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려전쟁사 - 거란전쟁 (4) 서경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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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gdrip.net/52911268 고려전쟁사 - 거란전쟁 (1) 전쟁전야

 

 

서경 공방전

 

 

  두 장수는 서경으로 출발했다. 먼저 출발한 지채문은 평양의 동쪽 50km거리에 있는 강덕진에 입성한다. 여기서부턴 적전지역이므로 탁사정과 합류하기 위해 대기하게 된다.

이러는 동안 거란군은 주저 없이 남하하며 곽주를 점령한지 이틀만에 안주에 도착하는데 안주의 부사 박섬은 싸울 생각도 못하고 달아났다. 강조가 진군할 때 가용병력을 있는대로 끌고간 것이다. 129일 거란군 선봉부대는 이미 서경에 도달해 중흥사를 불태웠다. 그 다음날엔 본대가 평양에서 하룻길인 성천에 입성했고 이날 항복을 권하는 거란의 사절이 서경에 도착한다.

  서경은 서북면의 행정중심이기도 하면서 최고의 요새지의 역할을 했다. 성은 삼중으로 방어되며 성벽은 높으며 남쪽은 대동강을 끼고 있으며 수당전쟁때는 몇 차례의 포위를 이겨낸 전력을 가진 요새였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이 한다. 거란의 사절을 맞은 서경부유수 원종석은 항복하기로 결정, 항복문서를 작성한다.

 

 

    평양성도.jpg

<평양도>

 

 

  하지만 서경의 관료나 주민들이 모두 항복에 동의한건 아니었고 성천에 주둔한 지채문에게 서경이 항복하려 한다고 연락한다. 지채문은 즉시 부대를 이끌고 서경으로 오나 이미 항복을 결심한 원종석등은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는다.

  지채문 부대에 있던 최장이 서경의 분대어사 조자기에 연락을 해 조자기가 문을 열게 한다. 지채문은 성 안으로 진군했으나 평양성은 삼중구조로 외성이 있고 그 안에 내성, 그리고 내성안에 궁성이 있는 구조로 서경의 관료는 궁성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채문은 이 곳 까지 군대를 끌고 들어가 무력시위까지 하며 원종석에게 항전을 촉구하나 원종석은 항복의사를 굽히지 않고 항복문서를 거란 사절에게 전달 하고 사절단은 개경을 떠난다.

 

 

    평양성_평면도.jpg

<평양성의 구조>

 

 

  시간계산을 한다면 서경 함락 이틀 전이다. 방법이 없었다. 지채문은 병력을 보내 거란 사절단을 기습하여 죽여 항복문서를 불태웠다. 이젠 서경이 살기위핸 싸우는 수단밖에 없게 됬다. 하지만 원종석과 같은 투항파는 정말로(...) 끈질겼다. 저들 때문에 우리 모두 죽을꺼라 여론몰이를 해 분노의 화살을 지채문으로 돌리게 하여 지채문은 성 밖으로 달아나게 했다. 서경군 아무도 지채문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대장군 정충절만이 따라 나왔다.

  정부군이 도망갈 정도로 서경 주민들이 극단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은 이유는 거란군에 대한 공포심만이 아니라 정종 이후로 즉위한 왕들은 서경세력을 견제해왔다. 이런 기억은 그들에게 소외감을 남겨주기 충분했다.

  이러한 서경의 상황은 성종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이런걸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서경의 상황을 분명히 알았던 성종은 사절단이 어떻게 된지 모른체 서경의 투항에 기대를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있었는데 고려 왕이 항복의사를 밝힌 것이다. 강화라고 표현하긴 하나 항복이나 마찬가지였고 성종은 이제 확실하게 되었다 생각해 민간인에 대한 납치나 약탈을 금하며 마보우를 개성유수, 왕팔을 부유수로 임명하고 울름군 기병 1천을 서경으로 파견한다.

 

 

     고려군.jpg

<성종이 꿈꾼 밝은 미래 앞에 등장한 그들>

 

 

  하지만 그 날 기적적으로 탁사정의 동북군 본대가 서경에 도착하게 된다. 이에 지채문은 탁사정과 합류, 강화파를 숙청시킨다. 당일 혹은 다음날 거란군 장수 한기가 이끄는 200명의 기병부대가 평양성으로 와 거란 사절이 죽은 사실도 모른체 문을 열고 황제의 명을 받들라 한다.

  역시나 성문은 순순히 열렸다. 하지만 명을 받는건 황제의 명이 아닌 탁사정의 명을 받은 고려 기병들이었다. 거란 기병중 100기가 죽고 모두 생포된다. 기습이라곤 하나 그 유명한 거란 기병-명심하라 당시 거란은 동아시아 최강이었다-이 이렇게 당한건 고려의 기병 역시 수준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단 한명도 돌아가지 못한 한기군의 전멸을 알지 못한 울름군 1천은 지채문의 포위 공격에 궤멸당하고 울름 등은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성종은 자신이 경솔했으며 그들을 벌하지 않았지만 서경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고 자신을 기만한 고려를 생각해 총진군을 한다.

