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자유, 평등, 우애, 그리고 방데

프랑스 서부 방데 지역의 도시인 숄레 인근의 퓌뒤푸(Puy du fou)라는 곳에서는 고성을 배경으로 한 역사테마파크가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 내국인은 물론 전세계에서 매년 수백만이 찾아오는,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인 이 테마파크에서는

매년 여름 방데 지역주민 수천명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지는 '시네세니(La Cinéscénie)'라는 독특한 야외공연이 펼쳐진다.

시네세니는 방데지역의 역사를 한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중세부터 현대까지 구성하여 보여준다.

 

그런데 공연의 중반부 즈음 방데지역의 평화로웠던 농촌공동체는 삼색기를 휘날리며 총칼로 무장하고 들어온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학살당하고 불태워진다. 

삼색기가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그들은 대혁명기 프랑스 공화국의, 혁명정부의 군대인 것이다.

농민들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백합기와 십자가, 성심 문양을 들고 저항하지만 무참히 패하고 곧 공연의 배경인 고성은 화염에 휩쌓인다.

혁명의 국가인 프랑스의 한복판, 그것도 프랑스인들을 비롯해 전세계에서 수백만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테마파크에서 보여준다는 공연이

혁명군이 귀족도, 성직자도 아닌 농민과 농촌을 짓밟고 학살하는 꼴이라니! 그리고 자랑스럽게 휘날리는 왕당파의 깃발이라니!

그러나 실제로 방데는 그렇게 짓밟혔다. 1789년 대혁명의 대의는 방데 지역의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시네세니 공연의 배경을 이루는 퓌뒤푸의 고성이 실제로 그 시절 혁명군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점이다.

수백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방데인들은 자기 지역의 역사를 생동감 있게 재현해낸 것이다.

이 지역의 대규모 테마파크 조성이 수십년 전 조촐하게 시작한 시네세니 공연이 대성공하면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지적하면

그 흥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혁명의 상징성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이 공연을 기꺼이 수용한 프랑스의 사회분위기 또한.)

 

그렇다면 도대체 방데지역민들 수천명이 자원봉사까지 해가며 이 공연을 통해 재현해내고자 한 자기 선조들의 역사는 무엇이었을까?

 

방데 시네세니 홍보영상(15초 즈음부터 방데로 진군해 들어오는 혁명군을 볼 수 있다.)

 

 

방데전쟁(Guerre de Vendée)


방데전쟁은 1793년부터 1796년까지 프랑스 혁명 정부의 징집령에 대항해 봉기한 농민군과 프랑스 혁명정부(제1공화국, 국민공회 시절)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일컫는다.

반란은 루아르아틀랑티크(Loire-Atlantique) , 메네루아르(Maine-et-Loire) , 되세브르(Deux-Sévres), 방데(Vendée)

이렇게 프랑스 서부 4개 도(Départements)에 걸쳐 일어났으며 농민 봉기의 시발점이자 중심지가 방데였기 때문에

이후 방데전쟁, 방데반란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1793년 봄, 제1차 대프랑스동맹으로 인한 대외전쟁으로 말미암아 프랑스 혁명정부가 30만 징집령을 선포하자 이를 계기로 프랑스 서부의 농민들이 최초 봉기했다.

3월 11일 징집관이 방데에 나타나자 농민 시위가 전개되었고 농민들이 관리와 병사들을 내쫓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소요는 순식간에 서부 전역으로 퍼졌는데 행상인 출신 자크 카텔리노(Jacques Cathelineau)가 이끄는 1만5천여명의 농민군이

방데의 주요 도시인 숄레를 장악했으며 여기에 방데의 귀족출신 왕당파 장교들이 가세했다.

스스로를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라고 칭한 이들은 정부군을 몰아내면서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들과 세력을 합치기 시작했다.

 

혁명정부인 국민공회는 왕당파의 휘장을 착용한 이들과 손에 무기를 든 모든 반란자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하고 진압군을 파견했으나

오히려 이들은 농민군에 의해 패퇴되었고 놀란 혁명정부는 23일부터 공식적으로

'방데와 인근 도의 전쟁(La guerre de vendée et des département circonvoisins)'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정부군은 4월에 숄레 탈환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6월까지 방데군은 지역 거점인 앙제, 소뮈르를 점령하는 등 승전을 거듭했고

루아르강 이남 전역으로 세력을 넓혔으나 6월 29일 낭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크 카텔리노가 부상으로 사망하면서 세력이 꺾였다.

