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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

 

학이 날개를 편 형상을 했다해서 이름붙여진 학익진으로 유명하고,

이후에 일어난 명량, 노량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해전이기도 합니다.

 

적을 감싸 포위하는 형태로 격파한 이 전투는 무척이나 직관적이고,

또 학익진이란 키워드까지 유명하지만

 

비교적 초기에 일어난 이 전투가 7년간의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전투 과정과 그 배경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투의 유명세에 비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편입니다.

 

 

 

오늘은 명량과 노량에 이어, 한산을 알아보겠습니다.

 

 

 

 

 

1. 한산 해전 이전,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과 전투 배경 상황.

 

https://youtu.be/mh47WOQhXVA?si=Afou4R-CyZ0JmrfD

 

https://youtu.be/bTVnK772_7E?si=v__oiMaZdi3C5NC5

 

↑ 참고하면 좋은 영상들입니다.

 

시간대 별 주요 전투들과 위치를 확인하기에는 위의 영상이 좋고,

전쟁의 전체적인 양상을 보기에는 아래의 영상이 더 좋습니다.

 

이 점 참고하시고 영상을 통해 확인하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 5월 23일, 일본이 기습적으로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했습니다.

국가 간의 총력전을 상정해두지 않았던 조선은 갑작스런 전쟁에 불과 2개월만에 평양까지 함락당하며 멸망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일본군이 이렇게까지 급격하게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은

 

첫번째로는 당시 일본군의 전략이 수로병진 및 빠른 수도 함락을 통한 수뇌부 확보 및 조정 붕괴와 합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일본군의 전략이 당시 여진족들을 상대하던 조선군의 군사 전략을 카운터쳤기 때문이고,

 

세번째로는 이 모든게 조선으로서는 너무나 기습적이며, 또한 서로 득 될 것이 없기에 일어날 리 없다 여긴 국삭빵 총력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1.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전략.

 

일본육군.png

일본수군.png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전략은 사실 무척이나 간단했습니다.

 

수륙병진,

대규모의 육군이 빠르게 서울로 진격해 수뇌부를 장악하는 한편으로,

동시에 수군이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조선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해 후방에 남은 조선 잔당(전라도)을 해안을 따라 점령해나가며

 

최종적으로 조선의 국토를 유린하는 대규모의 육군에 보급을 함으로 조선 국토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확정시킨다.

 

 

 

사실 전근대 국가들의 전쟁 방식으로선 지나칠 정도로 교과서적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한국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전쟁 방식이었습니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도 그랬고,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을 때에도 그랬으며,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도 그랬습니다.

 

 

 

일본이 임진왜란 당시 기습을 감행했기에 대규모 총력전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않아 수군이 경상도 남해안에 흩어져있던 조선수군은

몰려오는 적들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고, 적들에게 배와 물자가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군영을 불태우고 배를 자침시킵니다.

 

이 일로 조선 수군은 절반의 힘을 잃었습니다.

 

 

 

현대에는 통신 수단이 발달했기에 왜 배와 물자를 모아 전라도의 이순신에게로 합류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있지만,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적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소집되지도 않은 경상 수군만으로 대응하기엔 불가능한 숫자임은 확실했습니다.

 

아군을 소집하기엔 연락 수단이 없고, 적은 빠르게 경상도 해안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를 뚫고 배를 소집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소집한 수군을 적에게 포착당하지 않고 전라도까지 이동시킨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고요.

 

 

 

나는 이순신이 아니야.png

 

이순신이라면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건 이순신이니까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생각해보기라도 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원균의 대응은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잘한 일이었습니다.

 

 

 

 

자, 이야기가 좀 샜는데,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오면.

전쟁 발발 직후, 기습적인 전면전에 대응하지 못 한 조선 수군은 절반이 날아갔고, 일본 수군은 건재한 상태였습니다.

 

일본군이 조선으로 건너와 남해안에 군영을 꾸리는 동안,

전라도의 이순신, 경상도의 이억기-원균은 흩어져있던 수군을 소집해 일본 수군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옥포.png

사천.png

 

옥포해전(6월 16일), 합포해전/적진포해전(6월 16일~6월 17일),

사천해전(7월 8일), 당포해전(7월 10일), 1차 당항포해전(7월 13일), 율포해전(7월 15일) 등에서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두며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한산대첩.png

한산대첩2.png

 

이런 상황에 일어난 것이 1592년 8월 14일에 일어난 한산도 대첩이었습니다.

 

8월이면 이미 일본 육군은 서울과 평양을 점령한 지 오래였고 (평양성 함락 7월 22일),

함경도까지 진격한 상태에서 보급의 한계를 맞아 멈추어 선 상태였습니다.

 

 

 

모든 공격전에 통용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

 

만약 그 전에 끝낼 수 없다면,

최소한 적에게 치명타를 입혀놓아야 봄이 찾아왔을 때 유리한 구도에서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다.

 

일본 육군은 수군의 보급이 절실했습니다.

이미 의주가 위치한 평안북도 일대까지 조선의 왕을 몰아세웠으니까요.

 

후방의 전라도에 위치한 조선군들이 조금 골치아프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조선의 왕만 사로잡아 조정을 붕괴시킨다면 조선군들은 한데 뭉칠 구심점이 사라질테니 한낱 잔당이 될 뿐입니다.

 

조선 임금만 잡는다면요.

 

 

 

이 전쟁은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을 잡아내느냐에 성패가 달렸습니다.

 

 

 

해서, 일본 수군은 주력 함대를 모두 이끌고 서진합니다.

