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역사 속 흑사병 간단하게 알아보기

유럽의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흑사병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간간히 보입니다. 유럽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자주 언급되더라고요. 가입하고 간단한 역사 시리즈를 써볼까 생각중이었는데, 흑사병부터 간단하게 다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흑사병이 대규모로 창궐한 기간: 500's ~ 1800's AD. 

우리는 흔히 14세기 유럽에서 있었던 2차 대역병을 기억합니다. 아무래도 중세 봉건제의 몰락이라는 주제를 잡고 그 원인을 다룸에 있어서 흑사병을 언급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자세히 가르치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런 분류는 사실 지나친 단순화고, 흑사병이나 유럽의 위생에 대해 편견을 양산해내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중세 유럽이라는 분류는 대부분 지나친 일반화로 이어집니다. 편의상 자주들 쓰는 중세 봉건제 시기라는 분류는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부터 1453년 동로마 제국 멸망까지 거의 천 년에 이르는 세월을 가리킵니다. 그 영역은 서유럽부터 유럽 전체에 이르기까지 방대합니다.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고려 태조 왕건부터 대한제국 고종의 치세까지의 공통점을 찾는 수준입니다.

 

그러니 우리 머릿속에 있는 판타지적 중세 유럽 이미지는 지워버리고 천 년 넘게 적어도 구대륙 전체를 끊임없이 괴롭힌 흑사병이라는 존재의 영향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2. 1차 대유행: 유스티니아누스 역병(541~542 AD, ~ 750 AD까지 간헐적 발생)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영향으로 로마사에 대한 관심이 한동안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작품에 조금 소설 같은 면이 있지만 관심을 끌어내는데는 재능있는 작가분이죠.

그 때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세계사 시간에 등장하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는 인물이 기억날지도 모릅니다. 동로마제국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북아프리카의 영토와 이탈리아 대부분을 수복했던 황제. 그가 전쟁에 지나치게 국력을 낭비해서 어차피 위험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표면적인 결정타는 흑사병이었습니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흑사병이 상륙했고, 황제 본인과 그 가족들까지 그 공포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숫자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도시의 하루 사망자만 1만명에 달했다고 하며, 농촌에서는 곡물을 수확할 노동력이 부족해 곡물 가격이 치솟고 국가는 건설과 전쟁에 이미 지출한 재정 때문에 이걸 구매할 여력이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최대한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지만, 역병이 제국에 가져온 피해는 너무나 컸습니다. 그의 치세동안 4번이나 돌아온 질병으로 황제는 많은 가족을 잃었고 제국은 과거 로마 제국 강역에 대한 재정복을 시행할 여력을 상실했습니다. 현대 학자들 중 일부는 역병의 정점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하루 5천명씩 사망했으며 인구의 40%를 앗아갔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합니다.

 

(더 붉을수록 부유한 지역. 이탈리아 제외)

유전자 검사에 따르면 질병이 최초의 기원한 지역은 중앙아시아로, 기록을 기반으로 한 추적에 따르면 유명한 흑사병의 대유행은 이집트의 수에즈 부근을 거쳐서 콘스탄티노플로 넘어온 것으로 추정합니다.

모든 대도시는 대규모 배후 농경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집트는 로마의 전통적인 곡창지대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로마인 이야기나 HBO의 드라마 로마를 보신 분은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잡고 로마로 향하는 식량을 인질로 삼아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를 압박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콘스탄티노플도 이집트에서 대량의 식량을 수입했으며, 그곳의 쥐 등을 통해 역병이 퍼졌을 것이라 본다고 합니다.

 

3. 2차 대유행: 중세 흑사병(1346~1353 AD, ~ 이후 계속 발생)

유럽에서의 대유행이 유명하지만 근원지는 (연구 결과에 따라 다양하지만) 중국 근방에서 중앙~서아시아지역 정도로 여겨집니다. 흑사병은 몽골의 전세계적 침략 및 비단길을 따라서 퍼졌다는 것이 나름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원인은 아니고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지만요.

