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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전설 : 바둑황제 조훈현 - 일대기

세계 바둑계를 배경으로 삼국지를 쓴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한.중.일 동양 삼국이 바둑의 중심국이기에 구성요소는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삼국의 비중도 결코 어느 한 나라에 기울지않고 팽팽한 황금분할을 이루고있어 균형적이다.
중국은 바둑의 발상지이자 엄청난 바둑인구를 지니고있는 종주국(宗主國)이고, 일본은 바둑을 예(藝)와 도(道)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중흥국(中興國)이며, 한국은 앞서 거론한 두 나라들과의 진검승부에서 승승장구를 거둔 강대국(强大國)이다.
삼국의 바둑영웅들이 펼친 극적 드라마를 소재로 삼국지를 구성한다면 세계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한 한국의 기사(棋士)들이 단연 주인공에 캐스팅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 주연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조훈현을 택하겠다.
현대바둑 초창기에 바람을 일으킨 천재 오청원은 바둑 삼국지를 태동시킨 공로자로 족하고, 면돗날 사카다 역시 삼국을 아우르기에는 놀았던 무대가 좁았으므로 큰 역할을 주기엔 좀 아쉬운 감이 있다.
불굴의 투혼으로 일본기단을 주름잡았던 조치훈 역시 세계기전에서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으므로 일국의 맹주로 매김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 기라성같은 영웅호걸들이 즐비하지만 그 어떤 인물도 조훈현의 기록과 업적을 능가할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한 사람, 세계 랭킹 1위 이창호가 기록상으로 조훈현을 앞서지만 그의 존재는 조훈현을 더욱 빛나게 하는 현재진행형, 혹은 미래형으로써 자리를 비워두고 싶다.
조훈현의 위대성은 침체되어 있던 한국바둑계를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점, 그리고 이창호를 제자로 키워 바둑천재의 계보를 이었다는 점, 이 두 가지만으로로도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할 것이다.

삼국지의 오프닝은 아무래도 중.일 수퍼대항전이 적합하리라.
그 이전까지의 주무대는 역시 일본-
16세기부터 시작된 명인기소(名人碁所) 쟁취의 역사는 고스란히 일본바둑의 역사로 이어진다.
최후의 혼인보(本因坊) 슈사이를 끝으로 일본바둑은 권위의 시대에서 실력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대륙출신의 풍운아 오청원은 번뜩이는 창의력과 질풍같은 전투력으로 난세를 평정하며 일본기사들을 자극한다.
칫수 고치기 10번기를 통해 날고 기는 강자들을 꺾으며 제국시대와 전후까지 명성을 날렸다.
그의 배턴을 이어받은 인물은 사카다.
치열한 접근전으로 승부사(勝負師)라 불리운 사카다는 60년대를 전횡(專橫)하다시피 하면서 63개의 타이틀을 획득한다.
사카다의 시대를 마감시킨 인물은 대만출신기사 임해봉.
대륙적 기풍의 임해봉은 동포 오청원이 발굴한 천재이기에 더욱 드라마틱하다.
중국바둑은 일본보다 발전이 늦었지만 이미 그 시절에 오청원과 임해봉이란 양대산맥을 통해 현대바둑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국기사들의 계보는 이후, 섭위평-상호. 임해봉-왕립성으로 이어진다.)
임해봉 이후는 춘추전국시대이자 기타니 도장 일문의 시대로 접어든다.
컴퓨터 이시다. 미학자 오오다케. 대마 킬러 가토. 실전파 고바야시. 우주류 다케미야 등의 군웅할거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기성, 본인방, 명인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어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한 조치훈은 그들 중 막내에 해당하지만 질량면에서 군계일학으로 돋보인다.
이 시대야말로 바둑계의 르네상스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 때의 인물들이 아직까지도 세계바둑계의 맹주로 행세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바둑계도 이 무렵 인재들을 일본에 보내 큰물을 경험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개척자인 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김인, 윤기현, 하찬석 등이 기타니 도장에서 체계적인 바둑수업을 받고 귀국해 국내바둑계를 풍요롭게 했고, 조훈현과 조치훈, 두 천재가 조기유학을 와 천부의 재능을 닦고 있었으니까.
조훈현은 조치훈을 비롯한 다른 유학파 기사들과 달리 기타니 도장이 아닌 세고에 도장에 입문함으로써 독특한 배경을 갖게된다.
세고에 도장은 천재사관학교.
중국인 천재 오청원과 일본 관서기원의 총수 하시모토가 거쳐간 곳이다.
당시 고령(高齡)이었던 세고에 9단은 조훈현의 기재를 알아보고 마지막 제자로 받아 들인다.
그리하여 동양 삼국의 천재 세 명을 휘하에 거느리는 복을 누린 것이다.
그 무렵 기타니 도장은 걸출한 인재들이 득실거리는 양산박이라고 해도 좋았다.
조훈현이 조치훈과 함께 기타니 도장에 입문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또래의 강자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며 성장했을 테지만 한적한 세고에 도장으로 들어가면서 고독한 황태자로서의 면모를 얻게된다.
오청원과 하시모토를 사형으로 두고 괴물기사 후지사와로부터 실전의 가르침을 받은 조훈현은 그래서 하늘이 내린 재주와 행운을 완벽하게 거머쥔 천재인 것이다.

다시 물줄기를 삼국지로 돌리자면, 조훈현이 귀국해 한반도를 평정하고 있을 때 대륙에서 섭위평이라는 거물이 등장해 중일 수퍼대항전의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중국팀의 주장이자 최후의 수문장으로 버티면서 일본의 고수들을 연파, 바둑 종주국 중국의 위상을 드높인다.
그 동안 한국과의 정기교류전은 실력차이를 이유로 회피했던 일본이 중국의 도전을 받아들인 것은 다분히 한 수 가르침을 준다는 시혜의식이 발로됐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1985년 제1회 중.일 수퍼대항전의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중국측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섭위평은 막판벼랑에 몰린 상태에서 일본의 3장 고바야시, 2장 가토, 주장 후지사와를 차례로 물리쳐 승발전(勝拔戰)의 묘미를 한껏 과시하며 스타가 된 것이다.
중.일 수퍼대항전은 바둑선진국을 자처하는 일본의 오만을 여지없이 뭉개버린 일대사건이었으며 중국바둑이 세계로 진출하는 전환점이었다.
대만출신 응창기씨가 바둑올림픽이나 다름없는 응창기배 국제대회를 창설한 것도 딴에는 섭위평을 염두에 두었다는 설이있다.
세계최초의 국제대회를 중국인에게 빼앗길 수 없어 일본이 부랴부랴 후지쯔배를 창설했다는 것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아무튼 우승상금 40만불을 놓고 당대의 검객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응창기배 바둑대회에서 한국은 달랑 조훈현 한 명밖에 초청을 받지 못한다.
그만큼 우리 바둑이 푸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처음엔 대회참가를 보이코트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조훈현은 단기필마로 출전, 고바야시와 임해봉을 연파하고 결승에 오른다.
결승대항마는 역시 섭위평-
철의 수문장 섭위평과 조훈현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제1회 응창기배 결승에서 만난 두 사람의 혈전은 적벽대전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이 세기의 라이벌은 중국 항주와 싱가폴을 오가며 5번기를 펼친다.
최종 스코어는 3:2.
실로 극적인 역전승이었고 한국바둑의 저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쾌거였다.
이름하여 싱가폴 대첩.
지극히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치열한 투혼과 지략을 동원해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조훈현 개인은 40만불의 거금과 바둑황제라는 칭호를 획득했고, 한국바둑은 이 때부터 중국, 일본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삼각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게 된다.
중.일 수퍼대항전을 통해 기세등등했던 섭위평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실족, 진정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지 못한다.
그는 충분히 강했지만 동시대에 조훈현이라는 천재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사상최초, 사상최대의 큰 승부에서 조훈현의 벽에 부딪힌 섭위평은 바로 그 순간부터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무려 4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무렵 섭위평은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우리는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다. 훗날 나의 제자들이 성장하게 되면 당신들은 중국바둑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 호랑이 새끼는 다름아닌 상호로 밝혀졌는데-
섭위평이 말한 훗날의 판도는 어떠한가?
상호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여 중국대륙의 1인자로 떠올랐지만 이창호의 벽을 넘지 못해 힘겨워 하고 있지 않은가?
대를 이은 사제대결에서도 조훈현, 이창호 콤비는 완벽하게 바둑황실의 옥새를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요소들인가!

조훈현의 이름 석 자 앞에 무수한 찬사와 수식어가 붙어 왔지만 ‘바둑황제’라는 말 이상 적합한 어휘는 없다.
세계최연소 9세 입단에서부터 최고령 타이틀 보유기록에 근접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생명력.
국내 전관왕 및 국제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비롯해 무려 150여 회의 타이틀 획득기록과 세계 최다승 기사로 자리매김된 찬란한 업적.
청출어람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준 이창호의 배출.
조훈현의 삶은 경이의 연속이었고, 아직도 승부의 최전선에서 맹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경이로운 시선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조훈현의 고향은 어디인가?
전남 목포와 영암 두 지역을 두고 설왕설래 논란이 많은데 두 군데 모두 고향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창녕 조씨 일파가 뿌리내린 곳은 영암군 회문리.
남도의 소금강으로 유명한 월출산(月出山)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 곳에서 조씨 문중은 크게 부유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지적(知的)인 가풍을 유지하며 대를 이어왔다.
문중에 교사출신들이 많았으며, 조훈현의 부친인 조규상 씨도 일제시대 때 동경의 메이지(明治)대학을 나온 인텔리였다.
조훈현의 가족은 2남 4녀.
위로 형이 한 명, 누나가 세 명, 아래로 여동생이 한 명이다.
형제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가문의 분위기는 역시 어디로 가지 않는다.

장남 조종현 - 영화 필름 도매업.
장녀 조복심 -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
차녀 조경자 - 국립도서관장.(여성 최초)
3 녀 조연희 - 교육용 교재제조.
4 녀 조현숙 - L.A에서 사업으로 성공.

아무튼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영암 땅의 인텔리 조규상은 무안출신 부농집 딸 박순례와 결혼하여 월출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았었는데 자식들이 한결같이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다는 것이 영암 사람들의 증언이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사각모를 썼던 조규상의 지적 혈통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가족들의 분석에 의하면 모친 박순례 여사의 유전적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들 입을 모은다.
잠깐 조훈현의 모친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이 분은 지금도 평창동 저택에서 곱디고운 백발의 모습으로 건재하는데 기억력이 보통 비상한 게 아니어서 한때 프로야구 선수들의 타율과 연봉을 훤히 외울 정도였다.
아들의 대국일자와 전적은 물론이고 상대기사의 프로필과 기풍까지도 줄줄 꿰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으니까.
일본어에도 능통해 팔순이 훨씬 넘은 최근까지도 일본기원에서 발행되는 <碁道>지를 읽곤 했었다니 가족들의 분석이 꽤나 신빙성이 있는 셈이다.

조씨 일가가 영암에서 목포로 이사한 것은 해방 직후이다.
그러니까 조훈현은 그 이후 목포에서 출생하게 되는데 어쨌거나 조씨 문중의 요람은 아직까지도 많은 친척들이 살고 선산이 있는 영암이므로 바둑황제의 본향이 영암이라 해도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암(靈巖)-
말 그대로 신령스런 바위로 일컬어지는 지명인데 이는 곧 월출산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해발 809미터의 월출산은 소백산맥이 남으로 뻗어 내려가다 바다와 만나는 종착지에서 못내 아쉬운 듯 최후의 기세를 떨쳐 조각해놓은 명산이다.
남도의 곡창지대에 돌연(突然)히 치솟아 오른 월출산의 윤곽은 웅장하면서 화려하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뤄져있어 온갖 전설이 서려있는가 하면 왕인 박사와 도선국사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땅이기도 하다.
정상인 천황봉에 올라서면 북으로 영암 땅, 남으로 강진 땅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같은 남도라도 이른 봄 대지의 빛깔이 완연히 구분된다.
강진(康津)땅이 한 뼘쯤 아래 있다고 보리 싹이 조금 더 파랗게 자라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월출산의 산세도 남과 북이 판이하다.
풍화작용 때문인지 북쪽은 암반의 노출이 심하고 남쪽은 중턱부터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흘러내린다.
그러니까 영암 쪽 산세가 훨씬 급박하고 화려한 것이다.
그에 비해 강진 쪽 산세는 유려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이런 산세가 주민들의 심성에 유형무형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리 없을 터-
아무래도 영암 사람들의 기질은 강진 사람들보다 조금 억센 편인 듯 싶다.
월출산의 지형을 구구절절이 소개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두 고장에서 불세출의 바둑명인 두 사람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영암의 조훈현과 강진의 김인(金寅).
그 고장 사람들은 이 두 천재의 출현을 월출산 정기의 발현(發顯)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거기에 나는 월출산 남북사면(南北斜面)의 차이가 기풍의 차이로 드러나지 않았느냐고 강변하는 사람이다.
조훈현의 기풍은 월출산 북 사면의 기암연봉처럼 자유롭고 신묘하며 강미(强味)가 있고, 김인의 기풍은 남 사면의 갈대능선처럼 부드럽고 온유하며 두텁지 아니한가?
다분히 견강부회(牽强附會) 격으로 갖다 맞춘 논리이긴 하지만 언젠가 나는 월출산 천황봉에서 그토록 절묘한 신의 섭리를 혼자 발견한 것만 같아 몇 번이고 영암과 강진을 번갈아 보곤 한 적이 있었다.

영암출신 왕인 박사는 일본에 문물을 전해 아직까지도 그들의 스승을 추앙 받는 인물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혹시 왕인 박사가 바둑판도 들고 간 것은 아니었을까?
중국에서 탄생한 바둑이 일본까지 전래된 데에는 필연적으로 한반도가 교량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시기가 꽤나 오래됐을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삼국시대 무렵이 얼추 맞아떨어질 것이고 그렇다면 백제의 창구인 영암 땅 해창만을 통해 전파됐으리라 추리해봄직하다.
그로부터 아득히 먼 훗날, 이 고장의 바둑천재 김인과 조훈현이 거꾸로 일본에 유학을 떠나 바둑의 정수(精髓)를 습득해왔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대 한국 바둑의 정상은 거의 호남출신 기사들이 독무대나 다름없다.
조남철(부안) - 김인(강진) - 조훈현(영암) - 이창호(전주)로 이어지는 찬란한 라인업을 보라.
거기에 조치훈도 알고 보면 부안출신이고, 신안의 이세돌도 한 몫을 거든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뭔가 아쉬운 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현상에서도 풍수지리적 코드를 대입해보고 싶다.
예로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풍요로운 호남 땅은 예(藝)와 풍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고려시대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호남사람들의 에너지는 아무래도 현실 바깥쪽으로 많이 분출됐으리라.
서편제와 육자배기, 문인화와 도예, 그리고 바둑 같은 취미가 성행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내력들이 흐르고 맴돌고 고여 스며들었다가 마침내 오늘날 바둑이란 분야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폭발시킨 것은 아닐까?
억지라고 몰아붙이면 할말 없지만 어쨌거나 세대별로 정상의 자리를 대물림해 온 호남출신 기사들의 득세는 전체 프로기사 출신지별 분포 비율을 완전히 무시하는 결과로 나타나서 한번쯤 이런 식으로라도 분석을 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조훈현의 뿌리는 대강 이렇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그의 가족사와 개인사로 돌아간다.
해방이 되자 그의 부친 조규상은 정든 고향 땅을 떠나 목포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메이지 대학출신인 조규상과 명석한 처 박순례는 일제 당시 영암 땅에서 지식인 대접을 받았으므로 아무래도 해방이 된 시점에서 일부 주민들로부터 질시어린 눈총을 받았던 듯 보인다.
그런 부자유로부터 벗어나고 또 성장하는 자녀들의 교육환경을 감안해서 부부는 과감히 목포행을 결정하게 된다.
그 때가 바로 1946년이다.


 

목포는 항구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가수 이난영은 그리 구슬프게 목포가 항구임을 노래했을까?
너무나 단순한 그 노래 제목에는 영산강의 안개와 삼학도의 등대, 유달산 동백꽃과 똑딱선 기적 위로 나르는 갈매기의 영상이 오버랩 되어있다.
목포와 관련된 유행가나 문학작품의 밑바탕에 흐르는 기본적인 정서는 ‘哀傷’이다.
개항 1백년이 넘은 목포는 일제 때만 해도 삼백(三白)-쌀, 소금, 누에고치 -의 집산지로 번성을 누렸던 곳.
부산, 인천과 함께 3대 항구로 일컬어졌던 도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광복과 함께 공출산업의 기반이 와해되면서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류기지로 발전하기에는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해 천상 어항(漁港)의 지위로나 만족해야 할 입지조건 때문에 도시의 활력이 감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이 목포를 떠나 상경하는 러시가 일어난다.
그렇게 떠난 실향민들의 가슴과 뇌리에 목포는 아무래도 애상어린 고향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1번 국도의 종점이자 호남선의 종착역인 목포-
이 나라의 남단 땅 끝에 아련히 떠 있는 목포-
그러나 바둑황제 조훈현에게 있어서 목포는 세계로 뻗어가는 출발점이었다.

해방과 함께 영암에서 목포로 건너 온 조규상 일가는 항구에서 가장 번화한 한복판에 터를 잡고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
처갓댁의 배려로 목포극장 바로 옆에 위치한 2층 상가건물에 입주해 본격적인 도시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그 곳에서 조규상은 아주 짧은 기간 내에 사업적 성공을 거둔다.
그리 셈에 밝은 편은 아니었으나 메이지 대학 출신인 이 인텔리 사업가는 목포에서 유일한 지물포를 개업해 독점적 영업으로 제법 돈을 모으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히트상품은, 학용품인 공책을 제작판매하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전지 크기의 종이를 도매로 구입해 와 재단한 다음, 기술자들에게 하청을 주어 노트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게 곧바로 대박으로 연결된 거였다.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매출을 올렸는지 하루 영업을 끝내면 M1 실탄박스에 하나 가득 지폐가 들어왔고, 자녀들은 그 돈을 추리다가 찢어진 돈을 골라내어 저녁마다 고급과자 센베를 사먹었다고 한다.
그 시기가 상인 조규상의 개인사에 있어 가장 화려했던 절정기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대부호가 될 것만 같았던 조씨네 일가를 누군가 질투했는지 몰라도 한창 장사가 잘 될 때 엄청난 세금을 맞게 된 것이다.
당시에 개인사업자로는 목포에서 가장 고액납세자로 거론될 만큼 많은 세금을 물게 된 조규상은 끝내 조세(租稅)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파산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6.25동란이 터졌고, 조씨일가는 빈손으로 피난살이를 하며 극심한 빈곤을 경험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목포로 돌아온 조규상은 목포역 부근에 조그만 고무공장을 차려 재기를 모색하며 가세를 추스르기 시작한다.
바로 그 무렵 늦둥이 막내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조훈현이다.
다른 누나나 형들이 아버지의 전성기 때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을 누린데 비해 막내아들 조훈현은 가정경제가 최악인 상황에서 태어난 거였다.
어쨌거나 늦게 본 막동이를 아버지는 끔찍하게 예뻐해 자나깨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애지중지했는데-
두 살에서 세 살로 넘어가던 조훈현이 남다르게 영특하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깨닫게 된 것은 다름아닌 실종소동 때문이었다.
어느날 그 막동이가 엄마, 누나들이 한눈을 판 사이에 집을 나갔는데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훈현이는 이제 간신히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였고, 입은 옷도 소변 보기에 용이하도록 앞섶이 동그랗게 터진 갓난애 바지를 입고 있었던 철부지였던 것이다.
온동네를 뒤지고 다녀도 종적이 묘연한 훈현이의 실종 사실을 아버지께 알리기 위해 역전 뒤 고무공장으로 숨가쁘게 달려갔던 엄마와 누이들은 공장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맥이 탁 풀려 희비가 교차하는 한숨을 토하고 만다.
뜻밖에도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있는 훈현이를 발견한 거였다.
“아버지께서 훈현이를 공장에 데려 왔나요?”
“아니, 아까 지 혼자 들어오더라.”
아버지 조규상은 그 때까지도 막내 훈현이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딸들이 반문했다.
“얘가 몇 살인데 여기까지 혼자 걸어온단 말예요? 집에서 공장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그제서야 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철없는 막내아들을 내려다 보았다.
“훈현아. 너 여기 혼자 왔느냐?”
어린 훈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만 끄덕거렸다.
“세상에!”
가족들은 일제히 약속이나 한 것처럼 탄성을 터뜨렸다.
집에서 공장까지의 거리는 대략 1.5Km쯤 될까?
거리도 만만치 않지만 오는 길이 거리의 모퉁이를 몇 번이나 꺾고 블록을 휘감아 돈 다음, 대로를 건너고 복잡한 역사(驛舍) 건물을 관통하고 철도를 건너 공장의 담벼락을 끼고 반 바퀴를 돌아야 찾아올 수 있는, 어려운 길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어린애가 천연덕스럽게 그 길을 혼자 찾아왔다니 놀랄 수밖에-
(훗날 조규상 옹이 회고하길, ‘훈현이의 머릿 속에는 천부적인 방향감각의 나침반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했었다. 따지고 보면 조훈현의 놀라운 복기능력도 다 그런 감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 소동을 통해 막내아들의 총기(聰氣)가 범상치 않다고 여긴 조규상은 더더욱 훈현이를 슬하에 두고 금지옥엽처럼 총애하면서 또 다른 인생의 감격시대를 예감하게 된다.

 

조훈현과 가까운 바둑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그가 바둑을 두지 않고 다른 길을 택했어도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라고-
명석한 두뇌, 깔끔한 대인관계, 그리고 치열한 지적 호기심과 자유분방한 상상력 등등......
인간 조훈현은 성공인이 되기에 필요한 자산을 아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만약, 그의 부친 조규상이 사업가로 계속 승승장구했다면 아마 바둑황제 조훈현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부유한 환경의 소년이 그 당시만 해도 雜技 따위로 취급받던 바둑에 몰입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50년대 초반-
목포의 조규상은 하는 일마다 뜻대로 풀리지 않아 암울한 장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2층의 마룻바닥에서 조카사위 신서중과 매일 바둑을 두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7~8급 정도.
하지만 그 시절 남도의 항구에서 그 만큼 바둑을 둘 줄 아면 고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신중한 성격의 조규상은 바둑 스타일도 진지한 장고파였다.
여러 판을 뚝딱 해치우거나 내기를 즐기는 쪽이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맞수 조카사위와 도끼자루 썩는지 모르는 신선놀음을 즐겼다.
가족들에게 2층은 성역이었다.
올라가봤자 재미도 없었고 꾸중을 듣기 일쑤였으므로.
그런데 언젠가부터 네 살 짜리 막동이는 어른들이 바둑을 둘 때마다 계단을 기어 올라와 물끄러미 판을 내려다 보곤 했었다.
그 나이 또래의 어린이들이라면 바둑알을 건드린다거나 어른들을 귀찮게 할 법하건만 막동이 조훈현은 의외로 얌전하게 관전자의 매너를 지켰다.
고집이 유별나게 세고 활달한 편인 훈현이가 유독 바둑판 옆에서는 진지하게 앉아있는 게 대견스러워 아버지는 그 막동이에게 2층을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꼬마는 성냥과 담배 심부름을 기꺼이 하면서 노상 2층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날-
맞수끼리의 대국이 한참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어 난전이 전개됐을 때, 조규상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한 수를 놓으려고 반상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어린 관전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부지, 거기 놓으면 안돼라우!”
조규상은 네 살 짜리 막동이가 뭘 알고 그런 소리를 하나 갸우뚱했지만 이내 피식 웃어버리고 착점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복기를 해보니 바로 그 수가 패착에 가까운 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 조규상보다도 상대였던 조카사위 신서중(조훈현의 매형)이 먼저 네 살 짜리의 훈수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애가 혹시 수를 제대로 읽은 거 아닐까요?”
“에이, 이제 겨우 네 살 짜리가 뭘 알겠어?”
어른들의 대화를 묵묵히 지켜보던 꼬마가 자존심 상한 듯 대꾸했다.
“아부지, 나 바둑 둘 줄 알아라우.”
아들의 항변에 기가 막힌 아버지는 훈현이를 바둑판 앞에 앉혀놓고 흑돌을 밀어 주었다.
“어디 둘 줄 아나 한 번 보자?”
생애 처음 두는 바둑의 칫수는 아홉 점.
꼬마는 거침없이 똑딱똑딱 바둑알을 반상에 내리꽂았다.
판이 진행되면서 아버지와 매형의 눈동자는 화등잔만하게 커져 갔다.
놀랍게도 어린 훈현이가 제법 그럴 듯하게 집을 지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행마가 제대로 갖춰진 실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꼬마는 처음 두어본 바둑인데도 집이 많으면 이긴다는 바둑의 이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2층의 풍경은 확 달라졌다.
맞수들의 대결에 꼬마 관전자가 붙은 게 아니고 아버지와 매형이 교대로 신통한 꼬마와 대국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린 훈현이는 어른들이 한참 바둑을 두다가 오후 늦은 시각이면 항상 자기만 놔두고 어디론가 자리를 옮긴다는 사실을 알고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알고보니 어른들의 2차 집결지는 역전의 유달기원.
퇴근 시간이 되면 목포의 바둑강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기원이 아버지와 매형의 또 다른 사랑방이었던 것이다.
“아부지, 나도 기원에 데려가 주씨요.”
기원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꼬마는 아버지가 가는 곳에 꼭 따라가고 싶었다.
“허허, 그 놈 참! 좋다. 네가 아홉 점으로 나를 이기는 날 기원에 데려가주마.”
아버지는 마지 못해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
아들이 비록 천재적인 재능을 발하고는 있지만 기원에 데려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곳은 내기바둑으로 충혈된 기객들의 피로와 더불어 담배연기가 자욱한 곳 아닌가.
그래서 결코 불가능한 조건이다 싶은 내기를 걸었는데 어이없게도 며칠이 가기도 전에 그는 아들로부터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아 글세 이 놈이, 설렁설렁 집이나 지어대던 철부지가 아홉 점의 기착점 프리미엄을 십분 활용해 너무나 간단하게 승리를 닦아버리는 게 아닌가.
이제 기원에 데리고 가준다는 약속은 꼼짝없이 이행해야 할 판인데, 그렇다고 칙칙한 어른들의 사랑방에 이 어린애를 데리고 가긴 좀 찜찜하고......
그런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목포여고 수학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집안의 조카 박승곤이 찾아와 조규상의 판단을 도와주게 된다.
“고모부, 기원에 데리고 가 봅시다. 훈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닙니다. 비록 아홉 점이지만 7급을 이겼잖습니까? 게다가 동아일보에 게재되는 국수전 기보까지 주르르 외우는 걸 보세요. 전문가한테 훈현이의 진가를 한 번 감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꼬마 조훈현은 바둑을 구경한 지 한 달도 채 안된 시점에서 기원과 인연을 맺게 된다.


 

어떤 철학자가 예술을 규정하길 “예술은 그 사람의 인생만큼 나간다.”라고 말했다.
연륜(年輪)이 그 만큼 예술을 깊이 있게 만든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바둑은 어떠할까?
바둑 역시 인생의 부피와 비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가끔씩 출현하는 바둑천재들 때문에 극심한 혼란을 겪고 만다.
신동 이창호의 존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바둑의 불가해한 속성을 탄식하며 절망했던가?
적어도 일정한 판 수(數)를 경험한 뒤에 깨우칠 수 있는 기리(棋理)를 소년은 너무나 쉽고 빠르게 터득하고 말았으며 가공할 파워로 고단자들을 밀어버렸다.
제4기 동양증권배 결승전에서 이창호와 만난 조치훈.
“조훈현 선배는 제자 이창호를 좀더 혼냈어야 한다.”
그는 임전소감을 그 한 마디로 표현했다.
이창호가 아무리 세다한들 아직은 멀었다는 자신감과 함께, 제자에게 너무 쉽게 정상을 내주고 만 조훈현을 은근히 책망하는 촌철살인의 발언이었다.
그 말을 듣고 조훈현은 빙그레 미소로 답했다.
아마도 그는 조치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게 말야. 하지만 자네도 한 번 겪어보게. 창호의 완력이 만만치 않을 거야. 비록 내가 가르친 제자이긴 해도 이미 창호는 나름대로 바둑의 길을 터득한 아이거든. 치훈이 자네도 바짝 긴장해야 할 걸세.”
아니나다를까 결승 5번기는 이창호의 싹쓸이 3연승으로 간단하게 끝이 나고 말았고-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도 허무하게 패퇴하고 만 조치훈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현해탄을 건너가야 했다.
천재의 전형을 보여주며 일본기계를 평정한 조치훈은 그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무튼 어린 나이에 너무 쉽게 바둑의 길을 깨우친 천재들이 우리 바둑사에 드문드문 출현하곤 하는데-
그 첫 번째 타자가 바로 조훈현임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목포의 유달기원
50년대 목포에서는 거의 유일한 바둑사랑방이 바로 역전에 위치한 유달기원이었다.
부친 조규상과의 내기바둑(?)에서 승리한 조훈현은 약속대로 사촌매형 박승곤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생전 처음 기원에 발을 내딛었다.
만으로 다섯 살 무렵이었다.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손님들은 왠 꼬마인가 싶어 힐끔거렸다.
목포고 수학교사이자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박승곤이 원장에게 꼬마를 소개했다.
“원장님. 이 아이가 바둑을 둘 줄 아는데 한 번 봐 주실랍니까?”
“네에? 걔가 바둑을 둔다구요?”
“네, 그리 세진 않지만 제법 둡니다. 게다가 동아일보 국수전 기보를 외우고 복기까지 하거든요.”
“에이, 아무렴 걔가 복기를 할까?”
원장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부친 조규상이 훈현이를 바둑판 앞에 앉혀 놓고 복기를 시켰다.
당시 조훈현은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국수전 기보를 틈틈이 공부하던 중이었다.
어린 훈현은 아무 생각 없이 양 손에 흑돌 백돌을 나눠 쥐고 주르륵 복기를 해냈다.
대략 80여 수에 달하는 조남철과 김봉환의 바둑 수순이었다.
그 희한한 광경에 모든 사람들이 바둑판 주위로 몰려들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원장은 아직도 꼬마의 천재성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기보를 외우는 거야 연습을 많이 하면 가능한 거고 어디 조금 있다가 신문이 배달되면 오늘 치 기보를 놓아보도록 합시다.”
그래서 신문이 올 때까지 모두가 기다린 후-
원장이 신문을 들고 올라오자 훈현은 대수롭지 않게 국수전 기보의 숫자를 곰곰이 들여다 보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주르륵 한 판을 그려냈다.
그제서야 원장을 비롯한 모든 구경꾼들이 경악했다.
아직 글자도 읽지 못하는 꼬마가 놀랍게도 완벽하게 바둑의 맥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나랑 한 판 둬 볼래?”
원장이 마침내 지도대국을 자청하고 마주 앉았다.
아홉 점 바둑.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바둑에서 훈현은 바둑에 나이가 상관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원장은 그 자리에서 훈현에게 무료입장 자격을 베풀었다.
그 날부터 유달기원에는 색다른 멤버 하나가 들어오게 됐고 모든 기객들이 번갈아 가며 꼬마와 바둑을 즐겼다.
처음에는 너무 신통한 꼬마랑 한판 둔다는 기분으로 상대했던 기객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점 훈현의 급성장하는 기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막내 아들의 천재성을 지켜보는 재미로 기원에만 죽치고 살았던 조규상은 어느날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가세가 기울어 이화여대를 다니던 장녀가 중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무작정 이렇게 세월을 보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1958년 겨울.
목포의 조규상은 어린 막내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을 한다.
임시거처는 갓 결혼한 큰딸의 보문동 집.
그리고 매일 명동의 송항기원으로 출근을 하게된다.
송항기원은 당시의 일인자 조남철 국수가 운영하던 기원이다.


조훈현은 입지전적인 인물의 전형이다.
오로지 바둑 하나만을 택하고 그 길로 생활의 자유와 건강한 부유(富裕)까지 획득한 사람이다.
철저히 혼자의 힘으로 지금의 명예와 재산을 일군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그 만큼 프로페셔널한 기사도 드물다.
거의 오십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세계 타이틀전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것을 보라.
승부가 있고 상금이 있는 곳을 그는 어떤 경우에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로 갬블러로 유명한 차민수는 조훈현의 승부사 기질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스갯소리지만 방내기 세계 타이틀전이 생긴다면 조훈현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말그대로 있을 수 없는 농담이지만 차민수의 표현은 그냥 흘려 들을 수만은 없는 뭔가가 분명히 있다.
언젠가 조훈현은 중국의 마효춘과의 대국에서 만방이 어떤 것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전까지 마효춘은 번번히 중요한 길목에서 조훈현의 발목을 잡았던 껄끄러운 상대.
그 마효춘에게 족보에 있는 묘수를 구사하여 엄청난 대마를 잡아버린 거였다.
유리해도 더욱 고삐를 죄는 조훈현의 초식에 얼마나 많은 상대들이 치를 떨었던가?
요즘 조훈현의 바둑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젖혀오면 끊고, 끊어오면 늘어 바둑판 전체를 지뢰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특유의 속력행마로 치고 빠지면서 19로에 풍파를 일으킨다.
그의 운석은 화려하지만 미학과는 거리가 멀다.
신인 시절 김인 국수가 조훈현의 한 수(手)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런 수를 둘 수 있지?”
프로라면 차마 끔찍해서 둘 수 없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조훈현은 단호히 강변했다.
“그래도 그 곳밖에 둘 수 없었습니다.”
두 국수의 승부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
조훈현의 수(手)는 철저히 승부에 기여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어디에 두어도 한 수인데 미추(美醜)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렇다고 그의 행마가 전성기 때의 고바야시처럼 처절한 지하철은 아니잖은가?
이기기 위한 수를 추구하다 보면 미학도 어느 정도는 따라오는 법이다.

아무튼 입지전적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조훈현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부친으로부터 전혀 유산(遺産)을 물려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부친 조규상은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막내아들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자신의 생애를 던져 당대 최고의 바둑황제를 만들어낸 킹메이커이다.

신설동에서 돈암동으로 가다보면 좌우로 야트막한 산맥이 늘어서 있다.
성북구의 비탈진 그 동네가 60년대엔 다 달동네 판잣집촌이었다.
무작정 상경한 조규상 일가가 둥지를 튼 곳은 보문동.
탑골승방 보문사 뒷골목의 우물터를 돌아 층층계단을 오르면 경동고등학교 담장 아래 닥지닥지 붙어있는 마을이 있었다.
번지에 산(山) 자가 붙은 곳.
조규상은 신혼의 장녀 조복심 집에 임시로 기거하면서 보문시장에 좌판을 깔고 야채장사를 시작하면서 어렵사리 집을 마련했고 목포의 식구들을 전부 끌어 올렸다.
모든 생활의 초점은 막내 조훈현의 바둑공부에 맞춰져 있었다.
조규상은 매일 막내를 데리고 명동의 송항기원(松恒기원)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시장일 때문에 바쁘면 누나들과 매형 김석곤이 교대로 마부 역할을 맡았다.
한국기원이 생기기 전 명동의 송항기원은 한국바둑의 중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바로 현대바둑의 아버지로 통하는 조남철 선생이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목포의 신동이 상경했다고 하자 조남철 국수는 흔쾌히 지도대국을 허락해주었다.
역시 9점 바둑.
콧물을 훌쩍거리며 조남철 국수와 바둑을 두는 소년을 보고 많은 관전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 보았다.
그런데 이 소년의 바둑이 예사롭지 않았다.
뚝딱뚝딱 속기로 일관하면서도 제법 행마의 틀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흘리개와의 바둑이었지만 조남철 국수는 신중한 장고를 거듭해 최선의 수를 찾아내 응대했다.
승부는 세 시간 뒤에 끝이 났다.
국수의 승리였다.
패배를 확인하고 난 조훈현은 고개를 푹 떨구고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진 것도 분했지만 바둑 한판을 세 시간 씩이나 둔 게 너무 징그러웠다.
그런데 조남철 국수가 또 다시 한판을 더 두자고 했다.
어린 훈현은 넌덜머리가 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소년을 구슬려 바둑판 앞에 앉혔다.
당시 훈현에게는 지옥같은 승부였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 판을 지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남철 국수는 여지껏 지도기를 두 판 이상 둬준 적이 없는 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번 소년의 기력을 테스트하고 난 조남철 국수는 훈현의 급수를 강한 8급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급수와 관계없이 조남철 국수가 내준 수풀이 문제를 어린 훈현은 단번에 ‘패’가 난다고 대답해 놀라운 잠재력을 과시한다.

조규상은 훈현이의 미래를 믿고 기꺼이 밑바닥 인생을 자청해 보문시장의 인텔리 야채장사로 계속 일을 했다.
물론 좌판을 지키는 일은 거의 아내 박순애의 몫이었지만, 그들 부부는 막내아들이 일본유학을 갔다 온 뒤로도 한참 동안까지 야채장사를 했다.
그러니까 조훈현이 가세를 일으킬 때까지 무려 이십 년 넘게 보문시장의 터줏대감으로 일을 해온 거였다.
그 세월 동안 좌판의 규모는 커진 적이 없었다.
겨우 한 두 평 남짓한 좌판에 오이 몇 개, 고추 몇 개, 깻잎 몇 단을 놓고 지나가는 고객들을 상대했지만 부부는 시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웅대한 희망의 주단을 깔아놓고 있었는지 모른다.


 

바둑황제 조훈현의 취미는 등산과 독서로 알려져 있다.
등산은 체력관리를 위해 훗날 그가 의식적으로 택한 취미지만 독서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뗄래야 뗄 수 없는 선천적 취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분야의 정상에 우뚝 선 명인이므로 그의 독서취향이 고상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마실 것.
그는 비교적 읽기 편한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는 잡식취향의 독서광이므로.

일곱 살이 되자 조훈현은 집 부근의 삼선국민학교에 입학을 했고 마침 한국기원이 생겨 원생격으로 다니면서 바둑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훈현이 바둑만큼이나 관심을 품은 쪽은 다름 아닌 만화.
꽉 짜인 학교와 기원생활을 벗어나기만 하면 소년은 만화방으로 숨어들어가 가상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가족들이 그 때문에 무던히도 가슴앓이를 하곤 했는데-
한 번은 보호자 없이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훈현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야간에 찾으러 다닐 수도 없고, 이래저래 가족들은 애만 태우고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이튿날 동이 터오자 둘째 누나 조경자는 첫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나갔다.
짐작이 가는 곳은 오직 명동의 만화방밖에 없었다.
송항기원 다닐 때부터 훈현이가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화방의 양철문을 두드려 들어가 보니 훈현이는 한구석 의자에 쪼그려 옹색하게 잠들어 있었다.
밤늦게까지 만화를 보다가 막차를 놓치자 주인아저씨가 잠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보다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준 동생이 너무 예뻐서 누나는 그만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떨구고 만다.
그 바람에 잠이 깬 훈현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보다 만 만화책을 다시 펼치고 천연덕스럽게 침까지 발라가며 페이지를 넘긴다.
정말 못말리는 만화광 조훈현의 일화이다.

한국기원 원생시절.
미완의 대기 조훈현을 담금질해준 기사들은 많다.
동향의 선배 김인 국수가 각별한 애정을 주었고, 원생들의 사범을 자처했던 정창현이 많은 판수를 상대해주곤 했다.
본바닥에서 강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훈현의 바둑은 일취월장, 괄목상대, 일신 일신 우일신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러니 한국기원의 재롱동이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을 수밖에.
당시 아마추어 정상으로 군림하던 신면식(申勉植) 선생이 소년 조훈현을 혼내 주겠다고 벼르며 나섰다가 중반에 대마를 잡히고 두손을 들었었다.
그는 깨끗이 돌을 던지고 훈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나보다 세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노인이 찬탄을 금치 못하며 훈현이의 후원자가 되주겠다고 나섰다.
그 분이 바로 이학진(李鶴鎭) 선생.
이학진 선생은 그때부터 조훈현의 매니저를 자임하며 많은 바둑책과 옛 기보를 모아 주었고, 체계적인 행마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조훈현을 소개하고 다녔다.
조훈현을 중원무림의 강자로 키우기 위해 이학진 선생은 조건 없이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가족과 후원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조훈현은 구김살 없이 성장해갔다.
바둑을 열심히 둔다는 조건으로 사탕도 원 없이 얻어먹었으며 만화책도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었다.

만화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여기서 확실하게 조훈현의 독서 편력을 소개할까 한다.
소년 시절 만화방에 진열된 만화는 모조리 섭렵한 조훈현은 청소년기에 무협지에 심취했다가 청년기엔 추리애호가가 된다.
나는 어렸을 때 삼촌의 방에서 날마다 제목이 바뀌어 쌓여있는 무협지 시리즈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한두 권도 아니고 대여섯 권에서 열 권에 달하는 무협지들을 삼촌은 밤새워 읽어치웠던 것 같다.
아침이면 무수한 감귤 껍질과 함께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무협지들.
외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쯧쯔 혀를 차시며 방을 치우셨다.
“잠이나 푹 잘 것이지......뭔 놈의 책을 밤새워 읽는다냐?”
그랬다.
그 무렵은 ‘조훈현의 폭격시대’로 일컬어지는 전관왕 직전의 시절이었다.
삼촌 조훈현은 거의 매일 벌어지는 타이틀전의 피로 속에서도 밤마다 보문동 골방에서 혼자만의 은밀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비록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마음의 창이라는 눈망울에는 핏줄이 벌겋게 섰지만 그는 상상의 나래를 달고 무협의 세계로 들어가 에너지를 재충전했던 것 같다.
만화와 무협지, 그리고 미스터리.
품위와 다소 거리가 멀지만 조훈현은 그런 장르를 과식하면서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배양했던 것이다.
오십이 다된 지금도 그의 독서량은 상상을 불허한다.
웬만한 대중소설은 거의 손때를 묻혔고 한 번 읽으면 주인공의 캐릭터와 줄거리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비상한 재능이 있다.
언젠가 나는 새로 출간한 책에 사인을 해 삼촌에게 드린 적이 있었다.
삼촌은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말했다.
“이거 내가 읽었던 건데?”
그 책은 출판한 지 3년이 지나 표지갈이를 한, 리바이벌 작품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몇 초 만에 그 사실을 알아내고 만 거였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난 삼촌이었다.
작가인 조카뿐만 아니라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평생 재직한 둘째 누나 조경자도 조국수의 독서량을 익히 알고 있는 증인이다.
“내가 근무한 도서관마다 훈현이 도서대여 카드가 수십 장 될 거다. 
소설이라면 안 읽은 책이 없어.”
일반인들에게 하루 두 권밖에 대출해주지 않는 규정이 있지만 조훈현은 누나의 배경을 십분 활용해 그처럼 엄청난 비리(?)를 저질러가며 독서를 즐겼던 것이다.
믿기 어렵다면 그에게 책에 관한 질문을 넌즈시 한 번 해보라. 
아마 쑥스럽게 웃으면서도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을 들려줄 것이다.
나는 그의 바둑이 그처럼 자유분방하고 강하게 단련된 이유를 독서량에서도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다.
만화와 무협지, 그리고 미스터리 물에서 잔뜩 키운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바둑판 위에서 녹아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는지....


 

프로바둑에 입문하기란 사법고시보다 어렵고 신춘문예의 관문보다 어렵다는 것이 통설이다.
요즘에는 연구생과 일반인들의 입단제도가 공존해 조금 나아졌다지만 과거 우리 바둑계이 입단과 승단제도는 일본보다 훨씬 어렵고 엄격했다.
그런 관문을 조훈현은 아홉 살에 통과했다.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세계기록이며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는 공식기록이다.
천재의 기록은 오래가기가 쉽지 않은데 조훈현은 아직도 왕성하게 기록의 보물창고에 하나하나 전리품들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2001년 도쿄에서 열린 제14회 후지Wm배 우승으로 개인 통산 154회 우승과 국제대회 9회 우승 및 세계 최다승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48세 5개월로 국제대회를 제패했으니 앞으로 2년 후에 세계 최고령 우승기록까지 노려볼 만한 입장에 와 있는 것이다.

1962년 4월.
조훈현은 당당하게 실력으로 제16회 프로 입단대회를 통과한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목포에서 상경한 지 4년 만이었고, 입단대회에 도전한 지 세 번째 만에 얻은 결실이었다.
바둑 층이 얕은 한국의 기록이라 일본에서는 그리 중시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어쨌든 아홉 살 프로기사의 탄생은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언론의 요란한 조명을 받으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제16회 입단대회를 통과한 기사는 단 두 명.
김수영과 조훈현이었다.
입단 기수(期數)로만 따져도 조훈현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사들 중에서 단연 왕고참급에 해당한다.
아직 오십이 넘지 않은 나이임에도 그가 원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그 만큼 입단이 빨랐다는 이야기.
이 무렵 초단 조훈현의 바둑은 잔수가 밝고 싸움을 즐기는 기풍이었다고 한다.
명색이 프로였지만 그 당시에 프로들은 거의 수입이 없었다.
하지만 조훈현은 프로로서의 혜택을 나름대로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바둑으로 용돈을 얻어 좋아하는 만화책과 군것질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 프로기사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정계의 거물들이 관심을 보였고, 급기야 야당의 중진 정해영(鄭海永) 의원은 조훈현과 김수영을 자택에 기거시키고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옛날 우리바둑의 노국수들을 여유 있는 권세가들이 사랑방에 들여놓고 후원했던 형태와 다르지 않은 방식.
그 뒤를 이은 후원자는 박종규(朴鍾圭) 청와대 경호실장 이었다.
5.16혁명과 함께 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른 박종규 실장이 야당의원으로부터 탐나는 보배 조훈현을 인수받은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조훈현은 그런 인연으로 무수한 정관계 및 재계, 예술계의 인사들과 교분의 고리를 갖게 된다.
그보다 조금 후인 1968년 관철동에 5층짜리 한국기원 건물을 지으며 총재로 등장한 이후락 씨도 조훈현과 각별한 관계를 자랑하고 5공화국의 전두환 대통령도 명절 때면 한 수 지도를 요청해오는 애제자(?)임은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

여기서 이 글을 쓰는 작가의 비화 한 토막을 덤으로 소개한다.
1989년 필자는 KBS의 [전국일주]라는 프로그램의 작가로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 경기도 이천에 들를 기회가 생겼다.
온천과 쌀, 도자기로 유명한 고장 이천에는 취재거리가 무궁무진 했지만 필자는 다소 엉뚱한 취재감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당시 정국은 6공화국 청문회의 계절.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을 통해 집권할 수 있었지만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동지 전두환 전대통령을 백담사에 유폐시키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필자는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군사정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캐내고 싶은 마음에 모 PD와 함께 백담사 부근 용대리에 잠입취재를 하기도 했었고 12,12 사태를 풍자하는 영화 <시비시비(是非是非)>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었는데-
이천에 오니 3공화국의 거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세상을 등지고 이 곳의 도요(陶窯)에 산다는 것이었다.
군청 공보실에 인터뷰를 의뢰하니 일언지하에 NO.
아직까지 이후락 씨는 일체 외부인과 접촉한 적이 없다며 만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그때 나는 이후락 씨가 한국기원 총재로 역임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정중하게 이런 요청을 했었다.
“어르신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방송과 관계없이 한 번 뵙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조훈현 국수의 조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후락 씨로부터 OK사인이 떨어졌다.
그는 친히 마당까지 걸어 나와 풋내기 방송작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응접실에 앉혀놓고 술상까지 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 분과 노코멘트 약속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지만 그날 밤 나는 참으로 많은(혁명,평양 방문 등의) 정치비화를 들을 수 있었다.
작가의 입장에서 그처럼 만나기 어려운 거물과 한자리에 마주앉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영광인데, 그 복도 다 알고 보면 삼촌 조훈현의 빽이 통했기 때문 아닌가?

