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영화 봉오동 전투가 실제와 너무 달라 충격먹다

방금 보고 오고 너무 충격을 받아 이 글을 씁니다. 원래 자유시 참변 글 완성하기 전에는 글을 최대한 절제하려했는데 너무 충격적이라 글로 남깁니다.

 

영화속 봉오동 전투는 실제와 너무 달랐다. 너무 달라서 충격을 먹었다.

 

1.영화 봉오동 전투 묘사

 

1) 봉오동 전투 이전 전투 묘사

 

- 초반 장면에서 독립군이 경계하는 일본군들을 습격해서 (일본군 소년병 하나 제외하고) 쓸어버린다. 

-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한인 민간지역을 습격하고 학살하는데 독립군이 그런 남양수비대를 발견하고 일반적으로 쓸어 버린다.

- 독립군이 일방적으로 월강추격대(일본군) 주둔기지를 습격해서 동료(친해진 일본군 소년병 포로까지 포함)들을 구출하고 빠져 나온다.

- 영화속 최유하 캐릭터는 매우 날씬한 여성 독립운동가인데 (총을 쓰지 않고도) 육탄전으로 정규군인 일본군 병사를 발라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절벽 밑 강으로 같이 떨어진 후 강에서 싸우다가 칼로 찔러죽인다.) 이후에도 다른 독립군과 전투력에서 대등하게 나온다.

- 작중 유해진 캐릭터는 총은 못 쏘고 칼만 잘 쓴다는 설정이다. 중반부 유해진 캐릭터는 멀쩡히 있는 총은 쏘지 않고혼자서 칼만 들고 멀쩡하게 총을 든 일본군을 쓸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유해진 캐릭터가 일본군들을 쓸어버리니 그제야 다른 독립군이 뒤따라 총을 쏜다. 이 장면에서 유해진 캐릭터가 칼만 써서 쓸어버린 일본군이 10~20명 사이다.
(절박한 위기상황도 아니고 탄환이 부족한 상황도 아님.)

- 작중 류준열 캐릭터 혼자서 기관총을 갈겨서 봉오동 전투 전과 수준으로 일본군을 쓸어버린다.

 

2) 봉오동 전투 묘사

 

- 전개를 보면 독립군이 매복한 상태였고 일본군을 유인하고 사격하는 것일텐데 총쏘기 전부터 매복지에서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다.

- 매복지에서만 총을 쏘는 게 아니라 일본군과 근접으로 전투하는데도 쓸어버린다.(최유하 캐릭터도 일본군을 전문적으로 사살한다.)

- 날씨가 화창하고 맑은 날씨에서 독립군이 거의 일방적으로 일본군을 쓸어버린다.

- 쓸어버리는 도중에 주민들에게 즉석으로 총을 나눠줘서 합류시키는 여유까지 있다.

- 월강추격대 대장(야스카와)이 사망한다.

 

차라리 람보2가 봉오동 전투 보다는 현실적이다. 

 

2. 실제 봉오동 전투

 

1) 봉오동 전투 이전

 

비슷한 사건도 없다. 봉오동 전투 이전에 전투는 있었다.

 

1920년 6월 2일. 만주에 있던 항일군대 60여명은 국내로 들어와서 오후 4시 30분에 종성군 풍곡면 동포 경찰주재소 남쪽 6.000m지점으로 내려왔다. 항일군인들은 일제군경과 총격전을 벌여서 경찰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러자 일제는 종성에서부터 경찰 14명과 헌병 3명을 보내올렸다. (박창욱,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한국사연구 (111), 2000, 104)

 

6월 3일. 신민단원 약 30여명이 두만강 북안의 삼둔자 마을에 머물렀고 지휘자는 박승길이다. 항일군인들은 온성군 남양동 상류의 강양동대안에서 두만강을 건너 온성과 종성일대로 나아갈 예정이다. 다음 날  오전 5시. 온성군 남양의 두만강 상류에 약 15 지점인 강양도에서 였다. 일제군인들은 주변을 수색하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두만강남안에 쪽배 2척이 있던 것이다. 이걸보자 일제군경들은 항일부대원들이 올 것을 느끼고 부근을 수색했다. 그러던 차에 삼둔자 마을에서 약 17~18명이 두만강을 건너오는 걸 발견했다. 일제군경들은 바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신민단 부대는 건너는 걸 중지하고 삼둔자 부근 두만강 북안에 있는 버들방천에 은폐하였다. 그리고 일제군경을 대응사격을 하였다. 총격전은 얼마지나지 않아 끝났다. 신민단 병사들은 삼둔자 상촌(삼둔자 마을은 상 중 하촌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8호였다.)에서 큰 기와집인 김명오 노인집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박창욱, 107-108)

