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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리딩Dog] 6호-거리의 현대사상. (그 중 결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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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우치다 타츠루 선생.)

 

철학자의 철학책. 허나 제목이 '거리의 현대사상'인 만큼 일상에서 접하기 쉬운 생활밀접한 주제들에 대해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책.

 

대중철학책이지만 시중에 나와있는 무늬만 철학책인 것들보다야 훨씬 유익하고 재미있다. 인생선배로써의 저자가 '살아보니 내 입장은 이렇더라'~ 라는 식으로 주관을 끼얹어 써냈다. 철학자의 Q&A 생활상담코너 같은 느낌으로.

 

1-2장에서는 문화자본과 현대사회의 큰 경향에 대해 설명해주고, 3장부터 Q&A가 시작된다. 경어에 대해, 돈에 대해, 월급에 대해, 업무 의욕에 대해, 결혼과 이혼에 대해, 사내 개혁에 대해, 프리터에 대해, 증여에 대해, 학력에 대해, 대학에 대해, 상상력과 윤리에 대해.

 

아래는 본문 중 일부인 3장, 8-11회이다.

스압이 있다. 허나 읽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8회 결혼이라는 끝없는 불쾌함에 대해

-9회 타자로서의 배우자에 대해

-10회 이혼에 대해

-11회 이혼에 대해2

 

 

 

...

 

 

[제8회 결혼이라는 끝없는 불쾌함에 대해]

 

7711fd64-f19d-420b-90d8-3f4f8ac89944.jpg{선생님은 예전부터 '좋은 파트너를 찾으라고 말씀하셨죠. 서른 살 독신 여성으로서, 저를 오카 히로미로 만들 수 있는 무나카타 코치 같은 파트너가 어딘가에 없을까 생각합니다.(* 만화 에이스를 노려라!」에 대한 이야기. 테니스부의 무나카타 코치가 주인공 오카 히로미를 일류 테니스 선수로 키워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동시에 단순한 의문입니다만, 만약 있다 해도 그 '좋은 파트너'는 '좋은 결혼 상대가 될까요? '결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가 아니라, <좋은 파트너가 있으면 결혼하는 편이 좋은가? 아니면 딱히 안 해도 상관없는가?'가 궁금합니다. 제도로서는 붕괴되고 있다 해도, 이렇게 계속 의문을 만들어내는 '결혼' 에는 엄청나게 합리적이라 거나 뭐라거나, 요컨대 '이득'을 보는 면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결혼해야 돼!' 라는 생각이 안 듭니다. 이 절실함의 결핍은 직감적으로 사실은 별로 이득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이번 질문은 꽤 길지만 '흔들리는 여심' 의 뉘앙스를 이해하기 위해 이 정도의 길이는 허락해주시기 바란다. 요점은 '좋은 파트너를 얻는 것'과 '결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가, 결혼의 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다. 답변하겠다. 이 둘은 별개의 문제다. 또한 결혼에는 이점과 결점이 있는데 이점은 결점을 메우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을 다음에서 설명하겠다. 함께 생활하고 서로 물심양면으로 돕고 쌍방이 동의하면 관계를 끝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유로운 파트너십'과 '결혼 계약'은 별개의 것이다. 어떤 부분이 다른가. '자유로운 파트너십은 '사적인 관계'고 '결혼 계약'은 '공적인 관계'다. 이 부분이 다르다. 알기 쉽게 설명해보자.

 

