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만수산 드렁칡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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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 욥과 친구들. 친구들이 망연자실한 욥 앞에서 "나 같으면 벌써 자살했다" 라며 혀를 차고 있다>


욥은 하느님이 인정한 의인이지만, 봉욕을 치러야 했다. 막대한 재산을 다 잃는 것은 물론이요, 열 명에 달한 자식들도 줄초상을 당했고, 본인도 부스럼병에 걸려 죽도록 고생했다. 칠십 평생 신실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이해하지 못했던 욥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십니까"라고 하느님에게 탄원했으나, 딱한 그의 처지를 본 친구들은 "그래도 무슨 죄가 있지 않겠냐"며 회개하라고 종용했다. 그래서 하느님이 직접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 "너는 네가 의롭다고 주장하기 위해, 감히 나를 불의하다 말하려느냐?".

 

하느님의 이 말은 마치 "너처럼 의로운 사람은 벌 받아선 안 된다고 경전에 씌어 있던?" 하고 반문하는 듯 하다. 이것이야말로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횡액을 당하는 까닭에 대한 기독교 나름의 대답이다 :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는 뜻이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의 일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의지가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바꿔 말하면, 사람에게 닥치는 행운과 불운은 모두 하느님 마음이고,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무관하다는 의미다. 기독교 정신의 본질은 선행의 베풂에 있지, 마일리지 쌓아서 복으로 바꿔먹는데 있는 게 아니란 말씀. 따라서 욥이 "나 진짜 하느님 걸고 항상 착하게만 살아왔는데, 왜 벌 받나요?" 라고 따지고 드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만약 욥이 이 얘길 듣고 개빡쳐서 "응, 던짐 ㅅㄱ" 하고 깽판을 놨더라면, 벼락이나 한 방 벌었겠지. 그러나 욥은 끝내 하느님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라 믿었고, 140세까지 천수를 누릴 동안 갑절은 더 부유해지고 자식도 많이 낳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일은 욥이 일흔 살에 겪은 시련이다. 가문도 풍비박산 났겠다, 살 만큼 산 나이겠다,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 때, 욥은 신앙심과 하느님의 증언이라는 종교적 체험을 근거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았고, 기어이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과연 나였더라도 배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주 팔자는 믿으면서 신앙심은 티끌만큼도 없는 나 같은 잡놈은 의문스러운 일이다 : 욥은 지킬 것 다 지키고 살았는데도 하느님 내기 한 번에 인생을 말아먹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하늘에 달린 것, 꼭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더라도, 조금 덜 번거롭게 살 수는 있지 않았을까? 그의 친구들을 봐, 싸가지 없이 말 하고 마녀사냥 해도 욥이 대신 빌어주었더니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예로부터 위인들은 사회의 통념을 깨뜨리는 결단으로 명성을 드날렸다. 몇몇 천재들은 당대에 도저히 이해받지 못할 정도로 앞선 혜안을 발휘하여, 후세에 재평가 받기도 한다. 이렇듯 구태의연한 법도에 얽매여 곤궁하게 살기보다는 요령껏 사는 것도 지혜란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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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태위 가후(賈詡), 문화(文和). CEO의 전형이라 할 만 한 인물이다>

 

가후의 삶은 곱씹어 볼수록 신기한데, 주군을 숱하게 바꿨음에도 열후에 오르고 삼공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인물은 중임을 맡지 못하거나 토사구팽 당하기 마련인데, 가후는 일흔이 넘도록 천수를 누리면서 터럭 한 올 다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후의 처세술이 뛰어나서 그랬다고 보는 편이나, 나는 가후의 비상한 두뇌 회전 역시 한 몫 했다고 본다.