북송과 남송의 인구 감소에도 흑사병이 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가운데, 13세기 후반 몽골과의 잦은 전쟁과 그로 인한 기아, 이어지는 역병으로 중국 인구는 수천만명이 줄어든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때 인구의 30%~50%정도의 타격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여러 악재들이 겹쳤기 때문에 순수 역병에 의한 영향을 골라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합니다.

 

한반도도 흑사병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충목왕이 흑사병으로 죽은 것은 유력한 가설로 여겨집니다. 고려시대 기록은 지극히 부족하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는 1348년에 대규모 기근과 역병이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다만 말기 고려의 경우 지나치게 막장인 상황에, 페스트가 아니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 역병이 많아서 관심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을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은 서기 1000년 정도에 서로마 제국 시절 생산력을 뛰어넘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흑사병은 이들의 시계를 수백년 전으로 돌려놓습니다. 서로마 제국 멸망기처럼 종말론이 대유행했고 본격적으로 발달한 도시들의 인구가 대량으로 죽어나가는 모습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한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중세 위생 관념에 대한 편견이 이 시기에 형성되기도 합니다.

중세 도시는 비교적 깔끔한 곳이었습니다. 도시는 대개 여러 길드의 영향력이 강했고, 가족의 집, 회사의 건물처럼 도시는 길드들에게 얼굴 역할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수용능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이전의 도시들은 철저하게 관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도시에서 인구의 3할 이상이 밀집해 죽어서 처리되지 못한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는 이미지는 지나치게 강렬했죠.

물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원래 중세 유럽인은 도시나 시골 관계없이 열심히씻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쥐나 벼룩,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등을 통해 퍼지는 흑사병은 물과의 접촉으로 질병이 생긴다는 미신적인 믿음이 퍼지는데 일조했죠.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14세가 평생동안 몇 번밖에 씻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때부터 시작된 잘못된 믿음의 결과로 보기도 합니다.

 

4. 3차 대유행: 아시아 대역병(1855 ~1859 AD, ~ 일제시대까지 간헐적 발생 기록)

중국에서 시작된 대유행은 여러 대륙에 퍼졌으며, 인도에서만 천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제가 공부한 건 17세기까지여서 이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 대규모 발병은 계속 이어졌으며, 페스트는 현대에 치료제로 비교적 쉽게 치료 가능한 질병입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흑사병이 유럽의 질병이기보단 인류의 질병이라는 점에는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역병은 현대의학이 백신과 치료제를 만들어내기 전까지, 불과 백년 전까지만 해도 항상 우리 곁에서 어슬렁대던 악몽이었습니다. 한반도에 스페인 독감도 상륙했었다고 하니, 우리가 살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체제와 현대문명의 축복은 인류 역사에서 정말 얼마되지 않은 황금기일 수 있습니다.

26개의 댓글

2020.04.03

이런거 볼때마다 신기한게...우리 조상들은 이런거 살아남아서 우리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니...참 신기함;

툭하면 죽었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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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그리즐리

죽음이 항상 가까이 있었다는 건 전근대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들은 미신적이었습니다. 농사 실패는 대규모 기근과 아사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게 아니라도 질병은 충분히 초자연적 힘에 농민들이 기대게 만들었죠.

 

무속전통은 조선을 거쳐 살아남았습니다.

 

 

가장 미신적이고 꽉막힌데다 의무교육도 거부하는 가상의 한국의 농촌이 인구의 90%가 넘는다고 가정의 국가를 상상해보세요. 그게 전근대입니다.