'자유로운 파트너십'에는 따라붙지 않으나 '결혼 계약에만 따라붙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상대의 친족'이다. 결혼하면 (상대가 천애고아가 아닌 한) 예외 없이 시아버지 시어머니 장인 장모 시누이 처제 친척 아저씨 아주머니 등이 ‘덤’ 으로 딸려 온다. 그리고 놀랍 게도 결혼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의 90퍼센트는 이 '예외 없이 딸려 오는 상대의 친족' 때문에 생긴다. “어머, 올케, 이 창살의 먼지는 뭐야? 아이, 더러워. 대체 올케네 친정에 서는 청소를 어떤 식으로 한 거야?" 라는 식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틀에 박힌 ‘친족의 결혼 생활 간섭은 끔찍하게도 모두 사실이다. 나는 젊은 시절 여자 친구 집에서 “우치다 군도 모처럼 왔으니 저녁이라도 함께 하세”라는 경험을 몇 번인가 했다. 그때 받는 심문의 신랄함이란, 모르시는 분은 상상도 안 갈 것이다. 유혹에 넘어가 신상을 줄줄이 털어놓으면 “그런 경박한 녀석은 두 번 다 시 우리 집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할 테다” 라는 선고를 받고, 따라주는 대로 술잔을 거듭 비우면 “남의 집에서 만취하는 멍청이와는 사귀면 안 돼!”라고 단정지어진다. 물론 임기응변의 말재주로 분위기를 띄우고 만사 요령 좋게 구두시험에 답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미묘하게 빈틈이 없어서 엄마는 왠지 껄끄럽네” “젊은 녀석이 닳아빠진 건 아빠는 싫어”라는 훈시를 어차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여성이 상대의 가족'에게 평가받을 때의 준엄함에 비하면 이런 것은 거의 목가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왜냐하면 아시는 대로 이 나라에서는 남성 주체의 '낮춤혼低方婚이 혼인의 지배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낮춤혼' 이란 자신보다 '등급이 낮은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고자 하는 경향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혈통이든 학력이든 직위는 연봉이든 아내가 남편보다 '우위'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일단 도쿄대를 나왔고요, UCLA에서 MBA를 딴 뒤 지금은 외국계 회사에서 펀드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어요. 연봉은 1억 엔이 좀 안 된답니다. 후후”라는 여성이 샐러리맨 긴타로의 집에서 환대받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여성이 상대방의 가족에게 평가당할 경우, 좋은 집안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나 취향은 일단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각오해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은 “올케! 이 창살의 먼지는 뭐야?" 라는 질책에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글썽이는 '며느리' 이지 아들보다 일 잘 하고 아들보다 취향이 고상하며 아들보다 연봉 높고 아들을 호되게 혼내는 '알파걸'이 아니다. 대체로 '서른 살의 독신 여성'이 이제까지 획득하려고 부지런히 힘 써온 노력의 성과는 상대방의 가족'에게는 눈에 거슬릴 뿐이다. '미혼, 무자식, 30대가 그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루저 개(C 사카이 준코)'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녀들이 추구하고 획득해온 문화자본(학력, 자격, 교양)이 '낮춤혼' 사회에서는 모조리 '부채'로만 계산된다는 냉엄한 사실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으로 연애와 결혼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 여러분도 대체로 아셨으리라. 연애로 '공통점 있는 유쾌한 파트너'를 얻었다면 그 뒤로는 즐겁게 놀며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결혼은 그리 되지 않는다. 결혼이란 자신과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일평생 모르는 사이로 끝났을) '불쾌한 이웃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들의 취향이나 이해利害를 배려하며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연애와 결혼은 플레이어에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질이 완전히 다르다. 연애에 필요한 것은 '쾌락을 즐기고 쾌락을 증진시키는 능력'인 반면 결혼에 필요한 것은 '불쾌함을 견디고 불쾌함을 감소시키는 능력'이다.

 

"그럼 결혼해 봤자 좋은 게 하나도 없잖아요!” 뭐, 결론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약간은 좋은 점도 있다. “뭐예요?" 자, 생각해보시라. '상대방의 친족'이 '며느리에게 가장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식을 낳는 거겠죠.”

 

정답.

 

“자식을 낳는 게 좋은 점이에요? 뭐예요, 그게. 선생님도 엔젤플랜(1 * 일본의 출산 장려 계획.) 의 첩자인가요?"

 

 

아니다. 내 말은 그 반대다. 어째서 결혼하는 게 좋은 일' 인가 하면, 자식 을 낳고 기르는 '불쾌한 경험'을 뼈저리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분명히 말하지 않으니 내가 대신 말씀드리겠는데, 자식이야말로 여성에게 '불쾌한 이웃 넘버원'이다. 이 불쾌함은 그야말로 '상대방의 친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우선 임신하면 배가 나온다. 세련된 옷도 못 입고 놀러도 못 가고 일도 못 한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가 흔들리고 오줌이 샌다. 만신창이다. 모체 속에 '이물질'이 침입하니 당연한 일이다(늘 하는 말이지만 <에일리언>이나 <괴물 The Thing from Another World> 같은 '외계인이 체내에 침입하여 인간을 탈취하는 이야기'는 사실 모두 이 '임신의 불쾌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몰랐는가?). 낳을 때의 고통은 아시는 대로다. 그런데 낳은 뒤에도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아기는 징징거리고, 똥오줌을 흘리고, 콘센트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고양이 귀를 물어뜯고, 값비싼 유리잔을 깨부수고, 베란다에서 떨어지고...... 정말이지 부모는 마음 편할 틈이라고는 없다. 좀 자라면 이번에는 학교를 빠지고, 머리를 물들이고, 귀에 구멍을 뚫고, 문신을 하고, 마약을 하고, 오토바이 사고를 내고...... 한마디 주의하려 하면 “시끄러, 할망구. 정말이지 부모는(이하 동문)." 아무리 생각해도 육아로 얻는 '쾌락'은 이런 '불쾌함'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육아가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육아 따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자 홀로 육아를 해온 경험으로부터 단호히 말씀드리건대 자식은 '불쾌한 이웃 넘버원' 이다. 그 점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사랑할 능력이 없으면 육아는 결코 완수되지 않는다. 아이는 미피 캐릭터처럼 동글동글 보들보들한, 오로지 귀여운 존재라 생각하는 여러분은 망상을 키우고 있을 뿐이다. 이제 아셨는가. 인류가 재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쾌락을 즐기는 능력이 아니라 '불쾌함을 견디고 불쾌함을 쾌락으로 해석하는 자기기만 능력이다. 그 능력이 있는 개체만이 자신의 DNA를 다음 세대에 남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선택압selective pressure(| * 경합에 유리한 형질을 가진 개체군의 선택적 증식을 재촉하는 요인.)을 견디고 살아남은 인간을 '승자'로 여기도록 인류학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 '승패'의 판단은 우리의 자기 결정으로 뒤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결혼은 쾌락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 약속하는 것은 끝없는 '불쾌함' 이다. 하지만 결혼은 불쾌함을 극복해낸 인간에게 '쾌락'이 아니라 어떤 성취를 약속한다. 그 성취는 재생산이 아니라 '불쾌한 이웃', 다시 말해 '타자'와 공생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일 것이다.

