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군사첩보 실패의 교과서-욤 키푸르(1)

출처: 욤키푸르 전쟁(아브라함 라비노비치), 중동전쟁-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임용한)

영감을 받은 글: https://cafe.naver.com/bitethatbait/115250?art=ZXh0ZXJuYWwtc2VydmljZS1uYXZlci1zZWFyY2gtY2FmZS1wcg.eyJhbGciOiJIUzI1NiIsInR5cCI6IkpXVCJ9.eyJjYWZlVHlwZSI6IkNBRkVfVVJMIiwiY2FmZVVybCI6ImJpdGV0aGF0YmFpdCIsImFydGljbGVJZCI6MTE1MjUwLCJpc3N1ZWRBdCI6MTcwMjEyNTA4NDI3OX0.jteCfVp4PgBAuYqkj-VczwYxl4a_Z_fqnelosBWbH3I

 

 

6일 전쟁 이후의 상황

 

6일 전쟁 이후 영토.jpg

이때 얻은 막대한 영토는 전략 종심을 대폭 넓혀서 이스라엘의 안보 위험을 감소시켰다. 그리고 그 댓가로 이스라엘 정치인과 군수뇌부는 자만에 빠졌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대승을 이집트에게서 거두었다. 이스라엘군은 이 전쟁을 통해 동쪽으로 골란 고원에서 서쪽으로 시나이 산맥에 이르는 방대한 전략적 종심을 확보했고, 이는 이스라엘의 취약한 안보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제4차 중동전쟁 일명, 욤 키푸르 전쟁에 이르러선 6일 전쟁의 2배나 넘는 전차와 전투기를 보유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아랍 국가들에 비해 압도적인 전략적 우위를 가졌다 생각했고, 그 결과 방심했다.....

 

저는 아랍 병사들의 낮은 교육, 기술, 통합 수준과 아랍 내부의 분열을 피상적으로 단기적으로 포장하려는 요인에서 비롯된 이러한 약점이 빨리 변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 1973년 8월 모셰 다얀 국방장관

 

 

모셰 다얀.jpg

당시 국방부 장관인 모셰 다얀의 모습

 

6일 전쟁에서 거대한 승리를 거두다 보니 군지도층은 오만과 무사안일 주의에 빠져 있었다. 군대, 특히 이스라엘 공군은 6일 전쟁 당시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의 80%를 전멸시킨 전과로 인해 군대의 마법사 취급받아, 이스라엘 국방 예산의 50%를 먹었다. 예비군이 집결해서 본격적인 반격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 공군이 최대한 적의 공세를 저지한다는 개념이었다.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전차.jpg

욤키푸르 전쟁 당시 사용된 슈퍼 셔먼 전차

 

이스라엘 육군의 경우는 "전차만능론"에 빠진 나머지 너무 기갑병과에만 지원이 치중되고, 보병화력이나 장구류 등에 대해선 발전이 미비해서 기갑 병과 내부에서도 이런 현상에 대한 걱정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대전차 미사일인 새거 미사일은 특성등의 내용이 담긴 소책자가 이스라엘에서 발행되고, 기갑 사령부에선 대응 전술까진 만들어 두었지만, 몇몇 부대에선 이런 책자나 대응책을 접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몇몇 이들은 새거 미사일의 존재 조차도 몰랐다.

 

 

아랍군은 이에 반해 야간 투시장비를 보병에게 까지 폭넓게 보급했지만, 1차 중동 전쟁 당시 야간 기습전으로 재미를 본 이스라엘군은 야간 투시경을 도입한 전차(병사가 아니다.)가 극히 소수고 그나마도 별빛을 증폭하는 야간 투시 장비를 도입할 예정이었다.

 

옐로우 플리트.jpg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에게 함락되자 이집트 정부는 수에즈 운하를 폐쇄 시켰고, 그와중에 수에즈 운하를 지나가던 다양한 국적을 지닌 15척의 배들은 수에즈 운하에 갇혔다.

