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려전쟁사 - 거란전쟁 (2) 1차 거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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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gdrip.net/52911268 고려전쟁사 - 거란전쟁 (1) 전쟁전야

 

 

소손녕의 침공

 

 

  거란.jpg

<거란군>

 

 

  9938월 소손녕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는 군을 편성해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 각기 상군, 중군, 하군을 지휘하게 한다. 박양유와 서희는 안주에서 귀주 사이에 주둔하면서 선발부대를 북상시켰다. 한편 성종은 이들을 파견한 다음 달 직접 안주까지 왔다. 10월에 고려군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자 소손녕도 남하한다.

  두 나라의 군대는 귀주에서 조금 못 미친 봉산성에서 맞닥뜨렸다. 이 최초의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고 급사중 윤서안이 사로잡힌다.

 

 

  봉산성 전투 당시 전역.jpg

<봉산성 전투 거란전쟁 전역 1 이해를 돕기 위해 표시했는데 정확한 위치는 장담(...)하지 못한다. >

 

  고려전쟁사를 보면 거란과 고려군이 첫 전투를 치른 곳이 봉산이란 사실은 의왼데 봉산성은 낮고 평지에 위치했고 봉산성에서 하룻길이면 요충지인 귀주성이 있었다. 물론 이 일대는 아직 행정이 제대로 미치지 않아 정비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봉산을 택할 전술적 이유는 없었다. 즉 고려가 좋아서 선택한 장소가 아니란 소리가 된다. 왜 고려는 유리한 위치에서 기다리지 않았을까? 귀주로 진군하다 거란군에 차단된걸까?

  원치 않는 장소에서 적과 조우한 것은 고려가 서둘렀다는 증거가 된다. 선발대가 서두르는 이유는 본대가 전쟁을 치를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고 박양유와 서희가 이끄는 고려군이 북상한 후 성종이 안주에 온것도 축차적으로 군을 편성하여 투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려는 충분한 대항군을 형성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최대한 북쪽에서 적을 맞아 지연시켜야 했다.

  고려는 전쟁준비가 안되었다. 봉산에서 패한 부대는 선발대였음에도 선발대가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종은 당장 서경으로 되돌아가고 박양유와 서희의 부대도 회군한다.

 

 

고려 조정의 혼란

 

 

  서경에서 고려의 중신들은 대책회의가 벌어졌다. 우습게도 이 회의의 주제는 어떻게 싸울것이냐가 아닌 어떻게 항복할것인가 였다. 무조건 항복과 절령 이북을 주고 강화하자라는 안이 있었는데 절령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이며 개경에서 하룻길이었다.

  결국 땅을 주고 강화하자는 안이 결정이 났는데 그렇게 되면 개경의 방어도 불가능해지며 서경이나 개경은 고려지배층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 둘을 버리고 남하하면 반란이 나거나 고려의 정치상황은 극도로 혼란스럽게 될 수 밖에 없다. 생명은 잠깐 연장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스스로를 포기한 셈이다.

 

 

  조정.jpg

<이해를 돕기 위한 장면 아마 더 심각했을것이다>

 

 

  고려는 주력군을 동원한 전투를 벌여보지도 못하고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준비가 안된 국가와 국제정세에 무지한 결과는 이렇게 다가왔다. 다행이도 거란은 고려가 이렇게 대책이 없다(...)는 것을 몰랐으며 첫 침공이기에 지리도 잘 몰랐던건지 8월에 압록강을 건넜음에도 10월이 되어서도 귀주 근처까지 진출했다. 이후의 침공군이 2~3일만에 주파한걸 보면 비교가 된다.

  이후 소손녕은 거란군이 80만이라 말도 안되는 허세를 부리며 항복을 요구한다. 이 때 거란군의 실제 병력은 알 수가 없다. 거란군이 원정을 할 때는 최고사령관으로 도통을 두는 경우와 아닌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도통이 없었으며 대게 도통이 없는 원정군은 기병이 6만이었다. 기병 이외의 병력과 사역까지 합하면 그 이상일 것이다.

  고려 조정 전체가 이렇게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거란군의 움직임과 소손녕의 협박이 뭔가 이상한 점을 찾은 사람이 있었다. 고려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막 돌아온 서희였다.