 

결혼은 '쾌락'의 많고 적음으로 셈하면 틀림없는 '손해'다. 이 부분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결혼을 이득인가 손해인가' 라는 말term로 생각하는 것은 '쾌락'의 화폐로밖에 만사의 경중을 잴 수 없게 된 '근대의 병증'이라는 점은 슬슬 깨달아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을 진실로 '인간적' 이게 만드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수난' 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긴 이야기가 될 테니 다음 회로 넘기겠다.

 

 

 

[제9회 타자로서의 배우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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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는 '결혼은 이득인가요?' 라는 고민 많은 젊은 여성의 질문에 답했다. 내가 제시한 잠정적 결론은 '결혼은 〈득실〉로는 잴 수 없다' 였다. '손해인가 이득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어째서 당신은 〈득실〉이라는 판단 기준이 모든 인간사에 적용된다고 믿는 것인가?' 라는 대답을 한 것이다. 내가 가진 패를 내보이자면, 이것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 라는 유대인이 잘 쓰는 필살기다. 문제의 차수를 한 단계 높여서 당면한 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매우 뛰어난 지적 장치다. 단, 유감스럽게도 단점이 하나 있다. 이 방식에 익숙해져 온갖 이슈에 대해 '문제에 문제로 답'하게 되면 질문하는 사람이 점점 짜증이 솟구쳐서 얼마 뒤 “바보 취급 하지 마!" 라며 때리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이 부분이 '왜 학술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대부분 유대인의 손에서 태어나는가'와 '어째서 유대인은 그토록 미움받는가'를 동시에 설명하는 열쇠인데, 이를 논하기 시작하면 책을 한 권 써야 한다). 따라서 나로서도 안전 보장을 위해 매번 '질문에 질문으로' 답할 수는 없다. 가끔은 '서슴없이 대답'해서 질문자의 좌절감을 해소해드리는 일도 필요하다.

 

‘서슴없이 대답'하는 데는 비결이 있다. 물론 '질문하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묻는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을 알고 있지만, 그저 그것을 남의 입을 통해 한 번 더 듣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다. “저, 회사 그만두는 편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내심 '회사 때려치우고 싶다' 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은 즐겁고 상사는 높게 평가해주고 동료는 신뢰하고 부하는 우러러보고 옆자리 미요 씨는 뜨거운 시선을 옆얼굴로 보내고...... 이런 상황에서 “회사를 그만두는 편이 좋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만두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건 회사 돈을 횡령했거나 미요 씨가 모르는 숨겨둔 여자가 있거나 북한의 잠입 공작원인 등의 '아무에게도 상담 못하는 슬픈 사정을 껴안고 있는 사람'뿐이다. 그러므로 “그만두는 편이 좋을까요?" 라고 묻는 사람에게 '그만둔다'는 것은 이미 결정이 끝난 일이다. 그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은 '그 결단을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다. 물론 자신은 그만두고 싶은 이유를 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다른 이유, '아, 그랬구나!' 하고 스스로 납득하고 남들에게도 힘주어 말할 수 있는 '당당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므로 숙련된 '인생 상담가'는 '질문자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질문자가 깨닫지 못한 이유를 근거로 고한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은 이득인가요?" 라는 질문 방식 자체에 이미 '듣고 싶은 대답'이 들어 있다. 질문한 여성은 '결혼하고 싶은' 것이다. 결혼할 마음이 없는 사람, 결혼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결코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결혼하고 싶지만 그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만이 이런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시라. “벤츠는 역시 가성비가 좋아?" 라는 질문을 하는 건 벤츠를 살 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뿐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마지막으로 '등을 살짝 밀어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혼은 이득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득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한 것이다. 단, 그 이유는 여러분이 기대한 바와 다르다. 다르지 않다면 '인생 상담'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 여러분의 착각은 결혼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지난 회에서 말씀드렸다. 결혼을 추천하는 이유는 그것이 '불행'한 경험, '수난'의 나날을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결혼은 아주 가끔 즐거운 일도 있지만 대체로 '끝없는 불쾌함'으로 구성되어 있다('비교적 행복한 결혼 생활' 에서 불쾌함과 유쾌함의 비율은 '팥밥에서 쌀과 팥의 비율'에 가깝다고 말씀드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왜 나는 그런 생활 형태를 여러분께 추천하는 것인가. 지난 회의 결론 부분에서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썼다.

