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중한번역 5년차 탈주자가 생각하는 최근 번역이 찐빠나는 이유 정리.txt

유게에 올렸다가 묻혀서 읽을거리 판에 재업.

 

 

중한 번역으로 한 5년 정도 현역에서 굴렀던 경험을 한번 풀어볼까 함. 원래는 웹툰/웹소 쪽 위주로 돌았고, 게임 일감이 들어와서 한 1년 정도 일하다가 지금은 번역 자체를 도저히 미래가 안보이고 먹고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만 둔 상태임. 그래도 게임 번역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선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음.

 

우선 내가 작업했던 게임 중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걸로는 제5인격, 소울커넥트, 스도리카(요건 웹소설) 등등이 있음. 이외엔 아직 출시했는지 안했는지 모를 게임들도 있고, 여성향 스토리 관련 번역도 진행했었음.

 

게임 번역은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음.

1) 전체적인 일정 관리 및 일감 계약, 검수 등을 담당하는 PM

2) 직접적인 인게임  데이터를 번역하는 번역가

3) 번역가의 작업물이 제대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하는 감수자

 

이 중에서 하나라도 제대로 안돌아가면 번역 개판 나는 건 일도 아님. 당장 번역 이슈가 뜰 때마다 조선족 번역가 써서 개판 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안 보인 적이 없는데, 솔직히 조선족 번역가 써도 감수 및 PM에서 적당히 처리한다면 결과물 자체가 나쁘게 나올 수가 없음. 애초에 번역 결과를 개판쳐놓는 번역가는 이 업계에서 일 못해. 걍 PM 선에서 컷하고 다른 번역가로 대체하지.

 

번역이 진행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아. PM이 일감을 수주해오면 게임 업체에서 번역이 필요한 데이터가 담긴 엑셀 파일을 보내줘. 엑셀 파일 이외에도 번역에 필요한 정보가 담긴 내부 설정집 같은 걸 보내주는 경우도 있고, 더 나아가서 아예 게임 테스트 클라이언트를 보내주는 경우도 있지. 

 

이렇게 받은 엑셀 파일을 번역 툴에 업로드한 뒤, 작업을 진행할 번역가들에게 일감을 뿌려. 초기 번역 같은 경우에는 아예 바닥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이 부분에서 당연한 문제가 발생해. 작업자마다 무의식적으로 선호하는 단어 및 습관이 있기 때문에 문체 및 용어 통일이 안되는 경우야. 그래서 작업하면서 선작업자가 무조건 TB(Term Base, 용어집)을 만들면서 작업함. 후작업자는 무조건 이 TB를 바탕으로 번역하여 용어를 통일해야 하고, 이 부분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PM이 관리를 진행해야 해. 그리고 TB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라면 번역팀 및 PM과의 논의를 통해서 변경을 진행함.

 

또한 번역 툴 같은 경우엔 선 작업자가 번역을 했을 때 비슷한 문구를 출력해주는 TM(Translation Memory, 번역 메모리) 기능이 있어. 이전 번역의 유사도를 확인할 수 있고, 변경된 단어 등을 확인할 수 있지. 이를 바탕으로 문체를 통일하는 거야.

 

즉 TB/TM 이라는 두 기능을 통해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장의 다양성을 억제하고 최대한 통일성을 갖출 수 있도록 진행한다고 보면 됨.

 

그런데 사람이 작업하는 이상, 그리고 번역가가 작업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는 이상 결국 발생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문제가 있어. 

 

1) 선작업자가 빠져버리면 대체 번역가가 투입되고, 투입된 대체 번역가가 베테랑이라 기존 틀을 잘 따르면 괜찮은데 계속 찐빠가 나는 거야. TB/TM 관리가 진짜 번역의 처음이자 끝이나 다름없는데, 이걸 계속 유지보수를 하는 게 진짜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여기서 PM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등장해. 대체 번역가가 계속 문제를 일으키면 교체를 하던가 틀을 따르게 유도하던가 하는 인력 관리가 지속적으로 필요하지.

 

2) 애초에 구축된 TB/TM 상태가 메롱한 경우. 이건 진짜 모두가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데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는 지경이 된 경우도 있어. 특히 번역가가 교체 투입되는 것처럼 번역 업체도 교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전 업체에서 구축됐던 TB/TM 상태가 엉망진창인 경우도 있음. 근데 이걸 뜯어고치자니 그게 가능하겠어? 특히 이 경우는 서비스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라이브 서비스일 경우가 많은데, 게임 업체 자체에서 새로 번역을 위해 자금을 투입하지도 않을 뿐더러 일개 번역가/PM이 나서서 굳이 그걸 뜯어고쳐가면서 해봤자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야.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기존 TB/TM를 따르면서 그냥 번역 퀄리티만 조금 더 올리는 경우가 많지.

