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진다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달렛 계획 3

우월한 힘에 굴복하다-드루즈, 체르케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스라엘 건국 신화는 유대인이 막강한 아랍 군의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아랍군은 구원군 자체부터가 의욕도 없었고, 플랜 달렛 전까지 아랍 주변국 어느 누구도 본국의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겁쟁이가 아니라 계획 이전부터 때를 노린 유대인의 기습에 살해당하거나 폭력을 피해 도망을 간 것이었다. 오히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유대인에게도 꽤 아픈 피해를 남기기도 했다.

 

현실은 오히려 유대인의 압도적인 힘에 팔레스타인의 몇몇 소수민족들이 굴복한 것이다.

 

 

드루즈 교인은 이스라엘의 보호 아래, 성장하면서 이스라엘 군의 한축을 담당했다. 현재에 들어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압에 반발하는 청년층도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드루즈교도들이다. 시아 이슬람 이스마일파의 분파 중 하나인 드루즈교는 본인들 스스로를 무슬림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계파의 무슬림들에게 이단으로 인식 받았다. 처음 아랍 해방군이 팔레스타인에 왔을때 드루즈 교도들은 여기에 합류했지만, 48년 4월 초에는 아랍 해방군에서 탈영하여 500명의 드루즈 교도들이 유대군에 가담하게 된다.

 

재밌게도 드루즈 교도들은 유대군 사령관에게 가짜 전투에 참여하여 자기들을 포로로 만들어 달라고 주장했다. 그 다음엔 시온주의에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약속했다.

 

지금은 파괴된 마을 키르바트알카세이르Khirbat al-Kasayir와 하우샤Hawsha 인근에서 벌어진 가짜 전투로 포로가 된 드루즈 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포로가 되었고, 그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듯이 이스라엘의 충실한 보조군이 된다.

 

이들 드루즈교도들은 갈릴리에서 벌어진 종족청소에서 시온주의자들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드루즈 교도들은 그 댓가로플랜 달렛으로 벌어지는 폭력에서 보호 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르군이나 하가나 혹은 슈테른, 팔마흐 등이 한 마을에 들어와 남자들을 모두 포로로 잡은 다음 그 와중에 드루즈 인이 있는지를 묻는다. 만일 드루즈인이 있으면 그자는 마을에서 그냥 살아도 되었다. 나머지(무슬림+기독교도)는 레바논이나 시리아로 추방되었다. 이런 부역자 질로 드루즈 교도들은 팔레스타인인 사회에서 완전히 배척받는 존재가 된다. 갈릴리 북부에서 드루즈교도들은 무슬림과 어울려 지냈던 갈릴리 지역의 농촌 공동체를 그들 스스로가 박살 내 버린다.

 

 

갈릴리 지방의 체르케스인, 러시아 제국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던 체르케스 인들을 성지순례란 명목으로 추방시켜 버린다. 체르케스 인들은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게 되는데, 재밌게도 건국전쟁 당시 러시아쪽 아슈케나짐과 팔레스타인 체르케스 인들은 러시아어로 서로 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체르케스인 역시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던 유대군에 충성을 맹세했다. 역시 48년 4월 플랜 달렛 와중에 체르케스인 350명이 유대군에 합류한다. 드루즈인과 체르케스인들은 나중에 이스라엔 국경 경찰의 핵심이 된다. 이들 국경 경찰은 1967년 이전 이스라엘의 아랍인 지역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주요 무력집단 이었고, 1967년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하는데 앞장 섰다.

 

아랍의 대응

유대군이 플랜 달렛으로 속전속결로 팔레스타인의 아랍 마을들을 초토화 하고 마침내 5월 독립을 선언할 무렵, 아랍 측의 반응은 무능하기 그지 없었다. 전사한 압드 알카디르 알후세이니 이외에 주목 받는 군지휘관은 2,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 파우지 알카우크지만이 있었는데, 아랍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반면에 그 깊은 인상 만큼의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는 고립된 유대인 정착지를 공격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1948년 5월 24일 파우지 알카우크지Fawji al-Qawuqji의 사진, 그는 1대전 2대전에서 중동을 지배한 영국에 맞서 싸운 투사로 유명한다. 흥미롭게도 그 역시 아민 알후세이니 처럼 독일로 갔고, 2급 철십자장과 독일국방군 대령 계급을 받은 독특한 경험을 가졌다. 그리고 독일에서 독일인 아넬리제 뮐러와 결혼한다. 

