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천하를 휩쓰는 붉은 소용돌이 : 초기 중국공산당사

 

 

 

 

중국공산당은 1921723일 상해에서 창당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세력이 미약했던 이들은 이념적으로 정반대 노선을 걷고 있던 국민당과 본격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국민당과 일단 타협하게 되면서 19241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국민당 역시 아직 중국 전역을 통일하지 못한 상황에서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합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당의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1926년 북벌에 성공, 상해까지 아우르는 중국 남부를 완전히 평정함에 따라 국공합작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9274월 12일 장개석이 상해의 공산당원을 모조리 붙잡아 처형한 「4.12사건으로써 1차 국공합작은 결렬,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기나긴 싸움에 돌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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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군에 의하여 처형되는 중국공산당 당원들. 정치적 이념이 다른 상대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살육은 20세기 내내 계속된다.>

 

 

복수심에 불타는 중국공산당은 일을 크게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19278월 중국공산당내 정치국 총비서로 선출된 구추백의 지휘에 따라 공산당은 대도시에서는 노동자 폭동을, 농촌에서는 농민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1927년 하반기 내내 벌어진 이러한 무장투쟁은 군사적으로는 국민당에게 무력하게 짓밟히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민심을 얻지 못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죠. 능력에 맞지도 않는 큰일을 벌이려던 시도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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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추백[취추바이]. 소련에서 유학한 후 소련식 혁명을 꿈꾼 그는 볼셰비키가 했던 것처럼 대도시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소련과 달리 대도시 산업노동자 계급이 존재하기는 커녕 대도시나 현대적 산업 자체가 박약했던 중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억지로 소련식 혁명을 추구한 구추백은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이 실패의 책임을 떠안고 19286월 구추백은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당을 이끌게 된 이입삼의 노선도 구추백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하여 대도시의 사정이 크게 악화되고, 과거 국민당에게 굴복하는 모양새를 취했던 지방 군벌들이 일제히 항거하며 중국 전역에서 혼란이 시작되자 이입삼은 혁명의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19306월 이입삼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남창, 무한, 장사 등의 대도시에서 또다시 무장투쟁을 일으켰으나 1927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패에 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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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입산[리리싼]. 구추백의 뒤를 이은 이입산이었지만 그는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코민테른과 마찰을 빚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국내 무장투쟁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이후 오랜 시간동안 중국을 떠나야 했지만 훗날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평정한 후 그의 오랜 친구 모택동이 우정을 잊지 않고 이입산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문화대혁명 기간에 숙청된 그는 자살을 택했다.>

 

 