 

이건 조선까 논리의 주요 반박 논거이기도 합니다. 자력 근대화를 이룬건 영국뿐이거든요. 나머지 국가 인구의 90-95퍼센트는 어차피 인생 땅파먹고 근근히 살았는데 민생챙긴 정부는 거의 없었고, 조선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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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마감

한국은 그래도 교육열 하나는 원탑이었지 그게 성리학이라서 문제였긴하지만

실학이 발전했으면 더 빨리 근대화 됐을텐데 항상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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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아니그건니생각이고

식민제국의 침탈이 없었다면 식민지들도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가 뒤쳐진 것이 아니라 너희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라는 식의 학설이 유행한적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맹아론, 대분기 이론과 같은 것이 이런 맥락이죠. 한국 뿐 아니라 중국 심지어 서양에서도 연구되던 학설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학설들은 이미 90년대와 00년대를 거치며 신빙성을 많이 잃은 상황입니다.

 

 

1. 자생적 산업화가 일어난 나라는 영국밖에 없습니다.

> 한국도 자발적으로 근대화할 수 있었다는 의견에서 많이들 빼먹는 사실입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발생해서 가까운 유럽으로 퍼졌고, 그후 이어진 경제적 성장과, 지금까지 축적되었던 사상적 발전, 그리고 과학의 발전은 유럽을 근대화로 이끌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영국에서만 폭발했던 근대화라는 사건의 불씨를, '역사상 반드시 일어났어야 할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영국이 특이한 것이죠.

 

 

2. 편견과 다르게 유럽은 이미 17~18세기에 생산성이 중국과 비등하거나 추월했습니다.

> 대분기 이론(Great Divergence Theory)은 서양중심주의의 탈피를 외치던 약 15년전쯤 출판된 책을 기반으로 합니다. 중국은 거의 항상 유럽을 앞서 있었고, 서양은 산업 혁명을 통해 운좋게 추월한 것 뿐이라는 이야기죠.

 

그러나 기존 주장은 대부분이 반박된 상황으로, 적어도 서양이 계속 중국에 뒤쳐졌다는 것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3. 1.과 2.를 고려했을 때, 중국도 못한 자발적 근대화가(영국에서만 일어난 현상이) 조선에서 일어났을 것이라 가정하는 것은 비약입니다.

 

 

4. 실학대 성리학(주자학) 구도는 잘못된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 저는 한국사 수업은 많이 안들어서... 서울대학교 박평식 교수의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는 개론서 수준이라 읽기에 무리가 없는데, 널리 퍼져있는 실학 담론의 문제점들을 짚어줍니다.

 

중세 기독교의 가장 미친 행동만 골라잡으면 광신적인 암흑기를 만들 수 있듯, 성리학의 가장 보수적인 측면만 골라잡으면 우리는 꽉 막힌 양반님네들의 세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은 사람사는 세상이었고, 성리학은 생각보다 사람사는 세상의 사상이었습니다. 실학은, 사실 일부 측면을 제외하면 주류에게 아주 거부되는 수준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합니다(애초에 실학이라는 분류가 명확한 것이었는지도 의문이라고 합니다.).

 

 

5. 목적론적 역사인식의 문제.

> 일단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라는 분류는 유물론적 역사관으로 분류됩니다. 우리는 이 분류가 직관적이고 편해서 사용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목적성'을 띄고 있습니다.

 

하나의 문제는 전 세계 역사를 하나의 카테고리에 끼워넣음으로써 그들이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한다는 인식을 줍니다. 유물론적 역사관이라는 이야기에서 아시겠지만, 자본주의 다음 단계는 공산주의입니다.

 

사실 의무교육 과정은... 특히 조선 후기를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민족국가의 형성을 위한 과정처럼 그려냅니다. 동아시아에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고(전근대적 민족 공동체 의식은 좀 많이 다릅니다), 근대화라는 현상의 인식에 대한 문제가 있으며, 현실적으로 후기 조선의 역량 문제도 있음에도요.