 

결혼은 쾌락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 약속하는 것은 끝없는 '불쾌함'이다. 하지만 결혼은 불쾌함을 극복해낸 인간에게 '쾌락'이 아니라 어떤 '성취'를 약속한다. 그 성취는 재생산이 아니라 '불쾌한 이웃', 다시 말해 '타자' 와 공생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일 것이다.

 

내가 썼지만 좋은 말 아닌가. 중요한 말이므로 반복하자면,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결정적인 자질은 '타자와 공생하는 능력'이다.

인간을 다른 영장류와 구분 짓는 결정적인 특성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시는가. 인간만 하고 침팬지나 고릴라가 결코 하지 않는 행동은 무엇인가? “도구를 쓰는 것?” 노. 다른 영장류에게도 간단한 도구를 이용하는 능력은 있다. “언어를 쓰는 것?” 노. 기호를 써서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은 얼마든지 있다. “사회를 만드는 것?” 노, 원숭이사회는 인간사회와 매우 비슷하다. 인간만 하고 다른 영장류는 하지 않는 행동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무덤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만 년 전 구석기 시대에, 우리의 먼 조상은 '죽은 자'를 매장하는 습관을 가짐으로써 다른 영장류와 구분되었다. 이는 '살아 있는 인간'과 '죽은 인간'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 아니다(동물도 '살아있는 동물'과 '죽은 동물'은 '다르다'는 것쯤은 안다). 그게 아니라, '죽은 인간'을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낀 최초의 생물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죽은 인간'이 희미하게 눈앞에 나타나고, 그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고, 그 기운이 떠돌고, 생전에 사용했던 옷이나 도구에 혼백이 서려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생물만이 '장례’를 치른다. 죽은 순간 죽은 자의 '흔적'이 생활에서 깨끗이 사라진다면 장례 같은 걸 누가 치르겠는가.

 

인간이 무덤을 만든 이유는 무덤을 만들어 멀리하지 않으면 죽은 이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프랑스어로 ‘유령’을 ‘revenant' 이라고 하는데 이는 '돌아오는 자'라는 뜻이다). 구석기 시대의 무덤 가운데는 종종 사체 위에 거대한 돌을 올려서 죽은 자가 땅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있다. 아마 '돌아오지 못하도록' 누름돌을 올리는 것이 무덤의 본디 취지이리라. 인간의 인류학적 정의는 '죽은 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성에 관련된 모든 것은 이 본성에서 파생된다.

 

우리 사회를 뒷받침하는 규범, 이를테면 일본국헌법이나 인권선언, 미국 독립선언에는 모두 인간에게는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1조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잘 읽어보면 이상한 문구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를 잃은 상태’나 ‘행복을 잃은 상태'라면 직접 체험할 수도, 가까운 타인의 경험을 보거나 들을 수도 있지만 '생명을 잃은 상태'는 경험한 적도, 경험자로부터 “죽은 뒤에는 이런 기분이 들어" 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잃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인간적 권리' 첫머리에 쓰여 있다. 이 말인즉슨 인간은 '죽은 뒤'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안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한 결코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살아 있는 상태로 닿을 수 있다'는 이 ‘착각’(이라고 일단은 말해두자)이 인간성의 근본적인 성격을 형성한다. 인간성에 관련된 모든 것은 이 본성에서 파생된다.

 

왜 이렇게 멀리 돌아왔는지 이제 아시리라. 우리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결혼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타자와 공생하는 것'이다. 함께 사는 그 타자와 당신은 마음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고 말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으며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을 거스를 때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이 뭘 생각하는지 나는 모르고, 이 사람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그걸로 좋다. 결혼이란 '그 점을 뼈에 사무치게 경험하기 위한 의례'니까. 이 점을 머릿속에 두고 아까의 정의를 떠올려보시라. 인간은 결코 마음이 통하지 않는 타자(즉 '죽은 자' 말이다)의 기운이나 혼백, 메시지'조차' 알아 차리고 느낄 수 있는 능력으로 원숭이와 구분되었다. 인간의 인간성은 '절대로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없는 타자의 목소리'를, 그럼에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역설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곳 외에는 없다. 죽은 자와도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정의다. 하물며 당신의 배우자는 살아있다.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따스하게 만들어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다. 결혼이란 '이 사람이 뭘 생각하는지 나는 모르고, 이 사람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에게 말을 하고,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이 사람과 서로 신체를 만질 수 있다' 라는 역설적 상황을 살아내는 일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 즐겁게 사는 것을 추구한다면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 결혼은 그런 것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이해도 공감도 안 되지만 여전히 인간은 타자와 공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한 제도다. 혼인은 장례가 그러하듯 인류와 비슷하게 오래된 제도다. 사회 집단은 무수히 존재하지만 혼인 제도가 없는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혼인 제도가 없는 집단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인류학이 가르쳐주는 한 그런 집단은 어느 하나 살아남지 못했다. '타자와 공생하는 능력만이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진리를 이 인류학적 사실이 알려주는 게 아닐까. 당신은 그래도 여전히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지내고 싶다”고 말할 작정인가. 그것은 사실 “나는 인간을 관두고 싶어” “나는 원숭이가 되고 싶어" 라는 말과 같다는 사실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는 원숭이가 되고 싶어”라는 당신의 메시지를 들어줄 존재는 '인간' 밖에 없다. '내게는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가진 생물'만이 당신의 말을 알아 들어줄 테니까.