오히려 이들의 어쭙잖은 혁명 시도는 장개석이 아예 공산당의 싹을 뿌리 뽑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죠. 그해 12월부터 1934년까지 국민당은 무려 5차례에 걸쳐 문자 그대로 '공산당을 쓸어버리려는' 소공작전(掃共作戰)을 실시하였으며, 마지막 제 5차 공산당 토벌작전에서 대패한 중국공산당은 모든 근거지를 빼앗기고 머나먼 서쪽의 중국 내륙으로 도망치는 대장정(大長征)길에 올라야만 했습니다. 무려 1년이나 국민당의 추격을 피해 도망친 중국공산당은 1935년 낙후되고 외딴 도시인 섬서성 연안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국민당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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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중인 모택동과 홍군(중국공산당의 무장단체)의 모습. 「대장정」은 정치적, 역사적으로 단순한 퇴각이나 도망 이상의 의의를 가진다. 중국공산당은 드넓은 중국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면서 가난한 중국 농민들에게 혁명의 이상을 선전했고 이는 근거지를 잃은 대신 10억의 민심을 얻는 단초가 되었다. 또한 「대장정」을 거치면서 중국공산당은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로부터 벗어나 처음으로 자주독자노선을 걷게 되면서 스스로의 혁명, 스스로의 이념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들을 구원한 것은 엉뚱하게도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만주와 몽골은 일본의 생존에 필수적인 지역이라는 「만몽생명선론」을 주창한 이래 계속해서 만주 침략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국민당이 공산당의 토벌에 주력하던 1930년대 초반 내내 일본의 침략 시도를 홀로 막아내야 했던 것은 장학량이 이끄는 봉천군벌이었습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자신들을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라고 느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죠. 이에 장학량과 봉천군벌은 점차 국민당에서 멀어져 중국공산당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장개석은 봉천군벌을 위로하고 회유하기 위해 193612월 장학량을 만나러 섬서성 서안으로 갔습니다. 이때 장학량은 장개석의 호위병을 모두 죽이고 장개석을 사로잡은 사건인 서안사건을 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장개석은 공산당을 쓸어내기 위한 마지막 단 한 차례의 공격만을 남겨둔 시점에서 소공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격적인 항일 전쟁이 시작되기 전 공산당을 소탕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가 너무도 허무하게 날아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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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량(좌)과 장개석(우).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무력충돌을 삼가고 내부를 탄탄히 다진 후 힘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장개석은 1930년대 초반 만주의 일본 관동군과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았다. 이는 당장 관동군을 목전에 둔 봉천군벌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처사였고, 결국 장학량은 공산당 토벌전에 참가하라는 국민당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역으로 공산당의 포섭에 넘어가 장개석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193777노구교사건을 기점으로 일본은 대륙 침략에 대한 야욕을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양측의 정식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그것은 8년에 걸쳐 세계사에 전례 없는 잔혹함과 야만성으로 점철될 중일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전면 공격을 맞아 장개석은 공산당과 2차 국공합작을 벌이게 되었으며 국민당은 중국공산당이 항일 투쟁에서 같은 중국인으로서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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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제 ZB vz.26 경기관총을 사격하는 중국 국민혁명군. 독일제, 체코제 등의 우수한 유럽제 무기로 무장하고 독일 군사고문단으로부터 지도받은 국민혁명군은 일반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군의 전면 공격을 맞아 꽤 훌륭하게 싸웠다. 일본은 중국전역에서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였고,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서 내놓은 것이 1941년의 진주만 습격이었다. 미국과 협상하여 ABCD 포위망을 제거하면 중국은 알아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계산이었으나, 그 결과는 독자 여러분 모두가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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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의 국민혁명군 토치카를 향해 사격하는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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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과 국민혁명군의 결연한 방어로 공세에 난항을 겪게 된 일본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여러 무용담을 만들어냈다. 사진은 89식 중전차의 전차장이었던 니시즈미 코지로(西住 小次郎)와 1,300여발의 탄흔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전차이다. 니시즈미 코지로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작전중 전차에서 하차하여 도하에 적합한 지점을 물색하던 중 국민혁명군의 저격에 의해 전사했다. 그의 전사 과정은 일본군에 의해 부풀려지고 각색되었으며, 그 자신도 「군신(軍神) 니시즈미 코지로」라고 불리며 추켜세워졌다.>

 

 

그러나 대장정이후 당내에서 지도력을 획득, 새로이 중국공산당을 이끌게 된 모택동의 속내는 달랐습니다. 국민당의 압박에서 벗어난 지금, 일본의 침공은 그에게 있어서는 국민적 고통이 아니라 천재일우의 기회에 불과했습니다. 공산당이 장악한 섬서성, 감숙성, 영하성 3개 성 일대는 일본군의 침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고 평온한 상태였으며, 이곳에서 공산당은 전쟁의 참화에 휘말리지 않은 채 조용히 세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회피하고 전력을 보전하여, 나중에 일본과 싸우느라 지쳤을 국민당과의 결전을 대비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단 한 차례 백단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빼고는 항일 투쟁에서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백단대전에서의 승리조차 그 규모와 성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죠. 이러한 중국공산당의 교활한 행태에 장개석과 국민당은 크게 분노하여 2차 국공합작역시 사실상의 결렬에 이르렀지만, 당장은 일본군과의 싸움이 급했던 국민당은 직접 공산당을 토벌할 여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9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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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7
0
2020.09.07

왕징웨이 빡치게 한 그 사건은 어디가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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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7

공산당 입장에서는 진짜 희대의 대역전스토리 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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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7

따지고보면 일제랑 싸운건 국민당이고 공산당은 국민당 뒷통수 치고 먹은건데.. 공산당은 일본에게 감사해야 하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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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7
@창백한푸른점

그래서 모택동은 일본 황군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음.

1

진짜 중일전쟁은 가슴이 웅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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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쓴 글이랑 옛날글 퍼가도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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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1
@모두예할때아니요함

독일근현대사산책은 퍼가도 돼용

0
@Volksgemeinschaf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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