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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신성한 기생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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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살아있기(TO STAY ALIVE)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

번역 : 이미래

 

 

 

 

먼저, 고통에 대하여.

 

 “우주가 비명을 지른다. 그 벽의 콘크리트 벽돌은 폭력의 잔해를 담고 있다. 콘크리트가 비명을 지른다. 동물의 치아 사이에서 풀들이 신음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사람은 어떤가?”

 

 고통을 펼쳐놓은 것이 세상이다. 고통의 교차지점에 세상의 근원이 있이다. 모든 존재가 팽창이고 으깨짐이다. 모든 것들은 고통을 통해 존재가 된다. 존재하지 않음은 존재함이 되기까지 절망적인 발작 속에서 아픔과 함께 진동한다. 존재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성질을 간직한 채로 분열하고 복잡해지다가 어느 정도의 의식에 도달하고나면 비명을 생산한다. 시는 거기에서 나온다. 시보다 명료한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이 되기 위한 가장 첫 걸음은 그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고통 받는 일 말이다. 이 때 고통의 양식이, 고통을 사용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모든 고통은 좋은 것이다. 모든 고통은 유용하다. 모든 고통이 어떤 결실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고통 하나 하나가 우주이다.

 

 헨리는 한 살이다. 그는 바닥에 누워있다. 헨리의 기저귀는 더럽고 헨리는 큰 소리로 울고 있다. 주변을 서성이며 팬티와 브라를 찾고 있는 헨리 엄마의 하이힐 소리가 또각인다. 그녀는 저녁 약속을 위해 서두르고 있다. 똥에 뒤덮인 작은 헨리의 존재에 그녀는 몹시 화가 나있다. 그녀 역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헨리는 더더욱 크게 운다. 엄마는 집을 나가버린다. 헨리는 시인으로서의 커리어에 있어 아주 유리한 시작을 한 셈이다.

 

 마크는 열 살이다. 마크의 아버지는 암으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다. 목구멍에서 나온 튜브가 지나가고 정맥주사액이 뚝뚝 떨어지는 기계 장치 더미, 이것이 마크의 아빠이다. 남자의 눈만이 살아있다. 그 눈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담겨있다. 마크 역시 괴롭다. 마크 역시 두렵다. 마크는 아빠를 사랑한다. 동시에 마크는, 차라리 아빠가 죽어서 죄책감을 느끼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마크에게는 임무가 있다. 마크는 이 고통을 이제 내면에서 경작해내야 한다. 아주 특별하고 아주 비옥한 곡식, 이 가장 신성한 죄책감을.

 

 미셸은 열 다섯 살이다. 미셸은 여자애랑 뽀뽀를 해 본적이 한 번도 없다. 미셀은 실비에의 댄스 파트너가 되고 싶지만 실비에는 이미 파트리스와 춤을 추고 있다. 실비에의 춤 추는 몸은 행복을 뽐내는 듯 하다. 그 광경에 미셸은 얼어붙고 만다. 음악이 미셸의 가장 깊은 곳을 찔러온다. 거의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이다. 미셸은 이런 크기의 고통을 맛 본적이 한 번도 없다. 유년기를 포함해 이 순간까지 미셸은 줄곧 행복했다.

 

 괴로움으로 얼어붙은 심장과 음악의 압도적인 아름다움, 이 극단적 대비를 미셸은 이후로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미셸의 민감성이 형성된 것이다.

세상이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이유는 고통받는 일엔 아무런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시스템의 일부를 자유롭게 다룸으로 인해 얻어지는 마땅한 결과이다. 그걸 알아야 한다. 안다면 그 사실을 소리내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을 목표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통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고통이 우리에게 기입하는 상처 속에서 삶은 잔혹함이다가 교활함이기를 반복한다. 이 두가지 형태를 잘 알고 있으라. 이 형태를 잘 연구하라. 이 형태에 대한 완전한 앎을 얻어라. 무엇이 이 두 형태를 화합시키고 또 분리시키는지를 구별해내라. 그때서야 모순점들이 해결될 것이다. 당신의 목소리는 에너지와 폭에 있어 성장할 것이다. 현대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진짜 사랑을 체험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렇지만 사랑의 이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존재란 모든 이상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영원한 것이다. 존재는 엷어질 수도, 사라질 수도 없다. 따라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아주 명백한 불일치가 나타나며, 이 불일치는 고통의 아주 풍요로운 근원이 된다.