 

 

 

[제10회 이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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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실상은 어떨까요. 별로 좋은 문장은 읽은 적 없고 좋은 이야기도 적습니다. 주위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혼한 사람이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거의 다수파지요. 특히 이혼으로부터 1, 2년 전후가 가장 힘들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친구와 함께 있든 없든 밥이 맛있는 맛없는 관계없이 덮쳐오는, 이 간헐적으로 샘솟는 상실감은 대체 뭘까 싶습니다. 거리에서 일흔 정도의 노부부를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고서도 여전히 함께 있는 것'의 위대함에 저의 나약함이 겹쳐져 눈물이 납니다.}

 

이번 회는 '이혼'에 대해서다. 이혼은 슬프다. 실로 슬픈 일이다. 그 점은 나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혼하는 사람은 늘어나기만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기분'이 들 뿐만 아니라 실제 통계로도 그렇다. 현재의 이혼율은 2.1(인구 천 명당 이 혼 건수). 결혼율이 6.0. 따라서 결혼한 부부 세 쌍 중 한 쌍은 이혼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미디어의 논조를 보건대 이혼의 증가를 심각하게 문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는 모양이다. 이혼에 관한 사회적 발언 대부분은 “싫어지면 참을 필요 없어요. 얼른얼른 이혼합시다”라는 식의 '생글생글 이혼 상담' 같은 것뿐이다. 인터넷 세상에도 '이혼이라면 맡겨주세요' '이혼 고민 친절 상담' '잘 헤어지기 위한 법률 지식' 같은 사이트가 빼곡하다. 나는 이런 이혼의 '간편화' 경향에 회의적이다. 아무래도 미디어의 대세는 젊은 분들에게 '이혼'을 '대단치 않은 사건'으로 축소하여 보여주려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혼 따윈 별것 아니에요. 결혼한 뒤 '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면 빨리빨리 이혼해서 또 다음 상대를 찾으면 되니까요."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은 것일까? 이 실패한 관계의 신속한 해소에 따른 ‘보다 나은 파트너 발견'이라는 연애결혼 전략은 어딘가에 본질적인 '거짓말'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다.

 

이 연애결혼 전략은 의외로 홈쇼핑의 '2주 안에는 교환·반품 가능' 이라는 조건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동향과 상통한다. '이혼의 간편화'와 홈쇼핑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어느 분이든 아시겠지만 그것은 '리셋 가능성' 이다. 아무리 귀중한 것이라도 써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것과 교환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몹시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어떤 편리한 것에도 반드시 결점은 있다. '리셋할 수 있다'는 것은 '최종 결단이 필요 없어진다'는 뜻이다. '써 본 다음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했던 물건이었는지 아닌지를 깨닫는 일'이 허용된다는 것은, ‘써 보기 전까지는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물건인지 아닌지를 심각하게 곱씹어보지 않아도 좋다'는 태만함이 허용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태만함이 허용될 때 우리는 반드시 정신의 집중력을 아끼게 된다.

 

우리 세미나의 학생 이야기다. 새로운 게임이 나와서 사흘 정도 집에 틀어박혀 게임에 열중했던 그녀는, 끝판을 깬 뒤 수면 부족인 채로 오랜만에 학교에 나와서 멍하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친구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그때 순간적으로 오른손이 '리셋 버튼' 의 위치를 찾았다고 한다. 심오한 이야기다. 이 일화의 흥미로운 부분은 지나치게 게임을 한 탓에 현실 세계에도 '리셋 버튼이 있다'고 생각하여 환각을 느낀 데 있지 않다. '리셋 버튼이 있 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한 탓에 친구에게 부주의한 말을 하는 것을 자제하지 못한 데 있다. 다시 말해 그녀는 리셋할 수 있다는 전제로 무의식중에 '해서는 안 될 말'을 선택적으로 입에 담은 것이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재시작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 으면 자기도 모르게 '정정을 전제한 선택', 즉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동차 면허를 갓 딴 초보 운전자는 결코 중고차를 사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운전이 미숙해서 부딪쳐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 중고를 탄다'는 생각을 하는 한, 드라이버는 무의식적으로 '부딪치자'고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부딪쳐도 괜찮다' 라는 이유로 일부러 구입한 중고차다. 부딪치지 않으면 산 의미가 없다.

