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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논고 핵심 해석 - 6.4-7 문구 해석 (삶의 의미)

 

 

 

 

 

이것을 쓰는 데 도움을 준 논문은 다음과 같아.
Stephen Mulhall 교수의 Words, Waxing and Waning: Ethics in/and/of the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이영철 교수의 언어의 한계와 그 너머,
이영철 교수의 종교적 믿음과 언어,
김영건 교수의 과학과 형이상학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중심으로.

 

그 중에서도 Stephen Mulhall 교수의 Words, Waxing and Waning: Ethics in/and/of the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은 아주 큰 역할을 했고, 원래는 이것의 번역을 생각했지만 내가 너무 부족했어.

 

https://blog.naver.com/sellars/100030651718
이곳에서 6.4-6.54에 있는 문구에 대한 좀 더 자연스러운, 더 평문적인 번역을 볼 수 있어.
읽는 데 이것이 더 좋을 수도 있으므로 추천해.

 

논리철학논고를 안 읽은 사람에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해봤지만 이 글은 이미 선을 한참 넘은 거 같아...
책을 펼쳐서 1-2시간정도 앉아서 본문과 같이 읽는 게 이 글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같아.
내가 부족해서 미안해.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 논리철학 논고를 마친다.
그는 그 문구를 쓰기 직전 윤리에 대한 내용을 제시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서문에 이 문장을 포함하려고 했다.
‘나의 작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 한 부분이며, 내가 써 놓지 않은 모든 것을 거기에 더하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 둘째 부분이다. 내 책은 윤리적인 것의 영역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내부로부터 한계를 긋는 것이며, 나는 이것이 그런 한계를 긋는 단 하나의 엄격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윤리학의 정의는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나온다.
“이제 ‘윤리학은 좋은 것에 관한 탐구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저는 윤리학은 가치 있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윤리학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또는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윤리학은 곧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6.4 모든 명제들은 가치가 같다.

 

이 뜻은 6.53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6.41 세계의 뜻은 세계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리고 만일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가치를 지니는 어떤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건과 이러저러하게-있음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모든 사건과 이러저러하게-있음은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우연적으로 만드는 것은 세계 속에 놓여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다시 우연적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이라고 보는 게 좋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우발적이고, 가치는 비우발적이므로 가치가 세계에 속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그는 논고의 이전 부분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사태가 우연적인 것이라고 말해왔다.

 

지금 이 곳에 의자가 있느냐 없느냐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가치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그는 사실과 가치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말하려고 했다.
가치가 세계 속에 있다면, 가치는 사태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가치는 세계 속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가치가 세계 속에 있지 않다는 논증은 또 다른 중요한 점을 가지고 있다.
가치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가치를 가지는지 가지고 있지 않은지, 혹은 세계 전체가 가치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는 등의 의문에 대해서 막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것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어떤 것이 가치를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우연적인 질문을 내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가치가 비-우연적인 것과 모순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질문을 막아내고, 가치의 세부적인 속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6.42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의 명제들도 존재할 수 없다.
명제들은 더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
6.421 윤리가 언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리는 초월적이다.
(윤리와 미학은 하나이다.)

 

“초월적”이라는 단어는 칸트가 썼던 transcendental을 의미한다.
논고에서는 이 이전에 6.13에서 쓰여진 적이 있다.
(6.13 논리학은 교설이 아니라,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학은 선험적이다.)

 