 

 사춘기 시절이 중요하다. 사춘기 시절을 보내는 동안 충분할 정도로 이상적이고, 고귀하며, 완전한 감각의 사랑을 계발시켰다면 당신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여자를 사귀지 못하는 타입이라면 (내성적이어서든, 못생겨서든, 기타등등 다른 이유에서든) 여성잡지를 읽어보라. 같은 크기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부재라는 그 목적지로 곧장 향하라. 자기혐오를 계발하라. 자기를 혐오하고 남들을 경멸하기. 타인을 혐오하고 자신을 경멸하기. 이 모든 것들을 다 뒤섞어라. 합성물을 만들어라. 삶의 소란과 격정 속에서, 항상 루저로 남아라. 우주는 마치 클럽과도 같다. 셀 수 없는 낙담과 실망을 축적하라. 시인이 되기를 배운다는 것은 삶을 사는 법을 다시 배우지 않는(unlearn) 것과도 같다.

 

 당신의 과거를 사랑하거나 싫어해라. 하지만 잊으려고 하지는 말아라.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 완전한 앎을 습득해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더 깊은 곳에 있는 자아는 당신으로부터 분리되고, 태양 너머로 미끄러져 나갈 것이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몸은 현세에 남아 부풀고, 기포가 생기고, 염증이 나면서 새로운 고통을 위해 준비될 것이다.

 

 삶은 마치 여러번의 파괴 시험과도 같다. 첫번째 것을 통과하고, 나중 것들은 실패하라. 삶을 망치되, 너무 많이 망치지는 말아라. 그리고 괴로워해라, 항상 괴로워해라. 온 몸의 땀구멍 하나하나로 고통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주의 모든 파편 하나 하나가 당신에게 사적인 상처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산 채로 있어야 한다-적어도 얼마 동안은 말이다. 소심함은 경시될만한 것이 아니다. 소심함만이 내적 풍요로움의 단독적 원천이라고들 한다. 이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상, 의지와 실제 행동 사이의 주저하는 순간 속에서 흥미로운 정신적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순간들을 겪지 않는 인간은 동물보다 조금 더 나아간 정도에 그칠 뿐이다. 소심함은 시인으로서 아주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당신의 내면에 삶을 향한 아주 깊숙한 적의를 계발하라. 무엇이 되었든 진정으로 예술적인 창작에는 이 적의가 필요하다. 이따금 삶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적의가 너무 멀리 가서는 안된다,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어선 안된다. 설사 적의를 전혀 표출하지 않고 감추기로 결정했더라도 말이다. 항상 고통이라는 기원으로 돌아오라.

 

 당신이 타인의 마음에 겁에 질린 연민과 경멸이 뒤섞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당신은 잘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당신은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말로 표현하기(TO ARTICULATE)

 

 “에너지는 실행되고 시간 위에 놓일 때 움직임이 된다”

 

 고통을 잘 구성된 구조를 통해 말로 표현해내는 데 실패한다면 당신은 끝난 셈이다. 뭔가를 써내려갈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고통이 당신의 전체를, 안에서부터 삼켜버릴 것이다. 구조를 갖추는 것이 자살을 피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자살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보들레르가 스물 네 살에 했던 자살시도에 정말로 성공했다고 상상해보라. 구조의 힘을 믿어라. 고대 운율학 역시 같은 마음으로 믿어라. 운문화는 내면의 생명력을 해방시키는 아주 강력한 수단이다. 새로운 형식을 발명해야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라. 새로운 형식이란 드물다. 백 년에 하나 정도 나와도 충분히 밭은 호흡이다. 뭔가에 있어 최초라고 최고의 시인인 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시란 언어의 개정이 아니다. 말들이란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새로운 형식의 대부분은 존재했던 형식으로부터 천천히 일탈하는 와중에 놓인 작은 스크래치로부터 발생한다. 도구란 조금씩 개조되면서 가벼운 수정을

거쳐나간다. 이 모든 것이 조합된 효과인 새로움이라는 것은 가장 끝까지 갔을 때, 마침내 글이 쓰여졌을때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치 종의 진화와 비견할만하다. 당신은 처음에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방출한다. 그리고 자주 당신은 이 비명만을 지르던 상태로 퇴행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건 정상이다. 시란, 실제로는 명확하게 표현된 언어들보다 더 날것이긴 하지만 또 엄청나게 그렇지는 않다. 필요를 느낄 때마다 매번 불확실한 비명과 울음 속으로 몸을 던져라. 그건 마치 젊어지는 목욕과도 같다. 하지만 잊지 말아라. 이따금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당신은 죽을 것이다. 유기체에는 한계가 있다.

