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빵의 쟁취 - P.A. Kropotkin

 아나키즘, 특히 아나코-코뮤니즘에 있어서 크로포트킨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최초로 자신을 '아나키스트'라 지칭했던 프루동의 사상이 그에 의해 집대성되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외의 사상을 철저히 탄압했던 볼셰비키 정권에서조차 그는 좌파의 거두와 같은 존재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크로포트킨의 저서 『상호부조론』이 아나키즘의 등장에 대한 차분한 설명이라면, 이 저서 『빵의 쟁취』는 그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다. 앞의 절반은 아나코-코뮤니즘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뒤의 절반은 이상적 아나코-코뮤니즘 사회의 모습을 꽤나 구체적인 상상으로 그려낸다. 아나키즘이 좌파에게도, 우파에게도 치여 마침내 유의미한 정치적 대표성을 띄지 않게 된 오늘날에도, 그가 상상했던 - 아니 기획했던 아나키 사회의 정책은 사민주의의 형태로 전 세계 정책에 도입되고 있다. - 비록 크로포트킨은 자신을 사민주의자와는 다르다고 여겼지만 말이다.


 크로포트킨은 책의 전반부에서 인류가 가진 부(富)가 이미 전 인류의 생존권 - 19세기의 주장임에도 매우 현대적인 개념의 생존권으로, 단순한 의식주의 보장이 아닌 좋은 삶을 살 권리를 말한다 - 을 보장할 수 있을만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먼저 그는 토지와 생산 수단을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것을 '소유'한 자들이 생산품을 만들어내던가? 생산하는 것은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어 능력주의에 입각한 임금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노동의 가치를 정확히 측정해서 각자에게 그만큼의 몫을 나누어줄 수 있던가? 최저임금 - 놀랍게도, 19세기 프랑스에도 최저임금이 시행중이었다 - 을 받는 부두 노동자들은 그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받고 입에 풀칠만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노동의 가치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면, 혹은 일을 수행하는 능력을 정확히 츨정할 수 없다면, 지금의 임금 제도는 정의로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한다. 그들의 생존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근대화된 사회에서 자급자족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특히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 계급은 자신의 노동력을 헐값에 팔아넘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특히 분업화된 사회에서 생산품에 대한 개별 노동자의 기여도를 측정할 수 있던가? 시장 가치와 능력에 기반한 작금의 임금 제도로 생존권을 보장할 수 없다면 필연적으로 임금제는 타파되어야 한다 -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로서 지급되는 재화로는 생존권을 보장할 수 없으며, 인간에게 '좋은 삶을 살 권리'를 주기 위해선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재화가 지급되어야 한다.  크로포트킨은 사유재산, 특히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비판했으며,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재화를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면 굶주리는 자가 없을 것이라 주장한다. 사유재산의 소유 불인정을 제외한다면, 오늘날 논의되는 '기본소득제'의 골자와도 같은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사유재산 부정은 생산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경제학자들이 생산 수단과 소비재를 나누는 것에 의문을 표한다. 공장, 토지... 생산 수단이든, 옷, 집, 음식... 소비재든 전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하는 것을 누군가가 필요하지도 않은데 많이 가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존권의 결핍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포트킨이 주장하는 것은 공산주의식의 배급제가 아니다. 물과 공기와 같이, 야산의 나무와 같이 매우 풍부한 자원들은 필요하면 가져다 쓰되, 희소성이 있는 자원은 공동체에서 정한 규칙대로 - 극심한 식량난에서 식품을 배급할 때, 어린아이와 환자, 노인, 건장한 사람 순으로 배급하듯 - 분배하는 것이다. 모든 재화를 엄격한 규칙에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작은 지역 단위 공동체에서 중간 마진 없이 잉여 생산물을 타 공동체와 공유하며 사는 이상 사회. 그것이 크로포트킨이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이 주장하는 것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결과의 평등이 아니다. 그는 기회의 평등을 원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알고 있듯, 재벌가의 아이와 빈민촌의 아이에게 제공되는 기회는 ,그 차이는 재산뿐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를 것이고, 그렇다면 그 사유 재산이야말로 불평등의 원인이 아니냐고 그는 반문한다. 


 또한 크로포트킨은 익히 알려진 바와 달리 사치재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모든 인간이 굶주리지 않기 전에는 사치품을 생산해선 안 되겠지만, 실제의 인간은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그는 아나키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와 달리 모든 인간의 자유를 동등하게 옹호하며, 그것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은 이를 위하여, 모든 지적, 예술적, 혹은 사적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사람은 늘 그것에 쏟을 5시간 이상의 자유를 보장하게, 그러나 육체 노동에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분업화된 모든 과정의 일부에 속한 사람이 다른 과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택배, 건축, 청소 노동자 등 육체 노동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어떠한가? 그러나 모두가 그런 일을 하게 된다면, 더 이상 육체 노동은 열등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모두에게 충분한 여가 시간은 주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특정 계층, 특정인의 사회에 대한 희생은 필요치 아니하게 된다. 모두가 그 일에 참여하고, 모두가 그 일을 '즐겁게' 함으로써 모두에게 혜택이 가는 모두의 업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술과 산업이 뒤엉켜 구분할 수 없는 사회의 도래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노동에 일생을 바칠 필요가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모두에게 안락과 여가가 필요하다. 크로포트킨은 다음과 같이 예시를 든다.


