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포기하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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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단(畵壇), 풍차와 돈 키호테. 귀스타브 도레의 작품에 색을 입혔다. 그림이 시끄러워 보이긴 처음이다>

 

돈 키호테(Don Quixote)는 얼뜨기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사를 동경하다 못해 기사 그 자체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부푼 꿈을 안고서 모험을 떠났다. 하지만 한량으로 60줄이 다 되도록 놀고먹은 양반이 어떻게 기사 행세를 한단 말인가. 더욱이 돈 키호테의 활동 무대는 17세기, 기사 계급이 몰락한지 200년도 더 된 시절이었다. 때문에 돈 키호테의 기사 노릇은 시대착오적이었고, 그 자신의 미숙함과 망상증이 맞물리면서 엉뚱한 기행을 거듭 낳았다.

 

양치기들을 급습했다가 두들겨 맞기도 했다. 이발사를 윽박질러 고작 찌그러진 놋쇠 대야를 강탈하기도 했다. 묘약이랍시고 만들어 마신 꿀꿀이죽에 갖은 고생도 했다. 그러나 돈 키호테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풍차에 달려든 사건일 것이다 : 콘수에그라를 지나던 돈 키호테는 불현듯 서른 채가 넘는 풍차를 노려보더니 사악한 거인 무리로 단정 짓고는, 이들을 단신으로 정벌하려 했다. 어리숙하긴 해도 충직했던 종자 산초 판사(Sancho Panza)가 "그건 풍차예요, 이 양반아 !" 하며 만류했지만, 돈 키호테는 "못된 마법사가 네 눈을 속이는게야 ! 하지만 진정한 기사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도다 !" 라고 받아쳤다. 주저 없이 풍차를 향해 돌격한 돈 키호테는 당연하게도 날개에 얻어 맞고 나가떨어져버렸다. 이 일로 말과 본인이 다친 것은 물론, 하나 뿐인 창자루마저 부러져 기사로서의 체면이 잔뜩 구겨지고 말았다. 산초가 "풍차랬잖아요." 하고 나직이 이죽거리기도 했고.

 

풍차를 무찌른 사건은 소설 「돈 키호테」의 1권, 첫 챕터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때 혼쭐이 난 영감쟁이가 만일 정신 차리고 집에 돌아왔더라면, 평생 술안주 삼을 경험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 키호테는 이후로도 계속 유랑했고, 가는 곳마다 온갖 말썽을 일으켰다. 해당 소설의 저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는 이런 사고뭉치의 무모한 일대기를 소설로 엮으면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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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세조(世祖) 유수(劉秀), 문숙(文叔). 피폐해진 천하를 다시 수습하고 한 황실의 명맥을 이었기에 광무제라는 시호를 얻었다>

 

왕망(王莽)이 천하를 장악하고 신(新)나라를 개창한지 얼마 안 되어 전국에 기근과 재해가 잇따랐다. 하지만 왕망은 구휼에 소홀했고, 민생과 하등 상관 없는 궁정 사업에만 열을 올릴 뿐이었다. 또한 왕망의 외교적 망동에 흉노, 고구려 등이 크게 반발하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내외의 불안이 이다지도 깊어갈 동안 왕망은 정신 못 차린 채 전횡을 일삼았다. 나라 꼴이 엉망이니 중원에서는 녹림군과 적미군처럼 민도들이 크게 융성했다. 이들 무리는 왕망이 파견한 토벌군을 격파하며 각각 형주와 연주에서 급격히 팽창했다. 재미있게도, 도적떼에 불과한 두 군단은 구성원끼리 상부상조하며 엄정히 치죄하는 법률을 수립해 기강이 확고했던 반면, 신나라 토벌군은 가는 길마다 백성들을 약탈하거나 적전 도주하는 등 대단히 문란했다. 이러니 날이 갈 수록 조정을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지기만 하고 백성들의 이탈은 가속됐다. 그로 인해 온 천하에 반군이 들끓었다.

 

유수 또한 난세를 틈타 기의한 반란군 수장이다. 유수는 본래 한고조 유방(劉邦)의 혈통이나, 가계가 오래 전에 쇠락했고 부모 마저 일찍 여의어 쌀이나 팔러 다니는 신세였다. 그러나 진중하고 성실했으며 식자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는 등 명사로서의 품격만은 간직했다. 이윽고 유수의 형 유연(劉縯)이 형주에서 궐기하자, 유수의 운명도 바뀌었다 : 유연은 알고 지내던 협객들과 형주 사람들을 선동해 관리를 죽이고 용릉군(舂陵軍)이라 이름한 민병대를 창설한다. 사람들은 반역이 두려운데다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유연이 군을 일으키자 "유연이 사람 잡네 !" 라며 동참하길 꺼렸다. 그런데 유수가 가담했더니 그의 인품을 알고 있던 젊은이들도 대거 뒤따르면서, 용릉군은 마침내 약 8천 명의 규모로 결집할 수 있었다.

