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왕조 고려가 치른 최초의 전쟁은 대 거란전쟁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소홀히 여기는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거란전쟁은 고려의 생명을 위협했고 고려역사의 한축을 담당하는 길고 치열한 전쟁이었다.
거란과 고려의 만남
거란과 고려의 만남은 처음부터 악연이었다. 이 시작은 만부교사건에서 볼 수 있는데 942년 거란은 고려에 친선을 위해 30여명의 사절단과 낙타 50마리를 보낸다. 고려사에선 낙타 50마리를 예물로 표현하지만 실제론 낙타50마리에 예물을 실어왔을 것이고 낙타는 덤이었을 것이다.
<만부교 위치>
하지만 고려의 태조 왕건은 이 제의를 거절하고 거란 사절단 30명을 유배 보내고 낙타 50필은 만부교에 묶어 굶겨 죽였다. 거란은 동족인 발해를 명말시킨 국가로 이웃나라로 대접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으로 만부교는 탁타교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조선시대엔 이 일화를 다룬 사적비를 세운다. 여담으로 비문은 한석봉의 글씨이다.
<이익>
후대 실학자 이익은 명분 때문에 실리를 표기한 사례로 보지만 왕건은 그렇게 명분에 구애받는 사람은 아니라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발해의 원수는 우리의 원수라 공헌한건 민족애 때문만은 아닌 고려로 망명한 발해의 유민들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는 발해유민의 공이 컸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고 927년 왕건은 공산성에서 대패를 당한다. 발해의 유민, 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후예이며 발해의 왕족이었던 대씨들이 고려로 망명하는데 934년 7월에 발해의 세자였던 대광현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입국한다. 고려는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주고 족보에 올리고 그를 따라온 관료와 군사들에게도 벼슬과 땅을 주며 서북지방에 정착시켜 여진을 방비하고 유민들 일부를 고려군으로도 끌어들인다. 공산 전투로 인한 위기를 경험한 고려를 다시 단기간에 힘을 회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왕건 영정>
그 후 통일 후에도 유민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았고 국가로서 모습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고려에 힘을 갖추기 위한 왕건은 남은 여생을 서경을 거점삼아 평안남도 지역을 확보, 경영에 주력하는데 이런 개척지에도 발해 유민을 정착시킨 것이다.
왕건은 죽을 때 훈요십조를 남기는데 그 중에 ‘거란은 우매한 나라니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라.’ 했으며 또 ‘우리의 이웃은 강하고도 악한 나라니 평화로운 때에도 위험을 잊어서는 안된다.’ 라고 한다. 이웃이란게 꼭 거란은 아니겠지만 이웃국가는 거란, 여진, 왜 였으니 거란을 무시한건 아니었다. 그 외에 후진에 사신을 보내 협공하자는 제의도 했다.
<서경성>
왕건은 이토록 거란을 의식했는데 그렇다면 우호관계를 맺는게 정상이지만 위에도 말했듯이 발해유민은 중요한 존재였다. 고려가 거란과 국교를 맺으면 발해유민은 동요할 것이고 서북지방과 서경이 동요되고 최악은 여진과 발해 유민이 손을 잡을 수도 있었고 그 최대의 피해자는 고려가 될 것이었다. 고려로서는 그만큼 발해유민들이 중요했고 먹지 않고 오래 버티는 낙타를 굶겨 죽이는 이벤트를 보여주면서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고 우방의 보호자로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만부교사건은 이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북쪽의 위협을 감지 못한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정치적인 술수에는 강했지만 장기적인 통찰력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란의 성장
거란은 요하의 상류인 시라무렌 강 상류에서 성장한 유목민족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만주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이들의 기원은 확실치 않고 혼혈도 꽤 이루어진거 같은데 몽골족 계통인 선비족 일파가 중추인건 확실하다. 삶의 방식도 유목생활을 했던 것 같다.
거란은 여러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졌는데 7세기 경부터 8부족으로 대표로하는 연맹이 현성된다. 거란은 9세기 말 중국 5대 10국의 개판(...)을 감지하고 야율아보기가 봉기해 당의 절도사를 격파 907년 8인 위원회 선출, 916년엔 8부대인 전원을 죽여버리며 926년엔 발해를 멸망, 그 다음 해 그 아들 야율덕광은 만리장성을 넘어 후진을 박살내며 연운 16주를 장악한다.
<5대 10국>
하지만 거란은 부족제에 기초한 국가체제는 약점으로 작용했고 성장하는 시기에도 내전과 내란이 그치지 않았다. 후진을 멸망시킬 때에도 분열이 일어나고 중원진출을 하지 못하며 그사이 중원엔 송나라가 건국된다. 송나라는 986년 연운16주 일부를 되찾고 유주까지 진군하나 기구에서 대패하게 되고 그걸 본 거란군은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렇게 되자 중원을 공격하기 전 등을 찔릴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동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에 고려는 병력확충과 방어선을 강화하는 준비를 하지만 송과의 협력도 없으며 거란과 동맹도 없는 불분명한 태도로만 일관한다. 984년과 987년에 거란은 여진을 거듭 공격했으며 여진족은 고려에 구원을 했으나 고려는 냉정하게 거절하고 오히려 984년 압록강 유역을 점령을 했다가 여진족에게 패하기도 한다.