 

8월, 정부는 반격을 시작하며 방데전역에 대한 파괴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방데인들에 대한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0월 17일 방데군대가 숄레에서 패배하면서 방데군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지역의 봉기세력과 결합하여 최후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방데군과 학살을 피해 도망친 주민 10여만 명은 영불해협을 향해 이동했으나 11월 14일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그랑빌에서 정부군에게 패했고

갈레른 회군이라 불리는 회군이 시작된다. 방데군은 다시 남하하던 중 12월 12일 르망에서 대패했다.

 

잔존세력은 루아르강 남쪽을 향하여 철수했으나 12월 23일 루아르강 북쪽의 사브네에서 미처 도강하지 못한 마지막 방데군이 따라잡혀 전멸당했으며

포로와 민간인 수천명이 루아르강 익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방데군은 와해되었고 이후 전투는 게릴라성을 띄게 되었다.

1794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지옥종대(Colonnes Infernales)라고 이름붙여진 부대를 방데로 파견하여 파괴와 학살을 가했고

방데군대의 주요인물들에 대한 체포와 처형을 집행했다.

전투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나 정부군의 승리는 명확했고 마지막 방데군 지도자 샤레트(Charette de La Contrie)도 총살되었다.

1796년 7월 15일 정부가 서부의 모든 문제가 종결되었다고 선언하면서 방데전쟁은 끝을 맺는다.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jpg

방데군을 이끄는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Henri de la Rochejaquelein)

귀족 출신의 젊은 왕당파 장교였던 그는 방데군을 지휘하던 중 21살의 나이로 전사했다.  

 

 

전통적인 역사관 : 반혁명(Contre-révolution)

 

당대 혁명 정부는 서부 농민들의 봉기를 조국과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비난했으며 왕당파와 보수적 가톨릭 세력이 주도한 반혁명으로 간주했다.

프랑스 혁명 정부의 최대 목표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강화였기에

국민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이 혁명정부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쥘 미슐레(Jules Michelet)를 비롯한 당대 역사학자들은 순진한 서부의 농민들이

귀족과 성직자들의 기만과 음모에 놀아나 구체제 타파를 추구한 혁명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해석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19세기 말 공화주의 역사가들은 방데 전쟁의 규모를 1793년 3월 발생해 그 해 12월에 끝난 작은 내전으로 축소시켰는데

이는 초기 방데의 봉기만을 강조함으로써 1794년 이후 공화국 군대에 의해 벌어진 초토화 작전과 학살 등의 보복행위를 은폐시켰다.

이런 국가 주도의 공식적인 기억, 즉 혁명에 거역한 방데라는 국가기억의 형성은 방데 전쟁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방해했다.

국가기억 속의 방데전쟁에서는 농민들의 단순한 무지와 광신, 그리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가 강조되었다.

19세기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공화주의자들은 체계화된 공교육 제도를 이용해 방데를 반혁명이라고 공식화시켰고

봉건적 질서와 절대 왕정을 혁파한 혁명에 대한 저항은 이해할 수 없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방데란 단어는 20세기 중반까지도 '공화국의 적, 망명귀족, 왕당파, 반란' 등의 용어로 이해되었고 방데라는 단어가 반혁명과 반란의 이미지를 담게 되면서

자연히 방데는 반혁명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방데주민들은 반혁명주의자들의 후손이 되었다.

차별과 모욕, 낙인 속에서 방데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학살과 파괴는 무시되었다.

방데 전쟁의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 주민들은 국가적 무관심 속에서도 방데 전쟁의 발발이 반혁명적인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가 아닌

방데 민중들의 자발적 저항에 따른 것이었음을 기억하고 주장했으나 19세기 동안에 이러한 민간기억의 움직임은 미약했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전후 사회경제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방데 전쟁에 관련해서도

기존의 주류 역사학계의 해석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새로운 역사해석의 대두 : 대항혁명(Anti-révolution)

 

1960년대 연구들은 방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연구를 비판하면서 방데 농민들을 음모에 놀아난 무지한 반란군이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 및 그들과 동일시되었던 혁명정부에 자발적으로 저항한 능동적 행위자로 간주했다.

이 시기의 연구들은 방데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귀족, 성직자들의 음모가 아닌 사회구조적, 지리적, 경제적 요인에서 찾기 위해 노력했다.

