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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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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김구가 1949년 3월 14일 서울 마포구 염리동 창암학원 개원식에서, 아래 사진은 그해 4월 2일 전주향교에서 한독당 전북도당 간부들과 찍은 사진.

 

 "때때로 한가한 경우에 집어 드는 책이 요즘은 홍명희 씨의 『임꺽정』이다. 그 사상과 사건의 흥미며 의협적인 것에 재미를 느낀다.

 

 동양인으로 『금강경』도 삼독(三讀)의 필요가 있겠지만, 『노자』는 관념적인 운명관만 배제하면서 읽는다면 서양인들이 말한 바 변증법을 발견할 수 있다. 『성서』 특히 기독교의 구약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해도 읽을 필요가 있다.

 

 『고려사』의 열전(列傳)에서는 희세(稀世)의 정치가이며 명장인 을지문덕·연개소문의 우수하고도 자주적인 긍지를 읽을 수 있다. 『불란서혁명사』, 『링컨전』, 『육도』, 『삼략』 등도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다. 또 내가 중국에 있을 때 루쉰의 『고향』과 『광인일기』를 읽으면서 나의 고향을 생각해본 일이 있다. 번역이 되었다면 청년학도들에게 다행일 터인데 하고 궁금한 생각이 든다. 요즘 갓 수입한 이북만의 『이조사회경제사』를 읽고 있다.

 

 지금 열거한 책자들을 청년학도들이 꼭 읽어야 된다고 강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가 읽은 책자 중에서 몇 책을 들어 본 것이니, 이것으로써 청년학도의 면학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다."

 

- 김구, 「나의 애독서」, 『자유신문』, 1949. 3. 19.

 

 

백범어록 - 예스24

 

짧은 글이지만 백범의 만년 독서 편력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그의 추천 도서는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설, 여러 번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고전, 국내외 지도자들을 다룬 전기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소설로는 홍명희의 『임꺽정』을 거론하고 있는데, 식민지 시기 국내 조선인들은 즐겨 읽었지만, 중국에 있었던 백범은 아마도 읽지 못했던 듯하다. 남북연석회의 전후 홍명희는 백범과 정치 노선을 같이하였으나, 그는 북에 남고 백범은 남으로 귀환하였다. (...)

 

백범의 추천 도서에는 그의 청년 시절의 경험과 분단 전후 한반도의 현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1892년 17세로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육도』, 『삼략』 등의 중국 병서를 공부한 적이 있으며,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고 이어서 탈옥하여 한때 승려 생활을 하면서 불경을 접한 적이 있는데, 그중 『금강경』을 추천했다. 그후 청년 백범은 기독교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는데, 그것의 반영인 듯 『성서』,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 민족 독립과 관련되는 구약을 추천하고 있다. 백범의 자주적 민족적 관점은 그가 거론한 위인전, 『고려사』의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백범의 추천 도서에는 해방 직후의 변혁적 시기와 남북 분단의 갈등을 반영한 것도 적지 않다. 『불란서혁명사』, 『링컨전』 등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고, 사회주의자 이북만의 『이조사회경제사연구』를 읽고 있다는 것은 백범이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토지개혁 등의 경제 문제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백범은 김준보의 『토지개혁론요강』 (1948)에 휘호까지 써준 바 있다. 

 