 

반면 아랍군은 지난 패배를 경험으로 철저하게 재무장 되고 있었다. 특히 이집트군은 이스라엘 배가 수에즈 운하를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운하를 폐쇄(1967~1975년까지 폐쇄했는데, 그때 같힌 15척의 배들은 황색함대Yellow Fleet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함으로써 극심한 손해를 입었다. 그래서 다른 국가들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군개혁을 시작했다. 이집트군은 지난 6일 전쟁 패배의 원흉들인 똥별들(대표적으로 압델 하킴 아메르)이 치워지고 대학생까지 징집시켜 고급 장비를 다루는 병사들의 질을 향상시켰고, 지난 전쟁을 복기한 결과 하급 장교들과 병사들이 잘못한 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들을 자신감을 주고, 동기부여도 제공하는 프로그램도 진행되었다. 이들의 머릿속에서는 이스라엘군의 허를 찌를 만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튀어나왔다. 사다트가 "이게 진짜 군대다!"라고 감탄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소련을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무기는 별도로 말이다.

 

사다트.jpg

전임 대통령 나세르가 뭔가 외면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사다트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매우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집트 왕정 폐지 때도 얼굴 마담이 나세르였다면 실질적으로 왕정폐지를 주도한 이는 사다트였다.

 

그럼에도 사다트는 전쟁보다도 평화적인 수단으로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기 위한 노력을 시도했다. 아님 최소한 수에즈 운하의 정상이라도, 1970년 12월 모셰 다얀이 이스라엘군을 시나이 반도 국경선에서 20마일 뒤로 미루자는 제안을 하자(당시 총리인 골다 메이어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다트도 1971년 2월 모셰 다얀의 제안을 자기가 한 거 마냥 언급과 동시에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제안하여 청중들을 놀라게 했다.

 

하페즈 이스마일.jpg

사다트의 군사안보고문인 하페즈 이스마일의 모습

 

1973년 2월(전쟁 발발 8개월 전!) 사다트 정권의 군사안보고문 하페즈 이스마일Hafez Ismail은 헨리 키신저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6일 전쟁 이전의 국경(이집트-이스라엘 기준)으로 되돌린다는 조건 하에

1. 요르단 강 서안의 국경 조정에 이집트가 합의할 용의가 있다! 이스라엘은 국경에 군대를 배치할 수 있다.(2023-24년까지 국제법 상으론 이스라엘이 6일 전쟁 때 먹은 땅은 불법이다.)

 

2. 이스라엘-이집트 국경에 비무장 지대 조성

 

3. 대이스라엘 무역 제재 해제 및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이용 가능

 

만약 아랍인들에게 노출되었으면 사다트 머리에 빵꾸날 정도로 그 당시엔 무척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골다 메이어 내각은 무시했다. 헨리 키신저는 "사다트 대통령께 제가 드릴 충고는 현실적이 되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다트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시나이반도를 되찾고 수에즈 운하의 정상화가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보다 군사적인 우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스라엘의 너무나 취약한 방어 계획

다비드 엘라자르의 모습.jpg

다비드 엘라자르의 모습

 

시나이 반도가 생긴 이후로 이스라엘과 이집트군은 위키피디아 및 꺼무위키에 소모전( https://namu.wiki/w/%EC%86%8C%EB%AA%A8%EC%A0%84(%EC%A4%91%EB%8F%99) )이란 항목이 있을 정도로 은밀하고 치열하게 싸웠다. 나세르 사후 사다트가 이집트 대통령이 되고, 1971년 이스라엘군 참모 총장이 된 다비드 엘라자르David Elazar는 이집트가 잃어버린 시나이반도를 되찾기 위해 반드시 전쟁을 벌일거라고 예측하고 그에 대한 방책을 수립했다.

 

 

하임 바르 레브.jpg

막장으로 치닫던 시나이 전선을 간신히 승리로 이끈 하임 바르레브, 그는 시나이 전선이 개막장이 되자 무역산업부 장관에서 도로 군인이 되어 시나이 반도에서 군을 지휘했다. 만약 이 글이 인기가 좋다면 짧게 이야기를 하도록 노력해 보겠다.