 

 

  서희.jpg

<서희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구원자가 된다>

 

 

  처음 소손녕이 항복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을 때 모두 두려움에 떨었으나 서희만은 대뜸 거란군이 전투를 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간단하게 군대를 출격시킨 이상 항복이나 협상을 하려면 적의 영토를 점령하고 그것을 담보로 삼아야된다. 그래야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고 최소한 전쟁비용이라도 얻게 된다. 그러나 소손녕은 두 달 동안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항복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더욱이 80만이라 했지만 40만만 되어도 내원성에 그렇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눌러 앉아있다는 소리 자체가 병력이 얼마 안된다는 소리였다. 전쟁에서 병력은 언제나 과장하기 마련이지만 상식이 넘어선 과장은 내부에 문제가 있고 사령관이 바보란 증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추정만으로 국가와 국민의 생명이 걸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더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했는데 그것도 있었다. 당시 거란은 내원성(의주)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거란의 영토는 심양에서 내원성을 잇는 가는 선이었고 그 주변의 세력은 여진이었다. 이런 상황에 거란은 고려로 치고 내려온 것이다. 여진을 정벌하기 앞서 우방도 그렇다고 충돌하지도 않은 고려를 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는 고려와 여진의 연합을 야기할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거란은 여진을 횡단하는 원정을 했고 고립된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서 거란군은 전력을 보존하면서 상황을 신속하게 종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럴려면 고려군을 타격을 가해야 했고 서경같은 곳을 점령해야했다. 하지만 이런 전투는 희생을 수반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희생이 크면 전력이 약화되며 그 약화는 적에게 자신감을 넣어준다. 그렇기에 소손녕은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다.

 

 

  안주목.jpg

<거란전쟁 당시 고려 총사령부의 일을 한 안주>

 

 

  서희는 이러한 것을 알고 적의 허세에 속지 말고 일단 한 번 붙어본 후 항복이나 대응책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 라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고 전 민관어사 이지백만이 같이 항복불가론을 펼쳤지만 그의 논거는 거란에겐 돈을 주고 고려의 전통문화 복구였는데 전혀 쌩뚱맞은 주장이었는데 이는 성종의 개혁과 관련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성종의 개혁으로 인한 귀족의 불만을 그 시기에 토로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국가 중심에 있으니 서희의 냉철한 판단이 무시된게 이해가 안가는것도 아니다. 이렇게 서희의 주장이 무시되고 고려의 결론은 항복으로 갈 무렵이었다. 하지만 소손녕은 고려가 그런 선물(...)을 준비하는 줄 모르고 군대를 남진시킨다.

 

 

안융진 전투

 

 

  소손녕은 고려의 답이 늦어지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고 고려가 결단을 내리게 할려면 군사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에 따라 거란군 분견대는 남하했고 청천강 하구에 있는 안융진에 출현했다. 소손녕군은 내륙길을 따라 귀주로 갔지만 분견대는 해안길로 돌려 안융진으로 온 것이다.

  안융진성은 전쟁이 나기 한 20년 전인 광종 21년 혹은 25년에 쌓은 작은 토성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요새를 노강진으로 옮기는데 수군의 비중이 높아졌고 주적이 왜였으므로 바다에서부터 들어오는 적을 강어귀에서부터 차단하려고 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시대는 수군의 비중이 낮고 주적은 북방민족이었으므로 안융진과 같은 도섭지점과 그곳에서 이어지는 육로를 방어하는 지점에 기지를 두었다. 안융진은 주위 도로를 감제하는 요충지였다.

 

 

    안융진.jpg

<안융진과 노강진 위 안주 지도의 하단 확대 모습>

 

 

  거란은 안주성을 피하여 안융진으로 우회한다. 작전지역을 크게 우회하여 대부대가 도하하기 쉽지않은 청천강 하류로 내려온 것으로 보아 이 부대는 대부대가 아니었다. 아마 그들의 의도는 안주의 남쪽을 차단해 고려군의 보급을 차단시켜 불안하게 하려고 했던거같다.

  고려는 거란의 우회를 전혀 탐지하지 못했다. 거란이 안융진에 왔을 때 이 곳에는 주현군으로 편성된 수비대만 주둔하고 있었다. 후대의 기록엔 평시 안융진엔 장교 15명 병사 394명 백정 825명이 소속되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는 전시이므로 평상시보다 증원되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곳은 청천강 방어선 요충지였으므로 수비대 자체가 괜찮은 장수와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안융진 수비대의 책임자는 발해의 세자였던 대광현의 아들 중랑장 대도수였고 그 휘하엔 낭장 유방(?!)이었다. 발해유민의 최고 지도자 집안이 이끄는 만큼 휘하에는 유능한 장수와 병사가 많았고 충성심과 단결력도 좋았다. 또 유방은 꽤나 유능한 장교였는데 나중에 친종장군이 되며 병부상서, 서경유수, 그리고 관료의 최고관직인 시중에까지 오르는 무장출신으로써 이 수준이면 그가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준다. 또한 당시 태조의 측근 유금필의 집안은 많은 무장을 배출해 당시 유씨 무장이 많았는데 정확한 사료는 없지만 유금필 집안으로 추측된다.

