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옷장에 남길 옷 - 치노 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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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이기기 위한


 날씨가 순식간에 더워졌다. 밤에는 조금 쌀쌀하지만 낮에는 살이 익어가는 기분이다. 지난 주에는 서울재즈페스티벌을 다녀왔는데, 목덜미부터 종아리까지 타버린 걸 보고 진짜 여름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쩐지 요새 치노 쇼츠가 사고 싶다 했더니, 새로운 계절에는 자연스레 새로운 쇼핑이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이전에 카키 치노 팬츠에 대한 글을 쓴 적 있다. 그 글을 읽고 온 사람들은 '또 치노야?'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이건 그저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로, 막 입고 대충 빨아서 쓱 다리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치노를 내가 가장 즐겨입고 많이 사기 때문이다. 또, 나는 여름철에 나일론으로 된 트레이닝 쇼츠, 컷오프한 데님 쇼츠, 턱이 잡힌 치노 쇼츠 이렇게 3종류의 바지를 번갈아가며 입는데 이 중 출근을 하는 등 단정한 옷차림에 추천할만한 건 치노 쇼츠뿐이라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내가 안 입는 걸 추천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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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지만, 또 복학생


 치노 쇼츠가 남성복 문화에 자리잡은 건 1960년대 아이비리그의 역할이 크다. 그 전의 역사를 훑어보자면 너무 더운 지방에 파견된 군인들이 치노 팬츠를 잘라입던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있고 이는 곧 키즈 밀리터리의 중심인 보이스카우트에서도 받아들여 어린 아이들은 치노 쇼츠를 곧잘 입곤 했다. 하지만 성인들이 치노 쇼츠를 입는 건 '어린애를 따라한다' 는 식의 눈길을 받곤 했었기에 1960년대 아이비리그에 치노 쇼츠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주류 문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아이비리그는 곧 군인으로 바글바글한 곳이 되어버린다. 당시에 미국 정부에서 새롭게 만든 복지인 지아이빌 덕택인데, 2차 대전 이후 제대 군인을 위한 초저금리 학자금대출과 실업급여, 주택담보대출 등이 포함된 정책이었다. 이 복지를 놓치면 바보 수준이었기에 수많은 제대 군인들이 아이비리그로 몰려들었다.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예비군들은 군대에서 편하게 입던 옷들을 그대로 입고 다녔고, 그 과정에서 군복이었던 치노 팬츠와 치노 쇼츠는 순식간에 아이비리그의 패션이 되었다. 특히 해당 시기에 참전군인 출신이라는 건 일종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므로 그들의 패션이 유행이 되는 건 더더욱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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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키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치노 쇼츠는 카키 컬러가 아니어도 괜찮다. 여름까지 4계절을 카키 치노를 입기는 조금 질리는 감도 있거니와, 기본적으로 태양광이 강하게 내리쬐는 계절에 채도가 높은 옷을 입는 편이 좀 더 깔끔하고 옷을 잘 챙겨입은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만약 카키 치노를 고르지 않는다면 마드라스 체크 패턴의 치노 쇼츠, 네이비 컬러의 치노 쇼츠를 추천한다. 가장 아름다운 건 화이트나 아이보리 컬러의 치노 쇼츠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저기 걸터앉기도 힘들고 국밥을 먹다가 흘리면 바로 버려야 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만 생각할 뿐 구매하지는 않는 편이다. 나는 브라운, 카키, 베이지, 네이비의 4가지를 입고 있다.

 

 그리고 길이감에 있어서도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길이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허벅지 절반을 넘지 않는 이상 그렇게까지 노출이 과하지 않을 뿐더러 다리가 길어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물론 꾸준한 운동을 통해 몸을 만들어서 상대방의 눈을 배려하는 것 역시도 필요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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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입어볼까?


 추천하는 브랜드는 단연 폴로 랄프로렌이다. 이전에는 브룩스브라더스나 다른 하이엔드 브랜드도 어느 정도의 로망이 있었지만 수없이 사고 팔고 해보니, 치노 쇼츠라는 심플한 옷일수록 특정 수준만 넘어가면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특히 땀이 많이 나는 계절에 입는 옷일수록 빨리 상하기 마련인데 지나치게 값비싼 바지를 사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는 판단이다. 다만 반바지는 긴 바지와 달리 허벅지 실측, 전체적인 기장감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옷이므로 반드시 입어보고 사는 것을 추천한다. 허리는 얇고 허벅지가 두꺼운 체형이라면, 위의 사진처럼 앞 주름이 잡힌 바지를 입으면 우아하면서도 편안하게 핏이 잡히니 추천. 나 역시도 Andrew라는 모델명의 투 플리츠의 빈티지 폴로 쇼츠를 수집하고 있고 내 가게에서도 팔고 있다. 

 

 이 바지는 무엇과 입어야 할지를 말하는 것보다 무엇과 입으면 안될지를 말하는 게 빠르다. 사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말하는 게 어려운 수준의 옷이다. 바지와 상의를 같은 색깔로 맞춰입는 것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옷차림에 어울린다. 개인적으로는 네이비나 청록색의 폴로셔츠와 입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흰 티셔츠나 블루 옥스포드 셔츠와 입는 것도 좋아한다. 굳이 피하는 조합은 베이지 컬러의 상의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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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으면 따라입기


 정말 귀찮다면 영화 <Call me by your name>에 나오는 올리버의 패션을 따라 입으면 된다. 저게 무슨 미국 아저씨 패션이냐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전세계적으로 저명한 패션 에디터들과 스타일리스트들이 저 코디네이션에 감탄하며 수많은 리뷰를 올렸다. 기본에 충실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멋이 묻어나는 옷차림이다(물론 얼굴과 비율도 한 몫한다) 로고가 크게 박힌 명품을 입지 않아도, 무턱대고 비싼 소재의 옷을 입지 않아도 충분히 멋진 패션일 수 있다. 어차피 멋과 개성은 옷차림이 아니라 태도에서 묻어나기 때문이다. 단지 태도를 좀 더 바르게 하고, 더 잘 보이도록 해주는 수단에 불과한 옷차림에 과하게 몰입하고 스트레스 받지는 않았으면.