 

이야기가 이혼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전부 ‘뿌리가 같은' 이야기다. 당신이 '결혼해보고 안 되겠으면 이혼해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전제로 결혼에 임하는 경우와 '한번 결혼한 이상 이 사람과 평생 백년해로하는 수밖에 없다' 라는 굳건한 결의로 결혼에 임하는 경우 사이에는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당신의 언동에 틀림없이 유의미한 차이가 생겨날 것이다. '리셋 버튼'을 손에 쥐고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야말로 '리셋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특별히 자제심이 없거나 애정이 결핍되어서가 아니다. 버튼이 있으면 누르고 싶어지고 문손잡이가 있으면 돌려보고 싶어진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둘째가는 이혼 대국인데 (1위는 러시아), 나는 그 이유가 그 나라에 횡행하는 '결혼 계약' 에 있다고 짐작한다. 파경을 맞이했을 때의 재산 분할 방식을 정한 계약이 일반화됨으로써 이혼은 더더욱 심리적 저항 없이 손쉽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얄궂게도 그것은 계약이라는 개념이 불이행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약이 성실히 이행되지 않을 경우의 페널티를 상세하게 규정 하는 일은 '계약이 이행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계약 당사자들을 향해 '당신 역시 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수행적 메시지를 무언중에 발신하기도 한다. 1928년의 부전조약은(오, 이야기가 건너뛴다)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한 전쟁은 옳지 않다고 보고 국책 수행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할 것을 맹세"하며 세계 63개국이 조인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 정치가들은 이처럼 몽상적인 조약이 효과적으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서 “자기 방위를 위한 전쟁은 예외다” 라는 해석을 채용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은 이 해석을 근거로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역사상 최악의 전쟁에 돌입했다. 아시겠는가. '자기 방위를 위해' 라는 대의명분은 ‘부전조약'에 대한 일종의 '리셋 버 튼'이다. 당당히 선언하면서도 한구석에 작은 글자로 “이 선언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어겨도 좋다”라고 쓰여 있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한다. 인간이란 그런 구제할 길 없는 생물이다. 그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제 아셨으리라. 사람이 이혼하는 이유는 무의식적으로이긴 해도 이혼할 것을 전제로 결혼 생활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혼하는 사람은 결혼 생활의 사소한 사건 하나하나 속에서 거의 조직적으로 '결혼 생활 유지가 곤란해질 듯한' 옵션을 선택한다(장시간의 노동으로 피폐해진다, 가정 밖의 복잡한 인간관계에 휩쓸린다, 친구에게 돌려받을 길 없는 돈을 빌려준다, 승산 없는 승부에 자진해서 나선다...... 등등). 그리고 그 옵션으로 일어난 부부간의 다툼에서는 “이 정도의 '시련'도 못 견딘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이나 애정은 '진짜' 라고 할 수 없어" 라는 변명을 스스로를 위해 준비해둔다. 거듭 말씀드리겠다. 이혼하기 싫은데도 이혼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이혼은 당사자 중 한쪽 혹은 쌍방의 근면한 노력으로 '이혼에 이르는 길'에 도달한 '골'이다. 한데 왜 이런 무참한 결말을 향해 우리는 발걸 음을 재촉해야 했는가. 그에 대해 설명하기에는 이미 지면이 부족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회에!

 

 

 

 

[제11회 이혼에 대해(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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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이혼에 대해. 사람은 왜 이혼하는가? 지난 회의 마지막 부분에 나는 이렇게 썼다.

 

{거듭 말씀드리겠다. 이혼하기 싫은데도 이혼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이혼은 당사자 중 한쪽 혹은 쌍방의 근면한 노력으로 '이혼에 이르는 길에 도달한 '골'이다. 한데 왜 이런 무참한 결말을 향해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 는가......}

 

우리가 이혼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람의 힘을 그렇게 깔봐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강하게 생각한 일'을 실현시키는 잠재적인 능력이 있다. 우리의 이혼은 배우자 중 누군가가 이혼에 이르는 길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온 결과다. 사소한 대화의 어긋남이나 착각에서 비롯된 미묘한 위화감, 이윽고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가시 돋친 말, 어색한 침묵과 때때로 그것을 깨는 성난 목소리로 점철된 '결혼 생활 최후의 나날’, 이혼 신청서에 도장을 찍을 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얼어붙을 듯한 공기...... 우리에게는 그런 장면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이 우리를 생각했던 바로 그 장소로 데려간다.

 