 

가후의 특기는 심리전이었다. 그는 이각 · 곽사를 도우면서 처음으로 천하에 이름을 알린다. 전횡을 부리던 동탁이 죽어 그 잔당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짐 싸서 도망 가려던 이각과 곽사에게 "한 번 찔러나 보고 도망가죠?" 라고 설득한 사람이 가후였다. 동탁의 모살을 주도한 사도 왕윤은 동탁의 친모마저 "동탁 엄마인 죄"를 물어 죽였을만큼 일당에게 강경하게 대했는데, 가후는 이 점을 찔렀다 : 동탁의 고향인 양주 사람들을 "동탁 고향 사람인 죄"로 죽이려 한다는 소문으로 선동, 장안을 치게 한 것이다. 왕윤은 서둘러 대처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일족이 주살 당하고 본인은 죽어서 저잣거리에 효시되고 만다. 왕윤이 동탁을 죽인 후부터 교만해져 내부의 불만이 팽배했고, 또한 지나치게 비정하여 민심도 잃었음을 역이용한 계책이었다.

 

장수(張繡)에게 속해 있었을 당시, 조조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 그야말로 깨강정이 되도록 털어버린 적도 있다. 당초 완에 주둔 중이던 장수는 조조를 이기기 버거울 것이라 여겨 항복했지만, 조조가 장수의 숙모 추 씨를 취하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장수는 마치 숙모 팔아서 화친을 구걸한 모양새에 분노하여 조조를 치고자 했는데, 이 때 가후는 조조가 쉽게 승리를 얻었다고 방심하고 있으니 기습할 것을 주문한다. 조조는 이 날 대패하여 장남 조앙, 조카 조안민을 잃고 본인도 상처를 입은 채 몸만 겨우 내뺄 수 있었다.

 

관도대전을 앞두고 조조 진영에 있던 가후는 원소 군의 위풍당당한 규모에 의욕을 잃은 조조에게 리더십 차이를 지적하며 속도전을 벌이라 조언한다. 가후의 말을 요약하면 "원소는 당신보다 어리석고, 겁도 많고, 안목도 없고, 결단력도 떨어지는데 뭘 망설이십니까? 꾸물대지 말고 속전속결 하세요."인데, 대체로 원소 진영의 인재 관리가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원소 본인은 대단히 뛰어난 능력자였지만, 모든 걸 혼자서 결정하려는 독선이 있었고 이 점 때문에 인사관리에 문제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원소 군영으로부터 허유, 고람, 장합 등의 핵심 간부들이 투항하면서 원소 군은 압도적인 전력 차를 살려보지 못 한 채 패배하고 말았다.

 

서량의 군후들을 이간질 시켜 정복을 도운 것도 가후의 공이었다. 한수(韓遂), 마초(馬超) 등 서량 땅의 군벌들이 연합해 물경 10 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으로 동관을 점령하자, 근심하는 조조에게 가후가 이간계를 바친다 : 한수에게만 서신을 쓰되 몇 글자를 먹으로 칠해서 첨삭한 듯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가후의 아이디어. 마초는 한수가 조조와 은밀한 논의를 하고서 이를 비밀 삼으려고 편지를 고의로 훼손했다고 여겼다. 마침내 관서 연합군은 내분을 겪게 되었고, 그 덕에 조조가 한타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196년에 한수가 마초의 아버지 마등(馬騰)을 공격해 처자식을 죽였고, 서량 군벌들이 기의한 게 211년이었으니 불과 5년만에 원한 관계가 청산될 리 없다는 가후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이처럼 가후는 꾀가 많아서 몸 담는 곳마다 공을 세웠다.

 

반면, 그의 처세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이각과 곽사를 위해 "천자를 사로잡자"는 책략을 내놓고서는, 정작 이각이 천자의 거처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천자의 사은품을 갈취하려 하자 "왜 황상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십니까?" 라며 타박했다. 또한 이각 · 곽사가 가후의 공에 보답하려고 고위직에 천거하자 극구 사양하더니, 인재 채용에 깊이 관여해 조정 내에 청류파 선비들을 대거 등용하여 이각으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그러다가 돌연, 이각 군영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강족, 호족 군병들을 "어차피 공은 한족 장병들끼리 나눠먹고, 과는 우리 같은 이방인들에게 떠넘길텐데, 천자를 겁박했다가 화만 당하지 않을까?" 라고 선동해서 와해시켜버린다.

