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려전쟁사 - 여진정벌 (3) 여진정벌과 9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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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gdrip.net/52911268 고려전쟁사 - 거란전쟁 (1) 전쟁전야

http://www.dogdrip.net/53870213 고려전쟁사 - 여진정벌 (2) 준비

 

 

 

원정

 

 

  여진정벌 지휘부는 능력위주였는데 윤관은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해 숙종 때에 승진한 인물로 명문가 출신으로 덕을 보기는 했겠지만 재상가는 아니었으므로 능력과 열정이 열정이 작용했을거라 보는데 여진에게 패전 후 고려의 현실을 파악하고 대신의 자식까지 징발해 별무반을 완성한 것을 볼 때 그는 대세를 볼 줄 알고 이기주의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오연총도 과거급제 출신으로 집안이 미천하고 가난했으나 그는 남보다 노력하며 재주는 많고 자신을 연마할 줄 알았으며 편안해도 성실하고 판단은 신중하고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은 성공할 사람의 성품을 다 갖춘 인물로 숙종은 그를 재상감으로 보았다. 그는 지도자로는 부족할지 모르나 책임감과 의지로 극복해 나갔고 여진정벌에 회의적이었으나 철군을 주장하거나 임무를 회피하지 않고 임무를 다한다.

  그 외 김한충도 65세의 고령으로 재상까지 역임했지만 장모가 문종의 종이자 첩으로 정치적으로 주요한 자리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1104년 때 윤관과 종군한 경험이 있었다. 김덕진도 1106년 때 동북면 병마사을 여러번 겸임했고 최홍정, 박인량, 왕자지, 김준, 강증, 최홍재, 한충, 이자량등 내시-환관이 아니라 측근-출신으로 공통점이 있지만 이자겸의 동생 이자량도 있었으며 과거급제 출신부터 무관 출신으로 군인으로 성공하거나 여진족과 싸워 공을 세우는 등 출신과 경력은 각각 이었다.

 

 

  윤관.jpg 윤관필적.jpg

<윤관 영정과 그의 필적>

 

 

  이처럼 문관이라도 여진과 전투 경험이 있는 인물, 무관은 실전경험이 있는 인물로 채웠다. 하지만 이들 중 특별한 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척준경이었다. 그는 윤관과 인연이 있었는데 1104년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체포되어 구금된 적이 있었다. 이 때 윤관은 그를 풀어주며 원정에는 병마녹사로 임명해 기병부대를 거느리게 했다.

  110712417만의 고려군은 장춘역으로 집결했다.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장주와 정평은 여진에게 빼앗겨 그 쪽으로 가는 중으로 생각된다. 당시 고려의 전략은 이 일대의 여진족을 다시 고려편으로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패전으로 친고려파는 모두 숙청되어 새로운 추장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는 원정군이 출발하기 전에 우야소에게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냈는데 4년 전 일을 이제와서 언급하는것도 그랬지만 그것은 우호관계의 증진을 위한 표현이었다. 여진은 순진했던건지 거란이란 적을 먼저 생각한건지 고려의 제안을 기뻐했고 화친을 원하면 고려로 망명한 자와 체포한 여진인을 돌려달라 라고 했다.

  고려는 돌려보내겠다고 하지만 완안부까지 데려올 수 없으니 국경에서 인수해 가라라고 한다. 틀린말은 아니었다. 갈라전에는 아직 친고려파 인사들이 많았고 고려군이나 갈라전쪽 여진부족을 통해 호송해 오면 무슨 사단이 날지 뻔했다.

  우야소는 아괄과 승곤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직접 마기령 을척촌까지 와 대기했다.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함경도에 가깝거나 지역 내 였다.

  완안부의 사신이 출발했단 보고를 받은 윤관은 정주와 장주의 여진부락에 파견하여 반고려파 지도자를 석방할 테니 와서 맞이하라 제안한다. 이는 고려가 완안부의 지배권과 현재 반고려파 추장을 인정하는 의미로 화해의 의미로 잔치 등을 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는 천리장성의 관문 안쪽을 회합장소로 정하고 자리를 마련했다. 이 날 여진족 지도자 400여 명이 회합장소에 모여들었고 당연히 화친의 날이니 잔치하며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이들이 잔치의 분위기에 빠지고 술에 취할 때 고려군이 무기를 빼어들고 자리를 덮친다. 여진의 지도자들은 일거에 죽고 완안부의 사신도 죽게된다.

