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개미와 베짱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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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테니얼 경, 우물에 빠지는 점성술사. 이 사람은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다. 하늘을 보고 걷는 바람에 물에 빠졌는데, 시녀가 "천문은 살피시면서 한 치 앞도 못 보시네요." 하고 웃었단다>

 

결정론(決定論)이란 모든 것이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는 철학적 방법론이다. 탈레스를 위시한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철학자들이 처음으로 주장했다고 하는데, 이후로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다 : 과거의 인류가 공유한 가치관은 숙명론(宿命論)적으로, 모든 사건이 예정된대로 흘러간다고 여기는 관점이었다. 세상만사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면, 원리 같은 것이야 알아봤자 뭐하겠어. 때문에 고대인들은 현상을 보고 그 경이로움과 목적에 대해 상상했을 뿐, 기작은 신의 권능으로 여기며 관심 밖에 두었다. 반면, 결정론은 현상의 인과관계를 증명하고 법칙성을 발견하는데 집중하는 특징이 있다. 자연철학자들은 이를 도입해 자연이 감춰둔 비밀을 추론하고, 그것의 귀결을 밝혀내고자 거듭 시도했다. 이렇게 사물 간의 영향을 이론으로 정립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경향은 철학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결정론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수용적 태도를 버리고, 자연을 탐구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과학은 특히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전까지의 과학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자연학 체계를 따랐는데, 자연물의 형성과 움직임을 그것의 본성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등 신화적 발상에 가까웠다. 그래서 관찰이 면밀히 미치지 못하는 대상, 예를 들어 별과 같은 것들은 인간계가 아닌 신계의 법칙을 따른다며 설명을 거부하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이, 뉴턴 같은 거인들이 만물의 운동에 작용하는 인자, 즉 "힘"의 개념을 고안하면서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킨다 : 작디작은 사과에서부터 크나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고전역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결정론의 위업이라 할 수 있는데, 천상 세계의 운행 법칙이 지상 세계의 그것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신의 섭리 · 물질의 본성처럼 불분명한 개념으로 떼워오던 세상의 모순이 비로소 인간의 이해 범주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인과의 법칙을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다고 여긴 인간은 성취감에 매우 고무되었다. 라플라스는 "초기값(= 원인)을 알면 미래의 모습(= 결과)을 예측할 수 있다"고 선언했는데, 즉 온 우주를 지배하는 운동 법칙에 기댄 확신이자 자연을 정복한 이성의 승전보였다. 과학 혁명 시기를 즈음하여 인류는 바야흐로 합리주의의 시대를 맞이하고, 결정론을 앞세운 인간의 약진은 거침 없이 근대 문명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처럼 인류의 미명을 거두어 준 결정론이 지성사의 유구하고도 장엄한 싸움을 시작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 앞서 결정론이 인과관계와 법칙성의 발견에 주목한다고 했는데, 이는 법칙성이 인간에게 대단히 유용하기 때문이다. 동일 조건 하에서 동일 결과를 보장하는 게 법칙 아니던가? 따라서 어떤 현상의 인과관계를 터득하면, 법칙에 의거해 앞날을 예측할 뿐 아니라 이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가? 복잡하기 그지 없고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에도 법칙을 적용할 수 있는가? 결정론자의 기묘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것이 기묘한 이유는, 인간의 정신 작용 또한 법칙이 있다고 주장한 까닭이다. 사람은 물론 계획적인 사고 끝에 판단을 내리지만 창조적인 상상, 번뜩이는 재치, 죽 끓듯 하는 변덕과 같이 즉흥적인 생각에 의존한 판단 역시 자주 하는 편이다. 이러한 모든 선택들에 외재적 원인이 선행되고 법칙화 할 수 있다면, 인간은 사실 아무것도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게 된다. 또한 결정론이 정답이라면,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모두 밝혀지는 순간, 인간의 생각과 행동 역시 자연환경처럼 제어하고 가공할 수 있는 요소로 바뀐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정신을 영혼, 즉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하는 근원적 능력으로 여겨왔는데 결정론이 이를 부정한 것이다.

 

뜨끈한 합리주의 한 그릇 든든하게 말아먹고 이 쑤시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을 수밖에. 그럼 우리가 생각할 줄 안다는 게 무슨 소용인데? 이성의 힘과 가능성에 기대어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등 근대 문명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끼쳐온 결정론이 종국에는 이성을 부정하고 고대의 숙명론으로 회귀하다니. 더욱 뼈아픈 점은, 결정론의 변절이 인간의 탐구하는 능력(= 이성)과 함께 탐구할 주제를 선정하는 능력(= 자유의지)까지 한꺼번에 앗아간 부분이다. 다시말해, 인간은 사실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환경적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알 수 있다는 말씀.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견딜 수 없었던 철학자들은 비결정론으로 맞섰다 : 이 세상에 보편 진리 따윈 없으며, 이성으로 지각할 수 있는 정보만이 실재한다는 게 그 내용이다. 비결정론자들은 인과의 법칙이 "우연" 또는 "확률" 같은 변수까지 통제하지 못한다는 주장으로 그것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특히 인간의 인지 범위 바깥에서는 숙명론과 같아진다는 걸 보임으로써 무의미 하다고 공격했다. 

 

결정론을 둘러싼 갈등은 2천 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데모크리토스는 인간 뿐만 아니라 영혼, 자연, 신조차도 인과율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파격적 주장을 폈으나, 그 진보성을 용납하지 못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후학들에게 조직적으로 비판 받았다. 17세기를 즈음하여 과학의 융성과 함께 부활한 결정론은 경험론, 회의주의와 겨루어야 했다. 또한 인류 최고의 석학이자 열렬한 결정론자였던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의 새 지평을 쓴 보어의 논쟁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렇듯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점잖지만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었던 이유는, 물론 그 결과가 인류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도 낙관적이지 않다 : 결정론을 긍정할 경우, 인간은 한낱 통 속의 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적절한 자극에 적절히 반응하며 살아가는, 그러면서 고등한 정신문화를 향유한다고 착각하는 생물 말이다. 우주 교수님 지시에 맞춰 우주 대학원생이 이리저리 조작하는 실험체일 뿐이다. 한편, 결정론을 부정할 경우, 인간은 합리성과 인과법칙이라는 두 척도를 상실한 폐허에서 원초적 공포와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룩한 모든 문명과 지식의 성과가 실은 우연한 발견의 산물이고, 언젠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붕괴하면 우리는 지적 파산을 맞이한다.

 

과연 인간은 환경이란 실에 얽매인 존재인가? 그 실을 끊고 자립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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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덩이를 받는 진() 문공. 예순이 넘은 늘그막에 천하의 패자가 된 사람이다>

 

진 헌공(獻公) 궤제(詭諸)에게는 아들만 여덟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장남 신생(申生), 차남 중이(重耳), 삼남 이오(夷吾)의 자질이 뛰어났다고 한다. 훗날 진 문공(文公)에 오를 중이는 과연 젊어서부터 인재를 모으는데 힘쓰는 등 총명한 기질을 드러낸다. 그러나 딱히 치적을 남기진 않은 듯 한데, 헌공이 대단한 정복 군주였기 때문. 진 헌공은 정적들을 일거에 쓸어버려 혼란했던 내정을 안정시키고, 주변국들을 모조리 병탄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능력자였다. 이러니 중이는 그저 잘 먹고 잘 살면 그 뿐이었다. 그러나 부왕이 말년에 과욕을 부리는 바람에 그의 고생길이 열리고 말았다.

 

헌공은 여(驪)를 정벌하고 얻은 공주를 총애하였는데, 마침 공주가 아들을 낳자 그를 후계로 세우려 했다. 우선 헌공은 태자 신생을 비롯하여 다른 아들들을 모두 외방에 봉하는 식으로 수도에서 내쳤다. 당시 이들에게 주어진 영지는 모두 외국과 경계를 마주한 곳으로, 숫제 죽으라고 내보낸 셈이다. 그러더니 신생에게 일군을 맡아 원정대를 이끌도록 했는데, 태자가 일개 장군도 아니고 군을 지휘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군주의 이러한 조치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져 대부 이극(里克) 같은 이가 지적했으나, 헌공은 그저 "아직 누가 후계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라며 고집대로 굴었다.

 

결국 헌공은 신생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궁에서 찍어내버렸다. 놀라 달아난 신생은 외진 곳에서 자결로 삶을 마감했다. 그러자 헌공은 사건의 공범으로 중이와 이오를 지목하고, 군대를 풀어 둘을 잡아오게 했다. 이에 중이는 야음을 틈타 외갓댁인 적(翟)나라로 도피했고, 이오는 한동안 농성하다가 양(梁)나라로 망명했다.