백범이 『노자』를 추천한 것은 다소 의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나의 소원」에서 이미 『노자』를 거론하면서 "정치에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히는 등 노장적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바, 여기서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 김구 지음, 도진순 풀고보탬, 『백범어록 - 평화통일의 첫걸음, 백범의 마지막 말과 글』, 돌베개, 2007, 354~356쪽.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하러 갔다가 남으로 귀환한 그들과 달리 북에 남은 홍명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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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남북협상과 5.10총선거 이후 중도파를 보면, 근로인민당, 사회민주당, 민중동맹, 민주한독당, 근로대중당, 신진당, 남조선천도교청우당 등 중도좌파(여운형이 벌건 대낮에 극우 백색테러로 서거한 후 세력이 많이 약해진)는 다수(백남운, 장권, 이용 등)가 주도해서 북한 정부 수립 과정인 6월 평양에서의 제2차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와 그해 8월 해주에서의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소수(장건상, 여운홍 등)는 이들과 다른 길을 걸었고(남북한 단독정부 양쪽 모두 반대하거나 대한민국 지지), 홍명희의 민주독립당이나 이극로의 조선건민회와 같은 일부 중도우파도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했음. 홍명희는 식민지기에 화요회의 일원으로서 조선공산당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사회주의운동 경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민족통일전선인 신간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인물이기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아마 미군정 측 기록이었던가, 아무튼 미국 측에서도 중도우파로 분류하고 있던 인물인데, 결국은 남북협상을 하러 갔다가 북에 잔류하고 북한 정부 수립까지 참여했단 말이지. 홍명희는 남북협상 당시 북한이 이미 헌법을 채택한 것을 날카롭게 지적해서 당황한 김두봉이 궤변으로 답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한데, 결국은 북한 정부 수립이라는 길을 걸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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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중도우파인 김규식, 안재홍은 홍명희, 이극로와 다른 길을 걸었음.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은 애초부터 남한 정부를 사실상의 정통정부로 인식하면서도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것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거에 대해서 '불참가·불반대'라는 유연한 입장을 보였고(김구가 5.10총선거에 입후보한 한독당 간부들을 제명하는 등 완강한 입장을 보였던 것과 대비됨), 이후 김규식의 민련은 김구의 한독당과 함께 대한민국의 제도권 정치 밖에서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했음. 북한 측에서 이들에게 제2차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할 것을 제의하자 단호히 거부, 북한이 약속을 어기고 또 다른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한다며 강력하게 비판했음. 김규식은 김구와 함께 8.25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대해서도 강력한 비판을 이어갔고, 이들과 달리 북한 정부 수립을 지지했던 중도파들은 이들을 비난하면서 갈등을 겪었음. 당시 북한에 모여 있던 남북한 좌익 지도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박헌영이 김구와 김규식을 맹비난했음. 이듬해인 1949년 5월 북한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일 때 김구와 김규식이 조국전선에 불참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6월 평양에서 열린 조국전선 결성대회에서 허헌이 김구와 김규식을 강도 높게 비난한 것과 일맥상통함. 원래부터 김구와 달리 유연한 입장이었던 김규식은 1948년 12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축하하면서 이때를 기점으로 대한민국을 전격적으로 지지하며 활동하는 방향으로 전환했음. 안재홍은 남북협상을 응원하면서도 미군정 민정장관으로서 5.10총선거를 준비했으며, 최선이 불가능하면 차선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면서 남북협상파가 5.10총선거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는 등 '차선으로서의 대한민국'에 정통성을 부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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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파에서 우익의 일부인 김구 계열로 눈을 돌린다면, 남북협상과 5.10총선거 이후 김구의 한독당 내부에서 현실론자였던(5.10총선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 조소앙이 가장 먼저 노선을 전환해 대한민국 육성강화론을 내세우며 한독당을 탈당했음. 조소앙은 사회당을 창당해 신생회를 조직한 안재홍과 함께 대한민국의 육성강화를 위한 '민족진영강화론'을 제창하면서 민족진영강화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들은 1950년 5.30총선거에 참여해 당선되어 제2대 국회에 입성하기도 했으나, 이승만 정부와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은 이들의 노선 전환에도 이들을 철저히 배격했음.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면서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이 납북되어버리면서 대한민국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음. 김구는 5.10총선거에 유연한 입장이었던 김규식과 달리 완강하게 반대했으며, 남한과 북한 양쪽 모두의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집했지만, 1948년 12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 이후 이를 축하하면서 점차 태도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음. 1949년 국면에서부터는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활동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이동했음. 그는 당시 대한민국 정계에서 이야기가 돌던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 합작론'이나 '민족진영강화론'에 처음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회동하는 등 이에 점점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1949년 6월 26일 이승만 정부의 군 상층부를 배후에 둔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음. 

 

1948년 국면에서 김구 계열과 정치 노선을 함께 했으며 중도파의 일원이었던 홍명희가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달리 북에 잔류하고 심지어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한 까닭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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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인 홍기문 때문일까. 국어학자이기도 한 홍기문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선공산당, 신간회 등에서 활동했는데, 민족통일전선인 신간회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활동했지만 아버지보다 사회주의 사상이 강했는지 아버지와 자주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음. 그런데 알아보니 홍명희가 북에 잔류한 후에 홍기문이 월북한 것으로 봐서는 홍기문이 원인인 것 같지도 않고. 잘 모르겠다. 

