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2차 고당전쟁] 2. 당나라의 ‘수군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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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해양력

 

백제가 서해에서 나타난 13만 명의 당군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13만 명의 수군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익숙할 뿐이지, 사실 7세기에 13만+a 명을 한꺼번에 바다에 띄워서 적국의 수도를 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규모 면에서 예를 들면, 1571년 레판토 해전 당시 신성동맹은 약 68,500명을 동원했고 오스만 제국은 약 77,000명을 동원했다.[2-1] 둘을 합쳐야만 삼국통일전쟁 당시 당나라 수군의 규모와 대략 비슷할 것이다.

 

[2-1] 김응종, 「지중해문명의 종언 : 레판토해전을 중심으로」, 『군사』 88, 2013, 172-173쪽.

 

645년의 경우: 대함대의 전사(前史)

 

이러한 당나라의 해양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시작점은 1차 고당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큰 배를 한 척 건조하려면 인건비로만 2,236필의 비단이 소모되었다고 한다.[2-2] 그럼에도 당나라는 이미 상당수의 수군을 운용하고 있었다. 644년에 편성된 당나라 수군의 전함은 500척이었고, 병력은 4만 3천 명이었다.[2-3] 이것으로 보자면 전함 한 척에는 평균적으로 약 86명이 탑승했다고 할 수 있다.

 

[2-2] 『資治通鑑』 卷199, 貞觀 22年(648) 9月 壬寅, “大船一艘, 庸絹二千二百三十六匹.”

[2-3] 『册府元龜』 卷117 帝王部117 親征2 貞觀 18年 11月 조.

 

다만 문제는 645년에 고구려에서 철수하는 당 수군의 규모는 7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2-4] 여기에 더해 군량선도 644년에는 400척[2-5]이었다가 645년에 600척으로 증가[2-6]되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수군 인원이 최종적으로는 7만으로 늘어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2-7] 이러한 기록상의 혼란은 해석의 어려움을 야기한다.

 

[2-4] 『册府元龜』 卷117 帝王部117 親征2 貞觀 19年 10月 조.

[2-5] 『資治通鑑』 卷197, 唐紀13, 太宗 貞觀 18年 7月 辛卯, “敕將作大監閻立德等詣洪・饒・江三州, 造船四百艘以載軍糧.”

[2-6] 『資治通鑑』 卷197, 唐紀13, 太宗 貞觀 19年 正月, “韋挺坐不先行視漕渠, 運米六百餘艘至盧思台側, 淺塞不能進, 械送洛陽 丁酉, 除名, 以將作少監李道裕代之.”

[2-7] 이민수, 「백제 멸망기 당의 신라 침공 계획」, 『한국고대사탐구』 33, 2019, 391쪽.

 

그런데 위 기록에 나타나는 군량선들이 반드시 수군 소속인 것은 아니다. 643년부터 645년 1월까지 600척의 군량선을 제작 및 운용한 사람은 위정(韋挺)이었는데, 그가 맡은 임무는 내륙 각지에서 유주로 운반된 미곡을 요수(遼水)로 수송하는 것이었다.[2-8] 이 임무가 지체되자, (아직 출병하기 전이었던) 당태종은 진노하여 위정을 파직하고 이도유(李道裕)를 대신 파견했다.[2-9]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 군량선들은 산동반도의 래주에 집결해 있던[2-10] 수군과는 별개로, 향후 요동으로 진군할 당태종 휘하 육군의 보급을 위해 운용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11]

 

[2-8] 서영교, 「唐太宗의 고구려 침공과 水軍」, 『동양학』 90, 2023, 5-6쪽.

[2-9] 『舊唐書』 卷77, 列傳27 韋挺傳.

[2-10] 서영교, 「唐太宗의 고구려 침공과 水軍」, 『동양학』 90, 2023, 10쪽.

[2-11] 서영교, 「唐太宗의 고구려 침공과 水軍」, 『동양학』 90, 2023, 9쪽.

