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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세계대전의 여파
제 1차 세계대전은 전쟁 당사국인 유럽 제국(諸國)에 씻을 수 없는 전재(戰災)를 남겼다. 우선 패전국 독일은 개전의 모든 책임을 지고 매년 전쟁배상금 약 50억 마르크를 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거기에 모든 해외영토와 해외식민지를 빼앗기고 해외자산을 동결 당했으며, 자를란트 등 공업지대를 빼앗겨 국내생산력이 현저히 감소했다. 또한 폴란드의 독립에 따라 동프로이센과 본토가 지리적으로 분리되었다. 영국은 전쟁기간 동안 막대한 물자를 수입한 여파로 인한 국제수지 악화와 파운드화의 약세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며 경제 불황이 심화되었다. 모든 전투를 자국 영토 안에서 치른 프랑스의 피해는 더 심각했다. 북동부 대다수의 철도와 도로는 파괴되었으며 농경지와 공장지대가 황폐화되었고 거액의 부채를 떠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로 가뜩이나 정체를 보이던 인구에 562만의 전사상자 발생이라는 직격타를 당했으며 이는 프랑스의 전체 청장년층 남성의 3분지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공업생산이 크게 성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수출량을 기록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유럽 제국에 정부차관을 공여하여 전후에는 마침내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자 금 보유국이 되었다. 일본 역시 구미 열강이 전쟁 수행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수출을 확대하고 아시아에서 이들이 갖고 있던 이권을 빼앗아 가는 등 반사이익을 톡톡히 얻었다.
한편 전근대적 농노제 봉건국가나 다름이 없던 러시아의 산업생산역량은 제 1차 세계대전이 개전되자마자 한계에 봉착했다. 얼마 있지도 않은 모든 공업생산품과 식량이 전쟁물자로 할당되면서 소비재 생산이 크게 축소되어 생필품 부족을 야기했다. 이에 살인적 물가등귀가 발생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식량난까지 덮쳐 러시아 국민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러시아는 1917년 공산혁명이 발생해 전쟁에서 이탈했으며 적백내전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러시아의 공산혁명은 제 1차 세계대전 뿐 아니라 서유럽 자본주의국가들의 정치 및 사회 정책의 변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양상은 대다수 자본주의국가에 공통된 변화를 가져왔다. 총력전을 위해 국가는 직접 생산 및 분배 과정에 개입할 필요를 느꼈다. 또한 전쟁수행에 우선되는 국민단결을 위하여 적극적인 노동자 통합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국가의 권위는 강화되어 수직적이고 권력적인 위계통합이 동시에 나타났다.
<프랑스의 참전독려포스터>
전후 재건체제의 성립
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막을 내렸다. 이후 기진맥진한 유럽 제국이 국제사회에서 주도권을 미국에게 넘겨주어 미국의 번영에 기반을 둔 재건체제가 성립되었는데, 이 체제는 재건금본위제와 다각적 무역망 형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1920년대 미국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호황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종전된 해인 1918년부터 뉴욕에서 주식공황이 발생한 1929년 10월까지의 10년은 미국사(史)에서 ‘번영의 10년’이라 불린다. 이 때 양질의 주택이 대량으로 건설되어 공급됐으며, 내구소비재산업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포드와 제네랄 모터스를 위시한 미국 자동차 산업은 미국 경제를 선도하였는데, 원재료가공산업과 석유화학산업, 정유산업을 확장시켰을 뿐 아니라 도로건설사업과 소비자금융산업의 활성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미국 경제는 또한 표준화·분업화·전문화로 대표되는 ‘포드 시스템’과 대량선전·대량판매체제라는 규모의 경제를 확립한 ‘테일러 체제’를 마련하는 등 경영조직까지 혁신시켰다. 이와 같은 능력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미국은 1920년대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했다. 특히 유럽 제국에 단자(短資)를 투하하며 재건체제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미국 번영의 10년, The Roaring Twenties>
미국의 번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1920년대 세계경제의 회복기를 상대적 안정기라 부른다. 그러나 이 동안 심각한 문제들이 미해결된 채로 남아있었다. 우선 전채(戰債)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총 160억 달러, 영국은 47억 달러, 프랑스는 40억 달러의 채무를 지게 되었다. 미국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영국과 프랑스, 특히 독일은 막대한 전채와 전쟁배상금을 물어낼 능력이 전혀 없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임시변통적 방책은 최종채권국인 미국이 그 상환자금을 다시 대부해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미국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이다. 이렇게 재대부된 상환자금은 64억 달러에 달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변부농업국(남미, 오세아니아, 동구)에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전재에서 빗겨간 이들 주변부농업국들은 대전기에 토지를 개간하고 농업 기술을 도입하였다. 농업생산의 현대화와 집약화가 이루어지면서 주변부농업국들의 농업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농산품 가격이 전체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공산품은 이미 독점자본주의적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던 지라 하방경직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결국 공산품에 비해 농산품 가격이 순식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1922년부터 면화, 생사, 설탕, 차(茶), 소맥, 커피, 양모, 고무의 순서대로 가격이 대폭락하였다. 주변부농업국 다수는 단일경제작물농업에 산업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가격하락이 덜 한 공산품 산업의 발전은 미비했기에 농산물 과잉생산의 표면화로 인한 농산물가격의 폭락으로 인하여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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