이야기가 가끔씩 다른 길로 흐르더라도 조국수의 팬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아량을 베풀어 주실 줄 믿는다.
천하의 조훈현에 관해서 우리가 더 이상 모르는 게 뭐 있겠는가?
날고 기는 바둑평론가, 관전기자들의 필설을 통해 그는 밝혀질 대로 밝혀진 공인이다.
그렇기에 홈페이지의 라이프 스토리는 아무래도 정통전기 작법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비화들을 발굴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써내려 가는 것이 여러분께 편하게 어필하리라 믿는다.

피스톨 박으로 유명한 박종규 실장은 4~5급 실력이었는데 조훈현을 집에 들여놓고 시간 날 때마다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박실장도 어지간히 승부욕이 강한 인사라 그냥 친선으로 두거나 배움을 목적으로 하는 바둑은 두지 않았다.
무조건 내기바둑이었다.
프로기사는 내기를 둘 수 없지만 소년 조훈현은 어쩔 수없이 후원자와 한 집에 1원씩을 걸고 바둑을 두었다.
물론 돈이 걸린 바둑을 훈현이 져줄 리 만무했다.
그 때 박종규 실장이 잃어준 돈을 모두 합하면 꽤 큰 금액이었으리라.

 

남들은 평생 바둑공부를 해도 1급에 도달하기 힘든데 아홉 살 만에 프로기사가 된 조훈현은 관철동에서 분명 이채로운 존재였다.
이 빛나는 원석(原石)을 갈고 닦아준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각별한 애정으로 돌봐준 기사는 김인과 정창현.
6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도장에서 수업을 받고 이듬해인 63년 귀국해 조남철의 아성을 넘보던 김인 9단(당시 4단)은 틈날 때마다 조훈현 초단을 앞에 앉혀놓고 복기를 해주었다.
그 역시 일찌기 호남땅에서 천재 소리를 듣고 홀로 상경해 정상등극을 눈앞에 둔 주인공이었으니 어린 조훈현을 보는 시각이 남 같지는 않았을 터, 열 살 연상의 선배로서 그는 아낌없이 조훈현에게 무공을 전수해주었다.
김인은 태생적으로 입이 무거워 곰살맞은 애정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직 19로 위에서 흑백의 수담으로 친밀한 감정을 토해낼뿐이었다.
잔수가 밝고 싸움을 즐기는 그 시절 조훈현의 바둑에 김인 선배는 부단히 보다 더 넓고 큰 틀의 패러다임을 제시함으로써 공력을 배가시켜 준 것이다.
아마 자신처럼 외로운 승부사의 길을 택한 동향의 후배소년 조훈현에게 운명적인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와 반대로 정창현은 당시 한국기원 원생들의 사감역을 자임하며 호랑이 선생으로 군림했던 인물.
날카로운 기풍처럼 언어표현도 거침이 없었던 정창현은 조훈현의 모습만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워 할 수 없었다.
훗날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조훈현을 ‘사위’로 칭하며 끔찍히 아꼈던 정창현, 그 역시 반상의 전투에 일가견이 있어 녹록치 않은 스파링파트너 역할을 해준 은인이다.
어쩌다 강한 완력으로 훈현을 궁지에 몰아넣으면 통쾌한 웃음으로 소년의 오기를 자극했고, 번뜩이는 소년의 재기에 당해 궁지에 몰리면 과장스럽게 신음을 토하며 격려하곤 했었다.
이름의 끝 자인 현(鉉) 자를 같이 쓴다는 이유만으로도 훈현을 제자식처럼 아꼈던 쾌남 정창현,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조훈현의 찬란한 성취를 바라보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을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조훈현의 입단 전후에 실질적 매니저 역할을 해준 후원자는 바둑계의 원로인 이학진 옹이다.
이학진 옹은 조선조 마지막 왕족인 의친왕의 사위로서 조남철 국수와 막역한 사이로 우리 바둑계의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여 온 분이다.
그는 천재기사 조훈현의 떡잎을 알아보고 알뜰살뜰 비료와 물을 뿌려주었다.
흔치 않은 바둑서적은 물론이고 일본의 명국기보 등을 수집해 전해주었다고 한다.
조훈현을 일본으로 보내는 데도 이학진 옹이 앞장을 섰다.
그 이후로 9년의 유학생활과 3년의 군대생활을 거쳐 조훈현은 자연스럽게 홀로서기를 하게 됐으므로 이 옹의 후원자 역할을 계속할 기회는 없어지고 말았지만-
제1회 응창기배 대회가 열렸을 때 그는 한국기원의 젊은 기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한국 바둑계가 천 년에 한 번 오는 대운을 만났어. 이 번 세계바둑대회에서 조훈현이 우승할 걸세. 이 기회를 잘 잡으면 크게 도약할 거야.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라구.”
당시에 이학진 옹은 역학(易學)에 심취해 있었다는데, 젊은 기사들은 원로의 예언을 그저 희망사항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옹의 예언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조훈현의 응창기배 우승을 신호탄으로 한국바둑은 동양증권배와 단체전인 진로배를 휩쓸면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정상을 정복해버린 거였다.
4인방으로 압축되는 대표기사들의 투혼과 실력이 이뤄낸 업적이긴 하지만 이쯤되면 이학진 옹의 예언도 나름대로 어떤 근거가 분명히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튼 황태자의 면모를 갖춘 소년기사 조훈현은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화려한 비행을 위한 활주에 나선다.
세계 최연소 기록으로 입단한 천재소년의 존재가 일본에 알려지자 양국의 바둑관계자들이 사상최초의 전화대국을 기획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기타니 가문의 이시다(石田)가 천재성을 유감없이 떨치고 있었는데, 한일 양국의 천재들을 맞붙여보자는 기획이었다.
전화대국의 장소는 사간동 한국일보 사옥.
훈수를 방지하기 위해 양국의 기자들이 입회한 뒤에 드디어 기발한 전화대국이 진행되었다.
결과는 조훈현의 패배.
명문 도장에서 체계적인 수업을 받고 기라성 같은 동문 실력자들과 실전을 쌓은 이시다의 바둑은 탄탄하면서도 행마가 부드러웠다.
그 전화대국을 계기로 바둑계에서는 조훈현의 일본 조기유학을 서두르게 되었고-

1962년 입단한 조훈현은 1년도 채 안돼 2단으로 승단하고 나서 이듬해인 1963년 10월에 일본으로 떠났다.
만으로 겨우 열 살이 된 소년 조훈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을 떠나야 했다.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그렇다고 가기 싫은 건 아니었다.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호기심과 본격적인 바둑공부를 할 수 있다는 계획에 한껏 가슴이 부풀었었다.
훈현의 도일이 결정 나자 조선일보에서 항공료를 부담해주었다.
소년과 동행한 사람은 재일교포 박순조씨.
조훈현은 박순조씨와 함께 두 달 가량 동경에 머물며 앞날에 관한 포석을 그리기 시작했다.
낯설은 이국땅이었지만 소년은 금새 그 곳 풍토에 적응하고 있었다.
언어소통이 불편했어도 그 무렵 찢어지게 가난했던 고국에 비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있던 일본은 그야말로 살기에 너무 편한 세상이었으므로.

바둑팬이라면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그 무렵 한국의 기사들이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되면 거의 무조건 기타니 문하로 들어가는 게 관례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본 바둑계의 원로 기타니 9단은 당연히 조훈현도 관례에 따라 자신의 도장에 들어올 줄로만 믿고 있었다.
기타니 뿐만 아니라 한국의 후원자들과 현지 보호자인 박순조씨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의 나침반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우연이라는 자력(磁力)이 그 관례를 어긋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느날 우연한 계기로 조훈현 일행은 기타니 9단과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세고에 9단의 자택에 인사차 들르게 되었다.
박순조씨 아들의 친구인 유학생 김희운이 소개를 했기 때문인데, 그는 바둑은 몰랐지만 일본물정에 밝아 세고에 선생의 위상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청원과 하시모토, 두 사람밖에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 두 제자의 질량이 너무 커서 일본바둑계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세고에 선생은 연배로 보나 관록으로 보나 기타니 9단보다 격(格)이 높은 존재였다.
그러나 워낙 연로해서 그 당시 도장을 운영하고 있진 않았다.
다시 말해 내제자를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처음에 김희운씨가 세고에 9단에게 훈현의 입문을 청하자 선생은 고령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눈빛이 총명해 보이는 조훈현을 보자마자 세고에 선생은 대뜸 바둑판을 내와 기량을 측정해보고 싶어했다.
시험기(試驗棋)의 칫수는 석 점.
턱 턱 턱-
석 점을 깔고 흑을 쥔 소년은 시작부터 백말을 협공하고 코너로 몰아붙여 단숨에 승기를 포착해 나갔다.


“허어, 판이 짜지질 않는군!”
세고에 9단은 선선히 패배를 인정하고 바둑돌을 쓸어담았다.
“두 점으로 해볼까?”
옆에서 지켜보던 관계자들은 세고에 9단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고에 선생은 엄격하기로 소문난 분으로 지도기는 일 년에 한 판 둘까말까할 만큼 대국에 인색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시 두어진 제2국.
한 점 덜 놓았다고해서 소년의 바둑이 기죽을 리 만무했다.
훈현은 특유의 속기로 노인의 얼을 빼놓았다.
역시 소년의 승리.
“음, 내가 늘고 몸이 불편해 언제 죽을지 모르나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가 죽는 날까지 데리고 있겠네.”
세고에 선생은 그 한마디로 조훈현의 거취를 말끔하게 다림질해버렸다.
기타니 9단의 양해를 받고말고 할 것도 없이 세고에 9단은 독단적으로 한국에서 온 천재소년을 자신의 내제자로 삼아버린 거였다.
애초의 수순과 달라 박순조씨와 한국의 후원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나 그렇다고 세고에 9단의 결정에 가타부타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기타니 문하로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좋은 코스인지도 몰랐다.
기타니 도장은 무척 활성화되어 있어 바둑사관학교로 통할 만큼 인재들이 우글거리는 곳.
실전적으로 바둑을 배우는 데는 유리하겠지만 이방인 소년이 자칫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기가 꺾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세고에 선생은 오청원과 하시모토를 배출함으로써 소위 킹메이커로 우뚝 선 존재 아니던가.
어쨌거나 세고에 선생의 결단에 따라 조훈현은 그날부터 바로 니시오기에 있는 스승의 자택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기타니 9단은 무척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그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조훈현을 초청해 내제자로 받아들였을 텐데, 가만 두어도 자연히 자신에게 굴러 들어올 줄 알았던 진주(眞珠)를 세고에 선배에게 빼았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훗날 조훈현이 일본기원에 입단해 파죽지세로 고단진들을 연파하며 이름을 날리자 기타니 9단은 공식석상에서 마주칠 때마다 애틋한 시선을 뿌렸다고 한다.
아마 그의 입 안에서는 이런 아쉬움들이 맴돌고 있었으리라.
‘아이고, 저 아이도 내 새끼로 키웠어야 하는데!“

세고에 선생의 내제자로 들어간 시기는 겨울이었다.
그 해 겨울은 무던히도 많은 눈이 내렸었다.
훈현의 아침일과는 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치우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바둑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니시오기의 넓은 저택에 가족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고령(高齡)의 노스승과 수발을 드는 며느리, 그리고 유일한 제자인 소년 조훈현-
스승은 무서워서 감히 범접하기가 어려웠고, 세 끼 챙겨주고 깊은 모성으로 돌봐주는 세고에 9단의 며느리를 훈현은 마마짱으로 부르며 의지했다.
생모 박순애 여사가 유년기의 9년을 키웠다면, 양모 마마짱은 소년기의 9년을 맡아 준 제2의 어머니였다.
그렇게 뿌리내린 일본생활의 초기를 조훈현은 ‘마당쇠 시절’이라 표현하곤 한다.
오로지 하는 일이라곤 마당 쓰는 일과 심부름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무교육대상이었으므로 훈현은 인근에 있는 다카이도 다이용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천재의 학창시절은 어떠할까?
궁금해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훈현의 국민학교 시절, 특출하게 드러난 바둑 이외의 천재성은 별로 없는 듯 보인다.
서울에서 잠깐 다녔던 성북구 삼선초등학교 담임은 조훈현에 대한 기억을 그저 눈이 찢어진 아이 정도로 회고할 정도니까.
다카이도 다이용 국민학교에서 훈현은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일단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모든 과목이 부진했다.
그러자 담임 선생이 한 번은 훈현을 불러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쿤켄, 너에게 공부를 잘하라고 주문하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담임인 나는 너 때문에 조금 걱정되는 게 있어. 네 점수로 인해 우리 학급 평균점수가 떨어지거든.”
훈현의 저조한 점수 때문에 학급 평균 점수가 낮아지는 걸 걱정하는 선생님의 입장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리 하소연한다고 단시일 내에 고쳐질 리도 없는 것.
어느 날 우연히 굴러온 이방인 학생 쿤켄을 떠안은 그 선생님의 팔자가 사나운 탓으로 돌릴 수밖에-

그와 반면에 세고에 선생은 슬하에 훈현을 거느리고 뿌듯한 노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기사지만 바둑계의 대부로 추앙받고 있고, 제자 오청원과 하시모토가 좌우의 날개로 버티며 한껏 명예를 빛나게 해주고 있었으며,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바둑과 문학에 관한 담소를 즐기며 학(鶴)처럼 고고한 기품으로 황혼을 맞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훈현은 마지막 재산이자 희망이었다.
이 아이만 잘 키우면 동양 삼국의 천재들을 제자로 거느린 복 많은 사람이 된다.
아아, 내가 조금 더 젊어서 훈현이를 만났더라면......
그처럼 늙으막에 얻은 내제자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세고에 선생은 좀처럼 훈현에게 웃는 낯을 보여주지 않았다.
물론 바둑을 둬주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왕자처럼 뭐든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훈현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들이었다.
그러나 낯선 일본땅에서 소년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스승에 대한 복종뿐이었다.
그저 관성으로 이 어려운 시간의 숲을 빨리 통과해나가길 바랄뿐이었다.
스승이 마냥 엄격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훈현의 성격과 행동습성등을 정확히 궤뚫어 보고 있었다.
훈현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일부러 강아지 벵케이를 데려올 정도로 세심하게 배려해주었다.
벵케이는 강아지 때 들어와 9년 동안 훈현과 동고동락한 유일한 친구라고 해도 좋았다.
(훈현이 한국으로 귀국하고 세고에 선생이 자살하자 벵케이도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같은 시기-
기타니 도장에는 여덟 살 짜리 꼬마 조치훈이 입문해 수련을 쌓고 있었다.
1956년생으로 조훈현보다 세 살 아래인 조치훈은 알려진대로 조남철 국수의 외손자이자 기사 조상연의 동생이어서 일찍부터 지체없이 바둑사관학교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시다, 오오다케, 고바야시, 가토, 다케미야 같은 엘리트들이 우글거렸는데 치훈은 막내뻘로 그 호랑이굴에서 정글의 법칙을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함께 건너온 김인, 하찬석, 조상연 등이 있어 아주 외롭지는 않았다.
조훈현을 사랑하는 올드 바둑팬들은 종종 이런 가정을 해보곤 한다.
“만약 조훈현이 세고에 문하로 들어가지 않고 기타니 문하로 들어갔더라면 바둑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무척 난해한 질문이지만 한번쯤 음미해 볼만한 화두가 아닐까?


 

조훈현은 일본으로 건너간지 3년 만에 일본기원에 입단하게 된다.
그 3년 동안 그는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정말 호사가들의 가정법처럼 기타니 문하로 들어갔더라면 훨씬 입단의 시점이 빨라지지 않았을까?
그 시기에 그가 바둑돌을 멀리한 건 아니었지만 스승 세고에의 지도방법이 유유자적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기타니 도장에서 맹훈련을 받고있는 한국기사들의 소식을 들으며 서울의 가족들은 훈현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세고에 선생이 훈현을 너무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다 못한 부친 조규상은 사위 김석곤과 머리를 맞대고 아주 정중하면서도 항의의 뜻을 담은 글월을 작성해 일본으로 보냈다.
제발 훈현이를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얼마 안가서 세고에 선생의 답장이 날아왔다.
역시 정중하면서도 간결한 대답이었다.

<바둑은 예(藝)이면서 도(道)입니다.
기량은 언제 연마해도 늦지 않습니다.
큰 바둑을 담기 위해서는 먼저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도야가 우선이지요.
훈현이의 기재는 오청원과 버금갑니다. 아니 오청원을 능가하는 기사가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 세고에를 믿고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 답장을 받아든 가족들은 뭐라 할말이 없었다.
공연히 안달이 나 냄비근성을 보인 것 같아 아들의 스승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주 먼 훗날, 문제의 항의편지를 썼던 훈현의 부친과 매형은 세고에 선생의 통찰력과 교수법(敎授法)이 백 번 옳고 마땅했다고 입을 모았다.
사실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의 훈현은 워낙 모두가 위해주는 바람에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고집불통이었는데 세고에 문하로 들어가 절제의 미덕을 배우면서 성격의 첨예한 모서리가 절차탁마(切磋琢磨)됐다는 것이다.

니시오기의 스승집에 정착하면서 훈현은 일본기원 원생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프로 2단의 신분이었는데 원생으로 다시 시작하려니 자존심이 상했지만 당시 양국 바둑의 차이는 분명했으므로 불만은 없었다.
급수 평가를 받아보니 4급 판정이 내려졌다.
‘어떻게 그런 급수가?’
훈현은 창피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일전 전화대국으로 인연을 맺었던 이시다와 만나 재대결을 벌일 기회가 생겼는데 그 대국을 통해 자신의 바둑이 얼마나 투박한 것인지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훈현의 장기는 싸움바둑인데 이시다는 좀처럼 맞붙어주지 않고 툭툭 치고 빠지며 실리를 챙기는 거였다.
결과는 불계패.
그 날 이후 조훈현은 충격을 받아 바둑의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학교 수업을 받으랴 원생생활을 하랴 삼중고에 시달리면서 그는 조금씩 야무지게 성장해가고 있었다.
세고에 선생은 직접적인 지도대국보다 바둑의 기본에 대해 중점적으로 교육했다.
특히 바둑을 두고 나면 반드시 복기와 함께 기보를 챙길 것을 강조했다.
프로기사의 모든 것은 기보에 담겨있으므로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이었다. 훗날 노스승은 훈현의 공식대국 기보를 단 한판도 빠짐없이 정리해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 기보와 관련된 생각 하나.
기록제조기 조훈현은 사실 억울한 핸디를 안고 있다.
어지간한 바둑관계자들은 인식하고 있겠지만 그 핸디는 바로 일본기원에서 활동했던 1966 ~ 1972년 사이의 전적이 전혀 기록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기원에서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지만 왜 그 기록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는지 당시의 담당자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의 또 다른 영웅 조치훈의 혁혁한 기록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듣기에 당시의 처사는 다분히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내린 판단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나라 어느 기원에서 활동을 했든지 프로의 전적은 일관되게 기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조훈현이 대략 6년 동안 일본기원에서 활동하며 올린 승수(勝數)는 300승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봉수 9단이 세운 세계 최초 1천승 돌파의 기록보다 몇 년 앞서는 기록이 된다.
뿐만 아니라 조훈현이 현재 날마다 경신해가고 있는 최다승의 기록 저울추도 시급히 바꿔달아야 하는 것 아닐까?
당시의 기록은 일본 니시오기 세고에 선생 자택에 아직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그런 기보들을 보물처럼 여겨 한국에 옮겨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누군가 그런 노력을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며, 지하에 잠든 세고에 선생도 아마 흔쾌히 지지하리라 믿는다.
바둑강국이 되려면 데이터 구축과 컨텐츠 확보가 우선 아닌가?

원생수업을 받으면서 훈현은 바둑의 정석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
뻔히 아는 길이었지만 다시 밟기로 작심했다.
마음을 비우니 한결 진보가 빨랐다.
승패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원생들과 많은 바둑을 두었다.
집에서는 온갖 고전과 일류기사들의 대국집을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2년 만에 강한 1급 판정을 받았고 도일 3년 째인 1966년 여름, 세 번째 출전한 입단대회를 통해 정식 일본기원 프로기사가 된다.
그의 나이 13세.
당시까지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타이기록의 주인공이었다.
이후 67년 2단, 69년 3단, 70년 4단, 71년 5단으로 승단한 조훈현의 행보는 실로 날렵하고 경쾌했다.
단위(段位)의 서열이 뚜렷한 일본기원에서 이처럼 매년 승단하기란 결코 쉽지않은 일인데-
그러나 사실 그는 알게 모르게 승단대회에서 피해를 본 입장이었다.
원인은 기타니 도장의 문하생들 때문이었다.
일본기원 승단대회 규정에는 같은 도장 문하생들끼리 대국을 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이시다, 고바야시, 가토, 조치훈 등 기타니 동문들은 서로 부딪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그들은 승단대회의 승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세고에 도장 출신인 조훈현은 늘 그들 전부와 맞상대를 해야만 했다.
승단하기 위해서는 기타니 문하생들을 헤치고 나가야 했던 것이다.
만약 조훈현이 기타니 문하로 들어갔다면, 당연히 그의 입단과 승단은 훨씬 빨랐으리라는 것이 통설이다.
빠른 진군이 낫다는 뜻은 아니지만.


세고에 도장에서 9년 동안 수련을 쌓았지만 훈현이 스승에게 직접 지도 받은 바둑은 열 판이 채 넘지 않았다.
그러니까 1년에 겨우 한 판 정도 가르침을 받은 셈이었다.
그나마도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 의례적으로 사제가 판을 짜고 어느 시점에 봉수(封手)하고 접은 적이 많았다.
세고에 선생의 바둑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 국수는 지금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렇게 평한다.
“센 바둑이시지. 아주 정수만 골라두시는 분이야. 날일자로 지키고 두 칸 벌리고 급소만 찾아두는 스타일인데 상대가 어떻게 두어도 불계로 끝나는 판이 없었어. 정확하게 덤 안쪽에서 승부가 나거든. 반집에서 다섯 집 안쪽으로 말야. 세상에 그런 바둑도 찾아보기 힘들 거야.”
스승은 그런 사람이었다.
시시콜콜 이런 수 저런 수를 가르치기보다는 프로기사로서의 품위와 바둑의 시야를 넓혀준 정신적 지도자였던 것이다.

소년 훈현이 실전수업을 쌓은 곳은 다름 아닌 후지사와(藤澤秀行)의 연구실이었다.
당시 후지사와 9단은 전후 일본 기계에서 변환(變換)의 천재 야마베(山部俊郞), 독설가 카지와라(梶原武雄)와 함께 기계의 삼총사로 불리우던 거목이었는데 포석감각이 당대제일로 평가받고 있었고 큰 승부에 강한 기사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워낙 자유분방한 천재형인 후지사와는 우연히 한국에서 건너온 조훈현을 발견하고 각별한 애정을 쏟아주었다.
소년의 화사한 기풍과 전류처럼 빠른 직관이 자신의 스타일과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후지사와는 후배들에게 철저히 속기(速棋)를 강조하곤 했다.
빨리 두어야 감각이 발달한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연구회에는 오오다케(大竹英雄), 임해봉(林海奉),구토(工藤) 등이 멤버로 참여하고 있어 그야말로 쟁쟁한 영웅호걸들이 모인 양산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훈현은 그 멤버들 중 막내였다.
바둑황제 조훈현의 일생은 거의 노출되어 있지만 이 시기의 디테일한 과정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는 황태자 시절에 이미 그토록 물 좋은(?) 바닥에서 활개를 치며 바둑을 배웠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후지사와, 임해봉, 오오다케, 구토 등등 그 면면의 명성과 호방한 기풍들을-
그들 중에 하나라도 쫀쫀한 바둑이 있던가?
화려하고, 두텁고, 미학적이며, 완력을 구사하는 고수들이 아니던가?
그들 틈바구니에서 소년 훈현은 알게 모르게 전투력을 전수 받았으니 알고 보면 그들이 죄다 스승이며 사형이요 동지에다가 우리 편(?)인 셈이다.
성격이 천진난만하면서도 구김살이 없는 후지사와는 훈현을 보기만 하면 바둑판 앞에 앉혀놓고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덤벼라. 쿤켄(훈현의 일본식 발음)!”
그는 시덥잖게 권위를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대 최고수의 반열에 끼는 원로였지만 바둑판 앞에서는 마냥 즐거워지는 어린애와도 같았다.
두 천재의 바둑은 늘 속기로 부딪혔다.
후지사와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제일의 속기왕 이었는데 훈현의 바둑은 그보다 훨씬 시간사용량이 적었다.
그 속기대결의 치수는 처음에 둘셋(2점으로 한판,3점으로 한판)으로 시작해서 1년 만에 선둘(선으로 한판, 2점으로 한판)로 바뀌었다.
얼마나 많은 판을 두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은 철저히 단판 치수고치기로 대결했고 마침내 어느 시점에선가 훈현이 선으로도 앞서기 시작하자 치수고치기의 룰이 깨지고야 말았다.
아무리 승률이 좋다기로서니 기계의 거목이자 대선배인 후지사와를 상대로 백을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훈현의 기재를 깊숙히 들여다보았던 후지사와는 그 때부터 공공연하게 이런 소리를 달고 다녔다.
“훈현의 기재는 세계최고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초일류기사로 우뚝 서고 말 것이다.”
세고에 선생과 후지사와 9단이 그토록 침이 마르게 칭찬했던 천재 조훈현은 그러한 후광에 힘입어 일본기원에서 일찌감치 주목받는 존재로 부각된다.
비록 입단은 예상보다 조금 늦었지만 2단 시절에 명인전과 본인방전을 비롯해 각종 기전의 본선 문턱까지 진출하는 놀라운 성적을 낸 것이다.
한국과 달리 단위(段位)의 위계질서가 철저한 일본에서는 모든 타이틀전이 1차 예선, 2차 예선 등 관문이 복잡해 저단자들이 본선에 오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본선에 오르기 위해서는 1,2차 예선에서 전승을 거두어야 가능했다.
훈현은 명인전에서 파죽의 7연승을 거두며 그를 사랑하는 스승과 선배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아직 다케미야, 이시다, 가토 같은 선배들을 따라잡진 못했지만 고바야시나 조치훈보다는 한발 앞서가는 성적이었고 모두들 그렇게 평가해주는 분위기였다.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기타니 도장과 달리 혼자서 외롭게 세고에 도장을 지켜야 했던 조훈현에게 후지사와 연구회는 바둑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전진기지로 무척 의미 깊은 공간이 된다.
그 곳에서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후지사와 연구회의 멤버 중에 아베 요시테루(安倍吉輝) 6단이 있었는데 그는 후지사와의 직계제자로서 기재는 별로 뛰어나지 않았어도 엄청난 공부벌레였었다.
훈현보다 한참 선배였으나 바둑은 다소 딸려 속된 말로 밥이라고 해도 좋았다.
사람좋은 아베 6단은 훈현의 존재에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후배를 사랑해야만 했다.
“ 이 아이가 바로 장래의 명인입니다.”
그는 훈현을 데리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랑을 늘어놓았다.
도쿄 양산박 후지사와 연구실 멤버들은 막내 격인 조훈현을 그렇게 담금질시켰고 그렇게 반짝반짝 광을 내준 고마운 은인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베 6단과 후지사와 9단이 합작으로 어린 조훈현을 궁지에 몰아넣은 사건이 있었으니......
그 사건이 바로 내기바둑 파문사건이다.


 

그 때가 15세로 2단이던 시절.
평소 훈현에게 빠듯하게 밀리던 아베 요시테루 6단이 작심하고 바둑판 앞에 앉아 도발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쿤켄, 우리 내기바둑으로 한판 붙어보자. 그냥 두는 건 승부욕이 동하지 않잖아?”
그는 바로 얼마 전 명인전 2차 예선에서 훈현으로부터 쓰라린 패배를 당한 뒤였다.
“내기는 선생님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이, 여기서는 괜찮아. 도박을 하는 건 아니니까.”
“어쨌든 내기는 곤란한데요.”
훈현이 한사코 사양을 하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후지사와 9단이 아베를 거들고 나섰다.
“여이, 쿤켄. 걱정하지 말고 붙어 봐라. 한 판에 1백엔 거는 정도는 괜찮다. 아베 말대로 승부욕을 돋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양념도 필요한 법이야.”
훈현은 별수 없이 아베 앞에 앉았다.
1백엔은 적다면 적은 돈이었고, 열다섯 살 훈현에게는 또 그리 적은 돈만은 아니었다.
내기바둑이 벌어지자 연구회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판을 에워쌌다.
훈현의 머릿속에 이제 세고에 선생의 엄명은 지워지고 없었다.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전신에 번져 올랐다.
한 판, 두 판, 그리고 세 판-
애시당초 헐거운 상대였지만 훈현은 독한 마음을 먹고 내리 세 판을 스트레이트로 밀어버렸다.
보통 내기바둑의 경우 그처럼 한 쪽이 일방적으로 몰리면 덤을 주거나 치수를 조정하는게 관례지만 프로 6단이 2단에게 굴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계속 호선으로 판이 진행되었다.
다시 네 판, 다섯 판, 그리고 여섯 판-
아베 요시떼루 6단은 개망신을 사서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어쩌면 그는 한 판이라도 건져보겠다는 욕심보다도 천재 조훈현의 진가를 확실하게 엿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에 판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그날 훈현은 내리 6승을 거두고 6백엔을 땄다.
그 소식은 금새 일본바둑계에 널리 알려졌다.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아베 요시테루였다.
그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훈현이를 자랑하고 다녔다.
“세고에 선생의 내제자 훈현이에게 내기바둑을 둬서 여섯 판을 깨졌다. 정말 무서운 놈이다.”
물론 그의 의도는 동생처럼 아끼는 훈현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싶은 선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식이 세고에 선생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만다.

“쿤켄. 이리 오너라.”
내기바둑을 둔 며칠 후, 세고에 선생은 준엄한 표정으로 훈현을 불렀다.
영문도 모르고 훈현은 노스승 앞에 꿇어앉았다.
“아베 요시테루와 내기바둑을 두었다면서?”
“......네.”
훈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스승은 제자의 대답을 듣고 나서 눈을 감았다.
히로시마 출신의 스승은 2차대전 당시 원폭피해를 입어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 낯에 분노가 어리자 차마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무서운 표정으로 변해갔다.
“보따리 싸서 당장 나가라! 네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그 따위 정신태도로 바둑을 대한다면 다 부질없는 일이다. 나와의 관계는 오늘로 끝났으니 이제 한국으로 들어가거라.”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훈현은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얼핏 모든 걸 책임지겠다던 후지사와 9단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거기서 이러쿵저러쿵 변명 따위를 달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너는 더 이상 나의 제자가 아니야.”
대화는 그 것으로 끝이었다.
훈현은 옷가지 몇 벌을 꾸려서 참담한 심정으로 니시오기를 떠나야만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같아서는 후지사와 연구회 클럽 선배들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홀홀단신 일본에 건너온 훈현의 입장으로 볼 때 세고에 문하에서 파문당한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어쩌면 바둑 자체를 포기해야 할 상황인지도 몰랐다.
아직 열 다섯에 불과한 그로서는 이 난관을 합리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했다.
하루종일 도쿄 거리를 헤매다 훈현은 한국식당의 간판을 발견하고 무작정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유학생인데 사정이 어려워 찾아 왔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숙식을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주인은 훈현의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식당에서 훈현은 졸지에 접시닦이로 전락해 2주일 동안 주방의 싱크대를 지키며 눈물겨운 밥을 먹어야 했다.
세고에 선생의 분노가 가라앉은 기간이 바로 그 2주일이었다.
그 동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세고에 선생을 찾아가 훈현의 처지를 변호하고 내기바둑의 동기가 불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용서를 청했다.
한 입으로 절대 두말을 하지 않는 세고에 선생은 그 때 처음으로 원칙을 깨트리고 훈현을 다시 받아들였다.
철없는 제자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 파문을 시킨 것이지 사실 선생의 마음은 2주 동안 몹시 불안하고 허허로웠을 것이다.
나가란다고 아무런 대책 없이 휭 나가버린 제자가 도대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무슨 일은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웠으리라.
이 대목에서 소년 조훈현의 비화 하나를 추가할까 한다.
여덟 살 무렵의 사건이다.
바둑보다 만화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어린 훈현의 산만한 자세에 화가 난 부친 조규상이 하루는 아들의 손목을 부여잡고 거리로 나섰다.
“너 이 놈! 그 따위로 바둑을 둘려면 다 그만 둬라. 한강으로 가자. 이 애비는 너 때문에 복장이 뒤집혀 살기가 싫다. 한강에 풍덩 빠져 죽어버릴란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아버지. 잘못은 제가 했는데 왜 아버지가 죽습니까? 제가 한강에 빠져 죽겠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앞장서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충격요법을 통해 버릇을 고치려던 아버지는 그 한 마디로 넉다운이 되고 말았었다.
세고에 선생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사건과 묘하게 맥락이 닿아있는 일화가 아닌가?
물론 내기바둑 사건으로 훈현은 큰 교훈을 얻었지만 세고에 선생도 이 마지막 제자를 막 다뤄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 당시까지도 천재 조훈현의 특질 가운데 하나는, 궁지에 몰려도 소년답게 아쉬운 소릴 하지 못하고 상황에 떠밀려 흘러가고 마는 케세라 세라 기질이 다분했다는 점이다

 

조훈현의 취미는 등산과 독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바둑 이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쪽은 단연 컴퓨터 게임이다.

평창동 그의 자택엘 가보면 호화롭진 않아도 방의 배치가 아주 아기자기하게 설계되어 있음에 놀라게 된다.
1층에는 노모의 방과 부부의 침실, 거실이 있고, 지하에는 서재 겸 기록실(그가 평생 획득한 트로피와 상패들을 진열한)과 음악실(피아노와 노래방기기가 설비된)이 있으며, 2층에 세 자녀의 방이 각각의 개성에 따라 꾸며져 있다.

조 국수는 대국이 없는 날 특유의 날쌘 행보로 2층 계단을 서너 개씩 뛰어 밟으며 자녀들의 영역을 침범하곤 한다.
그 곳에 인터넷 전용선이 깔린 펜티엄급 컴퓨터가 있기 때문이다.
대낮이라 두 딸은 학교에 가 있고 아들 민제는 먼 지방의 대학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컴퓨터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의 컴퓨터 포석도 바둑만큼이나 빠르다.
아직 자판 솜씨는 초보 수준이지만 마우스를 움직이는 솜씨 하나는 날렵하기 짝이 없다.
인터넷으로 들어가면 초기화면의 사회정보를 단숨에 속독하고 게임사이트로 들어간다.
스타 크래프트도 즐기고 고스톱과 블랙잭 등 다양한 게임을 만끽하는데 무엇을 해도 승률은 높은 쪽이다.

조훈현의 게임에 대한 감각, 승부에 대한 집중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세계적인 프로 갬블러이자 조훈현의 절친한 친구인 차민수 4단도 조 국수의 내공(?)에 혀를 내두른다.
“바둑만 잘 두는 게 아닙니다. 포커와 장기, 마작 솜씨도 뛰어나죠. 천부적인 승부사입니다.”

조 국수의 승부사적 에피소드 중에 전설적인 일화가 바로 체스 챔피언을 꺾은 기록이다.
언젠가 LA를 방문했을 때 일정 중에 체스대회를 참관하는 스케줄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체스 챔피언과 바둑황제 조훈현이 인사를 할 기회가 생겼다.
동서양의 챔피언들이 만나자 주위의 호사가들이 체스 한 판을 기념으로 둬보라고 권유했다.

물론 전공이 달랐으므로 형식적인 팬서비스 대국에 불과했지만 뜻밖에도 체스를 둬본 적 없는 조훈현이 망설임 없이 챔피언의 맞은 편에 앉았고 속기로 한판을 벌인 결과 기습적인 승리를 낚아챈 것이었다.
그 황당한 결과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난 체스의 체 자도 몰라. 그런데 그들이 두는 것을 유심히 보니까 몇 가지 이기는 길이 눈에 들어오더라구. 축구로 표현하자면 하프 서클에서 윙 쪽으로 패스한 다음 빠르게 적진을 돌파한 뒤 센터링을 올리고 장신의 포워드가 헤딩슛을 날리는 공식같은 것. 그러니까 일정한 틀의 코스가 보이더란 이야기야.”
이 것이 그의 국후 무용담이다.

공식대국은 아니지만 체스 초짜가 챔피언을 한방에 보낼 수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닌가?
그러나 조훈현이란 인물 자체가 워낙에 상식적으로 해독이 되지 않는 천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기에 이 에피소드는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닌지 모른다.

그가 체스에 관해 덧붙인 한마디가 통쾌하기만 하다.
“체스나 장기는 바둑에 비해 경우의 수가 훨씬 적다. 벌써 체스는 인간이 컴퓨터에게 밀리고 있는 판이다. 하지만 바둑은 어떠한가? 컴퓨터가 아무리 기를 써도 19 X 19 줄 바둑의 변수를 인간만큼 짚어낼 수가 없다. 바둑이야말로 진정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마인드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다시 일본 유학시절로 돌아간다.
내기바둑 사건으로 세고에 선생으로부터 혼쭐이 난 조훈현은 그 뒤 각별히 조심을 하고 바둑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나 또 한 차례 파문 지경까지 몰릴 만큼 혼이 난 전과가 있었다.
그 것은 다름 아닌 빠찡1꼬 사건.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인근 빠찡1꼬룸에 놀러갔던 일이 화근이 돼 다시 세고에 선생의 대노(大怒)를 샀던 것.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소한 일이지만 스승 세고에는 조훈현을 속된 잡기(雜技)의 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조훈현의 인식은 달랐다.
빠찡1꼬든 마작이든 확률을 바탕으로 승부를 겨루는 게임의 세계가 마냥 경이로울 뿐이었다.

그런 성향에 있어서 그는 후지사와 9단과 아주 흡사한 구석이 많았다.
경륜과 도박으로 큰 돈을 날리고 말년에 궁핍을 면치 못했던 후지사와 9단은 그런 역경을 딛기 위해 최고 상금이 걸린 기성전에서 가공할 기록을 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여러 게임에 대한 낭만적 호기심은 두 사람이 비슷할지 모르지만 조훈현의 경우는 후지사와와 조금 다르다.
게임은 게임일 뿐, 인생이 망가지도록 거기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 스타일이 바로 조훈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승률이 희박한 데 뭐 하러 풀 배팅을 하느냐는 것이다.
조훈현도 경마광이고 포커광이며 못 하는 게임이 없는 만능 갬블러지만 절대로 큰 규모의 도박은 하지 않는다.
바둑 승부의 열기를 잠깐 식히는 차원의 오락으로 즐길 뿐이다.
위험을 피해가는 안전위주의 유형이 아니라 지는 게임은 하기 싫다는 전형적인 승부사 기질의 소유자가 바로 조훈현이다.

아무튼 그 두 가지 사건으로 위기에 몰리긴 했지만 내기바둑에서 아베 6단의 돈을 땄듯이 빠징꼬 게임에서도 그는 짭짤하게 돈을 땄다고 한다.
정말 못말리는 소년 승부사 조훈현의 진면목이 그 대목에서도 보인다.


조훈현은 강하다.
강함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지난 20여년간 한국바둑계의 화두는 이 것이었다.
대략 강산이 두 번 변하고 정권이 네댓 번 바뀌었을 기간이었으나 조훈현은 바둑계의 독재자로 철권을 휘둘러왔다.
된장바둑의 대명사 서봉수 명인이 줄기차게 대권에 도전했었지만 조훈현은 정상에 올라선 이후 어느 한순간도 타이틀 다관왕의 지위를 빼앗겨 본 적이 없었다.
이창호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기사들은 조훈현의 전횡 앞에서 거의 전의를 상실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평생의 라이벌 서봉수 9단조차도 특유의 오기를 어느 순간 접어버리고 이런 말을 했을까.
“내 바둑의 스승은 조훈현이다. 그의 바둑에는 향기가 우러난다.”
수많은 바둑팬들이 서명인의 고백에 박수를 보냈다.
그 표현은 간결하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찬사였다.
오랜 세월 무수히 할퀴고 무진장 몰매를 맞았지만 그 포연 가득한 전쟁터의 한 모퉁이에서 검을 칼집에 꽂으며 상대의 공력을 인정하는 무사의 한 마디-
우리는 서명인의 표현에서 조훈현과 서봉수라는 멋진 맞수를 한 시대에 품고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에 그저 흐뭇할 뿐이다.
아무튼 그랬다.
조훈현은 엄청 강했다.
무엇이 강한가? 라는 명제로 월간 바둑지에서 특집을 꾸몄는데 결론은 모든 부분이 강한 것으로 매듭지어졌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세계 최고의 포석감각, 휙휙 바람소리가 묻어나는 속력행마, 타이트하게 죄어오는 완력, 뼈를 분지르고 관절을 꺾는 파괴력, 어설픈 타협을 거부하는 단호함, 그리고 누구보다 빠른 형세판단, 궁지에서 발휘되는 가공할 흔들기 등등 그는 전신(戰神)이라 불러도 어색함이 없는 진정한 강자였다.
그런 총체적 파워 앞에서 대부분의 기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고 스텝이 둔화되어버리는 공포감을 맛보아야 했다.
‘조훈현이 둔 수니까 뭔가 사연이 있겠지?’
그가 아무렇게나 둔 수는 없었겠지만 때로 뻑수를 두어도 상대들은 마냥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강자 프리미엄이라고 부른다.
그는 충분히 강했기에 덤으로 그런 프리미엄까지 획득했던 것이다.
이창호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조훈현의 빈틈과 취약점이 조금씩 드러나긴 했지만 그 전까지 바둑계는 조훈현 제국의 해질 날을 감히 예측조차 못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승부사 조훈현을 과연 누가 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 왕국의 수명을 30년 이상으로 점치며 치를 떨었으리라.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사랑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조훈현은 정말 기분 나쁜 독재자일 수도 있다.
거의 이십 년 동안 정상을 지키고 있다가 슬그머니 제자에게 왕관을 세습한 모양을 연출했으니 시원한 쿠데타도 없었고, 통쾌한 혁명도 없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아직까지도 물러나지 않고 심심찮게 상금 두둑한 국제대회 타이틀을 헌팅하고 있으니 도대체 그 저력의 바닥을 가늠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어찌됐든 조훈현 바둑의 특질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속력’일 것이다.
그리 몸집 크지 않은 이승엽이나 이종범이 홈런을 쉽게 날리는 이유는 타이밍과 배트 스피드 때문이다.
조훈현의 스피드는 세계적으로 공인된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
그 스피드의 원천은 역시 천재성에서 나온 것일 테고......

<저단 기어의 힘>
자동차 기어의 1단과 2단은 힘이 좋다.
톱니바퀴가 굵어서 회전 수는 적지만 대신 바퀴를 끌어올리는 파워가 힘찬 것이다.
일본기원에 입단한 이후 초단과 2단 시절 조훈현은 마치 자동차 저단 기어처럼 강력한 드라이브로 파죽지세의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워낙에 한국에서 건너와 세고에 문하에 들어간 황태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이미 입단 무렵 스승의 훈장수여식 기념대국에서 천하의 오청원 9단과 멋진 속기를 선보여 갈채를 받았고, 2단 시절에 청봉회(오청원, 임해봉의 이름을 딴 모임) 속기대국에서 당시 본인방이었던 임해봉 9단을 상대로 정선으로 두어 4집을 이기기도 했다.

2단이던 시절부터 파죽지세로 저단자들의 1,2차 예선을 통과하고 3차 예선에 오르면서 고단자 킬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기전이었던 명인전과 본인방전에서 파천황(破天荒)의 8연승 기록을 남기며 정상권의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물론 결승에서 야마베(山部俊郞)9단 같은 정상급의 실력자에게 가로막혀 본선 멤버가 되진 못했으나 모든 매스컴들이 경이적인 시선으로 조훈현을 조명하며 ‘꼬마 명인’ ‘미완의 대기’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 무렵은 지쿠린(金竹林) 시대라 해서 김인, 오오다케, 임해봉 등 삼국을 대표하는 기사들이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에 잠깐 유학한 뒤 귀국해 국내 각 기전을 석권한 김인, 명실공히 일본 최고의 타이틀인 명인위를 쥐고 있었던 임해봉, 그리고 아직 타이틀 홀더는 아니었지만 품격있는 바둑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오오다케 등 세 사람을 동양 3국의 대표기사로 손꼽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기타니 9단 같은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양조(曺,趙)’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었다.

조훈현과 조치훈, 양웅이 장차 세계바둑계를 평정하리라 짚었던 것이고, 그의 선견지명은 어김없이 십 년 후 쯤 현실로 맞아 떨어졌다.
1970년-
17세의 조훈현은 33승 5패 1빅(승률 88.6%)의 기록을 세우며 기도상(碁道賞) 신인상을 받게 된다. 
69년에 이시다가 받았고, 71년에 조치훈이 받았다는 것을 음미하면 당시 조훈현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두면 이기던 시절이 바로 이 때부터였다.

한편 서울의 가족들은 승승장구하는 훈현의 활약을 먼발치로 지켜보며 소리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보문시장의 야채행상으로는 경제여건이 좀처럼 나아질 리 없었지만 막내 아들의 대성(大成)을 기원하며 참으로 신산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존재 그 자체로 든든했던 큰 아들(조종현)은 월남에 포병으로 참전했고 딸들은 차례로 시집을 가 보문동 언덕배기(주소로는 삼선동) 자택은 늘 정적이 고여 있었다.

거의 살림을 도맡아 꾸려나가던 박순애 여사가 버스에 치여 7~8미터 정도 날아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시집간 딸들의 처지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않아도 깡마른 가장 조규상은 천식을 앓으며 나날이 말라갔다.
조훈현 홈페이지의 앨범을 보면 알겠지만 피골이 상접한 부친의 체중은 50Kg도 채 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늘 자부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한달에 한 번 동경에서 배달돼오는 ‘기도지(碁道誌)’를 기다리며 세월을 낚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조규상의 장녀인 조복심(68세)의 아들로서 40년 가까이 바둑황제 조훈현 가문을 지켜보고 함께 생활해왔던 가족의 일원이다.
조국수의 외조카로 삼촌과는 여덟 살 차이가 나는데, 필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년에 두 달 씩 외가댁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남도의 해안지방에서 교직생활을 하신 까닭에 방학만 되면 서울 친정집으로 올라왔고 그 덕에 누구보다도 천재 삼촌의 체취를 가까이 맡을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외가댁은 보문동과 삼선동 경계의 비탈진 언덕에 덕지덕지 붙은 조그마한 한옥이었는데 할아버지 조규상은 틈만 나면 뒤뜰의 바위절벽을 망치와 정(釘)으로 깡깡 두들겨댔다.

그 땐 영문을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터는 무허가였다고 했다.
시유지였는데 20년 이상 거주하면 거주자에게 소유권을 인정해 준다해서 할아버지는 조금씩 집터를 넓히는 공사를 벌였던 모양이었다.
방이 세 개 있었는데 그 중 가운데 방이 바둑서재였다.
식구들이 많을 때에도 그 방은 일본 유학을 떠난 막내 조훈현의 방으로 비어져 있었다.
나는 날마다 그 방에 들어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케케묵은 책 냄새와 소년이 가지고 놀기 딱 좋은 바둑용품들.
할아버지가 스크랩해놓은 막내 삼촌의 신문기사들을 훔쳐보며 마냥 가슴 뿌듯했다.