 

그는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1세의 허가를 받아 플랜 달렛 직전인 3월 말 유대기구 협의체의 일원인 여호수아 팔몬과 협상을 가졌다. 그러나 불가침 조약과 함께 유대국가와 팔레스타인의 연방국가를 내놓은 그의 제안은 이미 80%의 인구를 유대인으로 채우기로 결정한 시온주의자의 의지에 한참 부족한 제안이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 문제를 아랍 연맹에 논의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의미가 없는 발언이었다. 오히려 여호수아 팔몬은 첩보의 목적으로 이 교섭에 참가하여 아랍 연맹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4월 30일 최종적인 전쟁 개입 결정 직전에 아랍 각국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아랍 연맹 이사회는 전 회원국에 무기와 지원병을 파견하라고 요청했지만, 모든 국가가 그 의견에 따르지는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는 소규모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의견을 표했고, 레바논은 약간의 총기, 오직 시리아만이 적절한 군사 행동에 참여할 의사를 보였고 소극적이던 이웃국 이라크를 설득하여 훈련병을 팔레스타인에 보내게 했다.

 

아랍 해방군의 병사들은 그 수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어느정도 열의도 있었다, 다만 훈련이 너무 안되어 있는 것이 문제였다. 플랜 달렛 초기 팔레스타인에 파견온 이집트 지원병은 팔레스타인 남부 해안의 치안유지를 위해 갔지만, 이미 마을 대부분은 유대군에 의해 파괴되었거나, 혹은 유대군의 포격에 전의를 상실하여 후퇴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믿음 직한 군대는 바로 트랜스 요르단 군대였다. 아랍 군단 참모 총장 존 글럽 파샤John Glubb Pasha가 훈련한 군대는 아랍권에서 가장 훈련이 잘 되었으며, 전쟁에 이골난 유대군과 맞먹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이스라엘은 중동전쟁에서 욤키푸르 전쟁 이전까지 요르단 군대에게 큰 피해를 입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강력한 군대는 바로 이웃국 팔레스타인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국왕 압둘라 1세의 숨은 야욕이 있었기에 그런 것이다.

 

 

압둘라 1세의 사진, 그는 척박한 땅인 트랜스 요르단에 만족하지 않고 요르단 강 서안과 예루살렘을 획득하여 국가의 성장을 꾀했던 야심가였다. 그렇기에 그는 무슬림의 적인 이스라엘과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알후세이니 가문에게 사주 받은 암살자에게 암살당했다.

 

압둘라 1세는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38대손으로 이슬람권에서 가장 고귀한 가문과 혈통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1차 대전 당시에 에드워드 로렌스와 함께 일하며 아랍 반란의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런 활약 이후에 자신의 정당한 소유였던 아라비아 반도는 1924년 사우디 가문이 날름 먹었고, 압둘라 1세가 얻은 트랜스 요르단 지역은 베두인 유목민과 체르케스인 농부 소수만이 있는 별볼일 없는 지역이었다. 그는 고귀한 혈통이지만 요르단에선 이방인이었고, 자기의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문명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확장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걸 위해서는 유대 협의체와의 좋은 관계는 필수였다.

 

1948년 2월 초 요르단 수상은 런던으로 날아가 유대 지도부와 암묵적인 동맹(1월에 유대 협의체와 요르단은 구두동맹을 맺었다.)을 맺었다고 보고했다. 위임 통치가 끝난 뒤 팔레스타인을 요르단과 유대 국가가 분할한다는 것이다. 요르단은 분할안에서 아랍인들에게 할당된 지역을 병합하고, 그 댓가로 유대 국가(이스라엘)를 상대로 한 군사 작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존 바고트 글럽은 1대전, 2대전 시기 아랍전역에서 싸운 장교로 요르단 일대의 베두인 족과 체르케스인을 군대로 양성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압둘라 1세의 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참모총장 존 글럽 파샤는 요르단 아랍 군단의 작전 범위를 자국땅으로 간주한 동예루살렘과 오늘날 요르단강 서안이라고 알려진 지역으로 한정했다. 일부 장교들과 병사들은 그 명령을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도와 마을을 지킨 반면, 요르단군 사령관은 국왕의 명령을 준수하여 대체로 현장의 부대를 억제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본 아랍 해방군 사령관 파우지 알카우크지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훗날 그가 남긴 일기에서 팔레스타인 주둔 요르단 군이 그의 부대에 협력하지 않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절망에 빠진 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948년 5월 2일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 협의체와 요르단과의 최종 회담이 열렸다. 유대 쪽은 최고위 장교 슐로모 샤미르Shlomo Shamir가 요르단군 고위 장교 2명과 회담을 가졌다. 골디 Goldie 대령과 크로커Crocker 소령은 존 글럽 파샤와 마찬가지로 영국인이었다. 요르단 사절은 이스라엘을 공식 국가로 인정한다는 국왕의 서안을 가져왔고, 이스라엘 측 역시 팔레스타인의 일부를 요르단 측에 기꺼이 넘길 뜻을 보였다. 다만 회의는 예루살렘으로 넘어가면서 결렬되었다. 요르단은 예루살렘 역시 분할할 생각을 가지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슐로모 아니 그보다 더 위의 다비드 벤구리온에게 예루살렘은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최우선 목표였다. 벤구리온은 유대군의 무력으로 예루살렘은 금방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48년 요르단군 모습, 요르단군은 군기가 개판인 아랍군대 중에서 가장 군대 다운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압둘라 1세는 이시기 양면적인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하나는 아랍 연맹의 회원국들에게 팔레스타인의 구원의 선봉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필요했고 또 하나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세력 확장을 위해 이스라엘과 협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아랍 연맹이 하는 것 만큼의 노력을 보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요르단이 요르단 강 서안을 확보하는데 이스라엘의 동의를 얻는 것에 주력했다.