 

그에 맞춰 전임 참모총장 하임 바르레브Haim Bar-Lev의 이름을 딴 바르레브선을 구축했는데, 이 전선은 매우 취약한 단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약 161Km의 그때 당시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을 방어하는 병력은 욤키푸르 전쟁 당시 16개의 전초 기지에 441명?!?이 주둔하고 있었다.(우리나라의 DMZ에 있는 한국군 병력이 250Km에 수십 만 명이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안일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르레브선은 방어병력과 물자를 선에 고정시켜 이스라엘의 장기 중 하나인 기동전을 묶어두는 요인 중 하나로 변질되었다.

 

 

바르레브선.jpg

바르레브 선의 모습, 그렇다. 이 선은 대한민국의 DMZ와 비교하면 매우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어선이었다!


지키기엔 너무 얇았고, 그렇다고 막 버리기엔 아쉬운 계륵 같은 존재가 바르레브 선이었다. 아리엘 샤론(후임 이스라엘 최고 ㅇㄱㄸ 맞다)과 이스라엘 탈 장군은 이 방어선은 결코 이집트 군을 막을 수 없다고 장담했다. 이스라엘 장군인 라스코브는 물위의 불이라는 화염 방사 장비를 설치했다. 유사시 적이 쳐들어 오면 운하에 불을 질러 적을 저지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시나이 사단.png

시나이 반도 방어의 핵심이자 유일한 육군 무력 수단인 제252 기갑사단 "시나이 사단"의 패치 모습, 현재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군도 마냥 무능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라, 이집트 군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한 비둘기 장Shovak Yonim이란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시나이반도에 주둔 중인 유일한 현역 기갑사단인 시나이 사단(제252 기갑사단)과 300대의 전투기로 이집트군을 저지하는 동안 기갑 동원사단을 동원하여 적을 시나이 반도 너머로 쫓는 것인데, 여기서도 이스라엘군의 오만이 들어가, 내부로 침투한 적에 대한 대응지침은 간략하고, 운하를 건너 적에게 반격하는 내용이 핵심 내용이었다. 

 

 

D_E6JzTU8AA5J8n.jpg

극도로 오만한 이스라엘군은 더욱 강해지고 독기가 어린 아랍군을 6일 전쟁 수준으로 저평가 했다.

 

설사 너무 늦게 이집트 군의 침공을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시나이 사단과 공군을 통해 이집트 군을 저지한다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비둘기 장 계획의 내용이었다. 1972년 8월 이스라엘군 남부 사령부가 주관한 워 게임에선 이집트군이 수에즈 운하를 도하한다는 가정하에 진행되었는데, 정보당국은 고작 48시간 전에 경보를 내릴 수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참가자들은 정보당국의 48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정보당국은 그러한 우려에 5~6일이면 경보발령을 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워게임은 너무 낙관적으로 흘러가 시나이 사단이 적을 축출할 수 있을것이라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앞서 바르레브선에 우려를 표시한 아리엘 샤론 마저도 시나이 사단이 적을 단독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집트 군이 사전 경고 침공한다는 계획은 여기서 참가자들은 상정조차 안했다. 그냥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은 과거, 국경선 후방에 군대를 배치했지만, 6일 전쟁 이후 최전선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 말은 이스라엘군이 침공 여부를 사전에 파악하는게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과거 오합지졸 군대가 아니라 이스라엘인의 피에 굶주린 늑대들로 변해 있었다.

 

 

 

 

천사 강림하다.

 

마르완.webp

결혼식 당시의 사진 왼쪽은 당시 대통령인 나세르,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나세르의 딸인 모나, 악수하고 있는 인물은 마르완 이다.