일제 군경부대인 남양수비대(남양수비대 10명, 헌병 경찰 7명 합계 17명)는 추격대를 조직했다. 신미(新美 일본어 이름은 니이미로 추정)중위는 추격대를 인솔해서 오전 11시경에 두만강을 건너갔다. 화룡현 삼둔자로 침공했다. 중국 지역을 침범한 것. (박창욱, 110) (신효승, 석사학위논문 - 한말 일제초 홍범도 의병의 활동과 전략 변화,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12, 65)

 

당시 일제는 항일군("불령선인")이 있을 장소라 생각하면 들어가기전에 총을 쏘며 '위력수색'을 했다. 일본군은 이걸 '암탐사격'이라 했다. 의심이 되는 인원이 있으면 무조건 쏘고봤다. 그러다 민간인들이 놀라 도주를 하면 그 사람들 체포해 심문하려했고 여의치 않다고 생각하면 현장에서 바로 사살했다. 말이 통하지 않을경우도 쉽게 처리하기 위해 그대로 사살해버렸다. 일제군경은 이런 방식을 당연히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신효승, 35)

일제군인들이 침공한 삼둔자는 한인 농민들이 정착하면서 만든 마을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남양수비대는 이곳을 주요 독립군 근거지라 판단했다. 일본군은 그 마을 수색하면서 무차별로 발포했다. 일본군은 이 마을주민들을 독립군의 주요 지원세력이 생각했고, 또한 항일군과 지역주민들은 어차피 구별할 수 없을거라 생각해서 무차별 발포와 사살을 하였다. (신효승, 66)

 

도중 남양수비대는 한 농민에게 정보를 얻었다. 신민단 부대원들이 쉬고있던 집이 어딘가하는 내용이다. 남양수비대는 삼둔자 서쪽 산기슭을 따라 전진하면서 김명오 노인의 집으로 다가갔다. 포위해서 공격하려 하였다. 신민단원들은 일본군경들이 온 것을 눈치챘다. 얼른 집에서 빠져나와 서남쪽 마패방향으로 후퇴했다.(박창욱, 108)  남양수비대는 포위하면서 집을 공격했다. 김명오 노인의 아내와 장남은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노인 아들인 김종식의 아내와 손자는 중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박창욱, 110) 날이 저물자 남양수비대는 부근 산중에 야영하며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박창욱, 108)

일본군은 적은 병력으로는 항일군("불령선인")을 토벌할 수 없다고 판단해 병력을 증원했다. 일제군경들은 야스카와 추격대대(월강 추격대대)를 편성해서 6월 7일 새벽에 후안산쪽으로 침공했다. 추격대는 길 안내자 찾기위해 병사 1명을 보냈다. 당시 후안산에선 신민단 부대원들 14~15명이 최진포라는 사람 집에서 쉬고있었다. 최진포의 아내와 형수는 불을 켜놓고 식사준비했다. 마침 그 집이 일제 병사의 눈에 띄었다. 일제병사는 그 집으로 들어갔다 뭔가 의심이 들었다. 함부로 남의 집 방문을 열었다. 누워있는 신민단원이 있다. 신민단원 1명은 그자리에 바로 총을 쏘아 일제병사를 쓰러트렸다. 신만단원들은 바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봉오동으로 후퇴했다. 항일군과 일제군은 갑작스런 상황에 맞닥뜨렸다. 둘은 제대로 준비못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양쪽 다 피해는 거의없었다. 그러나 민간인이 희생됐다. 최진삼의 아내(최진포의 형수)는 집으로 돌아가기위해 집밖으로 나왔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무고한 민가인 6명을 체포했다.(박창욱, 110~111)(신효승, 66)

 

이에 대해 강룡권 연구원의 조사자료도 참고해보자.