 

 

 

 

 

잡설

최근 개드립에서 패션 관련 글을 썼다가 '전형적인 패알못' 이라는 댓글을 받았다. 내가 처음 스타일리스트/에디터를 시작했던 회사의 실장님께 바로 캡처해서 보내줬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 술도 마시고 새벽까지 놀았다. 왜냐하면 패션업계에서 대중에게 '패알못' 소리를 듣는 건 일종의 재미 요소이기 때문이다. 실장님은 YG의 사복 스타일링을 총괄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 시절에도 트위터와 편지로 옷을 못 입힌다는 비난을 수 백 개씩 받았다고 했다. 심지어 라프 시몬스와 후지와라 히로시가 그 스타일링들에 대해 엄청난 칭찬을 하던 시절에 말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당신이 얼마나 차려입던 누군가에게는 패알못일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의 눈을 지나치게 신경쓰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패션이 업인 사람들도 패알못 소리를 듣는데, 업이 아닌 당신이 패알못 소리를 듣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냥 무시하면 된다. 옷 입기는 TPO를 지키는 선 내에서 스스로가 즐겁고 당당한 게 가장 중요하니 쫄지 말고 재밌게 즐겼으면 한다.

 

72개의 댓글

2022.06.01

님 글 보고선 옥스포드 셔츠 필드자켓 넘모 맘에 들어서 샀음 ㅋㅋ

1
2022.06.01

옷잘입는 사람 부럽다 ㅜ

0
2022.06.01

항상 좋은 글 고마워양! 저도 오피서 치노 좋아해서 주구장창 입고다님 ㅎㅎㅎ

여담인데, 국내 도메들에 대한 룩북 둘러보기 같은것도 해줄 수 있으까요? 요새 폼이 많이 올라왔다고 하는데 옷 좀 치는 분의 의견으론 어떨까 해서... 저는 최근에 포x리 스포츠 블레이저 샀는데 기대랑 다르게 애매해서 쪼끔 그랬그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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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니키파이

로컬 브랜드들의 룩북 둘러보기도 재밌겠네요. 요새 로컬 브랜드들의 수준이 정말 많이 올라오긴 했는데, 그에 맞춰 가격도 크게 올라간지라 기대치가 높아진 거 같습니다. 이제 해외 준디자이너 브랜드급 가격을 받고 있죠... ㅎㅎ 남들 다 올리니까 가격만 올리고 수준은 못 올린 브랜드들도 많고요.

0
2022.06.02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연재 부탁드리고 싶네요. 옷 잘입는 사람, 그리고 타고난 감각? 있으신 분들 정말 부럽습니다..

0
2022.06.02

폴로스타일 좋아하는구만

0
2022.06.02

검색해봤는데 치노팬츠 = 면바지

이거 맞음? 그냥 면직물로된 바지를 의미하는 것?

0
2022.06.02
@bamchi

치노 클로스라는 빳빳한 능직 원단으로 만들어져야 치노라고 보는 게 정석이긴 한데.. 요새 그냥 면바지면 치노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지. 데님도 면바지긴 한데 치노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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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비율이 안좋아서 반바지 입기 꺼려짐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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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제발 패션글 많이싸줘 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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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3

치노팬츠 글 보고 RRL 오피서 치노팬츠 샀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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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3

너무 잘보고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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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3

사진 더 많이 많이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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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4

오래간만에 광고없는 영양가 있는 패션에 관한 글을 보네요. 어디 잡지에 기고된 글같아서 어펜딕스 읽기전에는 다른곳에서 퍼온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이런깊이의 글을 쓰는 분에게 패알못이라고 하는 분들은 얼마나 패션을 잘아는것일까 한수 배우고 싶어서 무척 궁금해집니다.(비아냥아님) 그나저나 이 잡지 문체는 참 너무 꾸며진, 현학적이라 느껴지다보니 일상적인 이야기를 서술하는 부분에선 여전히 적응을 못하겠군요.

2
2022.06.04

가끔 여기 나타나는 자칭 패잘알들중에 일본 스트릿패션 빨아재끼면서 개성=패션이라 생각하는 재능없는애들 많음

안그래도 엊그제 형광티보고 심하게 내상입었다

개붕이들은 제발 남의시선 신경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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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4

티피오가 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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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4
@뛣뛣뛣

Tim place O는 몰?루 옷 입는 장소와 시간(계절?)에 맞게 입는것

0
2022.06.05
@뛣뛣뛣

Time Place Occation.

 

시간과 장소, 경우에 맞춰 입는 걸 말합니다

0
2022.06.04

와 패션잡지 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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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5

형 그 앤초비 스토어라는 빈티지샵 있는데, 형이 운영하면 왠지 이런 느낌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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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5
@세로쓰기

실제로 자주 구경하는 샵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샵은 시드머니가 작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옷들을 바잉할 수 없.....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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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6

마지막 코멘트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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