 

 

알렉 세스 커크브라이드경

 

요르단 아랍 군단과 하가나 사이에 몇 차례 협상이 있었고, 아랍 군단의 영국인 장교들이 협상에 나섰습니다. 이 극비 협상의 목적은 양 세력이 각자 팔레스타인의 어떤 지역을 점령할지를 정하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에게 보내는 요르단 암만 주재 영국 대표 앨릭 커크브라이드Alec Kirkbride의 1948년 5월 13일 편지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한 어니스트 베빈, 영국 외무부 산하 선전 부서 정보연구부(IRD)의 창시자

 

나는 아랍인과 유대인의 적대 행위를 피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협상의 성공을 저해할 만한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협정의 실행은 아랍 군단 영국인 장교들에게 달려 있어요. 그러니깐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군단 장교들을 철수시켜서는 안됩니다.

앨릭 커크브라이드의 편지에 대한 어니스트 베빈의 답장

 

결국 서로에 대한 입장 차이로(다비드 벤구리온은 80%의 영토에 80%의 유대인인구, 압둘라 1세는 요르단강 서안의 확보) 위임 통치 종료 몇 주 후 다비드 벤구리온은 밀약을 맺은 지역의 일부를 뺏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1차 중동전쟁의 완벽한 승리로 다비드 벤구리온은 아랍 군대에 대해 방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 시피 요르단 군은 이시기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군이었고, 요르단 아랍 군단은 요르단 강 서안을 훌륭하게 지켜낸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런 방어로 요르단 강 서안에 사는 25만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지금 당장의 추방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1967년 3차 중동전쟁에는 그들 역시 새로운 추방의 물결의 휘말려야 했지만 말이다. 

 

 

1936년의 팔레스타인 비공식 정부인 아랍 고등 위원회의 대표들 단체사진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이스라엘 지도부와 다르게 산산이 흩어져 허둥지둥 하기 바빴다. 일부는 도주했고, 팔레스타인에 남아서 본인 자리를 지키면서 민족 위원회의 공식 성원 지위를 유지했다. 팔레스타인의 비공식 정부인 아랍 고등 위원회는 인원의 절반이 떠나거나 남은 인원은 이런 비극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기만 할 뿐 이었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이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유대군이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와중에도 최후까지 각자의 공동체 곁에 남았다. 에밀 고리Emil Ghori, 아흐마드 힐미Ahmad Hilmi, 라피크 타미미Rafiq Tamimi, 무인 알마디Mu'in al-Madi, 후세인 알칼리디Hussein al-Khalidi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카이로에 있는 아랍고등위원회 의장 아민 알후세이니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아민 알후세이니는 혼돈과 파괴의 팔레스타인에 오지 않았다.

 

그의 대리였던 같은 씨족 자말 알후세이니Jamal al-Husayni는 1월에 미국으로 떠났는데 뒤늦게나마 유엔 결의안에 반대하는 외교 캠페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팔레스타인에게 불행하게도 이때의 팔레스타인엔 지역적 지도자는 있어도 통합적인 국가 지도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가장 큰 팔레스타인의 불운이었다.

 

가짜전쟁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종료 몇 주 후 이스라엘은 고립된 유대인 정착촌 거의 대부분을 손에 넣는다. 단 두 곳만을 수복하지 못했는데, 이는 요르단과의 약조로 넘겨주기로 한 땅에 있는 정착촌 이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고 종족 청소 와중에 꾸준히 무기를 모으고 병력을 증강하는 와중에도 아랍 세계의 반응은 그럼에도 상당히 미적지근 했다.