시골에서 자랐기에 특별히 바둑을 배울 기회는 없었으나 필자는 방학 때마다 그 방에 잠입해 들어가 바둑책을 보며 저절로 기리(棋理)와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막내삼촌이 유학 도중 잠깐 귀국했을 때 그 방에서 나를 목마(木馬)태워준 적이 있었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의 편린이지만 나는 그 때 교복 차림의 훈현이 삼촌을 무릎 꿇려놓고 등에 올라 이랴! 이랴! 채찍질했던 기억을 분명히 간직하고 있다.

바둑황제 조훈현의 등에 올라타고 호령해 본 사람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나는 그 시절부터 무던히도 삼촌을 짝사랑했었다.
바둑이 뭔지는 몰라도 기막히게 두뇌가 좋아 어른들하고 맞장떠서(?) 마구 이겨버리는 삼촌이 내게는 삼국지의 조자룡보다도 멋있는 우상이요 영웅이었던 것이다.

어느 겨울날.
할아버지 조규상은 외손자인 필자의 손목을 붙잡고 종로로 끌고 갔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동대문에서 영천까지 가는 전차를 타고 갔으니 아마도 60년대 후반이었지 않나 싶은데......
목적지는 관철동 한국기원.
조개탄 난로와 연통이 설치되어 있는 일반기원실에 들어가 할아버지는 필자를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친구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언젠가도 언급했던 것처럼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판 정도 두는 엄청난 장고파였기에 어린 필자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손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아버지는 연거푸 사나흘 동안 한국기원에 필자를 끌고 다녔다.
필자도 요령이 생겨 사람 구경도 하고 만화책도 보고 바깥으로 나가 종로거리의 번화함을 눈요기하며 시간을 때웠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때 왜 할아버지께서 나를 관철동에 데리고 갔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들 훈현의 대타로 손자를 찍었던 건 아니었을까?
손자를 끌고 다니면서 유학간 아들의 빈 자리를 채워보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필자는 할아버지 조규상 옹의 그윽한 눈매를 분명히 기억한다.
내가 어른들한테 시커멓게 깔고 바둑을 둘 때 당신은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지켜보면서 손자의 기재를 가늠했던 것 같다.
훗날 조국수가 아들 민제의 기재 없음을 확인했던 것처럼 조규상 할아버지도 손자의 산만한 행마에 저억이 실망했으리라.

그러나 할아버지와 손자는 아주 좋은 바둑상대였다.
아홉 점부터 시작한 승부는 방학 때마다 치수가 바뀌었고 마침내 교복을 입을 즈음엔 호선으로 팽팽한 맞상대가 되었으니까.
너무 어려운 분이라서 실력이 역전된 후로도 필자는 백을 잡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 제법 힘이 붙은 필자는 할아버지를 상대로 온갖 꽁수와 노림수, 함정수를 동원해 판판이 밀어버렸다.
어린 마음에 인정받고 싶은 치기가 동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승패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다.
어렵게 복기를 하면서 떡수와 완착을 지적하며 무진장 혼을 내시는 거였다.
“치이, 지셨으면서......!”
당시에 필자는 그런 옹졸한 생각으로 할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건대 할아버지는 진정한 애기가요, 정신만큼은 명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분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고국의 가세(家勢)가 형편없이 기울어가고 있는지 유학생 조훈현은 알 바 없었다.
어머니의 따뜻하고 풍만한 가슴이 그리웠을 뿐 세고에 사숙(私塾)의 2층 다다미방에서 외롭게 생활하며 오직 바둑 한길에 정진해야만 했던 그의 시야에는 오로지 19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인상을 받았던 1970년 4단으로 승단했고, 이듬해 5단으로 승단하면서 이제 조훈현도 18세의 어엿한 청년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스승 세고에 9단은 그 무렵 마지막 제자의 성장을 흐뭇하게 응시하면서도 한편으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과 달리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한국의 사정상 훈현도 어김없이 병역의 의무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유학을 왔던 김인, 윤기현, 하찬석 등 기라성같은 한국의 청년들이 죄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유학에서 중도하차 했던 선례가 있었다.
스승은 제자의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지만 끝내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마침내 비정하고도 차가운 영장(令狀)이 현해탄을 건너 니시오카의 세고에 선생댁 우편함에 날아들었다.
절망의 초대장이었다.
스승은 식욕을 잃고 드러누워 탄식했으며 훈현은 바둑책을 덮었다.
모든 게 끝이었다.
바둑 두는 업 자체도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귀국의 시간을 기다리며 훈현은 생애 최악의 두 달을 맞이하게 된다.

(17화 예고)
귀국을 앞둔 19세의 청년 조훈현은 바둑돌을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동경의 뒷골목을 배회하지요.
마작과 파친코에 열중하며 청춘의 번뇌를 불사르고저 합니다.
엄한 스승의 고삐에서 풀려나 망가질대로 망가지는 자학의 코스로 빠지지요.
그 시간은 두 번 다시 기억하기도 싫지만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수업중단-
한참 터보 엔진을 장착하고 80퍼센트 대의 경이적인 승률을 올리며 고속질주하던 조훈현은 '일단정지' 표지판 앞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야 했다.
헤쳐온 속도가 워낙 고속이었기에 마찰음이 클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막혀버린 진로 앞에서 그는 우회로를 찾지 못했다.

바둑이라는 대명제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그였던지라 세상의 변수에 대한 적응력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적지 않은 세월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언어와 관습을 익혔지만 니시오카의 숙소와 쿠단샤(九段下)의 일본기원까지 지하철 중앙선을 이용해 왕복했을 뿐, 다른 곳에 가본 적도 없었고, 허튼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아아,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어린 시절에 떠나온 조국이었어도 훈현은 조국의 징병제도가 얼마나 단단한 사회적 의무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시점이 바로 한국전쟁의 뒤끝이었고, 또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터져 장병들의 의무복무기간이 연장됐던 시점이 바로 조훈현이 입대를 앞둔 무렵이었다.

아무튼 군대를 갔다 오지 않으면 중대한 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한국사회의 룰과 정서를 조훈현도 알고 있었다.
김인, 하찬석, 윤기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훈현도 이제는 봉수(封手)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그저 귀여운 애제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스승 세고에가 먼저 의욕을 잃고 말았다.

"모든 국민이 똑 같은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평등의 미덕 이전에 인적자원의 효율적인 관리를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말까 하는 바둑천재를 입대 시켜 병정으로 3~4년을 묶어둔다는 건 말이 되지않는 얘기다."
세고에는 이런 탄식을 했고 많은 바둑관계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한국정부도 특별한 인재에 대한 병역혜택제도를 시행하게 되었고 조치훈과 이창호가 혜택을 받았다.)

신주쿠-
도쿄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다는 번화가이며 욕망이 끓어넘치는 환락가.
귀국이 결정난 이후로 19세의 조훈현은 거의 매일 신주쿠 거리로 향했다.
그 곳에 가면 어쩐지 답답한 숨통이 트이는 듯 싶었다.

가부키좌(座)의 화려한 네온사인-
뒷골목의 불온한 핑크빛 간판들-
도심공원의 발랄한 아베크족들-
기원이 있는 쿠단샤 분위기가 교과서라면 신주쿠는 만화 같은 곳이었다.
어차피 정규바둑수업도 중단된 판인지라 세고에 선생도 더 이상 제자를 구속하지 않았다.

불안한 자유의 시간이 열렸다.
엘리트 사관생도의 첫 휴가인 셈이었다.
조훈현은 바둑돌을 던져버리고 잡기의 재미에 푹 빠져들어갔다.
대개 기원이 있는 건물에는 마작집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그 곳이 아지트였다.
낯 익은 손님들과 푼돈을 걸고 마작을 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배팅의 강도가 세져 아토사키, 홍비키, 가보잡기 등의 도박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바둑과는 품격이 다른 게임이지만, 그런 도박들도 나름대로 승부라는 측면에서 바둑과 통하는 공통점도 있는 거였다.

꼬마 명인, 미완의 대기 조훈현은 그 방면에서도 녹록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며 상대들을 긴장시켰다.
그 중에서도 마작 실력은 고수급이어서 좀처럼 돈을 잃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빈털터리였다.
꼭 마지막 순서로 붙게 되는 도박판에서 올인을 당하곤 했다.

원래 큰돈이 없는 청년이어서 패가망신할 것까지야 없지만 푼돈이래도 꾼들에게 털리고 나와 중앙선 역사(驛舍)에서 씁쓸하게 마지막 전철을 기다릴 때면 그 놈의 주황빛 가로등 불빛이 얼마나 쓸쓸하고 황폐해보이는지 몰랐다.
그 불빛 건너편으로 길게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가 또 얼마나 초라해보이는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튿날이면 발길은 어김없이 신주쿠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김유신의 명마가 기생 천관의 집으로 무턱대고 향했던 것처럼.
그다지 죄의식은 없었다.
단지 어제와 그제 자신에게 패배의 아픔을 안겨준 적수들을 다시 만나 통렬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 복수의 본질이 무엇일까?
그들에게 아픔을 두 배로 갚겠다는 것은 아니리라.
물론 잃은 돈을 다시 복구하겠다는 것도 아니리라.
그 복수의 표적은 사실 조훈현 자신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강한 고수여야 하는데 바둑수업을 중단하고 목적의식 없이 떠돌아 다니는 자신의 궤적이 너무 싫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 것은 자학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조훈현은 귀국하기 두 달 남짓한 기간을 신주쿠의 그늘 아래서 방황했다.
그나마 술을 마실 줄 모르고,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약한 편이며, 워낙 군기잡힌 생활을 해온 탓에 그 정도였지 술과 여자를 알았더라면 그 시기에 엉망으로 망가졌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래도 필자는 그 두 달의 방황기가 조 국수 인생에서 진정한 황금기였노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서도 대국 스케줄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공인이고 대중의 우상이기에 행동의 제약도 심했다.
비록 음습하고 아팠던 방종의 시간들이었어도 신주쿠의 밤은 아름다웠었노라고 나는 형용하고 싶다.
조 국수는 인생 최대의 슬럼프 기간을 그 때라고 단언하는데-
그래봤자 두어 달 아닌가?
그 시간들은 훗날 바둑황제가 '나도 이런 날이 있었노라' 하면서 들먹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울궈먹는(?) 추억의 김장독이란 말씀이다.


 

1972년 3월.
조훈현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든 채 하네다 공항을 떠났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 세월만의 하산(下山), 타의에 의한 어정쩡한 귀국이었다.
제자의 일본 체류연장을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던 스승 세고에도 묘수를 찾아내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떠나가는 제자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일본바둑계의 거목 세고에 선생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
훈현이 떠나간 지 4개월 동안 니시오카의 자택에 칩거하다 마침내 자결(自決)이라는 수단을 택해 세상과의 연(緣)을 단절하고 말았다.
그의 자결은 일본 바둑계에 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세고에는 왜 자결했을까?
소문에 의하면 오랜 벗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에 자극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애제자의 대성을 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 거란 설이 나돌았다.
어쨌든 세고에는 바둑계에 찾아보기 드문 진정한 큰 스승이었다.
수제자 오청원을 키워놓고 그에게 자신의 집을 물려준 뒤, 자신은 셋방을 얻어 나간 담백한 성품의 세고에.
그가 남긴 2통의 유서를 보자.

[1] 가족들에게 
0000: "노구(老軀)로서 더 이상 너희들에게 신세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저 한다."

[2] 친구, 후배들에게 
000 :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

첫번째 글은 떠나는 변(辯)이요, 두번째 글은 염원과 당부인데 그가 얼마나 조훈현을 아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세고에의 주변인들은 유서의 당부를 들어주지 못했다.
조훈현을 다시 일본으로 데려오지 못했으므로.
그렇지만 선생의 염원은 풀렸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조훈현은 척박한 한국의 바둑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우람한 거목으로 대성했으므로.

조 국수의 에세이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세고에 선생의 죽음을 뒤따라 애견 뱅케이도 비실비실 앓다가 죽었다.
위 아래로 소년기의 조훈현을 지탱해주었던 기둥들이 일시에 무너져내린 것이다.
세고에와 뱅케이에게는 조훈현이 거의 절대적인 희망이자 낙(樂)이며, 존재의 이유였던 게 아니었을까?
스승과 애견은 조훈현에게 사사로운 그리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알아서 정(情)을 뗀 게 아니었을까?
'외로운 황태자' 조훈현의 하산 주변에는 이처럼 드라마틱한 전설이 깔려 있었다.

속세(俗世)로의 환원

서울은 속세였다.
깔끔한 정원의 니시오카 사숙, 체계가 정연한 일본기원, 효율적인 교통시스템을 갖춘 일본이 산사(山寺)의 수련장이었다면, 서울은 홍진(紅塵)과 번뇌로 가득한 아수라장이었다.
산비탈에 위치한 보문동 집, 담배 연기로 자욱한 관철동 한국기원, 콩나물 시루와도 같은 만원버스……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언어 문제였다.
어린 시절에 떠나 십 년이 흐른 후 훈현의 뇌리에 남아있는 모국어 단어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편했고, 혼자 있을 때가 마음 편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따뜻한 가정의 온기(溫氣)였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얼추 삼십 년이 흘렀어도 부모들은 일본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러므로 아들과 완벽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푸근한 인상에 풍요로운 가슴을 보유한 어머니(박순애 여사)는 오래 떨어져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모성으로 훈현을 감싸 안았다.
집을 나갈 때와 들어올 때 훈현은 언제나 장난스럽게 어머니의 옷섶에 손을 집어 넣고 풍만한 젖가슴 살을 어루만지곤 했다.
(그 인사법은 초로의 나이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음.)
아들의 짓궂은 손 인사를 어머니는 늘 넉넉한 미소로 허용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참 예민한 시기에 부모와 떨어져 지낸 아들의 응석이었으니 어찌 타박할 수 있었으랴.
물론 그녀도 세상에 빼앗겨버린 것만 같던 내 아들을 그런 스킨쉽으로 확인하고 흐뭇했겠지만.

유일한 여동생 현숙이의 애교도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당시 여고 2학년인 그녀는 예쁜 용모에 밝은 성격, 하이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집안 분위기를 환하게 조명한 주인공이었다.
위로 세 언니가 시집간 후 혼자서 노부모와 생활하던 현숙도 오빠의 등장이 너무 반가웠을 것이다.
조훈현은 그렇게 속세로 내려와 저잣거리의 법칙을 터득해가기 시작했다.
혼란스럽긴 해도 그 곳엔 인간의 온기와 내음이 묻어났다.

조금씩 낯설긴 해도 한국기원에 나가면 모든 기사들이 훈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본기원의 5단을 그대로 인정 받았고, 곧바로 프로기사로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바둑계는 조훈현을 예의 주시했다.
그 때는 천하무적 김인(金寅) 7단의 시대-
김인 7단은 60년대 중반에 조남철 국수의 아성을 허물어버리고 1인자로서 계속 독주해왔었다.


 

조훈현이 귀국하자 한국기원은 그에게 어떤 단위를 내려야 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나갈 때는 2단이었다가 일본기원 5단으로 돌아왔으니 대우를 해주긴 해주어야 하는데 명분 차원에서 좀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엿한 한국기원 2단인 조훈현을 일본기원에서는 전혀 인정해주지 않고 새로 입단 시키지 않았었던가?
황태자 조훈현의 단위야 실력대로 인정해주고 싶었지만 기원대 기원의 입장에서는 그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그 문제는 5단으로 인정하는 선으로 결정났다.
조훈현은 그런 과정을 통해 한일 양국의 입단대회를 통과한 유일한 기사로 남게된다.
일본기계의 신성(新星)으로 떠오르던 조훈현이 돌아오자 관철동은 바짝 긴장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확실한 바둑선진국이었다.
일본물을 먹고 온 김인이 조남철 국수의 시대를 저 멀리 전설로 밀어내버렸고, 또 윤기현이 72년 국수위를 점령하는가 하면, 하찬석이 놀라운 기세로 본선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국내의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 조훈현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군 입대 이전 1년 반 기간 동안 조훈현의 바둑은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귀국을 앞두고 몇 달 남짓 신주쿠 일대를 배회하며 방종했던 후유증이었는지도 몰랐다.
낯선 환경에 놓이면서 여전히 바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울은 무질서한 아수라장이었다.
이제 무서운 스승 세고에의 눈길도 없었으므로 그는 모든 걸 혼자서 판단하고 실행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귀국하니까 나이도 한국식으로 환산되어서 졸지에 두 살이 껑충 올라갔다.
열 여덟에서 스물로-
청년 조훈현은 적당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 오똑 선 콧날, 맑은 인상을 풍기는 미남이었다.
그러나 성장기를 일본에서 보낸 탓에 모국어를 깡그리 잊어버려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아직도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을 오랜만에 조우했을 때 “엄마, 아빠”는 쉽게 불렀지만 “누나”라는 단어는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장난기 가득한 동료기사들은 조훈현에게 짖궂은 우리말부터 가르쳐 주고 그의 실수를 즐기곤 했다.
‘눈깔’ ‘대가리’ 같은 속어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광경을 상상해보시라.
‘잇빠이’ ‘우데카시’ 등등의 일본 용어와 버무려 구사되는 조훈현의 언어는 가히 환상의 개그(Gag) 수준이었다.
동료들이 폭소를 터뜨릴 때마다 조훈현은 조금씩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자연히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 버린 거였다.
요즘의 조국수를 가까이 지켜보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내성적인 유형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상대의 말을 되받아 넘기는 유머 감각, 늘 밝은 표정, 건강한 사고방식, 환하게 치열을 내보이고 터뜨리는 폭소 등등을 감안할 때 조 국수는 분명 명랑한 외형적 성향의 소유자임에 분명하다.
20십대 초반, 그가 말을 아끼고 표정을 관리한 이유는 아마도 그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환경 때문이었으리라.
기원의 분위기도 일본과는 완전히 달랐다.
고바야시, 다케미야, 조치훈, 가토 등 비슷한 또래의 청년 기사들과 아카데믹한 연구와 검토를 하던 일본의 풍토와 달리 관철동에서는 실전(實戰) 위주였다.
기전(棋戰)의 숫자가 미미하고 프로 리그의 운영 자체가 유명무실하던 그 시절 관철동에서는 짜장면 내기바둑이 성행했었다.
오전에 기원에서 부딪히는 기사들은 다짜고짜 마주앉아 짜장면 내기를 벌인 거였다.
프로의 세계에서 내기는 금기사항이지만 짜장면이 걸린 승부 정도는 누구나 너그럽게 봐주고 또 틈만 나면 참가하려는 분위기였다.
순국산 된장바둑으로 훗날 세계를 주름잡은 서봉수 명인도 바로 그 짜장면 내기바둑으로 단련된 멤버 아니었던가.
일본기원의 도장(道場) 환경과 판이하게 다른 관철동에서 조훈현은 비틀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바둑인생의 항로를 그려야 할지, 또 산다는 그 자체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암담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바둑밖에 없었기에 부단히 관철동에 나갔고, 되는대로 바둑을 두었을 뿐이었다.
물론 정제되진 않았어도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온 조훈현의 내공은 무지막지했다.
무수한 상대들이 그에게 무수히 짜장면을 헌납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본격기전에서 그는 성적다운 성적을 내지 못했다.
실전적인 국내기사들의 바둑에 적응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 그 이전에 성취동기가 뚜렷하지 않았으므로 최선을 다할 수 없었다.
병역의무 3년의 벽이 큰 부담이었다.
그 문제 때문에 일본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당장 입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 기간을 대기해야 했다.
대략 4~5년을 쉬어야 할 판인데 그 시간동안 나란히 어깨를 하고 수학했던 일본의 신예기사들이 얼마나 앞서갈 것인지 상상하기도 싫은 그림이 자꾸 어른거렸다.
악몽의 나날들이었다.
편안한 수면을 취하지도 못했고 새벽에 일어나면 가슴이 먹먹해 미칠 지경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하루를 열어야 하는 이방인의 새벽-
청년 조훈현은 그렇게 1년 반 동안 불연소(不燃燒)의 혼몽한 새벽을 경험했었다.

 

1972년, 조훈현의 공식 전적은 15승 4패(승률 78.9%)-
가공할 기록이었지만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바둑들이 태반이었고, 뚜렷한 획을 긋지 못한 성적이었다.
그 무렵 조훈현은 바둑에 혼신을 다하지 못하고 종로의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김인 선배, 유건재 등과 함께 어울려 바둑이 아닌 다른 게임(?)에 열중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용일여관, 함평여관이 아지트였다.
그 시절 프로기사들이라면 거의 모두 다른 게임 한 두 가지씩은 기본으로 즐기던 시절이었다.
승부사는 갬블러로 번역된다.
도박사라고 바꿔 말하자면 조금 어폐가 있지만 어차피 매 판 승리를 위해 지략을 쏟아내는 기사들은 도박사의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 아닌가?
뜨거운 승부를 반상에 펼치고 싶어도 당시의 환경이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었다.
어쩌면 그들은 종로의 뒷골목에서 매일 밤 게임에 열중하며 승부사의 감각이 식지 않도록 담금질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대리만족의 경지를 넘어서서 아예 그 방면으로 또 다른 성취를 이뤄낸 주인공이 바로 위대한 갬블러 차민수 4단이다.)
그렇다고 종로의 멤버들이 중심을 잃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건 아니었다.
동향의 선배 김인 국수는 각별히 조훈현을 챙겼다.
놀 땐 함께 가볍게 놀아주고, 틈틈이 후배의 손목을 이끌고 산행을 시도했다.
설악산과 월출산 등등, 대처 명산을 다니면서 호연지기와 체력을 배양하는데 신경을 썼다.
김 국수는 조훈현의 장래를 남달리 믿고 있었다.
그 역시 큰물에서 놀아본 경험이 있었기에 범상치 않은 후배의 내공을 미리 간파하고 그처럼 정신적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김 국수는 그토록 사랑하는 후배 조훈현에게 모든 타이틀을 이양(移讓)하고 무관의 야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아무리 누군가를 아낀다 해도 자신의 영광이 사그라지는데 아프지 않을 사람은 없다.
조남철 시대를 밀어내고 철권통치로 바둑계를 휘어잡았던 당대의 영웅 김인은 앞으로 다가올 혹독한 겨울을 감지하면서도 그렇게 조훈현을 아꼈고 키운 것이다.
바로 그 전통이 훗날 조.이(曺.李)사제의 관계에도 적용된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김인 - 조훈현 - 이창호로 이어지는 국수의 계보는 ‘내리사랑’이 배인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인 것이다.

<프로의 의무>

매일 다람쥐 체바퀴 돌 듯 반복되던 어느 날.
조훈현은 기원에 나가기 위해 어머니에게 차비를 요구했었다.
그러자 어머니 박순애 여사는 황황히 옆 집으로 달려가 돈을 빌려왔다.
그 시간이 훈현에게는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아, 우리집이 무척 가난한 모양이구나.’
그 것은 충격이었다.
사는 꼴은 후줄근해도 부모의 주머니가 이토록 텅 비어있을 줄이야 그는 한 번도 인식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빌려준 차비로 택시를 타고 나가면서 훈현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벌어야 되는구나!’
조훈현이 태어나서 처음 다짐한 결심이었다.
그 것은 진정한 프로로서 그가 정신무장을 한 계기라고 봐도 좋았다.
그날부터 그는 직업인으로 바둑을 두기 시작했고 결심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제 14기 최고위 타이틀.
상금은 30만원이었다.
최고위 조훈현은 여기저기 한 턱 내야 할 곳이 많았지만 두 눈 딱 감고 전액을 어머니께 갖다드렸다.
마침 그 시기에 동생 조현숙이 성신여대 미술학과에 합격해 등록금이 필요했었고 부모는 시장에서 거금을 빌려야 할 참이었는데 기막힌 타이밍으로 막내 아들이 정확히 수요만큼의 돈을 벌어온 것이었다.
대학 등록금 25만원에 옷이며 미술도구 등을 충분히 살 수 있는 장학금을 오빠가 마련해주자 여동생 현숙은 팔짝팔짝 뛰면서 감사를 표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프로로서의 자존심을 새삼 깨닫게 된 장면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1973년 8월 조훈현은 공군에 자원입대한다.
육군으로 가자면 대기기간이 길어지므로 서둘러 택한 입대였다.
생경스런 훈련소 생활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직 모국어에 익숙치 않은 조훈현 이병은 고문관일 수밖에 없었다.
‘뒤로 돌아 갓!’ 하는데 버젓이 계속 앞으로 행진하는 훈련병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눈썰미가 뛰어난 덕분에 그는 그럭저럭 별 사고없이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빛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게 된다.
바둑에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진급한 천재였지만 만인이 평등한 군대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일개 병사일 뿐이었다.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성남의 비행장.
군인 신분이라 초기에는 바둑대회를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군생활이 그리 답답한 것만은 아니었다.
또래의 청년들이 다 겪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두려움도 없어졌고, 막상 파란 제복을 입고 절제있는 생활을 하다보니 한때 황폐해졌던 몸도 마음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또 한국기원의 김수영 선배를 비롯한 지인들이 힘을 써주어 공군대학 교수부 2처에 근무하게 되면서 비로소 프로기사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되었다.
부대장도 바둑에 관심이 높은 분이라 열렬한 팬이 되어 행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연히 군인답게 이런 조건을 먼저 달았었다.
“이기면 걸어 들어오고 지면 위병소에서부터 포복으로 들어와야 한다.”


 

졸병 시절 조훈현은 '고문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신체 건강하고 동작은 빨랐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일과(日課) 자체가 고난스러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친 박순애 여사가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운이 이어졌다.

어느 날 보문동 집으로 중요한 대국통지서가 날아왔다. 
부대로 전화가 되지 않아 별 수 없이 모친은 통지서를 들고 성남으로 달려갔다. 
성남비행장 신호등. 파란 불이 켜지는 순간 마음 급한 모친이 서둘러 발길을 옮겼는데 정지한 버스 뒤에서 트럭이 튀어 나왔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모친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무려 8미터 이상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진 사고였다. 그 사고로 모친은 1년 이상 드러눕고 평생 후유증을 앓게 된다.

병영에서 그 소식을 들은 훈현의 마음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집안의 기둥이나 다름없었던 모친이 쓰러졌으니 부담이 컸다. 겨우 제복생활에 적응하려는 판국인데 너무 큰 시련이었다. 한동안 바둑알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군대에서 제대로 바둑을 둘 수 있게 된 시점은 서울 대방동 공군대학 교수부로 전출되면서부터였다. 그 곳에는 절친한 친구 차민수 초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민수는 PX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자주 만나진 못했어도 이따금 마주치면 얼굴 보는 그 자체로 든든한 전우였다. 두 사람은 기질 상 비슷한 구석이 많아 관철동에서 단짝으로 통하던 사이였다. 영등포 부잣집 막내아들 차민수는 외로운 황태자 조훈현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바둑이죠. 1백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거든요. 나는 그 친구를 처음 봤을 때 한 눈에 알아봤어요. 그런 친구가 군대에 들어와 고문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처음엔 무지 안타까웠지요. 하지만 금새 잘 적응하더라구요."

차민수, 그도 독특한 천재 중의 한 사람- 바둑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마 강자가 되었고, 아마 시절에 프로기사들과 맞바둑으로 짜장면 내기를 일삼던 괴력의 소유자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에 웬만한 프로기사들과 선으로 판을 짜면 거의 이기곤 했었지요. 그러나 조훈현한테는 어려웠어요. 아마들이 두 점으로도 버티기 힘들었으니까요." 
그의 술회에 대한 조 국수의 기억도 재미있다.

"저 친구(차민수)는 기가 좀 셌던 것 같아. 다른 아마들은 두 점으로도 상대하기 쉬웠는데 저 친구는 이상하게 어렵더라구. 유일하게 선 치수로 인정해주었던 상대였지." 
그 때부터 배짱이 맞았던 두 사람은 현재까지도 특별한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다. 
바로 얼마 전 귀국한 차민수 4단을 만나 필자가 물어 보았다. 
"한 마디로 조 국수를 표현한다면?" 
그러자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이 '나쁜 사람'이었다. 이유를 물어 봤더니 포복절도할 사연이 있었다. 차 사범은 가끔 타이젬 사이트의 대국실에 들어와 아마들과 수담을 즐기곤 했단다. 프로기사이긴 하지만 익명의 바다 인터넷에서는 부담 없이 아무하고나 속기를 즐길 수 있는 것 아닌가? 
그의 아이디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그런데 어느 날 차 4단은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괴상한 아이디의 소유자가 도전을 해온 것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수 가르쳐 줄 요량이었는데 어라? 한 수 한 수 놓일 때마다 판이 답답하게 짜여지는 게 아닌가? 결국 차 4단은 그 판을 참담하게 지고 말았다. 
장난이 아니다 싶어 그는 재대국을 요청했다. 두 번 째 판에서도 그는 질질 끌려 다니다 형편없이 당하고 말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手)를 보면 프로의 행마 같지 않은데 전투력이 무시무시한 상대였다. 
프로의 위신 때문에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고 혼자서만 그 망신스런 경험을 서리서리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가 나중에 조 국수를 만나 털어놓았더니 국수가 어린애처럼 깔깔거리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더라는 것이다. 
"하하하, 내가 그대의 아이디를 알고 있었지." 
"아니, 그럼 조국수가?!!!" 
"우하하, 전혀 눈치 못챘지? 그대가 50점 짜리 수를 두면 나는 55점 짜리를 골라 두었으니까." 
"에잇, 빌어먹을!" 
사연인즉 이랬다는 이야기다. 
(타이젬 회원들께서도 조심하시라. 가끔 가공할 공력을 발산하는 고수들이 눈에 뜨이거든 아이디를 체크해보시길. 이 사이트에는 최소한 너 댓 명의 고수들이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며 스파링 파트너를 찾고 있으니까.) 
조훈현과 차민수, 지금도 만나면 소년들처럼 구김살 없이 웃고 지내는 막역한 사이이다.

1973년 조훈현의 전적은 25승 8패. 1974년은 21승 14패. 
아무래도 바둑에 전념을 하지 못해서인지 갈수록 성적이 하향선을 그렸다. 
특히 1974년은 제6기 명인전 도전기에서 서봉수 명인에게 3:1로 패퇴하면서 크나큰 내상을 입었던 시련의 시기였다.

서봉수는 입대하기 전에 수 없이 많은 판의 짜장면 내기를 두던 동갑내기 라이벌이었다. 
맞대결의 전적은 분명 조훈현이 앞섰지만 서봉수는 이미 1972년 만 스무 살의 나이로, 고작 2단의 신분으로 거목 조남철 국수로부터 명인위를 양위받은 괴초식의 큰 바둑이었다. 
타이틀 홀더 서봉수는 예전의 바둑이 아니었다.

1국과 2국에서 서봉수에게 충격의 불계패를 당하고 3국을 가까스로 건졌으나 4국에서 완승을 앞두고 역전을 허용해 반집패를 당한 명인전 도전기. 
조훈현은 그 명인전을 통해 영원한 라이벌 서봉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됐고 독한 승부사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1974년 제 6 기 명인전.
조훈현 6단과 타이틀 홀더 서봉수 4단이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이십 대 기사들끼리 벌이는 결승전이라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대국이었다.
아울러 두 라이벌 간의 첫 번째 타이틀 매치로써 이후 장장 20년 동안 이어지는 조.서 대전의 팡파르라고 해도 좋았다.
두 사람의 비공식 대국은 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공식대국은 제 2 회 백남배 8강전에서였고 그 때는 조훈현이 이겼었다.
관철동은 양웅의 대결을 놓고 술렁거렸다.

“이제 조훈현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으니 명인전을 계기로 제 실력을 발휘하리라고 믿어. 누가 뭐래도 그는 당대 최고의 천재 아닌가? 객관적 전력에서 앞서는 게 사실이야.”
“과연 그럴까? 나는 서봉수 명인에게 걸겠어. 그에게 객관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우스운 일이지. 2단 시절에 조남철 국수를 꺾은 귀재 아닌가? 더욱이 명인전에서 만큼은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는 서봉수의 기세를 꺾기엔 아직 조훈현의 기는 약하다고 봐.”

예상은 반반이었으나 결과는 후자의 편으로 기울었다.
제1국 불계패.
제2국 불계패.
서봉수의 저력을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음에 뿌듯함을 느꼈고, 조훈현의 등극을 점쳤던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럴 수가!

누구보다도 깊은 자기 회의에 빠진 사람은 조훈현 자신이었다.
큰 승부에서 만난 서 명인의 바둑은 예전의 바둑이 아니었다.
타이틀 홀더가 된 그의 바둑은 승부처에서 한결 강미(强味)가 풍겨나고 실리를 추구하면서도 끊임없이 상대의 취약점을 노리는 서늘한 자객의 살기를 품고 있었다.

두 판을 잃고 난 뒤 조훈현은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제3국은 백으로 불계승.
그 여세를 몰아 제4국도 완승국으로 판을 짜나갔다.
그러나 끝까지 승기를 쥐지 못하고 막판에 반집으로 역전패를 당했다.
결승선 직전에서 추월당한 스프린터의 아픔은 직접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훗날 조훈현이 전관왕으로 바둑계를 평정했을 때 서봉수가 국기전에 도전해 1국에서 반집을 이겼던 적이 있었다.

당시 <바둑>지의 표현을 보자면-
“이 반집은 독재자 조훈현의 횡포에 저항하는 한 방울의 눈물이다.”
하지만 그 반집의 아픔을 1974년 봄에 조훈현이 먼저 겪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동갑나기 라이벌 서봉수와의 첫 타이틀 매치에서 1승 3패로 패퇴한 조훈현은 엄청난 좌절감에 사로잡혔다.
명인전을 4연패한 서봉수는 일약 스타덤에 올라 프로의 세계는 오로지 1등만을 인정함을 입증해주고 있었다.
승리만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프로의 세계 뿐만 아니라 군대라는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공군의 전우들은 패해서 귀대한 조훈현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졌지만 명인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은 조훈현은 이미 부대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던 거였다.

새벽 여섯 시.
기상나팔 소리는 모든 병사들에게 과히 반가운 것이 아니다.
여명의 정적을 일시에 흐트러뜨리는 방정맞은 템포와 찢어질 듯한 금속성 소음.
그런데 조훈현은 언제부턴가 그 기상나팔 소리를 반갑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인생의 한 쪽 한 쪽의 시작이 어느 순간부터 소중하게 느껴졌다.
관성으로 따라만 갔던 일과(日課)에도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육군처럼 땅바닥을 기는 정도는 아니지만 난생 처음으로 유격훈련이라는 것도 체험해봤다.

지속적인 PT체조와 난코스를 통과해야 하는 유격대 훈련.
그 것은 지옥체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체의 모든 근육이 극도로 긴장해서 젖산으로 범벅이 되고 마침내 피로감마저 상실해버리는 자학적 훈련.
그러나 훈련의 마지막 단계에서 병사들은 고통의 한계를 넘어서고 미묘한 카타르시스까지 얻게 된다.

조훈현도 그랬다.
생애 최악의 육체적 고통을 겪었지만 그 격렬한 훈련을 통해 진정한 군인으로 다시 태어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 6 기 명인전은 정신적 유격훈련이었고, 부대에서의 유격훈련은 육체로 둔 바둑 한 판이 아니었을까?

이듬해인 1975년 여름 대방동에서 이륙한 보라매 조훈현은 높은 고도의 상공을 유유히 선회하다가 목표물을 발견하고 급강하, 날카로운 발톱으로 낚아채 올라갔다.
최고위 1차 방어에 성공했고, 백남배를 획득한 것이다.
같은 해 겨울 제 2 회 최강자전에서 우승하고, 해를 넘겨 TBC 왕자(王座)전 및 제1기 국기(國棋)를 차지함으로써 5관왕으로 불리게 된다.

그 시기에 일본에서는 조치훈이 아사히신문에서 주최하는 ‘프로 10걸전’을 제패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한국 바둑의 최다 타이틀 홀더이면서도 조훈현은 아직 선배들로부터 ‘함량미달’이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정창현 7단은 특유의 독설로 ‘조훈현은 변두리에서만 논다.’라고 비꼬았다.

조훈현이 보유한 타이틀 ‘최고위’가 부산일보 주최였고, 여타 타이틀 또한 중앙일간지 기전과는 조금 격이 떨어지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정창현 7단의 발언은 지방신문사를 자극하는 독설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정창현 7단은 오래 가지 않아 또 한 차례 절묘한 코멘트를 남긴다.
“드디어 조훈현이 한강다리를 건넜다.”
1976년 겨울, 조훈현이 하찬석으로부터 국수위를 이양 받았을 때 터져 나온 명언이었다.

공군 현역 조훈현의 대공습이 시작되었다.
관철동은 다시 술렁거렸다.
묘한 공포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분위기였다.
최고 전통의 국수위에 오른 조훈현은 이제 보유 타이틀 질량면에서 단연 1인자였다.

 

2002년 1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LG기왕전 준결승전의 결과를 제대로 짚어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타이젬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했지만 조훈현과 유창혁이 승리하리라고 예측한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결승에 오르기를 기대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으면 아마도 두 사람을 지지하는 응답자들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 유 두 기사는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다른 외적 요인의 의해서 판가름 되기보다 양웅의 정면대결이 역시 멋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조훈현과 유창혁.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바둑팬들에게 화사한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다.
어느 바둑평론가가 표현하길 '백도(白道)를 표방하는 천재 계보'로 묶은 적이 있었다.
오청원 - 조훈현 - 유창혁
이 라인 업이야말로 하늘이 점지한 바둑의 천재들이란 뜻이다.
조훈현과 유창혁이 정상에서 랠리를 주고 받은 적은 별로 없다.
조.서의 공방전과 조.이 사제의 장기전 틈에 끼어 유창혁이 주춤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사람이 연출해낸 아주 아름다운 영상 하나를 가지고 있다.
백두산 대국-
푸르른 천지와 병풍 같은 백두산 연봉들을 뒤로 하고 때깔 좋은 한복 차림으로 바둑판 앞에 마주앉은 양웅들.
저잣거리 모든 기원의 벽에 액자로 걸려있는 기성전의 그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선명한 기억은 93, 94년 후지쯔 배 결승전에서 연속 맞붙어 사이 좋게 한 차례씩 우승컵을 나눠가진 형제대결이다.
유창혁은 단 한 번도 1인자의 자리에 등극한 적은 없지만 유유히 낭인처럼 떠돌아 다니다가도 큰 먹이감을 발견하면 전광석화같이 일직선으로 달려가 급습하는 큰 승부사.
국내 기전에서는 이창호의 그늘에 가려 침잠해있지만 국제 기전에서는 놀라운 무공을 떨친 사나이.
하나 둘씩 타이틀을 획득하다 보니 벌써 사이클링 히트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LG배 세계기왕전에도 그는 벌써 세 번이나 결승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그런 사연 때문에 조훈현 VS 유창혁의 LG배 격돌은 아주 흥미로운 대결일 수밖에 없다.
두 사람 모두 국제기전의 용사들인데다가 똑 같이 사이클링 히트를 걸고 있으므로.
아무튼 2월말에 벌어질 그 세기의 대전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울리기를 기대한다.

집흑필승의 신화

1976년 제11기 왕위전.
조훈현과 서봉수가 또 정상에서 만났다.
70년대 후반 들어서 바둑계는 서서히 이십 대인 두 사람의 시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때까지 두 라이벌은 명인전, 국기전에서 한 번씩 승리를 주고 받은 상태.
왕위전은 세번째 대결로 진정한 승자를 가름하는 분수령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 무렵 조훈현은 75년 승률이 무려 83.7%(35승 7패)로 기량이 절정에 달해 있는 시기였다.
빠른 주력과 현란한 페인트 모션을 가미한 조훈현의 드리블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거의 유일하게 태클을 감행한 상대가 바로 서봉수였다.
그는 확실히 이채로운 존재였다.
혼자 배운 바둑으로 정상에 오른 경력만으로도 그의 잠재력은 대단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서봉수의 강점은 '반탄력(反彈力)'으로 일컬어지는 야수적 승부호흡을 들 수 있었다.
바둑도 바둑이지만 반외의 신경전도 대단했다.
두 동갑 라이벌들은 어느 순간부터 대국 후 복기를 하지 않는 앙숙으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승부의 속성은 철저하게 빛과 그림자가 나뉘어지는 것.
승자의 기쁨은 패자의 아픔을 담보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라이벌 전의 불꽃은 사납게 흩날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내 기전은 전통과 권위로 국수전을 으뜸으로 쳐주었고, 예산규모의 질량 면에서 왕위전이 최대기전이었다.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삼성그룹의 작품이었다.
일본처럼 타이틀 상금 순으로 기전의 서열을 정확히 매긴다면 당시의 1인자는 왕위를 보유한 서봉수인 셈이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최고위, 백남배, 최강자, TBC왕위전, 국기, 국수 등을 보유한 다관왕.
왕위전은 일곱번째 사냥감이었다.
본선에서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고 도전권을 획득한 조훈현은 왕위 서봉수에게 진정한 1인자를 가리자는 결투신청서를 전한다.
5번기.
왕위전의 규정에 따라 도전자의 집흑으로 시작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흑을 차지한 쪽이 편하게 국면을 이끌어 나가는 양상이 거듭된다.
1, 3국 조훈현 승리.
2, 4국 서봉수 승리.
그리고 마지막 5국은 돌을 가려 흑백을 결정하게 됐는데 조훈현이 흑을 차지하게 되었다.
"흐음- 이거 감이 흐리구만!"
서 왕위가 입맛을 다시며 씁쓸한 독백을 내뱉었다.
흑을 쥔 도전자가 양소목으로 판을 짜기 시작했다.
큰 승부를 펼칠 때 조훈현이 즐겨 구사하는 실리전법이다.
일단 집을 알차게 확보해두고 적군의 세력이 커지는 곳을 저해하는 작전.
큰 승부에 명국이 없다는 말처럼 5국은 흑의 일방적인 페이스로 흘러가 단 한 번의 역전 찬스도 없이 끝나버렸다.
어쩌면 돌을 가릴 때 승부는 결정난 건지도 몰랐다.
집흑필승의 징크스에 서 왕위의 마음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각도로 보자면 초반에 우세를 확립한 도전자가 왕성한 기세로 주욱 밀어버린 한판이었다.

7관왕 조훈현.
1977년 2월 2일 조간신문들이 일제히 조훈현 시대의 개막을 대서특필로 공지했다.
아마도 이 날이 바로 외로운 황태자 조훈현이 비로소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날이라고 보여진다.
또 이 날 이후로 황제는 오늘 이 순간까지 곤룡포를 벗어본 적이 없다.
이창호에게 왕관을 물려주긴 했지만 틈틈이 섭정을 하는 상왕으로서 지금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둑은 스포츠의 한 종목이다.
예(藝)로 일컬어지는 바둑을 스포츠에 편입시켜 놓고 모두가 흐뭇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바둑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아울러 바둑인들에 대한 대접이 상향조정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바둑인들은 관철동의 낭만가들이라고 해도 좋았다.
문인들과도 벗이 되었고 정치인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리는 한량(?)들이었다.

그렇기에 술꾼들이 많았고 치열한 승부의 뒤안길에서 두주불사(斗酒不辭)로 통음하며 암울한 세월을 흘려 보냈다.
1976년부터 조훈현이 선전포고를 울리며 진군을 하면서 관철동의 분위기는 아연 달라지기 시작했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천하의 김인이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퇴각했고, 속기의 달인 김희중은 초속기로 대응하는 조훈현의 스피드 앞에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그나마 가장 단단하게 마지노선을 구축하고 참호전을 전개한 상대가 하찬석 국수였다.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7년 간 기타니 문하에서 바둑공부를 한 하찬석은 동아줄 같은 힘바둑으로 순식간에 정상에 올랐던 인물.
1972년 87.5%의 가공할 승률을 기록하며 본선무대를 평정했고 1973년 윤기현으로부터 국수위를 쟁취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주인공이다.
그는 기타니 문하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력바둑을 연구하고 체득화했다.
“바둑판은 커다란 바다와 같다. 어디에 두어도 한 수의 가치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귀를 중심으로 하는 실리바둑보다는 세력바둑이 큰 바다의 느낌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웅장한 세력바둑, 파괴력 있는 공격바둑을 두고 싶었다.”

7년 동안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하찬석은 자신의 이상대로 육중한 힘바둑의 전형을 익혀왔다.
하 국수의 바둑은 둔중하지만 줄기차게 조여가는 이미지로 통한다.
상대가 의식하건 하지 않건 묵묵히 조여가다가 강인한 완력으로 어느 순간 멱살을 잡는다.
그러나 그는 1973년 윤기현 국수와의 도전기에서 자신이 주장한 ‘바다와 같은 바둑’을 버리고 이기기 위한 바둑으로 전향한다.
안전위주의 극도로 조심스러운 바둑-
독특한 구상이나 과감한 작전보다는 과수(過手)없고 완착이 없는 기다림의 바둑을 택한 것이다.

이 때 그는 변명조로 이런 말을 했다.
“기사라면 누구나 멋지게 두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진다면 의미가 없어진다. 승부사에게 기풍이란 없는 것, 승부라는 체에 걸러지면 체취만 남을 뿐이다. 나는 멋을 포기하고자 한다. 더 이상의 진보가 없다하더라도 이제 나는 더 이상 모험을 즐기고 싶지 않다.”

그의 변화는 어찌 보면 지극히 프로다운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변신으로 하찬석은 그 무렵 국수와 왕위를 쟁취하여 잠깐이나마 일인자의 자리에 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운했다.

자신보다 훨씬 지독한 승부사 조훈현이란 후배가 잠깐의 틈조차 주지 않고 추월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차 하는 사이에 저만치 앞서 달려가 버린 후배 조훈현을 주시하고 하찬석은 맹렬하게 스퍼트했다. 1978년 겨울부터 국기전, 왕위전, 국수전, 패왕전 등에서 연속 도전권을 따내 대회전을 준비한 거였다.

이름하여 조(曺), 하(河) 20번기-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 처참했다.
도미노처럼 모든 도전기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국기전 3:0
왕위전 3:0
국수전 3:0
패왕전 3:0
20번기로 준비된 대회전이 단 열두 판으로 끝나버렸다.
무딘 칼날의 보검 하찬석은 그 전쟁에서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십자군 시대에 영국의 리차드 왕이 사라센 왕의 초대를 받아 찾아간 자리에서 로마검의 위력을 과시하고자 굵직한 쇳덩어리를 동강냈었다.
그러자 사라센 왕이 씨익 웃으며 가볍고 날렵한 반달검을 뽑아 하늘을 향해 날을 세운다.
그리고 그 위에 비단을 던진다.
비단자락이 반달검의 날 위에서 스르르 두 조각으로 분리되어 떨어진다.
로마 검의 파워보다 훨씬 섬찟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면-
조훈현이 바로 그 사라센의 반달검처럼 경묘하고 예리한 칼날이었다.
그 20번기에서 하찬석은 온갖 지략과 병법을 총동원해 부딪혔지만 조훈현의 신기(神氣)어린 초식을 감당하지 못했다.

사실 기력 차이는 기껏해야 한 눈금 차이건만 도무지 기세를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에 비해 철저히 이기기 위한 바둑으로 변모한 하 국수였지만 상대는 더 확실히 이기는 바둑을 구사하고 있었다.
날렵한 푸트 워크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도 틈만 보이면 턱 밑까지 치고 들어와 양 훅과 어퍼컷을 다련장 로켓처럼 퍼부어 놓고 다시 빠져나가는 상대, 그가 바로 조훈현이었다.