 

장수 밑에 있을 때의 가후는 기이할 정도로 쿨내를 풍긴다. 분명 장수는 가후의 책략에 힘입어 조조를 관광 태우고 독립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소와 조조가 결전을 앞두고 장수를 포섭하려 할 적에, 가후는 "원소의 세가 크니 우리가 가담한들 별로 기꺼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는 한 사람이 급한 실정이니, 그에게 합류하면 필시 크게 우대할 것입니다."라며 바로 그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권고한다. 심지어 원소의 사신이 의견을 물으러 오자, 주군인 장수 대신 "당신네 우두머리는 형제인 원술조차 용납치 못하면서 천하 재사들을 어찌 모으시려오?" 라고 꾸짖기까지 한다. 비록 가후의 예견대로 조조는 장수 무리를 환대하였지만, 가후가 일갈한 바람에 장수는 원소 측에 수습도 해보지 못한 채 말려들었다. 보통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법 아닌가?

 

조조가 말년에 가후를 불러 후계자 문제를 논의하고자 했다. 가후는 한참을 뜸 들이며 말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조조에게, 가후는 이렇게 대답했다 : "원소와 유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소는 막내 아들 원상을 총애하여 그에게 후계를 물려주려 했으면서 장성한 아들들을 정리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그들의 기량을 시험하며 세력을 더해주었다가 관도대전에서 패한 후부터 악화일로를 걷는다. 유표 또한 장남 유기를 놔두고 형주 채 씨의 지지를 받는 차남 유종을 밀어주면서, 주전파와 주화파의 분열을 초래했다. 이는 즉, 조조에게 "너도 원소랑 유표 꼴 날래?" 라고 일침하는 말이다.

 

가후는 기왕에 능력을 펼쳐 보였는데, 어째서 이토록 주군과 상충하며 세력을 갈아탔던 것일까? 내 생각에, 가후는 전문경영인 행세를 하여 입신양명을 꾀한 것 같다. 그는 무위군에서 태어났는데, 이 곳은 당시 서량 땅으로 벽오지에 해당하는 촌구석이었다. 가문도 한미한데다 촌뜨기 중의 촌뜨기인 가후로서는 별달리 출세할 방법이 없는 셈. 게다가 하필이면 커리어를 처음 시작한 곳이 동탁의 부하였으니, 제 아무리 똑똑하다한들 충의를 중시하는 당대 유교 패러다임 하에서 가후는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배경을 가늠해 본 가후가 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능력을 팔아서 살아남는 것 아니겠는가.

 

이각 · 곽사를 이끌어 도성을 공격해놓고 갑자기 왕윤을 대신해 근왕파의 면모를 보이는 것도, 장수를 도와 조조를 공격했다가 조조에게 투항하라고 말 한 것도 모두 가후의 커리어 관리 차원으로 본다면 재미 있다. 가후가 병 주고 약 주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전공을 쌓아 능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후속 조치로 자기 어필까지 했다는 말씀이다. 조조에게 원소, 유표 운운한 일도 결국 다음 사장님 되실 조비 들으라는 소리에 다름 아니니, 가후의 이러한 면모는 흡사 이적 시장에서 주가를 올리려는 전문경영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가후의 CEO스런 면모는 또 있다. 그가 스스로 섬긴 주군을 위해 당장의 계책은 잘 지어다 바쳤으면서, 거시적인 전략을 한 번도 아뢴 적이 없는데서 전문경영인 특유의 처신이 드러난다. CEO는 주주가 아니기 때문에 임기가 끝나고 가버리면 그 뿐이다. 따라서 회사가 장기적으로 살아남고 성장하는데 관심이 없고, 괄목할 성과를 단기간에 짜내어 월급 받는데만 밝은 경향이 있다. 이각 · 곽사를 도와 대권을 잡았으면서, 정작 둘이 싸울 때는 말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고 장수를 조조에게 투항하도록 해서 자신은 막하 모사로 이적했지만, 끝내 장수가 핍박 당해 죽을 때 일말의 구명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조조가 칭왕할 적에 순욱은 목숨까지 걸고 반대했지만 가후의 이름이 사서 어디에 나오던가. 어차피 가후 입장에서는 충성이니, 의리니 하는 명교적 가치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단 한 번, 가후의 입에서 거시적 경영 전략이 나온 적 있긴 하다. 조비가 촉, 오 중 어디를 먼저 치면 좋을지 물어보자, "촉에는 제갈량이 있고, 오에는 육손이 있는데, 우리나라엔 그들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난색을 표했다. 그러면서 인재를 기르고 물산을 비축해 다가오는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조비는 콧방귀 뀌며 남벌을 감행했지만, 죽을 때까지 한 치의 땅도 수복하지 못 했다. 가후는 이 말을 마친 뒤 조비가 1차 원정을 대차게 말아먹는 꼴을 보고 숨을 거둔다.