 

삼둔자 전투 설명:
『삼툰자전투의 규모를 살펴보면 <독립운동사>[1975년 발행한 독립운동사 제5권을 말함]에는 "5, 6일동안 있었던 두 차례의 싸움(삼툰자전투와 안산전투 - 저자)에서 독립군은 적병 1백 20여명을 사살했다"라고 적혀 있다.

두차례 전투에서 1백 20명을 사살했다고 하니 삼툰자전투 한 차례만으로는 얼마나 되겠는가? 절반이라면 60명, 3분의 1이라해도 40명가량 된다. 당시 강양동습격적에 동원되였던 독립군이 모두 40명이였는데 상대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접전하여 아군의 병력만큼 적을 소멸한다는 것은 대단한 고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문제를 둘러싸고 안화춘 선생이 수차 조사 방문하여도 이런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는 없었다. 필자 역시 안화춘 선생의 아래와 같은 판단에 동의하는 바이다.

"1백 50명을 소멸했다는 봉오동전투를 당시 <독립신문>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반면 그보다도 앞서 1백 20여명을 설멸했다는 삼툰자전투는 크게 알려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전투는 소수병력의 접전으로서 섬멸전이 아니고 쌍방간의 사격전후에 삼툰자북방으로 퇴각한 전투로 판단된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59~260)

 

안산전투 설명:
『(...)이 때 사망한 부녀의 아들 최상준(1909년생, 안산전투당시에 12살)로인이 생존해 있었다. 필자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사이에 세번 방문하여 그 자세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최상준 로인은 당시의 전투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5호동네는 최진욱, 최진삼, 최진국 3형제의 가족과 최원준, 최성일 등 다섯 최씨가 살고있는 동네였다. 나의 아버지는 최진삼(둘째)이고 어머니는 김숙정이다. 경신년(1920년) 음력 4월 20일 밤에 조선으로 모연하러 나갔던 신민단 대원 10여명이 피륙과 신을 둘러메고 돌아와 나의 삼촌 최진국의 집에 묵었다. 밤이 깊었고 또 시장기와 피곤에 지쳤으니 밤을 지내고 이튿날에 봉오동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삼촌댁 혼자서 10여명의 밥을 짓기 힘드니 나의 어머니를 불러 함께 밥을 지었다. 바로 이 때 일본군이 왔다. 독립군들은 되는대로 누워자고 있었고 모연대를 환영하러 온 신민단 안산책임자 최명극과 그 외 두세명이 자지 않고 앞으로의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일본군 병졸은 불쑥 머리를 들이밀며 들어오다 놀라 소리를 지르며 오던 길로 달아났다. 최명극이 뛰어난 사격술로 한방에 그놈을 처치하자마자 그 총소리가 신호가 되어 일본군들이 삼촌 최진국의 집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옷도 벗지 않고 자던 독립군들은 뒷문으로 빠져 밀림속으로 들어갔다. 철퇴하던 독립군 중 한명이 전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집안에 있던 독립군들이 다 나가자 나의 어머니와 삼촌댁 두 부녀자만 집안에 남았는데 총알이 쉴새없이 문과 벽을 뚫고 들어오니 너무도 무서워 백부 최진욱의 집으로 가자고들 했다. 삼촌댁이 먼저 뒷문으로 빠져 시형네 집으로 가는데 성공했다. 집안에 홀로 남은 나의 어머니가 뒤따라 달려나오다가 백부와 삼촌집 중간거리에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 때는 벌써 어슴푸레 새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일본군들은 독립군들이 빠져나간 뒤에 5호 동네에 들어와 최진동, 최진삼, 최진국(최진포라고도 불렀음) 3형제와 신민단 안산책임자 최명극과 모연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왔던 안산 아랫마을의 김환영 등 5명을 체포하여 평양감옥으로 압송했다. 》