 

6일 전쟁 이후 3년이 지난 1970년 이스라엘 대사관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받은 이스라엘 측은 모사드 요원을 파견했고, 그가 2개월 전에 사망한 나세르의 사위 아슈라프 마르완Ashraf Marwan임을 파악했다.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기밀을 팔겠다는 이들은 많았지만 아슈라프 마르완 만큼의 초대형 거물은 없었다.

 

 

사다트는 나세르 일원과 협업하는 것이 자신의 통치에 중요함을 깨닫고 나세르 사후에도 마르완을 중용했다. 그리고 마르완은 낭비벽으로 유명했는데, 모사드에서도 마르완을 매수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철회되었다. 근데 그 마르완이 제발로 이스라엘에게 들어온 것이었다!!!!

 

 

이스라엘 군 정보국은 마르완에게 이집트 다음 전쟁 계획과 부대, 배치상황, 무기와 지휘구조 같은 1급 기밀을 요구했고, 마르완은 요청받은 문서 일체를 제공했다. 이스라엘 군 정보국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이집트 군사기밀과 마르완의 정보를 짜맞춘 후 마르완의 정보가 진짜 임을 확인했다.

 

 

마르완은 이후 모사드에게서 엔젤이란 암호명을 부여받고 당시로선 특급 정보들을 이스라엘에게 마구 뿌리게 된다. 이집트 무기 구매 내역부터, 군사 명령, 군사 회의록, 사다트와 아랍 지도자의 사적인 대화와 심지어 모스크바에서의 사다트와 브레즈네프의 회의 내용까지 보냈다. 그리고 그 첩보내용들은 총리, 국방장관, 참모총장, 모사드 및 군정보국 국장등에게 특급으로 보내졌다.

 

 

엘리 제이라.jpg

엘리 제이라의 사진, 아만 취임 당시에도 몇몇 군인들은 군 정보국 국장이면 신중할 필요가 있는데 제이라는 너무 자신감이 많다고 걱정했다.

 

1972년 10월 미국 주재무관으로 있다가 이스라엘에 돌아온 엘리 제이라Eli Zeira장군이 이스라엘 군 정보국(AMAN 통칭 아만이라고 하겠다.)의 국장으로 취임했다. 아만의 국장으로 취임한 제이라는 마르완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마르완의 정보를 토대로 개념Ha Tfisa(The Concept)이란 분석틀을 만들게 된다. 개념의 핵심 내용은 소련의 전략폭격기(그래야 그 이스라엘군 전투기가 있는 군기지들을 공습할 수 있으니)하고 스커드 미사일(이스라엘 수도 텔 아비브를 타격하기 위해서)를 제공받아야 사다트는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는 골자의 내용이었다. 소련은 아직까지 이 2개를 이집트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골다 메이어.jpg

아니 씨발.... 우리군 너무 낙관적이네,,,, 군대 안간 늙은 골다 메이어의 눈에도 지금 꼬라지는 심히 우려스러울 수 있었다.

 

제이라는 골다 메이어 총리 앞에서 이스라엘군은 사전에 이집트군이 공격할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골다 메이어는 제이라의 호언장담에 "어떻게 알지요? 준비사항을 보고서?"라는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했다. 제이라는 이집트와 전면전이 벌어져도 시리아군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란 말을 남겼다. 제이라의 이같은 발언에 모사드 국장 즈비 자미르Zvi Zamir와 다비드 엘라자르는 제이라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1972년에 벌어진 전쟁 위기론에서 엘리 제이라는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모사드의 예측에 반론하며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의 말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예언자 수준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착각한 게 있다면 사다트는 1972년 11월에 진짜 전쟁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세르는 6일 전쟁 패배 이후 자기 몸을 깍아가면서 '방어계획 200'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고, 1972년 10월 28일 군 수뇌부를 모아놓고 준비사항을 점검했다.

 

 

당시 회의중인 이집트 군.PNG

이집트군은 사다트의 공격명령에 두려움으로 일관했고, 사다트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해임시켰다.