 

 

 

이조사회경제사연구』- 이북만 지음 (대성출판사,1948년) : 네이버 블로그

 

한편, 김구가 토지개혁에 관심이 있어서 사회주의자인 이북만의 책까지 찾아 읽었다는 것이 흥미롭기는 하네. 그런데 뭐 보수라고 해서 반드시 좌파가 쓴 책을 못 읽을 것은 전혀 아니고, 정치적 입장이 다르더라도 사안에 따라서 접점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당장 나도 스스로를 보수주의자(그 중에서도 중도우파로 분류되는 기독교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영국의 좌파 경제학자가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에 따른 '불로소득 자본주의'를 비판한 책인 『불로소득 자본주의 시대』라는 책도 찾아 읽고 있는 중이니, 무리도 아니지. 

 

백범일지 - 예스24

 

백범은 상해에 도착한 직후부터 접하게 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것은 이론적인 근거에 입각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이동휘 등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코민테른 노선 추종을 사대주의적 행위로 인식하면서 느끼게 된 경험적인 측면이 강하다. 백범의 민족주의가 혈연적인 공동체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도 바로 그러한 인륜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공산주의자들은 인륜의 기본원리인 부자지간의 의리조차 저버리는 부도덕한 집단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깔려 있다. 그것은 백범 혼자만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이 무렵 상해에서 활동하면서 임정을 끝까지 지킨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백범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를 주체성이 결여된 사대주의 사상에서 찾고, 그것은 조선왕조 시대의 맹목적인 중화문화 숭배사상과 동일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백범의 정치이념을 집약한 유명한 「나의 소원」에도 잘 요약되어 있다. 상해에서 유일독립당 운동을 전개할 때 백범과 같이 활동한 적이 있는 저명한 공산주의자 홍남표는 해방 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백범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로 말한대도 집도 땅도 없는 사람이니 구태여 자본가들을 잘 살리기 위하여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왜1놈한테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아라사에 팔아먹으려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신조선보』, 1945.11.24.)

 

- 김구 지음, 배경식 풀고보탬,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너머북스, 2008, 482, 541쪽.

 

 

이런 것을 보면 김구가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까닭은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민족이나 국가나 가족 공동체·전통 도덕·가족의 가치에 대한 부정, 부도덕, 소련에 대한 사대주의 등 이유가 더 컸다고 볼 수 있음.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균등을 지향하면서 주요 기간산업과 토지의 국유화를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것은 조소앙이 창시한 삼균주의에 담겨 있는 내용이기도 함. 정치균등·경제균등·교육균등을 실현하기 위해 보통선거 제도, 주요 기간산업과 토지 국유화, 의무교육 제도 등 내용을 담고 있는 삼균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세웠던 이념으로서 1941년에 발표한 건국강령에 투영되었음. 물론,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꼭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중국 국민당의 삼민주의와 같이 민족주의가 더 크게 작용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함. 실제로 삼균주의를 내세웠던 것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고. 또 이 삼균주의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의 1948년 5.10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할 때 상당 부분 반영되었음. 북한헌법이 아니라 제헌헌법에. 

 

이승만이라고 해서 크게 달랐을까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님. 이승만도 김구와 거의 일치함. 반공주의를 가지게 된 이유가.  

 

현대한국정치 - 예스24

 

"이승만은 초기 저작에서부터 러시아를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황제의 지배 아래 있던 러시아(제정 러시아)가 조선의 독립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침략세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미국에 정착한 이후에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소련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는 그것을 적극 이용할 수 있다는 자세를 취했다. 독립을 위한 협조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소련에 특사를 보내려고도 했다. 반공 노선이 확고해진 이후에도 그는 공산주의가 독립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는 분명히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은 반공 노선을 분명히 하지 않았으나 일련의 사태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가장 큰 요인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사회주의자들과의 갈등이었다. 임정에서 이승만의 실정을 공격하는 데 가장 앞장 선 인물들은 주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사회주의 계열과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외교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의 대결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반감은 높아졌다. (...)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태평양잡지』에 공산주의 관련 글들을 기고하며 반공 노선을 정립하게 된다. 그가 이 잡지에 쓴 공산주의 관련 논설은 모두 4편인데, 그중에서 최초의 글 「공산당의 당부당」에 반공 노선이 집약되어 있다. (...) 반공에 관련된 첫 번째 논설에서부터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강하게 대비되는데, 일차적으로 그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한다"는 부분을 반공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았다(「공산당의 당부당」, 『태평양잡지』, 1924/07,18).

