제 합병된 리투아니아 선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소련의 승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사회주의의 위대함, 자본주의의 굴욕이라며 이념대결을 부추겼죠. 미국은 아마추어 경기에 프로선수를 출전시켰다며 소련을 비난했고 리투아니아 4인방은 올림픽 정신을 훼손한 주범으로 매도 당했습니다.

서구 언론은 리투아니아 농구 황금세대는 물론 반세기동안 이어진 독립투쟁에도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거라곤, 함께 찍은 사진 뿐이었죠. 그마저도 무리에서 몰래 나와 찍어야 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사루나스는 다짐했습니다. 이번이 소련 유니폼을 입은 마지막 날이 될 거라고 말이죠.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합니다. 15개 구성국 중에 처음이었죠. 모스크바는 독립운동이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탱크 부대를 리투아니아 수도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반세기동안 응축된 설에는 두려움이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냈고 결국 이듬해 소련의 독립승인을 받아냅니다. 사르나스 바람대로 더 이상 빨간 유니폼을 입지 않아도 됐습니다. 하지만 곧장 리투아니아 유니폼으로 갈아입지도 못 했죠. 유니폼을 맞출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스크바는 독립의 대가로 경제보복에 나섰습니다. 반세기 동안 사회주의에 길든 리투아니아 경제는 한순간에 꼬꾸라졌죠. 감자 하나를 사는 것도 손 떨리는 마당에 유니폼과 농구공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없었겠죠. 독립 직전, 대표팀 슈팅 가드 마스는 NBA 3점슛 콘테스트에 초대 받았는데요. 농구공 25개를 구할 수 없어 경연 세팅에서 연습도 못 한 채 출전했다죠. 유럽최고 슈터는 그날 25번 시도 중 9번만 성공하며 첫 번째로 탈락했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기간 발트해 거인 12명은 호텔 방 하나에서 지내야만 했죠. 물론 모두 불편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 본선은 농구동아리 MT는 아니죠. 유니폼, 장비를 구비하고 교통, 숙소, 식당을 주선하고 코치, 트레이너를 고용해야 했습니다. 모든 게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이 가까워질수록 독립국 선수들의 불안감은 커졌죠. 팀은 꾸릴 수 있을지, 행정비용은 감당할 수 있을지, 바르셀로나행 비행기표나 살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다 싶은 러시아는 독립국 선수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은 약속하며 독립국가연합으로 올림픽에 참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리투아니아 다음으로 독립을 선언했던 라트비아 선수들은 조국의 불안정한 정세를 이유로 러시아 제안을 받아들였죠.

리투아니아 미래도 못지않게 불확실했는데요. 하지만 대표팀은 반공 구호처럼 강경했습니다. 빨간 유니폼을 입을 바에 죽는 게 낫다고 말이죠. 죽기 싫다면 후원을 받아야겠죠?

 

1992년 사루나스는 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사랑받는 운동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식스맨은 유로스텝과 우아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농락했고 꾸준함과 집요함으로 코치와 팬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루나스는 달아오는 인기와 끈끈한 지역 유대감을 내세워 대표팀을 위한 모금활동을 했습니다. 배이 에어리어 가정집, 가게, 스포츠바 기업들을 방문했고 원정 도시에서도 구원자를 찾는 일에 멈추지 않았죠.

  92년 봄, 디트로이트 원정경기,  샌프란시스코 출신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가 같은 도시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르나스는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미국을 상징하는 밴드입니다. 60년대 히피문화와 함께 탄생한 이 밴드는 사이키델릭 록, 컨트리, 블루스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습니다. 멤버들은 즉흥연주에 탁월해 같은 곡을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재탄생시켰죠. 밴드의 이 같은 경계없는 표현방식은 자유를 추앙하는 미국을 상징했습니다. 

그날 디트로이트 공연도 여느 때와 같았습니다. 3분짜리 곡은 애드리브로 수십분간 이어졌고 부드러운 조명 관객은 흐느적거리며 제멋대로 음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잿빛 아래서 박자와 동작마저 간섭받으며 살아 사루나스는 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토록 자유로운 영혼들이라면 이제 막 자유를 쟁취한 리투아니아에 동질감을 느낄 거라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사르나스의 예상대로였습니다. 리투아니아에 끈질긴 투쟁 역사를 접한 그레이트풀 데드는 진한 유대감을 느꼈죠. 독립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대표팀 상황도 안타까워했습니다. 미국을 상징하는 밴드는 고민없이 구소련 국가의 농구팀을 후원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수표 한장을 거넸죠. 5,000달러. 그레이트풀 데드가 그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투어 수익을 올린 밴드 라는 점을 고려하면 액수는 좀 적어 보이스 있습니다. 그런데 그레이트풀 데드는 현금보다 수백배 값진 제안을 했습니다. "대표팀 티셔츠를 만들어 주겠습니다."