사실 이 표현은 많이 이상한 것인데, 윤리학의 명제와 논리학의 명제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명제가 더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짜 명제가 아니며, 따라서 무의미할 것이지만, 논리학은 그렇지 않다.
윤리학의 명제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논리학에서의 말해짐/보여짐 구분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선 논리학과 윤리학을 연결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하고자 하는 점은 이것이다.
기존의 논리학에서 사용한 표현을 통해 윤리학이 세계의 한계에 위치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 뜻에 대해서는 6.423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마지막에 쓰여진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이다."라는 문구는 논고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구절 중 하나로 꼽힌다.
윤리학과 미학이 하나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가 쓴 "전쟁일기"에서의 언급에서 일부분 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영원의 관점에서 본 대상이다. 그리고 좋은 삶은 영원의 관점에서 본 세계이다. 이것이 예술과 윤리의 연관이다.”
윤리학과 미학은 진실로 하나이기보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많은 주석가들은 해석한다.
(Diane Collinson에 의하면, 미학은 영원의 관점으로서 보는 방식인 것이고, 윤리학은 영원의 관점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임으로서 관련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6.422 “당신은 ...해야 한다”라는 형식의 윤리 법칙이 세워졌을 때 드는 최초의 생각은,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가 통상적인 뜻에서의 상벌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행위의 결과들에 관한 이러한 물음은 중요성이 없어야 한다. 최소한 이 결과들이 사건들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문제 제기에는 무엇인가 올바른 것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일종의 윤리적 상벌이 존재하기는 해야 하지만, 이 상벌은 행위 자체에 놓여 있어야한다.
(그리고 상은 유쾌한 어떤 것이어야 하고, 벌은 불쾌한 어떤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의 법칙들이 논리학과는 별개로 절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마라”라는 법칙이 있다고 할 때, "거짓말을 한다면 어떻게 되지?"라는 생각이 가능하고, 그것이 적어도 인식 가능할 수는 있다.
칸트가 법칙으로 제창한 정언 명령과 같은 사례에 대해서도 똑같은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이 세계의 한계 부분에 있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이러한 질문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가장 해석하기 곤란한 문장은 마지막에 있는 상과 벌에 대한 동어반복이다.
상은 유쾌한 것이고, 벌은 불쾌한 것이 맞는데 왜 이것을 언급했을까?
여기서 나올 수 있는 첫 번째 해석은 이것이 동어반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적절하게 그 한계를 인지하면서 윤리적인 한계를 준수하며 살아가는 것이 상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Stephen Mulhall은 여기에서 급진적인 두 번째 해석이 더 올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번째 해석에 대해서는 6.43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6.423 우리는 윤리적인 것의 소지자로서의 의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현상으로서의 의지는 단지 심리학의 관심사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윤리를 사태들로 이러어진 세계보다 그 세계의 한계에 주목한다.
윤리적 평가의 대상은 삶에서 무엇인가를 한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지향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윤리적인 의지와 현상으로서의 의지를 구분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의지를 사태로 바라본다면 윤리학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삶의 태도와 지향으로서의 의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6.42에 나온 명제가 더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따랐다.
이를 통해 "의지"라는 단어에 대한 윤리적인 사용을 막았다.

 

지금까지 보이겠지만, 윤리학은 세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계속 주장하고 있다. 6.421에 대한 문구는 논리학이 세계의 한계를 비춰주는 것처럼 윤리학도 그렇게 세계의 한계를 비춰주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말하면 윤리학과 논리학은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은, 세계와 그 한계를 비추는 삶을 사는 것이므로, 이것이 논리적인 것과 뗄 수 없는 삶이라는 표현도 된다는 것이다.

 

 

 

6.43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바꾼다면, 그것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는 없다. 즉,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다면 세계는 선악의 의지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전체로서 이지러지거나 차야 한다.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계는 전체로서 이지러지거나 차야 한다."는 문구이다.
이 글은 이전에는 보다 보편적인 용어로서 "세계는 전체로서 감소하거나 증가해야 한다."는 라는 문구로 번역되었다. 그 뒤 수정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여기서 증가와 감소가 아닌 그 반대로 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각각 연관짓기 위해서였다.
독일어 원어로는 감소와 증가를 abnehmen과 zunehmen라고 했는데, 이 용어는 달의 이지러짐과 참을 의미할 때 쓰인다.

 

달의 비유는 비춰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달의 이지러짐과 참이 오직 달이 아닌 햇빛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같이, 선하거나 악한 의지도 세계가 아닌 세계의 한계가 바뀐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의 감소와 증가를 행복한 자의 세계와 불행한 자의 세계와 연관지었다.
행복한 사람은 세계가 이지러지는, 즉 세계의 한계가 사라지고 투명하게 봄으로서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보는 사람을 뜻한다.
불행한 사람은 세계가 차는, 세계의 한계들만을 맞닥뜨리는 사람임을 뜻한다.
세계의 한계는 곧 윤리학을 의미한다. 불행한 자라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같다. 그는 그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그 문제들에 부딪힌다.