 

이 글에서 이승만은 세계가 공산주의로 통일된다고 해도 우리 한인은 일심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여 세계에 당당한 자유국을 만들어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문제라도 생각하지 그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2천만이 모두 다 밀년에아[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지라"고 선언했다(「공산당의 당부당」,18). 그리고 글의 말미에서는 "우리 한족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우리는 다 공산당 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고 하면서 이중적 입장을 보이는 듯하지만(「공산당의 당부당」,18), 사실은 '민족 독립'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 반공과 관련된 또 다른 논설인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에서도 그는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는 기준을 '민족의 생존'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방침을 방해하는 것은 "곧 민족적 자살"이라고 강조했다(「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 13). 또한 이 글에서는 "세계적 주의가 전파되는 곳마다 민족주의와 충돌이 생기나니"(「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 13)라고 말하면서 사회주의를 민족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사상으로 보고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밝힌다. 그에게 민족주의는 국가·민족의 생존 및 부국강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며, 그것이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계급 평등과 국제주의를 압도하고 있다. (...)

 

그는 20세기에 들어 전파되는 공산주의에서 오늘날 인류사회에 '합당한 것'과 '합당치 않은 것'을 '당부당'이라고 표현했다. 이승만이 합당한 것으로 꼽은 것은 '인민의 평등주의'였다. 반상의 구분, 신분의 귀천, 노예제도의 혁파, 가난한 자와 부자의 혁파는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산을 나눠 가지자 함', '자본가를 없이하자 함',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 사상도 다 없이한다 함'은 '합당치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재산을 나눠 가지면 사람들의 근로 의욕이나 노동 동기부여가 사라지고, 자본가를 없애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 정승현, 전재호, 「이승만 - 통치이념으로서 자유민주주의의 탄생」, 『인물로 읽는 현대한국정치사상의 흐름 -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아카넷, 2019, 113~115쪽.

 

우남 이승만 연구 - 예스24

 

참고로 이승만의 반러적인 인식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서 활동했던 '운동권' 시절부터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비에트가 들어선 이후까지 계속 유지되었으며,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반소적 입장을 대외적으로 명확히 했지만, 자금 획득과 외교 지원 등의 필요에 따라서는 소련과 일시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음. 이에 따라서 적십자사 총재인 이희경을 통해 여러 차례 대소 외교를 시도하기도 했고. 1920년대 초 러시아 볼셰비키의 승리 가능성, 구미 각국이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를 승인할 가능성, 더 나아가 소련이 최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임. 이승만은 1928년 자신의 세력인 "동지회의 정강을 문의하는 윤치영에게 보낸 답장에서 소련과의 연대에 찬성했고, '공산사회 등화(等化)' 즉 평등한 공산사회 건설에도 동의했다"고 함. 다만, "국제주의보다 국가·민족주의가 우선"이며, "계급 구별은 민족을 분열시켜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니, '공산사회 등화'는 독립 후에 선택해도 늦지 않으나 소련과 연락을 취하는 것은 급무"라고 했다네. 이승만이 "더이상 소련과의 비밀 합작이나 원조 요청을 고려하지 않고 대내외적으로 명백한 반소·반공 노선을 표방"한 것은 1933년 소련 방문 이후부터임. 소련의 실상을 목도하면서 피상적이었던 반러·반소적인 인식이 확고한 신념이 되었고, 모욕적인 추방까지 당하면서 소련에 대한 반감을 굳히게 되었음. 자세한 내용은 정병준 교수님의 저서인 『우남 이승만 연구 -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역사비평사, 2005)를 참고하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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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에 서명하고 있는 국회의장 이승만. 제헌헌법은 민주주의 제(諸, 모든) 제도와 경제적 균등 및 통제경제를 지향했음.