 

 

1948년 5월 29일 동예루살렘 성묘교회에서 인증샷을 찍은 압둘라 1세

 

이유는 바로 팔레스타인 작전 군 사령관이 압둘라 1세 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스라엘과의 갖은 접촉은 아무리 비밀리에 만난다고 해도 결국은 다 들통나게 되어 있고, 4월 쯤 되면 아랍 연맹국 상당수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밀약에 대해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아랍 연합군의 지원에 대해서 어떤 아랍 국가도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이집트는 5월 12일 상원에서 침공 결정이 내려졌지만, 팔레스타인 원정군이 침공하는데 준비하는 시간을 겨우 3일 밖에 주지 않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보급과 준비를 개판으로 한 군대의 결말은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힘을 쓸 수 있는 미국은 시온주의자의 로비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서 미국정부가 개입을 안하기로 천명했기에 국무부의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렸다. 오히려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황이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47년 12월 기준 75,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 병력 모두가 팔레스타인 내의 영국군 관료와  민간인을 빼내는데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치안은 손을 놓았다. 유대군대가 전초기지를 점거하거나 무기를 절도해도, 아랍지원병이 국경을 넘어도 신경을 안썼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만이 법이 되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1948년 5월 11일 협의체를 주도하는 다비드 벤구리온은 요르단 아랍군단에 대해서 유대군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물었을 때 참석자들은 그냥 각 부대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게 종족 청소에 임하면 된다는 의견을 내었다. 예루살렘이야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서로 협의를 안했기에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울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시기 준비도 제대로 안된 아랍 연합군은 논외의 대상이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당시 시리아 군의 모습, 위의 요르단 군과 다르게 민병대에 가까운 무장과 복장을 하고 있다.

 

훗날 요르단군 참모총장이었던 존 글럽 파샤는 1948년의 중동 전쟁을 가짜 전쟁이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아랍 국가 곳곳에 영국군 군사고문들이 있었고 이들이 정밀한 네트워크 마냥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군 고문들은 아랍 연합군의 준비가 얼마나 개판이고 장비가 얼마나 낡았는지, 군율이 얼마나 한심한 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시리아 만이 이 전쟁에 열의를 보이면서 참전 했지만 참전 병력의 질은 매우 저질이었다. 시리아의 권유로 같이 파견한 이라크군은 정부(국왕 파이살 2세는 후세인 1세와 같은 하심가문 출신으로 그 역시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이었다.)의 지침이 압둘라 1세의 지시에 순응하라고 내려왔기에 몇몇 군인들을 제외하고 요르단강 서안 북부에 주둔해 있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제닌 근처에 주둔 중인 이라크 병사들의 사진

 

아랍군은 5월 15일 연합군을 구성하여 진격한다. 그러나 그들은 보급의 문제와 훈련의 질 문제 등으로 다비드 벤구리온이 방어상의 한계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유대인 정착촌을 공격했다가 번번히 실패했다. 설사 점령해도 다시 곧 뺐겼다. 고립된 정착촌 중 한 곳(미슈마르하야르덴Mishumar HaYarden) 만이 아랍군의 수준에 넘어갔다.

 

티후르(טיהור)

아랍군의 수준이 개판이기에 이스라엘 군은 5월에도 각 부대에 할당된 마을을 찾아 파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확실히 정규국가가 된 이스라엘은 정기 회의는 줄이고 이제는 종족 청소와 아랍 군대와의 전쟁에서 병력이 충분히 있는가로 집중하였다. 다만 아랍 연합군은 개판이었고, 5월 15일부로 이스라엘 국민이 된 100만의 팔레스타인 시민을 상대로 종족 청소를 벌여야 하는데 어느쪽에 더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 문제였다.

 

5월 14일 이후로는 이스라엘군 각 부대에 하달된 명령에 이 티후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띄게 된다. 히브리어로 정화를 뜻하는 이 단어는 팔레스타인의 도시와  마을을 병사들이 파괴하러 가기 앞서 이 단어를 보여 줌으로써 부대의 사기를 진작 시켰다. 팔레스타인인을 대상으로 한 종족 청소는 이후로도 줄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피난 가는 팔레스타인 난민

 

1948년 5월 말까지 종족 청소는 충실하게 진행되었다. 아랍 연합군의 군사력은 형편없었다. 기존 아랍 지원병만큼이나 군사력은 형편없었고, 그들의 하는 작전도 고립된 유대인 정착촌이나 공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완전히 자아도취되어 기존에 요르단에게 약속한 요르단강 서안이나 골란 고원, 레바논 남부 점령을 고려하기도 할 정도였다. 5월 22일 키르야티 군 사령관의 보고서에서는 기존의 폭약 대신에 불도저로 마을을 밀어도 되냐는 질문을 할 정도로 느긋함까지 보이며 팔레스타인 마을을 파괴헀다.