선이 굵은 풍류남아 하찬석은 깨끗이 패배를 시인하고 고향 합천으로 낙향했다.
그 후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 그늘에 은거한 그는 영원히 도전무대에 등장하지 못했다.
참으로 비정한 승부세계의 단면을 엿본 것 같아 착잡하지만 이 때를 분수령으로 우리 바둑에서 낭만이나 이상 따위의 추상명사는 발붙이지 못하게 된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바둑이 스포츠의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최후의 보루, 하찬석이라는 고목이 그루 째 나동그라지자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너무나 처절한 광경이었다.
전기톱을 휘두르는 벌목꾼 조훈현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목표를 베어 나갔다.
오직 한 사람 잡초 서봉수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 있었다.

 

전성기가 따로 없는 조훈현이지만 1976년부터 1977년으로 이어지는 시기가 아마도 그에게 최초의 황금시대였으리라.
무려 31연승.

1977년 승률이 44승 1빅 7패로 85.6%.
일본에서 건너 온 청년은 마침내 5년 만에 한국바둑계를 평정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는 한국의 일인자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했다.
모두들 그가 다시 일본으로 향하지 않을까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국내활동에 뜻을 굳히고 있었다.
국내 타이틀을 여러 개나 쥐고 있는 챔피언이 새삼스럽게 일본에 가서 수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조훈현이 파천황의 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할 때 서봉수는 장판교의 장판교에 선 장비처럼 홀로 우뚝 서 장팔사모를 꼬나 쥐고 황제의 진군을 막았다.
서봉수가 없었더라면 조훈현의 승률은 거의 1백 퍼센트에 가까웠으리라. 서봉수는 알려진 대로 거친 황야에서 자란 야성의 사나이.

바둑 뿐 아니라 사고(思考)조차도 자연인답게 활달하고 꾸밈이 없다. 조치훈이 일본에서 맹활약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서봉수 명인도 일본에 가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다.
일본으로 원정 가서 타이틀을 뺏어 오겠다는 야심이었다.
그는 체질적으로 승부에 민감한 야전사령관.

일본 유학파 조훈현과의 승부는 생존을 떠나 자존심과 관계가 있었으므로 절대 쉽게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었다.
전반적인 점유율에서는 7:3 정도로 몰렸지만 서봉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늘 조훈현의 발목을 잡으면서 질긴 몽니의 근성을 보여주었다.
조서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라이벌답게 앙숙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복기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석에서도 별로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아니 일부러 어울리지 않았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조훈현은 투박하고 거친 서봉수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았고, 서봉수는 모범생 조훈현의 존재 자체가 피곤했다.

그들의 의식은 고스란히 19로 바둑판 위에서 표현되곤 했다.
“내가 거칠다고? 독하기로 하면 조훈현을 따라갈 사람이 어디 있나? 그의 손맛을 본 사람은 내 말에 공감할 것이다.

그의 스트레스 성 잽이 얼마나 통렬한 줄이나 아는가? 맞으면 뼛속까지 통증이 밀려온다. 한 판의 바둑에서 그런 뭇매를 수도 없이 맞는데 무려 4백 판 가까이 상대한 나는 정말 맷집이 좋은 셈이다.”

서봉수는 과묵하지만 필요할 때 촌철살인의 코멘트를 잘 날리기로 유명한 독설가.
그 누구보다도 조훈현 바둑의 특질을 잘 알고 조훈현류 무공의 깊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고수 서봉수는 불세출의 천재 조훈현을 이기기 위해 마인드컨트롤을 시도한다.
“적개심이 생기지 않는 상대하고는 바둑이 잘 안된다. 그래서 나로서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스스로 부추기는 것이 대국에 임해 필승을 다지는 한 방법이다.”

그는 스스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또 복수, 증오, 공격, 도전, 투쟁, 도전 등의 단어가 진실에 가깝다는 발언도 했었다.
확실히 야성으로 무장한 전사임에 틀림이 없는데-
바로 그런 서봉수의 오기가 또 조훈현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는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프로기사 두 사람이 공식대국을 300판 이상 둔 기록은 이들이 유일한데, 그 무렵 거의 모든 타이틀전에서 두 사람은 공성과 수성을 거듭하며 패권을 다투었다.

운당여관에서 주간지와 만화책을 교대로 읽었다는 전설(?)도 이 때의 일화이고, 다 이긴 바둑을 놓고 확실하게 상대의 뼈를 부러뜨리기 위해 55분을 장고 했다는(상대는 얼마나 피가 말랐으랴?) 에피소드도 이 때의 풍경이었다.

조서대전의 처절한 기록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아무튼 잘 나가는 조훈현은 슬슬 국제바둑계에 이름 석 자를 내놓기 시작했다.
대만의 명인 주함형(周咸亨)을 가볍게 눌러주었고, 일본바둑관광단을 이끌고 내한한 다카가와(高川秀格)9단을 꺾어 한국바둑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과시했다.

1978년 11월.
만 6년 만에 조훈현은 일본 땅을 다시 밟았다.
스승 세고에의 7주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니시오기의 스승 집 정원에 다시 선 조훈현의 감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걸 금의환향이라고 해도 될까?
니시오기는 이국의 마당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정신의 고향이라고 해도 좋은 곳.
이곳을 떠나갔다가 한국의 바둑왕이 되어 다시 돌아왔으니 스승의 영정 앞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러나 스승의 소원은 제자가 다시 일본에 돌아와 기성이며, 본인방, 명인 등의 타이틀을 획득해 대성하는 것.

조훈현은 착잡했다.
말로는 어찌 올릴 수 없었어도 한국에서나마 최선을 다해 대성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속으로 꾹꾹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기원 관계자들은 한국의 국수 조훈현을 귀빈으로 대접해주었다.

오래 전에 귀국했지만 조훈현은 일본기원 소속 기사로 등재되어 있었다.
일본기원 5단으로 귀국한 조훈현이 몇 년 만에 한국바둑계를 평정한 사실이 그들로서는 결코 싫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세고에 9단의 추념식을 끝내고 일본기원에서는 한일 양국의 정상의 맞대결을 기념대국 형식으로 마련했다.
당시의 일인자는 기성위를 보유한 후지사와 9단.

조훈현은 흔쾌한 기분으로 바둑판 앞에 앉았다.
후지사와 기성은 실전을 통해 바둑을 가르쳐 준 또 다른 스승이었다.
승패를 떠나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과는 불계승.
친선대국이었지만 일본바둑계는 조훈현이 후지사와를 물리치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이, 후지사와가 편하게 두었겠지!
어디 진짜 세졌는지 검증해보자.

그 다음으로 고바야시(小林光一) 8단이 나섰다.
고바야시 8단은 기타니 도장의 핵심 멤버로 각종 기전의 본선무대에서 맹활약하고 있었던 강자.
그 바둑도 조훈현은 가볍게 불계승을 거두고 말았다.
저런, 쉽게 볼 상대가 아니네!
바로 그 때부터 일본바둑계에서는 조훈현에 대한 경계경보가 발령되었다.

 

1978년 봄까지 조훈현은 국내 공식대국 35연승을 기록한다.
한국기원 기사전적표를 보면 그 당시 조훈현의 칸에는 패국을 의미하는 검은 동그라미가 보이지 않는다.
두기만 하면 이겼고, 그 내용도 충실한 바둑이었다.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기사로 자리 매김 하면서 생활도 안정되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둑기사들의 평균 수입은 형편없었다.
오직 성층권의 타이틀 보유자 몇 사람만이 간신히 전업기사의 체면을 지킬 정도였다.

바둑밖에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조훈현은 바둑으로 살아가야 했으므로 그저 열심히 바둑만 두었을 뿐이었다.

공식대국 35연승은 당시까지 전인미답의 신기록이었다.
승수도 대단하지만 거의 모든 대국이 타이틀전이거나 본선대국이었으므로 승국의 질도 기름진 것이었다.

그의 독재를 저지하기 위해 모든 기사들이 각오를 새로이 하고 돌아가면서 공격을 감행했지만 처절하게 응징을 당하고 물러서야 했다.
모든 타이틀전이 영봉(零封)으로 마감되었다.

그는 이기는데 익숙해졌고, 상대들은 두기도 전에 패배를 예감한 상태로 임해야 했다.

강자라 해서 조훈현이 쉽게 둔 바둑은 드물었다.
그는 매판 최선을 다해 바둑을 두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최강의 수를 구사한다는 것. 그렇기에 그와 일합을 겨뤄본 상대들은 조훈현의 완력에 기가 질리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정작 조훈현은 상대나 기록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에 골몰하고 있었다.

자신의 중심만 흔들리지 않도록 균형추를 세우다 보면 승부의 성취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 그런 무념무상의 자세가 대기록을 세운 밑거름이었다.

그 시기가 바로 이십대 중반이니 그는 참으로 빨리 승부의 속성을 깨우친 승부사인 셈이다.
많이 두고 많이 이겼어도 여전히 승부는 어려운 것이어서 큰 바둑 한판을 두고 나면 체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규칙적인 군대생활을 통해 균형 있는 몸을 만들었지만 전역한 이후에 조금씩 체중이 줄었다. 심했을 때 56Kg까지 내려갈 정도였다.
먹성도 신통하지 않았다.

비위가 약해 기름진 음식을 꺼려했고 그저 과일이나 생선살 몇 점으로 끼니를 때운 적이 많았다. 그런데 담배는 하루 서너 갑을 피워댔으니 살이 붙을 일이 없었다.

바둑 행마처럼 날렵한 몸.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제비’였다.

1979년 김희중 6단과의 기왕전 도전기를 지켜본 조선일보 관전기자 박치문은 조훈현을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쓴 글은 조훈현 선국집에 머릿글로 실려 오래도록 바둑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명문이다.

“한 마리의 새가 허공을 난다. 그 새는 날개를 퍼덕이지도 않으며 갈기를 세우지도 않는다. 바람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다만 바람을 따라 소리없이 움직인다.

조훈현은 ‘질풍’은 아니다. 그는 상대를 다치거나 상대를 파괴하지 않는다. 지극한 평화주의자처럼 매우 부드럽게 전진한다. 그래서 상대가 여유있는 포즈를 취하면 어느새 옆구리를 아프게 조여놓고서 상대가 온몸을 긴장시키면 벌써 언제 그랬냐는 듯 허공을 본다.
...(중략)

기왕전 도전기를 보면서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조훈현은 확실히 강했다.
그러나 종잡을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조훈현은 검의 명인이 아니라 창의 명인이며 그것도 단창(短槍)의 명인일 거라는 느낌이었다.

도전기 전 4국을 통하여 조훈현은 바람처럼 움직였다.
나뭇가지 끝에서 살랑거리기도 했으며, 상대의 세력 곁을 민첩하게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이윽고 균형이 깨진 뒤 상대가 정치(精緻)하지 못한 공격을 감행해 올 때 빠른 창으로 궤뚫어 버리곤 했다.
그는 부드러운 바람이며 빠른 창이었다.“

그렇게 쓰고 나서도 박치문은 조훈현 바둑의 특질을 명쾌하게 글로 뽑아내지 못한 아쉬움을 두고두고 탄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훈현의 세계는 여전히 깜깜하다.
그를 ‘부드러운 속도감’ 그리고 ‘감각의 탄력성’으로 표현해보았지만 여전히 김인의 ‘중후함’, 하찬석의 ‘죄는 힘’, 서봉수의 ‘야성’,정창현의 ‘예리함’ 등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선명히 보여주지 않는다.

실로 나는 그의 이미지에 정확히 접근할 수 없었다. 비몽사몽 속에서 그의 세계로 저벅저벅 들어가 보았다고 말한다면 좋겠다.
그 꿈속에서 그의 세계는 회색빛이었고 바다 밑처럼 안으로 안으로 침잠한 채 부드럽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조훈현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굉장한 잠재력으로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조훈현 전기를 쓰고있는 필자는 위의 인용문을 수도 없이 읽었었다.읽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훈현의 ‘미완성’에 대한 표현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조훈현은 2002년 현재까지도 완성되지 않은 그릇 아닌가?

몇 번이고 사그라졌다가 새로운 환경에 몸을 만들어 적응하는 그 카멜레온과도 같은 변신술과 휘닉스 같은 생명력을 우리가 어떤 형용사로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20여 년 전에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조훈현은 엄청난 배기량의 엔진을 가동시킨 채 늘 RPM을 최대치로 올려 급발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잘 나가는 청년 조훈현의 빛나는 전성기는 주지하다시피 70년대 말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75년부터 80% 대의 승률을 기록하며 다관왕(多冠王)의 면모를 과시하는데, 이 때부터 ‘제비’라는 별명과 함께 ‘조관왕’이라는 이름도 통용되곤 했었다.

이후 전관왕, 바둑황제, 전신, 최근에는 화염방사기라는 별명까지 획득함으로써 바둑 타이틀 못지않게 별명까지도 다양하게 보유한 주인공이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숨 가쁜 일대기의 장을 덮고 쉬어 가는 의미로 최근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신문지상을 통해 알려졌듯이 얼마 전인 1월 하순에 조 국수는 아주 독특한 손님들과 조우했었다.

그들은 일본 만화계를 주름잡은 ‘고스트 바둑왕’의 원작자 오타 유미씨와 출판을 담당한 집영사(集英社) 편집장 다카하시씨였다.
‘고스트 바둑왕’은 일본에서 16부까지 출판돼 무려 1,200만 부나 팔린 초 베스트셀러-

앞으로 얼마나 이야기가 더 진전될지 모르지만 작가는 바둑의 진수를 표현하기 위해 세계최강의 한국을 찾아 온 것이었다.

물론 목적은 소재확보 및 만화배경의 리얼리티 구축 작업이었다.
그들은 한국 바둑인들을 만나기 위해 국내협력사인 서울문화사에 협조요청을 해왔고, 서울문화사의 김문환 편집장은 대학동창인 필자에게 SOS를 타전함으로써 어렵사리 취재일정을 잡게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일정은-

조훈현 국수 면담 및 자택 취재
강철수 화백과의 대화
한국기원 및 바둑 TV 스튜디오 탐방
유명 바둑도장(권갑룡 도장)

한국기원 원생들 수업과정 취재
한국의 일반기원 스케치
소소회 연구실 탐방
신예기사 자택 탐방(박영훈 천원)
LG배 참관

등이었는데,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모든 스케줄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 바둑인들의 후한 인심도 일조를 했지만, 무엇보다도 ‘고스트 바둑왕’이 한국에서도 꽤나 알려진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오타 유미씨는 한국에 올 때 이처럼 많은 것을 체험하고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고 고백했다.

필자가 그들과 나흘 동안 동행하면서 인상 깊었던 몇 장면을 간략하게 기록하자면-

#1. 조 국수의 평창동 집에서

(인터뷰를 끝내고 기념촬영을 하는데 기왕이면 대국장면을 찍자고 제의해 바둑황제와 마주앉은 다카하시 편집장이 대뜸 백돌을 한 움큼 집어 들고 돌을 가리자고 한다. 기겁하는 주변 사람들.

다행히 조 국수가 익살맞게 대응해주어 분위기가 살아남.
알고 보니 다카하시는 바둑문외한이란다.)

#2. 한식당 석파랑

(자하문에 위치한 석파랑 식당의 별채는 대원군의 여름 별장으로 유서 깊 은 곳. 
그 곳에서 일본 손님들과 마주한 조 국수, 강철수 화백은 바둑과 만화에 관해 유창한 일본어로 해박한 지식을 쏟아 붓는다.

국수는 만화에 일가견이 있고, 화백은 또 바둑이 전문가 수준이었으니 환상의 콤비네이션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오타 유미는 만화스토리를 오래 쓴 작가도 아닌 데 ‘고스트 바둑왕’ 단 한 편으로 ,200만 부를 히트시켜 떼돈을 벌었다는 소리에 강철수 화백이 탄식한다.)

강철수 : 제기랄! 역시 일본의 만화시장은 알아줘야 해.나는 평생 동안 2000권 이상 만화를 펴냈지만 요 모양 요 꼴로 사는데......

(그러자 국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조훈현 : 누가 뭐래. 나는 평생 동안 2000국 이상 바둑을 두었지만
요 모양 요 꼴 아닌감!

(듣고있던 필자가 기막혀 한 마디 안 할 수 없었다.)

필 자 : 그 놈의 요 모양 요 꼴 좀 빌려줘 보세요.
우리도 그렇게 좀 살아보게 말입니다!

#3. 제주도 중문 롯데호텔 특별대국실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제1국이 벌어지고 있는 대국실 옆 해설장.
넓디넓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은 고작 열 손가락 안팎이다.
조선일보 관계자 및 한국기원 관계자, 그리고 기사 몇 명.

오타 유미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유 미 : 이거 세계대회 맞나요?

필 자 : 그러믄요. 엄청 큰 대회구요. 두 기사 중에 우승자는 그랜드슬램 을 이루는 중요한 시합이죠.

유 미 : 그런데 분위기가 좀 썰렁하군요?

필 자 : 아아~ 이런 일들이 하도 빈번해서 이젠 별 이슈가 되지 않은 겁니다.

유 미 : 그렇군요. 하긴 최근에 한국기사 분들이 워낙 우승을 휩쓰니까 감동은 덜 하겠네요.

필 자 : 맞습니다.

(얼렁뚱땅 둘러 붙였지만 무척 비중이 큰 세계대회임에도 불구하고 매스컴과 바둑팬들의 관심이 다소 빈약했다는 점에서 주최 측의 이벤트 홍보 전략에 좀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4. 제주 공항

(일본으로 떠나가는 오타유미와 다카하시에게 한국바둑계를 돌아본 소감을 물었더니 즉각 튀어나온 대답들-)

유 미 : 한국바둑계는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아요. 프로들의 정신도 파워풀하고, 소년들의 실력과 의욕도 상상을 불허하며, 무엇보다도 일반기원에서 만나본 시민들의 바둑에 대한 열정이 너무 부러워요. 앞으로도 일본이 한국을 따라잡기는 요원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카하시: 바둑사이트 타이젬의 인상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예상할 순 없지만 느낌상 한국에서는 바둑이 스포츠와 인터넷 게임으로까지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습니다.

앞으로 ‘고스트 바둑왕’의 무대는 한국이 됩니다.
우리가 만난 조 국수님, 박영훈 천원, 김성룡 사범 등을 비롯한
소소회 멤버들과 한국기원 원생들 모두 만화에 등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에서 한국바둑을 주시하고 본받으려는 바람이 일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소감을 피력하고 그들은 제주공항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바둑만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오타 유미 일행은 한국에 건너와 실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바둑소재 만화로 대히트를 날린 그들을 부러워했지만 그들은 또 우리의 기름진 바둑토양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다.

 

1979년.
정계는 어지러웠다.
유신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궐기를 진압하느라 정부는 진땀을 뺐었고 마침내 철권의 통치자는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부터 총탄을 받고 쓰러졌다.

갑작스런 권력의 진공에 국민들은 막연한 두려움에 떨었다.
그 공백을 서서히 메워나간 주인공들은 정치군인들.
암담한 나날들이 중첩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그 혼돈의 어둠 속에서 찬란한 개인사를 써나가고 있었다.

제3회 기도문화상 5개 부문 중 최우수기사상, 최다승기록상, 연승기록상, 승률1위상을 휩쓸어버린 거였다.
서봉수의 명인성(城) 하나만 제외하고 중원의 모든 성을 장악한 조훈현.

관철동 사람들은 그 파천황의 기세를 지켜보며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한국바둑계의 두께가 아무리 얇다해도 한 사람의 전횡(專橫)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조훈현의 독재를 막아야 하는데......
서봉수 이외에는 대안이 부재했다.
결정적일 때 괴력을 발휘하는 서봉수 명인도 조훈현과의 상대전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큰일이 벌어지고 말 것 같은 1979년.

여자 복은 없었던 황태자

어느 날 조훈현은 여자를 만났다. 결혼을 전제로 만난 파트너였다.
육촌 조카딸 유기숙이 대학동창인 친구를 소개한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미화(鄭美和).

용인 출신으로 수원의 동남보건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고향의 제일약품에서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는 처녀였다.
농담 비슷하게 던진 조카의 중매알선이 갑작스럽게 현실로 진행된 것은 조 국수의 나이가 결혼적령기를 살짝 웃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확고부동한 국가대표 프로기사로서 활동하려면 아무래도 가정을 갖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게 필요했다.
주변의 친지들은 그렇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자꾸 조훈현을 닦달했다. 그 해 봄날 롯데호텔 커피숍.

두 사람은 수줍은 얼굴로 처음 맞선을 봤다.
남자는 여자의 첫인상이 순진하다 느꼈고, 여자는 남자가 날카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남녀는 한달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별다른 대화 없이 그냥 인상만 확인하고 헤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미화는 조훈현이 뭘 하는 사람이고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조훈현은 생애 처음 만난 여자에게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독특한 성장환경 탓에 여지껏 여자를 가까이 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애가 바둑이라면 아마도 카사노바 뺨치고 돈환을 엎어 치는 플레이보이였으리라.
치밀한 수읽기를 바탕으로 성동격서, 도남의재북(圖南意在北)으로 치고 빠지며 능수능란하게 데이트를 주도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숙맥이었다.
자기를 표현하는데도 서툴렀고, 상대를 칭찬하는데도 인색했다.
그들은 그렇게 다소 어색한 월간 데이트를 계속 이어갔다.
한달에 한 번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의무적으로 만나 관성적으로 인사했으며 관례적으로 식사를 함께 하고 헤어졌었다.

운명적인 파트너라는 인식이 누구에겐가 스며들어 온 것도 아닌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단지 어눌하고 순진한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명제를 쉽게 풀어 가는 해법은 찾지 못하고 그저 상대를 배려해서 다음 약속을 하는 소극적 데이트를 반복했던 것 같다.

당시 조훈현은 주말이면 산행을 빠트리지 않고 즐겼었다.
그래서 정미화를 만난 이후에는 곧장 산으로 가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화제도 산 이야기가 자주 등장했다.
정미화는 ‘이 사람이 나보다 산에 더 관심 있나보다’ 하는 섭섭한 생각을 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 것은 다름 아닌 ‘전화사건’-
모처럼 조훈현이 정미화의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를 든 사람은 미래의 장인 정운영(鄭運永)씨.

그날따라 무슨 일로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있던 빙장(聘丈) 어른은 맏딸 정미화를 찾는 청년의 음성에 왈칵 역정을 내고 만다.

“자네 누군데 미화를 찾아?”
“네, 저는 조훈현이라는 사람입니다.”
“조훈현이 누구냐구? 일 없으니까 끊어!”
빙장은 그렇게 매몰차게 수화기를 던져버렸다.

옆에 있던 정미화는 황당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신음을 꿀꺽 삼켰다. 조훈현은 기가 막혀 한참동안 수화기를 쏘아보았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담!”
가만 생각해보니 문제가 많은 만남이었다.
여자가 집안에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를 만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딸과 사귀는 남자한테 어찌 빙장어른이 이처럼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자존심 빼면 쓰러지는 조훈현은 그 순간 마음 속으로 결별의 획을 주욱 긋고 말았다.

“끝이다!”
그런 해프닝과 관계없이 두 사람의 맞선에는 여러 친지들의 관심이 얽혀 있었으니 그 무렵 등장하는 사람이 정미화의 외사촌 오빠.
그는 공군 출신으로 조훈현의 존재를 익히 알고있는 인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커플

그 때 외사촌 오빠가 정운영씨의 특명을 받고 조훈현을 탐색하기 위해 동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전우 조훈현에게 다짜고짜 사랑에 관한 훈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둑에 관해서는 국보급인 조훈현이 사촌동생과 맞선을 보고 있다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던 것이다.

한편 조훈현은 느닷없는 인물의 따뜻한 훈수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사실 그 자리는 결별을 선언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런데 여자의 사촌오빠라는 사람이 달콤한 버터를 발라주고 있었으니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도대체 정씨네 집안의 의중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고 오빠는 결합을 위해 애를 쓰다니 좀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수순(手順)이었다.
그런 혼란으로 인해 두 사람의 데이트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예고)

본격적으로 무르익어 가는 두 남녀의 사랑.
마침내 정운영씨는 사윗감을 보기 위해 딸과 함께 상경합니다.
그에게는 맏딸 정미화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

그래서 조훈현을 여러모로 재보다가 집안 어른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이 사람아 재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그런 인물이라면 냉큼 딸을 줘야지!“

그런 사연으로 순진남과 순수녀의 결합이 이뤄지게 됩니다.

 

 

욱일승천

조 국수의 전적은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뀔수록 상승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삼성화재배를 꿀꺽하더니 엘지배 타이틀을 놓고 유창혁과 모순(矛盾)의 쟁기(爭棋)를 벌이고 국내 최대의 KT배를 접수하는가 하면 일본으로 날아가 도요타 덴소배 1차전에서 왕년의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가볍게 물리쳤다.

그 뿐인가?
곧장 오키나와로 건너가서 오오다케 9단과 임해봉 9단을 꺾으며 제1회 바둑 아시아컵 퍼펙트 우승에 기여했다.
이 번 주에도 엘지배 결승전이 준비되어 있는데 승패의 결과를 떠나서 50을 바라보는 노(?) 국수의 맹위(猛威)는 그저 경이롭기 짝이 없다.

다시 1979년 겨울

빙장 어른의 전화 해프닝 이후 조훈현, 정미화 커플의 데이트는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속담처럼 두 남녀의 관계가 공고해진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순진함이 맘에 들었다.
천하의 조훈현을 몰라보다니......
한편으로는 섭섭했지만 딴에 그 무식(?)이 진실과 더 가까운 쪽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유명세와 관계없이 그저 사람 하나만 보고 수줍게 나타나는 여자.
여자는 남자의 심플한 매너에 반했다.
결혼에 관해 그다지 깊은 고민을 해본 적 없었던 그녀는 친구 소개로 만나기 시작한 이 남자와 어떤 사연을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심화시켜야 하는지 알 바 없었다.
그렇다고 칼로 무를 싹둑 자르듯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를테면 소극적 교제를 일관한 셈인데......
어느 날 용인의 빙장 정운영씨는 맏딸의 이성교제를 확실히 마무리해줄 요량으로 상경 롯데호텔 커피숍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함께 동행한 사람은 집안의 형님뻘 되는 유석현(현 동인신용금고 회장)씨.

정미화와 조훈현의 멋쩍은 대화를 지켜보고 나서 정운영씨가 유석현씨에게 말했다.

“인상은 좋아 보이는구만. 그런데 바둑을 두는 직업이 좀 마음에 걸리는 걸. 바둑을 둬서 마누라 밥 먹일 수 있나? 하는 수작을 좀더 본 다음에 여차하면 퇴짜를 놓아야겠어. 내가 어떻게 키운 딸인데......”

그러자 유석현씨가 그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호통을 쳤다.

“ 이 사람아. 자네가 뭘 안다고 큰소리인가? 아무 소리 말고 혼사를 밀어붙이게. 저 청년이 보통사람으로 보이나? 어지간한 걸물이 아니라 국보급 문화재니까 당장 약혼식을 강행시키게. 섣부른 객기로 망쳐놓지 말고!”

유석현씨는 조훈현이 바둑계의 거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앞날도 창창하다는 걸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충고에 따라 정운영씨는 엉겁결에 맏딸의 이성교제를 최종승인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었으니 알고 보면 그들의 혼사에 있어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유석현씨라고 해도 좋았다.
결과적으로도 유씨의 판단은 아주 정확한 거였다.

조훈현만큼 ‘修身齊家治國 平天下’의 교훈을 몸으로 실행하고 있는 위인이 과연 이 시대에 얼마나 되겠는가?

특별한 계기도 없고 짜릿한 연애경험을 축적하진 못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면서 서로에 대한 인간적 신뢰를 구축한 두 사람은 마침내 1980년 3월 15일에 약혼식을 올렸다.

차남의 혼사를 앞두고 보문동의 조씨네는 이사를 결행했다.
거의 이십 년 넘게 뿌리내리고 살아왔던 정든 보문동 한옥을 떠나 화곡동 양옥집으로 옮긴 것이다.

경동고등학교 담벼락 기슭에 위치한 보문동 한옥은 조씨네 가족들에게 있어서 모태(母胎)와도 같은 둥지였었다.

장남과 차녀, 삼녀를 여기서 시집보냈고 신산스런 가난에 부대끼면서도 정겨운 家族愛로 세월의 강을 건너왔던 터전이었다.
고지대인 까닭에 전망이 좋아 일출과 일몰의 아름다운 햇살을 즐길 수 있었고, 야간에는 동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던 곳.

그러나 돌산을 쪼아 세운 보문동 집은 너무 비좁았다.
더욱이 국수의 며느리를 들이기에는 신방조차 만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사정을 전해들은 집안의 외삼촌 박남술씨(박순애 여사의 남동생)가 자신의 화곡동 양옥을 추천했다.

우장산 기슭 신도로 변의 주택.
당시에는 신개발지여서 주변환경이 쾌적한 곳이었다.
그런 연유로 조씨네는 무려 이십 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사를 한 후에도 조 국수는 보문동 집에 대한 애착이 가시지 않아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그 집을 매입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곤 했었다.)

1980년 봄

아무도 나라의 운명을 점칠 수 없을 만큼 정세는 혼미의 극을 달렸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기존 정치세력들이 철퇴를 맞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대학가의 교문에 빗장이 드리워졌다.

그 해 4월 30일.
남산 입구의 앰배서더호텔 연회장에서 조훈현과 정미화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호텔 입구에는 각 언론사들의 대형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그리고 KBS, MBC......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언론사 사주들의 화환은 신랑 조훈현에 대한 존경과 축복을 담은 선물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조훈현은 그 언론사들이 주최하는 바둑대회의 거의 모든 타이틀을 쥐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3개월 뒤 신랑은 한국바둑사에 길이 남을 전타이틀 석권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신부 정미화씨는 그 호텔 예식장에서 비로소 남편의 존재가 예사롭지 않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마침 흐드러지게 유채 꽃이 만발하고 바다 바람도 따스한 훈풍으로 바뀔 무렵이었다.
보수적인 환경 속에 성장한 신랑과 신부는 남국에서 처음으로 이성과의 사랑, 그 환상적인 로맨스의 진수를 맛보며 꿈같은 밀월여행을 즐겼다.

(2002년 2월 엘지배 결승전을 앞두고 부부는 렌터카로 제주도를 일주했다. 만 22년 만에 오직 둘만이 돌아본 여행길에서 부부는 아마도 신혼여행의 기억들을 부단히 주워 올렸으리라.)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신부 정미화는 화곡동의 신방을 정리하면서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차남이었지만 조 국수는 결혼하기 전에 노부모를 봉양하는 조건을 내걸었었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유학 가는 바람에 부모의 정을 충분히 못 받았다는 이유를 달았지만 사실은 형님의 넉넉지 못한 경제사정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칠순을 넘긴 노부모는 며느리에게 낡은 스크랩북과 앨범을 건네주었다.
그 안에 당대 최고의 천재인 남편의 빛바랜 발자취가 담겨져 있었다.
거실의 선반 위에는 무수한 트로피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트로피에 광택을 내면서 남편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왁스 같은 존재가 되리라 마음먹는다.

이 때까지 조 국수의 타이틀 획득 수는 자그마치 33개.
국내의 모든 타이틀을 거머쥐고 오직 명인위 하나만 남겨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 마지막 철옹성을 향한 조 8관왕의 주도면밀한 공세가 이미 펼쳐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마지막 성주 서봉수는 한국바둑의 자존심을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텼다.
2:2의 스코어.

관철동은 기이한 분위기 속에 대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조.서 양웅 그들만의 잔치로 변해버린 타이틀전.
기사들은 소줏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양웅의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중립이었지만 아무래도 한 사람에 의한 독재는 바람직하지 않았기에 은근히 서봉수가 투지를 발휘해주기를 기대했었다.

1980년 7월 12일. 한국기원 4층 특별대국실. 명인전 도전 제5번기가 열렸다.
보통의 경우 비중이 큰 도전기는 유명호텔의 특설 링을 빌려 치르는 게 관례였지만 특정 장소에 따른 두 대국자의 징크스 관계로 공정을 기하기 위해 한국기원을 택한 거였다.

오전 10시 정각.
입회인 김동명 6단이 대국개시 선언을 했다.
돌을 가린 결과 도전자 조훈현의 흑번으로 결정 났다.
아무래도 기분 좋은 출발.
명인위는 78년에 접수했다가 이듬해인 79년에 다시 반납한 타이틀이며 서봉수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곳.
이 명인성만 없었다면 조훈현의 전관제패 신화는 조금 더 일찍 이뤄졌을 것이다.

매스컴과 호사가들은 79년부터 조훈현의 전관제패 가능성을 놓고 왈가왈부했었다. 조훈현도 세간의 화제가 된 이상 꼭 달성해보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바둑은 서로 간에 큰집 모양이 없는 난전의 형세로 100여 수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07 수, 조훈현의 묘착이 떨어지면서 좌하귀에 생사가 걸린 패가 났다.

치열한 공방 끝에 팻감이 부족한 서 명인이 136 수로 끝내기와 다름없는 팻감을 쓰자 도전자는 가차 없이 만패불청, 좌하귀를 때려내고 만다.
이후 명인은 아쉬움을 버리지 못하고 227 수까지 승부를 끌고 갔지만 우하귀의 출혈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을 던졌다.

하지(夏至)를 갓 넘긴 7월의 낮은 길었다.
조훈현의 전관제패 소식은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오후에 관철동을 진원지로 사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5층 공개해설장.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와아- 함성을 터뜨렸다.
만 27세의 양웅은 묵묵히 복기를 하며 감상을 주고받았다.
공식대국에서 만난 이후로 종국 후에 두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 예가 없었는데 이 날만은 패자가 숙연하게 승자의 신화를 확인해주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쉬가 쉬지 않고 터졌다.
새롭게 등장한 바둑계의 독재자 조훈현은 수줍은 미소로 취임의 변을 밝혔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 말은 결코 겸양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국내의 전 타이틀을 싹쓸이했다 해서 바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 활약 중인 조치훈이 거의 모든 기전의 본선에 올라 메스컴의 조명을 받았고 마침내 11월 명인위에 등극하면서 바둑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국의 전관왕보다 훨씬 비중 있게 보도되면서 조훈현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었다.그 날, 엄청난 결혼선물을 안고 귀가한 조훈현에게 신부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이미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입을 통해 즐거운 소식을 듣고 싶었다.

“응, 졌지 뭐.”
남편의 대답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좀처럼 패배를 모르는 전신(戰神)이지만 승부의 결과에 대한 물음에는 항상 졌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신부는 피식 웃으며 승부의 피로에 찌든 남편을 껴안아 주었다.

전관왕 조훈현이 용인 처가댁에 방문하자 장인 정운영씨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환대해주었다.
이런 보물인 줄 진작 알았다면 결혼 전에 좀더 잘 대해줄 걸......
장인은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미화야. 남편 잘 챙겨드려라.”
장인은 눈만 부딪히면 맏딸에게 간곡한 당부를 했다.

그럴 때면 정미화는 샐쭉 입술을 내밀고 토라지곤 했다.
“피이, 사위만 눈에 보이죠?”
잘 나가는 남편을 둔 아내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은 영광의 소외감이 아닐까?
어차피 한 몸이라 남편의 영광은 다 아내의 몫이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의문이 드는 법이다.

그러나 국수의 신부는 일찌감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남편의 존재와 동일화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던진다.
노부모를 모시고 조씨네 살림을 도맡아 꾸려 가는 맏며느리 역할에서부터 승부사의 비서 역할까지 감당하며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까지 조 국수의 그림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출판인 김석록은 여성동아에 조 국수의 아내 정미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國手의 네모난 칸을 가득 채우는 둥근 돌.’이라고.

얼마 전에 끝난 엘지 배 세계기왕전은 세계 바둑타이틀 전 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일컬어지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결과는 유창혁 9단의 역전승.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백중지세 속에서 조훈현의 3:2 승리를 예상했었다.
실제로 조훈현은 3국을 승리함으로써 세계타이틀 그랜드슬럼을 기록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배짱 두둑한 유창혁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기세 좋게 전신의 변환술을 맞받아 쳐 대역전극을 연출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계대회 싸이클링 히트의 영광은 유창혁에게 넘어갔다.
조훈현의 팬들은 그 패배를 아쉬워하면서도 유창혁에게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유창혁은 능히 그런 영광을 차지하여도 아깝지 않은 인물.
어찌 보면 조훈현의 기질과 기풍을 고스란히 닮은 후배가 아니던가.
필자를 비롯한 조훈현의 팬클럽은 시기상 이 번의 기회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이쯤해서 엘지배를 접수했으면 이제 바둑인으로써 조훈현은 이룰 것을 다 이룬 셈이 되고 조금 더 부담 없이 큰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요즘 조 국수의 스케줄을 한 번 훑어보면 그야말로 혹사지경임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요타ㆍ덴소배, 오키나와 아시아 배, 그리고 국수전과 후지쯔배......
공교롭게도 이 시기, 조 국수는 심한 몸살을 앓았으니 아무리 전신이라고 해도 두는 족족 이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전에서 외국기사들에게 거의 퍼펙트 승리를 쌓아가고 있는 조 국수의 경이적인 활약을 보라.
그는 목표가 정해지면 한도 끝도 없이 내달리는 기관차에 분명하다.

 


 
못 말리는 한국바둑

이제 세계대회가 열려도 그리 두근거리지 않는다.
8강과 4강을 우리 기사들이 무더기로 점유하여도 겉으로 환호작약하기가 조금 머쓱하다.
바둑 팬들은 일본과 중국기사들이 좀더 분발해 드라마틱한 명승부를 연출해주길 갈구하는 입장이고, 아울러 매스컴은 국제대회 우승의 비중을 1면에 한 줄 정도로 취급한다.

큰 시합 때마다 당연히 생중계를 해주리라 믿고 TV채널과 인터넷 사이트들을 방황하는 팬들은 오후 무렵에야 대국 결과에 관한 간단한 정보만 접하고 아쉬움을 삭힐 뿐이다.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으로 짜여진 삼총사의 국제전적은 거의 퍼펙트에 가깝다.

어쩌다 한 판을 놓쳐도 우리는 그리 아쉬워하지 않는다.
꼭 삼총사 중에 한 명은 뒤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요새 우리는 삼총사의 컨디션 조절을 간곡히 당부한다.
이제 그들의 적은 사실상 폭주하는 스케줄뿐이다.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하고 성급한 아카시아까지 주렁주렁 꽃봉오리를 터뜨린 4월은 우리의 영웅 조훈현 국수에게 꽤나 잔인한 달로 기억될 듯싶다.
초순에 걸린 독감이 하순에 접어들 때까지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엘지 배 결승전 역전패, 국수전의 연패......
이 일련의 하강곡선은 바이오리듬의 저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아마추어라도 맞수와 제대로 된 한판의 바둑을 두고 나면 탈진하는 법.
그런데 세계의 최고수들과 거의 매일 기 싸움을 벌여야 하는 조 국수는 로마시대의 글래디에이터와 다를 바 없는 전사이다.
거듭되는 결투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또 다른 승부를 기다려야 하는 고독한 검투사......

다시 1980년
전 타이틀 석권.
아무리 기사 층이 엷은 한국바둑계라고 해도 한 사람이 모든 타이틀을 싹쓸이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기록이었다.

한반도를 평정한 조훈현은 고개를 들어 대륙과 해양을 조망했다.
이제 조훈현이라는 절대강자를 보유한 한국바둑도 한 번쯤 일본과 맞대결을 해보고 싶은 열망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훈현은 매년 벌어진 국제 친선대국에서 일본의 내로라 하는 강자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고 완력을 선보여 왔었다.
그 무렵 중국에서도 섭위평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등장해 호시탐탐 일본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까지 일본은 세계최강국이었다.

조훈현과 섭위평은 명인전, 본인방전 등의 본선 무대에 끼워주어도 시드에 남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카다 9단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면돗날 초식을 구사하고 있었고, 후지사와 9단은 술과 도박에 찌들어 있었으면서도 가공할 집중력으로 서열 1위 기성전에서 후배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이중허리 임해봉은 오청원의 대를 이어 중후한 대륙바둑의 선봉으로 꾸준히 성적을 냈고, 기타니 도장의 오오다케, 이시다, 가토, 다케미야가 늘 선두권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조치훈이 마침내 80년 명인위를 차지함으로써 화룡점정의 마침표를 찍는 시점이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까마득한 20년 전의 강호들 대부분은 아직도 흔들림없이 정상권에 머물러있다.
그 때 일본의 타이틀전이 모두 오픈 되어 삼국의 고수들이 공평한 조건에서 자웅을 겨뤘다면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 시기 필자는 수시로 조 국수를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똑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삼촌, 이제 일본 가셔야죠?”
“어떻게 가겠냐?”
가는 방법이 있으면 좀 알려달라는 투로 국수는 대답했다.
늘 같은 질문에 늘 같은 대답이었다.
간결하면서도 은유적이며 핵심을 함축하고 있는 국수의 답변.
그 말속에는 강렬한 투지가 녹아 있는 게 확실했다.
바둑관계자들은 조훈현에게 ‘일본 콤플렉스’가 있다고 지적했었다.

공부하다가 중단해버린 일본 유학.
스승 세고에 9단은 유언으로 조훈현을 일본에 데려오라고 했고, 후지사와 9단은 왜 진주가 흙 속에 묻혀있느냐고 투덜거렸었다.

동생이나 다름없는 조치훈이 이미 75년에 최연소 타이틀 획득을 기록하면서 일본의 최강자로 떠오르고 있었으니 조훈현이 군대 문제로 귀국하지 않고 정진했다면 지금 일본에서도 틀림없이 정상권에 진입했을 텐데......

조훈현은 겸허한 자세로 때를 기다렸다.
언젠가는 세계에 한국바둑의 기개와 기량을 널리 떨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얼마 전에 타이젬의 게시판에 ‘일본 바둑 흥망론’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글이 올라왔었다.

현재 일본 바둑이 변방으로 밀려난 데에는 조훈현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결론이었다.
1970년대에 조훈현이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았었다면 조치훈 등의 강자들과 패권을 다투면서 일본바둑의 격을 한층 더 높였을 것이고 오늘날에도 결코 한국이나 중국의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야긴즉슨.

다소 궤변 같긴 하지만 지금에 와서 세계바둑사를 얼추 훑어보면 조훈현의 존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일리 있는 역설로 인정해 줄만도 하다.

이제 조훈현은 중국 프로리그의 용병으로 참가할 예정이다.
1년에 네 판 정도만 두는 형식이지만 조훈현을 기용한 중국바둑의 선택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조.이 사제와 유창혁이 포함된 프로리그는 세계 최강의 리그가 아닌가?
승패를 떠나서 한국의 고수들은 그들에게 실전적인 한국형 정석의 진수와 치열한 승부호흡을 선보일 것이며, 아마도 풍부한 텍스트를 제시하리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중국바둑의 폭은 한층 더 확대될 것이다.
일본도 자존심을 되찾으려면 결국은 문호개방이 선결조건이 아닐까 싶다.

1980년 가을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조훈현은 한달 간에 걸친 미국여행을 떠났다.
치열한 승부의 현장을 떠나 고갈된 기운을 재충전하기 위한 휴가였다.
어려서부터 남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온 공인이었기에 이번 휴가만큼은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객기 안에서부터 그의 희망은 부서지고 말았다.
승무원과 승객들 대부분이 한국바둑의 대명사로 떠오른 이 청년에게 인사를 전해온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구속이었다.
앉아 있는 것, 먹는 것, 심지어 화장실 출입조차도 타인의 눈을 의식해야 하니까.

미국에서의 일정도 바둑홍보 활동으로 타이트하게 짜여져 있었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바둑 붐이 일고 있었다.
트리밸리언이라는 작가의 소설 ‘시부미’가 밀리언셀러로 떠오르면서 그 소설에 등장하는 바둑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시부미’는 일본말로 ‘아주 깊고 그윽한 어떤 것’이라는 뜻인데 소설 속의 주인공이 어린 시절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바둑의 대가로부터 신비한 능력을 전수 받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시점에서 바둑천재 조훈현의 방문은 미국 유력 언론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워싱턴포스트지는 ‘Korea GO Champion Oriental Lightening Calculation'이라는 제목으로 조훈현에 관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조훈현은 워싱턴에서 ‘아주 깊고 그윽한 어떤 것’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벽안의 아마추어들을 상대로 다면기(多面棋)를 두었는데 16명과의 동시대국에서 15승 1패를 기록했다.

아마추어들은 여러 형태로 동양에서 온 마스터를 시험했지만 조훈현은 점잖게 대응하며 고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는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두 수를 한꺼번에 둬놓고 시치미를 떼기도 했었다.
그러면 조훈현은 씽긋 웃으며 위반된 돌을 지적했다.
물론 이기고자 저지른 반칙이 아니라 고수의 기억력을 테스트한 것이었다.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몇 판을 두더라도 모든 판을 기억하는 법이다.
그 중에서도 조훈현 정도의 고수라면 얼추 열 여섯 판의 복기를 어렵지 않게 해낼 판인데 그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었을 것이리라.

전문기사들이 수를 기억하는 능력을 전문용어로 조영력(造影力)이라고 한다.
한 수 한 수를 사진 찍듯이 머릿속에 새겨두는 능력을 말한다.
바둑의 수는 철저히 앞뒤의 수와 논리적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복잡한 판이라도 해부가 가능하고 복원이 가능한 것이다.
독도법(讀圖法)이 지형지물로 방향을 탐색하는 것처럼.

조훈현의 조영력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수십 판의 바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까마득한 과거의 바둑을 기억하는 저장성에도 일가견을 보여준다.

얼마 전 타이젬의 회의실에서 바둑평론가 이광구 선생이 이십 년 전의 바둑 기보를 주르륵 깔아놓고 때마침 들어온 조 국수에게 승부의 분수령을 가르는 문제의 수를 물었다.

그러자 조 국수는 지체 없이 중앙의 한 곳을 가리키며 그 판이 어떤 판인지 어떻게 해서 이겼는지 심지어 대국 당시의 기분과 주변의 관전자 분위기까지 술술술 재생해내는 거였다.

그러자 이광구 선생이 혀를 내둘렀다.

“어이구, 대단하십니다. 이십 년 전 바둑을 완벽하게 기억하시다니!”
“기억하고 싶어 기억하는 것이겠습니까? 밥줄이다 보니 어찌 기억하게 된 거겠지요.”
겸양의 표현으로 밥줄이란 표현을 썼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사십 년 전의 바둑까지도 맘먹으면 기억해내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조훈현이 미국에서 게임의 신화적인 존재로 부각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스토리 초반부에 언급한 체스 챔피언과의 친선대국 해프닝이 바로 그 것.
바둑외교의 사절로 어느 날 체스 클럽에 방문한 조훈현에게 클럽관계자가 체스 한 판을 권유했다.

바둑과 체스의 형태는 다르지만 당신이 게임의 고수라면 그래도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제의였다.
물론 조훈현은 그 때까지 체스의 룰조차도 모른 상태였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조훈현은 흔쾌히 응했다.
그는 이미 체스 명인들의 게임을 두세 판쯤 치밀하게 관전하고 난 상태였다.
어쨌거나 관계자의 주선으로 체스 챔피언과 바둑 챔피언의 맞대결이 벌어지게되었다.
첫 판은 조훈현의 완패.