 

물론 위와 같은 임무가 종료된 뒤에 600척의 군량선이 당 수군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장량(張亮) 휘하의 수군은 상륙전뿐 아니라 육군에 대한 보급까지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2-12] 따라서 수군의 구성을 크게 보급선과 전함으로 구분했을 때, 644년에 비해 645년에 수군이 2만 7천여 명 증가된 것은 이러한 보급선의 증가 때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총 7만의 수군 중 전투병이 4만 3천이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2-13] 그렇다면 당시 전함의 수가 500여 척이었던 것은 인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군량선을 합하면 총 1,100여 척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12] 문영철, 「645년 고구려-당 전쟁 당시 당의 水軍 운용 및 전략」, 『고구려발해연구』 77, 2023, 93쪽.

[2-13] 문영철, 「645년 고구려-당 전쟁 당시 당의 水軍 운용 및 전략」, 『고구려발해연구』 77, 2023, 95쪽.

 

당태종의 건함: 밑이 빠진 독

 

645년에 위와 같았던 당나라 수군은 15년 후인 660년 백제 멸망전 당시에는 1,900척의 함대와 13만 대군이 된다.[2-14] 표면적으로 보면 이와 같은 변화는 약 800척의 함선이 새로 추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박의 사용 연한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삼국지 오나라 멸망의 주역으로 유명한 왕준(王濬)은 건조한 지 7년이 되자 군선이 날로 파손되어 간다고 언급한 바 있다.[2-15] 또한 명나라 시기의 규정에 따르면, 소나무로 만든 선박은 5년마다 교체해야 하고 녹나무로 만든 선박은 7년마다 교체해야 한다고 하였다.[2-16] 그렇다면 당나라 수군이 660년에 운용했던 1,900척의 배는 대부분 655년 이후에, 아무리 빨라도 653년에 새로 건조된 선박들일 것이다.

 

[2-14]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306쪽.

[2-15] 『晉書』 卷42 王濬傳.

[2-16] 김석우, 「魏晉時期 水軍활동과 자연재해 -造船과 環境관계를 중심으로-」, 『중국고중세사연구』 24, 2010, 156-157쪽.

 

그런데 실제의 당태종은 이미 648년 6월부터 전면적인 고구려 침공을 결정하고 있었다.[2-17] 그래서 648년 7월부터 검남(사천)에서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다.[2-18] 그중 큰 것[大者]은 길이가 약 100척(尺)이었고 너비는 그 절반이었다.[2-19] 당나라 시기의 1척은 약 31.1cm이므로[2-20] 이때 만들어진 큰 배의 길이는 31.1m, 너비는 15.55m로 추정할 수 있다. 대략 조선시대 판옥선 정도의 규모(참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2-17]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2-18] 『資治通鑑』 卷199, 貞觀 22年(648) 6月-7月조.

[2-19] 『資治通鑑』 卷199, 貞觀 22年(648) 7月조.

[2-20] 김재효, 강연석, 고호경, 「전통적인 길이 척도 환산에 대한 역사ㆍ문화적 재고」, 『한국의사학회지』 23(2), 2010, 17쪽.

 

(五牙).jpg

수나라 시기 大艦으로 불렸던 함선 五牙의 상상도. 참고용 그림이다.

 

물론 시대상을 고려하면 전체 함대가 이런 대형 선박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다.[2-21] 다만 수나라의 기록에서 함종 중 오아(五牙)가 800명을 태우고 황룡(黃龍)이 100명을 태운다고 되어 있는 점[2-22]은 단서가 된다. 이중 황룡선의 규모가 위에서 살펴본 1차 고당전쟁 당시 전함의 탑승인원과 유사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당시 제작된 주력 함선은 100명가량이 탑승할 수 있는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23]

 

[2-21] 김석우, 「魏晉時期 水軍활동과 자연재해 -造船과 環境관계를 중심으로-」, 『중국고중세사연구』 24, 2010, 151쪽.

[2-22] 『隋書』 卷48 楊素傳.

[2-23]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71쪽.