 

5년 뒤 헌공이 죽었는데, 이극이 들고 일어나 여 공주와 그 일파를 모조리 숙청해버렸다. 이로써 공석이 된 군주 자리에 누구를 앉힐 것인지 의논이 분분했다. 사태를 주도한 이극은 우선 중이를 불러오게 했으나, 자신마저 제거하려는 술수로 여긴 중이는 완곡히 거절했다. 반면, 이오는 자형 진 목공(秦 穆公)과 이극 등에게 영토를 뇌물로 약조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나섰고, 끝내 공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바로 진 혜공(晉 惠公)이다.

 

혜공은 다소 미련한 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이극을 포상하긴 커녕, 보위를 잇자마자 "전임 군주(= 여 공주의 아들)를 시해한 죄"로 축출해버렸다. 또한 땅뙤기를 떼어주기로 한 진(秦)과의 약속을 번복하면서 원한을 샀다. 이렇게 나라 안팎으로 신임을 잃자 혜공은 명망이 높아 정통성을 위협하는 중이에게 자객을 보낸다. 다행히도 조정 내에 사람을 심어 사정을 미리 알고 있던 중이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중이의 입장에서 볼 때 일련의 사태는 속수무책이었다 : 잘 나가는 공자로서 호의호식하다가 하루 아침에 부친의 서슬을 피해 해외로 도망쳐야 했고, 판단 미스로 동생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으로 모자라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더군다나 나라를 떠날 당시 중이의 나이는 마흔 셋이었다. 춘추 전국 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50살 정도였으니, 몰락한 공자 신분에다 나이까지 많은 중이로서는 당최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이의 결의는 남달랐다. 그는 오히려 역전을 도모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과 맞섰다. 이후로 중이는 19년에 걸쳐 제(齊), 송(), 초(), 진(秦) 등등 당대의 강대국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아마도 천하 패자들의 군대를 빌려 진(晉)으로 돌아가려는 야심이 있었던 모양. 과연 대단한 집념이다.

 

떠돌던 처지에 때마침 명재상 관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중이는 제에 인재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으로 길을 잡았다. 그러나 실각한 공자 나부랭이인 그가 어디 가서 환대를 바라겠는가. 제나라로 가던 중 들른 위(衛)나라에서 중이는 잠시 거처를 청할 요량으로 위 조정에 출두했지만, 당시 군주였던 위 문공은 자신도 전쟁 중이라 바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했다. 중이는 먹을 것도 없이 쫓겨나서 지나가던 촌부에게 구걸하는 지경이 되었는데, 밥그릇에 흙덩이를 퍼담아 주더랬다. 중이의 충신 개자추(介子推)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다가 먹였다는 일화는 이 때의 일이다.

 

마침내 거지 꼴을 한 중이가 제나라에 도착하자, 환공은 그에게 4두마차(= 제후 전용 마차) 20승과 종실 여인을 아내로 내어주는 등 대단히 후하게 맞이한다. 하지만 당시의 제는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기여서 중이가 몸 담을 곳이 못 되었다 : 관중의 죽음으로 총기도 함께 사라진 환공은 간신들인 역아와 수초, 개방을 중용하여 조정의 기강을 문란케 했고, 다섯 명이나 되는 아들들의 서열을 정리해주지 않아 불화를 유발했다. 환공 본인도 연로한데다 중병에 걸려 제나라의 앞날이 상당히 불안정했던 상황. 끝내는 관중의 염려대로 역아 · 수초의 난이 발발하여 환공은 궁에 유폐되고 공자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중이는 5년 간 숨죽인 채로 그들을 지켜보다가, 글렀다는 판단이 서자 다시 여정에 오른다.

 

제나라는 송 양공의 후원 덕에 겨우 바로 설 수 있었지만, 패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체면만 잔뜩 구겼다. 그러자 송 양공이 패자를 자처하며 제후들 간의 회맹을 중재하고자 했다. 그 꼴을 본 중이는 송으로 향했지만 물론 순탄하지 않았다 : 송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위치한 조(曺)나라를 지나던 그는 인사 차 궁에 들렀는데, 조 공공이 맞이했다. 조 공공은 송 양공과의 싸움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터라 앙심이 가득했는데, 중이가 송에 의탁한다는 말을 하니 속이 상했나 보다. 공공은 "성인들의 갈비뼈는 서로 붙어서 통뼈라던데, 정말인지 궁금하다"며 중이더러 옷을 벗어보라는 둥 대단히 무례하게 굴었다. 신하들이 공공에게 자중하시라고 했지만, 기어이 중이가 목욕할 때 훔쳐보며 낄낄댔다고 한다. 조나라 대부 희부기가 대신 사죄하며 식량과 보물을 바쳤지만, 밥그릇에 흙을 받아 본 적 있던 중이는 웃으며 식량은 받았으나 보물은 사양했다.

 

송은 양공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쓸 데 없는 전쟁을 겪어야 했다. 앞선 조와의 전쟁도 그렇고, 초와의 전쟁도 그러하다. 특히 초 성왕(楚 成王)과의 일전인 홍수 전투는 송에게 뼈아픈 참패를 남겼다. 이 일로 송은 200승의 전차를 초에 배상함은 물론이고, 군대와 명예를 잃었으며 송 양공 자신은 화살에 맞아 생긴 상처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중이가 당도하자, 그를 국빈의 예로 극진하게 맞이하는 등 허세를 잔뜩 부렸다. 중이가 가만 보니, 송에 남아 있는 군대는 보잘 것 없었고, 국력도 쇠했는데 군주가 저다지 우둔하니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중이는 제에서와는 달리, 송에는 1년도 채 머물지 않고 떠났다. 죽기 직전이었던 양공은 그에게 제와 마찬가지로 20승의 수레를 선물하여 마지막까지 가오를 지켰다.

 

중이의 다음 목적지는 물론 초나라. 그러므로 초와 송 사이의 정(鄭)나라를 지나쳐야 했다. 정의 군주 정 문공은 중이의 방랑과 방문 목적을 알고 있었지만, 대응책을 놓고 수뇌부와 의논했다. 문공은 중이가 제후의 후손이자 손님이니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는 의견에 "저렇게 떠도는 귀족들이 널려 있는데, 일일이 후대하면 어떡하잔 말인가 !" 라며 거절한다. 한편 범상치 않은 인물이니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반대를 표했다. 그래서 정 문공은 예를 다 해 찾아온 중이에게 "제 아비를 배반하고 천하를 떠도니 불초한 자다." 라는 말과 함께 야박하게 굴고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초에 도착하자 성왕이 중이를 맞이했다. 초 성왕은 뜰 안을 갖가지 보물로 가득 채울 정도로 중이를 융숭하게 접대하며 은근슬쩍 기를 죽이려 했다. 그도 그럴 게, 초나라는 묘족들의 나라이고 중이의 고향인 진나라는 한족들의 나라이니, 힘만 셀 뿐 근본은 오랑캐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몸둘 바를 몰라 하는 중이에게 성왕이 물었다. "그대가 진으로 돌아가면 나에게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으려 하시오?" 우스갯소리 치고는 난이도가 높은 질문인데, 중이는 "군왕께서 진기한 재보를 모두 가지셨으니 마땅히 물건으로 갚을 길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 라고만 답했다. 성왕은 그치지 않고 "그래도 무엇으로든 보은해야 하지 않겠소?" 하며 더욱 몰아세우는데, 중이가 질렀다 : "후일 초나라 군대와 싸우게 되면, 진나라 군대를 90리 물려서 사은하겠사옵니다." 쥐뿔도 없는 중이의 패기에 초나라 장수들이 건방진 코노야로를 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성왕은 중이의 남다른 면모를 높이 사서 웃으며 넘어갔다.

 

중이가 초에 머무는 사이, 진(晉)에서는 혜공이 죽고 진(秦)에 억류되어 있던 태자가 탈출하는 등 소란이 있었다. 태자는 돌아가자마자 진후를 이어 훗날 회공이라 불리게 된다. 진(晉) 혜공은 일전에 가뭄이 들자 진(秦) 목공으로부터 양식을 꾸었는데, 반대로 기근이 진(秦)에 번지자 이를 갚기는 커녕 침략을 획책했다. 그러나 도리어 분노한 목공의 군대에 패퇴한 나머지, 태자를 인질로 보내고 영토까지 잃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회공이 멋대로 후계를 자처했으니 목공이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목공은 초나라에 중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자, 회공을 몰아낸 다음 그를 진(晉)의 주인으로 만들어주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중이에게도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중이가 진(秦)의 초청에 응하여 가보니 목공이 종실 여인을 다섯씩이나 하사할만큼 환대했다. 이토록 떠들썩한 접객 소식은 당연히 진(晉)에도 전해졌는데, 회공은 삼촌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에 겁이 나서 "중이에게 호응하는 자들은 족친을 멸하겠다." 라고 으름장을 놓고 본보기로 몇 명을 죽였다. 이는 반대로 회공 본인의 목을 죄는 조치로, 목공이 불의한 회공을 처단하겠다는 명분의 군사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회공이 군대를 보내 맞서게 했지만, 진(晉) 병사들은 중이가 온다는 소식에 도리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버렸고, 조정에서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중이를 열렬히 지지했다. 회공은 형세를 직감해 달아났다가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목공이 중이에게 종사를 잇게 하니, 진 문공이 비로소 등극했다.