 

 

  잔치.jpg

<모 드라마의 한 장면인데 상황이 어울려 빼왔다 고려군은 즐거운 분위기를 단숨의 살육의 현장으로 바꾼다>

 

 

  5~60명의 사절들은 의심했는지 관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살육이 시작되자 달아났다. 하지만 고려군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들 뒤에도 김부필과 척준경이 매복해 도주로를 차단했다. 관문 안쪽에는 최홍정은 기병부대를 끌고 추격해 양쪽으로 협공해 거의 모두 살해한다.

 이에 우야소는 완안부로 서둘러 회군하게 된다. 완안부는 전쟁 초기에 대응을 할 수 없었고 함경도 지역 여진족은 지도부를 잃고 분열하게 된다.

 그렇게 여진족 지휘부를 몰살한 고려군은 부대를 5군으로 나누어 정주와 장평의 성문과 주요지점에 쳐들어가게 된다. 지휘부를 잃은 여진족을 각개격파하려는 의도였다. 바다 쪽도 놓치지 않고 해군 26백명을 동원해 도린포로 진출해 여진족을 차단, 보급로 확보에 힘을 썼다.

 고려군이 진출하면서 여진족은 눈에 띄지도 않고 그들이 버린 가축만 널려 있었다. 너무나 쉽게 정평성을 탈환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이었다. 고려군은 북상한다.

 

 

  고려군.jpg

<이 날을 위해 준비했다>

 

 

  고려군의 전술은 속전속결로 여진족이 결집하기 전에 함경남도 일대를 확보해야 했다. 지역을 확보하려면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지형을 확보해야 한다. 윤관은 길주-명천 일대를 정복해 국경선 및 방어선으로 삼으려 했다. 거기서 남북을 오가는 유일한 통로라는 병목에 큰 기대를 걸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중요했다. 완안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일전을 각오해야 했고 승리를 거두려면 그들이 공격하기전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군은 북상한지 반나절 보동음성에 농성하는 적과 만났다. 윤관은 임언과 최홍정을 시켜 정예부대로 적을 점령하라고 하자 그동한 강훈련을 한 고려군은 돌격해 단숨에 점령한다.

  다음 날 보다 강력한 여진부대와 마주친다. 윤관은 항복을 권유하지만 여진은 

 

우리는 일전을 해 승부를 바라는데 어찌 항복을 말하나?

 

 고려군은 바로 성을 포위해 공격하나 저항은 완강했다. 공성전은 시간이 걸린다. 한번의 공세에 무너지지 않으면 공성장비를 준비해야하며 적의 분투가 소문이 퍼지면 여진은 고무될 것이다. 윤관은 가장 믿음직한 장수인 척준경을 불렀다

 

해가 기울고 사태가 급하다 장군 이관진과 함께 성을 공격하라 

 

  윤관의 말을 보면 하루라도 헛되이 소모할 수 없었던 듯 하다. 사실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추진하긴 쉽지않다. 그렇다고 계획에만 집착하면 안된다. 이런 상황엔 목적을 잊지 않는게 중요하다. 윤관이 하루를 아까워한 이유는 조급해서가 아니라 작전계획의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지휘관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전역은 시간이 중요했다. 정면 공격으로 희생이 나도 빨리 이 지역을 점령해 요새를 만들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한반도국가들의 축성은 나름 인정받고 있었고 적이 반격하기전에 방어선 구축과 주민을 이주해야했다.

  척준경은 윤관의 명령을 받고 말하길

 

일찍이 장주에서 죄를 범했는데 공이 나를 용서받게 하였으니 오늘이야 말로 목숨을 버려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흔히 이런 비장의 각오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불러오지만 척준경은 달랐다. 윤관의 명령을 들은 척준경은 석성 아래로 가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추장을 몇 명을 죽였다. 이에 윤관 휘하 군이 합세해 목숨을 걸고 싸워 적을 격파한다. 이 때 바위에 떨어져 죽은 자도 있었고 남녀 노소가 모두 살해됬다.

  함흥을 확보한 고려군은 여진을 소탕하며 파죽지세로 길주까지 올라갔다. 마지막 전투는 길주에 있는 이위동에서 벌어졌다. 양군은 상당히 치열하게 싸웠지만 고려군이 승리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여진은 분쇄되었고 격파한 촌락은 125개였으며 사살은 4940, 생포는 1030명이었다. 한 부족은 3200명을 대리고 투항한다.