수험생이 종종 책상 앞에 '필승 ○○대학!' 이라고 큰 글씨로 써 붙여놓는 경우가 있다. 이것에는 나름대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글씨를 보다 보면 점점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이란 바꿔 말하자면 '구체성을 가진 망상' 이다. 수험 교실의 긴장된 공기나 시험이 끝나 허탈함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서 본 풍경, 합격 발표날 마당에 피어 있던 매화의 향기 등을 수험생이 자기 방 책상 앞에서 턱을 괸 채 생생하게 망상’할 수 있게 되면 합격 확률은 상당히 높아진다. 그 망상'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수험 공부와 몇 개월 뒤의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아서 따분한 현실에 '즐거운 미래의 선금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미래는 자신에게 그 미래가 도래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선택적으로 찾아온다. 그런 법이다. 이를테면 내가 일본 수상이 될 가능성은 제로지만(이 점은 분명히 단언할 수 있다), 이는 나의 능력이나 자질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다(약간의 치명적인 결함' 이라면 있지만). 그게 아니라, '일본 수상이 되기 위해 내가 밟아야 할 이런저런 수순이나 절차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나로서는 고역이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삼류 학자가 수상이 되기 위해 밟아야 할 절차라면...... 일단 미디어에 빈번히 출연해서 얼굴과 이름을 팔고, 어떤 정당의 후보자 선발 오디션에 응모하고, 응원해주는 후원 조직의 간부에게 머리를 숙이고, 선거 차량에 타서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선거사무소에 다루마 인형( * 달마 대사의 좌선 모습을 본뜬 인형. 소원을 빌면서 먼저 한 쪽 눈동자를 그려넣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다른 쪽 눈동자를 그려 넣는 풍습이 있다.)을 장식하고...... 이 부근까지 상상한 데서 인내심의 한계가 온 내가 수상은커녕 중의원의 의원조차 될 수 없는 이유는 나한테 정치 센스가 없기 때문도, 인심 장악술이 없기 때문도 아니다(실은 꽤나 있다). 그게 아니라, 그 직위에 오르기 위한 길'을 상상하는 데 내 나약한 상상력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지금 일본에서 정치가가 될 수 있는 자는 선거사무소의 다루마 인형에 붓으로 눈을 그려넣거나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볕에 탄 얼굴로 만세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서 지속적으로 희열을 느끼는 사람뿐이라는 뜻이다. 조지 부시가 그 정도의 재치로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는 ‘아버지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딱히 조지 소년이 아버지 곁에서 통치의 핵심에 관한 제왕학을 배워서가 아니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밟아야 할 수순'을 일상적인 풍경으로 보면서 자랐기에, 그 과정을 담담하게 걸어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특별히 고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이르는 절차를 반복해서 그려보고, 그 길을 당연하다는 듯 걸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명확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이야기가 퍽 다른 길로 샌 것 같지만, 여기까지 읽었다면 대체로 갈피를 잡으셨으리라. 이혼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긴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작품이다. 우리의 이혼은 우리가 '이혼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게다가 그 상상으로부터 일종의 피학적인 '쾌감'을 얻은 결과다. 정년퇴직 후 갑자기 아내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서 남편이 기절초풍한다...... 이런 중노년 이혼이 최근 몹시 많다. 이런 종류의 이혼은 별다른 다툼 없이 협의가 척척 이루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사례에서는 아내가 '불평 하나 없이 정숙하게 자신을 섬겨온 내가 갑자기 이혼 이야 기를 꺼내면 저 바보 남편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뒤로 나자빠질까......'라는 망상을 몇 십 년에 걸쳐 키우며, '이혼 시나리오'의 세부까지 묘사한 집필로 날마다 어느 정도 희열을 얻었기 때문이다. 세부까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그렇지 않은 미래보다 실현될 가능성이 명백히 더 높다.

 

오토바이를 운전한 적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했겠지만, 코너링은 '코너를 깨끗하게 빠져나갔을 때의 체감'을 생생하게 예감할 수 있을 때 깔끔하게 해낼 수 있다. 반대로 클리핑 포인트(* 차가 코너를 돌 때 타이어가 코너 안쪽으로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지점.)에서 뒷바퀴가 주르륵 미끄러지면...이라는 부정적인 상상을 하면 실제로 뒷바퀴가 미끄러져 무서운 일을 겪게 된다.

 

사람의 몸은 실시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꼭 릴이 낚싯줄을 감아올리듯이 '미래'가 '현재'를 감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윤곽이 선명한 미래상'을, 말하자면 '청사진' 으로 골라서 그 밑그림대로 시간을 베껴나간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미래상을 반복해서 상상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그 상상의 실현을 향해 곧바로 돌진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혼에 이르는 길을 내달리는 이유는 물론 이뿐만이 아니다. 특히 남녀 관계에 관한 한 우리는 어째서인지 늘 ‘최악의 해석'을 고르는 경향이 있다.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은 것이나 사소한 착각, 별것 아닌 감정의 어긋남을 우리는 곧바로 '이별의 전조가 아닐까 의심'한다. 이 시기와 의심은 사랑이 '완벽' 하기를 바라는 성실한 남녀 사이에서 보다 격해진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여자 친구가 남자 행인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있을 뿐인데도 그 장면을 멀리서 본 남자친구가 '아, 나 몰래 저런 남자와 사귀고 있었구나......' 라고 멋대로 망상해서 단숨에 헤어지자는 이야기에 돌입하는 야단법석이 질리지도 않고 반복된다. 하지만 나는 이를 '소란' 이라며 웃어넘길 수 없다. 진지하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 그 사랑이 지나치게 깊은 나머지 '어떤 사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해석'을 번갈아 망상함으로써 사귀었다 헤어졌다 하는 것은 예로 부터 연애 이야기의 설화적 정형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해석'으로 인해 생기는 어긋남과 클라이맥스에서의 오해 해소는 셰익스피어 연애극의 필살 패턴이다(십이야도 「한여름 밤의 꿈도 로미오와 줄리엣』도 '오셀로도 모두 마찬가지)

 

남녀 관계에서는 상대의 행동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변화를 느꼈을 때, 그것을 일단 ‘애정이 사라지고 있는 조짐'으로 해석하는 편이 아마도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평온한 마음으로 있기보다 사소한 계기로 절망하기를 선호한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를 나는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인간은 '그런 존재'다.