 

진 문공은 나라를 떠나 지낸지도 오래 되었고, 즉위할 때의 나이가 이미 62세여서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공 치세는 진나라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아버지 헌공처럼 내 · 외의 우환을 모두 평정하고 패자를 공인 받았기 때문이다 : 문공은 원수 졌던 사람이나 정적들을 내치지 않고 모두 포용했다. 특히 혜공 때 자신을 죽이려 한 자객을 중용하여 신료들의 믿음을 얻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따르며 뒤치다꺼리 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치하하여 충성을 확보했다. 이렇게 장악한 인심을 밑바탕 삼아, 대대적으로 관료 조직을 개편하고 신권을 자잘하게 쪼개어 군주의 권한을 키웠다.

 

또한 문공은 오랜 방랑 세월 동안 익힌 민생 감각을 정치에 반영해 단기간 동안 진나라의 국력을 다졌다 : 문공은 즉위 직후부터 조세를 깎고 부채를 탕감했으며, 구휼 사업에 힘쓰는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구제를 우선했다. 뿐만 아니라 농업과 상업을 지원하고 절약을 강조하여 국고를 채워나갔다. 이렇게 해서 한 때 이웃나라에 곡식을 꾸어갈 정도로 빈궁했던 진나라는 어느덧 부강한 재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군제를 개혁한 것도 문공의 업적이었다. 당초 헌공은 주(周) 왕실이 허락한 한도를 어기고 군단을 확장해 상 · 하 2개 군단을 두었는데, 문공은 한술 더 떠서 6개 군단으로 대폭 늘렸다. 예법 상 6군을 다스리는 일은 오직 천자만의 권능이었지만, 문공이 명분과 편법을 동원해 거느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문공은 이웃하는 오랑캐 나라들을 휩쓸었고, 위 · 조 · 정 등의 소국으로부터 맹주로 추대되었으며, 진(秦)의 영향력으로부터는 독립하고 초와는 결전을 벌여 승리한다. 진 문공은 이 때 초군의 후미를 포위해 대단히 유리했는데, 성왕과의 약속을 기억하여 실제로 전장에서 군대를 90리 물려 배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복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주나라의 내란에 개입하여 천자를 보호하고 복위까지 주도한 공으로, 문공은 천자로부터 구석과 함께 패자 칭호를 내려받는다. 그는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패자로서의 권위를 활용해 회맹을 주도하며 제후들을 호령하고, 심지어는 천자더러 "님 계신 곳까지 가기도 귀찮은데, 우리 중간 지점에서 만나죠." 라는 압박을 가해 접견 장소에 불러낼 정도로 맹위를 떨쳤다. 그리하여 천하 사람들이 패자를 논할 때 송 양공이 아닌 진 문공을 더 높게 쳐주었다고 한다.

 

문공은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 때, 살아지는대로 머물지 않고 스스로 위난에 뛰어들었다. 군왕의 길을 걷고자 끊임 없이 노력했던 문공은 신민들의 고통을 달래고, 천하 판도를 놓고 이민족들과 겨루는 등 결코 적지 않은 가치를 남겼다. 문공의 집념과 의지를 후세 사가들이 길이 전하여 환난을 겪는 사람들의 모범으로 칭송한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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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령 순욱(荀彧), 문약(文若). 스스로 주인을 찾고, 또한 스스로 떠난 삶이 과연 장량과도 닮아 있다. 마땅한 화상이 없어 대만 만화가 첸 우엔(鄭問)의 작품으로 대체>

 

순욱은 낭중지추라는 말이 마치 그를 위한 것인 양, 어딜 가나 뛰어난 재주로 환영 받았다. 하지만 조조 단 한 사람과 고락을 같이 하며 한 평생 그를 위해 헌신했고, 결국 조조의 패업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한편, 그토록 충성한 조조가 위왕(魏王) 등극에 야심을 드러내자 적극 반대하더니, 자신이 일궈놓은 업적에 한 치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자결하는 등, 사대부로서 표표한 인생을 살았다.

 

순욱은 형세를 판단하는 혜안이 있었다. 젊어서부터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을 시작한 그는 지방직을 전전하다 불과 1년 정도 지나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당시 최고 실세인 동탁이 천자조차 멋대로 갈아치울만큼 전횡을 부렸는데, 이런 상황에서 영천 순 씨 집안 같은 청류파 선비들은 별 재미를 못 볼 게 뻔했기 때문. 순욱은 조정이 혼란할 것을 내다보고, 낙양에서 지근거리인 영천 역시 화를 입을 것이라며 이웃들더러 얼른 피난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땅과 재산이 아른거려 그 말을 듣지 않았지만, 다시 1년 뒤 동탁이 군대를 보내 노략질할 적에 목숨과 함께 잃어버리고 나서야 순욱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가족들을 데리고 기주(冀州)로 들어간 순욱은 남다른 행보를 보인다 : 발해(渤海) 태수 원소는 6년상과 동탁의 면전에서 발검하는 등의 퍼포먼스로 전국의 선비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책략으로 기주를 빼앗은 후, 스스로 세력을 형성하고 나날이 부강해졌다. 또한 순욱을 따라온 순심(荀諶), 곽도(郭圖)와 같은 예주(豫州) 사람들을 기용하여 인재에 대한 포용력을 내비쳤다. 때문에 당시의 기주는 청류파의 성지나 마찬가지였고, 순욱에게도 기회의 땅이라 할만 했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가 한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체적인 질서를 수립하려 하자, 미래가 어둡다고 판단하고 끝내 기주를 떠났다.

 

마침 조조가 동군의 흑산적 무리를 소탕하고 연주(兗州)에 자리 잡으려 하자, 순욱은 조조에게로 나아가 임관한다. 조조는 그 때까지만 해도 반동탁 연맹에 가담했다가 병력을 모조리 잃고 원소 휘하에서 객장 노릇이나 하던 처지인데, 이런 자를 찾아가 섬기려 했던 순욱에게 비상한 안목이 있었던지 숨겨진 의중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조조는 순욱을 반갑게 맞이하며 "나의 장량이 왔도다 !" 라고 했다는데, 과연 조조도 보통이 아니었다. 아무튼 순욱은 이 때부터 조조를 따르며 재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조조가 서주(徐州)에서 대학살을 자행하는 등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의 근거지인 연주에서 반란이 터졌다. 진류 태수 장막(張邈)과 진궁(陳宮) 등은 조조의 잔혹함에 혀를 내둘렀고, 오랜 기간 동안 인력과 물자를 공출해 간 주제에 별 이득도 없는 악행이나 일삼는 조조의 리더십에 연주 토호들이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 이들은 마침 지나가던 여포와 서로 결탁했는데, 하루 아침에 연주 전체가 여포 손아귀에 떨어진다. 오직 순욱이 지키는 견성(甄城) 현만이 여전히 조조를 지지하고 있었다. 순욱은 견성 마저 회유하려는 장막 측을 쫓아내고 수비 태세를 갖춘 뒤, 조조에게 연락을 취해 회군하도록 했다. 또한 정욱(程昱)을 파견하여 범(范) · 동아(東阿)현을 설득시켜 조조 세력으로 돌려 놓았다. 견성현은 1,041km2 로, 우리나라 강릉시 정도에 불과한 땅이다. 이 작달만한 곳이 그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할 것임에도, 순욱은 한 번 정한 거취를 꿋꿋이 유지함으로써 조조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연주는 총 80개 현으로, 그 중 77개가 여포의 편이었다. 게다가 때맞춰 창궐한 메뚜기 떼에 의해 전답이 초토화되면서 식량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절망적인 대세 가운데 여포와의 결전이 길어지자, 조바심이 난 조조는 우선 서주를 마저 취해서 전황을 바꿔보려 했다. 그러자 순욱이 "이전에 서주를 정벌할 때 위엄과 형벌로 실행해서 그 자제들이 부형의 치욕을 생각해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서주를 함락해봤자 우리가 가질 수는 없을 겁니다." 라며 지구전을 건의했다. 이에 조조는 서주를 단념하고 견성에서 군을 수습하며 겨울을 넘겼다. 다행히도 조조의 존 - 버 메타가 통했는지, 여포와 장막은 내분을 일으키며 자멸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조조가 반격에 나서자, 여포는 여지 없이 참패하여 거의 다 집어 삼킨 연주를 도로 반납하고 도망쳤다.