 

 이 고통의 가장 정점에서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쓸 수 있다고 느낀다면, 한 번 시도는 해보라. 여지는 남겨두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런 글은 별로이다. 절대로 일하지 말아라. 시쓰기는 일이 아니다. 시쓰기는 황홀(charge)이다. 만약 어떤 특정한 방식의 글쓰기(이를테면 아주 현학적인 글이라든지)가 힘들게 느껴지면, 단념하라. 그런 식의 노력은 아무런 보상도 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무감각증을 극복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만큼은 포기해선 안된다. 그건 절대적으로 필요한 종류의 노력이다. 형식에 있어서라면, 자신을 모순하기를 주저하지 말아라. 분열하라, 필요한 만큼 방향을 바꾸어라. 일정한 톤과 색채를 갖추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라. 당신이 좋든 싫든, 당신다움은 어차피 존재한다.

 

 당신에게 약간의 평정상태를 주선해줄만한 것이 있다면 절대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지 말아라. 그런 것들을 붙잡는다고 해도 어차피 당신은 행복이랑은 관계 없는 인간이다. 당신도 지금껏 살았으니 이걸 알고 있다. 하지만 행복의 시뮬라크르라고 할지라도 그걸 붙잡을 수만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그렇게 해라. 어떻든간에 그게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의 존재는 고통의 조직에 불과하다. 지금 당신은 그 고통을 말이 되는 형식으로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 당신의 목적은, 그걸 해볼 수 있을만큼 오래 사는 것이다.

 

 

 

 

 

 

살아남기(TO SURVIVE)

 

 죽은 시인은 글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단순한 논리는 이따금 잘 붙들고 있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창작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조금 오래 놓여있었다면 더 그렇다. 이런 때에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점점 쓸모없게 느껴질 것이다. 어찌됐든 당신은 글쓰기를 하지 않고 있는 중일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답 밖에 할 수가 없다. 궁극적으로, 당신은 이 상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스스로를 아주 자세히, 아주 솔직히 살펴본다면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간 사람들에게, 이상한 일들이 벌어져 왔다.

 

 당신이 더이상 글을 쓰지 않고 있다면 아마 그것은 형식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테마의 변화이거나, 아니면 둘다이거나. 아니 어쩌면, 당신의 창작 생명이 끝나버리려는 전조이거나. 하지만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 당신은 무엇이 당신을 글쓰기의 충동으로 밀어넣는지를 절대로 완전하게 알 수가 없다. 답에 다가가기만 하는 정도인, 어떤 모순되는 형태로서만 당신은 그걸 알 수 있다. 에고티즘인가, 헌신인가? 잔인함인가, 연민인가? 그 어떤 가능성도 논의될 수 있다. 결국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마치 알고 있었다는 척 행동하지도 말라. 당신의 무지 앞에, 당신의 미스테리한 일부 앞에 겸손하고 정직하게 남아라.

 

 오래 사는 시인들이 더 많은 작품을 남길 뿐 아니라, 중장년은 어떤 특수한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과정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 장소를 모르는 채로 남는 건 잘못이다.

 

 말한 김에, 살아남는 것은 매우 매우 어렵다. 페소아의 전략을 차용하는 것도 생각해볼만하다. 작은 직업을 찾고, 아무것도 출판하지 말고, 그리고 죽음을 평화롭게 기다리는 것. 하지만 이런 삶은 실제로는 중대한 어려움들을 맞닥뜨린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감각, 내가 있을 곳에 있지 않다는 느낌, 내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등... 이 모든 것이 아주 빠르게 참을 수 없이 힘들어질 것이다. 술을 안마시기가 힘들 것이다. 결국은, 기다림의 끝에 무감각과 돌이킬 수 없는 창작의 불모 상태가 오고, 그에 이어 냉소와 신랄함만이 남는다. 단점이 많긴 하지만 유일한 해결책인 다른 한 가지가 있긴 하다. 당신을 진단하고 당신에게 병가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의사라는 사람을 잊지 말아라. 그러나 정신병원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진다면 그건 너무 파괴적이다. 이 수단은 파산 상태의 해결책으로서만, 가장 마지막 휴양지로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활용할 수만 있다면 복지 체계를 최대한 활용해야한다. 당신보다 잘사는 친구들의 경제적 도움도 가능하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말아라. 