 

가후는 평생 고관대작과 일절 교류하지 않고 집돌이 생활을 했다. 삼공에 오른 몸이었지만 자식들조차 명문가가 아니라 평범한 집안과 혼인토록 했다. 하긴, 역적질을 거든 것으로도 모자라 조조군을 도륙내 버린 전과 2범이었으니 위나라에서 가후가 목숨 부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이런 사람이 탁월한 전략안을 가졌다 한들, 어느 누가 들어나 줬을까. 때문에 가후는 군주가 물어보는 것이나 임기응변으로 대충 떼우며 살았다.

 

"이것은 단지 목숨을 구하는 계책일 뿐인데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바로 제후 자리를 권하는 이각에게 가후가 사양하는 말이다. 난세에 임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구할 것은 구했던 가후의 지혜는 그 목숨을 오래 보전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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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왕(文懿王) 풍도(馮道), 가도(可道). 잘 익은 벼처럼 부드럽게 휘는 허리가 천하를 편안하게 했다>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는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서기까지의 약 70년 간을 일컫는 말로, 춘추전국 시대 또는 위진 남북조 시대처럼 중화 대륙이 여러 왕조로 쪼개진 호시절이었다. 여느 난세와 달리 오대십국 시대는 민중들의 고초가 덜 했다는 특징이 있는데, 풍도의 역할이 지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73세에 죽을 때까지 무려 5왕조, 11인의 군주를 섬기며 국태민안에 힘썼거든.

 

풍도는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의 높은 명성을 들은 유수광은 풍도를 자신의 속리(= 비서)로 삼았다. 문제는 유수광의 됨됨이가 극악한 패륜아였다는 점이다 : 유수광은 아버지를 공격해 감금한 다음 그 직책인 유주절도사를 멋대로 계승했고, 친형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골육을 도살하고도 뉘우치긴 커녕, 나날이 기고만장해진 유수광은 아예 "대연(大燕)"을 개국하며 절도사 직도 버리고 칭제를 때려버렸다. 풍도가 이런 사람에게 출사해서 무슨 영광을 누렸으랴마는,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다.

 

대연이 당면한 국적은 남북으로 마주하는 후량(後梁)으로, 당시 중원의 절반을 차지한 종주세력이었다. 겨우 유주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한 대연으로서는 중과부적. 또한 후량이 자랑하는 이존욱은 군재가 남달라서 훗날 거란의 대가한 야율아보기도 밟아버릴 정도의 명장이었다. 풍도는 결전을 희망하는 유수광을 만류했으나, 유수광은 도리어 풍도를 감금했다. 결국 제 고집대로 덤벼들던 유수광은 박살이 나버리고, 구차하게 도망다니다가 대연과 함께 파멸하고 만다. 이 와중에 풍도는 어찌저찌 탈옥해 목숨을 구했던 모양이나, 낭중지추라질 않던가. 이존욱이 후량을 멸하고 후당(後唐)을 세우자, 그 밑으로 출사해 한림학사(= 조서 담당관)에 임명됐다.