 

용릉군은 우선 인근에서 가장 강성한 녹림군과 연합하여 왕망의 폭정에 항거하기로 했다. 이 때, 유수는 탐탁지 않아 하는 녹림군 사령관들에게 유 씨 일가의 재물을 있는대로 긁어모아 주었다고 한다. 천생 도적떼들이라 그런지, 녹림군은 물자를 받고 나서야 연합에 응했다. 이들은 장안(長安)의 황궁으로 진군하다가 토벌대와 만나 교전했는데, 첫 전투부터 대패를 당하고 만다. 애초에 상대는 남양(南陽) 태수 견부(甄阜)가 이끄는 10만 대군이었고, 유연 · 유수 형제의 병력은 녹림군까지 합쳐도 5만이 채 안 됐다. 게다가 정규군이 아닌만큼 기량과 병장기 수준도 형편 없어서, 오죽하면 지휘관인 유수는 타고 다닐 말조차 구하지 못해 밭 갈던 소를 끌고와 탔을 정도. 이런 오합지졸들이었으니,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유연과 유수 형제는 포기하는 대신 심기일전하여 약점을 보완했다. 이들은 손절 치고 떠나려는 녹림군 수괴들을 일일이 붙잡아 설득하고, 중구난방이던 지휘 체계를 가다듬어 무장 집단에 걸맞도록 정비한다. 또한 서전을 말아먹어 바닥까지 떨어진 사기를 증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엿본 유연 일행은 다음 전투에서 보란듯이 대승을 거두었다 : 신야(新野)에서 토벌대와 대치 중이던 용릉군은 외방의 녹림군까지 모두 불러들여 장기전에 대비하는 척 하다가, 야밤에 적진을 기습해서 적장을 죽이고 군수품을 모조리 노획한다. 이 전투로 신나라 군대는 2만 명이 전사했고, 남부가 민도들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형세가 대단히 위급해졌다. 반면 녹림군은 세력이 더욱 커져서 이 시기를 즈음하여 10만 명까지 불어났고, 중원으로 진출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당황한 왕망은 기세등등한 녹림군을 수도의 남부 요지인 완(宛)에서 틀어막기 위해 재차 군대를 보냈지만, 이들도 유연 · 유수 형제에게 걸려 피떡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을 구원하지도 못해서 완은 녹림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그야말로 유 씨 형제의 과단성과 대담성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이쯤 되자 무지렁이 촌부들이 모인 녹림군도 천하 대세가 기울었다는 판단에서 다음 행보를 취한다 : 녹림군 간부들은 출신과 규모, 사적 교분 등을 이유로 분파를 나누어 이합집산했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도적떼스러운 운영 방식이었다. 그러나 한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숫자도 엄청 늘었으며, 민심까지 끌어 모은 지금은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굴다가 각개격파 당하기 십상이었다. 이에 녹림군은 전통적으로 황제 가문이었던 유 씨 중에 명사를 내세워 천자로 받들고, 아예 한실을 재건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천자 후보로 거론된 사람들 중에 유연도 있었지만, 녹림군 측에서는 유능한 유연보다 훨씬 다루기 편할 것이라는 생각에 어딘가서 유 씨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이윽고 그 사람이 모두의 지지를 받아 녹림군의 천자로 추대되니,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등극한다. 이후 경시제가 임한 세력은 명목상 한나라를 칭하였으므로 구분을 위해 현한(玄漢)이라 한다.

 

왕망은 반군들에게 본때를 보이고자 43만 대군을 앞세워 현한군의 후방인 곤양(昆陽)을 쳤다. 하필이면 현한군은 완을 공격하기 위해 병사란 병사는 모조리 차출해서, 곤양에 남은 병력이라곤 8천 명이 전부였다. 단순히 계산해도 50배가 넘는 규모인데,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당시 곤양 성 수비대장이었던 유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어차피 성을 버리고 퇴각하더라도 완과 곤양에서 협공 당해 궤멸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도리어 성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기세에 흔들려 항복하려는 장수들을 일갈하고는 결사항전 태세에 들어갔다. 유수는 원군을 청하기 위해 직접 기병 12명을 데리고서 적진을 뚫고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한군을 탈탈 털어봤자 유수에게 주어진 구원병은 3천 명이 전부였다.

 

여전히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인데도 유수는 곤양 성으로 되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감하게 행동했다 : 그는 왕망군의 주둔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완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곧 현한군이 몰려오리라는 거짓 소문을 적진에 널리 퍼뜨렸다. 이로 인해 왕망군은 사기가 바닥나서 군심이 동요하고, 반대로 곤양 성 안의 현한군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후 유수는 은밀히 자리를 옮긴 뒤, 별안간 한 줌도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적의 본진을 향해 돌격했다. 번개 같은 기습에 당황한 왕망군이 맞서 싸웠지만, 유수의 용맹에 짓눌려 사령관 왕심(王尋)이 전사하고 본대는 궤멸 당했다. 이 소식은 유수의 교란 공작만큼이나 빠르게 퍼져서, 신나라 군대는 삽시간에 와해되었다. 성 안의 수비군도 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뛰쳐나와 왕망군을 때려잡았고, 혼비백산한 43만 대군은 자기들끼리 도망 다니다가 강에 빠져 죽고, 밟혀 죽고, 잡혀 죽는 등 처참하게 무너졌다. 훗날 곤양대전으로 기억되는 싸움이었다.

 

연이은 역경에 용감하게 맞서며 대활약한 유수 ! 이런 그에게 슬슬 작은 영광이나마 허락했으면 좋으련만, 아직 운명의 시련이 더 남아 있었다 : 경시제는 뛰어난 전공을 세워 입지가 대단히 높아진 유연 · 유수 형제를 부담스러워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본래 녹림군 소속도 아니었고, 특히 유연은 자신과 황제 자리를 놓고 경합했던 사이 아닌가. 장차 그들의 명성이 자신을 능가하면 위험한 야심을 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시제는 유 씨 형제를 숙청하기로 마음 먹고, 먼저 유연부터 시덥잖은 핑계로 사형에 처했다. 또한 유수도 잡아넣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건수를 찾으려 했다. 이에 유수는 형의 죄를 대신 청하며 겸손하게 행세했고, 유연이 죽자 상중에도 상복을 입어주지 않았으며, 태연자약하게 다른 사람들과 교류했다고 한다. 물론 연좌되지 않기 위한 유수의 고육지책이었을 뿐, 밤이 되면 이불을 깨물고 숨죽여 울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무슨 수로 복수를 하겠는가? 상대는 이미 중원을 차지하고 조정의 지지를 받는 황제인 것을.