함대 결전을 목표로, 조선 수군을 꺾기만 한다면 이 전쟁은 승리다.

 

이 때 일본 수군의 함대는 전선 73척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그에 맞서는 조선 수군도 마찬가지로 주력 함대를 모두 이끌고 적을 맞이합니다.

이 함대를 막지 못 한다면 조선은 멸망이니까요.

 

이 때 조선 수군의 함대는 전선 55척 (거북선 3척,판옥선 52척 포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양국의 명운을 건 함대 결전입니다.

 

 

 

 

 

2. 전투의 전개 과정

 

https://youtu.be/_lphBAxg5gk?si=TaPvCPOSHxEhK1Ub

↑ 영상으로 확인 가능한 한산도 해전의 전개 과정

 

동영상이 좀 유치하긴 합니다만, 전투 과정 자체는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상입니다.

풀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3. 전투 결과와 그 이후

 

가라시마의 작은 섬에 올라와 있던 나카츠카사와 그 가신들은 13일간 솔잎과 미역을 먹으며 불탄 배의 널빤지로 뗏목을 만들어 육지로 올라가려 하였다.

판옥선이 물러나는 틈을 잘 보고 있었는데, 가라시마 밖에 일본의 병선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듣고 판옥선이 갑자기 물러났다.

 

그 틈에 5~6명씩 뗏목에 타고 그 섬으로부터 육지로 오던 중 판옥선이 다시 키를 돌려 와서 바닷가에서 (아군) 10여 명을 사살했다.

남은 자는 200여 명 남짓이었다. 겨우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나 목숨을 건져 김해로 돌아왔다.

 

-와키자카기 중-

 

 

 

일본 수군의 총지휘관이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원균의 무능함의 덕을 봐, 간신히 생환하게 됩니다.

 

 

 

이전까지 크고 작은 몇개의 해전에서 이순신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이 승리를 거두었다지만,

일본군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인해 원균의 경상 수군을 잃어버렸던 조선 수군은 분명 일본 수군 대비 전력면에서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11일.png

 

한산도 대첩이 일어난 1592년 8월은 의주로 몽진한 선조가 명에 원군을 요청해 명군이 조선으로 향하던 때입니다.

 

풀어 말한다면,

만약 이 전투를 일본군이 이겼다면 8월 중순에는 평양성에 자리잡은 일본군 주력이 힘을 되찾았을 것이고,

 

 

 

2차.png

 

이 시기에는 상황이 급박하니만큼 명군이 선봉 4천명만을 보내왔을 뿐이므로,

힘을 찾은 일본군이 의주로 향하는 것을 막아내기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4차.png

 

이후 명군이 대규모로 병력을 파견해 조선에 도착한 것은 1593년 1월 15일,

도착한 명군이 정비 후에 조선군과 함께 전투에 나선 것은 2월 6일임을 감안하면

 

 

 

한산대첩.png

한산대첩2.png

 

한산도 대첩에서 패배했을 시,

1592년 8월 중순부터 1593년 이후까지 의주에 자리잡은 조선 병력들 만으로는 일본군을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명군이 조선으로 병력을 파견하는 1월 중순 이전에 의주가 함락되고, 선조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면

조선은 각 지방에 분명 여력이 많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백제, 발해와도 같이 멸망의 길을 밟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선.webp

이천군.jpg

 

만약 한산도 대첩에서 패배하고 평양의 일본군이 의주를 점령하고 선조를 사로잡은 상황에서

조선의 희망을 생각해본다면

 

 

 

선조에게 분조(정부를 둘로 나눔)받은 광해군이 본래 향해야했던 평안북도가 아닌,

일본군이 점령 중이던 강원도 이천군(철원 북서부)로 향해 일본군에게 저항 중이었고

 

호남 지역이 이치 전투, 전주성 전투, 우척현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일본군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점으로

이 둘이 조선의 대일항쟁 기반이 되어줄 수 있었겠습니다만,

 

 

 

이미 왕이 사로잡히고 조선군 주력이 붕괴한 상황에서 호남의 지방 관군 일부만으로는 저항이 어려웠을 것이고,

 

사실상 조선이 멸망한 상태에서 부흥 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는 상황에서는

명도 지원군을 보내기보다, 의주에 자리잡은 일본군이 요동을 침략하지 않도록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힘을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초.jpg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과도 같이, 언제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었던 조선은

한산도 대첩의 승리 하나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니.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을 넘어, 이 전투를 기점으로 조선은 줄곧 일본에게 공세를 취하게 됩니다.

5개의 댓글

2024.01.30

큰 전투인줄 알았지만 사실상 지면 안되는 상황 수준이었네..입이 떡벌어진다

영화에서 보여준 전투는 실제랑 비슷하면서 약간 각색한거지?

0
2024.01.30
@시커먼샐럿

3부작 영화 기준

 

명량 - 고증 엉망이고 투박하고 엉성한 영화,

그러나 작품의 목적이었던 재미는 챙김

 

한산 - 고증 굉장히 잘 지킨 작품

 

노량 - 전투 고증은 잘 지켰으나 인물 고증은 그렇지 못 함.

촬영 기술과 기법 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냥 영화를 진짜 못 만듦.

0
2024.01.30
@2NAUwU

글이 참 재밌네. 개드립 올라가게 거기도 써주고 가끔 정리식으로 여기 올려주면 좋을 거 같아

0
2024.01.30
@시커먼샐럿

썼는데 묻힘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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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30
@시커먼샐럿

한산의 경우에는 고증 굉장히 잘 지켜졌지만 약간 각색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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