 

이승만은 해방 이후인 1945년 11월 21일에는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방송을 통해서 자신이 "공산당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주로 호감을 표한 것은 경제적 측면이었음. 정부 수립 후 경제정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에서 채용할 것이 여러 가지 있으며, 경제적 측면에서 근로 대중에게 복리를 주기 위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자신도 "얼마만큼 찬성한다"라고 밝혔지. 물론, 이는 이승만이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귀국하기 전에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공산당을 포섭하기 위해서 한 '립서비스'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1948년 5.10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이, 이후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이 보여준 모습을 볼 때 단순히 립서비스만이라고 보기 힘든 측면이 있음.

 

제헌국회에서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인정, 경제적 자유를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이라는 한계 내에서 인정, 주요 자원이나 산업에 대한 국유 내지 국·공영의 원칙 천명 등 경제 조항을 담은 제헌헌법이 제정 및 공포되고, 시대적 과제이자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농지개혁이 논의되고,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자유경제론'과 '계획경제론'이 경합을 벌이고 있을 때 한민당의 핵심 의원들은 지주·자본가를 대변하면서 국가의 통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농지개혁을 지주에게 유리하게 시행하고자 했으며, 자유경제론을 내세웠던 반면, 지청천 의원과 무소속계 의원들은 농민과 근로자를 대변하면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농지개혁을 농민에게 유리하게 시행하고자 했으며, 계획경제론을 내세웠음. 이승만은 대체로 후자의 손을 들어줬다고 봐도 무방함.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들고 나온 이도 이승만 계열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의 전진한 의원이었고. 

 

여러모로 흥미로운 부분임. 한민당의 반공주의가 주로 자신들의 기득권이랄까,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 즉 경제적 측면이 컸다면, 김구와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그런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주로 민족이나 국가나 가족 공동체·전통 도덕·가족의 가치에 대한 부정, 부도덕, 소련에 대한 사대주의 등 이유가 더 컸다고 볼 수 있음. 

 

혹시나 이러한 경제적인 입장을 오늘날 기준으로 접근해서 김구도, 이승만도 '빨갱이'였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부디 없길 바람.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지. 

 

일제 식민지 시기에 철저하게 식민 모국인 일본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따라 기형적이고 파행적으로 형성된 식민지 자본주의 아래에서 대부분의 자원과 생산수단은 일본인과 조선인 중에서 극소수인 친일파가 독점하고 있었음. 한반도 내 자본가의 다수는 일본인이었고, 조선인 자본가의 자본축적 정도는 취약했음. 산업시설이나 상품시장도 일본제국으로의 식량과 원료, 상품 공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조선의 수요·공급과는 괴리되어 있었고. 한반도의 남쪽에는 농업과 경공업, 북쪽에는 중화학공업의 분업구조가 일정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도 철저히 일본 자본주의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음. 특히, 식민지 지주제는 대다수가 농민, 또 그 가운데 대다수가 소작농인 조선인들로에게서 엄청난 반감을 샀고.

 

당연히 해방 이후에는 ① 일본 경제에 종속된 산업구조나, ② 식민지 지주제의 폐해, ③ 중화학공업 지대가 집중된 북한 지역과의 분단으로 인한 농업과 경공업 중심의 기형적인 구조 등 식민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① 일본 중심의 경제구조를 한국 중심의 경제구조로 전환, ② 한국인의 대다수인 농민들의 열망을 반영해 농민 친화적인 토지개혁 단행, ③ 북한과의 단절로 인한 산업 불균형을 시정하고 자기완결성을 갖춘 경제기반 형성 등 핵심 과제들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좌익이 아니라 우익이라도 '계획', '통제', '국유', '공유', '협동적 소유'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 

 

 

 

 

아무튼, 김구의 글 하나를 소개하다가 그 글에서 김구와 홍명희의 노선이 갈라지게 된 점, 그리고 김구가 토지개혁에 관심을 가지며 사회주의자가 쓴 책을 구해서 읽었다는 점에 꽂힌 나머지 글이 너무 길어졌음. 양해 바람. 