 

 

앞서 내가 게임 업체가 설정집 / 테스트 클라이언트를 보내주는 '경우'가 있다고 했어. 즉 모든 업체가 번역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해주지 않아. 그냥 달랑 엑셀 파일만 보내놓고 번역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어.

 

이 부분은 PM도 번역가도 열받는 부분인데, 업체도 업체 나름이라 파일 구분을 똑 떨어지게 잘 해놓는데도 있고 그냥 작업한 대로 중구난방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어. 후자가 작업도 개판으로 해놨으면서 필요한 정보 제공도 소극적인 경우가 많더라.

 

아무튼 이렇게 보내진 파일을, 개발자들처럼 전부 전후맥락을 파악한 뒤에 번역을 진행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어. 애초에 번역이란 건 인하우스(회사에 고용되어 직장인처럼 일하는) 번역가가 아닌 이상 프리랜서로 일하고, '단어'(중국어의 경우 한자 1자) 단위로 페이를 받아. 그리고 이 페이는 정말 기계처럼 하루에 정해진 분량을 채워나가지 않는 이상 일반적인 직장인처럼 200~300만원 벌기도 힘들어. 즉 전후 맥락 파악은 작업자가 번역의 편의를 위해서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지, 필수가 절대 아니라는 거야. 그리고 그 선택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일일 작업 분량이 기적처럼 채워지는 경우도 없고.

 

사람이라면 하루에 한정된 집중력은 한계가 있어. 일해본 사람이라면 알 거야. 그런데 번역가는 이게 더 심해. 단순히 이전 TM 따라서 변경된 부분 수정 작업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루 종일 머리를 쥐어짜면서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흐름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야. 그런 집중력의 파이를 불필요한 곳에 낭비한다는 것은 월급이 줄어든다는 얘기와 같은 말이지.

 

그래서 업체가 정보 제공을 하면 진짜 고마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냥 화면에 뜬 글자만 번역하다보면 내가 진짜 제대로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거든. 대부분 실제로 클라이언트에 적용했을 때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설정집을 통해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실제로 플레이하면서 어떤 식으로 번역해야 하는 지 감을 잡는 게 번역 퀄리티 향상에 정말 큰 도움을 줌.

 

문제는 앞서 말했듯 이런 업체는 극히 드물고, 제대로 된 파일 제공을 해주는 경우도 드물어. 따라서 번역가는 그냥 업체가 보내준 개판난 파일을 뜯어가면서 TB/TM 구축하면서 작업하고 있는 거야. 결과물은... 뭐 다들 알겠지.

 

 

그런 문제점을 어떻게든 보완하는 작업을 하는 게 감수자와 PM이야. 이쪽이야말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고객들이 실제로 볼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쪽이지. 이 분들이 작업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아

 

1) 번역 오류 검수

가장 기초적인 부분. 번역가가 작업하다보면 진짜 초보적인 실수도 가끔 있는데, 이런 걸 체크하고 다시 수정함. 특히 말도 안되는 오역이 날 때는 다시 작업을 요청하거나, 최악의 경우엔 번역가 교체 투입해서 재작업까지 진행해.

 

2) 디자인 검수

이 부분은 UI 관련한 부분인데, 번역한 단어/문장이 게임 UI를 벗어날 정도로 길어질 때 발생해. 보통 중한 번역의 경우 원래 길이에서 1.5~2배 정도로 길어지기 때문에 해당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안될 경우 번역 변경을 진행해.

 

3) 기능 검수

마지막으로 작업이 끝난 프로젝트를 업체에게 넘겨주기 전에 테스트를 해보는 거야. 게임 QA가 개발 오류를 체크한다면, 번역 QA는 실제로 게임에서 작업된 부분(볼드 처리, 색깔 코드 등등등)이 실제로 제대로 처리됐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지.

 

여기서 1, 2, 3 어느 부분이라도 찐빠가 난다? 바로 번역 조선족한테 맡겼냐 ㅋㅋㅋㅋㅋ 소리가 나온다.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고, 꽤나 인력과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임. 그런데... 페이는 역시나 개판이야. 검수자 같은 경우 번역가의 절반이나 줄까? 절반도 솔직히 잘 쳐준 거고.

 

특히 PM은, 앞에서도 계속 PM, PM 했던 것처럼 할 일이 진짜 산더미처럼 많아. 이 모든걸 검수하고 또 검수해야 하는 인력인데도, 월급은 그에 못미치고 워라밸 따윈 개나 준 직업이지. 그래서 연차 쌓인 PM 보기는 진짜 하늘에 별 따기고 다들 업계에서 도망치기 바빠. 

 

 

내가 보기에 이번 번역 논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아.

