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마왕과 용사는 친해질 수 밖에 없었다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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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친하게 지내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휴전협정이 된다.


마왕이 용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마왕성에서의 생활은 솔직히 말해서 따분하다. 밖은 연중무휴 따뜻한 봄날씨다. 그 한가운데서 휑하니 실내에 갇혀있는 입장이면 당연히 갑갑하다. 마왕은 그닥 신경 안쓰는 것 같지만 하여튼 용사는 갑갑했다. 이에 용사는 고심하다 소일거리를 만들기로 생각했다. 실내에서 해결 가능한 의뢰들을 수주해온 뒤 마왕성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을 의뢰들도 이제와서 해보니 나름 재미가 있었는지 용사는 꾸준히 의뢰를 들고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의 용사는 나무토막과 손칼을 집어들었다. 이것으로 '죽은 신의 십자상'을 만드는게 할 일이다.


마왕 "뭘 할려고?"
용사가 바라보자, 바닥을 굴러다니던 마왕과 눈이 마주친다. 용사는 그냥 고개를 돌려버린다.
용사 "조각이다. 집중력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마왕에겐 부적격한 일이라는 것을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왕 "좋아. 나도 해볼래."
말이 무섭게 마왕이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와 탁자 위로 손을 올린다. 손이 더듬더듬 탁자위를 힘겹게 살핀다. 테이블이 덜덜 떨린다.
마왕 "으극...! 윽...!"
용사 "그냥 일어나!"
더듬거리는 손이 목공용 칼의 칼날에 닿으려 하자 용사가 집어다 바닥에 떨궈버린다. 마왕이 떨어진 나무토막과 칼을 들고 다시 데굴데굴 굴러서 돌아간다. 용사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칼을 잡았다.
사각 사각. 우선 대강의 크기와 형태를 잡는다. 이 의뢰가 들어온 배경을 설명하자면, 우선 기존의 십자상은 다들 굉장히 무겁고 커다랬는데, 이는 조각가들이 제 실력과시에 심취한 나머지 무거운 돌덩이를 큼지막하게 깎아댄 탓이었다. 때문에 죽은 신을 지키는 자들(이하 신도들)은 십자상을 대부분 구하질 못했고 제대로 된 종교의식을 치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보통은 교회에 십자상을 마련해 두고 쓰지만 문제는 교회마저도 주변에 없는 경우다. 이 가여운 신도들은 가볍고 놔두기 편한 십자상이 필요했고 의뢰서를 마을에 붙였다. 거의 한달을 붙어있던 의뢰서를 용사가 이번에 챙겨온 것이다. 몇번의 칼질이 지나가자 나무토막은 점점 잘려나가 뭉툭한 형태를 잡는다.
마왕 "근데 뭘 만들어야 해?"
용사 "...아무거나."
마왕 "떠오르는게 없어."
용사 "아무거나 만들어라."
나무토막의 경우 즉석에서 형태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마왕 "뭘 만드냐고오~"
마왕이 용사의 바지를 잡고 끈다. 용사의 칼에 힘이 빡 들어간다.
용사 "그럼 자기 얼굴이라도 조각하지 그러나."
마왕 "알았어."
마왕이 스물스물 돌아간다. 용사가 깊게 숨을 내쉰다. 후우...
자, 다시. 그래서 나무토막의 경우 즉석에서 형태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안에 이미 완성품이 들어있고 그걸 파낸다고 이미지하는게 요령이다. 어떤 영재 조각가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인데 이게 초심자에게는 제법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원하는 형태를 강하게 떠올려두고 작업할 수 있다나.
우선 십자가 부분은 잠시 놔두고 죽은 신의 자세를 잡아간다. 의뢰서엔 자세에 대해선 딱히 터치가 없었으나 등을 기대고 앉은채 쓰러진 자세가 일반적이다. 개인적인 작품도 아니고 의뢰작인데 가급적 신도들에게 익숙한 쪽이 좋다.
마왕 "용사아아. 잘 안파져. 어떻게 파는거야?"
결국 용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용사 "줘봐라."
마왕이 나무와 칼을 건넨다. 용사가 쭈그려앉아 받아들고 시범을 보인다.
용사 "요는 짧게 잡고 조금씩 파는거다. 한번에 확 파내려고 욕심부리면 칼날이 먹혀서 빠지질 않는다."
마왕에게 토막과 칼을 다시 쥐여준다.
용사 "자. 다시 해봐라."
마왕 "좋아, 알았어!"
마왕이 눈을 찌푸리며 천천히 토막을 깎아간다. 엎드려 다리를 흔드는 꼴을 봐서는 과연 얼마나 오래 갈지 의심이 들지만. 용사도 의심 가득찬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죽은 신의 자세가 대강 잡히고 얼굴 묘사에 들어간다. 신의 얼굴을 신도가 빤히 쳐다보는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대부분 뭉뚱그려 표현하거나, 심하면 레이스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용사는 뭉뚱그려 표현하기로 결정한다. 해온 일이 일인지라 뭉개진 얼굴을 자주 보기도 하고.
사각사각. 세심한 손놀림으로 얼굴과 머리칼을 완성해간다. 용사의 칼이 죽은 신의 머리카락에 닿는다.
마왕 "앗!"
용사 "...! ..."
놀라운 자기제어로 용사는 칼이 미끄러지는걸 참아낸다. 무사한 조각을 보고 안도한다. 용사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을 빠는 마왕이 보인다.
마왕 "베였어."
용사 "... 후..."
용사가 이마를 짚으며 말한다.
용사 "칼 방향이 손을 향하게 두지 마라. 과일깎을때랑 규칙은 똑같다."
마왕의 입에서 피가 흐른다. 용사가 짚은 손을 떼고 묻는다.
용사 "깊게 베였나?"
마왕 "깊진 않은데... 어쩌지. 한번 죽을까."
용사 "진심인가? 손 비었다고 죽을생각을 하나?"
마왕 "고민중이야."
용사 "사고방식이 정상이 아니군."
마왕 "뭐래니, 지도 괴물수준이면서. 넌 팔이 날아가도 돋아나는데 그건 정상이냐?"
용사 "그래서, 죽여줄까? 내 기꺼이 도와주겠다."
마왕 "됐네요. 피 멎었음. 별거 아니었네."
마왕이 다시 칼을 잡는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용사도 긴장을 풀고 조각으로 돌아온다.