 

이존욱의 비서로서 풍도는 군심과 행정을 잘 조율하여 명성을 쌓았다. 이존욱은 싸움은 잘 했으면서 병사들 월급 주는 건 미루는 통에, 추밀(= 기무사 사령관) 곽승도(郭崇韜)가 나서서 사기가 떨어지고 있다고 한 마디 했다. 그러자 적반하장으로 진노한 이존욱은 곽승도를 내쫓은 뒤, 그를 죽여버리겠다며 군령장을 쓰게 했다. 이를 맡게 된 풍도는 우선 받들겠다고 대꾸한 다음 한참 동안 먹만 갈며 뜸을 들였다. 왜 이리 굼뜨냐는 이존욱의 닥달에, "신이 분부를 받잡았사오니 반드시 명대로 하겠사옵니다. 허나 곽승도의 말이 분명 지나치지만, 그로 인해 곽승도를 참하여 우리 군신 간에 흔들림을 내보이면 오랑캐(= 거란)들이 그 틈을 노릴까 걱정됩니다. 대왕께서 기왕 그의 헛소리를 관대하게 처분하시면, 이러한 화를 면할 수 있을 줄로 아룁니다." 라고 풍도가 답했다. 이존욱은 그제서야 분노를 거두고 곽승도에게 사과하며 풍도를 칭찬했다.

 

하지만 이존욱은 그 뒤로도 깨우치지 못하고 병사들의 처우를 개선하지 않았다. 한 술 더 떠서 환관들로 하여금 군영을 감독하게 했는데, 내시들에 놀아나 군권을 쥐어주는 꼴이었다. 불만이 가득 찬 장병들에 의해 결국 반란이 터졌고, 이존욱은 자신의 의붓동생 이사원을 시켜 진압토록 했다. 그런데 이사원이 오히려 반란군의 추대를 받아 역으로 궁궐을 습격했고, 수도 방위군 또한 이존욱을 잡아 죽인 뒤 항복해버린다. 이로써 황궁의 주인이 바뀌자, 풍도는 언제 이존욱의 신하였냐는듯이 이사원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했다. 다행히도 그럭저럭 인격자였던 이사원은 풍도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염(鹽), 철(鐵), 주(酒) 전매를 폐지하고 부패한 관리를 엄벌에 처했으며 혹형을 없애는 등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풍도는 항상 이사원을 칭송하면서 자기 말을 듣도록 살살 구슬렸고, 글 한 자 몰랐던 이사원은 신나서 더욱 성실하게 황제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한번은 사냥을 갔던 이사원이 짐승들을 그냥 놓아주자 "캬, 쟤들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게 영광입죠." 하며 듣는 이가 겸연쩍을 정도로 유난을 떨었다.

 

이사원은 본인이 군부의 지지로 등극한 까닭에 장수들을 매우 후대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장군들의 권한이 커지니 이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사원이 죽으면서 그 폐단은 고스란히 후세의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사원의 19살 난 아들 이종후가 권좌를 잇고서 절도사들의 권한을 줄이려 했지만, 그의 의붓형 이종가가 반대하고 나서다 거병하여 황위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에 이종후는 겁에 질려 황궁을 몰래 빠져나갔고, 전말을 알 길이 없던 조정에서는 한 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대신들은 긴급히 모여 사태를 의논하기 위해 황제를 찾아 부르짖었는데, 풍도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 "우리 황제께서 이렇게 오셨는데, 가고 없는 사람을 왜 찾는단 말인가?" 그러고는 곧바로 이종가를 황제로 책봉하는 조서 작성에 착수했다.

 

정작 이종가도 그렇게 제위에 오르고 맨 먼저 한 일은, 자신을 후원해 준 장군 석경당을 견제하는 일이었다. 그는 석경당이 이종후를 잡아와 준 덕분에 근심 없이 황제를 참칭해놓고, 정작 석경당을 변방의 절도사로 좌천시켜버렸다. 당연히 킹 받은 석경당도 이종가처럼 반란을 일으켰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인근의 거란족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석경당은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요 태종 야율덕광을 아버지라 부르며 부자 관계를 맺고, 연간 30만 필의 비단 등 막대한 조공 + 기마민족의 무덤인 만리장성 안쪽의 땅까지 떼어주는 조건을 걸었다.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스스로 주겠다는데, 이걸 받아먹지 못 하면 호구나 다름 없지. 거란이 흔쾌히 응하면서, 석경당은 휘하 군대 + 거란 군대로 단숨에 후당군을 박살내버렸다. 이로써 후당은 멸망하고, 석경당이 새롭게 후진(後晉)을 건국하게 됐다. 풍도는 이 때도 후진 조정의 재상으로 임명 됐다.