룰을 제대로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그대로 밀려버렸다.
아무리 친선이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대국은 싱거운 법.
그러나 조훈현은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들을 원위치에 도열시켰다.
한판 더 둬보자는 도전이었다.

그 두 번째 판에서 조훈현은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통쾌하게 체스 챔피언을 꺾어버렸다.
클럽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혹시 저 사람이 체스도 잘 두었던 거 아냐?’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지만 조훈현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체스를 두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겼을까?
“구경하는 동안 이기는 길 몇 가지를 봐두었었다. 이런 모양이면 이기고 저런 모양이면 지는구나 하고 승패의 경우를 파악해두었는데 공교롭게도 상대가 그 경우의 한 패턴에 쏙 들어와 준 것이다. 그러니까 실력으로 이겼다기보다 운으로 이긴 거지. 아마추어 골퍼가 냅다 휘두른 공이 홀인원 됐다고 보면 돼.”

조훈현은 그렇게 설명한다.
과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대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체스 챔피언이 한국에 와서 프로기사들의 바둑 두어 판을 관전하고 나서 이기는 길을 파악한 다음 조훈현과 바둑을 두어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역설의 가정을 세워보면 바둑이 얼마나 위대한 게임이고 조훈현이 얼마나 천재적인 승부사인지 알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80년 조훈현이 한국바둑을 평정한 것과 동시에 조치훈은 일본의 명인위를 차지함으로써 양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것은 일본의 전문가들이 오래 전부터 예견해왔던 사실이었다.
김죽림(金竹林) 시대를 잇는 양강(兩强)구도.
그러나 전문가들의 예견대로라면 조훈현이 일본무대에서 본인방 타이틀 하나쯤 획득했어야 옳았다.

한국의 모든 타이틀을 휩쓸었어도 그 함량과 무게는 일본의 명인위에 미치지 못했다.
언론도 그랬지만 바둑팬들도 조훈현에게 커다란 숙제 하나를 내맡겼다.

조치훈과의 진검승부.
비슷한 시기에 일본유학을 떠난 두 천재는 외로운 소년시절을 타국에서 보내며 각각 세고에, 기타니 문하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다.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그렇고 지기 싫어하는 승부근성도 비슷했으며 성씨까지도 같은 발음이어서 팬들을 혼동시켰던 두 사람.
1년 터울로 일본기도문화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이십 대의 창창한 나이로 정상에 오른 두 사람.사실 그들은 원생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동병상련의 다정한 사이였지 라이벌은 아니었다.

세월과 세상의 이목이 1980년 그들의 관계를 대칭각으로 맞세워 놓은 것이었다.
그 무렵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군인출신 정치인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떨치고 있었는데 민정당 국회의원들이 모인 자리에 조훈현과 조치훈이 동시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정치인들의 친선 바둑모임이었었다.

그 자리에서 실세로 통하던 한 정치인이 두 사람의 기념대국을 주선했다.
“우리들 앞에서 한일 최고수들이 한 수 겨루는 게 어떻습니까?”
딴에는 그럴듯한 기획의도였지만 두 사람은 얼굴이 벌개졌다.
아마추어들이 프로들을 모셔놓고 한판 벌이라니.

홍수환과 염동균을 불러놓고 둘이 주먹대결을 한판 뜨라는 것과 다름없는 얘기였다.
조치훈은 일언반구의 대답도 없이 자리를 뜨고 말았고 조훈현은 불쾌한 표정을 삭히느라 애를 먹었다.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한 조훈현이었지만 한국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프로기사이기에 정치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기원 소속으로 건너와 한국정치인들의 무례함에 정면으로 자존심을 표현한 조치훈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아무튼 무례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정치인이 보고 싶었던 것처럼 팬들은 양조의 승부를 확인하고 싶어했고 그러한 열망이 마침내 1980년 연말과 1981년 연초에 걸쳐 2차전 TV대국으로 성사되었다.

당시로써는 최고의 빅 매치였으나 사실 그 승부는 너무 졸속으로 기획된 대국이었고 편파적인 시합이었다. 양국의 정상들이므로 동등한 조건이어야 했음에도 대국료가 차등으로 지급된 것이다. 표면적으로 액수는 같았다.

그러나 조치훈은 엔화였고 조훈현은 원화였다.
당시의 환율로 네 배 정도의 차이.

대국료도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그 무렵에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던 조훈현은 바둑 둘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방송사의 스케줄을 외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전쟁에 나서서 이기거나 최소한 비기기만 했더라도 후유증은 덜했을 텐데 조훈현은 두 판을 모두 역전패 당하고 비난의 직격탄을 맞아야했다.

그러면 그렇지 일본의 명인한테는 역시 안돼.
바둑을 두면서 다리를 사시나무 떨 듯 떠는 매너는 뭐야?
패자에게 가당치 않는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승패를 떠나서 조치훈과의 형제대국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오랫동안 다른 환경에서 바둑에 정진해 온 양웅이 정상에서 만나 오로의 수담을 나눈다는 것은 행복한 만남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은 바둑의 내용을 보지 않고 승패의 결과만을 놓고 왈가왈부 입방아를 찧게 마련이다.

아무튼 그 대국은 수렁이었다.
그로 인해 그 해 겨울 조훈현은 홍역을 치르고 만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팬들의 지지율이 뚝 떨어졌고 왕위전에서 서봉수의 흉내바둑 작전에 말려 3승 4패로 전관왕의 지위를 잃고 만다.

다시 해를 넘기자마자 최고위를 빼았겼는가 하면 봄에는 국기마저 잃었다.
당시 타이틀 일곱 개 중에서 세 개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욱일승천하던 시절에 조치훈과의 대국은 독약과도 같았다.
기세가 한 방에 꺾이면서 전적과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은 거였다.

그러나 조훈현은 독약을 보약으로 돌려놓은 사람.
그 이후 조치훈은 모든 대국에서 조훈현을 이겨보지 못했다.

조치훈은 얼마 전까지 대삼관으로 일본 최고봉에 우뚝 선 상태에서 어눌하게 말했다.
“일본 최고가 세계 최고가 아니라서 부끄럽습니다.”

마찬가지로 조훈현도 최근 일본의 바둑통신에 가슴 깊이 묻어둔 생각을 밝혔다.
“일본의 메이저 타이틀전을 오픈하는 게 일본바둑을 활성화시키는 방안이 될 겁니다. 한국의 삼성화재 배처럼 말입니다. 그런다면 저와 이창호도 참여할 뜻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바둑이 아무리 세계대회에서 부진하다해도 기성전, 본인방전, 명인전 등의 타이틀은 세계대회를 상회하는 전통과 상금을 자랑한다.

일본에서 바둑을 공부한 조훈현에게는 그 세 개의 타이틀에 도전해보는 것이 염원일 수 있으리라.

스승 세고에 9단이 유언으로 남겼던 것처럼.
바둑전문가들은 말한다. 양조의 진검승부는 1983년 이루어졌어야 한다고.

그 때 조훈현은 한국 최초의 9단에 오르면서 제2차 천하통일을 이룩했고 조치훈은 ‘기성위’를 쟁취 일본 바둑 랭킹 1~4위 전을 석권하면서 실질적인 천하통일을 완수한 셈이었으므로.

지금 이창호를 비롯한 신흥강자들이 등장해 ‘양조’는 흘러간 이니셜이 되었지만 아직도 바둑인들은 두 천재의 기량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본의 타이틀전이 오픈 되어 기성전이나 명인전 타이틀 매치에서 양조가 이틀걸이 바둑으로 진검승부를 겨룬다면 승패를 떠나 얼마나 보기 좋은 장면이 연출 될 것인가 가슴이 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숙제는 물론 천만 바둑 팬들의 호기심도 시원하게 씻겨질 텐데.

 

 

1981년은 시작이 좋지 않아서인지 성적도 시원치 않았다.
언제나 연간승률 80% 이상을 기록했던 조훈현이었는데 이 해에는 35승 13패로 72.9%에 머물렀다.

그 13패는 한결같이 비중이 큰 타이틀전에서의 패배였다.
해일(海溢) 같은 기세로 모든 타이틀을 독식한지 불과 일년이 채 안 지났는데 조훈현의 칼날은 어쩐지 무뎌져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정월 조치훈과의 대국에서 혈도를 눌린 까닭이라고.
조치훈, 그리고 일본바둑의 무게가 조훈현을 답답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실상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그가 부진했다기보다 숙적 서봉수의 활약이 두드러졌었던 것이다.
순국산 잡초류, 야전사령관, 게릴라로 통하는 서봉수.
그는 천부적인 파이터였다.
조남철,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으로 이어지는 일본유학파 국수 인맥들에 비하면 바둑의 학력(?)이 턱없이 딸렸지만 스스로 승부의 독도법을 터득한 또 다른 천재였다.

그 괴초식에 현대바둑의 대명사로 통하던 조남철 국수가 무릎을 꿇었고, 천하의 조훈현도 15년 동안 시달려야 했었다.
만약에 서봉수가 없었다면 조훈현의 위대한 성취도 빛이 바랬을지 모른다.
국내 타이틀 천하통일의 시기도 빨라졌을 것이고 기간도 훨씬 길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서봉수도 조훈현이라는 강력한 상대가 있어 일취월장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동시대에 등장한 두 동갑내기 승부사들은 어느 순간 단숨에 정상에 올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한 걸음 먼저 명인산맥에 오른 서봉수.

5년 정도의 예열(豫熱) 기간을 거친 뒤 모든 산맥을 종주(縱走)해버린 조훈현. 두 사람의 피 말리는 전쟁은 그 당시에 관철동을 누비던 모든 기사들을 술 마시게 만들었었다.

주연과 조연-
나머지는 모두 엑스트라였으니까.
그리하여 최대의 타이틀전이 열려도 기사들은 시큰둥했었다.
“또 조훈현과 서봉수야?”
그러나 주위의 눈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웅은 숙적과의 승부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만큼 바둑은 살벌했다.
그에 따라 관계마저도 소원할 수밖에 없었다.
복기를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고, 반외에서 잡담조차도 건네지 않을 정도였다. 신경전도 치열했다.
상대가 장고 하는 동안 잡지를 보는가 하면 한 술 더 떠 수면을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훈현의 쾌속행마에 당할 대로 당한 서봉수는 비장의 흉내바둑을 들고 나와 재미를 보기도 했었다. 조훈현의 바둑이 밝고 화사하다면 서봉수의 바둑은 음침하면서 서늘했다.
무사와 자객의 이미지-
그들의 전쟁은 장장 15년 이상 이어지며 300판을 훌쩍 넘겼다.
세계바둑사에 이처럼 두 사람의 대국이 많은 사례는 없다.

전적은 정확히 2:1의 비율.
정통파 조훈현이 앞선다.
그러나 서봉수를 2인자로 부를지언정 패자로 부르진 않는다.
야성의 화신 서봉수는 조훈현에게 무수한 펀치를 맞았지만 단 한 번도 넉 다운 당해본 적이 없다.

밟힐수록 강해지는 보리 싹처럼, 바람에 쓰러졌다 일어나는 들풀처럼 끊임없이 되돌아 와 선전포고를 날렸다.
그리하여 제2회 응창기배를 먹었고, 94년 1천승을 돌파했는가 하면, 97년 제5회 진로배에서 파죽의 9연승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세계최강 조훈현의 스파링 상대로 맷집을 키운 서봉수는 어느 순간엔가 고산준령이 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서봉수의 게릴라전에 승부호흡을 키운 조훈현도 전천후 요격기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실전적인 한국형 정석의 모태가 바로 이 두 사람의 무수한 혈전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조국수의 일면

2002년 5월말 평창동 조국수의 자택에서 소소회를 중심으로 한 청년기사들이 모였다. 잔디밭에서의 뷔페 식사.
이 행사는 벌써 5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연례행사이다.
50명이 넘는 신진기사들과 연구생들은 이 날 하루 갖은 음식으로 포식하고 한국바둑의 거목인 조국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엿볼 기회를 얻게 된다.
편안한 모시한복을 입고 아들뻘이나 다름없는 동료기사들을 초빙해놓고 국수는 모처럼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네들과 더불어 아무런 이야기나 격의 없이 나누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아무래도 프로기사들의 모임이므로 바둑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이 되는데-
국수는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거침없이, 여과 없이 바둑론을 펼친다.
그러나 그 말에 확신이 함유되어있지만 거만의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식사가 끝나고 거실에서 바둑문화와 바둑행정에 관한 난상토론이 벌어진다.

한국바둑의 미래를 위한 제언들이 쏟아진다.
국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주로 경청하는 쪽이다.
청년기사들은 역시 진보적이고 개혁지향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바둑의 기세가 활활 타오르고 있지만 그 불길을 온전히 담아 보존할 용광로(?)의 상태가 아무래도 부실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국수는 그들 앞에서 청문회에 나온 증인처럼 시달린다.
사실 그는 청년들보다 훨씬 우리 바둑의 취약점을 깊숙이 꿰뚫어 보고 있음에도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격정적인 토론이 끝나고 청년들은 우르르 지하실로 내려갔다.
이창호 9단이 토론의 뒤끝을 지키기 위해서 스승의 옆자리에 앉아있자 국수가 씽긋 웃으며 한 마디 건넨다.

“창호, 내려가서 훌라 한 판 해라.”
그러자 이창호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지하로 내려간다.
후배들을 몽땅 지하실로 내려보내고 씁쓸한 커피를 음미하는 국수에게 다가가 필자가 물었다.

“창호(필자는 소년 시절부터 창호를 그렇게 불렀으므로 양해바람)가 포커 게임도 잘하나요?”
“바둑 고수의 내공이 어디 가겠니? 끝내기가 강하지.”
필자는 이창호의 그런 내공이 궁금해서 살짝 지하실로 내려가 기사들의 건전한 사이드 게임을 줄곧 지켜보았다.

이창호는 역시 게임에서도 과묵했었다.
스타일도 바둑과 다름없이 두텁게 운영하는 쪽이었다.
초반에는 상대들의 페이스에 질질 끌려갔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기회를 잡자 묵직하게 ‘훌!’을 부르고 대박을 때리는 것이었다.

결국 조국수의 예언은 정확히 적중한 셈이었다.
그 날 뒤풀이 훌라 게임에 참석했던 K모 기사, C모 기사, 타이젬의 이사님이 이창호로부터 개평을 받고 일어섰다는 사실.

 

조훈현은 술을 입에 대지 못한다.
아마도 체내에 알콜분해요소가 전혀 없는 듯하다.
박카스나 활명수를 먹어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체질이다.
대체적으로 조씨네 집안 사람들은 거의 술을 멀리하는 편이다.
그런 조국수도 80년대 초반에 딱 한 차례 폭음(?)을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80년 12월 31일, 아니 제야의 종이 울렸으니까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81년 1월 1일이 맞겠다.
관철동의 어느 소줏집에서 김인 9단과 함께 앉아있던 조국수가 갑자기 반 쯤 차 있던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 단숨에 비웠다.

처음 보는 광경에 흥미를 느낀 김인 9단이 다시 빈잔에 반쯤 술을 따르자 조국수가 또 원샷으로 비워냈다.

무엇이 그를 취하고 싶게 만들었을까?
김 9단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조국수를 지켜 보았다.
“어, 이 친구 봐라?”
김 9단은 두 가지가 궁금했다.

술이라면 근처에 가기도 전에 넌덜머리를 내던 후배가 어인 일로 화끈하게 원샷을 시도했는지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도대체 어떤 상태로 변하는지 그 추이를 보고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조훈현의 몸은 금새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총기 가득한 눈망울이 충혈되었고 목이며 손바닥 등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붉어졌다.
“저, 먼저 들어 가겠습니다.”
조훈현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이봐, 조국수 괜찮겠어?”
김 9단이 걱정스럽게 후배의 팔을 부축했다.
조훈현은 걱정말라며 손바닥을 내보이고 술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는 휘적휘적 밤거리로 나가버렸다.
김 9단은 후배를 떠나보내고 후회했다.
오늘같은 밤에는 취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함께 했어야 옳았다.

그의 흉중에 어떤 갈등이 도사리고 있는지 들여다 본 다음 속시원하게 긁어줘야 했고, 또 술이란 어떻게 음미하고 술벗과는 어떻게 함께 하는지 가르쳐 줄 좋은 기회였는데......
조훈현이 빠지자 술자리도 곧 파장이 되었다.

김 9단과 박치문씨 등이 술집에서 나와 단골인 한평여관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을 때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그림자 하나가 담벼락을 더듬으며 엉금엉금 기어 오고 있었다.
조훈현이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여관 문을 밀고 들어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해 정월 초하루 그는 여관에서 거의 하루종일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어야 했다.
소주 한 잔은 그에게 치사량이나 다름없었다.

반 잔이면 코가 막히고 전신이 충혈되며 한 잔이면 앞이 보이지 않고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그 이후로 그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조금씩 입에 대면 주량도 붙는다고 하지만 그는 주량 따위의 내공을 키울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술을 먹지 않아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낄 기회가 없다고 가까운 친구들이 탄식하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맨 정신으로도 얼마든지 흉허물 털어놓고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다고 내가 술자리를 마다하는가? 내 인내가 허용하는 한 생수와 청량음료를 앞에 두고 당신들과 늘 함께 할 수 있다.”
이 대답에는 필자도 쌍수를 들어 공감한다.

필자도 핏줄이 그런지 한 방울의 알콜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체질이다.
군대에서 고참들이 ‘마실래? 맞을래?’ 협박하면 맷집을 앞세워 절개를 지켰고 술집에서는 콜라 3000 CC로 기나긴 유흥의 시간을 버티곤 했으니까.

그렇기에 조 국수의 고뇌를 익히 알고도 남는다.
술, 까짓거 죽기살기로 한 두 잔쯤 못 마실 건 없지만 국수는 그 요상한 액체가 외부에서 체내로 들어와 희한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의식을 교란시키는 게 무지무지 싫다는 것이다.

그렇게 치사량의 소주 한 잔으로 시작한 1981년.
어찌 됐거나 조치훈의 중량을 체감했고 서봉수로부터 자극적인 도전을 받아 천하통일의 영광을 채 1년도 누리지 못한 조훈현은 절치부심 새롭게 칼을 갈기 시작했다.

승부의 속성이 한 번 밀리면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것이라 서봉수의 저돌적인 공세에 밀려 하나둘 씩 빼앗긴 타이틀을 되찾아오는 게 급선무였다.
4:3으로 양분됐던 타이틀 전선의 균형-
이제는 두 사람 모두 대등한 입장이었다.

그들은 한 손에 방패를 들고 또 한 손에 창을 쥔 채 공격과 방어를 거듭했다.
그 사이 타이틀의 도전자가 되기 위해서 치열한 본선무대를 거쳐야 했는데 어김없이 조훈현과 서봉수는 각 기전 본선무대의 최종승자가 되곤 했었다.
조훈현을 격파하기 위해서 수 없이 많은 전술을 구사한 서봉수-
그에 맞서 계속 새로운 변환술로 받아치는 조훈현-

치열한 용쟁호투의 저울추가 어느 순간 다시 조훈현 쪽으로 기울었다.
컨디션을 회복한 조훈현의 기마부대가 칭기스칸의 몽골군대처럼 정연하면서도 빠르게 361로를 가로질렀다.

곳곳에 매복해서 끈질기게 게릴라전을 펼치던 서봉수의 선봉대가 와해되면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마부대의 추격전은 집요했다.
패퇴하는 적군을 끝까지 따라가 도륙(屠戮)했다.
그도 부족해 확인사살까지 할 정도였다.

반란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절대 무자비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또 다시 중원을 제패하고 말았다.

제 2차 천하통일-
사실 처음보다 훨씬 어려운 위업이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연초의 지독한 슬럼프에서 탈출해 마침내 황제의 위엄을 되찾고 만 것이었다.

매스컴의 반응은 첫 번째 천하통일 때보다 좀 약했다.
오히려 조치훈의 일거수일투족을 더 조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두 번씩이나 완벽한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지만 조명이 꺼진 그라운드에서 승리투수는 알 수 없는 허탈감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역시 그 것은 목표의 상실감 때문이었다.
이제 어디를 보고 싸워야 하나?

 

조,서 시대는 정확히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훈현의 독주체제에 서봉수의 기나긴 도전이 반복된 기간이었다.
그들만의 장기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무수한 군웅(群雄)들이 정상 아래의 능선에서 명멸했다.

장수영, 서능욱, 강훈, 백성호, 김수장.
이들을 사람들은 도전 5강이라 불렀다.
이들은 80년대에 모두 빛나는 20대의 청춘들이었다.
하나같이 재기도 발랄했고 승부에 대한 뚝심도 탄탄한 수재들이었지만 그 누구도 조훈현의 벽을 넘은 적이 없었다.

아니 조훈현 이전에 2인자 서봉수의 벽을 넘기에도 힘겨워했다.
77년부터 87년까지 도전 5강은 각 기전을 망라해 총 15 차례 조훈현의 아성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철저한 퍼펙트.
거의 단 한 판도 건지지 못하고 도전하는 족족 영봉(零封)을 당해야 했다.
월간 바둑 지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조 VS 도전 5강의 데드매치(칫수고치기)에서도 그들은 정선으로 미끄러지는 수모를 당했다.

지독한 조훈현, 위대한 조훈현.
그러나 역설적으로 조훈현의 독주는 한국바둑층의 두께가 엷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1984년 봄.
조훈현은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어린이와 시험기를 두었다.
칫수는 두 점.
상대는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이창호라는 아이였다.
소년의 바둑은 외모처럼 뭉툭했다.

국수는 특유의 현란한 스탭으로 두 점의 벽을 흔들어댔다.
접바둑의 효과는 금새 사라졌다.
그러나 소년은 끈질기게 백의 행마를 물고 늘어졌다.
바둑은 국수가 이겼지만 소년은 국수에게 화인(火印)처럼 강인한 이미지를 남겨놓았다.
재기가 흘러 넘치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강한 바둑이었다.

시험기의 배경은 제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한지 검증하는 성격이 깔려 있었다.
전주에서 금은방을 하는 이재룡씨가 전영선 7단을 통해 아들을 제자로 거두어달라는 요청을 해온 것이었다.
조 국수도 창호라는 소년이 전주의 바둑신동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자신이 어렸을 때 지겹도록 들은 ‘신동(神童)’ 소리인지라 얼핏 관심의 눈길을 건네긴 했지만 뚜렷하게 주목하진 않았다.
‘신동’이란 단어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영선 7단의 권유가 너무나도 간곡했다.

“내가 가르킨 제자인데 기재가 아주 특출해요. 조 국수가 거두어 주시오. 만나보면 틀림없이 인정할 것이오.”
그렇게 조우하게된 것인데......
사실 이 무렵 조훈현은 직업인과 생활인으로서 제자를 둘 만큼 여유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더욱이 창호는 아직 어린 소년이고 집도 전주에 있었기 때문에 키우려면 아예 집에 들여 앉혀놓고 내제자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화곡동의 집은 좁고 부모님까지 함께 기거하고 있어 창호에게 안배해줄 공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나이도 아직 창창한 서른 둘, 아무리 국내 최정상이라 해도 아직은 제자를 두기에 이른 시점이었다.
그런데 호기심으로 창호를 만나 시험기를 두고 난 조 국수는 이내 갈등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바둑은 분명히 강했지만 소년은 천재형이 아니었다.
외모도 둔해 보였고,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복기(復棋)조차도 서툴렀다.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면서 수많은 천재들을 대해봤는데 이런 유형의 천재는 일찍이 본 예가 없었다.
그런데 실로 이상했다.
몽롱한 눈빛, 두툼한 살집, 과묵한 표정 속에 숨어있는 기이한 잠재력이 은근하게 국수의 영감(靈感)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0.917-
빙산은 9할을 은닉하고 1할을 드러내놓는다 했던가?
국수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창호라는 소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말았다.
그 순간의 판단이 훗날 세계바둑계의 판도를 좌우하는 중대한 결단이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창호를 내제자로 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넓은 집으로 옮기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정든 화곡동의 국민주택을 떠나 연희동 446의 263번지 2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다.

모래내에서 신촌으로 가다 보면 사천고가도로 왼쪽으로 야산 하나가 솟아있다.
6.25 당시 격전지로 알려져 있는 야트막한 고지.
그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들어선 주택들은 하나같이 예뻤다.
규모는 작지만 그 당시에 나름대로 부촌으로 통하던 동네였다.
새로 옮긴 집은 정원도 꽤 넓었고 비탈진 곳의 지형을 잘 활용한 독특한 구조의 주택이었다.

노부모님은 1층에 모셨고, 안방은 2층에, 창호의 공부방은 2층 모퉁이에 배치했다.
창호의 방은 국수의 자료실이나 다름없었다.
창간호부터 모아온 월간 바둑지와 일본의 바둑서적들을 죄다 비치해놓아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소년의 방은 벌써 전문기사의 서재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바둑계의 일인자가 내제자를 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기원 주변에서 악의에 찬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서른 둘의 프로기사가 제자를 품었다는 것은 제자의 부모로부터 거액의 대가를 받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런 의혹들은 조국수의 연희동 이사와 맞물려 제법 구체적인 드라마로 각색되기까지 하였다.

국수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렇지만 그런 소문에 일일이 대응할 이유는 없었다.
내제자를 들인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자신이 창호와 비슷한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선생 문하에 들어갔는데 선생의 집에서 십 년을 머물면서 수업료 한 푼, 월사금이나 생활비 한 푼을 낸 적 없었다.

일본 특유의 도제(徒弟) 제도는 그런 것.
어떠한 계약이나 거래의 여지는 전혀 없다.
그저 사제관계가 맺어졌으면 스승은 제자에게 조건 없이 모든 기술과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다.
조훈현의 생각은 세고에 스승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물려받은 은혜를 되돌려 주겠다는 순수한 의도였다.

 

이창호의 내제자 입문에 얽힌 소문들은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국수는 생리적으로 비정상적인 금전거래를 싫어하는 스타일이며 누구에게도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다.

그 점은 부인 정미화씨도 꼭 닮았다.
“연희동 집은 은행 융자와 빚을 얻어 마련한 거예요. 그 이외에는 결혼하고 지금까지 생활비 걱정이나 빚 걱정해본 적이 없어요.”
잘 살거나 못 살거나 가정주부들의 살림살이는 늘 욕구불만 덩어리이거늘 그녀는 서슴없이 그렇게 말한다.

바꿔 말해 조훈현은 가장의 첫 번 째 조건인 경제자립의 요소를 완전하게 충족시켰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훗날 D일보의 모 기자가 이창호와 관련된 책을 저술하면서 누군가로부터 어설프게 주워들은 소문을 사실인 양 늘어놓았다가 법적 책임까지 지게 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스승 조훈현은 물론이고 제자 이창호까지 문제의 저자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함께 대처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듯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조국수의 사자 새끼 길들이기 과정은 차질 없이 전개되어갔다. 연금술사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재료를 선택하고 재료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리라.
이창호라는 재료를 선택하기는 했는데 한눈에 총체적인 제원(諸元)을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

보통의 상식으로 천재라면 번뜩이는 광채가 어른거려야 하는데 이 아이는 그저 투박할 뿐이었다.

오히려 보통의 아이들보다 더 답답할 정도로.
특이한 게 있다면 지나치게 과묵하다는 점 하나.
이 특성은 내성적인 성격에서 오는 수줍음이나 어린 아이의 어눌함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말하고 싶은데도 꾹 참는 것.
표현하고 싶은데도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것.
거기에는 본능을 뛰어넘는 어떤 의지가 작용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의지가 발동되려면 깊은 생각의 여과와 수련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랬다.

아홉 살 소년 창호의 과묵(寡?)은 스승의 눈에 수수께끼로 비쳐졌다.
임해봉의 어린 시절이 이랬을까?
아니면 조치훈 유형의 천재인가?
하여간 어린 제자는 오청원이나 사카다, 그리고 조훈현 자신과 같은 화사한 정통파 천재형은 아니었다.

수업은 특별하게 프로그램이 마련돼 진행된 건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두 번 한국기원 원생들과 두고 온 바둑을 함께 복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필자는 그 무렵의 창호를 제법 가까이서 지켜본 관찰자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나는 연희동과 가까운 수색에 살고 있었는데 시내에서 수색으로 들어가려면 연희동쯤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내린 김에 정류장에서 가까운 외가댁에 자주 들르곤 했었다.

기력은 3급 정도였지만 바둑광인 필자는 외삼촌 방에서 바둑 책을 훔쳐보는 게 취미 중의 하나였기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연희동으로 이사오면서 그 취미를 포기해야 했다.
책들이 모조리 창호의 방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어린 초등학생이라 해도 창호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갈 순 없는 일.

그 때부터 외가댁에 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대신 책보다 바둑신동이라는 창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나는 이종사촌 동생인 민제(당시에는 유아)와 놀아주면서 틈틈이 창호를 관찰했다.
도대체 얼마나 바둑을 잘 두는가 시험해보고 싶었다.

당시 스물 다섯의 필자는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육군 특공부대에서 병역의 의무를 필한 뒤 충무로 영화판(배창호 감독 연출부)에서 일하고 있던 자신만만한 청춘이었다.
비록 기원에서 3급 판정을 받은 실력이었어도 말들이 부딪히는 육박전에서는 특공대 출신답게 한가락 힘을 과시하는 막바둑이었다.

그런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틈만 나면 3학년 짜리 이창호와 한판 붙어 어른의 파워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창호는 언제나 늦게 들어왔다.
학교수업을 마치면 관철동 한국기원으로 나가 원생수업을 받고 귀가했다.
그렇게 혹사하는 아이를 데리고 바둑을 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재를 뿌리셨다.

창호 공부에 방해된다고 아예 2층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원천봉쇄하는 거였다.
그러나 창호는 어린아이답게 순진했다.
어린 동생 민제와 스스럼없이 총싸움과 말타기 씨름 등을 함께 해주는 자상한 청년에게 호감을 표시했다.(물론 전적으로 필자 생각이지만)
창호에게 접근하는 전술로 나는 씨름을 택했다.

창호는 우량아 출신으로 나이에 비해 힘이 센 소년이었다.
나는 창호에게 몇 가지 씨름 기술을 가르쳐 주면서 세대 차이의 간극을 좁혔다.
그런 공력을 들인 끝에 마침내 나는 창호의 방에 입성할 수 있었다.
“창호야. 너 이 책 다 봤냐?”
“대충요.”
“일본 책도?”
“기보만 보거든요.”
무서운 놈, 3학년 짜리가 방의 3면에 가득 쌓인 책들을 죄다 훑어 봤다니.

“야, 나랑 한판 둬볼래?”
“그러죠.”
창호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판 앞에 앉았다.
“기원 3급인데 몇 점을 깔아야 되지?”
“여섯 점요.”
정말 자존심 팍팍 상하는 칫수였다.
“네가 힘들 텐데? 좋다. 그럼 우리 칫수 고치기로 붙는 게 어떠냐?”
“그러세요.”

창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백돌을 들었다.
우리는 초속기로 한 판을 두었다.
결과는 창호의 두 집 승리.
(그때 필자는 이창호의 끝내기 실력을 이미 알아보고 있었다.)
우와, 정말 웃기는 바둑이었다.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슥슥 판을 밀어가는 창호의 솜씨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아니 어디 당한 데도 없고 밀린 데도 없는데 여섯 점의 효력이 어느 샌가 다 날아가 버리고 없어진 거였다. 또 분명히 끝내기 단계에서 열댓 집은 앞서고 있었는데 계가를 마친 시점에는 두 집이 부족한 게 아닌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도 열이 받아서 그 뒤로 두 판을 더 두었는데 애꿎은 칫수만 일곱 점으로 바뀌고 끝이 났다. 아하, 이 아이가 내다보는 바둑과 나 같은 범인이 바라보는 바둑은 차원이 다르구나!
솔직히 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때 내려다 본 창호의 두툼하게 살진 손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야, 전문가 입장에서 본 내 바둑이 어떻든?”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3학년 짜리에게 깍듯이 사범 대우를 해주고 물었다.
그러자 창호가 대답했다.

“힘은 좋으시네요.”
“그렇더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창호의 방을 나와야 했다.
‘힘은 좋다’라는 짧은 강평.
거기에서 ‘은’이라는 단독격 보조사는 힘만 좋다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 아니던가.
나는 그 날, 창호 바둑 버릴 작정이냐고 할머니한테 무진장 혼이 났으며 아울러 바둑에 대한 자신감도 완전히 상실한 채 연희동 대문을 벗어났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우연히 당대 최고의 천재 두 사람이 바둑판을 두고 앉아 무언의 수담을 나누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날은 마침 대보름날. 
조 국수의 연희동 저택은 교교한 달빛에 휩싸여 있었다.

2층 창호의 방 유리창에 그림자 두 개가 마주 본 상태에서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솟구치는 호기심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외삼촌한테 혼날 각오를 하고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안쪽에서 응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에라 하는 심정으로 도어 꼭지를 비틀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스승과 제자는 문 쪽의 불청객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들만의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제는 빈 바둑판을 앞에 두고 손으로 무언가 연신 짚어가며 토론하는 것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옆에 앉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 날 둔 바둑을 복기하는 듯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바둑알을 판에 놓지 않고 손가락으로만 계속 수를 짚는 두 사람. 
아아, 그건 신기(神棋)라고 해도 좋았다. 
신기의 전설이 무엇이던가? 
두 신선이 백돌로만 바둑을 뒀다는 것. 
그런데 이 사제는 그저 텅 빈 바둑판 위에서 손가락으로 한 판의 바둑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수업의 주제는 필자가 추측컨대 '형세판단'이었던 듯 싶다. 
중요한 승부처에서 여러 형태로 발생되는 변화를 손으로 그려가면서 온갖 경우의 수를 깔아보고 가장 유리한 수순을 골라내는 수업이었다.
스승은 마치 타이프를 치듯 19로 구석구석을 짚어가며 참고도를 그려냈다. 
어린 제자는 묵묵하게 스승의 그림을 보고 있다가 간혹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 
역시 손가락으로만 표현되는 수화였다.

제자의 의견을 듣고 있던 스승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길도 나쁘진 않네. 그런데 이 길이 더 간명하지 않니?" 
스승의 물음에 제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을 접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자 스승은 마침내 돌을 들었다. 
반사적으로 제자도 다른 색 돌을 들었다. 
그때부터 천변만화의 참고도가 지어지고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국외자이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그들의 언어를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판을 복기해주고 스승이 나가면 제자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그 바둑을 놓아보곤 했었다.

소년 이창호의 바둑판은 네 귀 화점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귀의 정석과 변화를 두었는지 줄이 닳아버렸고 아예 그 부분이 움푹 패일 정도였었다.(지금 이국수가 그 바둑판을 소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존재한다면 상당한 가치가 있는 명반(名盤)일 텐데) 
그런 일 대 일 수업이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균 한 달에 한 번 정도 베푼 가르침이었지만 아주 농도가 짙은 수업이었으리라. 
국내 초유의 내제자 수업. 
국수는 그 옛날 스승 세고에로부터 전수 받았던 기예와 정신을 그대로 제자에게 물려주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천재형은 아니었지만 그 대신 창호는 경망스럽지 않고 차분한 소년이었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으나 조국수는 차츰 제자에 대해 신뢰감을 품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렵게 내린 결정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에 혼을 쏟아 부어 가르쳤고 어린 제자도 신통하게 나날이 괄목할 만한 진보를 보여주었다. 
창호는 연희동에 들어온 지 2년 만인 1986년에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재주도 재주지만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11세의 입단은 스승 조국수의 기록을 제외하고 으뜸가는 기록이었다.

창호가 입단할 무렵 필자가 국수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때요? 대성할 것 같습니까?" 
"아주 센 바둑이야." 
"국내 정상권과 칫수는요?" 
삼촌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이었다. 
"호선이야. 물론 승률이 조금 낮겠지만." 
그 시기에 조훈현은 도전 5강과의 칫수고치기 위험대결을 통해 절륜의 무공을 과시하고 있었다. 
도전 5강이 선으로 힘겨워하는 상대인데 이제 갓 입단한 초등학생 소년 이창호에게 호선의 실력을 인정하다니 누가 봐도 후한 점수일 터.

"묘한 바둑이야. 계산이 아주 뛰어나거든. 어쩌면 끝내기는 나보다 강한 지도 몰라." 
그 시절부터 스승은 제자의 계산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스승의 바둑은 수가 보이면 유불리에 관계없이 결행하는 바둑이지만 제자의 바둑은 계산의 우위를 바탕으로 꾹 참는 바둑이었다. 
반집만 이길 수 있다면 어떠한 상대의 도발도 맞받아치지 않고 피해 가는 스타일이었다.

신체 건강하고 마음마저 늘 부동심을 유지하는 소년 이창호는 그렇게 연희동 스승의 집에서 탄탄한 내공을 쌓아갔다. 
거의 매일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창호의 방에서는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방이 국수의 침실. 
국수는 그런 소음이 좋았다. 
어린 시절 듣던 야경(딱딱이) 소리 같기도 하고 평생 귀에 달고 살아온 익숙한 소음이기에 편안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소음이 국수의 의식을 번쩍 깨우치게 하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잠이 들려는 순간 제자의 방에서 딱! 하고 돌 소리가 나면 수면의 안개가 일시에 걷히고 의식의 백열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잠을 설쳐야 했다.

국수의 아내 정미화씨는 그 때까지만 해도 창호의 노력을 대견스레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확히 3년 후부터 그녀는 심야의 바둑돌 소리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는 통증으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저 자식 같기만 한 창호가 어느 덧 절세고수로 성장해 남편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 봄.
조훈현은 LA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대륙의 반달곰 녜 웨이핑 9단과 자웅을 겨뤄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당시 녜 웨이핑은 10년 동안 중국의 일인자로 행세하던 강자. 스스로 중국 국가대표 10인과 동시 다면기를 두어도 자신 있다고 완력을 자랑하던 인물이었다.

한국과 중국의 최강자들이 친선대국을 갖는다는 건 바둑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 교류전이 있고 난 뒤에 중일 슈퍼대항전이 본격적으로 개최되었으니까.

아무튼 조훈현은 녜 웨이핑과의 첫 대국에서 백을 들고 시원한 불계승을 기록했다. 
이튿날 두어진 두 번째 대국에서는 패배해 1승 1패.

승부의 저울추는 팽팽하게 평행을 이루었지만 관전자들은 조훈현의 무공이 훨씬 강해보였다고 입을 모았다.

조훈현의 표정도 그랬다.
“녜 웨이핑의 완력은 대단했습니다.”
그 인터뷰 뒤에는 ‘그러나 승부를 건다면 지고 싶지 않다’라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녜 웨이핑은 김인 9단에게도 1패를 당했다.
녜 웨이핑은 LA에서 조훈현의 속력행마 초식을 맛본 다음 곧장 일본으로 날아가 조치훈과 친선대국을 가졌다.
역시 2연패.

한국 출신 기사들에게 쓴맛을 단단히 본 녜 웨이핑은 그 후로 절치부심 자신의 부족한 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5년부터 시작된 슈퍼대항전에서 ‘철의 수문장’이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세계최강 일본의 고수들을 연파했던 것이다. 1회 대회부터 3회까지 무려 11연승을 거두면서 승발전의 스타가 되었다.

조훈현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우리 바둑계는 중일슈퍼대항전의 이벤트를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언젠가 삼촌이 일본 주간바둑지 [기도]에 실린 슈퍼대항전의 기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필자는 눈짐작으로 그 기보가 녜 웨이핑의 것임을 알아차리고 넌지시 물었다.

“그 양반 대단하데요. 고바야시, 가토, 후지사와를 모두 날려버렸다면서요?”
“응. 기세가 대단하네.”
“우리도 끼면 재미있을 텐데. 삼국 슈퍼대항전. 멋있잖아요?”
“아직은 어려워.”
삼촌은 이마에 갈매기를 띄우며 고개를 저었다.

“왜죠?”
“멤버 구성이 안되거든.”
“삼촌하고 서봉수 명인, 그리고 도전 5강이나 유창혁을 포함하면 할 만하지 않을까요?”
그때까지 중일 슈퍼대항전의 참가인원은 7명.
내 생각에는 충분하다고 보았다.

“아직 안돼. 저들은 우리 정도 팀을 대여섯 개까지 만들 수 있을 만큼 저변이 두터워.”
저들이라함은 일본을 일컫는 말이리라.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기사들 이름을 일일이 거론해가며 가능성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확고한 부정이었다. 아직 실력이 딸린다는 이야기였다. 개인전이라면 몰라도 단체전은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그 인식은 조훈현 개인만의 인식이 아니었다. 일본바둑계도 같은 인식을 하고 있어서 한국과는 벌써 교류전까지도 중단한 상태였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오직 한 사람 조훈현만 세계에서 통하는 고수로 인정할 뿐이었다.

조훈현은 그래서 더욱 외로웠는지 모른다.
우리바둑의 저변이 두터워질 때까지는 섣불리 모험하지 않는 게 낫다는 그의 인식은 훗날 1989년 동양증권배 창설 때까지 이어진다.
응창기배, 후지쯔배와 더불어 우리도 세계기전 하나를 만들어 나쁠 게 없는데도 조훈현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자신이 응창기배를 차지한 입장이었는데도 그는 한사코 한국의 세계대회 개최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차라리 국내기전을 활성화하는 게 백 번 낫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1회 동양증권 배 대회에 출전조차 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바둑의 세계화가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1980년대 후반 조훈현은 안으로 내제자 이창호를 키우면서 밖으로 80%대의 높은 승률을 기록하며 여전히 국내 챔피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86년에는 한일 TV정상대결에서 우주류의 원조 다케미야 9단을 꺾었고 국수전 10연패의 위업을 이룩했다.

바둑계의 간판스타가 되면서 지명도가 상승하자 희한한 구설수에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정치군인들이 집권하던 5~6공화국 시절, 민정당 후원회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던 것.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일반인들은 조국수의 행보에 심한 불만을 표출했다.
‘어떻게 바둑을 두는 기사가 독재정권과 야합하여 국민을 실망시킬 수 있는가?’

물론 대다수 바둑팬들은 국수의 입장을 너그러이 헤아려 줄 줄 알았다.
‘정권의 강권이 있었겠지. 조국수가 행여나 정치 쪽에 관심이나 있겠어? 왜 문학계 미술계, 언론계 등등 쪽수 채우기 식으로 할당된 명단이겠지.’
그들의 예상대로 민정당 후원회 가입은 본의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국수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끼워 넣은 거였다.

사실 국수는 역대 정권의 실세들과 관계가 돈독한 편이긴 했다. 특히 한때 같은 동네에서 사던 전두환 대통령은 낮은 급수임에도 바둑광이어서 가끔 명절 때가 되면 국수를 자택으로 초빙 아홉 점 바둑을 즐기곤 했었다.
과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서부터 시작해 최근의 이인제 민주당 고문에 이르기까지 조국수와 관계를 맺은 정치인들은 무수하다.
분명한 것은 정치인들보다 조국수가 훨씬 오래 정상의 권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아무튼 민정당 후원회 사건으로 자존심이 상한 조국수는 그 뒤로 이름에 대한 책임감을 확실하게 느끼게 됐고 불필요한 일에는 결코 끼어들지 않기로 작심한다.
특별한 예외 하나-
한겨레신문이 생겼을 때 국수는 기꺼이 국민주주의 한 사람으로 공모금을 냈었다.


 

조훈현이 한국 최초로 9단, 입신의 경지에 오르고 모든 타이틀을 획득한 상황에서도 일본기원 연감 기사인명록에는‘쿤켄 5단 - 현재 귀국 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세계바둑 최강국임을 자처하던 일본기원에서, 놀랍게도 변방(?)으로 돌아간 한명의 기사-조훈현의 도일(渡日)을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80년대 후반 광휘로운 전성기를 누리던 조훈현에 대한 팬들의 의문은 한결같이 일본바둑계 진출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에 가면 어느 정도나 될까?”
이 질문에 서봉수 명인은‘가서 타이틀을 따고 싶다’라는 자신감을 표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훈현의 표현은 조금 더 완곡했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죠. 대충 본선멤버쯤은 되지 않겠어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당장 건너가도 명인, 본인방, 기성전의 3대 리그 본선멤버는 자신 있다는 대답. 1년에 몇 차례씩 일본의 정상급 기사들과 만나 TV대국을 나눠본 결과 해볼만하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어 했다.
필자는 과묵한 삼촌의 열망을 여러 번 훔쳐본 적이 있다. 그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지는 않는 스타일이지만 틈틈이 일본기원에서 보내오는 ‘기도’ 잡지와 여러 자료들을 놓치지 않고 훑어보곤 한다.

평창동에 있는 삼촌집은 남향 온돌방이 연구실이다. 그 방에는 바둑판 한 조와 매일 들어오는 신문 및 바둑자료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후 북한산 승가사 산책을 마치고 그 방에 돌아오면 스포츠 신문을 주르륵 읽는다. 그리고 월간 바둑 지나 일본 기원의 기도 지를 살핀다.
책 읽는 방식은 역시 속독이다.
그러다가 파인더에 포착되는 대국이 있으면 보료에 드러누워 유심히 수순(手順)을 음미한다.

기보만 훑어봐도 여러 갈래의 변화도를 추정할 수 있고, 패착과 승착을 짚어낼 수 있지만 중요한 대목에서는 벌떡 일어나 바둑판 위에 좌라락 돌을 깔기 시작한다.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던 국면에서 몇 번 돌들을 이리저리 깔았다 주웠다를 반복하다 나름대로 최선의 수를 놓아본다. 복기의 마지막 착점이 바로 그가 찾아낸 해답이다.
소년시절 동시에 두어지는 3판의 대국을 혼자서 기록했고, 단 5분이면 300 수에 달하는 기보를 완전하게 해독할 수 있다는 그의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이 정도면 굉장한 노력이요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게 아닐까?

아무튼 그는 그런 식으로 늘 일본기원의 현황을 실시간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일본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필자뿐만 아니라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국수에게 던진 질문이다.
"갈 수가 있어야지요."
대답은 언제나 똑 같았다.
그 짧은 대답에는 '가고 싶다'는 의지가 분명히 실려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에게 일본은 그리운 대상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없으려니와 조 국수 자신도 아마 피식 웃고 말 것이다. 이미 숱한 국제대회 우승을 통해 한국바둑은 일본바둑의 벽을 뛰어넘은 상태이므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이 해는 바둑사의 지평이 일거에 확장되는 전환점이라고 해도 좋았다.
대만의 재벌 잉창치 씨가 올림픽처럼 4년마다 열리는 잉창치배 창설을 발표하였고, 이에 질세라 일본은 세계선수권 격인 후지쯔배 바둑대회를 만든 것이다.
국내에서 세 차례 천하통일을 이룩해 더 이상 목표가 없었던 조훈현에게 세계대회 창설은 승부욕의 심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그 무렵, 국내 바둑계도 서서히 지각변동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바둑을 배운 지 2년 만에, 11세의 나이로 프로에 입단한 이창호가 초광속의 성장세를 과시하며 놀라운 승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해 28기 최고위전.
이창호는 2단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본선무대를 주름잡고 도전권을 거머쥔 다음 스승 앞에 섰다. 최연소 2단 도전자였다.
스승은 제자 앞에서 당혹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 여기까지 왔느냐? 장하다. 하지만 너무 빠른 감이 없지 않구나.’
연희동 2층에서 함께 생활하며 창호의 바둑을 가다듬어 준 스승으로서 누구보다도 제자의 바둑을 잘 알지만 이토록 빨리 자신에게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물론 언젠가는 제자와 정면대결할 날이 올 줄 예감하고 있었지만 창호의 성장은 예측보다 훨씬 빨랐다.

