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독일 근현대 산책] 5. 낭만 속에 숨겨진 불편함, 「비더마이어 시대」 2/3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독일의 제후들은 나폴레옹에 맞서기 위해 독일 국민들에게 자유와 통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체제가 수립된 때에 와서는 개혁도 지지부진했고, 여전히 시민 계급에게 주어진 자유는 제한적이었으며, 무엇보다 통일을 위한 어떤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의식적으로 크게 성장한 독일인들은 이러한 행태에 크게 분노했죠.

 

 

 

 

특히 빈 체제하의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구상대로, 통일은커녕 마치 사분오열되었던 과거의 신성 로마제국이 다시 등장한 것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포함한 중부 유럽의 39개의 독일 국가들은 독일 연방(Der Deutsche Bund)을 결성했습니다. 독일 연방에는 독일 국가들의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연방의회가 상설 운영되었고 그 의장은 오스트리아였지만, 독일 연방은 사실 중부 유럽에 하나의 거대한 통일 국가가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영국의 계략으로 탄생했던 겁니다. 그런 만큼 독일 연방은 실질적인 연방 국가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연방의회에는 비독일 국가인 영국·덴마크·네덜란드*까지 포함되어 독일의 결속을 방해하고 있었으므로, 통일을 염원하는 독일인에게는 그 실망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1024px-Deutscher_Bund.svg.png

<독일 연방」 지도. 「독일 연방」을 주도하던 양대 축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었지만, 실제로는 온갖 유럽 강대국의 이해관심이 얽혀 사분오열되어 있었고 그것이 유럽 강대국들과 오스트리아가 바라던 바였다.>

 

 

 

 

이에 독일 각지에서는 민족주의·자유주의를 부르짖는 시민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이 시기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학생회를 구성하여 집회를 하거나, 신체를 단련한다는 목적으로 시민들이 체육회를 조직해 독일 통일을 촉구하는 선전 활동을 하는 등 여러 활동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1817, 시 낭송회나 음악회가 자주 열렸던 튀링겐의 유서 깊고 아름다운 바르트부르크 성()에서는 대학생들의 시국집회가 있기도 했습니다. 이 집회를 주도한 것은 해방전쟁당시 뤼초* 자유군단이라는 의용군에 자원해서 나폴레옹과 싸웠던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또 현재 독일의 국가로 지정된 독일인의 노래를 처음 부른 것은 이 당시의 함부르크 체육회회원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집회와 모임을 결성해 자유·통일을 촉구하는 시민들과, 현상유지를 바라는 지배층 간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Wartburg_aus_Suedwest.jpg

<바르트부르크 성. 관광명소로, 괴테나 바그너도 이곳을 찾았었다.>

 

 

 

 

코체부 암살사건

 

 

August_von_Kotzebue.png

<극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1761~1819).>

 

 

이 갈등은, 1819년의 코체부 암살사건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극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1761~1819)는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러시아에서 출세하여 러시아 귀족작위까지 하사받은 인물로 나폴레옹 시대내내 러시아에 협력해 나폴레옹의 반대편에 섰습니다. 1817년 러시아에서 독일로 돌아온 코체부는 뛰어난 극작가로 명성을 날렸으나, 사실 그는 러시아 외무성으로부터 독일의 민족주의 운동과 통일을 방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파견된 간첩이었죠. 이러한 내막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독일의 민족주의 운동을 비웃는 글을 자주 썼기 때문에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분노를 샀고, 열성적인 학생회 회원이었던 카알 루드비히 잔트(1795~1820)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1819323, 잔트는 만하임에 있는 코체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품에서 단도를 꺼내 민족반역자!라고 외치며 코체부의 가슴을 수차례 찔러 살해했습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삼총사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1802~1870)의 서술에 따르면, 당시 잔트는 코체부를 살해한 직후 패닉에 빠져 있다가 코체부의 어린 자녀가 살해 현장을 목격하고 울기 시작하자 극도로 흥분하여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 병원으로 옮겨져 살아났고, 거기서 체포되어 182055일 처형되었습니다.

 

 

Ermordung_August_von_Kotzebues.jpg

<코체부의 암살 장면.>

 

 

민족주의 운동을 비난했다가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한 코체부의 운명은, 빈 체제를 주도하던 각국 지배층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칫하면 자기들도 코체부처럼 암살당하거나 아예 왕정 체제가 뒤엎어지고 제 2의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피부에 와 닿은 겁니다. 이에 독일 연방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 카를스바트(현 체코 카를로비 바리)에 모여 해결책을 논의했습니다.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강경탄압을 주장했고, 이것에 모두 동의하여 1819920, 연방의회에서 카를스바트 결의가 통과됩니다. 카를스바트 결의에 의하여 독일 각지의 학생회체육회는 강제해산 당했으며, 이러한 단체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취업이 제한되었습니다. 또 대학생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각 대학에 감시원이 파견됐으며, 서적·신문 등은 엄격한 검열을 거쳐 발간됐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억압적 조치로 인해 이미 한 번 타오른 자유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던 당시의 사회상은, 비더마이어 시대라는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됐습니다.

 

 

 

 

*1. 영국 왕은 하노버의 왕, 덴마크 왕은 슐레스비히의 공작, 네덜란드 왕은 룩셈부르크(룩셈부르크가 독일에서 분리된 것은 19세기 중후반의 일이다.)의 공작 작위를 겸하고 있었기에 연방의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이를 중부 유럽의 통일을 방해하는 수단으로 삼았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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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빌헬름 폰 뤼초(1782~1834) 장군.>

 

 

「루드비히 빌헬름 폰 뤼초(1782~1834)」장군이 「해방전쟁」 당시 의용군을 이끌고 나폴레옹에 맞서 보여준 용기와 애국심은 이후로도 계속 독일인들에게 회자되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해군 전투순양함 「뤼초」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제 37 무장친위대 의용기병사단 「뤼초」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해군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1번함 「뤼초」일 겁니다. 원래 이 함선의 이름은 「도이칠란트(독일)」이었으나, 독일이라는 이름의 배가 혹시 침몰하기라도 한다면 사기가 크게 저하된다는 히틀러의 우려로 이름이 「뤼초」로 개명됐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뤼초 장군의 이름이 곧 독일이라는 이름과 기꺼이 맞바꿀 정도의 위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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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칠란트급 장갑함 1번함 뤼초.>

 

 

또 뤼초 장군이 조직한 「뤼초 자유군단」은 흑색 제복 위에 붉은 띠를 두르고 이를 황금색 단추로 고정시켰는데, 이후 독일의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여기서 착안한 흑·적·황 삼색기를 고안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흑·적·황 삼색기를 내걸고 1848년 3월 혁명을 벌였으며, 지금의 독일은 이것에서 현대 독일의 원류를 찾아 이를 독일 국기로 삼았으므로, 현대 독일은 곧 뤼초 장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독일의 국가정체성과 민족의식은 나폴레옹과 벌인 「해방전쟁」에서 탄생했다는 겁니다. 이 독일 근현대 산책 시리이즈가 「나폴레옹 시대」로부터 출발한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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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초 자유군단」에게서 따온 흑·적·황 삼색기가 나부낀 1848년 3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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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독일의 국기.>

2개의 댓글

2019.12.13

문제는 저러고도 성공을 못했단거지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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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3

오늘도 수고많습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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