 

위와 같은 급격한 건함은 막대한 비용 지출과 인부들의 희생을 야기했다. 현지의 이민족[獠]들이 부역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2-24] 게다가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일컬어지는 검남이었음에도 백성들이 집과 땅, 자식을 팔아야 할 만큼 경제적 타격이 심했다.[2-25] 사실 정관정요에 수록된 충용(充容) 서씨(신당서 후비전에는 이름이 서혜徐惠라고 나와 있다)의 상소를 보면 648년 당시 당나라는 전쟁, 궁전 건축, 조세, 요역, 군역 등 다양한 부담이 극심하여 민생이 피폐해진 상태였다.[2-26]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은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검남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계속해서 함선 건조를 추진했다.[2-27]

 

[2-24]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2-25] 나동욱, 「640년대 후반 高句麗·唐 전쟁에 대한 검토」, 『군사』 72, 2009, 50쪽.

[2-26] 최진열, 「648년 唐太宗의 高句麗 정복 준비와 그 실상」, 『군사연구』 156, 2023, 148쪽.

[2-27]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71쪽.

 

당태종은 또한 648년 8월에 월주도독부(越州都督府), 무주(婺州), 홍주(洪州) 등에도 명을 내려 해선과 쌍방선 1,100척을 건조하도록 했다.[2-28] 이중 쌍방선은 화물선으로 추정된다.[2-29] 이때 무주는 월주도독부에 속한 10주 중에 포함되고 홍주도독부에는 8주가 소속되어 있으므로 18개 주가 여기에 동원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1,100척을 건조하는 만큼 18주의 노동력으로도 버거운 과업이었을 것으로 평가된다.[2-30] 그런데도 당태종은 648년 9월에 추가로 강남 12주에 명을 내려 해선 350척을 만들도록 했다.[2-31] 여기에는 강남 12주에서 징수되는 세액의 약 23%가 소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32] 이렇게 해서 당태종이 건조한 선박을 합하면 1,450척 이상이 되며, 이는 한 척당 100명을 태울 경우 14만 5천 명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규모이다.

 

[2-28] 『資治通鑑』 卷199, 貞觀 22年(648) 8月 丁酉(23일) 조.

[2-29]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299쪽.

[2-30] 최진열, 「648년 唐太宗의 高句麗 정복 준비와 그 실상」, 『군사연구』 156, 2023, 157-158쪽.

[2-31] 『冊府元龜』 卷985, 外臣部·征討4 貞觀 22년(648) 9월 조.

[2-32] 최진열, 「647-648년 唐의 ⾼句麗 침공과 인력ㆍ물자 동원」, 『비교중국연구』 4(2), 2023, 24쪽.

 

문제는 이러한 막대한 숫자의 함선이 실제 전쟁에 투입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태종은 649년 5월 29일부로 사망했고, 수군 증강은 일단 중지되었다.[2-33] 그가 대대적으로 제작한 함선들은 648년으로부터 5~7년이 지난 뒤에는 대부분 폐기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무의미하게 소모된 물자와 인력은 당나라의 국력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손실도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당나라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2-33] 『資治通鑑』 卷199, 貞觀 23年(649) 5月 壬申(29일) 조.

 

당고종의 수군: 대상륙전이라는 혁명

 

649년 즉위한 당고종은 금세 선박 건조를 재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함선 제작은 심지어 더욱 규모가 확대되어 36주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2-34] 공교롭게도 송나라 시기에 선박을 건조한 관영 선장(船場)도 36곳이었는데, 995~997년에는 매년 3,337척을 생산했고 998~1021년에는 매년 2,916척을 생산했다고 한다.[2-35] 물론 당고종 시기의 생산량이 반드시 이 정도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규모였음은 틀림없다.

 

[2-34]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73쪽.

[2-35] 김석우, 「魏晉時期 水軍활동과 자연재해 -造船과 環境관계를 중심으로-」, 『중국고중세사연구』 24, 2010, 157쪽.

 

당나라의 이 같은 어마어마한 건함 정책은 마침내 백제 멸망전에서 그 성과를 드러냈다. 소정방의 당군은 산동반도의 래주에서 출발하여, 단 3일 만에 경기만에 위치한 덕물도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2-36] 1,900척의 대선단이 움직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신속한 기동이었다고 할 만하다. 이 함대에는 유인궤(劉仁軌)가 지휘한 보급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2-37] 당군이 통상 총 병력의 3할을 치중병으로 운용했음을 고려하면[2-38] 약 570척이 보급선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때 나머지 1,330척이 전함으로 13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여기에 승선했다고 보면, 1척당 약 98명이 탑승한 셈이다. 이것은 앞서 진행한 추정과 대체로 부합하는 규모라고 할 수 있다.