 

 

  안융진 전투 당시 전역.jpg

<안융진 전투 거란전쟁 전역 2>

 

 

  이 전투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은 없지만 이 전투는 중요한 전투였다. 고려는 완전히 허를 찔렸지만 이 수비대는 거란군을 이긴 것이다. 거란군이 타격을 크게 입은건진 모르지만 더 이상 전투를 안하고 후퇴한다. 오늘날 이 전투는 거의 언급이 안되지만 대도수와 유방, 휘하 병사들의 분전은 찬사를 받기 충분하다. 거란이 압록강을 도하하고 안융진을 기습하기까지 고려의 사정은 최악이었다. 침공의 징후, 적의 기동, 전술 등 적의 동향을 예측한 적이 없고 대응책도 실패 아니면 오진이었다. 그러던 와중 작은 수비대의 예상치 못한 분전이 이런 상황에 추를 꽂은 것이다. 만약 이 곳이 뚫렸으면 고려는 버티지 못하고 거란에 항복을 했을 것이고 그 뒤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러한 안융진의 낭보는 고려를 단숨에 강화론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당시 고려는 빨리 땅을 줄 생각으로 서경에 비축한 막대한 군량을 백성에게 나눠주고 그것도 남아 대동강에 버릴려고(...) 준비까지 했었다.

  강화회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려의 대표는 서희였고 거란의 대표 소손녕은 서희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하지만 이미 서희에게 소손녕은 허세만 있는 놈으로 보였는지 거절한다. 소손녕이 고압적으로 나갔지만 서희는 그냥 가버리고 소손녕은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회담.jpg

<많이 봤을 회담장면>

 

 

  이 회담에서 오간 대화는 자세히 기록되 있다. 다음과 같다.

 

소손녕 :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것인데 왜 침범하는가?

서희 : 고구려의 후손은 우리들이다. 그래서 이름도 고려고 서경에 도읍했다. 그러므로 원래대로 하면 거란의 동경도 우리 땅이다.

소손녕 : 우리랑 맞대있으면서 왜 송을 섬기는가?

서희 : 압록강 연안도 우리 땅이었지만 여진이 강점하여 거란과 교통을 차단했다. 만약 여진을 구축하고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과 보들을 쌓고 길을 통하게 된다면 어찌 국교를 통하지 않겠는가?

 

  우리 역사책에는 명분과 정통성 싸움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 문제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선조가 먼저 살았다는 말에 영토를 양보하는 나라는 없다. 진짜 핵심은 두 번째였다.서희는 강을 경계로 거란과 고려가 동시에 여진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이 지역을 나눠 점령하자 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소손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거란은 처음부터 고려를 점령할 의도가 없었다. 거란의 당면과제는 여진을 평정하는 것이었고 거란을 적대시 하는 고려를 위협하여 여진을 돕거나 동맹을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서희는 반대로 위 아래로 여진을 협공하자는 제의를 한 것이다.

  임무를 완수하고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소손녕은 흥분을 주체 못하고 서희에게 7일간 잔치를 베풀어 접대하고 낙타 10, 100, 1천 마리, 비단 5백 필을 예물로 남긴다. 소손녕은 끝내 자기가 무슨 짓을 한지 몰랐던 것 같다.

 

 

  강동 6주.jpg

<서희가 얻은 강동 6주 당시 서희는 평안북도를 뚫을려면 저곳들을 거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놓았다>

 

 

  역사책에선 이 회담으로 강동6주를 얻었다고 한다. 강동6주란 흥화진, 용주, 귀주, 통주, 철주, 곽주 6개의 군을 말하는데 이렇게 나열하면 그냥 6개 군을 얻은거 같지만 이 6주의 질적 의미가 중요했다.

  한반도는 예부터 평안북도 지역은 최고의 방어벽이었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서도 압록강을 뚫으면 평양까지 저항 없이 내려오곤 했고 조선시대에도 평북지역이 집중되었다. 게다가 길도 해안길 내륙길 단 두 곳이었다. 그곳을 다 막는곳이 강동6주이다.