 

한편 5월 12일 하가나 소속 알렉산드로니 여단은 텔아비브와 야파의 동쪽과 북쪽에 있는 마을들을 청소하란 임무를 받는다. 이들은 5월 말 쯤 되면 저항하는 몇몇 마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마을을 청소하는데 성공한다. 저항하는 몇 안되는 마을들도 7월 쯤 되면 완전히 청소 당해 사라졌다. 5월 22일 알렉산드로니 여단은 또 하나의 악명 높은 학살을 티후르의 기간 동에 저지른다.

 

탄투라 학살

포로들은 무리를 지어 200m 떨어진 곳을 끌려가서 거기서 총살당했습니다. 병사들은 사령관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제 사촌이 이번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사령관은 그 말을 듣고 부대에 5~7명의 무리를 따로 데려가서 처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계속해서 한 병사가 와서 자기 형제가 전투 중에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형제의 경우에는 보복이 더 컸지요. 사령관은 부대에 더 많은 무리를 데려가서 총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식의 과정이 계속 됐지요.

탄투라 학살에 관여한 유대 장교의 증언

 

 

영국 위임 통치시기 탄투라

 

탄투라는 지중해 연안의 1,500명의 아랍인이 사는 조금은 큰 마을이었다. 이들은 어업이나 농업, 인근 하이파에서의 잡무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5월 15일 마을 촌장을 비롯한 탄투라의 몇몇 명사들에게 유대 정보 장교들이 찾아와 항복을 제시했다.  하지만 항복을 하면 마을에서 쫓겨날 것이라 생각한 지역 명사들은 이 제안을 거절했고, 1주일 후 5월 22일 밤 이스라엘 군은 탄투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탄투라에서 방관 중인 적십자사

 

보통 이스라엘 군의 공격은 사방 공격이 아닌 삼면 공격으로 진행되었다. 삼면에서 공격을 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살기 위해 열어놓은 구멍으로 도망가기 일 수 였다. 그러나 이번 공격은 달랐다.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졌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의 포로가 되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인근 마을 푸레이디스로 쫓아냈다. 몇몇 운좋은 남자들은 1년 반 뒤 푸레이디스에서 가족들과 상봉했다.

 

 

이스라엘군에 의해 남자들과 분리된 탄투라의 여성과 아이들

 

분류된 수백명의 남자들은 이스라엘군에 이끌려 해안가로 향했다. 이스라엘군 정보 장교 심숀 마시비츠Shimshon Mashvitz는 눈을 가린 부역자와 같이 가서 몇 명을 골라내고는 미리 작성된 명단에 따라 이스라엘 정부에 조금이라도 해되는 일을 한 자라면 모조리 처형했다. 물론 이들만 살해당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밤중의 기습공격으로 거리와 집집마다 이스라엘군의 총을 맞고 죽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몇몇 희생자들은 존재하지도 않은 대규모 무기 은닉처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제대로 질문을 못하면 그자리에서 총살 당했다.

 

 

점령 직후의 탄투라 사진

 

모든 이들이 죽을 뻔 순간에 인근 유대인 정착촌 지크론야코프의 촌장 야코프 엡스타인Yaacov Epstein이 와서 학살을 간신히 멈췄다. 한 생존자는 엡스타인이 너무 늦게 왔다고 한탄했지만, 그마저도 안왔다면 모든 탄투라의 남성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생존자들은 현재 시리아 야르무크의 난민촌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때의 공포를 아직도 가슴에 담아두고 살아가고 있다.

 

탄투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모른다. 최소수치도 100에 육박하고 시체를 트랙터로 옮겨 묻은 지크론야코프의 주민 모르데하이 소콜레르는 본인이 직접 한명 한명 묻어주었기에 230명의 학살된 시신을 묻었다고 증언했다. 일부 생존자는 심숀 마시비츠가 바닷가에 모인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채찍을 민간인에게 휘둘렀다는 증언을 남겼다.

 

 

6월 탄투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

 

알렉산드로니 여단은 탄투라에 대한 청소를 마무리 한 후 갈릴리 북부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역시 초토화 작전을 벌인다. 