 

근데 보고를 하는 국방장관은 쭈뼛대며 "각하, 무슨 명령을 하달하였는지요?"라고 되물었다. 알고보니 군의 보안유지를 명목으로 군대에 공격계획을 알리지 않았고, 국방장관의 보고를 듣자마자 이집트군 장군들은 "각하 저희는 저 모래 장벽을 돌파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사다트가 노력해도 아직도 이집트 군에는 패배주의와 보신주의가 남아있었다.

 

 

샤즐리의 모습.jpg

참모총장 샤즐리의 사진, 국방장관인 이스마일 알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을 이겨야한다는 대국적인 관점에선 사적인 감정을 접어 두었다.

 

군의 기열찐빠적인 반응에 사다트는 국방 장관을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첩보국 장관 이스마일 알리를 임명했다. 참모총장으로 이스라엘군에서 제대로 싸울 줄 안다는 평을 받은 사드 엘샤즐리Saad el-Shazly를 임명했다. 당연히 기존의 '방어계획 200'은 사다트가 보니 너무 엉성해서 폐기했고, 겸사겸사 이스라엘 군 첩보의 기반이 된 '개념'을 포기했다. 마르완은 이 중대한 사항을 전했지만, 개념에 단단히 중독된 엘리 제이라는 마르완의 첩보를 무시했다. 오히려 마르완을 이중첩자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제이라의 입장에서 마르완은 이제 늑대가 온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양치기 소년에 불과했다. 즈비 자미르는 계속해서 전쟁 위험에 대한 첩보를 보고했지만, 개념에 헤어나오지 못한 이스라엘군은 보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6개의 댓글

2023.12.10

읽어보니 글이 노잼이네.....

0
2023.12.10
@綠象

술술 잘 읽히는데 뭘

0
2023.12.12
@綠象

핵꿀잼인데??? 재미있게 잘 읽었읍니다.

0
2023.12.13
@綠象
0
2023.12.10

ㅊㅊ

0
2023.12.13

재밌음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415 [기타 지식] 중국에서 안드로이드 폰을 사면 안되는 이유? 3 대한민국이탈리아 5 6 시간 전
12414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3 FishAndMaps 1 10 시간 전
12413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그녀는 왜 일본 최고령 여성 사형수가 되었나 10 그그그그 7 2 일 전
12412 [기타 지식] 최근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국내 항공업계 (수정판) 14 K1A1 23 2 일 전
12411 [역사] 인류의 기원 (3) 3 식별불해 5 3 일 전
12410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재벌 3세의 아내가 사라졌다? 그리고 밝혀지... 그그그그 4 5 일 전
12409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의붓아버지의 컴퓨터에서 발견한 사진 3 그그그그 7 7 일 전
12408 [기타 지식] 도카이촌 방사능 누출사고 실제 영상 21 ASI 2 7 일 전
12407 [역사]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ver2 19 FishAndMaps 15 9 일 전
12406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지구 2부 21 Mtrap 8 7 일 전
12405 [기타 지식] 100년을 시간을 넘어서 유행한 칵테일, 사제락편 - 바텐더 개... 5 지나가는김개붕 1 9 일 전
12404 [기타 지식] 오이...좋아하세요? 오이 칵테일 아이리쉬 메이드편 - 바텐더... 3 지나가는김개붕 2 11 일 전
12403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지구 1부 31 Mtrap 13 10 일 전
12402 [기타 지식] 칵테일의 근본, 올드 패션드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야기 15 지나가는김개붕 14 11 일 전
12401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2부 22 Mtrap 14 11 일 전
12400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1부 13 Mtrap 20 11 일 전
12399 [역사] 군사첩보 실패의 교과서-욤 키푸르(完) 1 綠象 1 10 일 전
12398 [호러 괴담] [살인자 이야기]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체포되기까지 28년이... 1 그그그그 6 12 일 전
12397 [역사] 아편 전쟁 실제 후기의 후기 3 carrera 13 13 일 전
12396 [과학] 경계선 지능이 700만 있다는 기사들에 대해 34 LinkedList 11 13 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