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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25일 자유프랑스(La France Libre)의 필리프 르클레르가 이끄는 병력이 파리를 해방시키고 다음 날인 8월 26일,

자유프랑스의 리더로서 파리에 입성한 샤를 드골은 개선문에서 노트르담 대성당까지 행진하는 의식을 가졌다.

그는 그 날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파리! 파리는 능욕당했습니다! 파리는 박해받았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파리 스스로, 파리시민들이 프랑스군의 지원으로, 전프랑스의 원조와 협조를 받아,

스스로 투쟁한 프랑스, 유일한 프랑스, 진정한 프랑스, 영원한 프랑스의 도움으로 해방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설은 자유프랑스를 기존 프랑스정부의 적통으로 선언하는 것이었고 나치점령기 프랑스의 정부였던 비시정부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 존재했던 프랑스 제3공화국은 비시정부가 아니라 드골의 자유프랑스와 레지스탕스가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프랑스인들이 레지스탕스를 통해 전국민적으로 나치독일에 대항했다는 기억을 향유하게 되었다.

드골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발언하기도 했다.

 

"공화국은 한번도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자유프랑스, 투쟁프랑스, 민족해방 프랑스위원회가 차례로 공화국을 이어왔습니다.

비시정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무효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억은 진실에 대한 외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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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앵발리드 내 군사박물관의 드골 그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6월 13일 파리가 나치독일군에게 함락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의 폴 레노 총리는 16일 사임했다.

그의 역할은 고령의 필리프 페탱에게 위임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었던 필리프 페탱 원수는 전권을 위임받은 다음날 독일과의 휴전을 추진했고 6월 22일 사실상의 항복조약인 독일과의 휴전에 서명했다.

조약의 결과 파리를 포함하는 북부프랑스 전체는 나치의 점령지가 되었으나 국토의 2/5에 해당하는 남부프랑스 지역은 자치권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0년 7월 10일 프랑스 제3공화국 의회는

의원 569명 중 찬성 472명, 반대 80명, 기권 17명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페탱에게 입법과 행정에 관한 전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프랑스 국민들이 선출한 의원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3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비시를 임시수도로 하는 '프랑스 국가'(l'État français)가 탄생했다.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이 무렵에는 작은 임시집단에 불과했고 프랑스의 식민지들 역시 여전히 비시정부의 관할 아래 있었다.

심지어 페탱은 미국, 소련 등과 외교관계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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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점령지구- 붉은색 / 비시정부 통치영역 - 푸른색

 

 

전쟁 전 1930년대 제3공화국은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있었고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파시즘이 대두하면서 내부로도 극심한 좌우파 대립을 겪고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과 계속되는 정부의 부패와 무능은 프랑스인들의 실망감과 무력감을 더욱 팽배시켰다.

점차 세력을 넓혀가는 파시즘에 대항해 공산당(극좌), 사회당(좌익), 급진당(중도)은 '인민전선'을 구성해 1936년 총선에서 승리했으나

인민전선은 경제정책 실패와 스페인 내전(스페인 인민전선 공화국 VS 프랑코 쿠데타군)의 지원문제로 내부 갈등을 겪은 끝에 와해되고 말았다.

급진당을 위시한 중도파와 공산주의 세력이 다시 대립하면서 프랑스의 정치는 표류하기 시작했고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으로 사회의 우경화가 진행되었다. 

전쟁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일어났고 프랑스는 충격적인 패배와 파리함락이라는 치욕까지 맛봐야 했다.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의 실패는 명확해보였다. 이제 개혁과 재건이 요구되었다.  

 

비시정부는 바로 이 대내외적으로 무너진 프랑스라는 토대에서 만들어졌고 그 정권을 잡은 페탱은 프랑스의 재건을 위해 "민족혁명"이라는 개념을 꺼내들었다.

1940년 10월 8일 처음 사용된 이 용어는 명백히 프랑스의 공화주의적 전통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비시정부는 프랑스공화국의 이념이었던 '자유, 평등, 우애'를 부정했다. '자유, 평등, 우애'는 곧 '노동, 가족, 국가'로 대체되었다.

공화정 형태는 개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헌법조항도 폐지되었고 의회는 유명무실해졌으며 비시정부에서 모든 권력은 원수인 페탱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 명백히 반공화주의적인 성격에도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비시정부를 지지 혹은 묵인했다.

심지어 페탱은 그의 반공화주의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의 수호자로 묘사되었고 놀랍게도 레지스탕스들 중에도 페탱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상당했다. 
비점령지구의 레지스탕스 지도자였던 앙리 프르네는 비시 정부가 수립된 후

“페탱 원수를 신임하는 프랑스 인민은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다시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면서

“높은 권위와 비할 바 없는 위신으로 우리를 지원하실 수 있도록 페탱 원수님, 만수무강하소서.”라는 말까지 했다.

또 다른 레지스탕스 조직인 ‘리베르테(Liberté)’ 역시 1941년 1월 10일자 신문에

“우리는 페탱 원수가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경탄할 만한 명석함과 불변의 정력으로

프랑스의 독립을 유지하고 프랑스의 모든 희망을 지키려고 노력했음을 안다.”고 글을 실었다. 

 

이런 현상이 가능했던 것은 제3공화국의 실패와 개혁이라는 이상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대 프랑스인들에게 휴전은 굴욕과 분노보다는 안도감을 안겨주었고 많은 이들이 비시정부가 독일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 프랑스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독일에게 패한 프랑스라는 국가적 위기의 상황은 개혁을 시도할 좋은 기회였다.