구조적 원인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위로부터의 강제적인 통합이 전통적 농촌 세계에 가져온 충격과

이에 대항한 농민들의 자발적 대응 양상을 추적했고 이로써 한세기 넘게 방데 주민들을 억눌러온 번혁명주의자들이란 낙인이 점차 옅어질 수 있었다.

 

이후 1970~80년대 연구가 계속되면서 혁명 당시 방데의 특수성이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방데를 비롯한 서부 지방은 봉건적 의무의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낮아 구체제의 압제로부터 얼마간 자유로웠다.

지역 귀족들은 부재지주의 비중이 타지역보다 낮았고 이에 따라 지역 주민들과 좀 더 친밀할 수 있었다.

또 가톨릭 교구가 단순히 종교적 단위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농촌 공동체 역할을 했고 이로 인해 사제와 농민들 간에도 결속력이 높았으며

교회의 재산이 공동체의 부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방데 지역의 특수성은 사제들을 반혁명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

성직자들을 탄압하는 성직자민사법, 수도원의 폐쇄 등에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곧 그러한 법을 제정한 혁명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혁명정부가 신설한 조세가 농민들에게 새로운 부담이 되어 혁명에 대한 박탈감까지 생겼으며 이런 상황에서

귀족과 교회의 몰수된 재산이 혁명정부를 통해 외지의 부르주아들에게 넘어가자 이를 본 농민들은 공동체의 부가 탐욕스러운 개인들에게 넘어가는 것으로 느꼈다.

 

결국 결정적으로 1793년 2월 혁명정부가 30만 징집령을 선포한 것에 더해 징집대상에서 부르주아들인 지방 하급관리들이 제외된 것이 봉기의 불을 당겼다.

실제로 방데의 봉기는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를 자처한 점을 제외하면 딱히 특정할만한 정치적 계획이 없이 진행되었는데

학자들은 이에 대해 정치체제를 결정하는 문제보다 공동체의 일상에 침입해 들어오는 혁명정부의 조직적 시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에 힘입어 반혁명 대신 대항혁명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반혁명이 구체제의 특권층에 의해 주도되어 구체제의 복귀를 추구하는 움직임을 의미한다면 대항혁명은 혁명정부의 급진적 행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을 의미한다.

즉, 대항혁명이란 용어의 사용은 혁명에 대한 전면적 거부가 아닌, 정치사회적 변화의 특정 측면에 대한 선택적 거부임을 규정한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학술적 연구와 성과는 19세기 이래 고착화된 공화주의적 역사서술, 즉 국가기억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로써 방데에서 시작된 프랑스 서부지역의 봉기는 혁명정부가 지역적 특성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추진한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정부군이 잔혹하게 진압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방데군.png 성심.jpg

방데군의 모습과 그들의 상징이었던 성심 문장(병사의 가슴에도 성심문장이 부착되어 있다.)

 

방데 깃발.JPG

성심문장은 오늘날 방데 도의 공식깃발에도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 

 

 

학살

 

방데전쟁의 구체적인 희생자수가 주요 역사문제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로 이미 방데전쟁으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오랜기간 관심을 못 받은 탓에 학살의 규모에 대한 추정치는 지금도 상당히 오락가락하고 있다.

추정치는 최소 12만 명에서 최대 60만 명까지 존재하며 학살인지 제노사이드인지에 대해서도 말이 갈리지만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사실이다.

 

민간 기록에 따르면 믿기 힘든 잔혹한 기록들도 많다.

결혼식이라며 남녀를 묶어 수장시키거나 아이를 말로 짓밟거나 아기를 총검으로 토스하거나 임산부를 포도압착기로(...).

1794년 12월 1일 방데전쟁의 주 무대였던 3개 도 대표 9명의 국민공회의원들은 파리에 제출한 집단 선언서에서 40만 명이 죽었다며 로베스피에르를 비난했다.

또 정부군 사령관이었던 루이 라자르 오슈(Louis Lazare Hoche)가 1796년 2월 1일 내무장관에게 쓴 편지에서 방데 주민 60만 명을 절멸시켰다고 쓴 부분이 있다.

 

다만 희생된 사람들의 비율은 지옥종대가 활동했던 지역이나 정부군과 방데군의 충돌이 잦았던 지역에서 특히 컸고 다른 지방은 그보다 피해가 적었기 때문에 때문에

40만 명이나 60만 명 희생자 가설은 현재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1990년대 이후 연구결과들은 대략 15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가

전쟁 과정에서 죽거나 학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봉기한 지역의 인구가 80만 명이 안된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여전히 어마어마한 수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숄레같이 방데군의 중심지였던 곳에서는 인구 손실이 40%에 달했다.