이것이 소위 《안산전투》의 전모이며 이것은 도문시 곡수에 계시는 리종만, 잡혀간 5명중의 최명극의 아들 최해룡(74), 김환영의 손녀 김귀인(77)등에 의하여 확인되었으니 이로보아 독립군들이 먼저 매복하여 왜군이 오기를 대기한 것으로 아니었고 산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음을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안산전투》라고 명명하는 것 보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작은 마찰이라고 함이 더 적절한 것이다. 이 마찰에서 일본군 1명 즉사, 독립군 1명 전사, 최상준의 어머니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일본 측의 보고서류에 《아군(일군)병졸 부상1인, 불령선인 즉사 1인, 지방인 즉사1인, 포로 6명》이라고 씌여진 사상자는 최상준을 비롯한 최해룡, 김귀인, 리종만 노인들의 구술과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삼툰자 전투와 안산전투에서 적 1백 2여명을 섬명했다는 기록은 실제 사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61-262)

 

2) 봉오동 전투

 

홍범도 부대는 일제추격대가 오는 걸 알게됐다. 추격대를 격퇴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봉오동은 분지(산지역으로 둘러싸였고 지역 안은 평평한 지역)형태였고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정도 형성되어있다. 골짜기 안에는 마을 세개가 있다. 홍범도 부대는 지형을 고려해서 4개 중대로 편성했고 각 중대를 포위하는 형태로 갈라놓아 배치하였다.(신효승, 66) 당시 홍범도 부대들은 신식 총기로 무장했지만 기관총 같은 무기를 가졌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화력이 딸렸다. 거기다 일본군은 포병을 지원부대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기관총을 쓰기 어려운 장소다. 또한 매복을 할 경우 피아구별이 힘들어서 일제군이 포병을 쓰기 힘들다. 홍범도는 의병시절 부족한 화력을 극복했던 방법을 봉오동에도 그대로 적용했다.(68) 그리고 일제군을 기다렸다. 

 

대기하던 남양수비대는 야스카와 추격대대가 오자 그쪽으로 합류했다. 추격대는 8시 30분경부터 봉오동 하촌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였다. 그러다 자기네들이 보기에 의심되는 민간인이 있으면 바로 사살했다.(박창욱, 114, 116)

그탓에 조선인 민간인들을 집을 빠져나와 피난을 갔다. 많은 집들은 사람이 없어 비워있었다. 석현주재 중국인 순경들은 순찰하다 일제추격대를 발견했다. 중국인 경찰들은 일제추격대에게 자신들 땅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추격대는 중국 경찰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더욱 침입하였다.(박창욱, 114)

 

추격대는 늦은 아침을 지어먹고는 한 농민에게 가서 수레에 기관총을 실으라 요구했다. 수색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다시 마을주민들을 발견했다. 추격대는 그 마을을 향해 "암탐사격"을 하며 무차별로 쏴갈겼다. 피난가지 못한 한인 민간인들은 기관총에 살해됐다.(박창욱, 114) 

오후 1시 경 추격대 척후병이 매복지점으로 다가갔다. 항일군인들은 그 척후병을 그대로 보내줬고 추격대 본대를 기다렸다. 추격대 본대는 그 장소에 들어기전에 다시한번 '암탐사격'(위력수색)을 했다. 여러 곳에 무차별 사격을 했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는 대응하지 않았다. 일제군 내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추격대는 행군종대 대형이었다. 추격대는 홍범도 부대가 매복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매복 성공 여부가 아니다. 병사들이 홍범도의 사격 통제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홍범도 부대는 짧은 기간에 모집해서 편성한 부대였으나 훈련은 제대로 받은 부대였다.(신효승, 69~70)

추격대가 매복장소로 다가왔다. 홍범도가 총을 쐈다. 동서남북에 매복하던 항일군이 사격을 퍼부었다. 일제군인들은 화력이 우세했으나 지형문제 때문에 그 화력을 제대로 쓰지 못 해고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퇴각했다. 그러다 오후 4시 20분경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렸다. 폭우가 쏟아졌다. 항일군 지휘부에서 파란 손깃발을 흔들었다. 항일군인들은 물러났다. 일제군인들은 6월 7일 밤 함북 온성 유원진 건너편까지 철수했고 사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다시 철수했다. (신효승, 67)(박창욱, 114~115)

 

전문가들의 의견을 보자.