비시정부에 협력했던 프랑스 지식인들 전부가 나치독일과 히틀러의 정책과 주장에 찬동한 것도 아니었다.

상당수 지식인들은 독일의 점령을 받아들이면서도 비시 정부를 통해 독일과 동반자의 위치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프랑스를 개혁하고 다시금 유럽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런 기조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페탱이 말하고 비시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민족혁명이었다.

이 사실은 비시정부 치하에서 벌어진 수많은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반유대적 정책들이 프랑스인 다수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비시정부가 단순히 나치독일의 괴뢰정부로 취급될 수 없음은 유대인 문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비점령지역인 남부프랑스에서 본격적인 유대인 차별조치는 독일이 아닌 비시정부의 자발적 행위로 시작되었다.

심지어 독일점령당국보다도 비시정부가 먼저 포고령에 '인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였다.

1940년부터 독일점령당국(점령지구, 북부프랑스)과 비시정부(비점령지구, 남부프랑스)는

서로 주거니받거니 유대인 차별조치들을 만들어나가며 유대인박해의 범위를 확대시켜나갔다.

1940년 10월에 공무원 중 유대인 비율을 제한하는 유대인공직법 역시 비시정부가 먼저 만들었고 이후 이 법은 대학생과 의사 등 전문직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비시정부의 통치기간 동안 이 법으로 해고된 3,422명의 유대인 공무원들 중 78%안 2,669명이 비점령지구인 남부프랑스에서 발생했다. 

유대인 검거의 문제에서는 어땠을까?

1942년 3월 27일부터 1944년 8월 17일까지 7만 명이 넘는 프랑스의 유대인들이 검거되어 독일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이중 2,500여명 만이 생존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비시정부 인사들의 자발성이 확인된다.

비시정부의 총리였던 피에르 라발은 16세 이상의 유대인들의 이송을 요구하는 독일에게 16세 미만의 어린이들도 데려갈 것을 제안하는가 하면

독일이 11,000명의 비점령지구 유대인들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자 14,000명 이상을 보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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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프랑스의 상징이었던 로렌의 십자가  

 

 

 

그러나 해방 후 비시정부가 프랑스의 역사 속에서 가지고 있는 자발성과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비시정부에 대한 기억은 급속히 망각되었다.

그것은 프랑스 역사의 오욕이었고 조국에 대한 모독이었던 것이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드골이 만들어낸 레지스탕스 신화였다. 

프랑스인들이 비시정부가 아닌 레지스탕스를 지지했고 레지스탕스에 협력해 독일에게 저항했다는 신화, 

그리고 그 신화에서 레지스탕스를 이끈 것은 자유프랑스였고 그 지도자는 드골 자신이었다.

드골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레지스탕스에게는 불멸의 명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실제로는 레지스탕스의 주축이었던 좌익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을 어느정도 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작업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친독협력자들을 처리해야 했다.

이제 숙청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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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페탱

 

 

최초의 청산은 초법적 형태로 시작되었다.

레지스탕스들은 자체적인 군법회의나 전투과정을 거치면서 독일에 대한 협력자들을 처형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전국에서 9000명 정도가 약식으로 처형당했으며 이중 2/3 이상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파리 해방을 전후로 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런 초법적 숙청 작업은 그러나 많은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는데 무고한 사람들을 밀고자로 몰아 죽이는가 하면

좌우 레지스탕스들이 노선 갈등의 과정에서 이러한 처형방법을 악용하기도 했다. 

드골은 초법적 숙청과 국내 레지스탕스, 특히 좌익 레지스탕스 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국가의 이름으로" 정의를 집행할 것을 강조하며

레지스탕스들의 무기를 회수하고 독일협력자들에 대한 처벌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1944년 8월 국민부적격이라는 죄목이 만들어졌고 이 죄는

"1940년 6월 16일 이후에 프랑스 국내외에서 자발적으로 독일이나 그 동맹국들에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었거나

국민통합 혹은 프랑스인의 자유와 평등에 해를 끼쳤다는 것이 인정된 프랑스인"에게 적용되었다.

12월에는 국민부적격죄에 대한 처벌로 공민권박탈이 부과되었다.

공민권박탈형은 해당 죄목의 사람에세 투표권, 선거권, 피선거권을 박탈하고 공직과 민간의 모든 기구 활동, 기업운영을 금지했으며

작게는 훈장과 무기를 소지할 권리, 육해공군의 계급 역시 박탈하는 법이었다.

 

재판과 집행을 위한 기관의 설치도 진행되었다.

부역자재판소, 공민재판소, 고등법원이 이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는데

공민재판소는 오직 국민부적격죄의 해당 여부만을 다루는 재판소였고 고등법원은 대독협력의 최고책임자들인 비시정부의 요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기구였다.

이로써 합법적인 사법절차가 모두 마련되었으며 이들 기구는 레지스탕스들에 의한 초법적 숙청을 대체해나갔다.

1951년 1월 31일 부역자재판소가 활동을 종결하기까지 32만 건에 달하는 소송이 부역자재판소와 공민재판소에 의해 진행되어 12만 명 이상이 판결을 받았다.

그 중 6,723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4만 명 가량이 징역이나 금고를, 5만 명 이상이 공민권박탈형을 받았다.

고등법원에서도 필리프 페탱과 피에르 라발 등을 비롯해 정부고위인사들에 대해 108건의 공소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프랑스의 과거사청산은 오늘날 한국에는 성공적 청산의 사례로써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청산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는 다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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