 

의지에 의해 세계가 이지러지거나 차오른다는 것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따르는지, 부딪히는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를 따름으로서 세계에 좌우되는 것이 감소하는 사람일수록 윤리적인 것을 상관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선하며 행복해진다.
그에 반해, 세계에 부딪히는 자는 윤리적인 것에 부딪힌다. 그는 악하다. 또한 불행하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는 세계와 일치해야 한다"는 "전쟁일기"의 말을 참고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앞에서 비가 내리는 상황을 생각해본다.
행복한 사람은 비가 내리는 것을 비가 내리는 것으로,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단지 일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우발적인 세계에 윤리적 상벌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불행한 사람은 비가 내리는 것에서 세계의 한계와 부딪힌다. 다시 말해, 불행한 사람은 이를 윤리와 연관짓는다. "내가 왜 이런 수난을 받아야 하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같은 이유로 해가 내리쬐는 때에도 불행할 것이다.

 

이제 여기서 6.422에 있었던 Stephen Mulhall의 급진적인 두 번째 해석을 언급할 것인데, 그는 상과 벌이라는 용어가 용어의 일반적 사용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한다.
윤리적인 것의 한계는 절대적이고, 비조건적이다. 다른 대안책은 윤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안다면, 상과 벌이라는 용어가 특별한 개념을 가진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상이라는 것은 윤리가 그 어떤 강요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상이라는 것은 "세계의 의지"를 따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에 따르면, 윤리학이 어떤 것의 자제라고도 생각하면 안된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라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무언가에 대한 자제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어떤 강요라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세계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세계와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윤리학은 "어떤 것으로부터" 자제를 한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할 것이라고 Stephen Mulhall은 말한다.

 

상과 벌이라는 것의 윤리적인 사용을 막은 점을 여기서 언급해야 한다. 행복을 추구한다면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의해서도 선악의 관점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상과 벌이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상과 벌이라는 생각조차 버려야만 한다.

 

 

 

6.431 죽으면 세계는 바뀌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일지라도.
6.4311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영원이 무한한 시간 지속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이해된다면, 현재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가 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6.4312 인간 영혼의 시간적 불멸성, 즉 죽음 이후에도 인간 영혼이 영원한 삶을 계속한다는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증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늘 그런 가정으로 달성하고자 한 것을 전혀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영원히 산다는 것에 의해 도대체 수수께끼가 풀리는가? 도대체 이 영원한 삶이란 현재의 삶과 똑같이 수수께끼 같지 않은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실로 자연 과학의 문제들이 아니다.)

 

죽음 이후로 더 사는 것이 어떤 것의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사람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반론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죽음 이후에 더 산다는 것은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윤리적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를 자연과학이 문제를 푸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었다. 시간성이 주는 문제에 어떤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이 문제를 준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해결했다. 이것을 solve, 해결 과정이라기보다 dissolve, 해소 과정이라고 볼 수 있고,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이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암시한다.

 

본문에는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는 문장에 대해서 '밖에' 부분이 이탤릭체로 강조되었다. 이것은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이 말그대로 공간과 시간 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 이미 그 문제가 공간과 시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으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이다.

 

 

 

6.432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는 더 높은 것에게는 완전히 아무래도 좋은일이다. 신은 자신을 세계 속에서 드러내지 않는다.
6.4321 사실들은 모두 단지 과제에 속할 뿐, 해결에는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 사실은 윤리적 과제의 수행에 있어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다.
세상이 어떻게 있냐는 것이 윤리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신의 의미는 범신론적인 것에 가깝다(혹은 가깝다고 뉴턴 가버는 말한다).
"전쟁일기"에서 나온 이 언급은 중요하다. "삶의 의미, 즉 세계의 의미, 이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같은 곳에서의 이 언급 또한 주목할 수 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세계의 사실들이 문제의 끝이 아님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의미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세계의 의미는 모든 가치가 그렇듯이 세계 속에 있지 않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세계에는 사실뿐만 아니라 가치, 즉 세계의 한계에 있는 윤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혼란스럽게도 "아버지로서의 신이란 비유를 결합시킬 수 있다"고 기독교적인 신의 결합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신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신과 다른데, 비트겐슈타인의 신은 세계 창조와 관련이 없다. 6.44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6.44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신은 창세기에 나온 창조자의 신과 다르다 -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5.552의 내용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명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이 경험뿐이라면, 경험에 앞서는 논리에 대해서는 무슨 전제가 필요한지에 대해, "경험이 아닌 모든 경험에 앞선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비스러운 것"에 해당한다.