<송나라 시기 동아시아>
송나라만해도 거란이 여진을 공격할 때 기회라 여겨 985년 고려에 거란을 공격하자라는 제안을 하는데 이러한 제안도 거절하며-송은 단독으로 공격하다 대패한다-불간섭을 고집한다. 고려가 이러는 동안 거란은 요동을 점령하며 991년 압록강 북쪽까지 도달 3개의 성을 축조한다. 그중 현대에 의주로 불리는곳에 내원성을 축조하는데 이 성은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데 내원성은 압록강 건너편이 아닌 안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압록강 방어선이 없어진거나 마찬가지었고 이 곳이 뚫리면 평양까지 밀려들어갈 수 있고 병자호란 때도 이 곳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간다.
<의주성과 압록강 좌측하단엔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가 있다>
혼돈의 고려
고려의 답답한 대응을 알아보기 위해 고려 역사를 다시 보자. 936년 왕건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943년에 사망하는데 이때 태조는 고려사회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는 대인관계나 정침감각, 거래에는 탁월했지만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사고와 통찰력이 부족했다. 왕건은 다음 세대의 고충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를 했는데 그게 혼인동맹이었다.
왕건은 수십년 동안 군대를 이끌고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장화왕후 오씨가 시내에서 빨래를 하다 눈에 띄어 침실로 불려갔다고 한 일화를 알 수 있듯이 상당이 여색을 밝혔으며 그가 결혼한 여자들은 사료에 나타나는 인물만 29명이었다. 물론 후삼국 시대는 좋은 동맹 수단이었겠지만 이게 모두 동맹을 위한 혼인인지는 한번 생각해볼만한다. 고려사에는 혜종을 낳은 장화왕후 오씨의 집안이 한미했음을 아래와 같이 인정한다.
‘(혜종의) 나이가 7세가 되자 태조는 그가 왕위를 계승할 덕성을 가졌음을 알았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해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낡은 옷상자에 황포를 덮어 왕후에게 주었다’
<장화왕후 왕건 동상>
어쨌든 이미 일은 벌어졌고 왕건은 한가지 방책을 낸다. 아들은 왕씨를 따르게 하고 딸들은 왕비의 성을 주며 후에 이복형제 자매들 간에 혼인을 시키는 방법이다. 하지만 결혼동맹안에 다른 동맹이 생기고 왕실은 더 빨리 분열되는 결과가 나왔다. 왕건이 죽자마자 권력투쟁에 빠진 것이다.
배경이 좋지 않았던 혜종은 즉위하자마자 자객의 습격을 받는데 한번은 자객이 습격하는 순간 깨어나 맨손(...)으로 자객을 때려 잡았다. 원래 이런 구실은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한 구실로 삼겠지만 혜종은 그 반대파를 누를 힘도 없어 추궁조차 하지 않았다. 계속된 암살과 쿠데타의 공포로 혜종은 2년만에 죽는다.
그 후 정종이 즉위하나 왕규가 쿠데타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쿠데타에 연루된자 300여명이 죽게 된다. 하지만 정종도 주변을 믿지 못해 재위 3년 만에 병이 들고 다음해 광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죽게된다.
광종은 정종이 위험세력을 숙청했기에 안정된 상태에서 즉위를 했고 가문적 배경도 좋았다. 하지만 광종은 일회적 방법에만 의존해 정국을 안정시켰기에 정치적 불안은 금새 되살아 놨고 근친혼과 대대적인 숙청을 한 결과 오히려 원수는 더 많아졌다. 광종은 혜종과 정종의 아들도 다 죽이며 경종까지 의심했다.
경종은 광종시대의 후유증을 치유를 해야했는데 그 과정에는 복수가 가능한 복수법-금방 철회된다-도 있었다. 고려는 통일 후 40년이 지났지만 지방관도 없었고 전국단위 행정망조차 건설하지 못했는데 경종 때 비로소 이 문제에 눈을 돌리나 태조와 광종의 유산이 발목을 잡았고 부친의 위협을 받고 자란 그도 정상적이지 않았는지 즉위 7년만에 27세로 이런말을 남기며 죽게된다.
‘나는 국가와 사회를 안정시키려 노력하며 매일 조심스럽게 살다가 피로가 병이 되어 죽는다.’
<천추태후에 묘사된 풍악을 울리라는 경종 말년에는 많이 망가졌지만 과장된 장면이긴 하다>
그리고 성종이 즉위한 후 2년인 982년 겨우 전국에 12개의 대읍을 선정하여 목사를 파견한다. 엄밀히 말하면 네트워크도 못되었지만 이런 틀을 토대로 중앙, 지방, 관료제, 학교등의 제도를 정비하며 국가의 모습을 갖춘다.
하지만 고려가 겨우 여기까지 올 때 거란은 이미 동방으로 진출을 준비를 했고 991년에는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의 행정망은 10년전과 변함이 없었다. 993년 5월에는 여진에서 거란이 고려를 공격한다는 첩보까지 왔지만 고려는 이 정보를 술책이라 보고 폐기한다.
993년 8월 소손녕이 이끈 거란의 원정군은 고려를 공격한다.
곶곶곶곶아라니
정나초
bomdong
기무찌요
박정희
하느
티스푼
장난기
bomdong
물론 서양의 봉건주의와는 다르긴해 어쨌든 고려 조정은 가장 강한 세력이었고 다수의 호족을 포용했거든 이뮤니티같은 것도 없었고
또한 기인제도를 둬서 제지호족들의 중앙관료화 또한 적극적으로 지원했어. 실제로 김치양 난때 현종의 편은 다수의 관료화된 경기지방의 관료화된 호족이었거든, 근데 이부분은 그냥 역사 흐름의 뉘양스가 이랬다고만 생각해줘
근데 호족에 의한 지방분권화가 꼭 나쁜 것 만은 아니야 제도를 생각할땐 시비가 아니라 장단으로 봐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