 

 

    보통문.jpg

<문만 남았지만 이 보통문에서 뛰쳐나왔을 고려 기병을 상상해보라...>

 

 

  당시 고려군은 탁사정은 성 안에 주둔하며 지채문과 완항령에서 거란군을 공격한 이원은 성밖에 주둔했다. 거란군은 숙천에서 서쪽길을 따라 평원군으로 내려왔는데 고려군은 이를 탐지해 싸우기로 결심하며 지채문과 탁사정의 부대와 법언이 이끄는 승병부대가 합쳐 9천의 병력이 북상한다.

  고려군이 택한 요격지점은 임원역 남쪽이다. 평양성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곳이며 대화궁을 쌓았던 곳이다.

  그 날 전투는 승병이 포함되있었는데 종교인 답게 국가와 주민과 대의를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으며 법언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했다. 이들의 분전을 바탕으로 고려군은 거란군 3천명 정도를 죽이며 패주시켰는데 이는 꽤 의미 있는 전투였다. 울룸 부대는 거란이 서경공략의 전위부대로 당연히 최정예였으며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승리하면서 거란전쟁 이후 야전에서 거란을 한번도 이긴적 없는 전적을 바꾼 것이이며 고려군 수준이 거란군에 비해 뒤지지 않음을 다시 증명해준 셈이다.

 

 

    대화궁터 주변 토성.jpg

<대화궁터 주변 토성>

 

 

  임원역 전투에 고려군은 승리를 했지만 거란군을 격퇴시키지 못했는지 다음 날 전투는 좀더 남쪽에서 일어난다. 거란군은 물량에 앞섰고 계속 밀고 내려왔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도 지채문이 선봉이 되어 출격을 해 전투를 했는데 거란군은 패주하여 도주하기 시작한다. 도주하는 거란군은 동쪽으로 도망쳐 임란당시 왕성탄 전투가 벌어진 마탄쪽으로 간다. 이 모습을 본 평양성의 고려군은 지채문과 합세한다. 평양에서 마탄은 40리였다.

  하지만 마탄에 도달했을 때 거란군은 역습으로 나왔다. 40리나 되는 추격은 긴 대열을 만들었고 그 틈을 노려 역습을 가했거나 다른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에 고려군은 큰 타격을 받고 역으로 추격을 받으며 평양성까지 후퇴한다. 이 과정에서 큰 희생이 따랐고 고려군은 야전을 포기하고 농성전으로 간다. 거란군은 평양성을 포위했고 성종은 근처 사찰에 본영을 설치했다.

 

 

 평양성 전역.jpg   

<평양성 전역>

 

 

  이 때 평양성 안에는 여러 부대가 혼재해 있었다. 그 중에는 17년 전 안융진에서 소손녕의 부대를 격퇴한 대도수의 부대도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도 참전했으나 청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남으로 후퇴한거같다.

  탁사정은 대도수의 부대가 발해민으로 구성되있으며 전투에 적극적이란 사실을 알고 대도수에게 계획을 제의한다. 대도수의 부대는 동문으로가 거란군 본영 좌측을 타격, 탁 사정 자신은 서문으로 나가 성종의 군영을 습격한다는 것이다.

무모해 보였지만 대도수는 동의한다. 발해멸망의 원수 거란의 황제가 있었고 자신의 아버지는 조국을 잃고 이곳에 정착했다. 이 먼땅에 거란의 황제가 스스로 찾아왔고 그에겐 기회였다. 성공해도 손실이 막대하며 확률도 희박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대도수.jpg

<천추태후에서 보여주는 발해 마지막 세자의 아들이었던 대도수>

 

 

  그 날 밤은 대도수와 그 부대원들에겐 특별한 밤이었다. 발해가 멸망한지 100년 이젠 발해의 옛 땅을 본사람도 멸망의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자신들은 발해를 보지도 못하고 고려인으로 자랐지만 발해의 후손이라는건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 눈 앞에는 그 원수가 있었고 과거의 전설과 의무는 현실이 됬다.

  그들은 남쪽의 대동문으로 나아가 거란군을 기습한다. 하지만 고려의 정예 앞에서 거란군은 방심하지 않았다. 대도수도 그걸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작전은 기습이 아닌 양동작전에 의의가 있었다. 그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대도수는 최대한 병사를 끌어모아야 했다. 실제로 대도수는 의무를 다했고 그들은 포위를 당했다. 그러나 탁사정은 계획과 다르게 성문을 나오자마자 달아났다. 대도수는 자기가 속은걸 깨달았고 꼼짝없이 고립된 대도수는 항복하고 만다. 여담이지만 거란은 발해인 포로들을 압송해 발해의 땅이었던 요양 일대에 정착시킨다. 그들은 그렇게 발해땅으로 돌아갔다.