 

이 문구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언급을 다룬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도 다뤄졌음을 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절대적 가치를 알리는 최선의 방법이 "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와 동시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 이 세계에 대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지를 언급하면서 이 문장이 가장 잘 표현해준다고 말하고는, 바로 그 뒤에 이 문장은 언어를 오용하고 있으며 이 표현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 절대적 가치에 대한 표현은 세계를 과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기적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이 내용은 6.54에서 자세히 언급하는 내용에 도움이 될 것이다.

 

 

 

6.45 세계를 영원의 관점에서 직관하는 것은 세계를 전체 - 한계 지어진 전체 - 로서 직관하는 것이다.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그 전까지 말했던 행복한 사람이 세계의 한계가 사라지고 투명하게 보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깨트려야만 한다. 영원의 관점에서 직관하는 것이 한계 지어진 전체라고 했기 때문이다.
영원의 관점이 무엇인지는 그가 쓴 "전쟁일기"에서의 언급에서 일부분 볼 수 있다.
"통상적 고찰 방식은 대상들을 말하자면 그것들의 한가운데에서 보고, 세계를 영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바깥에서, 대상들이 전체 세계를 배경으로 가지도록 본다.”

 

이 영원의 관점에서의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6.44의 세계가 있다는 것의 신비스러움과 연관되며, 또한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세계의 존재라는 기적에 대해 올바른 언어 표현은 언어 내의 어떠한 명제에 있는 것이 아닌 언어 자체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 내용은 6.54에서 자세히 언급하는 내용에 도움이 될 것이다.

 

 

 

6.5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언표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릇 어떤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물음은 또한 대답될 수도 있다.
6.51 회의주의는, 만일 그것이 물음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의심하고자 한다면,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립하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6.52 설령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런 물음도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6.521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인지된다.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6.522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6.52와 6.521에서 답한 내용은 중요하다.
다른 모든 가능한 물음들이 대답되어 있다 하더라도, 삶의 문제들이 전혀 건드려지지 않았고, 물음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므로 삶의 문제는 문제가 소멸하면서 해결된다.
또한 "이 문제의 소멸"에서 나온 소멸이라는 단어는 6.43의 달의 비유에서 이지러지는 달과 짝지어진다.
6.51에 나온 문구는 많은 주석가들이 말했듯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목적했지만, 이것은 또한 윤리학적인 질문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문구이다.

 

이것에 따르면, 행복한 사람은 존재에 대한 대답될 수 없는 남아 있는 문제에 대해 질문하려고 하지 않고 그 경향을 극복하려고 한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이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왜 나는 저것이 아닌 이것을 해야 하는가? 나는 왜 존재하며, 왜 나는 계속 더 존재해야만 하는가? 왜 이것이 아닌 저것인가? 왜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기보다, 무엇이 있는가?)

 

행복한 사람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피한다. 그는 윤리적인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는다"(eschew). 그리고 오직 자연과학적인 질문만을 질문으로 받아들인다.
영원의 관점에서의 한계 지어진 전체에 있어 "한계 지어진"이라는 내용이 바로 이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6.43에서 논의한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의 논의를 이에 따라 다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불행한 자라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같다. 그는 그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그 문제들에 부딪힌다. 행복한 사람이란 처음부터 그런 삶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던 사람이나, 이것이 대답될 수 없는 질문임을 깨닫고 그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은 사람을 뜻한다.