탄투라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숲과 시민들이 놀기 좋게 조성한 테마파크만이 남아 있다.

 

청소 확대 작전-파괴, 학살, 추방

6월에 들어선 인근 키부츠에 보호를 받아 아직까지도 살아있었던 마을들도 많이 사라졌다. 나즈드Najd, 부레이르Burayr, 심심Simsim, 후즈Huj 등이 위의 언급 한 마을들의 대표적인 예시였다. 자신들이 보호해준 마을들도 사라진 것에 해당 마을 주변 키부츠들도 충격을 먹을 정도였다.

 

야파를 떠나는 팔레스타인 가족(1948)

 

한편 5월 20일 UN에선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을 중재 대사로 파견한다. 이스라엘에서는 폴케 베르나도테가 2차 대전 당시에 유대인들을 보호해 주었기에 당연히 자기들 편으로 생각하고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베르나도테 백작은 정전을 중재하기 위해 계속 협상을 벌였지만 그럼에도 종족 청소는 계속되었다. 벤구리온은 폴케 베르나도테의 노력이 있는 와중에도 오늘은 팔레스타인의 어디 정착지가 파괴되었는지 기쁜 마음으로 썼다. 이제는 일기에 조심스런 표현따윈 없이 해당 마을을 청소[tihur]했다고 적어 놓았다. 이 당시 벤구리온이 가진 문제는 집을 보이는 족족 폭파하기 때문에 TNT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랍군은 지리멸렬 해졌다. 연합군의 대표인 요르단이 동예루살렘을 요르단의 일부에 둬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아랍 연합군은 원동력을 상실했다. 그나마 아랍 연합군이 지리멸렬한 와중에도 이집트는 끝까지 이스라엘과 싸웠다. 이집트 공군은 텔아비브를 몇 번이나 폭격했고 한 번은 벤구리온 집을 직격하기도 했으나, 전쟁의 향방을 줄 만한 결정적인 무언가는 아니었다. 

 

6월 8일 베르나도테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11일부로 1차 정전이 약 4주간 진행되었다. 이 4주간의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남부 마을 수십개를 사람이 다시는 들어 올 수 없도록 완전히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정전이 끝날 무렵에는 그나마 규모있던 팔레스타인의 촌락들도 이스라엘 군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

 

 

야자수 작전 당시의 작전도

 

7월에는 야자수 작전Operation Dekel이란 이름 하에 아랍 방어군을 맞이 한 카쿤이나 해안 도로 상에 있는 에인가잘, 에인하우드, 티라트하이파, 크파르, 이즈짐을 함락하고 동시에 나사렛시와 주변 마을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이 시기에 탄투라의 학살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을 고려하여 추방 마을 인근에 포로 수용소를 두었다. 이 시기엔 정화(티후르 tihur)란 단어 대신 청소nikkuy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야자수 작전으로 갈릴리 서부는 이스라엘에 의해 완전히 점령 된다.

 

나사렛의 경우 학살이 벌어지진 않았다. 아마 예수의 고향이다 보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서 노골적인 파괴와 추방는 보기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벤구리온도 인구의 60% 이상인 (16,000명의 주민 중 10,000명이 기독교도 였다.) 나사렛 만큼은 주민 추방을 원치 않은 입장이었다. 야자수 작전 최고 지휘관 모셰 카르밀Moshe Karmil은 주민들을 모조리 추방할려고 했지만, 벤구리온의 의지와 벤구리온과 같은 의견인 벤 돈켈만Ben Donkelman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나사렛의 주민들은 추방을 면하게 된다. 현재까지 유일하게 이스라엘 유일의 아랍도시로 나사렛은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이건 극도로 운이 좋은 경우였다.

 

야자수 작전은 10월 나사렛 주변의 살라딘과 십자군이 싸우던 유명한 전적지였던 히틴의 주민들이 추방하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UN 중재 대사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의 노력으로 1차 중동전쟁의 두 번의 휴전 기간을 가지게 된다. 이 시기에도 이스라엘 군은 팔레스타인 각지의 마을들을 초토화 하는데 골몰해 있었는데, 갈릴리 서부는 야자수 작전, 요르단 계곡은 삼나무Brosh 작전 등 창의적인 이름을 내건 작전들이 곳곳에서 펼쳐 졌다.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는 작전들도 이제는 청소가 아닌 빗자루나 가위 등과 같은 무언가를 쓸어내거나 잘라내는 듯한 이름의 작전으로 시행되었다. 야자수 작전으로 크파르야시프, 이블린, 샤파아므르 같은 이슬람교와 기독교, 드루즈가 두루두루 섞여 사는 몇몇 마을만 제외하고 많은 이들은 국외 추방 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추방되다 보니 추방자들이 다른 마을 추방자들을 이미 추방한 마을에 살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슬람교도는 얄쨜 없이 추방하고 기독교도들을 이미 철거된 곳으로 보내다 보니 행정이 난잡해 지는 경우도 있었다. 위의 언급한 세 마을도 이런 상황으로 난민들이 몰려오다 보니 마을의 규모가 도시규모로 커져버렸다.

