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약혐]1941년 독일이 점령한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

역사 좋아하는 개붕이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가입기념으로 글 싸질러보겠음.

어디서 본 글이면 내가 원작자이니 그러려니 하면 됨.

사진과 묘사가 좀 센 부분이 있으니 비위약한 개붕이들은 백스페이스 추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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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소련의 잘못된 정책(혹은 고의)으로 우크라니아인 700만명이 아사한 홀로도모르로가 발생함.

원래 민족주의적인 의식이 강했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자국을 점령하고 다수를 굶겨죽인 소련을 증오하는 정서가 팽배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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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사용되는 우크라이나 국기. 황금 밀밭과 푸른하늘의 상징.

 

시간은 흘러 1941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소련 침공인 '바르바롯사 작전' 당시 국경에 인접했던 우크라이나는 일찌감치 독일에 점령됨.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 독일군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함.

그런 상황을 묘사한 독일군의 회고를 보도록 하자. 

 

독일군 보병 중위 폰 카겐헥의 회고 중 :

"우크라이나 에서의 생활은 안락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있었다. 달걀, 버터, 우유, 와인....

흑해 유역에서 나오는 훌륭한 적포도주 였다...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크게 웃음 지으며 다가왔다. 여자들은 빵과 우유를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우리를 해방군으로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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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 사람들은 소련이 쫓겨나고 들어온 독일군을 진심으로 해방군으로 생각했고

독일군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공산주의와 유대인을 몰아낼 것이라 생각했음.

 

특히 우크라이나의 행정 중심지 르비브(Львів)가 독일군에 점령되면서

소련의 NKVD가 퇴각하며 감옥에 수감중인 우크라이나 및 폴란드인들을 학살한 정황이 드러났음.

르비브만 하더라도 브리트키(Бритки), 론치코호(Лонцького), 자마르스티니브(Замарстинів).

이 세 곳의 감옥에서 학살이 있었던 것을 확인하면서 대중의 분노는 격렬해졌고 독일은 이것을 만류할 생각이 전혀 없었음.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NKVD의 정보 요원 가운데는 유대인도 있었으나

실제 학살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이들 대부분이 이 학살에 참여하지 않았음.

(영국의 역사 학자 노먼 데이비드 교수의 연구에서 'High percentage of Jews was striking'라고 명시함)

독일의 학살 전담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C는 이런 점을 십분활용했고,

살해의 책임을 도망친 NKVD와 남아있는 유대인들에게 전가했으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로 이루어진 민병대를 조직하여 유대인 학살을 준비함.

독일 역시 소련처럼 자신의 손을 대신 더렵혀줄 사람들을 구할 뿐이었지만

당시 우크라이나 사람들 중 이것을 눈치채고 있던 사람은 극소수였음.

1941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최초의 학살이 시작되었음.

유대인으로 확인된 사람들은 단순한 몰수나 투옥이 아닌 이웃으로부터의 학살에 직면해야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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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위의 사진은 학살 당일, 르비브에서 우크라이나 군중들에 맞으며 도망다니는 유대인 여성.

*두번째 세번째 사진은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리투아니아에서 발생한 홀로코스트 사진.

 

이것과 비슷한 시기에 이웃한 리투아니아에서도 아인자츠그루펜의 지원 아래 

리투아니아인 민병대에 의한 홀로코스트가 발생했음.

이를 목격한 증언은 아래와 같음.

이를 첨부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에서의 그것과 비슷한 모습일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임.

"창고의 콘크리트 앞마당에는 스물다섯 살쯤 된 중간 키의 금발의 사나이가 나무 몽둥이에 기대어 서서 쉬고 있었다.

몽둥이는 팔뚝처럼 굵고 그의 가슴만큼 올라왔다. 그의 발 아래에는 약 15~20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죽어 가고 있었다.

피를 씻어내는 호스에서 물이 꿀꺽꿀꺽 배수로 흘러 들어갔다.

무장한 민간인의 감시를 받는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말없이 굴복한 채 그들의 잔인한 처형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소리 없이 앞으로 나선 다음 남자는 관중의 열렬한 함성을 동반한 나무 몽둥이질에 맞아 죽었다.

그의 발치에 있는 시체들의 봉분이 50구가 되자, 이 집행자(Death-Dealer)는

아코디언을 들고 시체 더미 꼭대기에 올라가 리투아니아 국가를 연주했다."

7월의 마지막 날에는 우크라이나에서의 두번째 학살이 있었음.

특히 이 학살은 '페틀유라 작전'이라고 불렸는데 1926년에 암살당한

우크라이나의 정치 지도자 시몬 페틀유라(Си́мон Васи́льович Петлю́ра)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음.

