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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과 삶과 관계에 대한 잡설

98235f35 2019.06.20 124

고유정이 경계선 성격장애로 보인다는 말이 나오더라.

차마 말로 못 할 끔찍한 일을 저지르면서도 태연하게 흉기를 사고 포인트까지 적립받거나, 범행이 끝나니 다시 환불받으러 간다거나, 범행 저지른 직후에 한숨 자고 나서 멀쩡히 현 남편이랑 데이트까지 다녀온다거나...

상식으로 보면 천인공노할 짓이다. 그 이전에 사람이라면 느껴야 할 어떤 무언가가 결여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겠지? 사람이 그렇게 사람을 끔찍하게 죽여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러고도 밥이 넘어가고 잠을 잘 수가 있나? 나도 여태 살면서 주입받은 상식으로는 그런 행태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근데, 그거 가능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물론 사람을 죽이거나 해를 끼치진 않았다. 나의 경우에는 나 자신을 해쳤다. 약이 되었던, 칼이 되었던, 밧줄이 되었던간에. 일단 저지를 단계까지 왔다면 아무것도 아니란 듯 일을 해치우고, 깨끗이 자리를 정리하고 놀란 사람들이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마주한다. 난 괜찮아. 또 이래버렸네? 많이 놀랐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그에 필요한 물건들을 살 때 어떤 표정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아마 어딘가 공허한 표정에 결연한 눈빛, 축 처진 어깨, 그 외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한 아우라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은 다르다. 해맑게 웃으며 자기 허파를 그을릴 번개탄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경계선 성격장애인들이다. 나의 단편적인 경험으로 모든 경계선인을 미루어 판단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아마 실제와 그렇게 다를 것 같지도 않다. 고유정이 그랬고, 내가 그랬고, DSM에서도 이러한 삽화를 보인다고 하고 있으며, 날 요모저모 뜯어본 의사들이 그렇댔으니까.

앞에서 웃으며 해괴한 일을 벌일 수 있다고 한 것이, 이 사람들에게 감정이 없다거나, 희미하다거나, 또는 무언가 도착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본질은 자신을 숨김에 있다.

곧 내가 얼마나 끔찍하고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던간에, 적어도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만큼은 정상적으로 연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밖으로 보이는 감정을 능란하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나같은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었거나, 정신병원에 갇혀있을거다.

물론 그런 감정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면 위에 써놓은 장황한 이야기들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숨기는 것은 단지 숨기는 것이다. 설거지를 하기 싫다고 해서 그릇들을 전부 싱크대에 몰아넣고 커다란 뚜껑을 덮어놓으면 어떻게 될까? 당장은 후련하겠지만 썩어문드러진 음식찌꺼기 냄새와 그에 홀린 벌레떼들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속에서 갉아먹힐대로 갉아먹혀 그 속을 내보일 지경이 되면 때는 이미 늦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집안은 난장판이고, 또 한 번 그렇게 주변은 고통받는다. 그러면 그 상황을 나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더 크고 좋은 덮개를 갖다가 이중 삼중으로 꽁꽁 싸매둔다. 근본이 되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란 아주 어려운 문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해결할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온갖 정신과적 약물과 상담,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는 내 모습에 얼굴을 감싸쥔 채로 울고있던 엄마를 본다면 누구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태어났고, 지금까진 어떤 방법을 써도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져왔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해왔던대로 내 자신을 깊이 밀어넣는 수 밖에 없다. 적어도 얼마간은 더 버틸 수 있으니까, 그 동안에는 '멀쩡하게' 살 수 있으니까.

근본적으로 내가 느끼는 세상은 몹시 단편적이다. 세상이 내게 다가와서 제 좋을대로 하고는 가버린다. 사람이 좋아서 친해지려 시도하지만, 내밀한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손가락질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름대로 고쳐준답시고 날 흠씬 두들겨팼다. 때로는 주먹으로 맞았지만, 더러는 말로써 베이고, 혐오로써 찢겨졌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도 난 참 병신같고, 내가 다른 사람이래도 날 멀리 하겠다. 이윽고 아무도 옆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으면 이제는 혼자 우울해하다가 죽던지, 아니면 죽을 시도를 하던지, 둘 중 하나겠다. 존재할 이유가 없어져버렸으니까.

그런 나날이 지속되다보니 어느 정도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일 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완벽하지 않다. 내게는 없는 것을 지어내다보면 어디든지 허술한 부분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허술한 부분을 들키고 다시금 보이기 싫은 모습이 드러난다면 또 다시 나는 혼자가 되는거다. 앞에서 말한 싱크대 덮개가 바로 이것이다. 

일종의 사회적 가면, 물론 누구든지 그런 페르소나로써 살아가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가면은 회사, 군대와 같은 곳에서만 쓰는, 집에 오면, 내 사람들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벗어던져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 가면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어디든지 항상 나를 연기해야 하고, 모두가 나를 그 모습으로 알고 있다. 겉거죽을 내려놓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언제고 어디서고 다시금 혼자 될 거라는, 버려질 거라는 그런 생각이 나를 휘감는다. 결국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항상 그런 생각을 가짐에도 멀쩡한 모습을 내보이니,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초연하고 평온한 듯이 굴 수 있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거겠다. 일상이 그토록 괴롭고 공허함에도 웃음 지을 수 있다면, 누군가를 죽였을때도, 내 손목을 그었을때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일상에서 당연히 하던 것을 끝마쳤다는듯이 그렇게 굴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어쩌면 그것이 이미 나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로 일상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 언젠가 나도 저 여자처럼 무언가를 저질러서 대서특필되고 조리돌림을 당할까? 아마도 그 전에 내가 내 스스로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아마도 먼저 죽은 다른 이들도 그랬을거다.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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