 

 

경찰관 작전의 주 목표인 리틀 트라이앵글의 지도

 

7월 24일과 26일 경찰관 작전Operation Policeman, Mivtza Shoter란 이름 하에 하이파 남부의 리틀 트라이앵글이라 부르는 지역(세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음)에 B-17와 더글라스 DC-5로 구성된 공군 폭격기와 이스라엘 해군이 맹렬히 마을을 폭격했다. 이미 달렛 작전 기간 중에도 지형의 험난함을 이용해 완강히 버티던 마을들은 이스라엘의 거센 공격에 무너졌다.

 

리틀 트라이앵글의 세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인 이즈짐은 3,000명의 주민이 살았지만, 이 작전으로 모두 쫓겨나고 이스라엘 정착촌 케렘마하랄Kerem Maharal이 세워졌다. 주민들은 제닌으로 추방되었고, 약 130명의 주민들이 이 작전으로 사망했다. 이스라엘군은 보고에서 아군 폭격으로 사망한 200구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보고했다.

 

에인가잘의 경우 가난한 마을이었지만, 2차 정전이 발효되었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때마침 라마단 기간이라 커피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던 와중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마을은 초토화 되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남자들의 인도로 도피하였고,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점령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점령군은 1936년 아랍 봉기에 참여한 걸로 알려진 17명의 남자들을 처형했고 나머지 남자들은 모두 추방했다.

 

 

리드와 라믈레를 점령하러 출발하는 팔마흐 부대

 

7월 9일에서 19일엔 다니 작전Operation Dani이 실시 되어, 라믈라와 리드를 점령하는 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때 요르단 군과 접전을 벌여 승리했는데, 이때 요르단 군을 지휘관 존 글럽의 지휘 판단의 미스로 해당 지역의 아랍 군단을 모두 철수했다. 아랍 지원군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도망쳤다. 해당 지역 주민들은 UN 결의안 당시 팔레스타인 국가로 지정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요르단 군이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지만 버림받았다. 리드 지역의 남자들은 구식 라이플 총을 들고 리드 중심부의 다하미시 모스크에서 이스라엘군과 싸웠다. 몇시간의 혈투 끝에 리드의 남자들은 항복했지만 이스라엘 군에 의해 학살 당했다. 팔레스타인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의 학살과 파괴로 남여노소 해서 426명이 살해 당했고, 모스크 내에서는 176구의 주검이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5만명의 시민들이 강제로 추방되어 요르단강 서안으로 끌려갔다.

 

리드(리다lydda, 알루드라고도 불림) 공항을 점령한 이스라엘군

 

밤중에 군인들이 점령한 지역의 모든 집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에워싸고 도시에 쫓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카루바Kharruba와 바르필리야Barfilyya로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다른 군인들은 말이 달랐지요. "압둘라 왕한테, 라말라로 가라." 정처 없는 길을 나서는 사람들로 거리는 넘쳤습니다.

.................

점령군들은 동쪽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난민, 특히 여자들의 몸을 뒤져서 목이나 손목, 손가락에 하고 있던 금붙이나 옷 속에 숨긴 것까지 빼앗았고, 또 돈뿐만 아니라 값나가는 물건은 들고 갈 만큼 가벼운 것이면 무엇이든 챙겼습니다.

스피로 무나야르Spiro Munayar의 증언

 

사실상 그들(=이스라엘군)이 가는 길을 막는 모든 게 죽었다. 도로변에 구멍이 숭숭 뚫린 시체가 널려 있었다.

시카고 선타임스의 키스 휠러Keith Wheeler의 증언

 

무자비할 정도로 눈부신 돌격이 끝난 뒤 아랍 남자, 여자, 심지어 어린아이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케네스 빌비Kenneth Bilby의 저서 근동의 신성New Star in the Near East에서

 

참고로 서방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위의 언급한 케네스 빌비의 저서 내용의 "무자비할 정도로 눈부신 돌격"을 보면 알다시피 미국의 언론은 이스라엘에 편중적 이었다. 사실 위의 키스 휠러와 케네스 빌비는 이스라엘군이 종군기자 식으로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런던 "이코노미스트"지 만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살육과 파괴, 그리고 그로인한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고통에 대해서 언급했다.