 

조조에게 날개를 달아준 협천자 명분도 실은 순욱의 아이디어였다. 천자 헌제(獻帝)는 삼보의 난을 당해 지존의 신분임에도 풍찬노숙을 거듭하다 겨우 낙양에 당도했는데, 순욱이 냉큼 모셔오도록 했다. 순욱은 천자를 받든 자에게는 "순리와 덕"이 따른다고 주장하면서 조조를 설득했다 : 400년이 넘도록 한나라를 지배한 이념은 단연 유학으로, 당대 식자들은 모두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충의를 최고로 쳤다. 천하 군웅들도 한나라 황실의 회복을 명분으로 기의했기 때문에, 멀쩡히 살아있는 천자에 대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연이어 벌어지는 전란에 지쳐 하루 빨리 질서가 바로 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순욱이 말한 순리와 덕이란 곧 천자의 명교적 가치인 셈이다. 조조는 제안을 받아들여 헌제를 옹립하고, 자신의 근거지에 가까운 곳으로 모신다. 이로써 조조는 그제껏 붙어먹던 원소와 결별하고, 재야의 뜻 있는 선비들이 제 발로 찾아와 위용을 갖출 수 있었다.

 

원소와 조조 간의 대결인 관도대전에서 보여준 순욱의 지략은 더욱 돋보인다 : 원소는 공손찬과의 혈전 끝에 기주와 유주(幽州) · 병주(幷州) · 청주(靑州)까지 두루 평정한 하북 일대의 패자로 거듭나 있었던 데 반해, 조조는 예주와 서주를 점령하긴 했으나 대학살의 여파로 실질적인 전력은 연주와 예주가 고작이었다. 때문에 초반의 놀라운 선전에도 불구하고 원소군에 대패한 조조는 관도(官渡) 땅에서 포위 당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예주에서는 반란이 터지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답답했던 조조가 순욱에게 철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봤더니 순욱은, "공께서는 10배가 넘는 원소군을 반 년씩이나 막아내고 계십니다. 이제 놈들의 기력이 쇠할 때가 다 되었으니, 계책을 쓸 때지 퇴각할 때가 아닙니다." 라고 답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조조는 끈질기게 버티다가, 원소군의 군량 보급로를 기습하여 크게 동요시키고는 기어이 역전에 성공한다. 원소는 얼이 쏙 빠지도록 털려서 퇴각하고, 신이 난 조조는 형주(荊州)로 눈을 돌려 세력 확장을 꾀했는데 이번에는 "원소가 패하기는 했으나, 공께서 형주로 나아간 틈에 다시 치고 내려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라며 뜯어 말렸다. 평범한 사람들이 눈앞의 전망만으로 판단할 때, 순욱은 그 너머를 읽고 주군에게 간언한 것이다.

 

세력이 어느 정도 안정된 뒤 순욱이 아뢴 계책은 주로 벌모(伐謀)책이었다. 원소가 급사하자 조조는 원소의 아들들을 서로 이간질 시켜서 내분에 빠지게 한 다음 손쉽게 정리해버렸다. 이 때 조조의 참모들이 통치의 원활화를 위해 기주와 나머지 주를 통합하는게 어떠냐고 건의했는데, 순욱이 "그렇게 하면 토지 대장도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땅 주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결국 또 반란이 일어나 오히려 곤란해질 것입니다." 라고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마침내 하북까지 취한 조조가 중원의 종주 세력이 되었을 때, 다시 형주를 공격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순욱은 "형주 사람들도 대세를 보는 눈이 있을 것이니, 금새 항복할 겁니다." 라면서 대규모 원정은 자중하게 했는데, 실제로 형주는 유표 사후 얼마 못 가 조조에게 투항했다. 병법에서 이르길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벌모야말로 최선이라 했으니, 순욱의 지모가 어느 정도 깊이인지 가늠할 수 있겠다.

 

인물평 또한 순욱의 특기였다. 순욱전에 따르면 순유(荀攸), 종요(鍾繇), 진군(陳群), 화흠(華歆), 신비(辛毗) 등 뛰어난 모사들을 많이도 천거했고, 이들 대부분이 훗날 높은 관직에 오를 정도로 조조 막하에서 빼어난 활약을 남겼다. 인걸에 대한 기준이 상당히 유연해서, 희지재(戱志才), 곽가(郭嘉), 두기(杜畿) 같은 이들은 "법도를 어기고 오만함" 이란 평을 들었음에도 과감하게 채용했는가 하면, 원소 측 간부들을 품평할 적에는 허유(許攸)의 탐욕스러움과 심배(審配)의 강경함을 지적하면서 패망을 예견하기도 했다. 동탁이 포악하니 필시 변란으로 죽을 것이라 예상한 점이나 한참 잘 나갈 적의 원소를 버리고 별 볼 일 없는 조조를 택했던 점만 보더라도, 순욱이 사람 보는 눈은 기가 막혔다.

 

이토록 통찰력이 뛰어났던 순욱이건만, 말년은 괴이쩍기 그지 없다. 천하가 삼국으로 정립되어 가던 212년, 이미 승상(= 국무총리)이 되어 떵떵거리고 있던 조조에게 중원을 평정한 공으로 공작위를 내리고 구석의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다. 그런데 순욱은 황제와 신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조 승상은 위국안민의 일념만으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지,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조정과 사직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작위와 구석을 내리시면 그 충정과 겸양하는 진심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라며 대놓고 반대를 때려버린다. 다사다난한 가운데 흔들림 없이 조조를 지지해 온 순욱으로서는 처음이자 가장 강력하게 역성을 든 언사였다. 순욱의 이 한 마디에 작위 하사 안건은 쑥 들어가고, 조조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조조는 20 여 년 동안 자신을 대신해 본진에서 행정 업무를 보던 순욱을, 별안간 전선으로 발령내서 뒤끝 있는 대응을 보였다. 그러자 순욱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 있다가, 조조가 동오로 출병하는 날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듬해 조조는 결국 구석을 받고 위공(魏公)에 올랐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조조 진영의 2인자로서, 누릴 일만 남은 순욱의 죽음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조조군은 중원의 2/3를 다스리는 종주세력이었고, 이는 누구보다도 순욱 본인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성과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소원하지도 않아서, 조조는 자기 딸을 순욱의 아들에게 시집 보낸데다가 죽기 1년 전만 해도 서량 정벌에 대한 계획을 논하며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 집안 사람인 순유조차 위공 등극을 찬성한 마당에, 순욱이 나서서 반대하는 모양새도 사나웠다. 만일 조조를 손절하려 했다면 장막의 반란, 관도대전 직전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놔두고, 세력이 강성해진 이후를 택하는 건 새삼스럽다. 게다가, 정 마음에 안 들었으면 은퇴하던지, 최소한 입 다물고 하던 일이나 마저 했으면 될텐데 굳이 자살할 것까지야 있는가. 순욱이 나이를 먹고서 비상했던 안목이 흐려지기라도 했던 것일까?

 

이는 순욱을 일반적인 선비라는 프레임에 끼워맞추면서 발생하는 부조화라 할 수 있다. 사실 순욱은 사대부 치고 당대 누구보다도 기이한 행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 아시다시피, 후한 말기 환관 세력들은 두 차례에 걸친 "당고의 금(黨錮之禁)" 사태를 통해 청류파를 중앙 정권에서 배제했고, 자신들에게 부역하는 탁류파 인물들만 기용했다. "십상시의 난(十常侍之亂)"을 당해서도 청류파와 탁류파 사이에 칼부림이 벌어져 많은 사람이 죽었고, 조정이 대단히 혼란해졌다. 때문에 청류와 탁류는 서로 교류할 수 없는 정적에 해당한다. 그런데 순욱은 누대에 걸친 청류파 사대부로 명망을 두루 인정 받은 집안 사람이고, 반면에 조조는 환관의 손자로서 탁류 중의 탁류 아닌가. 이토록 본질적 입장 차이가 있는 조조와 손을 잡는 것부터가 파격적이었다.

