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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천주교의 차이점. 절대 기준의 모호성


아래 법륜스님의 대화에서
 
절대적 기준 제시
=====
이 앞에 바구니 두개와 접시가 있는데 보이십니까?
그럼 제가 질문자에게 여쭤볼 테니까 본인 생각대로 얘기하세요.
가운데에 있는 노란 바구니와 흰 바구니를 봤을 때 노란 바구니가 큽니까? 작습니까?

크죠.

그럼 이 노란 바구니와 이 모래를 담아놓은 그릇하고 비교하면 노란 바구니는 커요? 작아요?

작죠

질문자는 지금 이 바구니를 두고 한 번은 크다고 했고 한 번은 작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바구니 하나만 두고 생각했을 때 이 바구니는 큽니까? 작습니까?

중간 사이즈입니다. (청중들 웃음)
===
우리의 삶의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해석하게 된다. 이를 종교는 본다고 한다.
도덕적 상대주의의 시작. 우리의 판단은 위에서 보듯이 자신의 경험과 습득에 의한 애매모호한 상황에 따라 뒤바뀌는 원칙, 즉, 상대주의를 가지고있고 불교는 이를 통하여 자신의논리로 사람들을이끌어낸다. 따라서 예수님은 누구도 판단하지 말라 하셨으며, 
절대적 판단 기준 (심판의 권한)은 하느님 그 자신에게 있다 하셨다.  

우리가 중간 사이즈라고 하든지, 크다고 하든지, 작다고 하든지 간에,
머리 속에 어떤 다른 것 하나를 연상해서 그것과 비교해서
”크다“ 혹은 ”작다“ 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무언가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을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한다면 상대적으로 크고, 상대적으로 작고, 상대적으로 중간사이즈이지요.

크다고 할 때에는 다른 작은 것을 연상한 것이고,
작다고 할 때에는 다른 큰 것을 연상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인식은 상대적인 것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
상대주의 세뇌 주장이 반복 된다. 개인이 소유한 상대주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불가피한 것이지만 만물을 주재하는 창조주의 절대적 옳음의 법칙은 변함없는 불변임을 기억해야 흔들림을 방지할수있다. 여기가 분기점이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보지 않은, 절대적인 차원에서 이 바구니 자체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개인의 관점에서 해답을 요구한다. 가톨릭은개인관점의해답이아닌 하느님의 뜻과 일차하고 그에 참여하는 종교이므로 정확하게 약점을 파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걸림.)

====
인간의 상대주의를 해설 한다. 이는 불교의 중심인 인간중심 편의주의 및 상대주의 주장의 핵심이다. 가톨릭은 신의객관에 의존하는 개인의종교이며 개인의객관이아닌 신의 객관을 알고 참여하며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는종교임을 기억하고 아래의 단락을 읽어 보자.


존재하지 않는다니요? 이렇게 눈 앞에 있는데요. (청중들 웃음) 그럴 때 언어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처음에 질문이 ”큽니까, 작습니까” 였죠? 질문의 언어를 빌리는 방법으로는“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닐 비(非)자를 써서 ‘비대비소’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불(不)자를 써서 ‘불대불소’라고 할 수도 있어요.
만약 상대적인 용어를 하나도 안 쓰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한 물건”이라고 합니다. 즉,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그것은 그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그것은 그것일 뿐이지 큰 것도, 작은 것도,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새 것도, 헌 것도,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선적인 언어라고 합니다. 
위의 말은 철저히 한 개인의 선을 강조한다. 개인의 선 즉 옳음을 가진이들에게 예수께서는 나는 의인이아니라 죄은을 데리러왔다고 이야기 하였다.

이하는 그들의 종교적 사유를 논한다. 좋게말해 상대주의 나쁘게 말하면 줏대, 기준 없음이다. 어디에도 개인 이익과 생존을 위해 영합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에게 배반당하고 돌아가셨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는 글로 말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의 철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공(空)이다’ 라고 표현합니다.‘공’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공’이라는 말은, 누군가가 ”크다“고 한다면 ”큰 것이 아니다“,
”작다“고 한다면 ”작은 것이 아니다“, ”새것이다“ 라고 한다면 ”새것도 아니다“,”헌 것이다“ 라고 한다면 ”헌 것도 아니“라는 뜻이예요.

‘실상(實相)’ 즉, 실제 모습이 어떤가, 즉 진실상을 표현할 때 이런 여러 가지 언어표현을 사용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언어마저도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옛날에 어떤 제자가 산 넘고 물 건너 스승을 찾아와서

'스승님께 여쭤보면 바로 깨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인사를 하고 질문을 해야지 하고 문을 열었는데,

두 발이 다 들어가기도 전에 스승이 벽력같이 고함을 쳤어요.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고요. 쉽게 얘기하면 “너 누구냐?” 이 말이에요.