 

의무교육은 역사학자 배출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을 양성하는 문제이므로, 이 부분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프레임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반드시 사실과 맞아 떨어지는가 하는 것은, 좀 그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역사학은 모든 세상을 하나의 틀에 끼워맞추려 하기보다 그 역사가 존재했던 맥락과 고유성 속에서 역사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한반도에서 자생적 근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영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요. 하지만 역사가 어떤 목적성을 향해 달리는 열차가 아니기에, 그것이 한반도의 역사를 열등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적성을 가진다고 가정하면 우리의 역사는 열등한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죠. 역사는 근대를 향한 달리기 시합이 아닙니다.

 

 

6. 교육열이 근대화랑 연관이 있다는 연결고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1.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지만, 유럽도 중세부터 대학을 만들었고, 대검/토지귀족에 대응되는 법복귀족의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다만 그것을 근대화에서 중요하게 작용한 요소로 손꼽지는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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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코로나 대처하는 꼬라지 보니까 흑사병이 쌘게 아니라 생각보다 유럽새끼들이 미개한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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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숨참음

글쎄요, 유럽에 인종차별 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아닌 사람들도 있고요.

 

근데 한국이 모든 면에서 유럽보다 우월한가요?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 그들이 어차피 황인종은 미개하다 하면 별로 좋게 반응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이들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것은 좀 놀랍습니다.

 

 

미국의 의료시스템이 많은 조롱거리가 되지만 사실 그들의 고용시장은 상당히 유연하고, 의료보험도 한국보다 안좋아도 사람들이 살아갈 수준입니다.

 

유럽의 고령화와 재정문제는 당장 우리의 미래죠. 우리가 그들을 반면교사삼고 개혁에 나서는 게 옳은지, 조롱하는게 맞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최근 pandemic에 대한 경고는 좀 있었지만 현실화된 건 지금이 처음이기도 하고요.

 

 

유럽인들도 인종차별 합니다. 우리가 패드립하고 흑형 뭐 어쩌고 하듯이... 위안부 드립처럼 유럽 롤에선 나치 가스챔버 보냅니다. 뭐...

 

그래도 커뮤니티 내 인종차별 발언들은 처벌받는 시스템이나 공감대는 있어요.

 

 

우리가 그들에 비해 우월한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메신저가 아니라 메세지를, 구성원이 아니라 잘못된 시스템을 욕하고 우리의 것을 그들과 비교해 더욱 발전시키는 게 맞지 않을까요?

 

술마시고 좀 감성적인 댓글을 달고 있을 수 있단 생각이 들지만, 댓글에 공감이 많이 찍힌 건 좀 안타깝네요...

 

만약 우리가 당연스레 인종차별을 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는 일부 유럽인들에 비해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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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공사마감

인종차별이랑 전혀 무관한 논점이탈임. '비판 '하면 "응 조까~"라고 하니까 그 결과로써 '비난' 이 따라올수밖에 없지

비판과 비난을 분리시키려고 시스템이랑 인간이랑 나눈게 오류임(Ex 개붕이들은 중국인을 욕하는게 아닌 인간을 탄압하는 시스템을 따르는 사람을 국적불문으로 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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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뭔일이여

(생각보다 유럽새끼들이 미개한거 같다)는 식의 언급은 영미권의 포챈이나 가장 더러운 사이트라는 레딧에서 인종차별로 신고당하고 경고먹거나 밴당할 만한 댓글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건 지나친 PC일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하켄크로이츠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문화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겠죠.

 

혈통에 기반한 민족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것을 묶어서 분류한 뒤, 인종 그룹 전체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어떤 무책임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2차 세계대전이 보여줬죠.

 

'비판'하면 "응 조까~"하니까 그 결과로써 '비난'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그런 태도를 개인도 아니고 인종/국가단위에 씌우는 것이 올바른 행동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월감 이외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거든요. 역사적으로 그런 태도가 마지막에 가져온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이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건 개인의 의견일 수 있겠습니다.