 

일전에 순욱은 원소가 헌제의 정통성을 비방하고 새 황제를 세우려 하자 기주를 떠났으면서, 정작 조조에게는 헌제를 사로잡으라는 계책을 권하는 등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공자의 직계 후손인 공융(孔融)은 서주 대학살, 원소군의 7 만 여 패잔병 갱살, 동 귀인 살해 사건과 같이 명백히 불의한 짓을 저지른 조조에게 "님 도르신?"을 일갈하며 가열차게 비판했지만, 순욱은 오히려 그에 맞서며 조조를 거들었다. 이것만 보아도 순욱이 일반적인 유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순욱이란 어떤 사람인가? 「순욱 별전」을 살펴보면 그의 진심이 드러난다 : 조조와 치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적에 순욱은 "순(舜) 임금도 교화와 정벌을 함께 썼고, 고황제 유방(劉邦)과 광무제 유수(劉秀)도 그러하였습니다. 공께서도 군사에 대한 일을 마치시면, 통치와 교화를 살피셔야 합니다." 라고 간언한 바 있다. 즉, 순욱은 난세의 종식과 민생의 안정을 위해 우선은 군벌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본 듯 하다. 때문에 순욱은 군사력과 장래성을 지닌 조조와 결탁하고 본인부터가 교조적 수양론에서 벗어나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 바쳤으며, 때로는 책략도 서슴지 않고 건의했다. 조조의 여러 과오를 눈감아주고, 그와 고락을 나눈 역사는 세력을 확보해야 하는 당장의 필요가 만든 셈이다. 그러나 요점은, 일단 중원이 평정되고 나면 "통치와 교화"를 살펴야 하는데 있다. 특히 순욱이 천거한 인재들은 공교로울 정도로 청류파 출신들이 많은데, 전란이 사그라든 이후를 경륜할 인선이었음이 명백하다. 이로 미뤄보건대, 순욱은 애초부터 진정한 목적인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질서 회복을 위해, 조조에게 접근하고 그를 이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적벽에서의 대패로 상황이 꼬였다. 그간 중원 판도를 좌우해 온 조조는 한타를 대차게 말아먹으면서 남쪽 방면의 진출로가 막히고, 수많은 군대를 잃고 말았다. 또한 정치적 위상에 큰 타격을 입어 이전처럼 대규모 원정을 도모할 동력을 상실한다. 때문에 조조는 불현듯 동작대를 짓고 벼슬을 뿌려대는 여유를 부리더니, 왕위에 오르려는 무리수를 뒀다. 이는 물론 자신의 실추된 권위를 바로세워서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조치였는데, 당시 54세였던 조조로서는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조바심을 낼만도 하다.

 

문제는 아직 천하가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조가 승상으로 머물러 있을 때는 그럭저럭 한나라 황제의 충신으로 포장이라도 할 수 있었지, 왕위를 갖는 순간 400년 동안 유 씨만이 허락된 자리에 오르는 만큼 빼도박도 못하는 역적질이었다. 이는 라이벌들의 대항의식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명분을 제공하기 때문에 병탄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선택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조조가 216년에 왕을 자칭하자 유비 역시 한중왕에 스스로 오르는 등 통일 왕조에 근본 없는 왕 자리가 생기더니, 후일 조조가 죽고 나선 중화 대륙에 황제만 세 명이 탄생하는 사태로 번진다.

 

선비로서는 갈 지자 행보를 보여왔지만, 전후 민생의 회복에 헌신하는 행정가로서는 일관된 태도를 지켰던 순욱. 그는 왕공 서임이 전란을 부추길 것이라 내다보고, 평생의 소신대로 반대를 표명한다. 한데, 순욱처럼 명민한 사람이 이러한 행동으로 도당의 중론을 거스를 수 있다고 여겼을까? 내 생각에는, 이 때 이미 순욱의 머릿속에서 큰 그림이 그려졌던 것 같다. 바로, 죽음마저 불사하는 결기로 판을 뒤집는 묘수를 둔 것이다 !

 

순욱의 죽음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큰 동요를 일으켰다. 누차 언급했듯이, 공훈으로 따지면 따를 자가 없었고 우두머리인 조조와 사돈지간까지 맺은 그의 입지는 단연 으뜸이었다. 또한 능력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워 진영 내에서 두루 존경 받았던 인물이다. 이런 명사가 파워 게임에서 실각한 이후 자살하면, 여파가 보통이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순욱씩이나 되는 사람도 가차 없이 내친다고? 그럼 우리는?

 

결정적으로, 순욱은 청류파와 탁류파를 조율하는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애초에 순욱은 군사력이라는 실천적 힘이 없어 조조를 택했을 뿐, 사대부들의 구심점으로 추앙 받을 정도로 이념적 영향력만큼은 조조를 능가했다. 조조에게 영합하는 순욱의 방편이 공융, 예형(禰衡), 유우(劉虞)와 같은 이상주의자들 눈에는 고루해 보였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대부들에게서는 현실적 대안으로서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당장 조조 휘하 능신들이 누구의 천거로 등용문을 넘었는지 살펴보면 뻔히 드러나는 사실. 이러한 순욱을 버린다면, 나머지 청류파들과도 척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조조 특유의 방심으로 잠시 깜빡했을지는 모르나, 사실은 순욱이야말로 조조 진영 내의 청류파 관료 세력과 탁류파 군부 세력이라는 두 축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순욱을 잃은 위나라 조정은 파행을 거듭한다 : 조조는 효헌황후 복 씨 및 그 일가붙이를 주살하고 자신의 딸들을 헌제와 맺어주어 어그로를 잔뜩 끌었다. 그러자 길본(吉本)을 주축으로 하는 난이 터지는데, 길본과 경기(耿紀) 등 반란군 수괴들은 모두 낙양 사람으로, 예주 선비에 해당하는 청류파 인사였다. 때문에 조조는 분노하여 한 황실에 남은 신료들을 대다수 숙청해버렸다. 이 일로 동요한 청류파가 조조를 지지하지 않았고, 조조는 이어진 한중 공방전과 번성 공방전 등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조조마저 죽고나자, 강력한 영도력으로 겨우 유지되던 청류파와 탁류파 간의 결속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조 씨 일파로 대표되는 탁류계는 전횡을 일삼으며 겉잡을 수 없이 부패했고, 청류파 계열을 경쟁자로 여기며 탄압했다.

 

끝내 두 집단의 갈등은 고평릉 사변으로까지 번진다. 아시다시피, 사변의 주역인 사마의(司馬懿)는 순욱이 직접 추천해서 임관한 사람이었고, 그에 동조한 고유(高柔)와 장제(蔣濟), 진태(陳泰) 등은 모두 청류파 사대부들이었다. 이러한 막판 뒤집기는 순욱의 유산이라 할 수 있으니, 위나라 신하로 머물 수도 있었던 선비들이 청류파로서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부패한 척신들을 경계해 행동하게 된 계기는 모두 순욱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헌제에게 의연하게 아뢴 "조조의 충정과 겸양" 운운하는 말도 실상은 순욱 본인의 마음이었던 게 분명하다. 전쟁의 장기화로 고통에 시달릴 백성들에게 하루 빨리 평화를 가져다주려는 일념이 그 속에 절절하게 묻어나온다. 한편으로는 사태가 이렇게 흘러갈 것을 예감한 순욱이 조조에게 가한 최후 통첩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정말이라면 과연 순욱의 통찰은 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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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의 월산대군 신도비. 비문은 마멸이 심해 읽기 어렵지만, 월산(  ʍ)이라는 상형문자로 비문의 주인을 익살맞게 드러냈다>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 이정(李婷)은 조선 조 종친들 가운데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특별한 업적을 남기진 않았지만, 누대에 걸쳐 경애 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후손이 전해진다. 월산대군이 죽고 한참이 지나 그 혈족이 임금의 혈계와 많이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실을 기리며 특별히 가문에 묘비와 제례도 베풀고 벼슬까지 내줬을 정도. 그 비결은 다름 아닌, 본인의 확고부동한 처세에 있었다.

 

세조는 장남 의경세자 이장(李暲)을 총애하여 공 · 사석을 불문하고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세자가 19세에 요절하는 바람에 옥좌를 물려주지 못 했다. 그나마 의경세자 슬하에는 월산대군 이정과 잘산군 이혈(李娎) 두 아들이 있었기에, 월산대군이 대통을 이어받아도 별다른 하자는 없는 상황. 그런데 세조는 아직 4살배기인 월산대군 대신,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 이황(李晄)을 세자로 삼으니, 그가 훗날의 예종이다. 이장과 이황의 나이 차이는 12살로, 따지고 보면 월산대군보다 3살 많았을 뿐 코흘리개인 부분은 매한가지였음에도 그러했다.

 

예종은 즉위하고 불과 1년 여 만에 급사했다. 이 때도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이현(李琄)이 마침 4살이어서, 보령을 이유로 임금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면 족친 가운데서 가장 왕위에 가까운 사람은 다름 아닌 월산대군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도 월산대군은 고배를 마셔야 했는데, 아우인 잘산군이 차기 군주로 낙점된 까닭이다. 잘산군은 삼촌인 예종의 양자로 들어가는 복잡한 절차 끝에 형과 사촌동생을 제치고 군왕이 되어 성종이라 불리운다. 이 때는 성종의 나이도 13세였던지라, 할머니 정희왕후 윤 씨가 조선 들어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기까지 했다.