 

 

   발해.jpg

<그들이 꿈꿨던 발해의 옛 땅>

 

 

  그렇게 밤이 지나간 아침 서경 주민은 하룻밤 새에 중앙군과 주력부대 및 지휘부가 사라진걸 깨달았다. 주전론자들이 없어졌으니 강화론자들에겐 기회였으나 그들도 없었다. 하지만 서경은 고려가 신경썼던 만큼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다. 중간급 간부들인 녹사 조원, 진장 강민첨, 낭장 홍협, 방휴 등은 의논 끝에 신사에 가 점을 쳐 길한 증조를 얻었다. 여기서 조원을 병마사를 추대해 분산된 병사를 집결시켜 다시 성을 고수하게 된다.

  서경에 이런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지휘부가 사라져 오히려 이들의 숨은 능력이 발휘 되었고 그들은 믿을만한 발해군이 궤멸하고 주력부대가 도망간 상황에서 민심을 잡고 병사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거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서경은 강한 요새지만 완벽한 전략적 목표였고 대도수군의 항복으로 고려군 주력이 도망갔다는 것도 알았다. 조원과 강민첨이 분투했지만 성패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려는 아직 충신이 많았고 하늘이 도우는 듯 했다.

 

강민첨.jpg

<강민첨 영정. 후에 조원과 강민첨은 큰 역할을 한다> 

 

 

전환점

 

 

  그 날 밤은 어둡고 고요했다. 장군은 막 순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한겨울 압록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성벽위에서 맞는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군량이 부족해질 수 있어 먹을건 마음껏 못줘도 물은 풍부해 뜨거운 물이나마 마음껏 공급하게 했다.

  이곳에 고립된지 벌써 한달, 거란군은 7일간 공격하더니 미련없이 포기하고 남하했다. 그 뒤 들려오는 소식은 패전뿐 자신들이 성을 지켰지만 전쟁은 불리하게 진행됬다. 강조의 (거짓)서신에서 항복하라했지만 그는 왕이 아니니 거부했다.

  이렇게 패전을 기다려야 되는건가 괴로웠지만 부장들은 이렇게 버틴것만 해도 큰 공이라 위로했고 거란의 황제마저 자신들의 용전을 치하하고 떠났다. 그들 말대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항복한다해도 누구도 욕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상념에 깨우듯 부장 한명이 준비가 끝났다고 한다.

  최정예 700명을 준비했다. 군인은 의무가 있었고 이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는 성의 수비를 위해 최소한의 병력만 차출했지만 이번엔 그것이 장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란의 포위를 빠져나올 준비를 한다.

 

 그는 양규였다.

 

 

    양규.jpg

<천추태후의 모습 양규는 거란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렸다>

 

 

  서경의 고려군이 거란군과 치열하게 싸우던 1215, 양규는 흥화진의 포위를 빠져나와 통주성에서 고려군을 1천명을 수습한다. 이 때 까지 거란군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계속 모르게 할려면 과감하고 신속한 공격을 할 필요가 있었다. 양규는 이 병력을 이끌고 곽주로 향한다.

  그리고 16일 1천명 혹은 1700명으로 6천의 수비대가 지키는 곽주를 공격한다. 그 날 밤으로 6천의 거란군을 몰살시키며 7천명의 주민을 구출 모조리 통주로 이주시키고 통주 방어를 강화했다.

  이에 관해 아쉽게도 자세한 사료가 없다. 양규는 혹한기에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완벽하게 적을 속여 탈출해 기습적으로 곽주성을 탈환했다. 지휘관의 사명감과 지도력, 정예 병사만이 이룰 수 있는 승리였으며 전황은 한순간에 바뀐다. 거란은 유일한 중간기지를 잃은 셈이 됬다.

 

 양규군 이동.jpg   

<양규군의 이동>

 

 

  이로써 거란군은 200km안쪽에 고립되었다. 이제 세가지 방법밖에 없다. 서경성을 점령하냐, 철수를 하냐, 개경으로 직공하냐. 결국 성종은 철수도 없고 서경을 무시하고 개경으로 간다. 여기서 개경까진 200km. 개경까지 진군하려면 400km의 고립을 감수하고 혹한을 견디며 현지보급을 해야했다. 이런 모험에 도전하는 유목민족의 생존력은 대단했고 실제로 그 선택은 옳았다.

 

 

 

 서경과 개경사이엔 고려군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6개의 댓글

2014.07.15
재밌게 보고있다 점점 흥미진진해 지는구만
0
고려군 통수 개쩌네ㅋㅋㅋ 아군의 통수까지 칠줄이야
0
2014.07.15
내 시조님 강민첨 나오셧네
0
2014.07.15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1000~1700명으로 6000의 수비대를 몰살... ㄷㄷ하구만
0
2014.07.15
탁사정은 싸우다가 왜 도망쳤지 근데 큰일이다 이거보고 역사스폐셜까지 다시보고있다 ㅋㅋㅋ
0
2014.07.16
양규도 무슨 소드마스터 그런거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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