 

[2-36] 남정호, 「660년 당군과 신라군의 연합 작전에서의 몇 가지 문제」, 『역사와 담론』 87, 2018, 82쪽.

[2-37]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顯慶 5年.

[2-38] 이상훈, 「백제 멸망기 신라 수군의 성격과 역할」, 『한국고대사탐구』 27, 2017, 235쪽.

 

물론 백제에도 함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650년 왜국에서 건조된 백제박(百濟舶)은 백제의 조선 기술을 반영한 선박으로 여겨지며, 약 120명의 인원을 중국까지 수송할 수 있었다.[2-39] 또한 태안반도의 당진포에는 백제의 수군 기지가 있었을 공산이 크다.[2-40] 그러나 이 수군 기지는 당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며,[2-41] 백제 수군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당진, 보령, 기벌포 등에서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2-42]

 

[2-39] 이재준, 「백제의 해양 환경과 수군 운용」,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53쪽.

[2-40] 이상훈, 「나당연합군의 군사전략과 백제 멸망」, 『역사와실학』 59, 2016, 63-65쪽.

[2-41] 이상훈, 「나당연합군의 군사전략과 백제 멸망」, 『역사와실학』 59, 2016, 67쪽.

[2-42] 이재준, 「백제의 해양 환경과 수군 운용」,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77쪽.

 

이러한 과정을 거쳐 당군 주력이 점차 남하한 다음 금강을 타고 올라오자, 당진을 위시한 서북방에 병력을 분산한 상태였던[2-43] 백제군은 끝없이 몰려오는 적군의 물결에 기함해 무너지고 말았다.

 

[2-43] 이상훈, 「나당연합군의 군사전략과 백제 멸망」, 『역사와실학』 59, 2016, 59쪽.

 

예컨대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소정방이 [금]강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 산 위에 진을 치고 크게 싸우는데, (그 와중에도) 돛을 올린 배들이 바다를 뒤덮었고, 연이어 이르렀다. 적군(백제군)이 패하여, 죽은 자가 수천이었고, 나머지는 스스로 흩어져 달아났다.

定方升東岸, 乘山而陣, 與之大戰, 揚帆蓋海, 相續而至. 賊師敗績, 死者數千人, 自餘奔散.

- 『구당서』 권83 소정방전

 

가히 ‘수군혁명’이라고 칭해도 될 법한 이러한 전술은 왜군이 백제부흥운동에 개입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2-44] 한반도가 평정되면 왜국도 당나라의 상륙작전이 가능한 사정거리에 놓이게 되는 까닭이다. 왜국이 이후 서일본 일대에 대대적인 방위시설을 건설한 사실 역시 이러한 침공 우려와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2-45]

 

[2-44]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307쪽.

[2-45] 송완범, 「'白村江싸움'과 倭 : 東아시아세계의 재편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45, 2007, 83쪽.

 

물론 당나라 함대에 수군으로 맞선 왜국의 시도는 백강 전투에서 400여 척의 배가 불타는 대패로 귀결되었다.[2-46] 당시 왜군은 수전에 있어서 당군보다 크게 미숙했던 것으로 보인다.[2-47] 이처럼 백제 및 왜국의 사례로 미루어 볼 때, 660년대 동아시아에서 당나라 수군은 적수를 찾기 어려운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동안 함대를 건설하는 데 들어간 물력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기도 꽤 어려웠을 것이다.

 

[2-46] 『資治通鑑』 卷201, 龍朔 3年(663) 9月 戊午(8일) 조.

[2-47] 이재석, 「백촌강 전투의 史的 의의」, 『한국민족문화』 57, 2015, 162-163쪽.

 

661년의 고구려가 목전에서 상대해야 했던 군대는 바로 이러한 존재였다.

4개의 댓글

2024.02.23

수나라때 고구려에서 갈아먹고 수당교체 혼란기에 갈아먹고 남은게 저정도라니...

0
2024.02.23

역사추

0
2024.02.24

ㄱㅊㄱㅊ

0
2024.02.2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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