 

이토록 장자 계승의 원칙을 깨고, 삼촌의 양자가 되고, 대리청정까지 하는 등의 기묘한 쇼를 벌인 이유가 뭘까. 바로 예종과 성종의 장인어른이 당대 최고의 권신인 한명회였기 때문이다. 한명회는 세조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사육신과 구성군 · 남이(南怡)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네 차례에 걸쳐 공신에 임명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실세 중의 실세였다. 나이 어린 군주를 비호할 친위 세력으로 이만 한 사람도 또 없지. 왕실 최고 어르신인 정희왕후는 한명회와의 결탁을 통해 사직의 안정을 보장받기 위하여 정도인 월산대군을 버리고 방편인 성종을 택한 셈이다.

 

정희왕후는 잘산군을 고를 명분이 도무지 없자 월산대군이 허약해서 임금감이 아니라고까지 했다. 흡사 태종이 세종을 고를 때처럼 비루하기 그지 없는 대목이다. 월산대군으로서는 억울하지. 본인도 박중선(朴仲善)의 사위로서 사실 상 한명회의 라인인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내가 왕 하면 되잖아. 이처럼 계승 서열이 꼬였을 때 왕자의 울분은 자칫 위험한 일을 초래할 수도 있었는데, 억울한 왕자의 곁에 억울한 사람들이 몰려들기 마련이고, 행여 본인이 조심하더라도 누군가의 음모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조선 왕자들의 삶을 잠시 돌이켜 보자 : 인종이 자식 없이 시름시름 앓자 후계를 정하기 위해 윤임(尹任)과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서로 경쟁했는데, 당시 윤임은 봉성군 이완(李岏)을 지지했더랬다. 하지만 윤원형 세력에게 선수를 빼앗기면서, 윤임은 을사사화로 박살나고 그가 지지한 봉성군 또한 유배에 처해졌다. 임해군 이진(李珒)은 광해군의 친형이었으나 성격이 포악해 민가를 약탈하는 등, 왕자로서 도를 넘은 행실로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등극하는데 일조한다. 그런데 광해군이 즉위하고도 패악질을 부리는 것은 물론, 무장들과 어울리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끝내 사병을 양성한다는 의심을 사는 바람에 유배 · 사사 되었다. 인조 시절, 이괄(李适)은 군사를 일으켜 도성을 함락시킨 다음 흥안군 이제(李瑅)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흥안군은 인조가 이괄을 피해 내려갈 때 같이 데려가고 있었는데, 도중에 대열에서 이탈해 이괄에게 합류한데다 이괄 진영의 공로를 포상하기까지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역적. 당연히 이괄이 패주할 때 붙잡힌 뒤 참혹하게 죽는다. 밀풍군 이탄(李坦)은 경종 때와 영조 때 모두 청나라 사은사로 다녀오는 등, 왕실의 중역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으나,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킬 당시 밀풍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품었기 때문에 난이 평정되자 자결을 명 받는다.

 

언급한 이들의 대선배인 월산대군이야말로 누구보다도 한명회에 대한 서운함이 충동질 당하기 딱 좋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일절 불만을 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생의 치세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처신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성종 2년은 구성군의 역모 의혹이 불거질만큼 불안한 시기였는데, 바로 그 때 월산대군은 도성을 떠나 권좌를 위협하는 자신의 존재부터 치웠다. 이후 구성군을 성공적으로 정리한 조정에서 공신 자리를 뿌릴 때, 아무런 일조도 하지 않은 월산대군에게도 고마움을 담아 공신 2등을 책록한다.

 

성종은 형님 마음을 헤아려서 정 2품 제조(= 사무차관)직을 내리기도 했다. 세종 대왕께서 종친부를 설치하신 이래로 왕족의 정치 참여는 금지였으나, 이렇듯 특별히 허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에 월산대군의 할아버지인 세조가 대군 시절 제조로서 토지의 개혁을 추진하는 등 왕성하게 정치 활동에 매진한 바 있다. 왕자로서는 조정에서 세력을 형성할 흔치 않은 기회였는데도, 월산대군은 극구 사양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다.

 

월산대군은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하여 본인은 물론이고, 식구들과 하인들조차도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 월산대군은 누구와도 교분을 나누지 않아, 이따금씩 성종이 찾아오는 걸 빼면 덕수궁이 늘 한산했다. 또한 피마(避馬)라 하여 지체 높으신 분이 행차하면 말에서 내려 조아리는 예절을 보일 필요 없는 신분임에도 스스로 지켜서 매우 겸손하다는 평을 들었다. 왕실 행사에 꼬박 꼬박 참여했다는데, 입장 상 사은할 일이 많은 월산대군이 취해서 주정 한 번 부린 적 없다는 걸 봐선, 초인적인 술고래였거나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게 분명하다. 집안 하인들도 주인의 권세를 믿고 날뛰었다는 기록이 없고, 첩을 들여 낳은 아들 덕풍군 이이(李恞) 역시 부친을 본받아 어떠한 이력도 남기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월산대군의 삼가는 품성을 잘 알았다. 성종 8년, 월산대군의 집에 중놈 둘이 찾아오더니 편지 한 통을 내밀었는데, 거기에는 "나 병조판서 이극배(李克培)는 나라를 셋으로 쪼개어서 한 귀퉁이를 먹고 말 것임을 맹세한다" 라고 적혀 있었단다. 나름대로 모반을 고변하는 모양새이긴 한데, 이걸 관아에 고해바치지 않고 월산대군에게 전해서 문제였다. 이러한 내용의 편지는 수중에 들어오는 과정을 캐물으며 얼마든지 물고를 낼 빌미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 다행히도 월산대군이 상황을 보고하자, 성종은 단번에 "그럴 리가 있냐" 며 월산대군과 이극배를 신임하고 감싸준다. 이후 편지를 전해준 스님들이 극형에 처해질 때까지 다른 말이 없었으니, 대소 신료들 중 누구도 월산대군의 충정에 이의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성종은 형님이 애틋해서인지, 언제나 자주 챙겨주려 했다. 말이나 비단 같은 것을 수시로 하사했고, 덕수궁을 방문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자주 만났다. 특히 편지를 워낙 많이 보내어서, 참외 맛있으니 나눠 먹자는 글 · 별장이 멋져서 지내기 좋으시겠다는 글 · 꽃이 피니까 형이 더욱 보고 싶다는 글 등등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시문들이 가득 남아있다. 성종실록을 들여다보면 월산대군에게 무언가를 내렸거나, 월산대군에게 어떠한 말을 했다는 기록이 즐비하니 가히 조석으로 형 생각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형적인 왕위 계승을 겪고도 이렇듯 의좋은 형제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월산대군의 처세가 한 몫 했음이리라.

 

유일하게 월산대군이 원껏 누린 것은 풍류였다. 본가인 덕수궁을 떠나, 고양에 지어둔 별장에서 휴양하거나, 합정동 근처의 망원정에서 한강이 도도히 흐르는 걸 구경하는 등 유유자적했다고. 동생이 국정에 집중하느라 그 좋아하는 매 사냥도 못 하는 동안, 수시로 유랑에 올라 낚시도 하고 술도 마시며 야인에 가까운 일상을 즐겼던 모양이다. 이러한 감상을 담은 시가 풍월정집에 수록되었을 정도니까. 

 

월산대군은 성종이 즉위하고 약 20년 간을 중앙 정계에서 떨어져 지내다가, 홀연히 세상을 버린다. 병약하다는 왕실의 핑계가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던지, 35살의 젊은 나이에 몸져 눕더니 결국 일어나지 못 했거든. 아픈 와중에도 어머니 소혜왕후 한 씨의 병 간호를 했다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어머니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성종은 형을 고양 별장에 모시고 오래도록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한 평생 금욕적이게 살아온 월산대군을 두고 천성이 소박한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 여건이 따라주지 못 했을 뿐 욕망은 누구 못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송나라 때의 스님으로 유명한 도천(道川)이 지은 시가 월산대군의 시와 유사한데, 둘 모두 "무심한 달빛", "빈 배"의 이미지를 차용해 불교적 명상에 집중하고 있거든. 즉, 공(空)에 대한 추구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성찰을 뜻하니, 월산대군은 욕망이 거세된 사람이라기 보단, 그저 잘 참은 사람이 아니었냐는 말씀. 사대부들의 우두머리인 왕족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따지고보면 불경을 언해한 세조로부터 총애를 받은 손자였고, 월산대군 본인도 청량리의 절을 중창하거나 원각사(圓覺寺)에서 스스로 움직였다는 불상 보러 가는 등 상당히 친불적 성향을 띠었다. 따라서 시를 통해 불교적 이미지를 연상하거나 차용하는데도 익숙했을 법 하다. 다시 말해, 월산대군이 종교적 힘을 빌어 욕망을 억누르려 했다고 봐도 타당한 시선이다.