 

구실을 찾지 못한 경시제는 유수를 하북(河北) 지방으로 보내서 민심을 살피게 했다. 사실 상 죽으라고 내보낸 셈이었으니, 당시 하북 땅에는 여전히 반란군이 득실거렸기 때문. 하지만 유수는 위기를 발판 삼아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민심이 경시제를 버리고 유수에게로 향한 덕분이었다 : 경시제는 유수를 내쫓은 뒤 방만해져서, 낙양(洛陽)을 도읍지 삼아 놓고도 곧바로 장안으로 천도하는 통에 쓸 데 없이 소요를 늘렸고, 아무에게나 관직을 남발해서 심지어는 고기를 잘 삶았다는 공로로 요리사에게 장관급 직책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다 늘 술에 취해 있었으며, 간언하는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바람에 충신들이 입도 떼지 못 했다. 반면에 곤양대전 이후 그 능력과 인덕이 널리 알려진 유수는 지방 호족과 관리들, 심지어는 오환(烏桓)족 같은 이민족조차도 지지하고 나섰다. 때문에 단신으로 부임하다시피 한 유수는 자신을 도우러 사방팔방에서 모여든 유력자들을 꾸역꾸역 받아들여, 눈 깜빡할 사이에 세력을 갖출 수 있었다. 반란군들도 유수의 급격한 팽창에 놀라서 속속들이 투항했는데, 일절 처벌하지 않고 모두 포섭함으로써 통 큰 인품을 증명했다. 이런 식으로 유수는 1년만에 대규모 병력을 휘하에 거느린 군벌로 성장하면서 하북을 제패하고 현한의 통제로부터 벗어났다.

 

다급해진 경시제는 유수를 회유하고자 했지만, 유수는 내친 김에 나라를 세우고 제위에 올라 본격적으로 경시제를 적대했다. 낙양에 도읍한 이 나라는 현한처럼 한나라를 계승할 것을 천명했기 때문에 후한(後漢)이라 불리운다. 다시 1년이 지나자 후한은 현한이 차지했던 강역을 모조리 정복했고, 10년이 더 지나자 아예 천하를 평정하여 난세를 종식시켰다. 이례적일만큼 재빠르게 전란을 수습하고 복구 사업에 힘쓴 유수에게, 사람들은 한나라 황실의 명맥을 다시 잇고 중흥을 가져다 온 공로를 기리며 광무(光武)라는 시호를 올렸다.

 

유수가 반란군 수장으로 일어서서 천자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도전으로 가득하다. 형과 함께 기의할 적에 유수라고 무슨 묘수가 있었겠으며, 곤양대전에 임하여서는 유수가 어찌 승리를 확신했겠는가. 하북으로 떠나면서 훗날을 기약하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도전에 임하여서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영광을 누리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이는 운명의 파도를 마주하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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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상장군(上將軍) 지채문(智蔡文), 호간(浩幹). 추상 같은 엄격함과 우스개가 묻어나는 유연함이 모두 느껴지는 영정이다>
 

고려 현종(顯宗)은 강조(康兆)의 난으로 옹립되어 정치적 기반도 불안정한 가운데, 거란이 침입하면서 엉망이 되어버린 고려를 다시 일으킨 명군이다. 본래 사생아였고, 권세가 대단한 강조를 끼고서 통치를 시작한지 2년만에 거란군을 맞닥뜨린 현종은 스무 살 나이에 버거운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다. 이는 그를 호종하며 열성적으로 모신 지채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채문은 경종(景宗) 때 문관으로 출사하여 30년 동안을 조용히 지냈다. 그 사이 경종, 성종(成宗), 목종(穆宗)을 떠나보내고 현종이 즉위하였는데, 성종 때는 지채문의 경력도 일천했고 목종 때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 씨의 집권기여서 달리 할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종 2년, 거란군이 국경을 넘으면서 지채문에게도 막중한 소임이 주어졌다.

 

당시 고려는 이부상서(= 국무총리) 강조의 지휘 아래 30만 대군을 동원해 40만 거란군에 맞섰으나, 통주(通州) 전투에서 대패를 당해 주력군을 일거에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기세를 탄 거란이 곽주(郭州)도 점령하면서, 고려 입장에선 북방 요충지인 서경(西京)까지 잃을 위기에 처했다. 현종은 중랑장(= 대대장 정도)이었던 지채문을 파견하여 서경을 구하게 했는데, 막상 서경 성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알고보니 서경부유수(= 서경 방위사령관) 원종석(元宗奭)을 비롯해 서경 관원들은 이미 항복 채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지채문은 서경 성 북쪽에 매복해 있다가, 거란군 사절단이 항복 문서를 받아 나올 때 들이쳐서 모조리 죽여버렸다. 거란 측이 "전에 보냈던 사절단한테서 왜 소식이 없냐?" 면서 다시 사람을 보냈을 때도 지채문에게 걸려 살아돌아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투항할 길이 막혀버린 서경 성은 별 수 없이 지채문과 함께 싸워야만 했다. 물론 그런다고 없던 병력이 생기진 않아서, 결국 지채문도 몇 번의 전투 끝에 패하여 개경(開京)으로 쫓겨가게 됐다.