 

 

사대주의 이런 얘기 나올까봐 덧붙이자면,

 

전 유럽에 전근대적 면모가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전근대의 유산과 연결고리가 많이 남지 않은 한국같은 경우가 더 특이한 케이스일 수 있죠. 그건 한국의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본문의 주제와 크게 상관없는 쪽으로 논의가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해 여기까지만 댓글 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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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공사마감

그냥 니가 기본적으로 문맥파악을 못함

코로나 꼬라지보니깐 / 흑사병도 유럽이라 당햇내 이런식으로 읽는거임

이해안가면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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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뭔일이여

만약 누군가 저걸 반대로 말한다면 니말이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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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마감

하켄크로이츠를 강력하게 규제하지만 욱일기는 규제하지 않는 점에서

하켄크로이츠와는 다르지만 떠올린다는 이유로 만자를 못쓰게 하는 점에서

하켄크로이츠 규제가 그렇게 도덕적인 이유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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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역병 때 사람 하도 많이 죽어서 고대부터 이어지던 유력 가문들도 싹 다 병으로 죽거나 재기불능 됐다더라.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전/후로 등장하는 귀족가문들이 전혀 다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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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대중목욕탕이 일상화되었다고 알고있던 로마도 전염병에 나라가 휘청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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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ADSL1990

대중목욕탕의 신화는 가 잘못 퍼뜨린 신화 중 하나기도 합니다.

 

대중목욕탕이 일상화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더러웠습니다. 의사가 부상자에게 상처가 덧나지 않기 위해 대중목욕탕을 가지 말라고 할 정도로요. 현대 대중목욕탕에서도 더러운 행동을 하는 분들이 한 둘이 아니고, 로마의 대중목욕탕의 많은 수가 '대중', 고대에서도 더러운 인간들을 대상으로 했죠.

 

벗은 상태로 있는 곳이라는 점 덕에 매춘이 자연스레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매춘은 기독교가 주류가 되며 대중목욕탕이 쇠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로마인이 씻기 좋아하던 것은 사실이었고, 전통은 로마의 몰락 이후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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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흑사병이 청결문제 때문에 생긴줄 알았는데 그 전 유럽은 잘씻고 다녔다는게 충격이넹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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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깐깐징얽

유럽 도시의 불결함도 잘못된 편견에 가깝습니다. 본문에 언급되었듯이, 도시의 불결함같은 문제는 도시가 과포화된 뒤에 일어난 문제거든요.

 

조선의 한성도 비슷한 문제를 겪습니다. 전부 도시의 과포화 문제죠.

 

 

중세의 '도시'들은 '농촌'의 공동체적 시스템을 유사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길드는 거대한 공동체였고, 강력한 공동체 사회가 으레 그렇듯 청결과 건강은 공동체적 문제로 취급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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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공사마감

간혹보면 조선시대에 외국인들이 구경할때 뭐 성안이 길바닥은 온천지 똥이고 물은 안빠지고 더러웠다 라고 했다던거를 개드립에서 본거 같은데 그것도 비슷한 상황이라 생각하면 되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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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깐깐징얽

네. 대부분의 도시 위생문제는 과포화랑 연관이 있습니다.

 

조선후기가 망해가던 시기고, 들어온 서양애들이 얼마 전 근대적 상하수도 시설이 확대되며 혜택을 본 세대라는 것도 한몫했을 겁니다.

 

지금도 기마경찰이 다니는 도로와 애완견때문에 똥이 있는데, 당시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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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예전에 신문 칼럼에서 읽은 건데, 중세에 잘 안 씻은 건 당시 기독교 교리도 한 몫했다더라. 인간의 영혼은 깨끗하고 순결하지만, 육체는 더러운 것이라는 개념이 있었다고 해. 깨끗한 영혼은 육체가 더러워야 균형이 맞다고 생각해 일부러 안 씻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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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레벨밥도둑

명백한 출처가 없는 이상 편견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중세 유럽은 잘 씻었거든요...