 

리드의 학살을 듣고 라믈라의 명사들은 이스라엘 군에게 항복했다. 7월 14일 이스라엘 군은 도시로 진주했고, 도시는 이스라엘군에게 약탈 당했다. 

 

이갈 알론 (리드와 라믈라의)주민들은 어떻게 할까요?

다비드 벤구리온 '다 내쫓으세요.'라는 의미로 손을 휘저었다.

라믈라 사령관 이츠하크 라빈의 회고

 

 

이스라엘에 점령 당한 직후의 리드의 전경

 

리드와 라믈라의 시민들 약 5만명이 요르단 강 서안으로 추방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과 식량도 없이 행진하다 길에서 탈진하여 사망했다. 리드와 라믈라를 포기한 존 글럽 파샤는 요르단군 참모총장에서 해임되었다.

 

이스라엘군은 라트룬과 예루살렘 동쪽의 셰이크 자라를 공격했지만, 요르단 군의 잘 준비된 방어로 패퇴했다. 오히려 이스라엘 역사는 리드의 학살보단 라트룬에서의 패배를 더 부각하는 모양세를 보였다.

 

 

이스라엘 군이 운용한 1대의 DC-5 "베이글랜서" 1948년 5월 26일 이스라엘이 인수하였다. 에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신 뉴 홀랜드의 항공 마크가 붙여져 있다.(현 사진에선 식별 불가), 등록번호는 VH-CXC, 주로 네게브 사막 보급용으로 쓰였지만, 간간히 폭격으로도 사용되었다.

 

1948년 여름엔 이제 어느정도 정리된 북쪽은 공군이 정리하게 두었다. 7월 17일 북부사령부에서는 이스라엘 공군이 세즈라Sejra에서 빠져나오는 피난민들을 향해 공군기들이 발포했다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마을 파괴보단 피난민 공격에 열중이었다. 벤구리온은 남부로 관심을 돌려 네게브 사막의 베두인들도 내쫓기 시작했다. 약 96개의 부족, 9만명의 베두인족이 네게브 사막에서 살다가 이스라엘군에 의해 11개 부족은 추방, 19개 부족은 폐쇄지역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추방은 59년까지 이어졌다.

2개의 댓글

2022.10.28

내일 밤에 정리해서 마무리 고고 하겠음.

0
2022.10.28

정보글은 개추~!!!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14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3 FishAndMaps 3 1 일 전
1213 [역사] 인류의 기원 (3) 3 식별불해 6 4 일 전
1212 [역사]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ver2 19 FishAndMaps 15 10 일 전
1211 [역사] 군사첩보 실패의 교과서-욤 키푸르(完) 1 綠象 1 11 일 전
1210 [역사] 아편 전쟁 실제 후기의 후기 3 carrera 13 14 일 전
1209 [역사] 왜 사형수의 인권을 보장해야만 하는가 72 골방철학가 62 24 일 전
1208 [역사] 세계역사상 환경적으로 제일 해를 끼친 전쟁행위 17 세기노비추적꾼 13 29 일 전
1207 [역사] 송파장과 가락시장 5 Alcaraz 9 2024.03.28
1206 [역사] 미국인의 시적인 중지 4 K1A1 17 2024.03.26
1205 [역사] 역사학자: 드래곤볼은 일본 제국주의사관 만화 17 세기노비추적꾼 13 2024.03.23
1204 [역사] 애니메이션 지도로 보는 고려거란전쟁 6 FishAndMaps 6 2024.03.13
1203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3 FishAndMaps 4 2024.03.08
1202 [역사] 지도로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동안의 기록 9 FishAndMaps 12 2024.03.06
1201 [역사] [2차 고당전쟁] 9. 연개소문 최대의 승첩 (完) 3 bebackin 5 2024.03.01
1200 [역사] [2차 고당전쟁] 8. 태산봉선(泰山封禪) 3 bebackin 4 2024.02.29
1199 [역사]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이야기 3 에벰베 6 2024.02.28
1198 [역사] [2차 고당전쟁] 7. 선택과 집중 bebackin 4 2024.02.28
1197 [역사] [2차 고당전쟁] 6. 고구려의 ‘이일대로’ 2 bebackin 4 2024.02.27
1196 [역사] [2차 고당전쟁] 5. 예고된 변곡점 1 bebackin 3 2024.02.26
1195 [역사] [2차 고당전쟁] 4. 침공군의 진격 1 bebackin 3 2024.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