소손녕은 조금 더 기다렸으면 고려를 거저 삼켰겠지만 오히려 고려에게 북방 방어벽을 만들게 해주며 고맙다고(...) 예물까지 주고 갔다. 984년 고려는 이 지역에서 여진에게 패했던걸 기억하자.

  고려에겐 아무래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기분이었을 것이다. 여진에겐 미안하지만 다음 해 994년 바로 거란과 고려는 여진에 대해 공세를 실시한다. 이번에도 서희가 출정해 압록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힌다.

  서희는 누구보다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9949952년동안 안주, 선주, 곽주, 귀주, 맹주, 장흥진, 귀화진, 흥화진, 안의진 등 압록강에서 천청강에 이르는 통로상의 요지에 성을 쌓았고 그 외에도 29개 소에 성을 쌓거나 보강해 북방 방어선을 구축한다. 2년 동안 수십 개의 성을 축조한건 당시로써 대단한 역사였고 백성에겐 말도 못할 고역이었을 것이다. 서희는 일단 거란군을 물리치긴 했으나 고려와 거란은 숙명적인 대결을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란걸 깨달았던 것 같다. 백성들의 입장으로썬 죽일 놈(...)이지만 그는 이 사업을 강행하고 결국 이뤄냈다. 그리고 서희는 그 대업을 마친 후 병석에 드러눕게 되고 성종은 개국사에 쌀 1천 석을 희사하고 기도와 축수 등 모든 노력을 다하도록 했다. 그러나 다음 해 997년 성종이 갑자기 죽고 서희는 투병생활 끝에 998년 사망한다.

 

 

  개국사 석등.jpg

<서희가 요양했던 개국사의 석등>

 

 

  서희의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이후 30년간 벌어지는 대 거란전쟁에서 증명된다. 이 방어망이 없었으면 거란군이 이 난코스를 그냥 통과하고 청천강이나 서경 앞에서 전쟁을 했더라면 몇 번이고 개경을 함락시키고 중부 이남까지 쉽게 진출 했을 것이다. 서희는 거란의 1차 침공을 물리친 인물로만 등장하지만 거란전쟁 통틀어 최고 수훈자는 서희다. 서희가 확보하고 개척한 강동6주가 거란의 침공에서 고려를 구했다. 그의 통찰력과 안목이 고려와 그의 후손을 구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외교적 승리는 국가적 외교정책이 없던 시기에 나온 것이라 더욱 값진 것이었다.

 

어쨌든 거란의 침공을 저지했고 땅은 오히려 넓혔다 다시 평화가 오는 듯 했다.

13개의 댓글

2014.07.12
어.. 중고등학교때 국사배울때는 고려의 서희는 강동6주를 말로 얻었다라고 배웠는데 자세하게 알려줘서 고마워
역사같은거 좀좋아해서 ㅋㅋ 일단 추천눌렀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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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물곰
저정도면 말로 얻은거 맞지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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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2
일베언급해도 되나? 거기서도 여요전쟁 다뤘었는데 에휴 개노잼인 드립범벅이어서 별로였었다.
이건 담백하니 맛이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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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2
@장난기
찾아가서 봤는데 참고 책이 같은거같네 사실 이번에 괜찮은 책 사서 개드리퍼들 책값아끼고 전쟁사나 배우라고 올리는거였는데 크게 상관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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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2
@티스푼
책 모임?
함 구경이나 해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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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2
@장난기
임용한의 전쟁과 역사2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국내에서 한반도전쟁사 다룬 책중엔 탑클래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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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절령이북으로 수정해야 맞지않냐 절령도가 있던것도 아니고 ㅇㅇ

여튼 12년 뒤에 송과 전연의 맹 맺는거 보면 씹소름;;

근데 유로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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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bomdong
맞다 고쳐야된다

그리고 유로파함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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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티스푼
유로파가 참 재밌지 서양게임이란것만 빼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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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bomdong
메죽 모드 해봐 고려 말기부터 되는데 나름 동아시아에 신경써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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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티스푼
메죽이 메이오우 랑 다른거 하나 합친거구나 메이오우 랙쩔었는데 메죽도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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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bomdong
아무래도 역설사 게임은 좀 확장하면 그럴 수 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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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bomdong
메죽 렉쩔긴하는데 컴터좋으면상관없고

컴별로면 베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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