그렇게 물으니 그 제자는 대답을 못했어요. 만약 금강경 구절을 물었거나, 법화경 구절을 물었거나,

교리를 물었으면 청산유수같이 대답을 했을 텐데 말이에요.

이럴 때 “법륜입니다”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은 제 이름이죠.

그렇지만 이름을 물은 게 아니잖아요. “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면 “법륜입니다”가 맞았지만

“너 누구냐?” 라고 물었지요. 또 “스님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직업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직업을 물은 게 아니잖아요.

이런 것 같이 그 제자는 “너 누구냐?” 하고 물으니까 딱 막혀버렸어요.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요.

그래서 이 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어요.

내가 어떤 것을 물을 때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묻는다는 것 자체가 웃긴 것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 고생을 하고 찾아와서 방문을 열고도 한 발도 못 들어가고 멍하게 있다가

그냥 문을 닫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화두라고 합니다. ‘이게 무엇인가? (What is this?)'라는 겁니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Who am I?)'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7년을 참구하다가 다시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절을 하면서 “스승님, 설령 한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르듯이 평화 자체인 본인께서 성령으로 우리 자신 안에 몸안에 우리 영안에 머무르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너스스로도 예수그리스도 자신인 평화와평온함안정감안에 머무르라고하셨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버리는것, 나를 아는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버리고 잊음으로 평화와 평온함안에 머무르는 길을 걷는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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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스승은 제자가 이미 이 본질을 깨우친 줄 알기에 인가를 해주었습니다.

금강경의 그 글귀는 이런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우리가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있니 없니 하는 것은 다 주관 즉, 자기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긴지, 짧은지, 새것인지, 헌것인지, 넓은지, 좁은지 하는 것을 객관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객관이라고 생각하는 ‘크다’나 ‘작다’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인식하는 문제입니다.

‘크다’고 인식하기도 하고, ‘작다’고 인식하기도, ‘중간크기이다’라고 인식하기도 하는 등

인식 상에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존재 자체는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고,

새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헌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네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우리는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내거다, 네거다, 새거다, 헌거다,

더럽다, 깨끗하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를 두고도 사람마다, 같은 사람이라도 경우에 따라 인식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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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개인의 뜻으로 다시금 기준을 만들어내며 개인의객관화를강조하지만 신의 객관을 강조하며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는 한 개인일 뿐이다. 이로서 불교와 가톨릭은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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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는 주관을 객관화시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식을 할 때 이것을 ‘크다’고 인식을 했다고 합시다.

우리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크다고 인식했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이것 자체가 크다‘,

’이것이 크기 때문에 크다고 내가 인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주관을 객관화시킨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인식한 것을 다른 사람은 달리 인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실제가 그렇다’고 자기는 알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만약 눈에 빨간 안경을 끼고 저 흰 벽을 바라보면 저 벽이 빨갛게 보이겠죠?

그럴 때 나는 ‘저 벽 색깔이 붉다’고 착각을 합니다.

사실은 저 벽 색깔이 빨갛다고 하면 안 되고 ‘내 눈에 빨갛게 보였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죠.

그런데 나는 ‘저 벽 색깔이 붉기 때문에 내가 붉게 인식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푸른 색깔의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이 저 벽을 보면 “저 벽은 푸르다”고 할 거 아닙니까?

‘상‘이라는 것, 즉 ’모양 짓는 것‘은 자기가 주관적으로 인식한 것을

객관적으로 바르게 인식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즉, 주관을 개관화시키는 것을 ‘상을 짓는다’고 합니다. ‘너를 보니까 내 감정이 나쁘다’인데

‘네가 나쁜 놈이다’라고 하는 거에요.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인데,

그 사람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단 말이에요.

이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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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옳다하는것 그르다고하는것. 인간은 성령을통해 평화와평온함안에 머무는것으로인해 그지혜를받는다. 지혜란 성령의 신의 가르치는사랑이기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받고 거기에 참여한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은 무릇 내가 지은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다는 뜻입니다.

이때 허망하다는 것을 허무하다고 이해하면 안돼요.

‘허망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 ‘진실상이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실제가 아니다’, ‘환영이다’ 라는 말입니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는 만약 모든 상은 상이 아님을 안다면

즉, 크다 작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 하는 것을 크다 할 것도 없고,

작다 할 것도 없고, 옳다고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것도 없고, 맞다고 할 것도 없고,

틀리다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이는 부처를 아는 것이다.

즉, 그것이 바로 부처이고 깨달음이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물잔이라고 하죠.

