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속에는 언제나 세상이 있다.
여기저기 찢겨지고 나서
말 없이 한숨만 푹 쉬어도 다 안다는듯
속으론 위로하며, 겉으론 비웃어주는 친구랑 소주 한 잔 헌다.
이 소주잔은 매일 밤새도록 다른 잔과 부딪히고,
나같이 한숨많은 사람들과 입맞추며
나처럼 "참 쓰다" 헐 것이다.
저 옆에선 미래를 고민하는 젊은 청년들이 잠시 다 잊어먹은듯
신나게 입에 고기를 우겨넣고
저 한 쪽에선 실연당한듯 축 쳐진 어깨로 한 손은 지 허벅지에,
한 손은 원형 스뎅 테이블 한 구석에 걸쳐놓고
멍하게 익어가는 고기만 보고있다.
실없는넘.
이 술이란 녀석은, 한 때는 어른스러움의 표상으로 나에게 존경의 대상이었고,
또 한 때는 내 하루를 완전히 망쳐버린 원망의 대상이었으며,
이제는 절로 뒤엉켜버린 머리를 풀어주는 의사 선생이다.
또 앞으로는 이 녀석이 어떤 친구가 되어줄지 슬쩍 기대도 얹어본다.
하루에 세 번 하늘을 바라보면 여유로운 삶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같은 사람이야 고개를 빳빳이 들어봐도 석면 타일에 기러기 몇 마리나 있으려나 셀 수 있는게 전부고
가끔 이렇게 소주 잔과 열 댓번 진하게 키스하고나서야 시커먼 하늘이나 볼 수 있겠다 하면서
하늘이 돈다 돌아 툴툴대며 집에 들어가는게 여유지싶다.
이 녀석은 또 내 변호인이다.
김아무개, 박아무개 앉혀놓고 젊은 날 목에 핏대 세워가며 내 핑크빛 가득할거라 여겼던 청춘 얘기 한것을
우리 참선생이 다 듣고있었다.
그 때 마다 참선생은 저기 가슴 바닥 밑부터 내가 서러워했던것들, 화났던 것들, 눈물 질질 흘렸던 것들을
결재서류 마냥 주르륵 보여주고 "자, 인쟈 너 하고싶은대로 다혀라. 그 동안 힘들었잖여?" 그랬다.
대충 눈꺼풀이 슬슬 내려앉고 귓볼이 뜨끈뜨근해질 때 쯤 요녀석이 귓속말로 그런다.
"저기 정수기 앞에 앉은 할배는 옛적에 니 옆집 살던 아파트 통장아녀?"
그 할배가 나 어릴 때, 이불에 오줌싸고 소금 얻으러 갔을 때 웃음서 소금 줬던게 아직도 생각이 난다.
"글고 저 시계 밑에 앉은 기지배는... 아까 계산대 옆에서 본 그 아재는..."
몰겄다. 누가 누군지 알게 뭐람. 김아무개랑 박아무개는 내가 중학교 때 담임에게 싸다구 맞은 얘기를 20년 째 하며 지금도 웃고있는데.
하여튼간에 술에는 참 세상이 있다. 앞으로 1년을 살지, 60년을 더 살지는 모르겠지만
이녀석이 내 청춘부터 죽을 때 꺼정 옆에서 얘기 다 듣고있을테니 누가 내 얘기 묻걸랑 참선생한테 물어보쇼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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