 "그랜드 피아노를 원하는 사람은 악기 제작 협회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반나절 여가시간의 일부를 그 협회 일을 하는데 제공함으로써, 그는 곧 꿈꾸던 피아노를갖게 될 것이다. 천문학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천문학자 협회에 가입해서 그 협회의 이론가들, 관찰자들, 계산가들, 천문 기구를 만들어내는 기술자들, 과학자들과 아마추어들과 함께 협회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몫의 일을 함으로써 바라던 망원경을 얻을 것이다. (중략) 간단히 말해서, 하루 중 대여섯 시간 동안 필수품을 생산하는 일에 전념한 뒤에는 모든 사람이 5~7시간 정도를 각자 바라던 사치스러운 취미에 대한 모든 열망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협회가 그런 일들을 지원할 것이다. 지금은 하찮은 소수만의 특권으로 여겨지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치스러운 취미는 부르주아 계급의 어리석고 허영에 찬 과시가 아니라 예술적인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아나키 사회에 대한 청사진은 우리의 편견보다 구체적이며, 18세기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진보적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1세기에 들어서야 논의되는 여성의 가사노동의 가치에 대한 이슈, 기본소득제, 최저임금의 인상.... 이 모든 것들을 크로포트킨은 18세기 후반에 이미 논의한 바 있다. 물론 크로포트킨은 급격히 성장한서비스 산업과 정보화 혁명에 대해서 알지 못했겠지만, 그에 힘입어 크로포트킨이 논의했던 정책들을 검토하는 수준에 겨우 다다른 것이다. 


 『빵의 쟁취』에 해설을 단 하승우 소장은 이 책이 아나키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 긍정적 의미에서의 - 선동이라고 평했다. 필자는 좀 더 나아가, 『빵의 쟁취』는 20세기 국가간의 힘겨루기 이후 전환될 인간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일찌감치 예견했던 이상 사회의 예언서라고 하겠다.

12개의 댓글

3줄요약좀
0
2018.07.16
1
너는
글을
읽지 마라
0
2018.07.16
이상적인 세계관을 역설한 것은 좋은데,
결국 저걸 실현하려면 객관적이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개인별 노동/생산/소비 할당량? 을 정량화하고 구성원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어야 할 거 같음.

1. 과연 기술의 발전(빅데이터 저쩌구)이 저런 선결조건을 달성을 앞당길 수 있을까?
2. 나는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위의 파라미터들을 순순히
솔직하게 공유하고 이타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을까?

라는 뻘생각을 해봄. 퇴근하고싶다
0
2018.07.16
@아침밥
ㅇㅇ 크로포트킨이 4차 산업혁명을 예측하진 못했겠지만
흔히 "기술적 특이점"이라 부르는 놈이 온다면 실제로 될지도.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인간뿐 아니라 모든 만물이 서로 돕는다는 이론을 펼침. 꽤 이상적이지만, 크로포트킨은 인간의 이기심이 이 결핍이나 불평등에서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0
2018.07.16
@아나키스트
닭달걀 이야기가 되겠네 허허
0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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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좋은글인데수, 그런데 악기제작협회에 그리고 천문협회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그 사람이 필요한만큼의 전문성을 갖출수있는가? 그리고 저 아나키 사회의 규칙은 어떻게 유지될것인가? 하는 반론에는 어떤 답이 나올수있을지 궁금한데수
0
2018.07.16
@스카우루스
나도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의문이 듦. 특히 각각의 분야가 고도로 전문화된 오늘날에는 더더욱 한정된 시간으로 전문성을 갖추기 힘든데, 4차 산업 혁명 이후 다가올 기술적 특이점으로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의 제작에 모든 인간이 투입되지 않아도 된다면 어쩌면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음.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크로포트킨은 인간 사회의 제도보다도 인간, 특히 민중의 판단을 존중했음. 솔직히 말하자면 책 읽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민중의 판단에 대해 낙관적인거지?" 싶음. 아마 크로포트킨이 반지성주의의 범람을 목격했더라면 그렇게까지 낙관하지 못했을 거 같음. 그에 대한 대비책이 뚜렷하게 없던 것도 크로포트킨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듯.
0
2018.07.16
@아나키스트
인간의 사회적 진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계몽주의시대 인간이라 저런 낙관론이 가능했지않나 싶음
0
그럼 돈은 누가벌어? 나 대졸자앰생 우리 이쁘게 말하자가 아나키즘의 종말을 증명한다!!
0
2018.07.17
SF소설 같은 소리네 ㅋㅋ
0
2018.07.19
책 이타적 유전자 추천한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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