마왕은 손을 베인 이후로 조금이나마 진지해졌는지 조용히 조각에 열중했고, 용사도 덕분에 완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이번에 마왕의 집중력과 끈기를 재평가할 수 있을거라 기대했으나.
마왕 "헤헤. 완성이다."
결국 여기까지 였던걸로. 용사가 곁눈질로 바라보자 투박하지만 처음치곤 제법 잘 만든 조각상이 보인다. 마왕도 나름 실력자인데 당연히 평균이상의 손재주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용사 "...잠깐. 그거 내 얼굴이잖아."
조악한 이목구비지만 험상궂은 눈, 고집 가득한 입술, 찌푸린 표정의 디테일이 살아있다. 딱 용사의 평상시 얼굴이다. 조금 추상적인.
마왕 "응. 맞아. 어때?"
마왕이 헤실헤실 웃으며 기어와 조각상을 책상에 올린다. 그러자 조각상이 왼쪽으로 넘어진다.
마왕 "어엇?"
떨어지는 조각상을 용사가 받아든다.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말한다.
용사 "무게중심이 망가졌군. 머리카락을 너무 크게 조각한 탓이다. 척봐도 왼쪽이 더 무겁지 않나?"
마왕 "줘봐."
마왕이 칼을 들이밀자 용사가 뺏어든다.
용사 "더 건드리지 마라. 어설프게 건드리면 더 망가질 것이다.
마왕 "..."
마왕이 순순히 손을 내려놓는다. 용사가 이어 말한다.
용사 "무게중심 말고도 칼을 크게 쓴 흔적들이 보인다. 칼은 작게 써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투박한 이유는 그 탓이다. 디테일하게 하고 싶었다면 좀더 천천히 했어야한다."
마왕 "...응. 알았어."
마왕이 일어나 옷을 탁탁 턴다. 먼지가 일어나 용사는 기침을 한다. 마왕은 휑하니 문을 나선다.
마왕 "그건 대충 처리해줘. 난 나가있을게."
쾅. 응접실 문이 닫힌다. 먼지가 내려앉자 응접실이 많이 조용하다. 조용해진 응접실에서 용사가 넘어진 마왕의 조각상을 집어든다.


용사 "...실언했나."
명백히 실언했다.
사각사각. 찬찬히 용사는 십자상의 마무리를 해간다. 너무 조용한 탓인지 묘하게 따분하다. 사각사각. 용사는 넘어진 마왕의 조각상을 자꾸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


저녁이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마왕이 잠에서 깨어난다. 마왕이 눈을 비비는 와중에 갑자기 문이 열린다. 끼이익-
용사 "실례."
마왕 "야야! 어딜 들어와!"
용사의 머리에 이불이 날아와 덮어버린다. 휘적거리며 이불을 벗어내자 마왕이 용사를 발로 밀친다.
마왕 "나가 임마. 레이디에 대한 예절이 없어."
용사 "이시간에 자고 있었나?"
마왕 "나가라고!"
용사 "잠깐, 잠깐만. 줄게 있다."
용사가 품을 뒤져 조각상을 꺼낸다. 마왕이 만든 그것이다.
마왕 "... 이건 왜."
용사 "잠시만. 기다려봐라."
용사가 마저 품을 뒤지자 안에서 다른 조각상이 나온다. 그건... 마왕의 얼굴이다. 두 조각상을 받아든 마왕이 엉거주춤하게 서있다.
용사 "그냥 손볼까도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네가 성심껏 만든걸 멋대로 건드리긴 좀 그렇더군. 그래서 그냥 새로 하나를 오른쪽이 무겁게 만들었다. 같이 세워두면 딱 맞을거다."
서랍 위에 마왕과 용사 조각상을 나란히 올리자 서로 기대어 넘어지지 않게 되었다.
용사 "크흠. 버린다는 투로 말하지 마라. 그래도 네가 만든것 아닌가."
용사는 미안하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것이다.


마왕 "고마워."


마왕이 활짝 웃는다. 용사의 찌푸린 표정도 펴진다.
그렇게 둘은 잠시 마주보고 웃었다.


마왕 "자, 나가 이새끼야."
마왕이 용사를 걷어차 문밖으로 날린다. 용사가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른다.
마왕 "베에-."
용사 "야!"
쾅. 문이 닫힌다. 마왕은 침대에 다시 누워 조각상을 바라본다.
투박한 용사와 세심한 마왕이 서로 기댄다. 그 모습이 우스워 마왕이 한번 더 웃는다. 손가락의 상처가 아물어간다.

6개의 댓글

계속지켜보고있다 잼다
0
2017.06.13
@나자렛의몽키스페너
ㅎㅎ ㄱㅅ
0
2017.06.13
언더시티에 본거같다
0
2017.06.13
@GLaDOS
거기랑 여기서 연재중
0
2017.06.13
@전장의방패
개드리퍼 으리로 이제부터 보자마자 추천박아준다. 똥꼬 단디챙겨라
0
2017.06.13
@GLaDOS
흑흑... 감사합니다 SENSEI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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