 

이러한 시각이 옳다면, 월산대군의 삶은 더더욱 위대하다 할 수 있다. 갓 쓰기 위해 골육 간의 정리도 무참히 버리는 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다스리며 탐심을 경계했으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월산대군의 조용한 희생은 성종 시기를 태평성대로 이끄는데 일조했으니, 그의 남다른 결의는 칭송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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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조제 드 카르발류 이 멜루(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 인자해 보이지만 신의 분노에 맞서 왕국을 재건한 무쇠 같은 사람이다>

 

예로부터 부(富)의 편중을 가르는 상품으로 향신료만 한 게 없었다. 향신료 무역로로서 애용된 루트는 인도양 ~ 홍해 ~ 지중해를 아우르는 항로인데, 대체로 이 일대를 지배한 나라들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역사로 보면 향신료야말로 번영의 열쇠였다. 향신료의 대표 격인 후추, 울금(= 강황), 계피 등은 모두 인도가 원산지였기 때문에, 중동의 상인들이 인도에서 떼어들고 온 것을 이집트에 집하하면, 유럽 상인들이 본국으로 사들고 가는 식으로 거래되었다. 당연히 그 먼 거리를 거쳐 온 향신료는 비싸서, 거래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막대한 풍요를 선사했다.

 

포르투갈은 15세기 경 향신료 무역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 이전까지 유럽 내로 들여오는 모든 향신료는 베네치아를 거쳐서 판매되었는데, 베네치아가 이집트의 향신료 집하장인 알렉산드리아와 레바논의 베이루트 판로를 독점했기 때문. 베네치아는 8세기부터 600 여 년 간이나 향신료 장사로 재미를 봤고, 그렇게 쌓아올린 부유함은 모든 유럽인들의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를 후원해가면서까지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포르투갈 왕국이 희망봉을 넘어가는 인도 직행 항로를 개척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포르투갈이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의 간섭 없이 향신료를 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유럽 내 향신료 시장 판도를 뒤바꾼 포르투갈은 그야말로 돈을 쓸어담았고, 강력한 해상 왕국을 구축할 수 있었다.

 

17세기 경 영국과 네덜란드 등 열강들이 인도 시장에 뛰어들었고, 특히 동인도 회사와 같은 거대 자본 집합체가 투하되면서 포르투갈도 고전을 면치 못 했다. 다행히 포르투갈은 18세기에 들어 브라질 식민지의 금광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지지부진하던 인도 시장에서의 성적을 만회하고 대서양 무역로로 눈길을 돌렸기 때문에, 당시 유럽 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유지했다.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수많은 환전상 · 대금업자 · 상인들로 가득했고, 인력소 · 무역회사 · 조선업체 등의 상공업 인프라가 갖춰졌다. 인도로 가는 발길은 끊겼을지언정, 아메리카로 가는 배 편은 여전히 대륙 서남부에 위치한 포르투갈에서 가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리스본은 예나 지금이나 유럽인들의 상업 심장부에 속했다.

 

중흥기를 구가하는 리스본에 희망이 피어났지만,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 곧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1755년 11월 1일 아침 9시 반, 리히터 규모 9.0에 준하는 강진이 도시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지진이 대략 5 ~ 6분 가량 지속되었다고 하는데, 그 사이 리스본의 건물 90%가 붕괴되고 도심부의 지반이 5m씩이나 쪼개어졌다고 한다. 문화적 · 자본적 집적도가 높았던 리스본은 여지 없이 엄청난 피해를 받으며 폐허로 변해 버렸다. 이 날의 재앙을 리스본 대지진이라 일컫는다.

 

이 날은 기독교에서 상서롭게 여기는 제성첨례(諸聖瞻禮)일이다. 할로윈 다음날로, 그 못지 않은 축제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지진이 발생할 당시 포르투갈 사람들은 모두 성당에서 기도 드리고 있었을 시간이다. 당시 지진으로 4 ~ 5 만 명이 죽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모두 성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붕괴하는 건물에 떼몰살을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성당엔 촛불이 많지 않은가? 당시 리스본에만 성당이 40채 넘게 있었다는데, 이게 지진으로 쓰러지면서 불을 피웠고, 그렇게 리스본을 괴롭히는 화마를 불러왔다. 불은 5일 밤낮을 일렁이며 리스본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생존자들은 난생 처음 겪는 재난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했는데, 오늘날처럼 지진 대응 매뉴얼이 없는 그들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일단 리스본 주민들 대부분은 개활지가 안전하리라는 판단에서 부둣가에 집결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오히려 악수였다 : 지진 발생 40분 후, 해일이 세 차례나 덮쳤거든. 전조는 이미 있었는데, 항구 쪽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바다가 말라버린 듯이 후퇴한 물을 보았다고 한다. 전형적인 쓰나미의 징후로, 역시 사전지식이 없었던 18세기인들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15m도 넘는 파도가 리스본을 덮쳤고, 지진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이 때 무심한 수마에 휩쓸려 목숨을 잃어야 했다.

 

당시 이 난리를 수습했던 사람은 군주인 주제(Jose) 1세가 아닌 그의 총리 카르발류였다. 주제 1세는 마침 해돋이를 보러 나가있었던 덕에 화를 면했지만, 파멸의 충격으로 여생토록 건축물을 신뢰하지 못해서 왕이라는 사람이 천막에서 신세졌다고 한다. 이게 문명 6였으면 리겜각을 보겠는데, 21세기의 게이머가 아니었던 주제 1세는 멘탈이 터져서 마땅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했다. 그는 카르발류에게 "하느님이 내리신 천벌에 어찌하면 좋겠소?" 하고 물었는데, 카르발류는 "산 자는 살리시고, 죽은 자는 묻으소서." 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주제 1세는 카르발류에게 전권을 위임하였다.

 

카르발류는 전대미문의 대재앙을 이겨내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 먼저 도시에 널린 시체들을 치우기로 한 카르발류는 리스본 대주교와 담판을 벌여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장례 절차는 생략한다"는 양해를 구하고, 지방군을 동원해 시신들을 싹 다 배에 실어다가 수장했다. 한 명 송장 치르는데도 찬송 · 기도 · 염습까지 이틀은 족히 걸리는데, 그 동안 시체를 방치했다가 전염병이라도 번지면 리스본은 그야말로 지옥으로 변모할 게 뻔했다. 그의 신속한 판단과 대처 덕에 그러한 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다.

 

도시 꼴이 만신창이가 되자 으레 그렇듯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지진으로 교도소가 무너져 죄수들이 탈출하기도 했고, 치안에 힘쓸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던 것. 곳곳에서 약탈과 강간 등이 자행되고 질서는 땅에 떨어졌다. 카르발류가 군대를 불러온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망나니들을 매달기 위함이었는데, 사태를 제대로 꿰뚫어 본 혜안이었다고 하겠다. 카르발류가 칙령으로 리스본 전역에 단두대를 설치하고 본보기로 수 십 명을 목 베어서야 겨우 사람들이 진정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행상인들이 재난을 틈타 폭리를 취하지 못하도록 엄금하고, 딱 지진 직전 가격으로 팔도록 했다. 지금은 서로 기회를 엿보며 등쳐먹을 궁리할 때가 아니었다.

 

카르발류는 이재민 구호소를 개설하고 그 곳에서 생필품을 배급해주었다. 이는 여러모로 지혜로운 대책이었는데, 물론 파괴된 리스본 경제를 대신할 구제책이기도 했지만, 중구난방으로 돌아다닐 생존자들을 집결하게 만드는 방책이기도 했다. 기초적인 의 · 식 · 주가 해결되지 않는 리스본에 아무도 남아있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도시를 빠져나가려고만 했는데, 그럼 누가 도시를 재건한단 말인가? 따라서 카르발류는 군대로 외곽을 봉쇄하고, 탈출하려는 이재민들을 붙잡아 구호소 대열에 합류시켰다. 또한 이렇게 모인 사람들 중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라면 강제로 징발해 도시 재건 사업에 투입했다. 이재민들은 자기 손으로 화재를 진압하고, 건축물 잔해를 치우고, 부상자들을 옮기게 되었다.