어떤 것은 커피잔, 어떤 것은 포도주잔, 소주잔, 정종잔, 이렇게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명칭이 붙으면 정종잔에는 정종을 마셔야 하고, 물잔으로는 물을 마셔야 하고,

커피잔에는 커피를 마셔야 하잖아요.

그래서 커피 좀 달라고 하면 “아이고, 우리 집에 커피잔에 없어서” 이렇게 말한단 말이에요.

이것은 상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즉, 이 존재는 커피잔, 물잔으로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것을 놔버리면 무엇이든 담을 수 있습니다.

물잔이라서 물을 담는 것이 아니고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됩니다.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되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잔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되고,

애가 오줌을 쌀 때 얼른 받으면 요강이 되고(청중들 웃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걸림 없이 자유로워지잖아요.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불교의 핵심사상인

‘공(空)’사상을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한 것입니다.

===============
위의 이야기는 걸림없는 자유가 아니라 오용이며 또한, 남용이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이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며 편하게 살아가리라는데에는 보는바와같이 의심의여지가 없지만 이를 진리의 가르침이라 하기에는 어폐가 많다. 

=============
교회의기준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어디에 있는가? 가톨릭사회교리서는? 십계명은? 우리는도덕적 상대주의자가 아닌 하나된교희의교도권과 그 엄정한 해석 아래에 모두 하나 아니던가? 우리의 부족함이 있다 하여도 말이다.
깨달음을 얻어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당신은 불교 신자지이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
그러니까 여러분들과 즉문즉설을 할 때에도 바탕에 이런 관점이 잡혀있는 거예요.

“애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안 되지 않느냐“ 고 하는데

‘안되지 않느냐’하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상을 짓는 것을 놓아버리면, 자유로워진다는 얘기예요.

“그렇다면 여기 잔에다가 아무거나 받아먹어도 되나요?” 한다면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해보세요.

우리 집에 소주잔도 있고 커피잔도 있고 물잔도 있고 포도주잔도 있는데도

굳이 이거 하나만 가지고 밥도 여기다 먹고, 국도 여기다 먹고 하면서 ‘모두 공이니까’ 하는 것은

또 공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공이라고 하는 상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활 속에서는 이것을 물잔으로 쓸 때에는 그냥 물잔으로 쓰는 거예요.

다른 것은 다른 데에 쓸 데가 있으니까요. 없으면 이걸로 커피잔을 써도 되고,

포도주잔으로도 써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울 가는 길은 어느 방향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본다면

어느 방향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무유정법(無有定法)

즉, ‘어느 방향이라고 정해놓은 법은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서울 가는 방향이 없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정해진 것이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말일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이라는 말은 ‘텅 비었다’, ‘없다’고 표현하지만 없다는 뜻이 아니고, 있고 없음을 넘어선 의미예요.

인천 사람이 물어보면 “동쪽으로 가세요” 얘기하겠죠, 그것을 누가 듣고 ‘동쪽으로 가면 되겠구나,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야’라고 생각하고 춘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을 때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그 사람은 동해 바다에 빠져 죽어요.

춘천 사람이 물으면 “서쪽으로 가세요”, 수원사람이 물으면 “북쪽으로 가세요” 해야죠.

그렇게 해서 제법이 공한 줄을 알면,

인연을 따라 그 사람의 위치와 시공간이 정해지면 정확하게 동이면 동, 서이면 서, 남이면 남,

북이면 북, 동북이면 동북, 서북이면 서북으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또 정해진다고 해서 절대화시켜도 안 되고요. 언어를 절대화시키면 상을 지은 것입니다.

‘절대화시키면 안된다’, ‘공이다‘라고 해서 아무 것도 방향을 잡을 수 없다든지,

잡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다시 공에 빠진 거예요. 이것을 ’공상을 지었다‘고 말해요.

그래서 ’어느 방향이라고 특정한 방향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은 동시에

인연을 따라서 ’어느 방향이라도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렇게나가 아니라 인연을 따라서 말이에요.

무언가가 상을 지은 것을 불교용어로 ‘색’이라고 하고, 상을 짓지 않는 것을 ‘공’이라고 해서,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죠.

여기서 ’색즉시공‘이라고 한번만 말하면 되지, 왜 똑같은 말을 바꿔서 ’공즉시색‘이라고 또 할까요?

수학에서 ’A=B임을 증명하라‘고 하면

먼저 ’A이면 B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는 것을 증명하면 ‘A는 B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다음 ‘B이면 A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면 ’A는 B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

고로

1), 2)에서 ’A는 B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고로

‘A=B이다’라고 하는 거죠.

달리 말하면, 두 개가 같다는 것이 성립하려면, 그 역도 성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라고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은,

즉 현상과 본질이 동시에 어우러져있는 것입니다.