어린 제자가 더없이 기특했지만 스승의 마음 한 켠에는 허허로운 우울 한자락이 깔려 있었다. 
우리의 중견기사들이 조금은 더 창호에게 버텨줘야 했는데…. 서봉수, 유창혁과 도전5강의 강호들이 창호를 더욱 단단하게 단련시켜줘야 했는데…. 바둑의 세계가 참으로 깊고 오묘하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했는데….
그러나 단숨에 본선무대를 평정하고 턱 밑에 올라와 도전장을 내민 제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한 판 겨뤄보자.’

사상 최초의 사제대결로 관심이 모아졌던 최고위전에서 스승은 최선을 다해 승리를 거두었다. 제자는 그 결승기에서 무력하게 패퇴했지만 천하의 조훈현에게 한 판을 이겼다는 것으로 충분히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이창호는 본격적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조훈현의 성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제국(帝國)의 균열은 내부에서부터 온다고 했던가?
향후 십년쯤은 더 지속되고도 남을 것으로 여겨졌던 조훈현의 시대가 영원한 라이벌 서봉수 대신 내제자 이창호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1989년.
이창호는 사흘에 한번 꼴로 바둑을 두어 111전을 기록했고, 최다승인 84승(당시 세계신기록)을 올렸다.
서봉수 9단을 비롯한 고단자들을 연파하고 8월 8기 KBS바둑왕 타이틀을 획득, 세계최연소(14세) 타이틀 보유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렵게 정상권에 도달해 가진 스승과의 타이틀매치에서는 세 차례 계속 실패해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이란 고사성어를 음미하게 했다.

조훈현 일인독주 체제를 서서히 뒤흔든 천재소년 이창호의 등장에 바둑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스승과 제자가 하루 아침에 라이벌이 되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일 수 있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 이것은 바둑이 만들어 낸 절묘한 명작이었다.


바둑올림픽인 응창기배 대회가 열리기 직전에 일본이 한발 먼저 개최한 후지쯔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 대회는 1988년 4월 2일 동경에서 테이프를 끊었다.
한국대표 선수는 조훈현 9단, 서봉수 9단, 장두진 6단 세 사람.
얼마나 기다렸던 큰 승부였던가?
안으로 오랫동안 갈고 닦았던 한국바둑의 기량을 유감없이 떨쳐보이리라.

4월 1일 전야제 행사 때 1천여 명의 바둑팬들이 주목했던 것은 중일 수퍼대항전의 영웅 녜 웨이핑()과 자국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였다.
추첨 결과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의 상대는 한국의 조훈현 9단.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사실상의 결승전이라고 평했다.

조9단은 내 입단동기이다. 20년 만에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어려운 상대인 줄 알지만 꼭 돌파해보겠다.
고바야시 9단은 그렇게 임전소감을 밝히고 입술을 한 일자로 굳게 닫았다. 겉으로 자신감과 투지를 밝혔지만 내심으로는 대진추첨의 불운을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 고바야시는 전야제의 약속을 확실히 이행해냈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순간도 우세를 빼앗기지 않고 5집 반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조훈현은 그렇게 첫 세계대회의 첫 판에서 손맛을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서봉수 9단, 장두진 6단도 각각 린 하이펑(林海峰)과 마 샤오춘(馬曉春)에게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한국바둑의 현주소가 극명하게 드러났던 일전이었다.
한국선수단은 전원 1회전 탈락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총총히 귀국길에 올랐다.
엄청난 기대를 걸었었던 언론과 바둑팬들은 그 참담한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역시 아직은 안되나?
며칠 전부터 요란하게 세계바둑대회의 개막을 예고했던 신문들은 아무 일없었다는 듯 일제히 1단 기사의 몇 줄로 후지쯔배의 참패를 쑥스럽게 알리는 것으로 민족언론(?)의 책무를 다했다.

조훈현은 그 날 이후로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머릿 속의 그림대로였다면 파죽지세로 결승에 올라 반대편 시드에 포진한 조치훈과 결승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아니,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위세를 떨친 녜 웨이핑을 꺾어 일본의 콧대를 눌러주는 대리만족감을 즐겼어야 하는데….
고바야시와 나누었던 한판 승부의 기보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통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같은 시간 중국(당시에는 중공)의 간판스타 녜 웨이핑은 후지쯔배 1차전에서 유럽대표인 약체 로날드 슐렘퍼를 꺾고 8강에 올랐다.
그 무렵 중공 정부는 그에게 기성(棋聖) 칭호를 수여했고, 중공의 신문들은 중국바둑계의 공자(孔子)라는 최상의 칭호를 선사하며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그러나 중공의 녜 웨이핑, 일본의 고바야시가 그 시기 양국의 정상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훗날 조훈현이라는 이름 석 자를 더욱 빛내게 만드는 황금분할의 삼각구도라고 해도 좋았다.
제1회 후지쯔배의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다가올 응창기배의 승부를 위해서는 어쩌면 이 때의 참패가 보약이었는지도 몰랐다.

1988년 8월 20일.
중국 북경의 샹그리라 호텔.
대망의 응창기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이번에 한국대표는 조훈현과 조치훈 두 사람 뿐-.
후지쯔배에서 나타난 각국의 전력을 참고해서였을까?
조치훈이 일본기원 소속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국대표는 오직 조훈현 한 사람뿐이었다.

대회가 열리기 전, 조훈현과 한국기원은 주최측의 횡포에 격렬한 항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주최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싫으면 불참하라고 배짱이었다.
응창기배는 주지하다시피 대만의 재벌 잉 창치(應昌期) 씨가 1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해 만든 최대의 기전. 이 대회의 저변에는 바둑종주국 중국이 최근 부쩍 일본에 근접하자 확실하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개최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일본 룰을 배제하고 새로운 응씨 전만법(塡滿法)을 적용하고 참가인원도 중국계 기사가 절반(녜 웨이핑, 오송생, 마 샤오춘, 강 주주, 린 하이펑, 왕 리청, 왕 밍완)을 차지한 것으로도 쉽게 증명된다.

억울하고 자존심이 구겨졌지만 조훈현은 단기필마로 북경을 향했다.
첫 번째 상대는 대만대표 왕 밍완(王銘琓).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조훈현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8월 23일 8강전-
상대는 역시 대만대표 왕 리청(王立誠)을 물리치고 올라온 고바야시 고이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대진이었다. 바둑의 신은 어쩌면 이리 심술 맞을까? 한참 후에 만나게 해도 충분한 강자들을 초전에 붙여놓다니.
그러나 알고보면 이 대전은 바둑의 신이 절묘하게 장치해놓은 시나리오의 반전요소였다.

고바야시는 아주 편안한 표정이었다.
입단 동기 조훈현의 매서움은 20년 전에 익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한국으로 건너가 비교적 손쉬운 상대들과 노니는 동안 칼날이 무뎌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후지쯔배에서 이미 그대의 초식과 내공의 깊이를 들여다보았노라. 본인방전이나 기성, 명인전처럼 큰 물에서 놀아보지 못한 그대는 나의 진정한 적수가 아닐 듯싶네. 내 평가가 억울하다면 어디 한 번 들어와 보시게.

지하철 바둑으로 정평이 난 고바야시는 철저하게 실리를 파고 나중에 타개하는 스타일. 그를 상대로 초반에 한 수라도 삐끗한다면 결코 역전하기 힘들다.
그런데 조훈현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기필코 이기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투지가 조급함을 불러일으키고 마침내 무리수를 두고 만 거였다.
상대의 실수를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포착한 고바야시는 일거에 우세를 점하고 야금야금 승부의 변수가 될 요소들을 차례로 반상에서 지워나가고 있었다.

같은 시간, 옆 자리에서는 조치훈과 녜 웨이핑의 대국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한국대표 두 사람이 중국, 일본의 정상들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고 있는 장면.
이 장면이 바둑삼국지의 프롤로그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형세는 우리의 양조가 철저하게 불리한 상태였다.
검토실의 한국선수단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조치훈은 초반부터 컨디션 난조로 일방적으로 밀렸고, 조훈현 역시 단 한 수의 실수 때문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상대가 다름아닌 고바야시, 덤 정도 부족한 상태라면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바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훈현의 눈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이래 지나 저래 지나 질 수밖에 없다면 길게 갈 거 뭐 있으랴. 그의 운석이 격렬하게 용틀임했다.
좌충우돌, 종횡무진, 천방지축, 한 수 한 수가 뜨겁고 처절하고 끈적끈적한 승부수였다.
검토실의 관전객들은 모두 다 조훈현이 돌을 던지기 위한 수순으로 단말마적인 몸부림을 치는 거라고 단정했다.

 

 

모두들 그렇게 감탄했었다.
"승부는 결정났지만 조훈현의 투혼은 굉장하다. 눈물겨울 정도로!"
대국실의 고바야시는 스페인의 투우사처럼 한 발 한 발 물러서며 조훈현의 저돌적인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조훈현의 초강수가 연달아 작렬했다.
얼핏 보면 아마추어 바둑에서나 나올 법한 무리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불퇴전의 서슬에 고바야시는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승리는 요지부동, 한 집을 이겨도 내가 이긴다.
사냥한 초식동물의 목덜미를 물고 질식할 때까지 기다리는 야수의 심정으로 고바야시는 어서 판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판을 다 메꾸고 보니 조훈현이 멋적게 웃고 있는 것 아닌가?
응씨 룰로 계산해보니 조훈현이 1과 6분의 5집을 남긴 거였다.
이럴 수가!
고바야시는 기가 막혀 치를 떨었다.

그의 일생일대에 이토록 치욕적이고 기분 나쁜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초강수로 육박전을 벌인 끝에 얻은 승리라 명국의 리본을 달기는 좀 어색하지만 바둑평론가들은 이 바둑을 '세기의 대결 중 최고의 백미(白眉)'로 평가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헤쳐나갈 수 있는 오직 한 길의 활로를 개척한 조훈현의 근성과 기세가 극명하게 드러난 한 판이었다는 것이다.

2002년 10월 17일 벌어진 제7회 삼성화재배 8강전에서 조훈현이 중국의 뤄 시허에게 거둔 투혼의 반집 역전승 장면을 떠올려 보시라. 아마추어가 보아도 절대로 이기는 길이 없을 것 같은 바둑을 그는 기어이 쫒아가 실낱같은 승리의 수순을 낚아채지 않았던가?

바둑평론가 이광구는 조훈현이 위기에 처했을 때 특유의 흔들기로 반상을 주름잡을 때 '강신무(降神舞)'를 보는 것처럼 황홀하다고 표현했다.
그가 사방을 흔들어댈 때 상대들은 함께 스탭을 맞추다 실족을 하곤 만다.
기적의 역전승은 혼자 잘 둔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다.
상대가 마법과도 같은 최면에 걸리고 주술에 홀려줘야 만들어지는 법이다.

아무튼 그렇게 조훈현은 넉 달 전 후지쯔배에서 당했던 패배의 아픔을 고스란히 고바야시에게 되돌려 주었다.
고바야시 입장에서는 실로 분하고 원통했겠지만 승부에서 과정의 품격이나 완성도 높은 설계도는 결과보다 우위에 설 수 없었다.
그는 좋은 바둑을 두다가 역전패 당한 패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8개월 후, 두 라이벌은 또 다시 제2회 후지쯔배 2회전에서 재격돌하게 된다. 
고바야시는 전야제에서 익살맞게 엄살을 부렸다.
"제발 이번만은 조훈현과 초반에 붙지 않았으면 좋겠다."
뼈가 있는 발언이었다.
조훈현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조훈현의 지독한 승부욕을 은근히 비꼬는 듯한 한 마디였다.
그 말에 마(魔)가 끼었던지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또 2회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실로 질긴 악연으로 맺어진 숙적들. 
역대 스코어 1:1
고바야시는 응씨배에서의 설욕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조훈현은 또 다시 강력한 인파이팅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제비'라는 별명이 무색할 만큼 저돌적이고 파괴적인 강수를 연발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고바야시를 상대로 펼쳤던 조훈현의 괴초식을 주목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필자는 그 세 판의 바둑에서 조훈현의 격정과 카멜레온과도 같은 변신술의 극치를 음미한다.
첫 만남에서 고바야시에게 맥없이 밀린 뒤로 그는 철저히 상대를 연구했던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완벽하고 상대에게 인색한 지하철 바둑, 마치 이탈리아 축구처럼 자물쇠 수비로 상대를 질식시키는 고바야시의 바둑.
그를 이기기 위해서는 경쾌한 제비의 행마를 버려야 했다.

훗날 제자 이창호의 끝내기 솜씨를 타파하기 위해 스스로 격렬함을 택했던 것이 결코 우연이나 시행착오의 산물이 아니었다.
이미 그 당시에 조훈현은 고바야시를 상대로 '상대성 원리'에 따라 '기풍의 전환'을 시도하는 복선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응씨배 8강전이 끝난 북경으로 돌아가 보자.
네 판의 대국이 끝난 결과 4강은 녜 웨이핑(), 후지사와(藤澤秀行), 린 하이펑(林海峰), 조훈현으로 압축됐다.
국제대회의 단골 우승후보로 손꼽히던 조치훈과 고바야시가 낙마하고 보니, 4강의 면면 중에서 가장 여유 있게 다가오는 우승후보는 네 웨이핑이었고, 그 다음이 린 하이펑이었다.

그러나 일본대표로 마지막 살아남은 후지사와는 의미심장한 예언을 던졌다.
"조훈현이 세계최강이다. 우승은 그의 몫이다. 아마도 나와 결승전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조훈현의 실전스승, 국적을 떠나 지금도 조훈현은 그를 만나면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어깨를 주물러드리는 등 존경과 애정을 바친다.
후지사와의 호언장담에 주최 측이나 중국, 일본의 기사들은 망령든 노인네의 기분 나쁜 망언 쯤으로 듣고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후지사와의 예언은 몇 달 뒤 여지없이 적중하고 만다. 물론 자신의 결승진출에 관한 장담은 허풍으로 끝났지만.

8강전이 끝나고 샹그리라 호텔에서 축제와도 같은 만찬이 벌어졌다.
요즘이야 한 달이 멀다하고 세계대회가 빈번하게 열려 전세계의 프로기사들이 자주 교류하지만 그 당시에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요 귀한 자리였다.
뜨거웠던 승부의 호흡을 식히고 바둑의 세계화를 위해 모두가 힘을 모으자는 별들의 만찬장.
그런데 조훈현은 만찬의 산해진미를 맛볼 틈이 없었다. 옆에 앉은 조치훈이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를 달래느라 애를 먹어야했다.

"나는 바보야. 내 바둑은 이제 끝나고 말았어!"
이름만으로도 만찬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천하의 조치훈이 어이없게도 패배의 충격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 그대는 누가 뭐래도 일류야. 세계대회 토너먼트의 단판승부에서는 누구라도 질 수 있어. 오늘 바둑은 잊어버리자."
아무리 달래도 조치훈의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 상대가 녜 웨이핑이었기에 그는 더더욱 분통이 터졌는지도 몰랐다.
만찬장에 함께 앉아 있었던 고바야시는 조치훈의 비감에 누구보다도 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작 더 분통이 터지는 사람은 자신인데 그렇다고 치훈처럼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고 무던히 타는 가슴을 냉수로 식혔으리라.

그날 밤.
조치훈과 조훈현은 새벽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조치훈은 그 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외로움을 세 살 위인 선배 조훈현에게 하소연했다.
모처럼 조훈현은 자상한 형의 입장에서 아우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한국과 일본에 떨어져 활동하면서 본의 아니게 언젠가 겨뤄야 할 숙적으로 서로를 저만치 거리에서 탐색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하나였는지 모른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그들은 닮은 꼴이었다.
어린 나이에 바둑인생을 택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혹독한 수업을 받은 과정, 그리고 천부적인 기재와 후천적 노력으로 각각 양국의 정상에 등극한 내력이 너무도 흡사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성까지도 발음이 같아 '양조시대?라는 조어가 탄생했었다.

또 있다.
승부사로서의 외로움.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을 끝끝내 고집하며 일본바둑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치훈.
한반도를 평정했지만 지금 응씨배에 홀로 출전해야 하는 서러움을 톡톡히 맛본 바둑약소국의 조훈현.
그들은 그렇게 본질마저도 철저히 닮은 쌍둥이 승부사였던 것이다.

그날 밤 밀어(密語)를 나눈 이후로 두 사람은 비로소 따뜻한 형제애를 교감하며 가슴 속에 드리워진 외로움의 그늘 한 자락을 접을 수 있었다.

 

 

1988년 11월 20일, 치열한 토너먼트를 통해 검증을 끝낸 세계 4강의 스타들이 서울에 모였다.
응씨배 준결승전.
조훈현 VS 린 하이펑, 녜 웨이핑 VS 후지사와.
어느 누구 하나 부족함이 없는 대승부사들이었다.

다만 그 중 63세의 노구 후지사와의 존재가 조금은 이채로웠다. 그 자리에 고바야시나 조치훈이 올라와 있었다면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4강전의 구성이 보다 완벽하게 짜여졌으리라.
그러나 후지사와의 저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희망사항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60년대 당시 일본의 최강 사카다와 10년간 자웅을 겨뤘고, 이후 일본 최대 타이틀인 기성전을 6연패한 후지사와는 도박과 알콜중독, 위암 선고를 받는 등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마음만 드잡으면 큰 승부에서 괴력을 발휘하는 인물, 그래서‘괴물 슈코’로 통했다.

오랜 투병생활로 피골이 상접한 후지사와는 서울에서 조훈현을 만나자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언젠가 조훈현을 만나기 위해 술병 하나만을 달랑 쥐고 현해탄을 건너온 적이 있었던 그였다. 그 때는 사랑하는 제자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아무런 목적없이 날아온 거였지만 이 번에는 상금 40만 불이 걸린 바둑대회의 적수로 찾아온 거였다.
아아, 드디어 이런 날이 우리에게 도래하다니.
후지사와는 마냥 유쾌하기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환갑이 지난 나이로 세계 정상권에 오른 자신의 영광도 즐겁지만 그보다도 그가 가장 아끼는 기재 조훈현이 기대에 걸맞게 성장해준 것이 너무 기특하고 반가웠던 것이다.

“쿤켄(훈현의 일본 이름), 보나마나 너하고 내가 결승에서 만날 텐데….그 땐 봐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 서로 최선을 다하자.”
장난기어린 말로 후지사와는 조훈현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세계최강의 기사는 조훈현이라고 강조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자신의 성가(聲價)를 함께 끼워 띄었다.
“하하, 왕년에 조훈현이 나한테 석 점까지 두고 바둑을 배웠었지.”
그런 말을 들으면 조훈현도 즉각 응사한다.
“에이, 선생님도 저한테 두 점까지 까신 적 있었으면서….”
한 판 승부에 따라 한 점씩 칫수고치기 시합을 했던 유학 시절의 에피소드였다.

그 시절 소년 조훈현에게 내기바둑을 권유해 세고에 스승으로부터 혼쭐이 나게 만들었던 장본인 후지사와,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의 장난꾸러기였다.
바둑 한 판을 가르쳐주어도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하다못해 어깨 주물러주기 등의 조건이 따랐다.
두 사람만이 공유한 천진난만한 추억을 떠올리며 조훈현은 63세 후지사와 선생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주었다. 그들의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의 팬들은 그 장면이 썩 유쾌해보이진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서울의 4강전에서 조훈현과 후지사와는 심정적으로 우군이라고 해도 좋았었다.

반면 응씨배 주최 측은 이 4강의 구도가 더 없이 좋은 흥행카드로 여겼다고 한다.
대만의 거부 응창기씨는 상해 출신, 40년 동안 바둑 룰을 연구해 온 집념가로서 바둑문화 창달에 일등공신이지만 본질적으로 응씨배 세계대회는 일본바둑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라고 봐야 옳았다.
그 시나리오에 당연히 한국은 들러리였고, 동양 삼국을 제외한 외국대표들은 양념이었다.

대회의 타이밍도 아주 절묘했다. 중일슈퍼대항전에서 녜 웨이핑이 11연승을 거두며 일본의 고수들을 연파하지 않았던가?
그 무렵 서양 사람들은 세계바둑의 일인자로 섭위평을 꼽고 있었다. 주최 측은 녜 웨이평과 린 하이펑이 결승에 오르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들 중 누가 챔피언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둘 다 중국인이었으므로.

롯데 호텔에서 벌어진 준결승전 3번기.
조훈현은 첫판에 백으로 무난히 불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중허리 린 하이펑은 기풍이 상극인 기사. 아무래도 발빠르고 치열한 조훈현의 기풍이 그로서는 거북했던 듯 보였다.
녜 웨이핑과 후지사와의 대결은 예상을 깨고 접전이었다. 전체적인 주도권은 후지사와가 쥐고 리드해갔지만 끝내기에 강한 녜 웨이핑이 끈질기게 추격해 극적으로 1점을 남겼다.(우리식 룰로 계산하면 반집 승)

10월 22일의 제2국.
첫 판을 빼앗긴 린 하이펑은 배수진을 치고 강하게 승부를 걸어왔다. 
흐르는 물처럼 유연한 그의 포석.
조훈현은 반상 곳곳에 보(洑)를 쌓고 댐을 지어 유수(流水)의 도도한 흐름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조훈현의 바둑은 본질적으로 상대의 리듬과 템포, 그리고 심중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것들을 거역하거나 역류시키고 분쇄하는 스타일.
그러다보니 그 바둑에서는 우형의 표본인 빈삼각이 세 번씩이나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세 번의 빈삼각이 전부 국면을 유리하게 전환시킨 묘수였다.
결과는 조훈현의 5점 승.

계가를 마치자 린 하이펑이 패배를 인정하고 조훈현에게 축하의 목례를 건넸다. 조훈현은 머쓱한 미소로 화답했다.
소년시절 청봉회 발회식 기념으로 선(先)에 덤 4집을 받고 가르침을 받았던 대선배 린 하이펑. 인격과 기력 양면에서 진정한 명인으로 대접받는 거인 린 하이펑과 3번기에서 2연승을 거두었다는 것은 조훈현이 우승후보로 손색없다는 추천장을 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후지사와는 2국에서도 녜 웨이핑에게 또 1점을 졌다.
2연패로 물러났지만 후지사와의 분전은 경이로웠다. 패장이긴 했으나 실로 괴물 슈코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보여준 대회전이었다.

조훈현과 녜 웨이핑.
이제 토너먼트 먹이사슬 최상위에 두 사람만 남았다. 30대 후반의 승부사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장들을 밀어내고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섰다.
응씨배 서울 4강전은 세계바둑 신구(新舊)세력의 균형이 한 쪽으로 확실하게 기운 권력재편의 분수령이었다.

 

 


제1회 응씨배 세계바둑대회는 1988년 8월에 시작해 1989년 9월까지 이어진 길고 긴 여정이었다.

조훈현이 국가의 명예를 걸고 결승전을 준비하는 사이 국내바둑계의 판도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최정상을 조훈현이 독점하고 있는 실정에 간간이 서봉수가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한두 개의 타이틀을 공략하는 형국이었는데 1988년 제6기 대왕전에서 유창혁 3단이 도전자로 나서 조훈현을 3:1로 꺾은 것.
경천동지할 대사건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창호 3단도 KBS 바둑왕 타이틀을 획득하며 살금살금 스승의 영역을 넘보고 있었다.
그러나 7관왕 조훈현의 벽은 아직도 높기만 했다.

응씨배 4강전이 끝난 뒤 5개월 후.
1989년 4월 25일, 중국 항주에서 대망의 결승전이 열렸다.
조훈현을 앞세운 한국선수단이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었다.
주최 측에서 결승전 5국을 전부 중국에서 진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국제관례에 어긋난 방식, 한국기원은 강력히 반발했다. 애당초 예선 엔트리 선발 때도 불이익을 당한 한국으로써 더 이상 주최 측의 일방적인 독선을 허용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명실상부한 세계바둑황제를 가리는 결승전인데 녜 웨이핑의 홈그라운드에서 다섯 판을 전부 두자는 것은 져달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한국의 강경한 태도에 주최 측은 한발 양보했다. 중국에서 세 판, 제3국에서 두 판을 두기로.

항주(杭州)는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절강성의 성도(省都)로 중국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관광도시다.
‘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 극락이 있고 땅에는 蘇州와 杭州가 있다.)
예로부터 그렇게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물의 도시 소주와 항주가 이상향으로 통해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역사적으로도 이야기거리가 풍부한 곳.
찡그린 얼굴마저도 아름답다는 천하미녀 서시(西施)의 고향이기도 하고 춘추시대 때 와신상담의 고사를 남긴 월왕 구천의 땅이기도 하다.
서시의 용모를 빗대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으며 또한 비 오는 날에도 좋다’는 항주.

한국선수단이 홍콩을 경유하여 항공, 선박, 열차 등 온갖 교통수단을 동원하여 항주에 도착한 날 그 곳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시에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였다. 시내로 들어가는데 공항 활주로에 줄지어 있는 미그기 편대의 살벌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상극락이라던 항주의 이미지가 어쩐지 어색했다.

矛利盾堅 勝負在天(창은 날카롭고 방패는 두터우니 승부는 하늘에 달려있다.)
항주일보는 4월 25일자 1면에 대서특필로 두 바둑영웅의 대결을 알렸다.

응원차 남편을 따라온 정미화씨는 첫 판이 벌어진 아침, 대국장인 샹그리라 호텔을 떠나 항주의 명찰 영은사를 찾았다. 
불교신자인 그녀는 이국의 사찰에서 108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승부사의 아내로 수십 번 수백 번 남편과 함께 큰 승부를 겪어왔지만 이 날은 그 모든 날의 긴장을 합한 것만큼 가슴이 떨리고 입 안의 침이 마르는 초조감이 엄습해왔다.

아아, 차라리 서울에 남았어야 할 것을….
그녀는 불상에 엎드린 채로 무수히 후회했다.
듣자하니 녜 웨이핑은 굉장한 힘을 지닌 강자라는데…. 주최 측이 노골적으로 그의 우승을 유도하기 위해 중국에서 결승전을 준비했다는데….
낯설고 물설은 항주 사람들의 미소도 친절한 게 아니라 녜 웨이핑의 우승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에 대한 조소(嘲笑)로만 느껴졌다.
그이도 나처럼 위축되진 않았을까?
하늘처럼 믿는 남편이지만 그녀는 자꾸 불안했다. 그저 국적에 관계없이 인자하기만한 부처에게 무릎을 꿇고 남편이 제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비는 수밖에 없었다.

반면 녜 웨이핑의 아내 쿵 샹밍(孔祥明) 8단은 심장이 약한 남편을 위해 산소호흡기를 준비한 채 대국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세기의 대결, 제1국.
백을 잡은 조훈현은 초반 특유의 속력행마로 요소를 선점하고 추격해오는 녜 웨이핑의 말들과 강렬한 접전을 펼쳤다. 조훈현의 기세에 놀란 녜 웨이핑은 쉽사리 승부수를 던지지 못하고 야금야금 추격하는 소모전을 펼쳤다.
안개와도 같은 상대-
과연 녜 웨이핑은 절세고수였다.
백이 그토록 발빠르게 행군하고 요충지를 두루 차지했는데도 흑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고 곳곳에 매복하여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였다.
집 차이도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후반에 들어 조훈현은 몇 차례 사이드 스텝을 밟았다.
때려도 때려도 굴하지 않고 달라붙는 녜 웨이핑의 인파이팅에 피로를 느낀 듯 보였다.
그런데 실상 녜 웨이핑은 그로기 상태였었다. 산소호흡기 신세를 져야 하는 몸 상태도 그러려니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전황(戰況) 때문에 의식이 분열지경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훈현의 3점승.

바둑이 끝나자 대국실과 마찬가지로 중압감에 가라앉아 있던 관전실이 왁자지껄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전역에서 몰려온 기자들이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대국자들을 겨냥했다. 사상 최초로 세계바둑대회 결승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선수단과 동행한 한국기자단도 본사에 제1국 승리를 알리기 위해 부산을 떨었다.
그 낭보는 곧바로 한국에 전해져 야간에 발행되는 익일 가판 신문 1면에 커다랗게 실렸다.

첫판을 이긴 조훈현은 선수단과 함께 샹그리라 호텔의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운기조식을 위해 이국에서의 식사를 극도로 조심했지만 이제는 마음놓고 포식해도 상관없으리라.
개선장군이 들어서자 식당에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승자를 환영하는 호텔 측의 배려였다. 긴 여행, 큰 승부에 지칠 대로 지친 한국선수단은 모처럼 웃음꽃을 피우며 찬란한 중화요리의 진수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한편 어이없게 기선을 제압당한 녜 웨이핑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호텔방에 두문불출 틀어박혀 패배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원수를 갚기 위해 섶에 누워 자며 이를 갈았고, 월나라 왕 구천(九踐)은 자나깨나 쓸개를 핥으며 패배의 치욕을 되새긴 끝에 마침내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던가?
녜 웨이핑은 그네들 조상의 교훈을 되씹으며 복수를 벼르고 있었다.

 

 

4월 28일, 제2국.
이틀 밤낮을 호텔에서 두문불출 칼을 갈았던 녜 웨이핑이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흑을 쥔 조훈현은 마음이 급했다.
응씨 전만법은 일본식 룰에 비해 덤이 많았기에 백을 쥔 쪽이 아무래도 느긋한 편이었다.

중국 TV는 양웅의 대결을 저녁 시간 내내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방송의 황금시간대를 바둑이 차지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 체제였던 중공에서 사상초유의 사건이라고 해도 좋았었다. 그만큼 녜 웨이핑은 문화계의 슈퍼스타로 떠올라 있었고, 냉전시대의 황혼 무렵 바둑은 탁구와 더불어 중국 인민들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는 두뇌 스포츠로 부각되고 있었다.

문화혁명 이후 흑룡강성 농장에서 돼지우리 당번으로 고초를 겪으며 투지와 시련을 배웠다는 녜 웨이핑은 인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두터운 반면운영으로 1국의 패배를 설욕했다.
1:1 타이 스코어.

이번에는 조훈현이 호텔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수한 승부를 겪어왔지만 이토록 중압감이 정수리를 내리찍어 누르는 대국은 없었고, 무수한 강호들을 겪어봤지만 이처럼 힘겨운 상대는 처음이었다.
녜 웨이핑의 기량은 홈그라운드와 주최측의 보이지 않는 응원에 힘입어 점차 상승기류를 타고 있었다.

2국이 끝난 후 조훈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상대가 커 보이는 거였다.
아무리 날카로운 창을 던져도 교묘하게 피해내면서 한발한발 다가오는 지긋지긋한 반달곰.
급소에 창을 맞아도 씨익 웃으며 이내 창을 뽑아 내던지는 불가사의한 생명력.

조훈현은 그 날 밤, 이미 자신과의 승부에서 지고 있었다.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루빨리 중국을 떠나고 싶었다.
산책을 하고 싶어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공안원들의 존재가 부담스러웠고, 천하제일이라는 자연경관도 사회주의 체제라는 장막아래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조훈현은 지금도 천하제일의 경관이라는 항주와 영파를 ‘아름다운 지옥’으로 기억한다.

제3국은 절강성의 영파에서 벌어졌다.
양국 선수단은 기차로 다섯 시간을 이동해 5월 1일 영파에 도착했다.
1,2국 TV중계의 영향으로 영파 시민들은 세기의 바둑대결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영파역에 수 천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 선수단은 처음에 그 광경을 보고 데모라도 터진 줄 알고 모두들 깜짝 놀랐었다.

시민들은 중국의 영웅 녜 웨이핑이 열차에서 내리자 박수와 환호성을 터뜨리며 에워쌌다.
영파는 잉 창치 씨의 고향. 반세기 만에 고향 땅을 밟은 잉씨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는 이 곳에서 결승 5번기를 모두 치른 다음 극적인 대미를 장식할 속셈이었으리라.

5월 2일의 제3국.
5번기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세 번째 판에서 조훈현은 석 집을 졌다.
나름대로 자신의 바둑을 두느라고 두었지만 녜 웨이핑의 뚝심에 조금씩 밀리다가 끝내 미세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패자의 가슴에도 우연(雨煙)이 피어올랐다.
영파의 시민들은 빗속에서도 녜 웨이핑의 위대함에 취해 환호작약하고 있었다.
그들의 축제에 희생양이 되고 만 조훈현은 쓸쓸한 뒷모습을 남긴 채 열차에 올랐다.
고통은 패배만으로 끝나지 않고 질기게 한국선수단을 따라 다녔다.
강남 지방에서 홍콩으로 빠져나가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각 성(省)마다 체계가 다른 중공의 행정 때문에 출국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공산권 국가를 방문한 경험이 없었던 우리 선수단은 이러다 아예 갇혀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시달릴 정도였다.

천신만고 끝에 선수단은 광주(廣州)로 이동해 주강(株江)에서 홍콩행 선박에 올랐다.
도도한 물결을 타고 남하하면서 조훈현은 남국의 부드러운 밤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정말이지 살 것만 같았다.

중국에서의 열흘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바둑선수이기 전에 한 사람의 자유인이고 싶었던 그에게 중국 땅은 악몽과도 같았다. 
된소리 투성이의 중국말과 느끼한 기름기로 범벅인 음식, 그리고 후덥지근 습한 공기, 그 공기만큼이나 끈적끈적 달라붙는 녜 웨이핑의 바둑….
그 모든 기억의 파편들을 주강의 물살에 띄워 보내고 싶었다.

1:2로 몰린 응씨배 전황에 따라 국내 언론들은 슬그머니 외면하기 시작했다.
1국의 승리를 대서특필했던 호의와 관심은 물안개처럼 증발하고 없었다.
이 시기가 조훈현 바둑 연대표에 있어 또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응씨배 결승에 올라 절정의 그래프를 그리는가 하면 국내에서는 서봉수와 이창호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제2회 후찌쯔 배에서 숙적 고바야시를 꺾었지만 다케미야의 우주류에 걸려 실족하고 말았다.

북벌(北伐)에 나섰다가 깊은 내상만 입고 돌아온 조훈현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거의 날마다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넉 달을 보냈다.
응씨배 4,5국은 그의 개인사와 한국의 바둑사를 좌우할 대전(大戰)인지라 휴식과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지만 그는 거미줄 같은 스케줄과 집요한 라이벌들의 공세에 심신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강적 녜 웨이핑을 다시 만나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진 않았지만 마지막 대회전의 장소가 싱가포르로 결정 나면서 전의가 돋아났다.
좋아, 승부를 떠나서 후회 없는 바둑을 두자.
내 영혼의 모든 정열을 쏟아 부어주마.
그 바둑을 당신이 이긴다면 녜 웨이핑, 그대는 진정한 챔피언의 자격이 있다.
그 때는 나도 고개 숙여 당신의 등극을 축하하리라.
그 것이 남벌(南伐)을 앞둔 조훈현의 심회였다.

 

 

1989년 8월 31일.
응씨배 최종결승 4,5국에 참가하기 위한 한국대표단이 캐세이퍼시픽 편을 탔다.
인원은 단장 윤기현 9단과 선수 조훈현 9단, 그렇게 둘 뿐이었다.
주최 측에서 5명을 초대하겠다고 약속해놓고 대회 직전에 엔트리를 줄여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대회 서막부터 여러 형태의 불이익과 푸대접을 받아온 한국 측이었던지라 보이콧까지 거론했었으나 이미 3국까지 진행된 마당에 잔칫상을 엎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반면 중국은 천 주더(陳組德), 화 이강(華以剛)을 비롯한 바둑인들과 체육성 관리, 보도진들까지 십여 명이 본토에서 날아와 기세를 올렸다.
자국 선수가 결승에 오르지도 못한 일본까지도 구토 9단을 비롯, 관전필자, 사진기자 등 5명이 참가해 응씨배의 향방에 관심을 표명했다.

명색이 세계최대의 바둑올림픽인데 왜 우리의 선수단 규모는 그리 단출했을까?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대한민국의 경제력을 감안한다면 주최 측의 초청과 관계없이 응원단을 파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은 아마도 1:2로 밀려있는 불리한 상황 때문이었으리라.
모두가 조훈현의 기적같은 역전승을 갈구하고는 있었지만 전망은 밝지 않았던 게 사실, 조훈현의 출정 소식을 크게 보도한 언론사도 거의 없었다.

9월 1일.
전야제가 열렸다.
만찬장 석상에서 녜 웨이핑은 호언장담했다.
“중국인이 주최한 최고의 대회에서 중국인이 우승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 목표는 우승컵이다.”
조훈현은 간략하게 임전소감을 피력했다.
“최선을 다하겠다. 전세계 바둑팬들을 위해서 최종 5국까지 갈 각오로 두겠다.”

전야제에서 중국 측은 기선을 휘어잡은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싱가포르는 인구의 80%가 중국계, 녜 웨이핑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단장 윤기현 9단은 대국장을 미리 점검하고 나서 의자를 교체해달라고 주문했다. 다리떨기 습관을 지닌 조훈현을 위해 넓은 의자를 요구한 거였다.
모든 상황이 불리한 가운데 단장인 그가 선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 밤 조훈현은 싱가포르 시내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기후는 습하고 더운데 이상하게 으슬으슬 오한기가 느껴졌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서울에서 준비해 온 감기약을 먹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다음 침대에 드러누웠다.
몸은 천근만근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데 정신은 명료하여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환영처럼 반달곰의 발톱이 번뜩였고 이명으로 바둑돌 놓는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자주 휘호하는 ‘無心’을 떠올리며 그는 밤새 의식의 주름을 다림질했다.

9월 2일 오전 10시.
72층을 자랑하는 웨스틴 스탠퍼드 호텔 특별대국실.
제4국이 시작되었다.
조훈현의 흑번. 피차 포석구상이 되어 있었던 듯 흑백의 행마들이 제2국과 똑같이 펼쳐졌다.
2국은 조훈현이 완패했던 바둑.
그러나 조훈현은 대담하게 그 포석을 다시 들고나와 응수를 물은 것이었다. 녜 웨이핑도 자신만만하게‘어디 덤벼 보시지’하는 식으로 뚜벅뚜벅 2국의 수순을 그대로 밟아갔다.

15수째에서 조훈현이 방향을 틀었다.
녜 웨이핑은 전혀 고민하지 않고 조훈현의 도발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반상의 네 귀는 백의 참호로 변했고 중앙에 담을 쌓은 흑은 악착같이 침투하는 백군 게릴라들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초강수로 버티는 형국이었다.
흑돌이 놓이면 흑이 우세해 보였고 백돌이 놓이면 금세 백이 우세해 보이는 난투극-.

일희일비, 검토실의 관전자들은 종국 직전까지 바둑의 승패를 가늠하지 못하고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하느라 애먹었다.
대국자들도 반상에 머리를 박고 동공이 튀어나올 만큼 처절한 계가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끝내기로 승부가 날 바둑이라면 아무래도 뒷심이 강한 녜 웨이핑이 유리했다. 더욱이 덤 8집을 안고 싸우는 입장이니….
게다가 초읽기를 맡은 화 이강 8단이 조훈현의 심기를 자꾸 건드렸다.
녜 웨이핑의 차례 때는 잠깐의 여유를 두었다 읽고 조훈현의 차례에는 가차 없이 카운트를 헤아린 것.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짜여진 드라마를 외면했다.
막바지에 녜 웨이핑이 사소한 실수를 범했는데 조훈현이 전광석화처럼 타이밍을 잡아 선수로 두터운 끝내기를 차지해버린 거였다.
종국해보니 덤을 제외하고 흑의 한 집 승리였다.
한 걸음만 삐끗했어도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었던 비관적인 외길을 조훈현은 처절한 투혼으로 건너오고 말았다.

검토실에서 종국을 지켜본 윤기현 단장과 개인 자격으로 응원을 온 김학수 4단이 얼싸안고 환호성을 올렸다.
중국선수단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고 녜 웨이핑의 아내이자 세계최강의 여류기사 쿵 샹밍(孔祥明) 8단은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중립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4국을 검토하던 일본기사들은 입을 모아 조훈현의 승부사적 기질이 돋보인 한판이었다고 밝혔다.

절체절명, 백척간두의 막바지에 몰렸음에도 2국에서 실패한 포석을 다시 들고나와 진검승부를 벌인 조훈현의 오기, 실리를 선호하는 기풍이면서도 과감하게 세력작전을 구사한 그의 배짱, 초읽기에 몰린 상태에서도 상대의 허를 정확하게 포착한 야수성이 마침내 반달곰을 질리게 만들었다는 강평이었다.

그리하여 종합전적 2:2-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과거의 네 판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고 오로지 마지막 제5국의 단판승부로 세계챔피언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4국을 이긴 쪽이 유리하다는 게 정설.

한국선수단은 조훈현의 우승을 확신하며 대회장을 나섰다.
그러나 정작 승리자는 그다지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저조한 컨디션으로 전쟁에 임했는데 피를 말리는 대국으로 인해 바이오리듬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거였다.

인체는 극한상황에 접하면 스스로 교감신경을 작동해 만반의 응전태세를 갖춘다. 신선한 혈액은 두뇌로 상승해 판단력을 증강시키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장의 연동운동이 정지하는가 하면 괄약근이 수축된다. 그리하여 체내의 기가 누출되는 것을 방지하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상황이 종료하면 일시에 모든 신경작용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타이밍이 빠르면 일시적으로 쇼크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조훈현의 몸 상태가 바로 그러했다.
지독한 고열이 엄습했고 아랫턱이 자꾸 떨렸다.
이틀을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도 좀처럼 감기 기운은 가시질 않았다.

 

 

9월 5일.
마침내 1년 넘게 이어져 왔던 제1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의 챔피언이 가려지는 날.
윤기현 단장은 4국에서의 불공정 계시를 강력히 항의하여 일본인 이토 씨를 추천했고 주최측은 어쩔 수 없이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숙적들이 이윽고 마주앉았다.
오래 전 LA에서의 친선대국까지 포함해 종합전적 3:3으로 평행선을 긋고 있는 라이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무공과 기량에 치를 떨고 있었으리라.

입회인이 개시를 선언하자 녜 웨이핑이 한웅큼 돌을 쥐었다.
조훈현이 홀짝을 맞추지 못하자 녜 웨이핑은 노타임으로‘백’을 불렀다.
앞서 벌어졌던 네 판의 순번을 무효로 하고 새롭게 돌을 가린 결과, 또 조훈현이 흑을 잡게 된 것이다.

검토실의 윤 단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젓자 일본인 관전필자 후지이(藤井正義)씨가 윤기현 단장의 어깨를 치며 위로했다.
“오늘 조훈현이 이깁니다. 두고 보세요.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산신령이 홀연히 등장해 흑을 쥔 조훈현이 승리한다고 예언했거든요.”
후지이의 꿈이 사실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를 비롯한 일본팀은 알게 모르게 중립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조훈현을 응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전 10시-
조훈현은 또 2,4국과 동일한 포진을 시도했다.
녜 웨이핑은 눈썹을 한 번 꿈틀하더니 양화점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아마도 조훈현의 도발적인 기세에 질린 것이었으리라.
그러자 조훈현은 4국 때와 정반대로 철저하게 귀를 파기 시작했다.
넓은 곳이 많아도 그는 상대의 집이 커질 가능성이 보이는 곳에 즉각 특공대를 투입해 두 집 내고 사는 타개작전으로 일관했다.

녜 웨이핑은 묵묵히 중앙에 성을 쌓으며 조훈현의 발 빠른 행보를 뒤쫒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민첩한 상대라도 언젠가는 허점을 노출하겠지.
그는 처절하게 인내하면서 두텁게 두텁게 따라왔다.
점심 작전까지 조훈현의 시간소모량은 90분, 그에 비해 녜 웨이핑은 고작 30분만 쓰고 있었다.
꾹꾹 참다가 자신이 장기로 하는 종반에 에너지를 터뜨리겠다는 심산 같았다.

점심 메뉴는 장어덮밥.
그런데 조훈현은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으로 밥알을 헤아리고 있었다.
윤 단장이 말을 걸었다.
“왜 아직도 편찮은가?”
“......”
그는 대답대신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말라있는 입술, 그는 큰 시합의 중압감과 감기 기운으로 만신창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냥 편안하게 두시게. 평소 자네 실력대로만 둔다면 이길 수 있을 걸세.”
조훈현은 선배의 충고에 또 미소만 지어보였다.
힘겨운 표정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내내 허공의 한 점만을 응시했다.
윤 단장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두어야만 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오전 봉수한 바둑판이 홀로그램으로 펼쳐져 있을 것이고 그 바둑의 전단(戰端)을 찾기 위해 골몰해있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아니나다를까 오후에 바둑이 속개되자마자 조훈현은 승부수를 띄웠다.
백의 세력권에 잽을 던진 다음 아예 깊숙이 헤집고 들어간 것이다.
응수가 곤란해진 녜 웨이핑의 행보가 둔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껑충껑충 중앙으로 탈출한 흑은 한숨을 돌려 우변의 약한 돌 한 점을 꾹 이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지킬 곳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때부터 녜 웨이핑이 맹렬한 반격을 시도해왔다.
시간을 아껴온 그는 상대의 대마를 노골적으로 공격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초읽기에 몰린 조훈현을 궁지로 몰기 위해 그는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난해한 초식으로 태클을 해왔다.

그러나 시간으로 승부하려는 그의 작전은 오산이었다.
조훈현은 당대 최고의 순발력을 자랑하는 천재.
코너에 몰린 상태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카운터블로를 날린 끝에 마침내 백의 공격에서 벗어나 거꾸로 대마를 잡아버린 것이었다.
그 수순은 거의 유일한 생명선이었는데 일분 초읽기 속에서 조훈현은 완벽하게 외길을 밟아나갔고 녜 웨이핑은 자폭을 택하고 말았다.

조훈현이 145수를 힘차게 두자 녜 웨이핑은 무겁게 고개를 떨구며 돌을 던졌다.
그 순간 검토실에서 함성이 터졌다.
5국이 진행되는 동안 바둑평론가 박치문 씨를 비롯해 동남아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각 언론사 특파원들이 대거 싱가포르로 몰려와 우리측 응원단도 적지 않았던 터.

4국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측 쿵 샹밍 8단이 오열을 터뜨려 주위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 만큼 그들의 기대가 컸었고 어이없는 좌절에 체면 따위를 갖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대국실에서 녜 웨이핑은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조훈현은 상대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듯 기쁨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곧이어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그동안 한국 측을 은근히 애먹였던 잉 창치 씨도 환한 웃음을 비치며 승자 조훈현을 축하해주었다.
1미터도 넘는 트로피와 40만 달러짜리 수표를 받은 조훈현이 그제서야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점심 때 지었던 희미한 미소가 시상식에서 꽃으로 활짝 피어났다.

같은 시각, 9월 5일 오후 4시의 한국기원은 빅뱅이 일어났다.
생중계로 해설을 하던 김수영 6단이 조훈현의 우승 소식을 전 국민에게 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쉰 목소리로 하루 종일 열변을 토하던 그는 목이 메어 이 대목에서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2백 명의 청중들도 따라서 울었다.
한국기원 사무국에서 캔맥주를 대량으로 주문해 청중들에게 서비스하며 즉석맥주 파티를 벌였다.
브라보!
싱가포르에 기자를 파견하지 못한 언론사들이 한국기원으로 카메라를 보내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다.
한국바둑이 세계정상에 우뚝 오른 감격의 순간이었다.