 

지채문이 돌아가보니, 고려 조정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이미 많은 장수들과 관리들이 멋대로 이탈했고, 남아 있는 대소신료들도 항복만이 살 길이라며 연일 현종을 압박했다. 오직 예순이 넘은 강감찬(姜邯贊)만은 "이건 강조가 말아먹어서 그렇지, 해볼만 합니다. 우선은 적의 예봉을 피한 연후에 이길 방도를 찾아보소서." 하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이 때, 지채문은 강감찬을 지지하고 나서서 현종의 피난을 청했을 뿐만 아니라, 현종의 경호원이 되길 자처하여 주전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감격한 현종은 그 날 밤, 대세를 거스른 채 두 왕비와 지채문을 데리고 파천(播遷)을 결행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는 점이다 : 고려는 도성 밖을 나서면 임금도 못 알아보는 동네였다. 이는 호족들의 위세가 워낙 막강했던 탓으로, 혈연과 경제적 호혜관계로 세력을 형성하고 사병을 동원해 실효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그들과 중앙 정부는 그다지 살갑게 지낼 수 없었다. 고려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으나, 역부족이어서 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지방 분권적 통치 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당시는 광종(光宗)의 대처분과 성종의 체제 정비를 거친 이후였지만, 여전히 고려 땅의 절반은 호족들 차지였다. 이토록 기반이 굳건한 호족들 영역에 즉위한지 얼마 안 된 현종이 임금이랍시고 행차하면, 호족들이 과연 복종하겠는가. 게다가 현종은 급히 궐을 나서느라 호위병 50명을 겨우 데려 왔을 뿐이고, 그마저도 수시로 도망가서 몹시 초라한 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거란군을 몰아내기 위한 군대의 재정비는 커녕, 현종 자신의 안위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종은 가는 곳마다 업신여김을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현종은 석 달 동안 전남 나주로 약 400km를 옮겨 다니면서 다섯 차례나 피습 당했는데, 모두 인근 지역 유지를 등에 업은 역참과 지방 관원들의 소행이었다. 이들은 떼로 몰려와서 임금을 억류하려 들거나, 거란군이 온다는 거짓말을 꾸며서 겁을 주거나, 심지어는 활을 겨누며 윽박 지르는 등 망발을 부렸다. 하지만 언제나 지채문이 의연히 대처함으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경기도 파주의 역참을 관리하던 병졸들이 무장한 채로 닥쳐오자, 지채문이 말을 타고 활로 쏴서 쫓아냈다. 그들은 야음을 틈타 재차 현종을 습격하려 했지만, 역시 지채문의 반격에 당해 흩어졌다. 경기도 양주를 지날 적에 마주친 관리 한 놈은 임금더러 "너 내가 누군지 아냐?" 더니, 패거리를 몰고와 밤새도록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이에 놀란 신하들이 흩어져 달아날 때, 지채문은 현종의 곁을 지키며 기회를 엿보다가 일행과 함께 도봉사(道峯寺)로 몰래 빠져나갔다. 전북 익산에 이르러서는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마저 반역할 낌새를 보였는데, 지채문이 미리 헤아려보고는 "태조(= 왕건)께서도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포상하셨습니다. 지금처럼 위태로운 시기에 민심을 얻으시려거든, 마땅히 고생하는 신하들을 포상하셔야 합니다." 라고 귀띔했다. 그 건의에 현종이 응하여 남아 있던 16인의 호위병들을 모두 중윤(= 소대장 정도)에 임명하면서 다시금 군율이 바로 서게 되었다. 전북 완주에서는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어전에서 관복도 입지 않은 채 마중을 나오더니, 아예 현종을 붙잡아 가두려 했다. 지채문은 우선 현종을 인근 역참에 모신 다음, 지붕 위에 올라 조용겸과 족당들의 무엄함을 꾸짖으며 혼자서 무리들과 대치한다. 결국 기가 꺾인 조용겸은 현종을 도모하지 못 한 채 포위를 풀고 왕명을 받들어야 했다. 이렇듯 지채문은 활 한 자루와 기개만으로 현종을 무사히 지켜냈다.

 

1011년 2월 말, 거란군은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내몰렸다. 뜻밖에도 서경 성이 함락되지 않자, 거란은 서경을 우회하여 고려의 수도를 빠르게 제압하려는 쪽으로 전략을 선회했더랬다. 하지만 현종이 몽진하면서 그것도 틀어졌고, 양규(楊規)와 같은 불세출의 명장이 자꾸만 배후를 타격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거란 측 수뇌부는 억류해 둔 고려 사절들에게 "너네 왕 어디 있는지 아냐?" 하고 물었지만, "님들 고려 먹으러 왔으면서 땅 크기도 안 알아보고 오셨음? 개경 남쪽으로 땅이 몇 만 리인데 어떻게 잡을거야 ㅋㅋㅋㅋㅋㅋ" 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지칠대로 지친 거란은 이런 얄팍한 속임수에 넘어가, 철수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거란의 2차 고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가고, 마침내 현종도 기나긴 고난을 끝내고 환궁할 수 있었다.