 

티셔츠를 돌돌말아 마디마디를 고무줄로 묶습니다. 원하는 부분에 잉크를 더 하고 풀어내면 만화경 같은 화려한 무늬가 나옵니다. 손으로 직접 만들고 매번 다른 디자인이 나오는 타이다이(Tie-Dye) 티셔츠는 생동감이 넘치는 옷입니다. 60년대 생기를 잃어가는 사회분위기에 히피들은 사랑과 평화를 외쳤습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들은 타이다이 티셔츠 입고 있었죠.

히피와 시대를 공유한 그레이트풀 데드의 콘서트장에는 타이다이가 물결을 이루다 이내 밴드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그 익숙한 염색 기법으로 대표팀 연습용 키트를 만들기로 했죠. 물론 올림픽 이슈에 묻어가 밴드를 홍보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반세기 동안 억눌린 감정을 폭발하던 리투아니아 당시 모습을 표현하기에 그저 타이다이가 적합했던 것이죠.
소용돌이 무늬에 노초빨 국기 색을 더했고 정면에는 덩크를 내리꽂는 해골을 그려넣었습니다. 리투아니아 타이다이는 지나가는 사람을 멈춰 세웠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내 공감을 불러일으켰죠. 결국 발트해 거인들을 응원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독립을 알린다면 후원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겠죠? 우리 모두가 본능적으로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레이트풀 데드의 혜안이었습니다.


그레이트풀 데드의 선물을 받아본 선수들은 티셔츠가 조국독립을 표현한다는 걸 단숨에 알아봤습니다. 전 세계 그 기쁜 소식을 알리고자 대표팀은 시도 때도 없이 연습용 키트를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덕분에 리투아니아 타이다이는 웃돈을 주고도 못 구하는 바로셀로나에서 가장 핫한 올림픽 굿즈로 등극했습니다. 덩달아 대표팀도 선수촌에서 뜨거운 관심과 응원을 받고 있었죠.

하지만 정작 리투아니아인들은 타이다이 티셔츠가 탐탁지 않았습니다. 치욕의 순간을 떠올렸기 때문이죠. 독립국가연합와의 조별 예선전, 88 올림픽 금메달 주역은 옛 동료를 압도하며 전반을 여유롭게 마무리했습니다. 

리투아니아 선수들은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후반전 코트에서는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죠. 서로 돋보이려는 이기심만 두드러질 뿐이었습니다. 결국 바이트의 거인들은 19점 차 리드를 날리며 자멸했습니다. 독립을 선언한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소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자유롭다던 타이다이티셔츠는 리투아니아인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결선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리투아니아와 독립국가연합은 준결승전에서 각각 미국과 크로아티아에 패합니다. 운명처럼 그 둘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재회합니다.

리투아니아는 자긍심을 되찾고 전세계에 독립을 알릴 기회였고 독립국가연합은 사회주의의 건재함을 선전할 차례였죠. 경기는 치열할 수 밖에 없었겠죠?

대표팀은 예선전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공은 선수들 손을 여럿 거치며 림을 향했습니다. 예선전 승리로 자신감이 잔뜩 오른 상대는 도리어 거침없이 림을 공격했습니다.

경기종료 6분 전 1점차 경기 관중석에서는 피가 마릅니다. 코트에서는 피가 흘렀죠. 리투아니아 승리에 무게를 살짝 얻는 팁인 바로 저울을 원상태로 만드는 점퍼. 추격 시도를 추격하는 블락과 승부를 결정짓는 레이어. 3, 2, 1.
81 대 78. 4점차 짜릿한 승리는 52년간 발트 연안을 붉은 그림자를 거둬냈습니다. 대표팀은 말끔한 트레이닝복 대신 연습용 키트를 입은 채로 시상식에 등장했습니다. 전세계인의 시선은 드림팀을 건너뛰고 발트해 거인들에게 향했습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동메달리스트 이름을 부릅니다. 리투아니아. 
비로소 우리는 중앙 유럽에서 대한민국 절반만한 나라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리투아니아라고 되새깁니다.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리투아니아 타이다이의 인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대중에게 판매된 지 일주일 만에 무려 만장이 팔렸다 하는데요. 장당 30달러라면 20억원에 가까운 수익을 올린 셈이죠. 그레이플 데드는 수익금 전액을 리투아니아 기부하며 국가를 재건하는데 보탬이 되었습니다.

대표팀은 2000년 시드니까지 3연속 동메달을 획득하며 유럽의 농구 강호으로 자리매김했고 리투아니아는 이후 나토에 가입하며 어엿한 국가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알아달라고 외출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화려한 티셔츠를 입을 필요도 마찬가지죠.
그럼에도 2023 피파 월드컵 대표팀 유니폼에는 익숙한 무늬가 담겨있었습니다. 무슨 할 말이 남았던 걸까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중앙 유럽을 가로지를 참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 턱밑까지 진출했죠. 강대국의 의욕은 조용히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죠. 리투아니아 타이다이는 잊혀져버린 자유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30년 전에 자유를 쟁취했다면 이제는 이를 지켜낼 차례입니다.
오늘날 리투아니아는 독립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을 지지하고 자유를 위협하는 시도에 바로 반발합니다. '무늬만으로는 자유를 지지할 수 없다.' 리투아니아는 전 세계에 이 말을 들려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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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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