 

석경당은 재주도 없고 식견도 짧아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랑캐 황제 야율덕광의 힘을 빌어서 나라를 세웠으니 오죽 했겠나. 석경당은 요 태종이 베푸는 대관식에서 군주가 되었고, 요나라식(= 오랑캐 전통 방식) 제례를 행해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했다. 이제 아들 나라가 되어 어버이 나라에 사은사를 보내야 했는데, 모두들 두렵고 치욕스러워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풍도가 "폐하는 야율덕광의 은혜를 입으셨고, 소신은 폐하의 은덕을 입었사오니 응당 제가 가야 마땅합니다." 라며 고생길을 자청했다.

 

야율덕광은 진작부터 풍도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풍도가 도착하자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석경당은 황제인데도 호복을 입히며 하대한 반면, 풍도가 온다는 소식에 친히 마중 나오고도 모자라 상아를 깎아 홀(笏)까지 하사해가며 국빈으로 후대했다고. 홀은 임금에게 아뢸 때 신하가 치켜드는 마이크 같은 건데, 조례 시 황제 코앞에 서는 1급 장관들만이 상아 홀을 쓸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요 태종이 풍도를 최고위 관료로 대우한 것이다. 요 태종은 풍도가 너무도 맘에 든 나머지 포섭하기 위해 "남조는 아들이고 북조는 아버지인데, 두 왕조의 신하가 된다고 무슨 다를 게 있는가?" 라고 묻는다. 그러자 풍도는 "그러잖아도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라며 머물던 관사의 창고에 그득한 땔감을 보여주었다. 이는 요 태종이 내려준 재물을 팔아서 바꾼 것들이었다. "저는 늙어서 북방의 기후가 사무치게 춥사옵니다. 폐하를 오래 모시고 싶은 마음에, 부득이 땔감을 마련한 것이옵니다." 라는 게 풍도의 답변. 깊은 감명을 받은 요 태종은 풍도를 더욱 중히 여기며 "따뜻한 고국에서 날 보러 자주 오시오." 라는 말과 함께 귀국을 허가했고, 석경당은 석경당대로 돌아온 풍도를 완벽히 신뢰하게 되었다.

 

석경당은 얼마 후 죽었지만, 그의 아들 석중예는 코흘리개였기 때문에 위태로운 국정을 맡길 수 없었다. 풍도는 구국의 결단이란 이름 하에 석경당의 조카 석중귀에게 보위를 넘긴다. 문제는 석중귀가 헛바람이 들었는지, 거란에 바쳐야 할 공물까지 끊어가며 적대적 행보를 보였다는 점. 요 태종은 진노하여 후진을 공격, 끝끝내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건국했으며 왕족과 조정 신료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 때 풍도도 야율덕광 휘하로 편제되었는데, 이민족에게 투항하는 행위에 한탄하던 사람들에게 길이 회자될 일화를 남겼다 : 요 태종이 면식 있던 풍도를 불러 짓궂게도 "당신 왕조가 망했는데 어찌 우리나라에 들려 하시오?" 하고 물었다. 풍도는 이에 "성곽도 없고, 군사도 없으니 응당 귀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충의와 절개가 백성들을 지키는 방벽과 병졸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에서 우러난 명언이었다.

 

요 태종은 여전히 거란족을 오랑캐라고 깔보며 화합하지 않으려 하는 한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요량으로, 군대를 풀어 지나가는 마을의 어른은 모조리 학살했고 아이들은 바닥에 패대기를 치며 놀았다. 이따금 포로로 잡은 자들을 항전하는 후진 잔당들의 화살받이로 썼다. 병사들의 약탈과 악행을 수수방관했으며, 그 자신도 한인이라면 잡아다 얼굴에 글씨를 쓰는 포락형을 가했다. 이토록 잔혹하게 굴어대니 중원 사람들은 더더욱 요나라를 거부하며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풍도는 이 상황을 해결하라는 요 태종에게 이렇게 간언했다 : "작금의 천하는 부처님이 오셔도 구할 수 없으나, 오직 폐하 한 분만이 능히 구할 수 있으십니다." 즉 요 태종을 부처보다 높이 추켜세워 아량을 베풀 것을 간곡하게 요청한 말이다. 요 태종은 그제서야 한족들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을 그만 두었다.