이런 예를 들어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같은 역사학자는 프랑스 혁명, 특히 이 시기 프랑스의 권력을 차지했던 자코뱅을

공산주의나 파시즘같은 전체주의의 기원이라고까지 보기도 한다.

 

지옥종대.jpg

방데인들을 학살하는 지옥종대의 모습

 

 

"이제 방데는 없습니다. 여자들과 그 자녀들이 우리 칼에 죽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브네의 소택지와 숲에 묻었습니다.

내게 내려진 지시에 따라 나는 말발굽으로 어린이들을 짓이겼으며 부녀자들을 살해했는데 적어도 이런 조치로 도적의 자식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비난할 포로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 프랑수아 조세프 웨스텔만(François-Joseph Westermann), 프랑스군 장군, 정부 공안위원회 보고서

 

 

혁명은 무엇을 위함인가?

 

 

 

 

 

 

 

http://www.dogdrip.net/105335602 - 한국사 전문가로 도금된 인강강사

http://www.dogdrip.net/105755067 - 간도영유권, 대한민국판 제국주의

http://www.dogdrip.net/119427956 - 다이쇼 데모크라시, 대일본제국의 봄 - 1 

http://www.dogdrip.net/120026247 - 다이쇼 데모크라시, 대일본제국의 봄 - 2

http://www.dogdrip.net/120486460 - 뮤지컬을 통해 본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두 시선

http://www.dogdrip.net/138029898 - 한 노인의 최후변론

 

 

P.S. 글 구성이 나무위키와 비슷하게 느껴진다면 글 작성자가 나무위키 방데전쟁 최초작성자라 그렇습니다.  

21개의 댓글

2017.09.09
방데전쟁 예전에 나폴레옹 전쟁사 정리하다 보면서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첨알았었지.
0
2017.09.09
규모나 잔인함이나 난징대학살급인데?
0
2017.09.09
@게을리즘
학살이란게 원래 하는 짓거리들이 비슷비슷하죠
0
테에.... 이럴 수 없는테치. 견제의 ㅂㅁ을 주는테치
0
2017.09.09
@세레브민주공원
웃후훗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손가락은 솔직한데수웅
0
@드림라이너
읽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는데샤아앗
0
2017.09.09
@세레브민주공원
정직한 챰피인테치
0
2017.09.09
방데전쟁은 나도 얼마전에 책읽다가 알게됐는데 프랑스 혁명이랑 나폴레옹 전쟁 시기는 자세하게 공부한 적이 없다보니까 매우 신선하더군
이런 글은 무적권 추천이야
0
2017.09.09
꿀잼추
0
2017.09.09
잘 썼다. 이런 글들이 많아야 할텐데.
0
2017.09.09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니라 우애라고 써주다니! 좋다!
Fraternité 는 박애가 아님 일본이 번역 잘못한거임
동지애나 우애가 더 맞는 번역
0
2017.09.10
하얀 손이 허벅지 안쪽 쓰다듬는줄
0
2017.09.10
@호뤵
ㅋㅋㅋㅋㅋㅋㅋ
0
재밌네여 잘 읽음
0
2017.09.10
조흔글은 닥추얌!
위키백과도 작성해주시면 안될까연
0
2017.09.11
나만 방댕이로 보고 들어온건가..
0
2017.09.11
방데는 없고 비데만 남앗구나 껄껄
0
2017.09.12
나도 프랑스 대혁명에 비판적이긴 한데 퓌레는 인용하는 부적절하다. 일단 방데관련부분 역사학자가 아님. 거기다 퓌레는 방데전쟁에서 대항혁명군의 평민, 농민 측 비중을 과소평가한다. (F.퓌레, 『프랑스 혁명사』, 김응종 역, 일월서각) 재평가 측은 평민, 농민 측은 주목하는데 퓌레 는 해석이 전혀 다름.

퓌레의 가치는 개념없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프랑스 혁명 해석을 제대로 반박했다는거지, 마르크스주의 대립을 벗어날경우 그 자체로 인용하기엔 적절하지 못한 면이 있음.

방데전쟁 전문 역사학자는 장 클레망 마르탱 인데 이 사람 책은 한국에서 번역된 적이 없다.
0
2017.09.12
@안티파굳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0
2017.09.17
꼬툭튀 실사냐
0
2017.09.17
@개좋은빛살구
리얼리즘입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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