챔피언 조훈현은 싱가포르 교민들을 비롯한 응원단과 승전 축하파티를 늦게까지 즐기고 호텔방에 들어왔다.
긴장이 풀려 목욕할 기운도 없었다.
아아!
그는 침대에 풀썩 쓰러져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수백 수천의 환영들이 파노라마처럼 회오리쳤다.
목포의 애잔한 풍경, 보문동 달동네의 계단, 세고에 스승집의 다다미 방, 공군복무 시절의 애환과 폭격시대의 영광,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응씨배 토너먼트의 기억들….

이제 내 몫은 한 것이겠지.
주마등같은 필름 끝자락에 비로소 안도감이 묻어났다.
몸을 뒤채고 천정을 바라보았다.
며칠동안 답답했던 비강(鼻腔)이 시원한 느낌이었다.
대승리의 엔돌핀이 지독한 감기 바이러스를 몰아낸 모양이었다.
참으로 상쾌한 피로감을 만끽하며 그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9월 6일 김포공항.
1층 입국장 게이트가 열리고 ‘바둑황제’ 조훈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30여 대의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렸다.
동시에 와아- 함성이 터졌고 1백여명의 환영객들이 황제를 에워쌌다.

한 사람의 바둑인이 이처럼 성대한 환영을 받아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아내 정미화씨는 북받쳐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중국 원정길을 동행해보았던 그녀는 마지막 결전장인 싱가포르에 따라가지 않았다. 피를 말리고 영혼을 태우는 현장이 너무나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는 용인의 사찰에서 날마다 천 팔십 배(拜)를 올렸다.
‘부처님, 남편이 후회없는 바둑을 둘 수 있게 평정심을 주십시오.’
맹목적인 승리를 기원하는 예불이 아니었다.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평정을 염원했다.
그러다 보면 승리는 자연스레 따라오는 고차원적인 기도였던 것이다.

남편의 손은 뜨거웠다. 그렇지 않아도 깡마른 체구의 그가 그날 따라 유난히 말라보였다.
“고생했지야?”
아내와 아이들 뒤에서 부모 조희아(규상에서 개명) 옹과 박순애 여사가 짧게 물어왔다. 그동안 어떠한 바둑시합의 결과를 놓고도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하지 않았던 어른들이셨다.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체질의 조훈현이지만, 이 날은 속내를 활짝 드러내놓고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귀빈실에서 가진 기자회견.
결승 5번기에 대한 소감, 새로운 국제 룰에 대한 견해 등을 기자들이 물어왔다.
황제는 모처럼 자상하게 모범답안을 냈다.
회견이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언제쯤 일선에서 은퇴할 생각인가? 그리고 이창호 이외의 또 다른 후진양성을 위한 계획은 없는가?”
이제 막 정상에 오른 바둑황제에게 은퇴시기를 묻는 당돌한 발언.
그러나 그 질문은 정상 등극 이후의 국내바둑 판도를 나름대로 예측한 기자의 예리한 후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황제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바둑두는 것 자체가 내 직업이고 소명이기 때문에 일선에서의 은퇴는 전혀 생각해 본 바 없다. 지금 이창호 3단을 내제자로 키우고 있는데 내 자신이 현역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후진양성은 나중에 생각하고 싶다.”
1989년 9월에 남긴 그 인터뷰는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02년 겨울까지도 아직 그대로 유효한 상태이다.

공항에서 종로의 한국기원까지 조훈현은 꽃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환영의 카퍼레이드.
길거리의 시민들은 세계바둑을 제패한 37세의 아름다운 청년 조훈현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시인 박재삼은 헌시를 지었고,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정치인들의 축하메시지가 쇄도했다.
한국기원 5층 건물 전체 벽면에 경축 플래카드가 걸렸고, 각 신문마다 1면 전체를 바둑황제 조훈현에 대한 찬사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정부에서 나라의 명예를 빛낸 공로를 높이 사 문화훈장을 수여키로 결정하자 조훈현은 우선 순위로 조남철 선생이 먼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꽃을 피운 자신보다 파종(播種)을 한 선생의 공로가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나란히 청와대로 가 훈장을 수여받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우리 바둑계, 문화와 스포츠 어느 쪽으로도 편입되지 못하고 장르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했던 바둑, 일본에서 활약하는 조치훈의 소식에 따라 울고 웃던 한국바둑이 마침내 자력으로 쟁취해낸 세계제패의 대쾌거-
조훈현이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보여준 독무(獨舞)는 세계바둑계의 시선을 한반도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이후 모든 대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출전 엔트리 수도 늘어난 것이다.

길고도 긴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고 집으로 돌아온 조훈현은 모처럼 제자 이창호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누구나 마주하면 세계제패에 대한 축하인사를 먼저 건네건만 돌부처와도 같은 창호는 꾸벅 고개만 숙였다.
이제 열 다섯의 여드름투성이 청소년.
스승은 씨익 웃으며 창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목례와 손길은 결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한국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입술을 열어 표현하진 않았으나 창호는 응씨배 결승대국 중계방송을 지켜보며 애타게 스승의 승리를 기원했으리라.
당시 3단이었지만 무패의 연승행진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던 창호는 이미 정상급 실력을 인정받은 상태였고, 계산이 정확하고 빠르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고수로 대접받고 있었다.

“창호야. 이젠 네가 해줘야 한다.”
조훈현은 익살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기 몫은 다했다는 홀가분한 어조-
그러나 그 한 마디에 실로 깊은 의미가 함유되어 있었다.
제자가 어린 나이에 절륜의 무공을 떨치며 고단자들을 연파해도 좀처럼 칭찬한 적 없는 스승이었고, 남들이 입을 모아 창호의 기량을 높이 평가해도 아직은 멀었다며 자꾸만 제자를 품 속 자락에 감추었던 스승 아니었던가.
그처럼 평가에 인색했던 스승이 비록 장난스럽긴 했어도 어쨌거나 정식으로 제자에게 임무를 떠맡긴 것.
필자는 그 발언이 ‘후계자 책봉식’이었다고 감히 주장한다.

스토리 서두에 언급한 바 있듯이 응씨배 결승에서 패퇴한 녜웨이핑은 세계바둑인들을 향해 중국바둑의 잠재력을 은근히 과시했었다.
자신을 몰락시킨 조훈현과 다시 응씨배에서 만나려면 4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 시간은 녜웨이핑에게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후계자가 있다. 앞으로 주목해달라.”
녜웨이핑이 자랑한 제자는 다름아닌 창하오(常昊).
그의 예언에 걸맞게 창하오는 현재 세계바둑계의 거봉으로 우뚝 솟았다.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당부한 몫이 바로 현재의 판도에 비춰진다.
이창호는 스승이 건넨 바통을 한 손에 굳게 움켜쥐고 당당하게 선두를 질주함으로써 황제의 ‘황태자 책봉’이 옳았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옥좌에서 한발 물러난 상왕이 아직도 국제전에 기사로 출전해 제자의 앞길을 막는 적군들과 처절한 육박전을 펼침으로써 다소 짐을 덜어주는 상황이 흥미롭지만......^^)

해외원정에서 돌아온 황제는 가을부터 국내 기전의 타이틀을 방어하느라 곤욕을 치러야했다.
응씨배 대전(大戰) 때문에 이월된 전쟁의 스케줄이 폭주했다.
전선(戰線)은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사방에 형성되었다.
기왕전에서 서봉수가, 대왕전과 기성전에서 유창혁, 그리고 최고위전에서 제자 이창호가 도전장을 던져왔다.
전방위에서 몰려오는 치열한 도전.
전천후로 임해야 했던 처절한 응전.
그해 겨울-
마침내 경천동지할 대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1989년은 한국바둑이 세계를 향해 힘찬 기지개를 켠 한 해였다.
그리고 한국바둑의 운명을 혼자서 짊어지고 응창기배 우승을 견인한 조훈현 역시 개인사의 절정을 구가했다.
국내 타이틀 쟁취 100회의 신기록은 덤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 해에 국내에서도 세계조류에 발맞춰 메이저급 세계대회인 동양증권배를 개최했는데 조훈현은 시기상조를 이유로 불참했다.
일본과 대만의 강호들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신진 양재호 6단이 우승하면서 세대교체의 기치를 휘날렸다.

전년도에 대왕위를 쟁취하면서 천재성을 떨친 유창혁 3단은 기성전과 대왕전에서 조훈현과 12번기를 펼친 끝에 패퇴해 아깝게 무관으로 전락했지만 바둑황제와 팽팽한 접전을 벌여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일본의 조치훈은 본인방을 따내 십단, 천원과 함께 3관왕에 올라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무렵, 바둑황제 조훈현이 무색하리만큼 출중한 성적을 내고 있는 다크호스가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황태자 이창호 4단이었다.
14세의 소년 창호는 제8기 바둑왕에 등극하면서 타이틀홀더가 되었고 111국을 두어 자그마치 84승에 75.7%의 놀라운 승률을 기록했다.
27패 중에 스승 조훈현에게만 13패, 라이벌 유창혁에게 3패를 기록했고 그외의 기사들에게는 거의 전승을 거두다시피했다.

아직 스승을 따라잡기에는 힘이 부친 듯 했으나 괴동 이창호는 절대열세의 전적과 관계없이 1989년이 저물어가는 12월에 스승으로부터 최초의 타이틀 하나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제29기 최고위전.
창호는 예선서부터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강자들을 연파하며 토너먼트의 사다리를 거침없이 타고 올라갔다. 서능욱, 장수영, 서봉수, 김일환을 꺾고 도전권을 획득한 것.

한 해전에 최연소 도전자 기록을 세웠던 기전이 바로 최고위전이었다.
그 때는 스승의 준엄한 가르침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이후 두 번 더 타이틀전에서 물러섰지만 이 번의 기세는 뭔가 달랐다.
흑을 든 제1국에서 스승의 날렵한 행마에 굴하지 않고 버틴 끝에 6집반 승리를 거둔 것이다.
2국은 스승의 완력이 제대로 먹혀들어 불계패.
1:1로 균형을 이룬 도전기는 이듬해로 넘어갔고 1월 8일 열린 제3국에서 창호는 환상의 명국을 연출하며 157수만에 불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스승의 반격이 곧바로 이어져 4국은 불계패.

1990년 2월 2일.
그 날짜처럼 2:2 타이스코어에서 마지막 5국이 두어졌다.
최종국답게 바둑은 262수까지 이어지는 혈국이었다.
눈터지는 계가바둑에서 스승은 끝까지 반집을 이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으나 종국해보니 제자의 반집승이었다.

관철동이 발칵 뒤집히는 대사건이었다.
14세의 풋내기가 세계챔피언이자 호랑이 스승을 꺾고 마침내 신문기전에서 우승을 한 것이었다.
최고위전은 조훈현이 20년 전에 생애 최초로 획득했던 타이틀.
역사의 수레바퀴는 무려 이십 년 만에 한 바퀴를 그렇게 돌았다.

소년 이창호는 예상보다 빨리 스승에게 보은(報恩)의 훈장을 헌정했다.
문제는 그 훈장을 스승으로부터 탈취해왔다는 점.
스승이나 제자나 그 상황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마찬가지로 바둑계 인사들도 사제 앞에서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난처한 사람은 바로 조 국수의 아내이자 이 최고위의 사모(師母)인 정미화 여사였다.

그날 밤 연희동 집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피로에 쩔은 조 국수가 힘겹게 현관을 들어섰고 그 뒤로 그림자처럼 소년이 들어섰다.
장한 쾌거를 거두었음에도 소년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집안 어른들을 맞았다.

최고위 타이틀전이 벌어질 때 필자는 늦게까지 연희동에 머물고 있었다.
조부모님들이 결과를 궁금해하셨기 때문에 수시로 진행상황을 알려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창호의 승리가 확정됐음을 전화로 확인하고 전하자 할아버님(조희아옹)은 저으기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허허, 그 놈 참!”
할아버님은 창호의 정신적 후원자이자 열렬한 팬이었다.
그날 할아버님은 심야에 귀가한 두 영웅들에게 똑같은 말을 건넸다.
“수고했다.”

아주 늦은 밤이었지만 창호는 대충 얼굴을 씻고 바둑방에서 혼자 복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승은 곧장 잠자리에 들었는데 바로 옆 방에서 제자는 두어 시간 넘게 바둑알을 만지고 있었다.
어쩌면 14세 소년 창호는 최고위 타이틀을 땄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 모르는 듯싶었다.
늘 두던 바둑 중 한판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다만 어렵던 스승과의 승부 5번기에서 3:2로 이겼다는 사실에 다소 흥분했을지 모른다.

그 나이에 상금의 액수나 타이틀홀더의 사회적 위치를 인식했을 리는 만무했다.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강해 모든 게임에 미칠 정도로 파고들었던 이창호에게는 바둑도 어쩌면 게임의 일종인지 몰랐다.
모든 스테이지의 키워드를 열고 한계 점수를 도달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년에게 바둑이라는 종목의 게임에서 마지막 관문은 역시 스승 조훈현이었다.
소년은 어느새 첩첩산중의 난이도 높은 스테이지를 통과한 상태에서 최후의 문을 열기 위해 수문장 ‘조훈현’ 캐릭터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호는 바둑지와 바둑연감에 실린 스승의 기보를 낱낱이 분석하고 속력행마에 대항할 수 있는 비책을 강구했다.
결론은 두텁게 판을 짠 상태에서 후반에 승부를 내는 것이었다.
포석과 전투에 능한 스승은 주로 초반에 승기를 포착한 다음 상대가 운신할 수 없게 묶어버리는 스타일이었고 설령 초반에 실착을 해서 밀리더라도 중반에 가공할 흔들기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경향이 많았다.
워낙에 기력이 출중한 까닭에 대부분의 상대들은 스승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었다.
그래서 스승은 후반부에 정교한 끝내기 솜씨를 과시할 기회가 드물었다. 어지간한 판은 불계승으로 밀어버렸으므로.
최고위전에서 창호는 자신의 전략을 완벽하게 구사해냈다.
최종국에서 끈질긴 인내와 치밀한 계산력으로 스승이 내보인 한 치의 허점을 여지없이 꿰뚫어버린 거였다.

1990년의 아침은 그렇게 밝아왔다.
15년을 이어온 조훈현의 독재, 서봉수 도전체제가 이창호의 등장으로 다각화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운에 고무된 듯 입단 5년차인 오규철 3단이 1월 왕위전 도전자로 나서 조훈현과 일합을 겨뤘다.
서능욱은 KBS, MBC 양대 방송사의 속기전 결승에 올라 조훈현을 괴롭혔다. 물론 조훈현은 그들 모두를 제압하고 다관왕의 지위를 방어해냈다.
한편 위로는 영원한 라이벌 조훈현에게 밀리고 아래로 뭇 후배들에게 치이던 서봉수 9단은 5월 제 2 기 동양증권배에서 자신의 천적으로 통하던 이창호를 3:1로 꺾고 기적처럼 우뚝 일어섰다.
그러나 창호는 명인전에서 서봉수 9단에게 설욕하며 도전권을 쟁취했다.
하지만 조훈현은 서봉수와 이창호를 싸잡아 물리치고 황제의 위엄을 계속 떨쳤다.

그해 9월.
사제는 국수전에서 다시 만났다.
국내 최고(最古)의 전통과 호칭의 상징성에서 으뜸을 자랑하는 국수전.
창호는 그 전쟁에서 완벽한 전술로 3:0 스트레이트 승리를 거두었다.
조훈현의 이름 뒤에 15년 동안 꼬리표처럼 달려있던 국수라는 호칭을 15세 제자가 마침내 떼어버린 것이었다.
국수의 계보는 한국바둑 일인자의 계보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바둑평론가들은 조훈현의 몰락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제자에게 국수위를 내준 조훈현은 이어 상금랭킹 1위의 기성전에서 유창혁에게 1승 1무 4패로 어이없게 KO패를 당했다.
역대 타이틀전에서 조훈현이 이토록 일방적으로 몰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창호와 유창혁에게 완패를 당한 조훈현. 이쯤되자 바둑계는 일인자 논란이 일어났다. 다관왕 조훈현과 국수, 최고위의 이창호, 그리고 최대상금 타이틀 기성위를 보유한 유창혁 중 누가 일인자인가 하는 문제였다.

철저하게 상금의 규모를 따지는 일본식으로 본다면 이제 조훈현은 더 이상 일인자로 불릴 수 없는 처지였다.

다시 해가 넘어가고 1991년 1월 조훈현은 대왕 타이틀을 제자 이창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미 창호가 국수가 되었을 때 바둑계에서는 이창호의 독립에 관한 여론이 번지고 있었다.
한 지붕 아래 기거하고 한솥밥을 먹으며 같은 차를 타고 한국기원에 나가 타이틀 전쟁을 벌이는 사제의 기묘한 동거는 누가 봐도 어색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창호의 부친 이재룡씨는 조금 더 아들을 연희동에 맡겨두고 싶었다. 비록 스승을 연거푸 이기고 있다지만 열 여섯 살에 불과한 소년 국수 이창호를 완벽하게 담금질시켜 천하의 명검으로 탄생시키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대왕위를 상실한 날, 조 국수는 기분전환을 위해 친구들과 밤을 보냈다. 이튿날 새벽에 귀가한 남편을 맞이하러 나온 정미화 여사는 문득 창호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창호의 방에서 희미하게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아아, 저 소리는 내 남편을 이기려는 소리가 아닌가!
새벽이라 창호는 조심스레 돌을 놓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총성처럼 아프고 공포스러운 소리였다.
여지껏 자식보다 더 아껴온 창호였기에 그녀는 아릿한 통증을 느껴야했다.
창호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사모로서 당연히 자랑거리였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남편을 위협하는 강적이 아니던가? 창호의 발전은 곧 남편의 퇴보이며 남편의 몰락은 당장 가계(家計)와 직결되는 것이 프로의 공식이다.
이 엄청난 아이러니를 어떻게 감수할 것인가?

애당초 조 국수 부부는 창호를 5단까지 혹은 성인이 될 때까지 품을 생각이었었다. 그것이 일본에서 불문율로 통해 내려오던 관례였다. 헌데 이 괴소년은 너무나도 빨리 성장해 관례를 적용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일본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승부바둑을 둔 관례조차도 없었다.
‘조훈현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더 심한 표현으로‘살모사론’이 등장했다.
모든 뱀은 난생(卵生)으로 알을 낳지만 살모사는 독특하게도 체내에서 새끼를 부화한다. 어미의 뱃속에서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먹으며 자란다. 새끼들이 세상에 나올 때면 어미는 껍데기만 남는다.
종족번식의 본능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담보하는 살모사.
조훈현도 어찌 보면 살모사의 어미와 많이 닮았다.
내제자인 이창호를 품어 자신의 자양분을 먹이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1991년 2월.
사제가 본격적으로 바둑계의 영토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 창호가 하직인사를 올렸다.
이제 더 가르칠 것이 없다. 하산하거라.
스승이 6년 내제자 수업의 종료를 선언했다.
창호는 짐을 꾸려 반포의 아파트로 출가했다.
전주에서 수시로 서울을 오르내리는 아버지 이재룡 씨의 입장을 감안해 고속터미널 부근에 둥지를 튼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조국수도 평창동으로 이사했다.

헤어지자마자 사제는 그 달에 최고위전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스승이 도전자 입장이었다.
결과는 3:2로 이창호의 승리.
다음달 3월에 제자는 왕위전에 도전해 4:3으로 승리한다.
이제 조훈현은 군소 타이틀만을 거느린 변방의 성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수와 왕위, 최고위를 보유한 이창호가 완벽하게 쿠데타에 성공한 형세였다.

바둑평론가들은 수시로 조훈현의 심경을 물어왔다.
“제자는 제자고 승부는 승부입니다. 이제까지는 창호가 나한테 배웠지만 앞으로는 내가 창호한테 배워야지요. 창호는 내가 모르는 경지를 알고 있는 듯싶기도 해요.”
그는 겸허하게 이창호의 실력을 존중하고 인정했다.
그러나 창호한테 배우겠다는 어조에서 결코 승부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전의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다.
이때부터 그는 검토실에서 특유의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는 몰라. 창호한테 물어 보라구.”
“나는 곧 은퇴할 사람이야. 몰라 몰라.”

국내에서 6개월 동안 한 번도지지 않고 무려 41연승을 올리면서 명실공히 히 일인자에 오른 이창호건만 이상하게 국제대회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후지쓰배에서 마 샤오춘에게 완패했고 요다 노리모토와의 대결에서 3:1로 패퇴해 바둑팬들을 실망케 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창호를 아직도 미완의 대기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짙었다.
오다케 9단은 노골적으로 이렇게 평했다.
“이창호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하다. 그러나 오로지 스승 조훈현 9단을 이기는 길만을 연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국제대회에서 조훈현을 만나면 그들은 입을 모아 이창호에 대해 물어왔다.
그때마다 조훈현은 빙그레 웃으며 한결같이 대답했다.
“당신들은 아직 이창호의 실체를 모른다. 창호는 세다. 언젠가 당신들은 창호의 실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조훈현은 팔불출처럼 자신의 제자를 그리 자랑하고 다녔다.

그해 8월 그는 또 제자에게 명인 타이틀을 빼앗겼다.
3:0의 충격적인 전적.
이제 바둑계에서도 사제대결이 벌어지면 당연히 제자 쪽에 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서봉수와 유창혁 같은 이들은 이창호의 힘을 충분히 알기에 조심스럽게 논평했다.
“이제 조 국수가 옛날 같은 영광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다른 이들은 더 심하게 표현했다.
“이제 조훈현도 완전히 간 거 아냐? 이십 년 동안 독재를 누렸으니 할만큼 했지.”

모두가 그렇게 조훈현의 몰락을 예고했고 단정했다.
실제로도 그 무렵 조훈현은 기왕과 패왕 두 개의 타이틀만 달랑 쥐고 있었으니 팬들이 화려한 재기의 기대감을 가질 수도 없었다.
세계챔피언에 오른 후 목표감을 상실해버렸고, 기존의 상대들과 달리 빈틈이 없는 창호와의 대결에서 연속적으로 패배하자 자신감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끝없이 기다리는 창호의 바둑 앞에서 조훈현은 방향감각을 잃기 일쑤였다.
좋은 바둑으로 만들어가다 역전패 당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치명적인 반집패를 자주 당했다.
그러다보니 미세한 계가바둑으로 판이 짜이면 불길한 예감에 휩싸일 수밖에.
거기에 체력의 열세도 더해져 점점 조훈현은 기울어져갔다.

그러나 한 가지, 시간이 흐를수록 심리적 부담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그에게 보약이 되고 있었다.
지는 것이 습관이 되고 제자의 실력을 아예 윗길로 인정해버리고 나니 오히려 개운해지는 거였다.
이 때부터 조훈현은 이창호를 상대로 진지한 탐색과 실험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한때 창호가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연구했던 것처럼 그도 창호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공부를 전개한 거였다.

어떻게 하면 창호를 이길 수 있는 것인가?
승부도 중요하지만 아직 스승으로서 창호가 세계일인자가 될 때까지는 더욱 자극을 줄 필요가 있었다.
조훈현은 창호를 상대로 매번 같은 포석을 들고나와 답을 요구했다.
사제는 고집스럽게 그 포석의 수십 가지 변화를 주고받으며 현란한 승부를 펼쳤다.

거기서 파생되어 전 세계에 퍼져나간 정석이 바로 한국형 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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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14일. 기성전 제2국에서 이창호가 모처럼 패배했다.
최근 21연승을 기록하며 농심배, 도요타 덴소배, 국수위까지 손쉽게 거머쥐고 동방불패의 위용을 과시했던 그가 150여 수 만에 돌을 던졌다.
상대는 다름아닌 스승 조훈현.
지난번 1국에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던 스승은 2국에서 특유의 스피드로 귀를 선점한 다음 중앙에 산재한 곤마들을 무난히 수습해 제자의 항서를 받아냈다.
5번기가 3번기 승부로 압축되면서 기성전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서서히 증폭되기 시작했다.

최근 소년기사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사제가 결승에서 부딪히는 장면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창호는 여전히 여러 개의 성을 차지하고 있는 절대군주이고, 조훈현의 이름 앞에서는 이제 제자와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마저 증발한 상태이다.
정상의 제자에게 도전장을 던지기 위해서는 과거에 비해 훨씬 내공과 계산이 강한 젊은 강자들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그 걸림돌을 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고 아무래도 많은 전투를 치러야 하므로 상당한 전력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선 조훈현의 기마부대가 출정을 하면 중원이 술렁거리고 세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전장(戰場)을 주시하게 된다.
‘이번에 전신(戰神)은 또 어떤 조화를 부릴 것인가?’
사제대결의 양상은 언제나 발 빠른 스승이 기습, 침투, 생존 및 도피탈출을 감행하고 묵직한 제자가 매복, 수색, 정찰 및 포위압박하는 공수대결로 전개된다.
어느 쪽이 자신의 주특기를 더 발휘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가려진다.
그런 점에서 관전자들은 조훈현의 공격을 더 주시하게 된다.

앙팡테리블 박영훈은 이렇게 말한다.
“조 국수님 바둑은 박력만점입니다. 다른 기사들의 기보는 몰라도 저는 국수님의 기보만큼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것, 그 것이야말로 모든 기사들의 꿈이죠. 저도 그런 바둑을 두고 싶습니다.”
지존무상 이창호는 어느 누구에게도 스승의 바둑을 쉽게 논평하는 일이 없지만 어려운 상대를 대라면 아직도 스승을 지목한다.
“선생님이 가장 까다롭습니다.”
문하에서 하산시킨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제자를 편안히 놓아주지 않는 스승. 
중국 바둑인들은 녜웨이핑, 마 샤오춘 같은 선배들이 조훈현보다 일찍 승부의 뒤안길로 물러난 점을 통탄하고 있다.

지난 12월 조 국수는 컨디션 조절 실패로 극심한 부진에 빠졌었다.
워낙 대국 스케줄이 일년 내내 폭주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내기 힘들므로 딸들의 방학 시즌에 맞춰 모처럼 해외여행을 계획했었던 게 원인이었다.
여행 일정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대국을 벼락치기로 압축해버린 거였다.
그러다보니 거의 매일 대국을 해야 했고 등산 같은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틈이 없어 막말로 골병이 들 정도였다.
연례행사로 찾아오는 감기 바이러스가 무려 한달 동안 체내에 머물며 심기를 어지럽혔고 그 와중에도 빈번한 해외대국이 잡혀 있어 연말쯤엔 몸을 추스르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여고를 졸업한 맏딸 윤선이는 이번 겨울에 아빠의 아픔을 알게 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엊그제 가족들 모두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가 화면을 보면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시는 거예요. 무슨 소리인가 귀 기울여 들어봤더니 바둑 용어들이더라구요. 아빤 TV 앞에서 그날 두었던 바둑을 복기하고 계셨던 거에요. 사람들이 아빠를 천재라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아빠가 엄청나게 노력하는 분이라는 걸 알아요.”

가족 여행을 위해 무리한 스케줄을 선택한 가장, 폭주하는 대국 속에서도 한판 한판의 과정을 흘리지 않고 반추(反芻)하는 승부사.
그리고 사상 최강의 제자에게 끊임없이 숙제를 던지는 스승.
인터넷 바둑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매일 평창동 지하실 컴퓨터 앞에 앉아 바둑사이트들을 둘러보는 사업가.
그 다양한 모습들이 바로 현재 조 국수의 실제이다.

다시 이야기는 90년대 초반으로 넘어간다.
이창호, 유창혁의 기세가 불꽃처럼 타오르면서 거함 조훈현호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15개 기전 중에서 그가 보유하고 있는 타이틀은 기왕과 패왕 단 2개.
그러나 모두가 그의 침몰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을 때 거함의 뱃머리가 갑자기 수면 위로 치솟아오르며 포말을 휘날렸다.
그리고 가공할 함포사격을 퍼부으며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제자와의 국수전 리턴매치에서 3:2로 극적인 승리를 쟁취했고, 기성전에서 유창혁을 4:2로 누르며 다시 일인자로 복귀한 것이다.

일찍이 우리바둑계에서 한 번 정상에서 내려온 자가 다시 복귀했던 전례는 없었는데 조훈현이 보라는 듯 예외를 증명했다.
“그래, 아직도 조훈현의 검은 예리해.”
“아냐, 서산의 마지막 노을일 거야. 넘어가는 순간 쨍하고 최후의 빛살을 뿌린 거지.”
사람들의 평가는 그렇게 반으로 나누어졌었다.
그 사건을 우리는 조훈현의 1차 재기라고 일컫는데, 바둑황제의 권위와 생명력을 믿는 이들과 이창호의 절대우세를 점친 이들의 예측은 상반되면서도 어느 쪽 하나 틀리지 않는 평가였다.
천하명검 조훈현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시퍼런 날을 과시하며 강호를 주름잡고 있으며, 황금방패 이창호 역시 정상에 오른 뒤 단 한 번의 추월도 허용하지 않고 독야청청하고 있으니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한단 말인가?

1993년. 한국바둑계의 지도가 완전하게 개편되었다.
국수전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 조훈현 이창호 사제가 5개월 동안 무려 27회에 걸친 사제대결을 통해 명백하게 힘의 우열을 가리게 된 것이다.
세계 바둑사상 유례없는 사제 간의 혈투는 제자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제자는 대왕위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기전에서 승리해 전대미문의 13관왕에 등극했다.
총 109국을 두어 90승 19패, 승률 82.6%
다승 1위, 승률 1위, 최다대국 1위로 확고부동한 일인자로 우뚝 섰다.
조훈현은 대왕과 KBS바둑왕 타이틀을 지니고 있었으나 왕위 유창혁의 지위에도 밀리는 군소정당의 당수쯤으로 물러나 앉게 되었다.
서봉수를 포함해 4인방 시절로 불리던 전국시대가 이창호의 천하통일 시대로 마감된 거였다.

그러나 4인방은 국제대회에서 나란히 한 몫을 해내 국가대표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제1회 진로배에서 조훈현이 막판에 수훈을 세워 우승컵을 가져왔고, 서봉수는 제2회 응씨배를 거머쥐었으며, 유창혁은 적진 한복판에서 조훈현과 형제대결을 벌인 끝에 후지쯔배를 접수했으며 막내 이창호가 일본의 일인자 조치훈을 3:0 스트레이트로 꺾고 동양증권배를 지켜냄으로써 한국바둑이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이룩한 것.
안으로는 이창호를 정점으로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 투쟁을 벌이고 밖으로는 4인방이 번갈아가며 세계바둑계를 주름잡는 이 시기가 우리 바둑의 진정한 도약기였다.
이들이 펼친 격변의 전쟁사가 우리 바둑에 역동적인 생기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고교생의 신분으로 국내 일인자에 오른 이창호는 93년 대학 진학문제로 갈등을 겪는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 바둑계와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고민거리로 떠올랐었다. 학업을 병행하면 아무래도 바둑에 대한 열정의 순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반대파와 진학을 통해 바둑 명인의 지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찬성파가 팽팽하게 맞섰다.
희대(稀代)의 천재 창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학을 갈 수 있는 학생이었다.

스승 조훈현은 제자의 진학문제에 관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과묵한 창호였지만 스승이 뭐라고 한마디만 언급해주면 그 방향으로 기수(機首)를 틀 터인데 그는 일언반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 무렵 조 국수의 입장을 명쾌하게 들어 기억한다.
“글쎄, 구태여 학사 학위가 필요 있을까? 걔는 이미 박사 과정을 뛰어넘은 아인데.”
그때는 바둑학과가 없었지만 이미 창호는 전문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전문가이므로 대학 진학을 권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캠퍼스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보는 눈이 넓어지겠지만 그렇기에 승부사 입장에서는 산만해질 가능성이 많을 거야. 미팅도 할 것이고, 사회에 대한 발언 욕구도 생길 것이고, 학점을 따려면 공부도 해야할 것 아냐?”
스승이 덧붙인 말이다.

역시 바둑인은 한 길을 걷는 게 지당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조훈현 자신도 학력은 일천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바둑황제라는 수식어 앞에 중졸의 학력을 따지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시대와 완연히 다르기에 제자에게 장인의 길을 권유할 순 없었지만 스승은 대신 몸으로 표지판 역할을 해주었다.
‘나에게 바둑이 숙명이었듯 너에게도 바둑은 숙명이다. 우리에게 그 어떤 전생의 영혼이 깃들어 이 길을 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에 와서 우리가 또 어떤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겠느냐? 창호야. 앞만 보고 달리자.’

스승은 하루걸러 이어지는 사제대결을 통해 그런 무언의 지침을 전했다.
어느덧 승부의 요체를 터득해버린 괴물 이창호는 불가사리처럼 각종 기전의 트로피를 넙죽넙죽 집어삼켰고 스승과의 대국에서도 두는 족족 이기기 시작했다.
한때 이탈리아 축구의 대명사 카데나치오(빗장수비) 전법으로 계가까지 끌고 가 반집의 승리를 자주 거두었던 이창호의 바둑에도 어느 틈엔가 알게 모르게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해 여름 오사카에서 후지쯔배 준결승전이 열렸다.
4강의 주역은 조훈현과 유창혁, 가토와 아와지 9단이었다.
흥행 만점의 한일전 카드였다.
그때까지 후지쯔배는 5년 동안 일본의 독무대였었다. 그 외의 모든 기전은 한국이 휩쓸었지만 이상하게도 후지쯔 배는 난공불락이었다.
최강 이창호가 빠지긴 했지만 조훈현, 유창혁 콤비의 존재는 가토와 아와지를 능가하는 중량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두 천재의 바둑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초반에 행마가 비틀거리며 쫒기기 시작했다.

중반전, 검토실의 일본기사들은 승부가 끝났다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조, 유 콤비는 포기하지 않고 실낱같은 역전의 가능성을 찾아 361로 구석구석을 훑고 다녔다.
마침내 조훈현은 묘수 한방으로 살인청부업자 가토의 발목을 잡았고 유창혁은 1분 초읽기 속에서 끝내기 패를 끝까지 버텨 아와지의 패착을 이끌어냈다.
둘다 반집승이었다.

관전기자 박치문은 후지쯔배의 기적 같은 역전 반집승의 배경에 이창호가 있었던 거라고 단언했다.
조, 유 두 천재에게 승부는 종반전에서 가름된다는 것을 수도 없이 입증시켜준 조련사가 바로 이창호였다는 것이다.
한달 후, 두 사람은 도쿄에서 다정하게 결승전을 치렀고, 유창혁이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로써 한국바둑은 세계 4대 기전을 평정하며 진정한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후지쯔배에서 감동의 형제대결을 연출했던 조, 유 콤비는 귀국하자마자 이창호와 차례대로 타이틀전을 벌여야 했다.
유창혁은 후지쯔 배 타이틀 홀더의 여세를 몰아 명인전에서 선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창호의 3:2 승리.
졌지만 접전을 펼쳤다는 것만으로도 유창혁은 포스트 이창호 시대의 유일한 맞수로 인정을 받았다.
같은 시기 조훈현도 이창호와 국수전에서 만났다.
사제는 국수전에서 한번씩 서로에게 상처를 준 내력이 있었다.
전년도에 놀라운 저력으로 국수위를 다시 쟁취했던 조훈현.
그러나 어김없이 일년 만에 제자는 다시 도전자로 돌아와 있었다.

국수전 제1국은 러시아에서 치러졌다.
프로기사 출신이자 독일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이창세 씨가 자신의 사업체인 볼가 강 유람선에 도전기를 유치한 것.
사제는 처음으로 장거리 여행을 함께 떠났다.
바로 그때 대학시험 날짜가 임박해 있었고, 또 비행기 타기를 끔찍히 싫어하는 창호였지만 유럽원정을 마다할 수 없었다.
볼가 강 유람선 대국은 욱일승천하는 한국바둑의 페스티발이었으므로 그 여행에 함께 한 바둑인들이 많았지만 사제는 각별한 감회로 그들만의 시간을 공유했다.

세 번째 만나는 국수전 도전기. 그 첫판이기에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입회인들까지 묘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특유의 밝은 미소와 유머로 분위기를 리드했다.
품에서 떠나보낸 제자와 모처럼 여러 날을 함께 지내며 예전 동거 시절의 정(情)을 되살렸다.
어쩌면 이 여행이 스승으로서 마지막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시간이었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바둑을 떠나 창호의 진로에 대한 충고일 거였다.
돌부처 창호는 내면에 어떤 갈등이 끓어도 표현하지 않는 소년이었기에 그의 고민은 아버지이자 매니저인 이재룡 씨를 통해서 밖으로 드러났다.
조훈현은 창호의 엄청난 성취와 잠재력을 조심스레 짚어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뜻을 대신했다.

볼가 강 선상대국이 벌어진 알렉산더 호에는 세 명의 국수가 타고 있었다.
김인 국수, 조훈현 국수, 이창호 국수.
거기에 한 명의 준(準) 국수가 가세했으니 그는 다름아닌 알렉산더 호의 선주 이창세였다.
이창세 씨는 4단 시절 조남철 국수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3:2 명승부를 연출했던 개화기의 프로 기사. 일세를 풍미했던 강자였지만 빈곤한 바둑계의 풍토에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독일로 떠난 인물이었다.
볼가강의 물결 위에 떠있는 세 사람의 선배는 각각 시대를 나누어 우리 바둑사를 떠 맡았던 주역들.
그 다음 세대의 선두주자로 배턴을 물려받은 이창호는 도도한 볼가 강물에 스스로 결심을 굳히게 된다.
바둑 외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기로.

그날 밤. 이창호는 유람선의 카지노에 들러 가벼운 마음으로 블랙잭 게임을 했다. 처음 해보는 카드 게임이었지만 21에 근접한 숫자를 쥐는 쪽이 이기는 블랙잭의 룰은 쉬웠다.
19로 361칸의 천문학적인 변수를 읽어내는 천재 앞에서 카지노의 딜러는 ‘럭키 보이’를 연발했다. 잠깐 동안에 창호는 꽤 많은 칩을 긁어모으고 머리를 긁으며 일어섰다.
다음날 벌어진 선상대국에서도 창호는 가볍게 스승을 물리쳤다.

 

 

 

제1국의 여세를 몰아 이창호는 3:0 스트레이트로 승리를 거두며 다시 국수위에 등극했다.
1993년 초겨울부터 1994년 봄까지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대왕전을 힘겹게 지켜 그나마 체면을 차렸으나 바로 그해 12월부터 벌어진 12기 도전 5번기에서 제자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무관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로써 창호는 12관왕이라는 영광을 구가하며 완벽한 일인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말할 수 없이 괴로웠겠지만 조훈현은 묵묵히 제자를 상수로 인정하고 뒷전에 자리 잡았다.

1994년 초, 제2회 진로배 국가대항전제 11국.
그동안 5연승을 올리며 파죽지세로 판을 휘젓고 다니던 일본대표 요다 노리모토 9단의 상대로 조훈현이 나섰다.
일본 팀은 물론이고 한국의 팬들까지도 깜짝 놀랐던 순서였다. 권위를 중시하는 바둑계에서 황제 조훈현이 주장을 마다하고 부장으로 나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조훈현은 제자의 천적으로 통하던 요다를 일거에 제압해 한국 팀 우승의 걸림돌을 제거했다. 연이어 일본의 차세대 유망주 고마쓰까지 꺾은 뒤 마지막 다케미야의 관문의 열쇠는 제자에게 맡겼다.
제자는 다케미야의 우주류를 공중분해시키며 스승이 내준 숙제를 침착하게 풀어냈다. 사제의 멋진 콤비플레이로 진로배 2연패를 이룩한 것이다.
대회가 끝나고 일본 팀은 한국의 절묘한 오더(Order)에 허를 찔렸다고 분통해했다.

이듬해 제3회 진로배에서도 사제의 오더 합작품은 계속된다.
유창혁, 서봉수, 양재호로 이어지는 선발진이 류징, 미야자와에게 줄줄이 점수를 내주며 초반 3연패를 당하자 한국의 우승 가능성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이제 남은 선수는 조훈현, 이창호 두 명 뿐.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이 번에는 이창호가 중간계투를 자청했다.
“작년에 선생님께서 제 체면은 살려주셨으니 이 번에는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창호는 갈길이 멀고도 먼 싸움판에 스승의 등을 떠밀 수 없었다. 그래서 부장을 자처하고 먼저 칼을 뽑았다. 그리고 국제무대에서 아직 인정받지 못한-국내용이라고 폄하 당하는 데 대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신들린 검무(劍舞)를 추며 4연승을 올렸다.
조대원, 고마쓰, 마 샤오춘, 다케미야가 차례로 쓰러졌다.

그러나 대륙의 반달곰 녜 웨이핑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싹쓸이의 기록을 놓쳤다.
녜 웨이핑은 가토를 꺾으며 왕년에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보여주었던 괴력을 다시 뽐내는 듯싶었다.
이제 한국 팀의 마지막 보루는 조훈현.
조훈현, 녜 웨이핑의 대결은 응씨배 이후 최대의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나 병아리 때 쫓기던 닭 장닭이 되어서도 꼼짝 못한다는 속담처럼 싱가포르 혈전 당시 조훈현의 매서운 펀치에 녹아난 녜 웨이핑은 중반까지의 우세를 지켜내지 못하고 역전을 허용했다.

조훈현은 다음날 린 하이펑과의 최종결승국에서 불계승을 거둠으로써 한국의 3연패를 지켰고 1억원짜리 금배 진로컵을 한국기원에 영구보존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선수층이 두텁지 못하다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한국바둑이 불멸의 신화를 계속 써가고 있는 데는 조-이 사제의 콤비플레이가 그만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조훈현은 94년에 망명객(?)으로 변신했다.
국내에서 대왕위 하나를 간신히 유지하며 다관왕 이창호의 등쌀에 못이겨 발디딜 곳을 찾느라 쩔쩔맸으나 세계대회에서는 연전연승하며 바둑황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봄에 한국기사 킬러로 유명한 요다 9단과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만나 3:1로 승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 때까지 요다는 한국챔피언 이창호에게 6승 1패를 기록하며 이창호를 미완(未完)의 소년으로 비웃던 인물. 조훈현은 그런 요다를 처음부터 다그치고 윽박지르고 핍박하며 완벽하게 밀어버렸다.
여름에는 후지쯔배에서 유창혁과 결승전을 벌였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된 형제대결이었다.
옆 자리 3,4위전 테이블에서는 거장 린 하이펑과 조치훈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경쟁하고 있었다. 한국바둑의 위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결승전에서 조훈현은 작년에 양보했던 우승컵을 유창혁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조 국수님. 축하합니다.”
유창혁은 돌을 던지며 깍듯히 고개를 숙였다.
그 축하인사는 세계 최초로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선배기사 조훈현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그로부터 8년 후, 유창혁은 제주도에서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의 축하인사를 조훈현으로 다시 돌려받게 된다.)

응씨배,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진로배.
그 당시 현존하는 모든 타이틀에 지문(指紋)을 묻힌 주인공은 조훈현이 최초였다.
국내 무관의 나락에서 불사조처럼 날아올라 세계대회를 주름잡은 조훈현.
연간전적 70승 32패, 타이틀전에서의 연패 등등 사상 최악의 부진 속에서 이룩한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의 기록은 그렇기에 더욱 가치가 높은지도 몰랐다.
94년 조훈현은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추락했지만 연간 상금 4억 3천만원을 벌어들여 실리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 무렵 한국기원은 관철동 시대를 마감하고 홍익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바둑계의 세대와 판이 새롭게 짜여진 시점이 바로 이 때였다.
조훈현도 환경의 변화에 발맞춰 심신의 개혁을 시도했다. 20여 년간 즐겨왔던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 것.
그의 흡연 습관은 유별났다.
오로지 ‘장미’만 피우는 데 하루 두세 갑은 기본이고, 대국이 있는 날은 다섯 갑까지 피워댔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내가 평창동 지하실 창고에 장미담배 1만 개비들이 박스를 산처럼 쌓아 두었을까.
아마도 그는 평생 손에 쥐었던 바둑알만큼이나 많은 담배개비를 연기로 날려보냈으리라.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우선 체력을 유지하는데 흡연 습관은 독약이었다.
아무리 양치질을 많이 해도 새벽에 일어나면 입 안에서 화약내음이 솔솔 풍겨나왔다.
원래 약한 기관지와 편도선에도 니코틴은 지뢰로 작용했다. 결정적일 때 염증을 일으켜 컨디션을 흐트려 놓곤 했었다.

“승부세계에서 더 오래 견디기 위해서는 담배부터 끊어라!”
조훈현이 미국여행을 갔을 때, 절친한 친구 차민수가 정색하며 구박했다.
그의 승용차에서 조훈현이 담배를 피워 무는데 갑자기 유리창을 열면서 싫은 표정을 비쳤다.
“내 차는 금연구역이야.”
조훈현의 가슴 속에서 슬그머니 짜증의 싹이 돋았다.
친구의 차 안을 벗어나 미국 어느 곳을 가도 흡연자들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문구가 눈에 어른거렸다.
‘내 더러워서 끊고 만다!’
조훈현은 미국여행 중에 금연을 작정하고 주머니 속의 담배갑을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제2003년 봄 중국리그 을조의 용병으로 참가 열흘 만에 모든 대국일정을 소화한 조 국수는 연이어 후지쯔배, 기성전 도전기 최종국에 이르기까지 강행군을 해야 했다. 결과는 역시 좋지 않았다. 리듬을 잘 타면 아무리 벅찬 일정이라 해도 연승을 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에는 지난 연말처럼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거였다.

중국리그 직후에 참가한 후지쯔배 1회전에서 본인방 가토 9단을 꺾긴 했지만 2회전에서 왕리청의 벽을 넘는 데 실패했다.
귀국한 뒤 바로 벌인 기성전 최종국은 사제가 장장 10시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최선을 다한 혈투였고, 피를 말리는 이런 대국일수록 당연히 컨디션이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었다.

최종국이 벌어지기 전날 국수를 만나 근황과 임전소감을 물어봤다.

필자 : 중국리그 잘 다녀오셨어요?
국수 : 응, 막판에 삐끗해서 망신을 당했지.
필자 : 그래도 6승을 거두셨잖아요? 랭킹 1위 왕레이도 꺾었고.
국수 : 그럼 뭘 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판을 지는 바람에 홍 콩팀의 갑조 리그 승격이 좌절됐거든.
필자 : 그것도 다 이긴 바둑이었다면서요?
국수 : 그랬지. 확실하게 못질하려다 손등을 찍고 말았어. 이젠 결정적일 때 (정신이) 가물가물하다니까.
필자 : (화제를 바꿔) 절강성 미녀군단 예쁘던데요? 특히 그 중에서도 탕리 초단같은 경우 탤런트 뺨치는 외모던데…?
국수 : (화색이 돌면서) 무지 예쁘지. 아닌 게 아니라 탤런트 쪽도 생각하 고 있는 모양이던데?
필자 : 타이젬에 동영상이 업데이트되면서 탕리 팬들이 많아질 것 같더군 요.
국수 : 중국에서도 최고래. 스포츠 스타 중에서 압도적으로 인기도 1위를 유지하고 있대.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수려하잖아? 칼라 콘택트 렌즈를 끼었는지 눈동자도 묘한 빛이 감돌던데?
필자 : 가까이서 만나봤어요?
국수 : 그럼, 그 팀하고 붙었었지.
필자 : 국수님은 페미니스트라 미녀한테 한 수 접어주고 두었을 텐데…?
국수 : 후훗, 내가 미녀한테는 좀 약하지. 우리 측 후배 하호정이도 있고 해 서 절강성 미녀군단 전부를 초청해 저녁을 사겠다고 했더니 웬걸 그네들이 먼저 초대하는 거 아니겠어? 그 다음날 내가 곧바로 갚았 지.
필자 : 그럼 두 번씩이나 저녁을?
국수 : 오해하지 마. 내가 미녀들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녀들 이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던데?
필자 : (견딜 수 없었지만 충분히 그럴 소지가 있어 참기로 하고^^) 중국 리그 참 파격적인 구석이 많아요. 어떻게 삼국의 미녀들로 팀을 구 성할 생각을 했을까요?
국수 : 신호팀이 흥행을 고려한 거지. 그런데 탕리는 성적도 좋았어.
필자 : 내년에는 그 팀으로 뛰시지 그래요?
국수 : 하하, 그렇지 않아도 내가 그 팀 감독으로 뛰고 싶다고 밝혔지.
그랬더니 반색하던데?