 

박창욱 교수
『제2북부 지방회의 통보에서 대대장 1명이 죽었다는 것은 오보이다. 대대장 이라면 안천(야스카와 - 글쓴이)소좌를 말하는데 안천은 그 후 돌아가서 전투 상황을 보고했다. 거기다 같은해 10월 21일 청산리전역서는 백운평 전투에서 선봉추격대 90명을 거느리고 직소에서 북로군정서의 교성대와 싸웠다. 어떤 자료에서는 안천소좌가 거느린 1개 대대병력이 참가하였다고 나오는데 과장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평시 편제에 근거하면 보병 1개 대대는 600~700명의 병력이다. 이런 과정으로 하여 전과에서도 "120명 또는 150명을 섬멸"하였다고 하는데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다.』
(박창욱,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한국사연구 (111), 2000,  117)

 

강룡권 연구원
『봉오동 전투는 점심때쯤부터 시작되었다. 보리저격때가 되여 쾌청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와 소낙비와 우박을 억수같이 퍼부으니 삿갓에 구멍이 난 것은 물론 머리위에 이고 있던 함지도 깨질 정도였다. 소나기가 내리면서부터 총소리가 멎고 싸움이 끝이 났다. 일본군들은 호박골로 퇴각하면서 조선 풍리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던 지원병과 피파골에서 저들끼리의 싸움이 붙었다.

 

최상준의 증언-도문시 오공촌

 

(...)전투 당시 애기주먹만한 우박이 쏟아져 한메터앞도 보이지 않으니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싸움을 끝내고보니 독립군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땅에 풀썩 주저 앉으며 "독립군들이 안개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어두워서야 호박골로 후퇴하던 일본군은 피파골에서 오는 자기쪽 지원군들과 오해로 말미암아 전투가 있었다.

 

리종만의 증언 - 도문지 홍광향 홍위촌(곡수)

 

경신년에 나는 13살이었는데 관개지땅에서 농사지었다. 일본토벌군은 하전자에서 5호동네를 거쳐 남봉오골마을엔 들리지 않고 고개 하나 넘어서 마촌에 당도했다. 그때 우리 집은 마촌에 있었는데 전날에 벌써 피난가고 마도윤노인 혼자만 남아있었다. 일본군은 마촌에서 아침을 지어먹은 후 마도윤 노인을 협박하여 서수레에 경기관총 2정을 싣고 봉오동으로 갔다. 첫 총소리에 말탄 일본군관이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다. 싸움을 몇시간 하다가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폭우가 쏟아지며 우박까지 퍼붓는 통에 어느 편도 총을 쏠 수 가 없었다.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천지신명이 독립군을 도와주었다. 소낙비가 그치자 독립군들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일본군은 손실을 입고 호박골로 후퇴하면서 산중에 피난갔던 백성들에게 분풀이를 하며 18명이나 참살했다. 이와 같이 백성을 마구 죽이던 놈들이 얼마 못 가서 저들끼리 싸워 떼죽음을 당했다. 그것을 봉오동에서 전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하러 오던 일본군과 피파골로 후퇴하던 일본군이 서로 마주치자 상대방을 독립군으로 알고 격렬한 싸움을 벌인 것이다. 싸움에서 큰 손해를 본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용배미(훈춘시 양수진 경영촌)에 천막을 치고 3일이나 묵어있다가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배를 타고 돌아갔다.

그 외에도 안산의 김동진(1986년에 72세), 남봉오동의 한동선(1986년도에 75세), 김리환(1986년에 75세)등 노호들을 방문했는데 그들 모두는 폭우가 전투를 종결지었다고들 했다.

 

이처럼 실제조사자료를 종합해보면 봉오동전투는 일제의 퇴각과 독립군의 추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독립군의 주동적인 매복적으로부터 시작하여 독립군의 주동적인 후퇴로 끝난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64~266)
실제 현지주민들에게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독립군이 주도적으로 매복해서 독립군이 주도적으로 후퇴해서 끝난 것이며 현지주민들 사이에선 정작 독립군이 일본군을 몰살했다는 증언이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군 끼리 오인 사격을 해서 사망자가 더 생긴 것이라는 증언도 나온다.

 

결론:
실제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영화 본 소감:

movie_image.jpg

( 사진출처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59070 )
엄복동보다 조금은 낫다.

 

추신_나무위키 보면 이 글과 비슷한 글 나오는데 그게 내가 쓴 글이다.