 

'왜 중세 유럽은 안 씻었는가'의 논거가 사실이 되려면, 중세 유럽이 안 씻었다는 점부터 증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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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레벨밥도둑

조금 찾아봤는데, 영문 위키마저도 교회가 청결을 강조했고, 구성원들에게 청결해질 것을 권고했으며, 왕들도 칙령을 내렸다고 하네요. 잘못된 정보인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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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공사마감

찾아보니 칼럼이 아니라 책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저자, 캐서린 애셴버그.

거기 나온 내용을 옮겨보자면,

[예전 유럽은 목욕 공포증을 가졌다. 따끈한 욕조의 물에 신체가 오래 노출되면 체액에 변화가 온다고 믿었다. 이 신념이 굳어진 계기는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이다. 사람들이 속속 죽어나가는 와중에 목욕을 하면 피부 땀샘이 열리고, 그 곳으로 병균이 파고든다고 그들은 믿었다. "살고 싶으면 목욕하지 말라"는 게 건강 비결인양 통했다. 또 다른 요인은 초기 기독교다. 영혼과 몸을 나눴던 기독교는 '더러운 몸'이야말로 청결한 영혼과 한 쌍이며, 그게 성스럽다고 믿었다.

일테면 프란체스코 성인도 더러움의 미덕을 찬미했고, 대다수 수행자들이 몸을 닦지 않고 살았다. 그 결과 유럽은 페스트 이후 400년 가까이 '더러운 대륙'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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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레벨밥도둑

일단 영문 위키 출처 내용들을 옮겨봅니다.

 

Mary F. Thurlkill (종교학 교수) Sacred Scents in Early Christianity and Islam: Studies in Body and Religion. Rowman & Littlefield. pp. 6–11. ISBN 0739174533

... Clement of Alexandria (d. c. 215 CE) allowed that bathing contributed to good health and hygiene ... Christian skeptics could not easily dissuade the baths' practical popularity, however; popes continued to build baths situated within church basilicas and monasteries throughout the early medieval period ...

 

알렉산드리아의 Clement는 목욕이 건강과 위생에 좋다는 점을 인지했다... 기독교인 회의론자들은 목욕의 유명세를 꺾을 수 없었다; 교황들은 중세동안 큰 성당들에 목욕탕을 지었다.

 

 

Paolo Squatriti (초기 중세 전공/미시간 대학) Water and Society in Early Medieval Italy, AD 400-1000, Parti 400-1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54. ISBN 9780521522069.

"... but baths were normally considered therapeutic until the days of Gregory the Great, who understood virtuous bathing to be bathing "on account of the needs of body" ...

 

위대한 그레고리 때까지 목욕은 의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그레고리는 신체의 필요에 따라 목욕을 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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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찾은 내용들입니다.

 

https://www.thevintagenews.com/2018/08/27/bathing-middle-ages/

Patricia Grimshaw(박물관학 석사)

 

(...)

According to the rule of St. Caesarius, from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nuns and monks were expected to bathe regularly.

성 Ceasarius에 따르면 6세기 초부터 수도사와 수녀들은 주기적으로 목욕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

And as recorded by his biographer, Einhard, King Charlemagne “would invite not only his sons to bathe with him, but his nobles and friends as well, and occasionally even a crowd of attendants and bodyguards, so that sometimes a hundred men or more would be in the water together.”

샤를마뉴 왕은 그의 전기작가 에인하드에게 기록된 것처럼 "그의 아들뿐 아니라 귀족과 친구들, 심지어 어느 때는 경호원들과 수행원들까지 목욕에 초대하곤 했다. 따라서 때때로 백명이나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물에 함께 들어가기도 했다"

 

(...)

Nonetheless, the people in the Middle Ages appreciated personal hygiene at least on some level, and tried to attain it as best that resources would allow. Whether by simply keeping their hands and face relatively clean, as well as their clothing, medieval people were not afraid of bathing, nor was it considered a sin. It just was not as simple as turning a tap.