 

현종의 많은 신하들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갈 만큼 위급했던 때, 지채문의 행실은 확실히 돋보이는 면모가 있다. 혹시 지채문이 정치적 모험심이나 공명심 때문에 곁에 남은 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지채문이 한 자리 해 먹을 심산으로 호위를 자청한 게 아니었냐는 말씀이다. 하지만 지채문에게서 나 같은 속물이나 생각할 법한 이해타산적 면모는 도통 찾아볼 수 없다 : 당시 거란군은 현종 일행이 개경을 벗어난지 사흘만에 도착해 성 내를 불바다로 만들었는데, 그만큼 바짝 뒤를 쫓고 있었다는 뜻이다. 왕이고 뭐고 간에, 얼마든지 버리고 도망칠만 했던 셈이다. 하지만 지채문은 현종의 안전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단기필마로 몇 번이나 적도들에 맞섰고, 본인도 장군이었지만 직접 말고삐를 잡으며 마부 노릇을 했다. 특히 혼자서 정찰을 나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 핑계로 달아나지 않고 반드시 현종에게로 돌아왔다.

 

일찍이 현종과 함께 하다가 슬그머니 내뺀 관리가 있었는데, 지채문이 마침 경기도 양주에서 정탐하다가 그와 마주쳤더랬다. 지채문을 알아본 관리는 "오던 길에 도적을 만나 짐을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하며 겸연쩍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지채문은 "네 놈이 신하로서 이미 불충하였거늘, 목을 온전히 건진 것만으로도 족하도다." 라는 말로 싸늘하게 받아쳤다. 이후로도 현종의 피난 행렬에서는 계속해서 이탈자가 발생했지만, 지채문만은 끝끝내 직분을 다 했다. 현종이 만고충신인 지채문을 총애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지채문인들 거란이 언제 물러날지 어떻게 확신했겠는가. 그러나 역경 앞에 선 인간이 그것에 맞서려면 좌절하기보단 의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알았다 : 지채문과 현종이 충남 천안을 지날 적에, 길가에 기러기 떼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 지채문은 기러기 떼를 놀래켜서 솟구치게 한 다음, 화살 한 발로 날아오른 기러기를 쏴 잡았다. 그러고는 현종 앞에 가져다 바치며, "전하, 이렇게 활 잘 쏘는 신하가 전하 곁에 있사온데, 무엇을 두려워 하시옵니까. 아무 걱정 마시옵소서." 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큰 소리로 웃은 현종은 지채문의 궁술과 충절을 칭찬했다. 지채문의 삶으로부터 용기를 깨우친 현종은 일생일대의 시련을 강건하게 견뎌내고, 재차 침입한 거란을 무찌르고 고려의 부흥이라는 대업을 훌륭하게 수행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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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석상. 표정처럼 단호한 의지로 위대한 도전에 임한 사람이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18세기 중엽 영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금수저에게 최적의 때와 장소를 타고났다는 뜻이다 : 당시 영국은 인도와 아메리카, 호주에 식민지를 차리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우뚝 섰다. 명예혁명과 계몽주의의 여파로 시민들이 봉건적 사회 질서를 거부하고, 입헌군주정을 수립한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산업혁명의 도래까지 맞물리면서, 유산 계급인 젠트리(Gentry)들이 영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즉, 돈이 쏟아지는 나라의 돈이 넘쳐나던 시절, 돈을 쓸어담는 집 도련님이시란 말씀이다.

 

엘리트답게 윌리엄은 명문대를 나와서 일찌감치 정계에 몸을 담는다 : 윌리엄은 아직 학생이던 21살에 고향 헐(Hull)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윌리엄이 자그마치 8천 파운드(= 오늘날 기준 약 15억 3천만 원)를 뿌려 유권자들을 매수한 결과였다. 주민들이 대부분 도시로 떠나는 바람에 비어버린 촌구석에선 이렇듯 막걸리 선거가 잘 먹히는 법이었다. 대신 4년 뒤 영국에서 가장 큰 지역구인 요크셔(Yorkshire)에서도 하원으로 나섰는데, 이 때는 타고난 재치와 뛰어난 언변으로 청중을 사로잡아 당당하게 재선될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내각의 다수를 차지하던 휘그(Whig) 당이 아닌 무소속 의원으로 출마했는데, 그만큼 많은 이들로부터 촉망받는 유망주였다는 반증이다. 

 

인생 게임에서 이렇게 좋은 손패가 떳으면 그대로 누리기만 했어도 될텐데, 윌리엄은 28살 나이에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노예 제도의 폐지를 위해 한 몸 불사르기로 한 것이다. 직전까지 윌리엄은 상류층 자제들이 으레 그러하듯, 사교 클럽에서 술 마시고, 노름 하고, 극장이나 쏘다니는 등 헤프게 살아왔다. 오죽했으면 노래 잘 부른다는 소문이 나서 황태자 신분이던 조지 4세도 "그가 노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다."고 칭찬했을 정도로 잘 놀았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지난 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사회 악인 노예제의 근절을 목표로 정치 인생을 내걸기로 맹세한다.

 

문제는 그 시대 영국이 노예 무역에 기대는 정도를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을 만큼 호기로운 야망이었다는 점이다 : 영국은 유럽 국가 중에서 뒤늦게 노예잡이에 뛰어들었으나, 18세기 즈음에는 노예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100년 동안 약 300만 명 가량의 노예를 수출하고 있었다. 18세기 중반의 성인 남성 노예는 40파운드(= 대략 900만 원)의 가격이었고, 마진율이 약 9% 정도라고 했으니 영국 입장에선 노예만 팔아도 짭짤했겠지. 하지만 아프리카로부터 구해오는 노예들은 산업적으로 쓸모가 많아서, 그 자체로도 타국에 잘 팔리는 상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식민지 곳곳에서 커피 · 담배 · 목화 ·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이렇게 길러낸 작물들은 다시 영국이 노예 판 돈으로 사들이고, 유럽과 본국 시장에 팔아서 남겨 먹었다. 말하자면 흑인 노예들은 일면 영국의 산업 동력원에 해당하는 셈인데, 이걸 포기하자는 소리가 영국에서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더구나 윌리엄 본인도 할아버지가 노예들 굴려서 일군 설탕 정제업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인데 말이다.