 

 

 

 

 

 

시인은 신성한 기생충이다(The poet is a sacred parasite)

 

 시인은 신성한 기생충이나 다름없다. 마치 부패하는 부유한 사회의 몸뚱어리 위에서 번영하는 고대 이집트의 왕쇠똥구리처럼. 하지만 시인은 검소하고 강인한 공동체들의 중심에도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싸울 필요는 없다. 싸움은 시인이 아니라 권투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그래도 출판은 조금씩이라고 하는 게 필요하다. 이건 사후에 받을 인정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당신이 최소한의 양이라도 출판하지 않으면 (그저 그런 잡지에 실리는, 단지 한 줌 정도 밖에 안되는 텍스트라 할지라도) 그게 없다면, 당신이 살아있었을 때 아무도 당신과 당신의 작품을 몰랐듯이 후세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당신을 발견할 수 없다. 아주 완벽한 천재라고 할지라도 흔적을 남겨야 한다. 나머지는 문학 고고학자가 발굴하도록 남겨두면 된다.

 

 실패할 수도 있다. 자주 실패하니까.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말을 최소한 하루에 한 번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연대기를 연구하는 일이 유용할 수도 있다. 이건 어떤 종류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도와준다. 절대 잊지 말아라, 가장 일반적인 룰은, 빈곤과 가난의 문제에 있어서 좋은 해결책은 원래 없다는 것이다. 나쁜 해결책들이야 많지만 말이다.

 

 당신이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보통 그렇게 대단하진 않다. 살 수 있는 곳에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지적 죽음을 가져다줄 능력을 갖춘, 시끄러운 이웃들 주변에 사는 일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도록 해봐라.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던 경험은 그 자체로 사회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이므로 나중에 작품을 쓸 때 좋은 지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하지만 주변부에 가라앉은 채로 보내는 가난의 시기 역시 다른 종류의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는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해보는 게 좋다. 

 

 삶의 다른 조건들 -예를 들어 화목하고 평화로운 성생활, 결혼, 그리고 자녀들 등-은 이롭기도 하고 보람있는 일이다. 하지만 예술이 연루되면 이것들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거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영토나 다름없다.

 

 높은 확률로 당신은 적의와 고뇌 사이에서 이리저리 튕겨질 것이다. 적의를 품든 고뇌에 빠지든 술이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러는 와중에 잠깐이라도 회복의 순간들을 가지는 것이다. 이 순간들이 당신의 작품 세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 순간들은 짧을 것이다, 그러니 붙잡는 데 노력을 기울여라.

 

 

 

 

 

 

행복하지 못할까 두려워 하지 말아라.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Have no fear of happiness; it does not exist

 

 지식을 단지 지식 자체를 위해 추구하지 말아라. 시에 있어서 감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솟아나는 게 아닌 모든 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여기에서 ‘감정’이라는 단어는 물론 가장 넓은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어떤 감정들은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를테면 이상함이라는 감정이 그렇다.) 감정은 캐주얼한 질서를 폐지한다. 감정에는 사물들을 사물 그대로 지각할 수 있도록 돕는 힘이 있다. 그렇게 해서 지각해낸 것들을 운반하는 것이 모든 시의 목표이다.

 

 철학과 시가 동시에 공유하는 이 목표는 둘을 잇는 비밀스러운 공범 관계의 원천이다. 철학적인 시를 쓴다고 이걸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는 세상을 지적으로 재구축한 필터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직관적인 방식으로 리얼리티를 발견해내야 한다. 시적인 형태에 철학을 담는 것은 거의 대부분 형편없는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철학의 가장 진지하고 열성적인 독자들은 시인들일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일부 철학자들에게는 시에 감추어진 진실을 알아본 후에 바깥으로 끄집어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시 속에서 철학자들은 직접적인 명상 만큼이나 (그리고 존재한 철학 조류들 안에서보다 훨씬 더 )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영감을 얻는다.