  이렇게 정벌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고려군은 공세를 시작한지 한 달도 안 되서 길주와 주면 고을을 장악했다. 윤관은 개경에 소식을 알리고 지역 방어와 주민 이주를 위한 축성을 시작했다. 이 때 쌓은 성이 윤관의 9성이다. 처음엔 함주, 길주, 영주, 웅주, 복주, 공험진이며 여기에 다음 해에 완공한 의주, 통태진, 평융진을 합쳐 9성이라 한다. 그 후 윤관은 숙종의 약속을 지켜 영주성 안에 호국인왕사와 진동보제사 두 절을 세웠다.

 

 

  여진정벌 전역.jpg

<윤관의 9성은 위치가 명확하지 않고 밝혀지지 않은 곳도 있다>

 

 

  이 9성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두만강 유역설-이남, 이북 두가지-, 길주설, 함흥평야설이 있는데 우리나라 교과서는 최근까지 함흥평야설을 교육시켰으나 최근 길주설이 대두되고 군사적으로 보아도 길주설이 맞아 떨어지기에 길주설을 차용한다. 물론 이게 100% 맞는건 아니다. 위치는 불분명하다.

 

 

  함흥평야설.gif

<최근까지 이 함흥평야설을 배웠다>

 

 

반격의 시작

 

 

  고려군은 완벽한 승리를 얻었다. 우야소가 완안부에 도착하고 고심할 무렵 고려군은 이미 함경남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우야소는 회의를 소집했는데 모든 추장이 반대했다. 거점을 확보한 고려군을 공격하는건 부담이 컸고 거란도 고려를 공격했다 패배했다. 완안부의 주력이 그렇게 소멸된다면 거란멸망과 여진정복의 꿈은 사라진다.

  하지만 우야소의 동생 아골타만이 반대를 했다. 이 사태를 방치하면 다른 여진부락이 반기를 들 것이라는 이유다. 그렇게 결론은 전쟁으로 돌아서게 된다. 우야소는 이복동생 알색을 사령관으로 삼는다.

  여진의 남하 소식을 들은 윤관은 예정대로 병목에서 여진군을 차단하기로 하고 오연총과 함께 8천명을 이끌고 병목으로 간다. 윤관이 지 길을 지날 때 여진군은 고려군의 본대를 기습공격하는데 앞과 중간으로 끼어들어 윤관의 앞뒤를 차단하고 방어진형을 구축해 윤관을 고립시킨다. 윤관과 오연총 주변엔 병사 10여 명만 남았지만 결사적으로 막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와중 척준경은 10명을 뽑아 결사대를 만든다. 형을 따라 참전한 동생은 반대했지만 척준경은 역시 달랐다. 동생의 말을 뿌리치곤

 

너는 돌아가서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해라 내 몸은 국가에 바쳤으니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돌격하니 과연 10여명을 죽이며 적진들 돌파하고 윤관은 구원을 받는다. 그동안 구원병이 와 여진족은 도주하고 그들을 쫓아 36명을 죽인다. 윤관은 꽤나 감동을 받았는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이제 나는 너를 아들로 생각할테니 너도 나를 아버지로 보라

 

  이는 말로만 한게 아니었고 척준경은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합문지후로 승진하게 된다.

  이 병목전투에서 고려군은 큰 사실 하나를 알게 됬다. 본래 이곳을 여진정벌을 시도하며 목표로 선정한 이유는 함북에서 함남으로 오는 유일한 출구라고 알려졌기 때문인데 이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다. 함경산맥은 험하긴 했어도 군대의 이동이 불가능한곳은 아니었고 개마고원을 통해 함경남도 전 지역을 공격할 수 있었다. 원래는 강동 6주와 같은 깊은 종심을 가져야할 방어선이 한 줄의 도로로 된 측면이 노출됬으며 후방보급로도 없는 얇은 방어선이 되버렸다.

 

 

  여진정벌 공격로.jpg

<고려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된다>

 

 

  역시나 전황은 복잡하고 격렬해졌다. 병목차단이 소용 없었기에 고려군은 각 성에서 분열된 상태로 여진군을 방어해야했다. 당시 축성된 성은 6성으로 17만을 단순 나눠도 28천이었고 이것저것 감안하면 한곳에 1만 명도 주둔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고려군은 이 일대를 점령한지 한달도 안됬고 성은 온전할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성은 토성이었다.