 

1789년에 윌리엄은 최초로 노예 무역 폐지에 관한 법령을 입안했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1791년에도 똑같은 법을 제안했는데, 역시 부결. 의원들은 물론이고 웬만큼 사는 사람들 중에 노예 무역과 관련 없는 사람을 찾기가 힘든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대토지를 소유한 농장주와 노예상 등 직접적인 관계자들은 아예 활발하게 로비를 벌여 윌리엄을 압박했다. 이윽고 옳다는 이유만으로 옳은 행동이 일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윌리엄은 전략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윌리엄은 알고 지낸 전직 노예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언론에 흘렸고, 노예들이 실린 무역선을 보여주어 끔찍한 실태를 낱낱이 고했다. 또한 흑인 노예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풍자화, 시와 노래 등을 널리 보급해서 일반인들이 노예 무역에 관심 갖도록 했다. 여러 사회 단체들을 설립 · 후원하였는가 하면, 그들의 연명 청원서를 엮어다가 의회에 제출하여 로비에 대항했다. 특히 1791년에 일어난 서인도산 설탕 불매운동은 인상 깊은데, 정치권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타겟 삼아 성공을 거둔 캠페인이었기 때문이다 : 불매운동 주최 측은 가정의 건강과 윤리 의식을 책임지는 여성들에게, "서인도 노예들이 혹사 당해 가며 생산한" 설탕을 소비해서야 쓰겠느냐는 식으로 호소했다. 그러자 20 ~ 30만에 달하는 영국인들이 불매운동에 참여하여 서인도산 설탕은 종전의 1/3 밖에 팔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노예가 생산하지 않았다고 홍보하는 동인도산 설탕을 썼는데, 서인도산에 비해 3배나 비쌌음에도 주저 없이 구매했다. 이는 시장 논리에 따라 노예제를 포기하지 못한 지주층에게 윌리엄이 대항할 명분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 1792년에는 헨리 던다스(Henry Dundas)가 제안한 노예 무역의 "점진적" 폐지에 관한 법안이 상 · 하원 의회를 통과했다. 헨리는 당장 노예 무역을 철폐해버리면 노예주들이 편법을 쓰거나 음지에서 암암리에 노예 거래를 계속할 게 뻔하니, 차라리 충분한 의논을 거쳐서 모두가 만족하는 대안을 찾자는 취지에서 이러한 법을 건의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헨리의 의중은 사실 상 노예제 폐지를 반대한 것인데, 명확한 기한을 두지도 않았을 뿐더러 향후 대안을 논의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보수주의를 견지해 온 윌리엄에게 "노예 해방을 운운하는 걸 보니 급진좌파로구나 !" 라는 음해를 가한다던가, 두 번에 걸친 암살 미수 등등 윌리엄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매년 가결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똑같은 법령을 입안했고, 가산을 털어서까지 노예 제도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끊임 없이 뜻을 같이 하는 동료를 모았고, 노예들의 울음 소리를 모두에게 생생히 전했다. 그러는 사이 20년 가까이가 지나, 윌리엄의 가세가 기울고 본인 건강도 해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다 때려치고 집에서 놀고 먹을만도 한데, 윌리엄은 한결 같이 노예제를 규탄했다. 그러한 노고가 결실을 맺어, 1807년 3월 25일 윌리엄이 12번째로 입안한 노예 무역 폐지에 관한 법률이 드디어 통과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윌리엄을 지켜본 영국 민중들이 화답한 것이다.


이미 노예 무역을 막은 것도 큰 업적인데, 윌리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노예제의 완전한 철폐를 위해 분주히 노력했다. 또 다시 의회에 매 해마다 노예제 근절에 관한 법률을 제안하고 탈출 노예 지원 협회를 설립하는 등 지난한 싸움을 이어갔다. 몸을 돌보지 않아서 1825년에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 해방을 위한 사회 운동에는 반드시 참가했다. 이번 윌리엄의 모험 역시 끝을 보기까지 20 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마침내 1833년 7월 26일 영국은 윌리엄의 제안대로, 공식적으로 노예 제도를 불법화 하고 모든 노예를 해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종전의 노예주 3천 가구에게는 보상금으로 2,000만 파운드(= 약 2조 7천억 원)를 지불하기로 했다. 몸져 누워 있던 윌리엄은 그 소식을 접하고 만족 속에서 사흘 뒤 숨을 거둔다.

 

윌리엄은 어째서 사력을 다 해 노예들을 돌봤을까? 무엇이 그를 노예 해방에 헌신하도록 했을까?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이를 종교적 깨달음에서부터 찾고 있다 : 윌리엄이 젊은 날 지역 순방을 다녀온 후,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을 느끼고 스스로 본받고자 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신앙인이 아닌 나로서는 이러한 설명을 납득하기 어렵다. 윌리엄은 노예들을 자유롭게 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서, 정작 다른 사회적 이슈에는 별로 정성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679년 제정된 신체의 자유권에 해당하는 인신보호청원을 부정적이게 봤고, 중산층 · 빈곤층의 참정권을 신장하는 일은 무지한 자들을 의회에 들이는 도박수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다시 말해, 박애주의적 관점에서 노예 문제를 다룬 게 아니란 말씀이다.