현상은 엉터리이고 본질만이 진실이라고 보는 것은 또 진실의 절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크냐 작으냐”고 물었을 때,

항상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하면 안 돼요.

구체적인 조건에서 물어봤을 때에는 “크다”고 얘기해야 됩니다.

이것이 ‘색’이예요. 이 상황, 이 인연에서는 크다, 이 인연에서는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인연을 떠나서 절대적으로 물으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다” 또는 “공이다” 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원리가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거예요.

도가 트면 윤리 도덕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늘 윤리, 도덕을 맞춰서 살지만 때로는 윤리나 도덕이 인간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할 때에는 과감하게 윤리, 도덕을 부정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인간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윤리나 도덕이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예요.

중심은 인간을 행복하게, 자유롭게 하는 데에 있고 그 길로 가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이 있는 것인데,

지금 방법을 절대화시키고 거기에 인간을 끼워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피부가 검은지 흰지로 차별했지만 지금은 피부 빛깔로 인간을 차별할 수 없습니다.

남녀는 성별로 차별할 수 없고요. 신체가 건강한지 장애가 있는지에 따라 차별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성적 취향으로 차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런 문제는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자꾸 카르마, 자신의 업식,

윤리관, 관습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

차별이 아니라 영혼이 사후천국으로 가느냐? 아니면 타락하여 자기 편의대로 생각하여 밑바닥으로 가느냐의 문제인데 그걸 고작 차별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가?
자유? 그런 자유를 얻어 세상살면 자기 편한대로 모든게 해석되는데 죄책감이라는게 있을수 있겠는가? 자기가 옳은 참 진리와 그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타인의 감정적 물리적 고통과 그들의 압제가 이 논리 앞에서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7개의 댓글

2021.01.29

ㄹㅇ 보면서 불편한 이유는 바로 그거지

 

시발 그게 되면 통계는 왜 있는거냐 ㅋㅋㅋㅋㅋ 불교 존나 편하네

0
2021.01.29
@micalles

뭔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괴로움의 원인이 어리석음임

괴롭지 않을려면 진실에 깨어있어야 하는거임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한번에 안변함 초등학생만 되도 몇 번 반복해야됨

그래서 도 닦는다는 말이 나옴거임

그게 싫다면 생긴데로 사는거지 뭐

0
2021.01.29

법륜스님도 그렇고, 해당 원글 올린 개붕이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기본적인 골자는 '누군가의 판단에 나를 맡기지 말고, 나는 나라는 걸 명심해라' 였음

어머니도 그렇고, 딸도 그렇고 두 사람 다 불교 신자라서 스님이 하는 말에 아 ㄹㅇㅋㅋ 한건가? 아니거든

이건 불교가 아니라 무교인 사람이라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말이었기에

댓글 쓴 개붕이들도 '와 좋은 말이네 ㄹㅇㅋㅋ' 하고 넘어갈 수 있었음

 

근데 너는 '인간의 판단? 그런걸 믿음?? 주님이 판단할거임 ㅅㄱ' 라면서 '느그 종교'식으로 반박한거임

그래 뭐 ㅋㅋ 신학으로 반박한건 그렇다 치는데, 그래서? 어쩌라는건지 모르겠음 ㅋㅋ 느그 교회 나오라고?

기독교인 사람에게는 '아이고 그럼요 당연하죠' 하고 넘어가겠지만, 교회에 관심없는 사람은 그러질 못함

무교인 사람에게 주님이 판단할거라고 하면 대체로 '어.. 그래..^^;; 교회 열심히 다녔네..' 하고 뒷말을 흐릴게 분명하거든

 

너야 좋은 의미로 말했겠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감정적, 물리적 고통을 '주님의 말씀'으로 땡치는 압제임

그리고 막줄에 '영혼이 사후천국', '타락하여 밑바닥으로 가느냐의 문제' 이거,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소리잖음 ㅋㅋ

 

타인에게 '이제 너 지옥갈거임 ㅅㄱ~' 하는 언어적 폭력을 자행하는데 무슨 신자야 ㅋㅋ

 

이런 글은 '반박'이 아니라 그냥 전도임 ㅇㅋ?

전도할거면 마스크 낀 상태로 번화가 가서 하시길 바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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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반박은 지랄ㅋㅋㅋ 언제까지 사후세계 드립으로 사람들을 갈아먹을 것인지 참 딱하긴 한데, 사후세계나 규명하고 오라고 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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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코로나나 옮기지마 더러운 예수 좆빠는 년아

1
2021.01.29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

0
2021.01.29

난 지옥갈테니까 불교편 할래 ㅅㄱ 천국가면 너같은 사람 우글우글하겠네 그곳이 나에겐 곧 지옥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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