126일 여진군 2만이 영주성으로 밀어닥쳤다. 완안부의 주력부대였다. 병목으로 간 고려군이 8천이니 영주성의 고려군은 1만 명 내외였을 것이다. 윤관은 농성전을 하기로 하지만 여기서 또 척준경이 나온다.

 

우리가 나가 싸우지 않으면 적은 늘어날 것이며, 군량이 떨어질 때 까지 구원병이 오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지난 날 제 공을 보셨을 겁니다. 제가 오늘도 죽기를 무릅쓰고 나가 싸울테니 공은 성 위에서 지켜보십시오.

 

  척준경은 이렇게 결사대를 끌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아마 별무반의 용사로 구성됬을 것이다. 척준경의 부대는 적진을 거칠 것 없이 뚫으며 19명을 죽인다. 여진군은 전위부대가 물러서자 주변의 부대도 뒤따라 달아났다. 척준경은 북과 피리를 울리며 당당하게 성안으로 개선했고 윤관과 오연총 등 지휘관은 손을 잡고 결사대와 서로 절을 했다.

첫 전투에 승리했지만 여전히 고려군은 분산되어 있었다. 윤관은 영주성을 버리고 중성도독부로 이동하며 다른 부대도 포기할 곳은 포기하고 이 곳으로 집결케 했다. 아마 웅주성으로 추측된다.

  여진은 고려군의 작전을 예상하고 공험진에서 돌아오는 고려군을 기습한다. 고려군은 패하고 왕자지는 말까지 빼앗기나 구사일생으로 돌아오는데 여기서도 척준경이 부대를 이끌고 나가 적을 패퇴시키고 여진의 마갑을 빼앗았다. 아마 이 마갑은 왕자지한테 선물한것인지 전우애인지 이 인연으로 둘은 수많은 전투를 함께 치룬다.

  차이는 크게 안났지만 웅주성은 6성 중에는 가장 컸고 길주와 영주보단 여진의 접경에서 약간 떨어져 있고 해안에 붙어있어 보급이나 교통도 편리했다. 고려군이 웅주성으로 집결하자 여진군도 병거 수백 량과 공성구를 갖추고 수만의 병력을 동원해 포위를 한다.

 

 

  병거.jpg

<병거 장갑차의 역할을 했다>

 

 

  성을 포위하는 여진군을 보며 고려군은 위기감을 느꼈다. 웅주성도 결국 급조한 것이기에 토성일 가능성이 컸다. 이런 성에 대해 공성구를 갖춘 적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최홍정은 병사들을 소집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계획을 세운다. 이미 고려군 별무반은 베테랑이 되었다. 최홍정의 제안에 동의한다.

  잠시 후 4방향의 문이 동시에 열리더니 고려군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별무반은 다시 진가를 발휘했다. 이런 공격을 대비해 병거를 수백 량이나 가져왔지만 별무반의 용사들은 이를 돌파하고 여진군을 쳤다. 그렇게 적을 80여 명 죽이며 50량의 병거와 수레 200, 군마 40, 셀 수 없는 무기를 노획한다.

 

 

  선진진.jpg

<이 그림은 함흥과 길주 사이의 요새로 척준경은 이러한 요새를 뚫고 진격해나갔다>

 

 

  이러한 사투를 벌이는 밤 웅주성에서 병사 한사람이 몰래 밧줄을 타고 내려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병사는 척준경이었다. 실제로 혼자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100km가 넘는 적진을 돌파에 정평으로 귀환하고 구원부대를 편성한다. 그 후 다시 웅주로 출발하며 통태진과 야등포를 경유해 적을 격파 하며 웅주성으로 갔다. 바로 웅주성에 갈 수 있었지만 역시나 척준경은 구원부대를 이끌고 그대로 여진군 본대를 공격해 격파해버린다. 당시 웅주성의 사람들은 척준경부대가 오자 얼마나 감격(...)한것인지 모두 운다.

  완안부의 주력을 모두 물리침으로 고려군의 승리는 확실해졌고 이제 고려는 여진정벌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의주, 통태, 평융에 3개의 성을 쌓았다. 고려는 지방관을 파견하고 백성들을 이 지역에 이주시키기 시작하고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는다. 아마 이 비가 발견되면 9성에 관한 의문은 모두 풀릴 것이다.

 

 

  척경입비도.jpg

<척경입비도>

 

 

 조선 초기에 46진이 그러했듯 주민이주는 결코 쉽지 않은 사업이었다. 하지만 방어시설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 주민이주를 하니 경비와 방어에 어려움이 생겼다.