 

나는 여기까지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미래에 대해 명확한 상상을 하는 사람은 그런 미래를 반드시 불러온다. 이것이 첫 번째 명제. 남녀 관계에서 상대가 하는 '이해 불가능한 행동'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해석'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두 번째 명제.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우리 중 누구도 연애의 종말을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다. 우리는 상대의 어떤 행동을 보는 '아, 이제 끝이다' 라고 믿는 데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믿음을 확실히 실현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데서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왠지 암담한 결론이 나와서 참으로 면목 없지만, 그렇게 낙담할 필요도 없다. 여러분은 이 '리얼하고 쿨한 현실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면 되니까. 우리는 연애에서도 결혼에서도 반드시 '나쁜 쪽으로 방향키를 돌리는' 습관이 있다. 그렇다면 그 선천적인 '버릇'을 언제나 계산에 넣고 운전하면 된다. 러브 라이프에서 반성이 없으면, 우리는 반드시 파트너의 발언을 곡해하고 그들의 무작위한 언동에 대해 최악의 해석을 내리며 사랑의 종말이 눈 앞에 다가왔음을 확신하여 끝을 재촉하려 든다. 그리고 그렇게 쿨하게 행동하는 자신에 대해 (어리석게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상황보다 선수를 치고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치명적인 착각이다. 우리가 파국을 향해 속도를 올릴 때, 사실 우리는 사고의 자유도 상상력도 빼앗겨 '강제로 그렇게 망상' 하게 된다. 사랑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잘 이해되지 않은 언동'에 손쉬운 해석을 적용하지 않는 일이다. '나는 이 사람을 잘 모른다(하지만 좋아한다)'라는 상쾌한 체념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책, 거리의 현대사상. 우치다 타츠루 지음.

 

 

...

 

예전에 쓴 글, 여기다 옮김. 원글링크.

 

https://m.idpaper.co.kr/counsel/item/item_view.html?cnslSeq=726402&rurlList=https%3A%2F%2Fm.idpaper.co.kr%2Fcounsel%2Fitem%2Fitem_list_my.html%3Fpage%3D3%26amp%3Btype%3D1%26amp%3BschTitle%3D%26amp%3BschTitleBk%3D

 

 

10개의 댓글

2022.05.27

잘 읽었습니다!

재밌네요.. 작가의 사견도 들어가 있어서 부드럽게 읽히기도 하구..

1
2022.05.27
@HeadTax

장문의 글을 다 읽어주신 분이 한 분이라도 있어 보람있슴다

0
2022.05.28

너무 졸려서 나중에 보려고 스크랩 한다.

5분의 1 정도 읽었는데 통찰력이 남다르다는걸 느꼈음

1
2022.05.28

하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평소 결혼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과 많이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어쨌든 프로포즈의 순간에는 "이 결혼은 앞으로 우리에게 고난이 될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거야.."라는 말보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무지무지 행복할 거야-!"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까 사실 결혼의 쾌락에 대한 환상이나 목표의식이 어느정도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개로 이혼에 대한 작가의 생각에 실로 동의합니다만

한편으로 너무 이혼을 무겁게 바라보는 사회에서는 이혼남녀들에게 과도한 색안경이 끼워지는 것 같고...

그로 인해 정말 이혼을 택해야 하는 사람들이 망설이게 하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이혼은 분명 잘못된 선택에서 개인의 삶을 구제하는 유일한 해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혼에서의 선택은 아무리 신중을 기하더라도 결코 결과를 확신할 수 없기에 그 누구더라도 이혼이 필요한 순간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고요.

 

하지만 역시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문화가 사람의 심리적 문턱을 낮춰버리는 게 결혼생활 자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ㅠ.ㅠ...

무언가를 얻으면 무언가를 잃는 관계에 있는 것 같네요... 균형이 참 중요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발췌글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은 '사람의 몸은 실시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꼭 릴이 낚싯줄을 감아올리듯이 '미래'가 '현재'를 감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입니다.

실시간으로 통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깨부수면서도 미래를 꿈꾸고 실현시키는 능력을 부각하는 근사한 문장이에요.

 

여러모로 생각을 정리해보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네요.

좋은 글 감사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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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8
@싸우지마요

네, 저와 똑같은 글귀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시네요. 저도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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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8

너무재밌게잘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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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8

일단 빠르게 한 번 읽었는데 재밌는 시각인 것 같음

천천히 다시 한 번 읽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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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8

이름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예전에 읽으려고 샀던 다른 책의 저자네. 그 책도 다 읽지 못했지만 이 글은 재미있어서 책 사러가봐야겠어ㅋㅋ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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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9

인간성을 만드는게 불쾌한 고난이고 사랑의조건이 상쾌한 체념이라는게 진짜 가슴에 와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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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30

무릎을 치면서 읽었습니다. 대단한 책이고 정말 좋은 발췌네요. 책도 바로 구매했습니다. 소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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