 

사실 그 시기 즈음의 영국에선 노예 제도를 비판하는 게 식자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노예제를 공격하면 도덕적 우월성이 보장되고, 그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높아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영국에선 당론을 가리지 않고 노예제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 독립을 요구하는 미주 식민지 의회에 보수파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우리가 언제 너희를 구속했다고 독립시켜 달라는거야? 너희가 부려먹는 노예들이야말로 독립 시키지?" 라고 답했고, 진보파였던 그렌빌 샤프(Granville Sharp)는 "노예 제도처럼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건 죄악이야. 마찬가지로 영국도 미국을 억압해선 안 돼 !" 라고 호응했다. 이렇듯 표면적으로는 노예 문제를 공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발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한 셈이다. 어쩌면 윌리엄도 비슷한 소리를 해서 여론을 끌어모으려 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그는 1799년, "노조는 우리 사회의 질병입니다."라는 발언으로 근로자들의 기본권 요구를 비난했고, 1815년에는 수입산 곡물에 관세를 마구 매기는 곡물법에 찬동하여 시민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어렵게 했다. 1819년에는 평화 시위 도중 11명이나 죽은 피털루 학살 사건이 발생했는데, 윌리엄은 그 진상 조사를 저지하려 했고, 입막음을 위한 6대 악법의 발의에 기여하는 등 전형적인 엘리트주의 정치인으로서 색깔을 드러냈다. 이렇게 인기 없을 법한 정책에만 손을 댔으니, 뒷심을 모을 필요성도 있었겠지.

 

다만, 노예제의 폐지 자체는 윌리엄이 진심으로 원했던 일인데, 그가 독실한 복음주의 교도였기 때문이다 : 당시 윌리엄의 주변엔 복음주의 신도가 많았고 본인도 영향을 깊게 받아서 심판론을 진지하게 믿었다고 한다. 죄악으로 가득한 영국이 천벌을 받는 것은 이들에게 기정사실이었다. 그 중 노예제는 영국의 가장 명백한 악행으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반드시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 됐다. 이와 같은 신념이 과두정체 정치인의 사고 방식과 결합하면, 윌리엄처럼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이 한 몸 희생해서라도 죄를 사멸시켜야 한다." 는 소명이 탄생한다. 그래서 윌리엄은 의회와 매양 싸우면서 "영국이 위대한 나라로 거듭나려면 하느님의 법을 실천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고, "성경에서는 압제자를 학살자보다 더 큰 죄인으로 본다." 라며 노예들을 풀어주도록 설득했다. 다시 말해, 윌리엄은 정치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 때문에 나라가 망할까봐서 해방 운동에 앞장섰다는 뜻이다.

 

숭고한 동기야 어떻든, 윌리엄이 생애를 통틀어 보여준 용기와 뚝심은 수많은 후예들에게 귀감이 된다. 장장 50년에 걸쳐 도전을 이어나가면서 숱한 장벽과 한계를 뛰어넘고, 기필코 본인의 소신을 관철하고야 만 위인이 몇이나 될까. 윌리엄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영국이 미국보다 30년 앞서 노예 소유를 법적으로 금하게 만들었고, 자기 자신도 구원하여 "내 나라가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기꺼이 황금을 포기했도다 ! 신께서 흡족해 하시리라 !" 라는 환희와 함께 최후를 안겨주었다.

 

Don_Quixote_fighting_windmills.jpg

 

<G.A. 하커, 돌진하는 돈 키호테. 지면을 박차는 로시난테의 발굽과 표적을 노리는 돈 키호테의 창에 망설임이란 없다>


사람들은 돈 키호테의 엉뚱한 면모만 보고 그를 풍차에 달려드는 괴인 정도로 취급한다. 하지만 사실 돈 키호테야말로 인간다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불의에 맞서는데 주저함이 없고, 약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기사도라는 신념을 중시하는 인간성의 모범이다. 순진한 산초를 놀려먹은 영주, 돈 키호테에게 사기를 친 학사, 이웃이 죽어가는데도 유산에만 관심 갖는 마을 사람들 등 작중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비교하면 영웅적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인간을 대표하는 돈 키호테가 끝내 처참히 실패하고, 초라한 죽음을 맞이한다는데 있다.

 

영감쟁이의 소꿉놀이를 그만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은 계략을 써서 돈 키호테와 "하얀 달의 기사"가 마주치게 했다. 하얀 달의 기사는 먼저 돈 키호테를 도발하여 결투를 벌였는데, 사전에 "내가 이기면 그대는 무구를 내려놓고 집에 가서 1년 간 은거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돈 키호테는 자신의 공주가 모욕 당했기에 앞 뒤 잴 것도 없이 덤볐지만, 참패하여 하얀 달의 기사가 요구한대로 귀향길에 올라야 했다.

 

이후 돈 키호테는 약속대로 무기를 일절 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마저 팽개친 채,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를 칭한다. 고향에 도착한 그는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 불리운 알론소"로 소개하며,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망상이나 해대던 작자답지 않게 사리분별이 명확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조카 딸과 이웃들은 알론소가 정신을 차렸다고 안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론소는 심각한 우울 증세를 보이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지경에 처했다. 그토록 팔팔하고 드세던 사람이 산초에게 "내 친구여, 나를 용서하시게. 내가 세상에 아직도 편력기사가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져 그대까지 우스갯거리로 만들고 말았군." 하며 점잖게 사과를 하는 대목에서는 운명 앞에서 체념하는 비통함이 절절히 묻어나온다. 급기야 알론소는 주변인들에게 유산을 나눠주는 등 신변을 정리하더니, 얼마 못 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돈 키호테의 최후는 그가 남긴 여러 이력들만큼이나 기이하지만, 우스꽝스럽기보단 참담하기 그지 없다. 내용을 충실히 따르자면, 그는 하얀 달의 기사와 벌인 대결에서 입은 상처 때문이 아닌, 우울증으로 쇠약사했다. 마실 못 나간 나머지 우울증 걸려서 죽었다는 돈 키호테의 어이 없는 퇴장은 모험 활극 소설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인데, 정 약속을 어기기 힘들었다면 1년 기다렸다가 다시 여행 했어도 됐잖아? 인간다움을 상징한다던 돈 키호테의 마지막은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염세적 주장을 담고 있는 걸까? 물론 그렇지는 않고,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라는 가짜 기사의 소멸과 알론소 키하노의 죽음을 통해 인간다운 삶에 대해 은유하기 위한 전개이다.