 

805_307_2243.jpg김준보-교수.jpg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자면, 김구가 김준보의 저서인 『토지개혁론요강』에 휘호까지 써준 바 있다고 나와 있는데, 김준보는 일제 식민지 시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조선총독부 광공국 사무관과 경기도 연천군 군수를 지낸 행정관료 출신으로 해방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며 농업경제학자로 활동했던 인물임. 농업경제학이나 통계학 등에서 학문적 업적이 대단해서 지금까지도 경제학계에서 기리고 있는 분이라고 하네. 식민지기 관료 생활을 하면서는 소작농을 보호하는 입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에서는 자문 활동을 하면서 '농어촌고리채법'을 제정해 농민의 짐을 덜어줬으며, 농민의 입장을 대변해 토지개혁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함. 그러나 식민지기 친일 경력 때문에 민간 차원에서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기도 했음. 국가 차원에서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수록되지 않았고. 

 

이 김준보의 손자가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해서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분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김준보의 논문을 바탕으로 쓴 책이 바로 얼마 전 한길사에서 나온 이 책임.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 - 쌀 금 돈의 붕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책. 강력하게 추천한다. 

 

8개의 댓글

12 일 전

DJ도 쉬는 시간에 노자 필사하며 자기 해석을 적곤 했다는데 정치인들에게는 경세론, 통치철학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은가보네.

2
12 일 전
@문틈

독서를 많이 하기로 유명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자에 관심이 많으셨나 보군요. 그런 것을 보면 확실히 경세론, 통치철학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기는 한가 봅니다. 저도 나중에 제대로 읽어봐야겠네요.

1
12 일 전
@기민주의

나는 장자를 주로 읽곤 했는데 확실히 개인주의적인 면모가 많음. 한비자가 법, 세, 술을 통치의 세 솥발로 말했듯 처세술도 정치가 아니냐 하면 뭐 아닐 건 없지만.. 통치철학 같지는 않았음.

 

차라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글에 '독자를 군주에 이입케하는' 장치가 대놓고 있으면 모를까 도덕경은 살짝 뜬구름 잡듯이 말해서(그게 매력이라곤 하지만) 장자와는 또 다르게 읽기에 어려움이 있더라구요. 흔히 노장이라고 한묶음 취급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다르다?

1
12 일 전
@문틈

제가 님처럼 그쪽으로 해박한 것은 아닙니다만, 노장사상이라고 하면 '무위자연'이라는 말도 있듯이 무언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강권이 없는 소규모 공동체들이 모여 사는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그래서 개인주의적인 면모가 많다는 말씀이 납득이 가는 듯도 하고요. 아나키즘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공동체, 사회적 협동조합 느낌입니다. 아무튼, 정치인들에게는 의외로 경세론, 통치철학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은 듯하다 하시니, 정치인들은 또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읽은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는 하네요. 정말 처세술이라는 측면에 주목했을 수도 있겠지만요.

1
12 일 전

좌파식 경제는 긍정하면서 우파적 전통주의는 지키려 한다라 이거 제3의 위치...

2
12 일 전
@김팽달

그 점에 주목해서 본다면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당시 시대적 상황이라든지, 우리나라가 처해 있던 상황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0
12 일 전
@기민주의

아니 빈말로 한게 아니고 실제로 그 시대에 일민주의 등이 주창되었으니까

1
12 일 전
@김팽달

'제3의 위치'라고 하면 극우 파시즘이나 민족사회주의(나치즘) 느낌이라서.... 물론, 일민주의는 족청(조선민족청년단)계를 이끌었던 이범석이나 안호상과 같이 독일 극우 민족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이승만 정부가 내세워야 할 이념으로서 제창했던 것이기는 하지요. 제3의 위치가 꼭 극우 파시즘이나 민족사회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고 더 넓은 개념이라고도 하고요.

 

그러나 '제3의 위치'라는 용어부터가 초기 파시즘에서 나온 말이고 파시즘과 분명하게 구분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아서 이를 이범석(일민주의)을 넘어 김구, 이승만이나 지청천(삼본주의 또는 민족사회주의), 조소앙(삼균주의), 안재홍(신민족주의), 김규식, 더 나아가 안창호(대공주의)에게까지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좌파식 경제는 긍정하면서 우파적 전통주의는 지키려 한다"는 부분에 주목한다면 어지간한 민족주의 계열은 다 걸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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