 

병마부사 박경작은 무공을 세웠으면 군사를 거두어 후일을 도모하는게 일인데 다시 여진의 지역으로 들어가 성과 마을을 만들면 만들기엔 쉽더라도 지키기엔 어려울까 저어된다.’ 라고 하나 윤관은 이를 거부하고 내성의 재목과 기와를 거두어 9성을 쌓았다. 김한충은 불가하다며 외성을 다 쌓기 전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겠는가 원수가 명령을 내려도 지키지 못하겠다하니 후에 그 말이 맞았다

 

  어찌 되었든 9성은 구색은 가추기 시작했다. 윤관과 오연총은 49일에 개경으로 귀한하며 개선행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행사가 끝나기 전에 여진은 다시 웅주성을 포위한다. 예종은 윤관은 쉬게하고 오연총을 다시 사령관으로 임명해 동북면으로 파견한다. 웅주성의 책임자는 최홍정과 임언이었다. 임언은 내시출신으로 숙종 때부터 여진정벌을 주장해 성사시킨 숨은 주인공이었다. 패배로 끝났던 숙종 때도 임간과 윤관의 출병을 성사시킨 사람도 그였다.

 

 

  개경의 내성 외성.jpg

<개경의 성 보통 외성은 최소한의 요새였고 내성이 군사적으로 확실한 요새였다>

 

 

  웅주성이 포위되자 고려군은 지난번과 같이 다시 성 밖으로 출전하지만 역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초전의 패배는 컸고 성의 방어도 온전치 못해 힘겨운 전투가 됬다.

 

이 때 웅주가 포위당한 지 27일이 되었는데 임언과 최홍정 등이 부대를 나누어 고수하며 오랫동안 교전해 사람과 모두 피곤하여 더는 견뎌 나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오연총은 정예 1만을 거느리고 부대를 넷으로 나누어 4길로 진군했다. 이에 여진은 차단작전을 준비했는데 그 지점은 오음지, 사오라는 고개로 이 곳을 넘어서면 바로 웅주 길주가 나타난다. 여진군은 이곳에 방책을 설치하고 기다린다. 의도는 분명하다. 웅주성을 함락할 시간을 버는 것으로 고려군도 고개에 도착한 순간 그 의미를 깨달았다. 웅주성은 함락 직전이었다.

  진정한 정예부대는 주어진 순간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회피하지 않는다. 이 병사들의 고귀한 가치는 자신의 생명이 아닌 동료에 대한 전우애였다. 그리고 그 운명의 요구는 11082월 웅주로 가는 길에서 여진군의 진지와 마주한 고려군도 회피하지 않았다. 지난 2년간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아왔다. 전쟁이 시작된 지 겨우 3개월이었지만 북방의 험지와 추위 속에 함께 수백km를 행군했고 함께 성을 쌓고 여러번 전투를 치르며 여기까지 왔다.

 

 

  전우애.jpg

<전우애를 잘 표현한 작품 전우애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들은 그렇게 진지로 서로 앞을 다투며 고지로 돌격한다. 그 공세에 여진족은 191명의 피해를 입고 후퇴한 뒤 공격하려 했다. 백병전은 체력소모가 커 전투를 한 번 하면 교대해야 했다. 그 틈을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고려군은 늦추지 않았다. 병사 하나하나가 각오와 의지가 분명했고 그들은 베테랑이었다. 그 승세를 타 다시 달려나가 여진군을 쳐 291명을 죽였다. 여진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방책에 불을 지른 후 도주했고 웅주성을 포위하던 여진군도 후퇴한다.

  오연총은 이 공으로 양구진국공신이 되었다. 고려는 극적으로 승리했다. 7월 오연총을 다시 불러들이고 윤관을 다시 파견한다.

 

 

 

하지만 이 전투는 고려가 정착촌까지 건설했음에도 여진은 포기하지 않았고 그것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음을 의미했다.

4개의 댓글

2014.07.30
크 진짜 기다리고 있던 글 ㅊㅊ 박음.
필자 이제 올리고 나서 오타 수정중일듯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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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30
이런글은 추천해야죠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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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30
왕자지 ㅋㅋㅋㅋ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괜히나오소리가아니구나

어쨋든 ㅊㅊ
0
2014.07.31
고려 무쌍 척준경 ㄷㄷㄷㄷㄷㄷ

읽으면서도 "아 이젠 죽겠네..."라고 생각한게 한두번이 아닌데 계속 안죽엌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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