 

 

 

6.53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 과학의 명제들 — 그러므로 철학과는 아무 상관없는 어떤 것 -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에 있는 모종의 기호들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것, - 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이 방법은 그 다른 사람에게는 불만족스럽겠지만 - 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가르쳐 주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겠지만 - 이 방법이 유일하게 엄격히 올바른 방법이다.


이 유일하게 올바른 철학의 방법은 기존의 논고 해석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해석 또한 가능하다.
6.521에서 보인 것과 같이, 윤리적 문제의 해결은 윤리적 문제의 소멸에 있고, 윤리적인 질문에 있어서 그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6.53이 보인 철학의 방법은 윤리적인 문제 대신 대답될 수 있는 자연과학의 문제만을 문제로 삼음으로서 윤리적인 질문을 표현하는 행위를 피하고, 그를 통해 윤리적 문제의 소멸과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6.4에서 나왔던 수수께끼같은 문구와도 관련된다. “모든 명제들은 가치가 같다.”
문제가 철학적이건, 과학적이건, 역사적이건, 수학적이건, 미학적이건간에 6.53에 있는 기준을 지킴으로서 같은 윤리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으로 인해 뜻풀이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철학의 명제와 윤리학의 명제는 자연과학의 명제들과 같은 의미가 있는 명제가 아니고, 비의미적이지도 않다. 논리학의 명제들이지도 않고, 수학의 명제이지도 않고, 자연과학의 법칙이지도 않으면서, 필연적이어야만 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논리철학논고에서 철학의 명제의 무의미함은 윤리학의 명제가 무의미함과 굉장히 비슷한 면이 있다.
철학의 명제의 무의미함이 윤리학의 명제의 무의미함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한다면 이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구절에 대해 (전통적 해석에 동의하는) 하나의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절대적 가치를 알리는 최선의 방법이 "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와 동시에 이 문장이 언어를 오용하고 있으며 이 표현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6.45에서 다뤘던 영원의 관점에서의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세계의 존재라는 기적, 즉 신비스러움에 대해 올바른 언어 표현은 언어 내의 어떠한 명제에 있는 것이 아닌 언어 자체의 존재라고 언급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표현이 언어에 의한 표현이라기보다 언어의 존재에 의한 표현이다고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그 표현하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으며 그런 것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이 특정한 무의미한 표현을 일상적인 무의미한 표현과 다르게 취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언어의 존재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세계와 관련되어 언어와 논리 그리고 윤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말을 할 때 그 배경적 지평을 이루고 있을 뿐, 결코 언어로 표현될 수 있게끔 드러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한 무의미한 표현이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고 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윤리학을 명제로서 표현하려고 한 행위들은 그의 말대로라면,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다. 우리의 새장 벽에로 이렇게 달려가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희망 없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논고의 명제들과 같은 사이비 명제가 있어서, 그것들을 사다리처럼 딛고서 넘어 올라갈 때에 비로소 올바르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사이비 명제들은 논리적이기엔 너무 윤리적이라고, 윤리적이기엔 너무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모든 것은, 우리가 반드시 침묵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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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의미와 종교의 의미

( https://www.dogdrip.net/267059887 ) 의 글을 쓴 사람입니다.

 

그 글은 사실, 이 글의 요약문 같은 것이었고,

너무 체계적이고 난해한 것 같아서 여기에 올리지 않기로 그 당시엔 결정했습니다.

이제는 마음을 바꿔 올린 상황, 이 글을 읽고 그 글을 파악하는 데 있어 더 첨예하게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9개의 댓글

2022.12.31

논리철학논고 10장 정도 읽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는데 이런거 진득하게 참고 잘 읽을려면 어떻게 해야되?

0
2022.12.31
@애플주주에여

구글에 "비트겐슈타인 플로우차트"라고 하면 나오는 글이 있던데 괜찮아 보여요.

0

학부생 당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를 듣고 "아가리 해" 라는 뜻일거라고 생각했는데, 훗날 그토록 중요한 것들을 괜히 입에 올려서 그 가치를 훼손하지 말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고 새삼 놀란 기억이 나네..ㅋㅋㅋㅋㅋ 좋은 글 고마와요!