 

인간성의 대표답게, 돈 키호테는 결함이 뚜렷한 존재다. 정의로운 기사가 되고자 했던 그의 이상은 실현 불가능하고 허황되다. 한 주먹거리에 불과한 노인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돈 키호테는 여정 내내 무참히 깨어지고, 꼴사납게 실패하길 반복한다. 하지만 반드시 창을 고쳐잡고 다시 일어서지 않던가? 돈 키호테는 인간 본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광인이란 오명을 썼지만, 명백히 가망 없어 보이는 싸움에도 목숨을 걸고 도전했으므로, 사실은 진정 초인적인 용기를 보인 셈이다. 그리고 인간성의 상징인 돈 키호테의 도전과 실패, 재도전의 순환은 「돈 키호테」의 주제의식을 계속해서 짚어준다 : 우리들 역시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끊임 없이 도전해야 한다고.

 

인간은 원래 미숙하게 태어나는 존재다. 옹알이와 걸음마부터 떼어야 하고, 다 커서도 벅찬 일들 투성이라 익히는데 한 세월이 걸린다. 세상사는 그런 인간에게 어찌나 가혹한지, 변화무쌍한 시련으로 자꾸만 사람을 몰아세운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도 없고,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지도 못한 채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으로서는, 하루 하루를 감당하는 것 자체가 위태롭고 불합리하다. 인생이 주식이라면 펀드 매니저들은 진작에 손절 각을 쟀을 것이다. 그러므로, 또 다시 하루를 살아가기로 결심하여 지금에 이른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돈 키호테와 닮아 있다. 수 십 명의 거인에게 주저없이 돌격한 엉터리 기사, 돈 키호테만큼이나 용감한 도전에 임한 셈이다. 따라서 그가 받는 찬사 또한 우리 모두 누려야 마땅하다. 세르반테스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찬양하기 위해 돈 키호테를 지은 것이나 다름 없다.


기사로서의 모험을 계속하는 돈 키호테에게는 불가사의한 활력과 쾌감이 넘쳐난다. 반면, 하얀 달의 기사에게 패하여 칩거해야 할 적의 돈 키호테는 자리보전이 고작이며, 그마저도 버거워서 결국 생을 마감했다. 둘은 한 몸이지만, 어떨 때는 사자와도 맞설만큼 용맹하고 또 어떨 때는 몸져누울만큼 병약하다. 이는 도전하는 자에게 인간다운 삶의 영광과 즐거움이 허락된다는 세르반테스의 위로이자,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는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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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미얀마 군중의 세 손가락 경례. 소설 헝거 게임에서부터 영향을 받은 이 제스쳐는 압제와 탄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여기 또 다른 돈 키호테들이 모였다. 그들 앞에 선 적은 거인보다 강고하고, 사자보다 난폭하며, 하얀 달의 기사보다도 교묘한 강적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돈 키호테와 마찬가지로, 낡아빠친 창 한 자루와 비루먹은 말 뿐이다. 이토록 불리한 싸움에 임하여서, 포기라는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면 제 정신이 아닌 듯한 선택을 했고,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도전을 했다. 세르반테스에 따르면, 영광은 결국 그들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승리와 그에 이르는 고통이 길지 않기만을 빌며, 역사의 책장을 넘기려 한다. 작은 부탁을 해도 된다면, 우리들이 저 용감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부름에 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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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의 댓글

10 일 전

글솜씨 미쳤네:;

1
@산양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글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

0
10 일 전

돈키호테의 길은 때때로 너무 지독하다, 자기 자신을 망가뜨릴 만큼.

 

1
@별빛꽃

그것을 알고도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것이 돈 키호테가 보여준 길이기에, 그 길을 걷는 모두가 영웅적인 용기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0
8 일 전

글먹 가능

씹가능

책을 내신다면 1장 소제목을 나는 왜 이렇게 글을 잘쓰는가? 로 해주세요

1
@도희

격찬해주셔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언젠가 책을 낸다면 좀 더 나은 글과 소제목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다른 글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

0
7 일 전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개드립은 읽판때문에 오는거같아요

1
@kejang

좋게 읽어주셔서 좋은 글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다른 글들과 다른 좋은 분들의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

1
4 일 전

삶 시리즈 좀 더 짧게 다듬어서 에세이집 하나 써봐. 괜찮아류 작가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어처구니 없는 자아성찰 베스트셀러 판에 진물이 나는 요즘 이런 수필이 오히려 자위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미를 당기게 해주는 것 같다. 글이 완벽한 것과 더불어, 생각보다 잘 읽혀서 독자의 지적 허영심을 스무스하게 채워주는 느낌임.

1
@행복한가정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책으로도 만나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우선 개드립 식구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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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글이 그냥 읽히다니. 그리고 이게 왜 유머야? 굿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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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애플치즈팡

제 주관이 많이 들어가서 유머로 분류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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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 전

좋은 글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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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ㅡ치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른 글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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