29개의 댓글

2019.08.07

총맞은 사람들 의견도 들어봐야

2
2019.08.07

글쓴이는 실제 봉오동 전투 참여한 분이시랍니다

1

그렇게 실화 역사 고증 따질거면 이 세상 실화기반영화중 100프로 완벽구현영화가 있겠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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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중복판별기18호

달라도 너무 다르다잖수

0
2019.08.07
@중복판별기18호

실화기반이여도 전체적인 흐름은 따라가야지 저건 완전 왜곡수준이잖아...

일본놈들이 그런 의도로 생각하면 군함도도 할말없음

0
2019.08.07
@중복판별기18호

고증을 하다가 살을 붙일 순 있어도 고증을 개나 줘버리고 판타지를 만드는 건 말이 안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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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복판별기18호

와우 이게 실화기반이라면

http://blog.naver.com/tballeech280/221430367483

여기 나온 영화도 찾아보면 ~사건 기반이라고 다 주장할만한거 나오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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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중복판별기18호

고증을 완벽하게 연출 및 각색 할수 없지만 최대한 반영하는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흥행을 위해 왜곡이 되어선 안된다, 잘못된 고증 영화로 사실인양 믿을수 있기 때문이고 실제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한국군의 만행도 거침없이 밝히고 반성해야 하는것처럼 말이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 때문에라도 우린 국뽕이 아닌 실제 역사를 우리가 잘못한 역사까지 교육해야 하는것이다,

지금 봉오동과 나랏말싸미의 국뽕운 위한 각색이랑 광해의 기록되지 않은 재미를 위한 각색을 구분해야 한다,

1
2019.08.08
@중복판별기18호

이런 댓글이 젤 이해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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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사극이니 역사와의 괴리가 작품 감상을 저해할 수 있지

하지만 다큐가 아니잖어 역사교보재도 아니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미개한거지

그게 걱정된다고 창작을 제한하진 말자

 

다만 이 기회에 실제 역사도 배워 놓는게 좋지

그런 의미에서 너무도 좋은 정성들어간글 ㅊㅊ

 

근데 이 글이 트루라면 진짜 좀 충격이네

교과서에도 영화처럼 묘사되오 있지 않냐

엄청난 대전투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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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복지회사

그렇긴 한데... 사실까지 비틀어서 왜곡하면... 일본놈들이 하는 역사왜곡이랑 다를게 없어짐..

 

적어도 작은틀은 어쩔수없는 상업적인 면을위해서 과장 왜곡은 이해해도 사실적인 면을 뒤틀면.. 일본 역사왜곡도 할말 없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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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titan36

백인악당 쓸어버리는 노예출신 흑인 총잡이

쟝고 존나 멋있지

근데 탈출노예 범죄자 쓸어버리는 백인 보안관?

ㅗㅜㅑ..큰일난다야..

 

내로남불맞음

역사가 강자의 것이라면 로맨스는 약자의 거라고 봄

즉 역사라는 소재는 피해자의 것임

그래서 우린 자유롭고 일본은 자유롭지 못함

 

일본 역사왜곡이랑 다를바없다고?

입장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일이야

누구도 그렇게 안볼테니 걱정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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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복지회사

와 난 이덧글 보기전까지 역사왜곡 심하내란 생각했는데 이런 주장 보니까 이것또한 맞는말 같음.

트로이나 로빈후드영화나 십자군 관련 영화나 프리덤외치는 영화나 검투사 로마 영화나 고증안맞아도 다들 수준높은 영화로 보잖아

 

근데 영화를 만들고보니 새로운 해석이나 상업적 성공도 없고 작품성보 낮으면 그냥 역사왜곡한 영화라서 망했단 생각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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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히어로

사죄도 청산도 없고 잊혀지기엔 너무 가까운 시대라서 예민하고 요구치가 높은게 당연함 그게 이상한건 아니지

어떻게 보면 슬픈거야 국민이 민중이 우리민족이 오죽 서러우면 딴것도 아니고 사극에서 진실을 찾을까..