1) 형편없는 번역 실력을 가진 번역가 풀

2) 그 번역가 풀에서 옥석을 가려낼 PM의 부재

3) 업체의 폐쇄적인 정보 공유

 

1)의 경우 조선족 번역가한테 초벌 맡겼냐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를 대충 알 거 같아. 형편없는 번역이 튀어나오니 한국어 잘 못하는 번역가한테 맡긴 거 아니냐, 라는 얘기겠지. 하지만 내가 일했던 업체에서는 애초에 조선족 번역가는 보지도 못했어. 그분들은 또 자신들만의 업체가 있거나 아예 중국에서 일하고 있을테니까. 그분들이 페이 경쟁을 해서 번역 페이가 개판났다~는 반만 맞는 얘기야. 애초에 이 번역 업계는 중한 쪽만이 아니라 그냥 업계 전체가 블랙이야. 내가 처음으로 웹툰 번역 시작한 2015년보다 2020년의 페이가 더 줄어들었어. 어처구니가 없지. 조선족이 있어서 페이가 줄어든 게 아니라, 그냥 페이를 안 쳐줘. 

 

그러다 보니 고급 인력은 웹툰/웹소설/게임/영상 번역을 떠나서 돈이 되는 특허번역, 전문 번역 쪽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아.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이제 막 HSK 5급, 6급 딴 그야말로 문맥만 읽을 줄 아는 초보자들이지. 그런 초보자들한테 페이를 제대로 지불하겠어? 헐값으로 후려치려고 들지. 그리고 한번 헐값으로 후려쳤는데 경력자 페이라고 잘 쳐줄까. 어차피 PM이 달라붙어서 두 번 일할 거 각오하고(애초에 웹툰은 번역 내용이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드물거든) 싼값의 초보자들을 데려다 쓰는 경우가 많더라고.

 

2) 앞서도 계속 강조했듯, PM의 임무가 번역에선 엄청나게 막중해. 업체 컨택, 계약, 업체와의 소통, 일감 분배, 번역(직접하는 PM도 있다더라), 검수, 인력 관리까지. 이 일들을 한 사람이 전부 처리한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러다보니 PM 대탈주가 이어지고, 베테랑 대신 신입 PM이 그 자리를 맡아서 또 갈려나가고 있어. 1, 2의 환장의 콜라보가 아주 기대되지.

 

3) 업체가... 정보를 안줘? 이게 가능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비일비재함. 그리고 이번 붕스도 난 이쪽이 더 의심되더라고. 미호요 쪽에서 그동안 유출을 수도없이 당해서 외부 업체에게 정보 제공 자체를 꺼리는 것 같기도 하고. 최근에는 그냥 미호요 코리아에서 자체 번역가를 고용하던 것 같은데. 참고로 나도 일 그만두기 전 미호요 코리아에 지원 넣었는데 이새끼들 이력서도 안 읽어봐서 솔직히 개빡침 ㅅㅂㅋㅋㅋ

 

 

아무튼 대충 이런 식으로 번역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면 되고, 업계 자체가 뭔가 이래도 굴러가? 그럼 더 해봐~ 를 어디까지 해보려나 도전하고 있다는 느낌이야. 페이도, 인력관리도 개판난 업계라 난 도저히 일을 더 하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지금은 그림이나 그리고 친구랑 스타트업 준비 중인데 살아남을 수 있도록 기도해줬으면 좋겠다.

8개의 댓글

2023.07.25

붕스는 말대로 엑셀 파일에 대사 순서가 다 뒤섞여 있으면 한 캐릭터가 쭉 말하는데 존대 반말 뒤섞일 수 있겠다 싶은데 명일방주는 진짜 겜 모르는 사람이 쓴건가 싶을 정도로 퀄리티가 낮아서 명빵땐 몇년동안 개무시하다 붕스때 변명한다고 나오니 어이없긴함

0
2023.07.26

한국인이 안쓰는 단어들로 번역되어 나오는거 때문에 조선족 쓰는거 아니냐는 말도 많이 나오긴함

1
2023.07.30
@시하
[삭제 되었습니다]
2023.07.31
@달밤에과자

검종류들이 처음보는거로 번역되었어서

 

클레이모어가 갑자시 십자검 이지랄남

 

모닝스타도 샛별 곤봉 이러고

1
2023.07.26

명빵이나 데스티니가디언즈같은거 보면 존대 반존대 번역이 어색함이 아니라 다른 의미(진짜 텍스트 다름), 다른 숫자 이런수준이 나옴

0
2023.07.26

일단 제일 즁요한 번역가 자질/마인드 미달이 너무 많음

0
2023.07.26

스타레일 고유 명사보다가 ott 중국 드라마 마냥 개대충 직역해서 뭔 개소리지 하면서 그냥 넘겨버렸는데 그런 이유에서 였구만

0
2023.07.26

번역 단어도 이상한것도 결국 초보자가 번역하다 해당 번역에 맞는 우리말을 못찾아서 사전에서 적당히 찾아다 넣었을수도있겠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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