 

 철학자들을 존경하라. 베끼지 말아라. 당신의 길은 불행하게도 철학과는 다른 것이다. 당신의 길은 신경증과 구분하기 힘든 무엇이다. 시적 경험과 신경증의 경험이라는 두 가지 길은, 서로 교차하다가 대개 합쳐져 하나의 길이 되기도 한다. 신경증의 혈류 안에 시적 원석이 용해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당신이 뭘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것 말고 다른 방식은 없다. 당신이 몰두하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작업은 당신을 결국 고뇌에 절고 무감각에 집어삼켜진, 비참한 몰골로 산산히 부서트릴 것이다. 하지만, 반복하는데, 다른 길은 없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지점을 만나야 한다. 고리를 부수어 내야 한다. 그리고 추락해 박살이 나기 전에 시를 써라. 당신은 방대한 공간을 힐긋거렸을 것이다. 모든 위대한 열정은 영원에 대한 전망을 열어준다.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듯이, 모든 위대한 열정은 우리를 진실의 공간으로 이끈다. 다른 공간으로, 아주 고통스러운 공간으로, 하지만 거기에서는 앞이 멀리, 또 맑게 보인다. 정화된 사물들이 가장 또렷하게 그들의 명석한 진실을 드러낸다.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이 서로 통함을 믿어라.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목적은 당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목적 역시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사회가 사용할 무기는 무관심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똑같은 태도로 상대해서는 안된다. 공격해라! 모든 사회들이 약점을, 아픈 곳을 가지고 있다.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아래로 꾹 세게 눌러라.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다뤄라. 보이는 경치의 반대편을 다루어라. 병, 고뇌, 추함에 매달려라. 죽음과 망각에 대해 말하라. 질투를, 무관심을, 절망을, 사랑의 부재를 말하라. 비천해져라. 그러면 당신은 진실이 된다. 

 

 아무 것에도 속하지 말아라. 혹은 속했다가 그 즉시 배신해라. 그 어떤 이론적 책임도 당신을 오래 붙들어둬선 안된다. 당신의 임무란 무엇보다 제안하는 것도 건설하는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다면 해봐도 좋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는 모순들에 부딪히면, 막혔다고 말해라. 왜냐하면 당신의 가장 뜻깊은 임무는 진실을 파고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덤을 파헤치는 자이면서 동시에 시체이다. 당신이 이 사회의 시체이다. 사회의 시체에 대한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모든 문제들이 똑같은 양으로 당신의 책임이다. 세상을 포용해라, 당신은 인간 쓰레기다! 무죄와 유죄가 무엇인지를 정의해라. 처음에는 당신 내부로부터. 이렇게 하면 당신의 가이드가 준비될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그들의 변명에 대해 숙고해봐라. 그리고 가장 공정하게 평가해라. 자기 자신을 빼놓지 말아라. 아무도 빼놓지 말아라. 당신은 풍부한 사람이다. 당신은 선과 악을 알고 있다. 그 둘을 구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라. 우리 시대의 낙인과도 같은, 관용이라는 덫에 걸리지 말아라. 시에는 명확한 도덕적 진실을 수립하는 힘이 있다. 온 힘을 다해 자유를 증오하라.

 

 진실은 수치스럽다. 하지만 진실 없이는 아무것도 의미없다. 세상에 대한 정직하고 순진한 시각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작품이다. 이 능력에 비하면 독창적인 것은 별 볼일 없는 재능이다. 독창적이 되려고 열중하지 말아라. 작품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당신의 결점들이 쌓인 자리에서 독창성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까 더도 덜도 말고 단순히 진실을 말하기만 하면 된다.

 

 진실을 사랑하면서 세상을 함께 사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선택했다. 문제는 이제 선택한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 용기를 계속 지속하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그렇다고 당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 반대로, 당신은 몹시도 혼자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과 동맹을 맺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죽는다.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는 자살이다.

 

 진실에 다가가면서 당신의 고독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 커다란 전당은 웅장하고 멋지지만 폐허이다. 당신은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빈 홀을 걷고 있다. 공간의 분위기는 명쾌하고 맑으며 불변의 느낌을 준다. 모든 사물은 마치 조각상처럼 느껴진다. 이따금 거기에서 당신은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맑고 또렷해 흐느끼고야 만다. 당신은 편안한 무지의 안개 속으로 다시 뒤돌아 걸어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안다.

 

 계속 해라. 두려움을 갖지 말아라. 가장 최악의 지점은 이미 지나갔다. 확실하게 하자면, 삶은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관점에서 보자. 당신은 어차피 삶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이것을 기억해라: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당신은 이제 영원과 마주보고 있다.

2개의 댓글

아니 근데 님 언제 레벨 주황됐음

 

개드립 직원임?ㄷㄷ

0
2021.10.27
@마법부오러사무국장

월급도 줌 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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