 

 

주제 1세는 리스본의 꼴이 영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얼마 안가 수도를 옮기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을 개진했는데, 열심히 하는 사람 사기 떨어뜨리는 소리일 뿐이었다. 카르발류는 "이웃나라 스페인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요?" 라는 말로 주제 1세를 단념시키고, 다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만일 리스본이 가망 없다고 생각해 포기했더라면, 당시 리스본에 진출해 있던 수많은 유럽 상인들 역시 포르투갈 왕가에 대한 신용을 잃었을 테고, 이는 또 다른 문제의 단초였다. 리스본을 조졌다고 해서 다른 식민지까지 내다버리는 조치에 다름 아니었다.

 

대지진의 피해를 추스리는 과정에서 대활약한 카르발류는 후속 조치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 다음에 있을 지진을 대비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지진 피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던 것이다. 포르투갈 전역에서 이뤄진 설문조사에는 지진의 발생일시와 인명 · 재산 피해 정도, 지진 당시의 객관적 정황 등을 묻는 항목이 게재되어 있었고, 책임자들의 행동 강령이 적절했는지도 물었다. 이렇게 수집한 설문 자료를 적절히 참고하고 보전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리스본 대지진의 규모와 끔찍했던 현장의 모습을 상상이나마 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리스본에는 간헐적인 여진이 50년 넘도록 발생했다. 다시말해, 언제든 리스본 대지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르발류는 1758년 도시계획법을 공포하여 지진 대비에 종지부를 찍었다. 새로운 도시계획법에는 건축물의 설계에 관한 제반 규정과 도로 규정, 건축 허가 규정 등이 포함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 리스본에서 4층 이상의 건물은 지을 수 없고, 반드시 벽면에 골격을 촘촘히 설치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하며, 집과 집 사이의 간격은 멀찍이 떨어뜨려 놓도록 했다. 도로는 종전의 폭을 확장해 18 ~ 20m를 갖추도록 했고, 이러한 대로를 도시 중심부로 이어서 사통팔달하도록 했다. 당국의 건축허가가 떨어지는 즉시 집을 짓도록 하되, 5년이 지나서도 완공되지 않을 시 건물을 경매에 부쳐서 재빨리 도시가 제 모습을 갖추게 하는 내용도 있었다. 상기한 도시계획법은 리스본을 최초로 내진설계 및 지진 대비 도로 설계를 포함한 도시로 바꿔놓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았다 : 지진 발생 직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제 심판의 날이 머지 않았으니, 다들 회개하십시오 !" 라며 재건 활동을 방해하고 선동이나 일삼았다. 이들은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망가진 리스본을 어째서 다시 세우려 드느냐는 논리로 대들었는데, 카르발류는 무력으로 예수회를 진압한 뒤 추방하는 등 강경하게 대처했다. 한편, 건물주와 땅 주인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도시계획법 발의 이전에 임의로 건물을 본래 모습 이상으로 개 · 보수하거나, 자기 땅 위를 점거하여 재건 사업에 지장을 주었다. 안전한 도시 건설을 원했던 카르발류는 즉각 이러한 자들을 해산시키고 시민들의 권리 행사를 억압했다. 이후 신속한 복구를 위해 신 도시계획법에 의거하여 모든 건물을 획일적인 디자인으로 설계하고, 건축 자재는 모듈화 하여 대량 생산 하도록 명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천민 나부랭이와 지체 높으신 우리들 집이 똑같은 모양새여서야 쓰겠느냐는 뜻에서였다. 카르발류가 군홧발로 짓밟은 것은 물론이다.

 

카르발류는 초유의 재앙을 맞이해서도 의연하게 모든 혼란을 정리해냈다. 그의 단호한 의지력이 없었더라면 고난과 좌절, 그리고 인간적 탐욕이 되풀이되는 난항 속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포르투갈의 상처가 아물도록 헌신한 카르발류는 그 공으로 후작위에 봉해지니, 국민들이 영웅으로 기억해주는 영예만큼이나 당연한 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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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스 모렐스, 우는 철학자. 이 철학자는 만물이 끊임 없이 변한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다. 인간이 직면한 어둠 때문에 울고 있다>

 

결정론은 인간의 또 다른 지향점인 도덕의 위상을 흔들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면, 자발적으로 저지른 악행도 없는 셈이므로, 인간은 어떤 행위에도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게 결정론의 입장. 인간이 조건만 갖춰지면 악행을 일삼는 기계적 존재라면, 우리가 애써 도덕적이게 살아갈 구실이 없는 게 아닐까? 그냥 그런 특정 조건 하에서는 누구나 악해질테니 말이다. 이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모두 다룰 수 없지만, 직관적으로도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귀책론을 다루었는데, 행위를 "원인 제공자"와 "고의성 여부"에 따라 "자발적 행위"와 "비자발적 행위"로 구분 짓고, 그 중 자발적 행위는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주목할 점은, 자발적 행위에 "행위자가 강압에 의해 실시한 행위" 역시 포함된다는 점이다. 참주가 자식을 붙잡아 두고 부모에게 매우 유감스런 짓을 명령했을 때, 부모로서는 그 짓을 할 확률이 높겠지. 그러나 참주의 명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예시에서의 부모라는 행위자는 참주라는 강압에 굴복해 행위했지만, 결국 행위 자체는 행위자들이 직접 이행했으므로 도덕적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상기 논리는 자유 의지가 침해된 것만으로 도덕적 책임이 조각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는 결정론의 물음을 향한 도덕의 대답이기도 하다 : 책임이란 개인의 의지가 아닌 사회적 정체성에 부과한다는 게 그것이다.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특정한 위치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의 삶이 사회를 떠나서 성립할 수 없고, 사회 또한 우리의 효율적 역할 분담 없이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적 역할 간에 마찰이 발생하는 경우로, 공동체를 영위하다 보면 으레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마찰은 사회 후생 손실을 야기하고, 결국 사회 구성원 전원에 피해를 끼치며,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공멸을 유발할 수도 있다. 책임은 바로 그럴 때 문제 해결의 준거로 작용하도록 사전에 정해 놓은 개별 역할들의 범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범위를 정하는 주체는 사회 유지라는 취지 하에 행위의 규칙을 제시하는 도덕 원리의 몫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면서 어느 역할을 맡는 순간부터 책임을 갖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문을 다시 보자면, 부모라는 행위자는 "인질로 잡힌 아이의 부모"라는 정체성과 "시민 사회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당연히 두 정체성의 범위를 설정하는 책임도 함께 갖고 있으며, 부모의 행위는 어느 한 쪽 정체성에 대한 내적 선택이 실제로 드러난 것이다. 이 경우, 도덕적 책임은 부모의 사회적 정체성을 전제할 뿐, 그 자체로 부모의 자유 의지를 유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도덕적 책임은 개인의 선택 이전에 있는 것이지, 선택으로 말미암아 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결정론과는 반대로, 도덕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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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선별진료소의 의료진. 동아일보 DB에서 발췌>

 

나는 아직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진정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모두에게 각자의 역할과 책임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우리 삶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음 역시 확실하다.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맡은 바를 충실히 해내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여러분 몫의 하루를 보내온 덕분에.

 

오늘날과 같이 어두운 시기를 지혜롭게 헤쳐나가기 위해선, 그 어느 때보다도 모두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자각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새로운 규범으로 성립한 방역 수칙은 우리 사회의 존속을 위해 우리들에게 새로이 행동 강령을 제시했으나, 최근의 추세로 볼 때 사회 일부의 방기가 있었다고 하겠다. 다시 한 번, 전염병 창궐 사태 하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그 책임을 다 해야 할 때다.

 

물론 각고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놀고 싶고, 신경 끄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노릇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어쩌면 결정론자들의 생각처럼, 이런 시국에도 아랑곳 않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법칙이라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에게는 우리 몫의 도덕적 책임이 존재하며, 누구도 그것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냉엄하면서도 다행한 일인데, 모두에게 도덕적 당위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당신의 책임을 다 하면 사회는 그만큼 이로워지고, 그렇지 않으면 공멸이 기다린다.

 

인류는 수많은 역경을 딛고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가꿔왔다. 그 과정을 믿고, 우리도 각자의 역할에 성실히 임한다면 지금의 고난 역시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7개의 댓글

와 읽어도 끝이 안나길래 내려와봤는데 진짜 기네

이정도면 여러개 묶어서 전자책으로 내도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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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받으며개드립하기

다른 글들도 잘 부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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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

혼자 쓴 거야?!!

나 진짜 다 읽었는데 교수님이 쓴 칼럼같은데???

글 엄청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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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붕

네, 혼자 썼습니다. 다른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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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
@한그르데아이사쯔

글 너무 좋아용. 진짜 잘 쓰시네여 다른 글들도 보는 중이에요 ㅎㅎ

2
@쌈붕

고맙습니다. 미진한 솜씨를 좋아해주신단 말씀에 부끄럽고도 감지덕지한 마음입니다. 더 잘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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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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