시몬 페틀유라는 1918년~1921년 동안 지속되었던 독립국가인

우크라이나 국가 공화국(UNR)의 지도자였으며

1926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자 유대인인 사무엘 슈발츠바드에게 암살당한 인물임.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당시 천대 당하던 유대인들에게 유대인 출신 장관까지 임명하며 자유와 안전을 보장했지만

공화국 내 반 유대주의는 높았고, 민족주의자 민간인 뿐 아니라 공화국의 통제를 거부한 군부대까지 가담하여

유대인 학살과 추방(포그롬)이 전국에 걸쳐 발생하고 있었음.

이 시기 공식적인 보고만 하더라도 1236건, 3만 5천명이 학살된 것으로 확인됨.

그리고 암살범인 슈발츠바드의 부모는 우크라이나의 도시인 오데사에서 발생한 포그롬 당시 살해당한 부부의 자식이었음.

말 그대로 피를 피로 씻는 복수의 연속이었지만,

독립국과 염원과 반 유대주의 정서에 젖은 우크라이나 인들에게 그런 것 따윈 아무렇지 않은 사실이었음.

공산주의자 유대인에게 살해당한 과거 지도자의 이름을 붙인 '페틀유라 작전'의 명칭은

극단적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성취감을 고취시키는 일이었음.

 

이 6월~7월 두번의 학살만 하더라도 8천명의 유대인이 사망했고, 이 숫자는 시작에 불과했음.

이런 민족주의자들의 학살과는 별도로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학살도 동반 진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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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야르 계곡에서 있었던 바비야르 학살의 현장 사진들.

 이 엄청난 학살을 추모하기 위해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1960년대 발표한 13번 교향곡에 '바비야르'라는 이름을 붙였음.

 

1941년 9월, 우크라이나 민병대의 도움을 받은 독일군이 바비야르 학살을 집행했으며

이 학살은 정학히 2년 동안 지속되었음.

 

1943년 부터 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한 독일군은 자신들의 범죄를 지우기 시작했으며, 44년에는 거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음.

이 때문에 학살의 세부적인 규모는 지금도 정확한 추산이 불가능함.

대략 10~20만면 정도가 저 바비야르 계곡에서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뿐임.

 

이런 일련의 학살의 과정에서 그 대상은 유대인에서 집시, 타타르인, 반 독일 우크라니아인까지 점점 범위를 넓혀갔고

이 대학살의 피해자들을 색출, 압송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언젠가 세워질 환상 속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위해,

또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 이익을 위해 기꺼이 협조함.

이런 적극적인 협조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담했음.

자유를 부여할 대상이 아니라 독일의 번영을 위해 착취할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었다는 것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 거임.

당시 우크라이나를 시찰한 독일 공군사령관 괴링의 말에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줌.

 

"쓸모없는 입은 먹이지 마라. 일할 수 있는 자들은 부리고, 나머지는 죽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자들은 죽을때까지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44년, 소련군의 대공세에 우크라이나가 소련에 점령당하면서 이들의 미친 학살과 공화국의 헛된꿈은 다시금 묻히게 되었고

독일에 협조했던 민병대와 그 가족들은 그들이 가했던 것처럼 무자비한 학살과 보복에 노출되었음.

16개의 댓글

2020.12.09

이런 기록들 보고나서 세상이 썩었네, 말세네, 우리땐 안그랬네 뭐 옛날엔 어쨌단 사람들 보면 어처구니 없다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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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돼지껍데기

어떻게 봐도 옛날보단 지금이 낫더라.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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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0
@돼지껍데기

저 시대만 하더라도 죽을병이었던걸 지금은 그냥 다 치료하는 것만 봐도 지금이 최고지.

1
2020.12.09

한대로 그대로 당했나보구만 ㅉㅉ

0

우크라이나인들이 유대인을 증오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해서 아쉽네 재밌게 봤다!

0
2020.12.09
@멍뭉아까까먹자

그건 또 조만간 쓸거임

0
@호정보요원

그것도 기다릴게 ㅎㅎ

난 아우슈비츠 다녀온 이후에 관심이 많이 생겨서

저 쪽 역사 좀 알아봤더니 참 안타까운게 한 두가지가 아니더라;; 우리 긍현대사만 ㅈ같은게 아니었음

0
2020.12.09
@멍뭉아까까먹자

ㄹㅇ.. 사실 안좆같은적이 없었던 민족이 없음. 근현대사만 놓고 봐도 두 손 안에 꼽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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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전설의리코더

현대에 국가로써 존재하는 민족이 타민족에게 ㅈ같은짓 안해본 경우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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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호정보요원

ㅇㅇ 한 번도 안해본 민족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있었더라도 이미 사라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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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ㅇ 광기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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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미쳐돌아가던 시대라 사람목숨이 말그대로 벌레만도 못하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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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아 너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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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지금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이러면 막 저럴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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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qazz

그런 문제에서 인간은 시대를 안가리고 선빵을 날리려했지

0
2020.12.11

시발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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