내년 일은 알 수 없으나 조 국수와 절강성 미녀군단의 조합은 예사롭지 않다. 탕리를 비롯한 아마조네스 전사들과 전신(戰神)으로 불리는 플레잉 코치가 합세한다면 기세와 인기가 만만치 않으리라.

필자는 내처 예민한 사안에 관해 물었다.

필자 : 요즘 이창호와 이세돌의 전쟁이 볼만 하던데요?
국수 : 바람직한 현상이지.
필자 : LG배 기왕전 끝나고 창호 만나서 위로라도 해줬습니까?
국수 : 우리는 그런 거 안해. 승패는 병가지상사인데 뭘.
필자 : 그래도 스승이신데 격려해주셔야죠.
국수 : 격려하는 게 더 어색하지. 누가 뭐래도 창호는 아직 챔피언이야.
필자 : 이세돌 바둑도 매콤하던데요.
국수 : 펀치가 세. 둘이 치고 받으며 상호 발전하는 거지.
필자 : 내일 기성전 최종국인데 밑그림은 그려두셨어요?
국수 : 창호랑 한두 판 두는 것도 아닌데 밑그림은 무슨….
필자 : KT배도 탈락하셨는데 타이틀 하나쯤 건져야 세계대회 참가 자격을 얻지 않겠어요?
국수 : 그러게 말야.
필자 : 상금이 과거 같진 않아도 이창호한테도 내일 결승국이 중요한 의미 가 있겠죠?
국수 : 그럼.
필자 : 사제가 멋진 기보 남기길 빕니다.
국수 : 이제 한물갔기 때문에 기대하지는 마.

그것이 전날의 대화였다.
조 국수의 임전소감은 언제나 엄살로 시작해 엄살로 끝이 난다.
기성전 5국에서 지긴 했지만 내용은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10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고도 복기에서 아쉬운 부분을 몇 번이고 짚었다니 노익장의 감투정신을 높이 살 수밖에.
이번 대국으로 사제의 전적은 111승 171패.
천하의 조훈현을 상대로 171승을 거둔 이창호의 무공이 놀랍고 세계 일인자 이창호를 상대로 37%의 승률을 기록한 조훈현의 저력이 놀랍지 않은가?
스스로 퇴물이라 말하지만 아직 전심의 검은 날이 서 있다. 신산(神算) 이창호조차도 세 판 중 한판은 제물로 내주어야 할만큼.

그러나 1996년 무렵 조 국수의 전적은 참담했다. 모든 타이틀을 쥐고 있다 일시에 상실해버린 쇼크 때문에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어지간한 기사들 같았으면 아마도 그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김인 9단이 일인자 자리를 내려오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다시 찾아올 수 있겠지. 훈현이가 아무리 잘 둔다해도 내가 정신을 차리면 기회가 올 거야.”
그러나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조 국수는 황폐한 심기를 전환시키는 계기를 금연에서 찾았다. 사소하지만 금연은 자신의 부질없는 욕망을 절제하는 약속이었다.
그와 동시에 북한산 등반을 주기적으로 실행했다.
담배를 끊으니 손과 입이 허전해 군것질을 즐기게 되었다.
정미화 여사는 남편의 손이 자주 가는 곳에 멸치와 한과를 비치해두었다. 그 당시 필자는 조 국수가 한 접시의 멸치를 대수롭지 않게 해치우는 것을 본 적 있다. 아마도 담배 세 갑쯤에 해당하는 분량(60마리)이었지 싶은데, 그렇게 영양식을 먹고 산에 오르며 땀을 뺐으니 운기조식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십년 동안 체내에 축적된 담배의 독소가 서서히 방출되면서 날렵한 그의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손이 두툼해지고 바지마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새로 맞춰야했다.
체급이 상향조절 되면서 제비의 별명대신 황제, 혹은 전신이라는 별명이 새로 붙어 다녔다.
맷집도 좋아졌고 이제는 15회전 판정으로 가도 버틸만한 지구력이 붙었다.
제자에게 무수히 당했지만 아직은 제자 또래의 신예들에게 추월을 허용하지 않고 힘들게나마 2인자 자리는 지키고 있는 터였다.
이 때부터 조 국수는 본선무대의 상좌에 앉아 제자에게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교관 노릇을 하게 된다. 그를 통과하지 못하면 이창호를 알현할 수 없는 거였다.
중국기사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는 이유가 바로 그 대목에 있다.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이나 마샤오춘 9단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순식간에 뒷전으로 잠복한 반면 한국에는 조 국수 같은 거물이 오래도록 승부의 현장에 남아 후배들을 조련시켰다는 것이다.

 

 


1996년 제5회 진로배의 막이 열리자 한국의 2장으로 출전한 서봉수 9단이 중국의 위빈, 창하오와 일본의 히코사카, 야마다 등을 차례로 꺾으며 쾌조의 4연승을 기록했다. 이후 서봉수 9단은 파죽의 9연승을 올리며 진로배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도중에 여러 번 고비가 있었으나 서 9단은 놀라운 근성과 승부 호흡을 과시하며 한국 바둑 단체전 5연패의 주인공이 되는데-

그의 홀연한 등장에 바둑팬들은 열광했다.
당시 서9단은 바둑지와 한 인터뷰에서 담담하게 연승의 비결을 이렇게 밝혔다.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두었습니다. 내 뒤에는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이 남아있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습니다.”

서봉수와 함께 사그라지는가 싶었던 조훈현도 반짝 빛을 발했다.
연초에 패왕과 비씨카드배를 차지하고 6월에 기왕위를 접수, 3관왕에 오르며 기염을 토했다.
그해 말 타이틀(국내, 국제 포함) 분포를 보면 이창호의 독주체제 아래 유창혁, 조훈현 두 사람이 힘겹게 뒤를 쫒는 형국임을 알 수 있다.

이창호 : 왕위, 하이텔 바둑왕, 기성, 국수, 명인, 국기, 박카스배 천원전
최고위, 대왕,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TV바둑아시아선수권

유창혁 : 테크론배, SBS배 연승최강, KBS바둑왕. 응씨배

조훈현 : 기왕, 패왕, 비씨카드배

1996년 조훈현은 한 해 동안 110국을 소화했다. 1994년부터 3년 내리 최다대국 수위를 기록했다. 연중 사흘에 한 번 꼴로 바둑을 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최다승 타이틀도 자연히 따라왔다.(71승)
남들은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이라며 혀를 내둘렀지만 조 국수는 담담하게 대국 스케줄에 따라 출전했다.
과거처럼 정상에 서 있다가 올라오는 도전자와 진검승부를 벌이는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지옥의 본선리그와 한발 삐끗하면 그대로 추락해버리는 토너먼트의 사다리를 그는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지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았다.
언제나 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서봉수의 고백은 조훈현의 심경을 대변해 준 명언이기도 했다.

그해 초겨울.
조 국수는 혼자서 눈 쌓인 북한산을 올랐다.
가볍게 늘 다니던 코스를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설산(雪山)의 분위기에 취해 등반장비도 갖추지 않고 고봉(高峰)에 도전한 거였다. 다행히 먼저 올라간 등산객들의 발자국이 있어 더듬더듬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도중에 여러 번 미끄러지는 봉변을 당해야했다.
그렇게 올라 맛본 정상의 바람은 더없이 상쾌했었다. 코가 확 뚫리고 망막의 더께가 한 꺼풀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아래 나목(裸木)의 숲이 은빛 주단을 깔고 고즈넉이 쉬고 있었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
나무는 제 때에 가진 것을 버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야 더 풍성한 잎을 얻는다는 진리를.
‘힘들었지만 올라오니 좋구나!’
국수는 정상에서 삼십 분 가량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하산을 시작했다. 내리막길을 미끄럼 타듯 굴러 내려오며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겨울산, 겨울나무로부터 배운 무소유의 자유.
발걸음이 한결 가뿐했다.

그 다음 주 12월 21일.
제40기 국수전 도전 5번기의 최종국이 열렸다.
스코어는 2: 2
11월에 있었던 1, 2국에서 조 국수는 천하무적 이창호를 상대로 연거푸 불계승을 거둬 화려한 컴백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첫 판에서 그는 제자가 개발한 이창호 정석을 들고 나와 난전을 펼친 끝에 통렬한 승리를 거뒀고 두 번째 판은 불리했던 바둑을 종반 흔들기로 역전시켰었다.
그러나 제3국에서는 거꾸로 절대 우세한 판이었는데 제자의 신묘한 끝내기 솜씨에 당해 1집 반을 지고 만다.
그 역전패의 후유증이 컸는지 제4국은 힘도 써보지 못하고 밀린 끝에 5집 반으로 패배.
연승과 연패를 주고받으며 맞이한 최종국.
5국까지 이르게 되자 홍익동에서는 이창호가 타이틀을 방어할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

사제는 관전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뿌리치고 묵묵히 돌을 가렸다. 사제(師弟) 간에 벌이는 숙명의 라이벌 전.
이 무렵 이창호는 연속되는 타이틀전에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1996년 그의 위세는 가공했었다.
2월에 진로배에 출전 3연승을 올렸고, 3월에 동양증권배에서 마샤오춘을 꺾고 우승했으며 5월에 TV바둑아시아배를 거머쥐었으며 8월에는 후지쯔배를 차지했다.
그도 부족해 한. 중 .일 삼국의 1인자들이 출전해 더블 리그로 승부를 겨룬 ‘96세계바둑최강결정전에서도 4전 전승으로 우승, 명실공히 세계 챔피언으로서의 위치를 굳게 자리매김 했었다.

세계대회에 전력을 쏟았기 때문이었을까?
국내기전에서는 다소 부진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연말에 국기전, 박카스배 천원전, 국수전 등 3 개의 도전기에서 모두 막판까지 가며 흔들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용케도 그는 풀세트 접전 속에서도 마지막 판을 이겨냈다.
사제는 그렇게 똑같이 폭주하는 대국에 시달리며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국수전 마지막 판을 메워 나갔다.
초반 포석에서 흑을 쥔 제자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중반에 어김없이 스승의 흔들기가 시작되었고 역전이 이뤄졌다. 종반으로 가면서 다시 이창호의 끝내기가 먹혀들기 시작했고 승부는 안개 속에 묻혔다.
두 대국자 모두 4시간 59분을 소비하고 60초 초읽기에 몰린 상황.
중앙에서 돌들이 격렬하게 엉키며 스승의 백 대마가 사활에 걸렸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조훈현은 절묘한 맥점을 찾아내고 대마를 단숨에 살려냈다. 검토실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제 백 대마가 살았으니 승부는 끝난 셈-. 그런데 조금 후에 더 큰 감탄사의 메아리가 울려왔다.
이창호가 백 대마를 살려준 대신 두 번의 선수로 집을 짓고 죽은 말 석 점을 이어온 것이었다.
그래놓고 보니 또 다시 형세는 반집 승부였다.
검토실에 나온 김인 국수가 묵직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신을 다한 두 대국자의 기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가 이기든 명승부야!”
한때 국수위를 6연패했던 그에게 제 40기 국수전의 혈투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으리라.

밤 10시를 넘어선 시각.
장장 282 수가 놓여진 끝에 흑백의 공방은 끝이 났다.
이창호의 3집 반 승리.
사제는 손가락으로 승부처를 짚어가며 간단한 복기를 마쳤다.
어렵게 국수위를 방어해낸 챔피언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러나 2연승 뒤에 3연패로 대역전을 당한 도전자 조훈현은 아직도 상기된 얼굴로 끝내기에서 당한 부분을 책망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었으면 이겼을 것이다.’라는 뜻보다도 ‘이렇게 두었으면 흠이 없었을 텐데….’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두 사제가 대국실을 나오자 검토실의 기사들이 박수를 보냈다.
“역시 이창호야!”
누군가 그렇게 찬탄을 금치 못했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조 국수를 격려하는 소리도 튀어 나왔다.
“대단하십니다!”
그 소리에 조 국수는 씨익 웃으며 손을 가로 저었다.
“어이구, 그런 소리 말아.”
차츰 패배의 아픔이 축적된 그에게서 이제는 달관의 미소가 피어나고 있는 듯 보였다.

 

 

 

1997년 벽두에 제8기 동양증권배 본선 토너먼트가 열렸다. 여느 국제기전처럼 삼국의 강자들이 모두 출전했으나 초반부터 파란이 일어났다. 무명이나 다름없던 한국의 김영환 4단이 중국의 류 사오광(劉小光) 9단과 일본기원의 류시훈 7단을 누르고 4강에 진입한 것.
이창호는 다른 시드에서 가토 9단과 마 샤오춘(馬曉春) 9단을 꺾었고 조훈현은 왕 리청(王立誠) 9단과 왕 레이(王磊) 9단을 물리치며 각각 4강에 올랐다.
마지막 한 자리는 일본의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 9단의 몫이었다. 고바야시 사토루 9단은 중국의 조 다위안(曹大元)과 일본의 조치훈을 제압하고 올라왔는데 비록 일본에서 무관이지만 두터운 바둑으로 한때 서열 제1위 기성위를 차지한 적 있는 강자였다.

3월 9일 준결승전.
조훈현은 겁 없는 신예 김영환 4단의 돌풍을 잠재우고 결승에 올랐다.
이날 그는 통산 1,100승으로 세계 최다승 기록을 갱신했다.
그런데 당연히 이길 줄로만 알았던 이창호가 고바야시 사토루에게 일격을 당하고 패퇴했다. 초반 포석부터 유연하고 두텁게 판을 짠 고바야시는 최강 이창호의 존재에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바둑을 선보이며 녹록치 않은 힘을 과시했다.

조훈현 VS 고바야시 사토루.

제8기 동양증권배 결승전의 예상은 5:5로 팽팽했으나 전문가들은 체력상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조훈현보다 고바야시 쪽이 유리하다는 진단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둘 간의 전적은 딱 한 차례, 1995년 후지쯔배 본선 2회전에서 만나 고바야시가 이겼었다. 한 차례의 전적을 참고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 때 조훈현은 고바야시의 두터움에 꽤나 시달리다 그대로 밀리고 말았었다.
기풍 상 어려운 상대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삼년 전 동양증권배에서 조훈현은 까다로운 요다를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3:1로 승리한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요다는 한국기사 킬러로 악명을 떨치지 않았던가.
도끼를 휘둘러 장작을 패듯 반상에 돌을 내리찍는 요다에 맞서 조훈현은 시종일관 중얼거리며 엄살을 부리고 다리를 떨었다. 하지만 엄살과 달리 반상에서 그는 조폭처럼 거칠게 덤벼들었다.
멱살을 쥐고 관절을 비틀고 태클을 감행하는 난폭자. 마치 하수 다루듯 무리수와 독수(毒手)를 남발하는 조훈현의 도발에 질려 요다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다 3:1로 무릎을 꿇고 말았었다.

사무라이 기질의 요다와 달리 이번에 정면승부를 펼치게 될 고바야시 사토루는 호방한 인상을 풍기는 신사이며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애주가에 대인관계도 기풍처럼 넉넉한 기사였다.
과연 그에게도 요다에게 써먹었던 우격다짐이 통할 것인가?
견고한 실리바둑에 기초가 탄탄한 요다는 웬만해서 큰 실수를 하지 않는 수비형이지만 몸싸움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상급의 기사인지라 전투력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취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조훈현은 요다의 기보를 통해 직감으로 해법을 찾아냈었다. 상대가 싫어하는 길로 유도하는 것. 그렇다면 고바야시 사토루가 싫어하는 길은 어떤 길인가?

조훈현은 큰 대국을 앞두고 특별히 대비책을 세운다거나 공부를 하진 않는다. 눈만 뜨면 큰 시합이 기다리고 있는 판인데 그 많은 대국에 앞서 일일이 준비를 할 순 없는 노릇. 그 대신 그는 일상 아무 때나 공부를 한다.
식사를 할 때,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잠들기 전의 휴식 때….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신(神)의 한 수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바둑판 한 조가 비치되어 있어 언제 어느 때나 혼자서 스파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내대회에서나 국제대회에서나 그는 휴식시간에 어슬렁거리며 다른 기사들의 대국을 즐겨 훔쳐본다. 그리고 복기할 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한다.

과거에는 각국 기원에서 발행하는 바둑 잡지를 읽어보고 해외 주요대국의 기보는 팩스를 통해 입수하곤 했지만 요즘은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들을 검색한다. 각 기전의 전적과 기사들의 동정, 그리고 기보 등을 한 눈에 주르륵 훑어본다. 자판에는 서툴지만 마우스 클릭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조훈현의 바둑공부는 그렇게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헐렁헐렁한 것처럼 보여도 광범위한 정보를 포착하는 고성능 레이다가 365일 24시간 가동되고 그 중 필요한 정보만 골라 두뇌의 집적회로에 저장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는 것이다.

제8기 동양증권배 결승전.
준결승에서 이창호를 꺾고 올라온 고바야시 사토루는 컨디션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포석에서 천하제일이라는 조훈현을 압도하고 당당하게 진군했다.
중반까지 진행됐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조훈현의 패배를 단정했었다.
이제 돌을 던지는 시점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조훈현은 끝까지 던지지 않고 실낱같은 역전의 가능성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대국은 TV로 중계방송되고 있었는데 아마추어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조훈현의 종반 흔들기 초식은 절망적이고 자폭에 가까운 몸부림으로 보였었다.

‘무슨 수가 있는 것인가?’
관전자들은 이미 판이 끝났음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정작 고바야시 사토루는 시간이 흐를수록 미혹(迷惑)에 빠져들고 있었다.
마침내 그 미혹이 불안을 잉태하고 불안감은 과잉투지를 불러일으켰다. 탄탄하게 판을 짜오던 고바야시 사토루가 갑자기 조훈현의 저돌에 맞불을 놓으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딱 한 번의 오버페이스.
바로 그 순간 밑바닥에 눌려 아득바득 기회를 노리던 조훈현의 카운터블로가 작렬했다.
통렬한 자반뒤집기였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역전승.

‘심했다!’
관전자들의 국후 촌평은 한 마디로 집약됐다. 아무리 우리 편이라지만 너무 지독하게 물고 늘어져 상대의 실수를 유도한 것 아니냐는 분위기였다.
고바야시 사토루도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하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했던 바둑이었으므로 조훈현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2국에서의 설욕을 장담했었다.
이 당시 고바야시 사토루의 바둑은 신록의 숲처럼 물이 올라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큰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최정상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 있었고 수많은 일본기사들 중 요다와 함께 국제기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 해 연말에 삼성화재배 결승에도 진출해 이창호와 3번기를 가졌다.)

하지만 2국, 3국 모두 그는 조훈현에게 지고 말았다.
세 판 모두 기보를 보면 사토루의 승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완벽한 우세를 점했다가 허망하게 역전패를 당한 거였다.
제8기 동양증권배 결승 3번기를 통해 고바야시 사토루는 한국 팬들과 세계 바둑 팬들에게 강자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심어주었었다. 그러나 우승컵과 거액의 상금은 조훈현의 몫이었다.
“내용과 관계없이 이기는 자가 강자다. 패자가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사토루는 시상식에서 겸허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1997년 하반기 고바야시 사토루는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이창호에게 3:0으로 영봉을 당하면서 한국의 사제 콤비에게 단단히 쓴맛을 보게된다.)

 

 

IMF 한파가 몰아친 1998년. 바둑계도 이창호의 독재체제가 굳어지면서 모든 프로기사들이 한파를 실감해야 했다.
이 해에 이창호 9단은 삼성화재배,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등의 국제대회를 석권하면서 사상초유의 세계대회 전관왕이라는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명인전과 테크론배 등 7개의 타이틀을 연이어 획득, 무풍가도를 달렸다.

이창호의 빛이 강할수록 스승 조훈현의 그늘은 짙을 수밖에 없었다.
순발력을 자랑하는 조훈현은 장거리 레이스 성격이 짙은 국내대회보다 단거리 성격의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곤 했는데 98년도에는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삼성화재배 16강전에서 류 사오광에게 밀렸고, LG배 16강전에서는 위 빈에게 막혔다.
또 후지쯔배 8강전에서는 일본의 히코사카에게 패배했으며, TV바둑아시아 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요다에게 저지당함으로써 타이틀 사냥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울러 국내대회의 성적도 역대 최악이었다.
35승 26패. 승률 57.38%.
기사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연간 승률 50%대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반타작을 겨우 넘는 승률에 비해 가을걷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5월 KBS바둑왕전 결승전에서 이창호를 2:0으로 일축, 2연패 및 통산 10회 우승의 기록을 세웠고, 7월에는 신예강자 이성재 5단과 막판까지 가는 랠리를 펼친 끝에 우승함으로써 통산 19번째 챔피언이 되는 세계기록을 세웠다.

제33기 패왕전은 조훈현의 빛과 그늘을 여실히 보여준 무대라고 해도 좋았다.
도전기 첫판에서 다 이긴 바둑을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지더니 2국에서도 종반에 역전을 허용 반집패를 당했다.
이제 이성재까지도 조훈현을 넘어서는 것인가?
그 동안 번기(番棋)승부에서 조 국수를 넘어선 신예기사는 이창호와 유창혁뿐이었다. 정상에서 한발 물러선 이후로도 8부 능선쯤에 진지를 쌓고 신예들의 진군을 막고 기량을 테스트하던 호랑이 교관 조훈현이 드디어 함락되는 것인가?
그러나 조훈현은 8월 들어 전열을 재정비하고 3,4,5국을 스트레이트로 이겨내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 여세를 몰아 가을에는 국수전 도전자로 올라와 제자와 6년 만의 리턴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제42기 국수전은 기세등등한 신예들의 등쌀을 털어내고 관록의 중견기사들이 대거 본선에 등장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무대. 김인, 서봉수, 서능욱, 최규병 등이 오랜만에 대진표에 이름을 걸고 전통의 국수전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켰다.
준결승전에서 최규병 8단을 어렵게 물리치고 도전자가 된 조훈현.
그 해에 속기전을 제외하고 본격기전의 번기 승부에서 이창호에게 6전 전패로 밀리고 있었기에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당시까지 이창호는 국내 타이틀전 전승의 기록을 세우고 있어 조훈현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조훈현 자신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으니까.
‘이창호의 진정한 적은 이창호밖에 없다.’
홍익동을 떠돌던 신조어가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10월 17일.
광양제철소 영빈관에서 벌어진 제1국.
이창호의 세력작전에 대항해 조훈현은 치열한 교란전술로 임했다. 불꽃이 난무하는 난타전 끝에 전신(戰神)은 신산(神算)에게 1집 반의 승리를 거둔다.
그로부터 한달 뒤 11월 17일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 열린 제2국에서도 전신 조훈현은 특유의 몰아치기 전법으로 불계승을 거둬 아직도 바둑계에 자신의 지분이 남아있다는 것을 선언했다.
독재자 이창호가 159수만에 돌을 던지자 카메라 플래시가 폭죽처럼 연발했다.
눈물겨운 컴백.

동아일보는 46세 노국수(?)의 금의환향을 대서특필했고 팬들은 노장의 투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승부를 가름하고 나서 사제는 손가락으로 간단한 복기를 나누었다.
10년 전 연희동 2층의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된 손가락 복기. 몇 십여 수가 뒤엉킨 미로의 열쇠를 두 사람의 검지는 아주 간단하게 찾아내고 있었다.
연승행진을 저지당하고 그 어떤 타이틀보다 가치가 높은 국수위를 잃었어도 이창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은 감돌지 않았다. 스승에게 당한 패배는 그리 아프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스승이 심기일전해 날카로운 창술을 선보인 것이 오히려 고맙기조차 했을지도 모른다. 스승의 회생은 제자에게 꼭 필요한 거름이었고 자극제였으니까.
스승의 컴백은 국내와 국제대회 최다관왕으로서 더 이상 적수를 찾을 수 없던 이창호에게 방심하지 말라며 놓은 일침이었다.

긴 승부를 끝내고 사제는 가족 및 관계자들과 더불어 늦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한강을 끼고있는 남양주 유원지는 다양한 음식점들이 밀집해 있는 명소.
풍성한 식탁을 앞에 두고 두 주인공은 냉수만 거듭 홀짝일 뿐이었다. 아직도 승부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듯 창호는 물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훔치고 있었다.
돌아온 조 국수는 특유의 유머감각을 발휘하며 식사 분위기를 띄웠다.

그로부터 며칠 후.(12월 5일)
조 국수는 부친의 4주기 제삿날을 맞이해 영정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어떤 동작이든지 시원시원하고 속도감 넘치는 조 국수지만 이 날의 큰절만큼은 아주 정중하고 느릿했다. 평생 아들의 성공을 위해 마음을 쓰셨던 부친께 올리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83세의 노모 박순애 여사는 술잔을 채우며 아들대신 남편의 사진에 말을 걸고 있었다.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로 아들의 부활을 알리는 전언(傳言)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실감났다.
사진 속의 조규상 옹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생전 그는 아들만큼 손자뻘 이창호를 사랑했던 인물.
‘창호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훈현이 네가 더 오래 버텨줘야 한다.’
부친의 영혼이 제삿상에 날아왔다면 아마도 그는 그렇게 훈시를 남기고 떠나갔을 것이다.

 

 

1999년 6월 29일은 박순애 여사의 85회 생신이었다. 언제부턴가 노환으로 기억력이 희미해지고 거동이 불편해 종일 당신의 방에 앉거나 누운 채로 소일(消日)하는 노모.
그러나 그녀는 아들의 대국일정과 결과에 늘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물론 금방 들어도 시합의 명칭을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뭔가 큰 시합에 아들이 나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귀신같이 알고 계셨다.
그날 평창동 거실에는 직계가족 수십 명이 모여 생신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주인 조훈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에서 최초로 창설된 국제대회 춘란배 결승전 대국이 난징(南京)에서 거행됐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국제대회에서 부진을 보였던 조훈현은 국수 컴백을 신호탄으로 본격 상륙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춘란배 예선에서 샤오웨이강 9단, 저우허양 9단, 창하오 9단 등 6소룡 중국기사들로 첩첩이 쌓인 죽(竹)의 사다리를 파죽(破竹)의 기세로 치고 올라간 것.
반대편 시드에서는 이창호가 위빈 9단, 요다 9단, 최명훈 6단을 차례로 꺾고 올라와 있었다. 지긋지긋한(?) 사제대결이 머나먼 중국 땅에서 재현되었다.

6월 25일 난징의 진링(金陵) 호텔에서 벌어진 제1국에서 스승이 의욕적인 강수를 연발하며 제자의 대마를 잡고 선승.
이날 이창호는 흑을 잡고 패배해 국제대회 흑번필승 25연승의 진기록을 접어야했다.
6월 27일 속개된 제2국에서는 제자가 절묘한 맥점을 구사하며 스승의 대마를 잡아 복수에 성공했다.
같은 날 벌어진 3,4위전에서 최명훈 6단이 창하오 9단을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함으로써 금, 은, 동을 한국이 싹쓸이해 주최측을 무색케 만들었다.

이틀 후 벌어진 최종국은 스승보다 제자에게 더 중요한 일전이었다. 신설기전인 춘란배를 차지하고 이듬해 개최되는 응씨배에서 우승하면 세계최초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98년 국제대회 3관왕이었던 이창호는 99년에도 삼성화재배와 LG배를 거머쥐어 가공할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응씨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 등 3개 기전만 존재할 때 스승이 한발 먼저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제는 춘란배까지 생겨 메이저 국제기전이 6개로 늘어나면서 그 대기록을 달성할 사람은 이창호밖에 없는 듯싶었다.

15만 달러의 우승상금은 물론이려니와 사이클링 히트의 교두보가 걸린 큰 승부를 앞둔 상태였지만 사제는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 같은 팀 최명훈 6단이 3위를 차지하면서 선수단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탓이었을까?
그들은 전날 부담 없는 기분으로 난징의 공원을 산책하고 명승지를 돌아다녔다.
식사시간에 조 국수는 익살스런 웃음을 지어 보이며 후배들에게 말했다.
“적당히들 두지 그랬어. 우리가 싹쓸이해버리면 춘란배가 축소되거나 폐지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러자 누군가가 맞받았다.
“그러는 국수님께서는 왜 양보하지 않고 6소룡을 자근자근 밟으셨어요?”
“야, 나는 벌이가 궁하잖아. 셋이나 되는 애들 대학에도 보내야 하고….”

최종국. 다정한 사제는 바둑판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앉았다.
이창호의 흑번. 덤 5집 반. 아무래도 흑을 쥔 제자 쪽이 편해 보였다.
초반 쌍방의 행마가 난징 시를 감싸고 흐르는 양쯔강 물결처럼 평화롭게 흘러갔다.
틈만 나면 전단(戰端)을 찾아 육박전을 펼치는 스승이 이번만은 어떤 결심이 있었던 모양으로 유장(悠長)한 호흡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돌부처로 통하는 제자가 중심을 잃고 먼저 삐끗했다.
그때부터 스승이 타이트하게 조이기를 시도해왔다. 도처의 귀와 변에 손바닥만한 집들을 굳혀두고 야금야금 중원의 흑진에 교두보를 확립하는 전략이었다.

1,2국에 서로 대마를 잡고 잡히는 살육전을 펼쳐 관전자들을 즐겁게 했던 두 사람이 최종 결승국에서는 집 차지 바둑의 진수를 선보이며 제한시간을 모두 소비한 끝에 285수의 빽빽한 기보를 남겼다.
결과는 백의 2집반 승리.
격차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백의 완승국으로 평가된 한판이었다.
잊혀질 만하면 한 건씩 사고를 내는 노장 조훈현은 그렇게 제자의 대기록을 심술궂게 방해하며 나름대로 스승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조 국수의 춘란배 우승이 확정된 순간, 중국 현지의 소식통이 승전보를 알려왔고 평창동 자택에서 샴페인이 터졌다.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손자들의 축가가 울렸고 며느리 정미화 여사가 시어머니 귀에 희소식을 전했다.
“어머니, 아들이 춘란배 타이틀을 땄대요.”
“춘란배가 뭐다냐? 후지쯔배겄지.”
“그래요. 아무튼 이겼다니까 기뻐하세요.”
“누구한테 이겼는데?”
“창호한테요.”
“뭐, 창호한테?”
노모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력이 현저히 감퇴되었지만 언제부턴가 아들이 제자인 창호에게 자꾸 밀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않고 있는 그녀였다.

“애야, 어디서 뒀다냐?”
“중국에서요. 할머니.”
“뭔 대회라고?”
“춘란배요. 중국에서 만든 국제대회예요.”
“그래? 그럼 우승한 거냐?”
“네. 상금도 많이 받고 트로피도 받았답니다.”
“그래, 쓰겄다.(전라도 사투리로 좋다는 뜻)”
그녀는 생신잔치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자꾸 외손자인 필자에게 아들의 시합에 관해서만 물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쯤에 중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주인공 조 국수가 낭랑한 음성으로 어머니께 생신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이겼다면서?”
“네, 어머니.”
“장하다. 내 새끼. 어여 오거라.”
노모 다음에 수화기를 건네받은 아내는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글썽거렸다.

필자는 수없이 많은 큰 승부 뒤끝에 외갓집에 들렀지만 그 때처럼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응씨배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외숙모의 눈물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삼촌이 전화로 이겼다는 말을 전해온 것도 처음이었다.(그는 늘 졌다고 대답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음.)
그만큼 세기말 조 국수는 힘겨운 행보를 걷고 있었으므로 오랜만에 들려온 우승 소식에 모두가 감격했던 거였다.
(그날 십여 명이 넘는 조카들과 손자들은 국수의 사모님으로부터 특별용돈을 받았다. 춘란배 상금의 일부분을 쪼개 갖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99년 조 국수의 전적은 42승 13패.(76.3%)
전년도에 비해 한결 안정감을 되찾은 기록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국내외 바둑계는 이창호의 제국이었지만 조훈현은 제국의 고문(顧問)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았고 언제든지 전쟁터가 부르면 출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전사로 대기하고 있었다.

 

 

2000년 세계바둑계의 화두는 세대교체였다. 동양삼국 중 가장 먼저 변혁의 급물결이 시작된 곳은 중국.
몇년 동안 정상을 양분해왔던 창하오와 마샤오춘이 신예들에 의해 무너지면서 자우허양, 위빈, 샤오웨이강, 뤄시허, 딩웨이, 류쓰즌 등 무려 8명의 타이틀 보유자가 난립하는 군웅할거 시대로 접어들었다.
일본도 조치훈으로부터 왕리청이 랭킹 1위를 물려받았고, 요다, 조선진, 류시훈, 야마시다 게이코 등의 신예들이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시대의 조류를 확인시켜주었다.
상황은 한국도 마찬가지.
부동의 정상으로 군림하던 이창호의 위상이 다소 흔들리면서 이세돌, 목진석, 최명훈, 이상훈, 예내위 등이 타이틀 보유자로 떠올랐다.

그렇게 고대하던 응씨배를 차지하긴 했으나 2000년말 이창호는 왕위, 명인, 기성, 패왕 등 4관왕에 그치면서 다승 3위, 상금랭킹 3위로 추락하는 고배를 맛봐야했다.
우리의 주인공 조훈현 9단의 성적도 제자와 더불어 신통하지 않았다.
30승 25패(54.55%).
최악이라던 98년도의 기록보다 저조한 생애 최악의 성적이었다.
세계 챔피언 이창호와 바둑황제 조훈현의 성적이 예상보다 좋지 않았던 것은 상대들이 그만큼 따라붙었다는 증거. 사관학교에 비견되는 한국기원 원생출신 기사들이 성장하면서 정상권(頂上圈)의 볼륨이 두터워진 것이다.
두 사제가 국제대회보다 국내대회 타이틀을 따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공공연히 밝힐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반타작의 승률에 불과한 조훈현이 알게 모르게 엄청난 성취를 올렸다는 사실이다. 저조한 외형(승률)에 비해 내실은 알찼던 것이다.
5월에 거행된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류시훈, 딩웨이, 이창호를 연파하고 우승했으며 8월에 열린 13회 후지쯔배에서는 저우쥔신, 조치훈, 저우허양, 목진석, 창하오를 내리 누르며 우승, 47세의 절정을 과시했다.
특히 본선 2회전에서 이창호에게 일격을 안겨줬던 중국 랭킹 1위 저우허양 9단과의 8강전은 노장의 투혼이 살아있는 한판으로 기억된다.
저우허양은 후지쯔배 직전, 중국의 타이틀전에서 라이벌 창하오를 4:0 스트레이트로 물리쳐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는 평가를 받던 중국의 비밀병기.
그가 이창호를 꺾자 중국선수단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듯 기뻐했었다. 세계최강 이창호를 제압했으니 이빨 빠진 호랑이 조훈현은 상대하기가 쉽겠지. 녜웨이핑, 마샤오춘, 창하오가 못 이뤘던 꿈을 저우허양이 꼭 달성해 주리라 그들은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흑을 잡은 조훈현은 반상에서 노병이 아니라 팔팔한 특전용사였다.
번개같이 네 귀를 차지하고 나서 고도의 책략으로 중앙을 지워 127수 만에 저우허양의 항서(降書)를 받아냈다. 제자의 복수를 시원하게 해준 것.
결승에서는 창하오가 전우 저우허양의 복수를 벼르며 의욕적인 신수(新手)를 구사해왔으나 조훈현의 치고 빠지기 작전에 녹아버렸다. 세계대회 결승에 7번 진출해서 6번 우승을 거둔 조훈현의 위대한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난 장면이었다.
조 국수가 후지쯔배를 두 번째 제패하고 목진석 5단이 3위를 차지하던 날 도쿄 상공에 쌍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그해 가을부터 열린 2회 농심신라면배 국가대항전에서도 조훈현은 부장(副長)으로 출전해 일본의 부장 야마다 7단과 중국의 주장 위빈 9단을 연파하면서 한국팀 불패신화에 이바지했다.

2000년 상금순위를 유심히 살펴보시라.
1위 : 조훈현 - 3억 9천만 원.
2위 : 유창혁 - 3억 5천 700만 원.
3위 : 이창호 - 2억 800만 원.

승률 50% 대의 조 국수가 이창호에 비해서 두 배 가까운 소득을 올렸다는 점이 놀랍지 않은가?
최소의 승률로 최대의 소득을 올린 그의 경제적 활동은 과다한 대국 스케줄에 시달리는 정상급 기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최근 이창호, 이세돌, 유창혁의 행보에서도 역량을 경제적으로 분배하고 있는 모습이 여실하다. 21세기의 바둑스타들에게는 발칸포나 M60 기관총 스타일의 무차별 제압사격보다 K1 소총의 조준사격이 훨씬 효울적이라는 얘기다. 얘기인즉슨-.

그해 중국 체육주보는 세계랭킹 10걸을 발표하면서 조훈현을 1위에 선정했다. 2위는 유창혁, 3위 이창호 순이었다.
반면 한국기원에서 발표한 세계랭킹 순위는 중국과 역순이었다.
1위 : 이창호(4회 삼성화재배 우승, 4회 응씨배 우승)
2위 : 유창혁(12회 후지쯔배 우승, 5회 삼성화재배 우승)
3위 : 조훈현(1회 춘란배 우승, 13회 후지쯔배 우승)

랭킹의 공정성을 놓고 왈가왈부하기 이전에 밀레니엄 교체기의 세계바둑계 판도는 다름 아닌 한국의 3인방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훈현이 13회 후지쯔배 우승을 차지하기 직전 일본의 왕리청이 춘란배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이후로 현재까지 세계대회 타이틀은 모조리 한국기사들이 독점해왔다(최근 CSK배 아시아 4국 단체전에서 연승기록이 깨졌지만).

2000년 봄.
조훈현은 사업가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게 된다.
평생 바둑 외길만 걸어온 승부사인지라 바둑을 떠날 수는 없고 인터넷 바둑의 가능성에 미래를 베팅하기로 한 것이다.
회사명은 인터넷 바둑리그를 표방한 ICBL. 현 타이젬의 모체이다.
국내 바둑사이트 중 최대의 자본금으로 출범한 ICBL의 간판 역할을 맡아 인터넷 바둑의 활성화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사업방향은 여러 갈래이지만 기사가 아닌 이사(理事) 조훈현이 기획하고자 하는 아이템은 바로 세계최대의 온라인 기전 창설.
전세계의 프로기사들이 온라인에서 리그전으로 순위를 가리는, 파격적이고 웅대한 스케일의 기전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온라인 대국은 기술상의 문제와 스폰서만 해결되면 기존의 국제기전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훨씬 많은 대국을 소화해낼 수 있다. 그렇게 절약한 경비는 상금으로 환원, 우승자부터 순위대로 많은 상금을 차등지급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전승으로 우승할 경우 천문학적인 상금을 받게 된다.)
또 바둑 팬들이 실시간으로 관전을 하며 승자를 예상해 베팅하는 게임 측면의 요소도 가미할 수 있으므로 제대로 운용된다면 바둑의 패러다임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본다.

그렇게 태동된 ICBL은 타이젬으로 변신했고 2002년 4월 라이브 바둑과 합병되면서 다시 태어났다.
이 사이트에서 조훈현은 이창호, 유창혁, 서능욱 등의 기사들과 함께 의기투합해 바둑의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고심의 한 수(手)를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잊을만하면 활화산처럼 떨치고 일어나 우리를 놀라게 했던 바둑황제 조훈현.
사업의 영역에서도 귀신(?)이 돕는 사람이기를 기대해본다.

 

 


드디어 타이젬이 세계 최대의 인터넷 오픈기전을 만들어 천하에 공표했다.
타이젬 9단의 실력만 인정받으면 누구나 대회에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참가자가 익명의 아이디로 온라인 상의 대결을 벌이는 희대의 이벤트.

한국기원은 프로기사들의 참가를 엄격히 금지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그러나 주최 측이 익명의 비밀을 보장하는 한 참가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는 없는 일.
바둑 매니아들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지만 프로바둑의 권위와 정통성을 지키고 싶은 한국기원 측의 입장을 감안하면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조 국수는 프로기사의 대표적인 얼굴이면서 타이젬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번 일로 한국기원과 다소 갈등할 여지가 다분하지만 바둑문화의 대중화, 바둑 인구의 확대 차원에서 절묘한 타협점을 찾기 바란다.

바둑 팬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세계대회보다 더 신선하고 자극적인 대회의 등장이 나쁠 리 없다.
타이젬 오픈대회가 파격적인 방식의 기전이긴 하지만 필자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지금 예산보다 열 배 정도 확대하고 전 세계의 모든 강자들이 평등한 조건으로 참여하는 매머드 기전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진행상의 문제점과 예산 확보 등의 문제가 있기에 기대난이지만)

참고로 요즘 바둑사이트 대기실에는 꽤 많은 프로기사와 연구생들이 출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수는 낮지만 바둑을 보는 눈만큼은 프로의 경지에 달한 아마추어들은 고수들의 착점을 지켜보며 대국자가 프로기사 누구인지 짐작해보기도 한다.
필자는 몇몇 프로기사들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바둑을 두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청소년 기사들은 부담 없이 아마추어들과 수담을 나누며 그들의 신선한 발상을 흡인하기도 한다고 했다.
조 국수도 가끔 한가할 때 인터넷 바둑을 둔다.
친구 차민수 4단을 골탕 먹인 에피소드를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이다.
타이젬의 골수 매니아들께서는 조 국수의 아이디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비슷한 기풍의 강자가 출현하면 혹시 그가 평창동의 바둑황제 아닌가 의혹을 품어봤을 것이다.

참고로 밝히자면 조 국수는 여러 개의 아이디를 보유하고 있다.
한 개의 아이디로 계속 두면 보안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왜 굳이 보안을 따지느냐 하면 그 것은 프로기사라는 이유 때문이다.
바둑을 업으로 삼는 기사에게 아마추어들이 한 판 지도받기 위해서는 금액이 적더라도 소정의 지도료를 내야 한다.
그러나 인터넷 대국에서는 그런 규정이 없다.
그러므로 프로기사들이 인터넷 바둑을 두는 이유는 간단하다.
부담 없이 바둑을 즐기거나 불특정 다수의 아마 강자들과 승부하면서 끊임없이 칼날을 가는 즉, 기량연마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조 국수의 경우 전자에 해당한다.
타이젬 사이트의 독특한 베팅대국을 즐기는 쪽이다.
또 다른 강자들의 대국을 지켜보면서 사이버머니를 베팅하는 것도 즐긴다.
대국은 말할 것도 없고 베팅에도 천부적인 승부감각이 있어 주로 따는 편에 속한다.
그렇기에 언제나 두둑한 사이버머니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사이버 대국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우스를 통해 바둑 게임의 다양한 가능성을 찾고 싶어 한다.

바둑황제 조훈현의 인생은 무수한 승부의 연속선상에서 크고 작은 등락을 거듭하면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려왔다.
세계 최연소 입단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천재적 소년기.
세고에 문하생으로 기도를 닦으면서 신인왕에 올랐던 일본의 청소년기.
귀국해서 질풍노도처럼 타이틀 사냥에 나섰던 청년기.
응씨배를 거머쥐면서 세계 정상에 오른 장년기.
그리고 제자 이창호에게 하나둘씩 타이틀을 이양하면서도 큰 시합에서 놀라운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재.

아직 노년기로 부르기엔 그의 기백이 너무 창창하고 기량도 녹슬지 않은 상태지만 조 국수 자신은 후배들에게 스스로를 ‘노친네’라고 엄살을 부린다.
국제대회에 나가도 최고령 참가자이기 일쑤인 그는 이제 바둑에 관한 업적은 이룰 만큼 이룬 인물.
바둑문화사업이 필생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둑의 중원에 뛰어들어 신묘한 보법과 현란한 변신술, 전류와도 같은 검법으로 일세를 풍미하고 그만의 자기류(自己流)를 세웠으며, 문하에서 최강의 후계자를 배출한 조훈현의 영광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리라.
전신(戰神)으로서의 내공과 위엄은 사는 그 날까지 영원할 것이고 바둑계의 걸출한 위인으로 우뚝 서길 바라며 조 국수의 문화사업 포석이 기풍의 그것처럼 속도감 있게 전개되어 찬란히 꽃 피우기를 바란다.
그 꽃의 개화와 결실은 다름 아닌 바둑 팬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는 선물일 것이기 때문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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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daum.net/skydragon/10862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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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개의 댓글

30줄 요약점;;;
0
2014.12.15
@걍가려다가리플씀
60살 인생을 30줄로 요약하라면 얼마나 슬프겠니
0
2014.12.14
너 대단하다..
0
2014.12.15
@오뜨
퍼온겨 ..
0
2014.12.14
임마 이걸 읽으라고...
0
2014.12.15
@존재
일단은 글이니까 ㅎㅎ
0
2014.12.14
잘 읽었다...
요즘은 중국한태 밀려서 옛말이 되어버렸지...
박정환 김지석 기사도 잘하지만 뭔가 아쉽지. 이 시절애 비하면.
0
2014.12.15
@밀라도공작
이번에 김지석 삼성화재배 우승해서 기대를 걸만해 ㅋㅋ
0
2014.12.14
엄청길당.. 드라마로 만들어도될듯
0
2014.12.15
@반물질
그런데 바둑이야기로는 자극적이질 않아서 ㅠ
0
2014.12.14
읽으려고 했다가 포기했다
분할해서 연재로 하지 그랫어?
0
2014.12.15
@연예인
퍼온거라서 ㅋㅋ
0
2014.12.15
ㅠㅠㅠ 시험기간인데 이거 보다가 2시간 날림 ㅠㅠ 꿀잼이긴 하다...
0
2014.12.15
@지요
ㅋㅋㅋㅋㅋ 시험 잘쳐라 ~
0
2014.12.15
4시간동안 한줄 한줄 집중하면서 본듯 중간에 배터리도 갈고 ㅋㅋ 와.. 근데 진짜 좋은글인데 이거 글보니깐 조국수님 조카분이 책쓴거같은데 저작권같은거 안걸릴라나...?
0
2014.12.15
@심해여행객
다음블로그에서 퍼온건데... 시무룩..
0
2014.12.15
중국이 바둑 종주국이란 근거는?
기원도 기억안날만큼 까마득히 오래된 게임을
중국이 뭔데 종주국을 자처함?
0
2014.12.15
@묘르닐
모르면 공격적이질 말던가.. 검색을 해보던가..
우리가 하는 왠만한 동양식 보드겜은 다 중국에서 시작됐고 바둑 역시 중국이 종주국임
중국에서 수입해서 즐겼다는 근거가 일본 한국에 다 남아있음 ㅇㅋ?
0
2014.12.15
읽기 개 힘드네....저 중에서 5문단만 띄엄띄엄 읽었다...
0
2014.12.15
@유랑단장
조금만 집중하면 재밌을거야
0
2014.12.15
내가 영암에서 사는데
중학교때 바둑장기 하는 동아리실 뒤에 조훈현이야기 액자식으로 딱하나걸려잇엇음
0
2014.12.15
좋은글 고맙다 정독했고 추천하나 박을게 ㅋㅋ
0
2014.12.15
다읽었다 ㅠㅠ 좋은글 감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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