0
2022.12.31

철학입문서 추천좀

0
2022.12.31
@지나가는똥개

소피의 세계

0
2022.12.31
@ㅇㄱㄱㅈ

감사요~ ^^

0
2022.12.31
@지나가는똥개

표지가 괴상하지만 정말 좋은 책입니다. "돼지가 철학에 빠진 날"을 추천하고, 철학사로 쉽게 읽으려면 소피의 세계를 추천합니다. 현대철학에서 첫걸음을 간다면 박찬국의 "현대철학의 거장들"을 추천해요.

1
2022.12.31
@지나가는똥개

그리고 원전보다 그 전에 2차저작을 찾고 좋은 걸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해요. 아마 어떤 철학자를 탐구하고 싶은지도 알아야 하겠죠... 원전을 처음 들어가고 싶다면 그때 가장 좋아보이는 건 흄의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이고요, 현대철학 원전 읽기의 시작으로 가장 좋은 건 제가 보기엔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 비판"인 것 같아요.

0
2022.12.31
@지나가는똥개

"나는 철학 계속 파고 싶지 않고, 페이지 길어도 되니까 결정타로 딱 골라 읽으련다" 싶으면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2, 3권을 추천합니다. 사실 움베르코 에코는 조금만 썼고 지휘 역할을 한 것뿐, 이탈리아 철학자들이 모여 분야를 맡아서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수직으로 깊게 파기보다 수평으로 해안가를 보듯 관점 포착과 섬세함을 노린 책인데, 그 면에서 정말 아주 좋은 책입니다.

0
2022.12.31
@난쓰레기

이야.. 감사합니다 정선스런 답변..

0
@난쓰레기

정말 내취향을저격하는 책을알려줬네.. 내가 인문학은좋아하는데(취미의영역) 너무 깊은건 힘들어서 피하는데 취미로 이것저것ㄷ건드리다보니 지대넓얕에서 언급하는 수준은알고있는데 그렇다고 더 깊은수준으로 가려니 너무 중간단계가 없어서 어쩌지했는데 고마움

0
2022.12.31
@지나가는똥개

출판사에서 쏟아내는 동서양철학 10인 100인 이런 세트 하나면 떡치고도 남음

0
2023.01.01
@아멜리아왓슨

그런건 너무 설명이 간략해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듦

0
2023.01.01
@lIIlIIl

입문서론 충분함

등장했던 사고방식들이 중요한거지 철학이 중요한게 아니니까

예를들어 유물론이랑 관념론의 유래를 모르면 순수이성비판이 어렵다고 느껴지는거랑 같은거임

출판사도 문과고수들이라 유아용조차도 뭔 논문을 언제 썻는지등등 있을건 다있음

색안경벗고보면 으른용 철학세트는 10만원으로 입문하기좋은 최고의 가성비임

0

윤리학 관련해선...칸트의 이성의한계안에서의 종교 읽고나서 '칸트 안어렵네? ㅈ밥이네?' 하고 한번 판단력비판까지 뚫어보자는 심정으로 순수이성비판 읽다가 감각의 형식(30쪽은 되나)에서부터 이미 대가리 터지고 나가떨어짐...

3비판서에서 어려운거 얘기다해서 이성의한계안에서의 종교가 존나 쉬웠던것..

나름 문맥이 통하는 건 있는 것 같은 게,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의 설명에 대해 '아가리'하라고 했고, 칸트는 '묻지말고 하라고' 정도로 되는거같음. 칸트의 신의 존재 요청도 같은 맥락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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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로그라이크아님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에대해 아가리 라고 한건 공감하는데 칸트의 경우 묻지 말라라고 했다기보다 다 자기기준으로 캐바캐로 받아들이는데 정의를하는게 의미있음? 이정도 같던데 어차피 이렇게 정의 하는것도 좀 의미가 없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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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양 교수같네 혹시 교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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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침묵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하네.. 침묵만큼 아름다운 음악이 없다고도 하니까

침묵의 미래라는 책도 생각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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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4

댓글 추천서적 전부 구매했읍니다. 좋은 글 남겨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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