그런 시대정신을 작품에 잘 담아내는것이 어쩌면 대중예술의 중요한 임무일지도 모르겠다

내 의견은 너무 이상적인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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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역사적 사건을 박아놨는데,

과장과 생략, 캐릭터부여까지는 이해한다치더라도

아예 창작을해서 붙여넣는건 얘기가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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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적인 문제가 될만한 요소들이 있다면 비판하는건 맞다고 봄

근데 실고증 혹은 있는 사실 그대로 영화화하면 다큐내지 인강이랑 뭐가 다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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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실제 역사에 있던 사건에 있었을법한 사건을 조금 가미하여 재미를 추구하다 ~ 영국의 거룩한 철수 작전의 처절함를 체험시키므로서 역사를 다시 살려낸 영화 덩케르크

실제 역사에 있었으면 하는 사건에 실제 역사를 조금 가미하여 재미를 추구하다 ~ 독립군이 겪었던 실제의 고귀한 희생과 노력보다 전형적인 액션 영화의 재미를 추구한 영화 봉오동전투.

 

엄복동도 그렇고, 봉오동도 그렇고 실제로 존재했고 제대로 마주봐야할 역사의 암울한 면을 아예 없던 것으로 해버리고 가상의 역사를 새로 만들었음. 이건 뭐 전쟁 중에나 만들법한 선전영화급의 주제의식임. 상업영화 이하의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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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게릴라가 정규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를 강조 안하고 그냥 무쌍 찍었다고 또 주작 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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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조금 상상을 가미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군함도 시즌2를 찍었다는 얘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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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이런애들 특 ) 고증철저하게 하면 노잼이라고 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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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영화가 엄청 재밌으면 고증 안 맞아도 면죄부 생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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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여기가 영판이 아니고 읽판인데. 저 글쓴애는 봉오동 영화를 까면서 실제 역사를 쓰려고 했구만. 이건 뭔가 핀트가 틀렸지. 영화를 깔꺼면 영판에, 정보전달이면 영화 까는걸 좀 자제해야지. 글 제목도 저렇게 지으면 안되고. 실제 영화와 다른 봉오동 전투를 알아보자. 요렇게만 글 제목 했어도 이렇게 까이진 않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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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암살보고 생각한건데

인물들 신파찍으면서 뻔한 사망플래그 올리거나 줄줄히 죽어나갈때의 전형적인 한국영화 느낌이랑

마지막에 감독이 힘줘서 연출한 반역자 처단 연출이랑 괴리가 너무 심하더라고

한국 감독들이 제작사 간섭이나 공식에 갇혀서 이제 자기 역량만큼 찍을 수가 없게 된게 아닐까 싶음

영알못이라 억측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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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엄복동도 마찬가지지만

사실을 얼마나 고증했냐 안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재미가 없어.

 

암살, 밀정 쪼금 많이 너그럽게 쳐서 덕혜옹주까지

역시나 고증 쪽은 그다지 높은 점수를 못주지만

보는 재미는 있잖아.

 

이건 쌀쿡 영화 인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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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고지전 같은 몰입감 절때 없음

태생이 개그 조연 배우들 둘이 모아놔서

하나는 혜리남친 하나는 땅딸보 김혜수 전남친 생각밖에 안남

그리고 호빗을 주연으로 할려면 앵글각을 조정해서 미션 임파서블처럼 덩치가 작아보이지 않게 주연으로써의 존재감이 부각되개 만들어야 되는데 그런거 없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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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뭔가 저런걸 보면 독립운동사가 무장 투쟁부분이 크게 없는거에 대한 보상심리, 그런게 있는 거 같음. 그래서 무장 투쟁만으로 독립 운동을 다룰려고 하면 큰 딜레마에 부딪히는 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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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역사물이 팩트 고증논란에서 자유로울려면

존나 재밌으면 됨

광해봐라 누가 뭐라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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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0

시사회가서 영화보고 너무 충격받음.

이렇게 영화 만들거면 봉오동전투라는 제목을 쓰면 안되었음.

영화가 너무 의식의 흐름처럼 너무 스토리가 왔다갔다하는게 제일 문제였음.

역사를 바꿔서 만들거면 재미라도 잡았어야 했는데, 재미도 못잡아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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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5

국뽕 빼고 드라이하게 만든 남한산성 망한거 보면 어쩔수없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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