 

그럼에도, 중세 사람들은 최소한 어느 수준 이상의 개인 위생을 유지하려 했고, 접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획득하려 했다. 손과 얼굴을 비교적 깨끗하게 씻거나, 옷을 청결하게 하려 했다. 중세 사람들은 목욕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죄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목욕이 수도꼭지를 돌리는 것처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었을 뿐이다.

 

 

 

https://www.medievalists.net/2013/04/did-people-in-the-middle-ages-take-baths/

However, a closer look shows that baths and bathing were actually quite common in the Middle Ages, but in a different way than one might expect.

 

하지만, 목욕은 중세에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꽤 흔했다.

 

 

 

---

그 외에 찾은 내용들입니다.

https://going-medieval.com/2019/08/02/i-assure-you-medieval-people-bathed/

Eleanor Janega (중세 역사/ 런던 정치경제대학)

 

제목: I assure you, medieval people bathed.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중세 사람들은 목욕을 했습니다.)

In fact soap is a motherfucking medieval invention. Yes. It is. The Romans – whomst I don’t see a bunch of basics going around accusing of being filthy –  did not, in fact have soap, in contrast.

 

사실 비누는 빌어먹을 중세에 개발되었다. 그래. 로마인들은 - 내가 돌아다니면서 더럽다고 비난받는 것을 본 적이 없는 - 반대로, 비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Your peasant ass would likely have been making soap at home,

 

(이전에 인구의 85%가 농노였단 이야기를 함) 농노들도 집에서 비누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In fact, the whole washing after eating thing was an explicit health concern, because as medieval medical writers such as Magninius Mediolanesis noted,

If any of the waste products of third digestion are left under the skin that were not resolved by exercise and massage, these will be resolved by the bath

중세 작가 Magninius Mediolanesis가 썼듯이, 먹고 나서 씻는 것은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었다: 세 번째 소화로 피부 아래에 남은 부산물들을 움직임과 마사지가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목욕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

+ 이전 자료들에서도 나오는 "excessive bathing"은 이성과 같은 장소에서 목욕하거나 그런 걸 의미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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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레벨밥도둑

작가분이 방송분야 종사자이신 것 같은데, 신빙성은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생각해보면...

 

14세기 페스트로 목욕을 조심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 매춘과 성병이 목욕탕을 중심으로 퍼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 목욕탕의 위생문제 때문에 감염의 원천으로 지목받기도 했습니다. (보니까 왕들이 목욕탕을 가지고 움직였다는 기록도 있고, 전근대 특성상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부유층들은 개인 목욕탕을 구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맥락을 데어놓고 보면 첫 문단은 맞는 말입니다.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가톨릭적 믿음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아직 교통정리도 안되었던 초기 기독교의 자극적인 믿음을 가져온 것은 솔직히 좀 납득이 잘 안갑니다. 초기 기독교때는 신약도 없었고, 교회체제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이 때 경쟁하던 교파들이 사라지고, 통합되면서 가톨릭과 정교회로 남죠.

 

 

기독교인은 전유럽에 걸쳐 있었고 목욕에 대한 시선은 달랐습니다. 굉장히 특이한 의견들도 많았고요. 흑사병 이후 보다 더럽게 살았단 것도 본문에 언급했다시피,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기를 굳이 따지면 르네상스로 구분하죠. 르네상스에 중세적 특징이 많았다고 하지만, 중세라고 구분짓는 시기는 이미 1천년에 가깝습니다. 로마 공화정 말기 ~ 제정 초기의 초기 교회 + 르네상스기 흑사병 이후의 사례들을 들고 중세 중간에 살았던 인물의 발언을 콜라보한 뒤, 중세를 일반화시켜 버리는 건 좀 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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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얼마전에 중국서 흑사병이 재발한거보니 죄다 중국산으로 생각됨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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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다크레이디

흑사병은 미국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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