 

그렇다고 죽인 사람들의 목숨과 산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오나? 요나라는 격렬한 저항에 시달렸는데, 그 혼란한 틈을 타서 유지원이란 자가 스스로 제위에 오르더니 후한(後漢)을 개창했다. 후진의 하동절도사였던 유지원은 성정이 포악했지만, 요 태종이 오죽이나 싫었던지 많은 한족 유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진무절도사 절종원, 하양도부서 무행덕, 무녕절도사 부언경 등의 후진군 잔당도 유지원에게 귀부하면서 후한은 세력이 커졌다. 결국 견디지 못 했던 요 태종은 북방으로 퇴각했다가 열병에 걸려 죽었다. 풍도는 그 동안 후진의 유신들을 비호하고 한족 장졸들을 몰래 후원해주며 거병을 부추켰고, 마침 야율덕광이 죽자 일행을 이끌고 유지원에게 투항했다. 유지원이 크게 반겨 풍도를 태사로 임명했음은 물론이다.

 

유지원의 후한은 5년도 채 못 가 망했다. 유지원 본인은 후한을 세우고 난 뒤 곧 죽었고, 유승우가 자리를 이었다. 그 쯤 후한은 이수정의 난과 거란군의 위협으로 나라 안팎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이를 추밀사 곽위가 도맡아 방비했다. 그런데 유승우는 곽위를 두려워하여 절도사의 직책을 회수하려 했다. 이에 곽위는 도리어 유승우를 쳐서 없애고, 권력을 장악한 다음 황족 가운데 유빈을 꼭두각시로 내세웠다. 당시 후한 황족들은 서주 끄트머리에 겨우 피신해 있었는데, 풍도가 나서서 유빈을 데려오기로 했다. 유빈은 곽위가 벼르고 있다고 생각해 마뜩찮아 했지만 오랜 세월 재상이었던 풍도를 믿고 따른 것인데, 정작 풍도는 그대로 유빈을 곽위에게 넘겨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로써 후한은 멸하고 후주(後周)가 들어선다. 또 다시, 풍도는 조정의 영수가 되었다. 곽위가 죽고 시영이 새 황제가 된 직후 풍도도 눈을 감으면서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끝난다.

 

후당, 후진, 대요, 후한, 후주의 다섯 나라가 중원을 파도처럼 휩쓸 동안, 중국의 재상은 언제나 풍도였다. 이러한 사실은 후세 사가들로부터 크게 비난 받았다. 사마광은 풍도를 평하면서 "임금은 계속 바뀌어도 풍도의 부귀는 온전했는데 이게 간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라며 대놓고 저격했고, 조익은 "11명의 군주로부터 따로 따로 받은 작위를 자서전에 일일이 자랑했으니 염치 없는 놈이다." 라고 언급했다. 확실히 풍도의 언사는 손이 닳도록 윗사람에게 아부하는 간신배의 모습으로 비친다.

 

그러나 풍도는 평생토록 근면했으며 청렴결백으로 이름 높았다. 공겸(孔謙) 같은 탐관오리는 조세로 걷은 곡식 가운데 쥐가 쏠아서 없어진 부분과 참새가 쪼아서 없어진 부분을 따로 계산해 작서모세(雀鼠耗稅)를 걷어다가 뒷주머니에 찼을 정도였고, 당대에 관료들의 이런 행위는 일반적이었다. 반면, 풍도는 일절 뇌물을 받거나 준 적이 없고, 장작을 패거나 밭을 매는 일을 스스로 할만큼 청빈했다. 이존욱의 한림학사로 군영을 누빌 때는 초막에 거적떼기 하나만 둔 채 지냈고, 병사들과 같은 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했다. 농기구가 없는 집을 보더니 소까지 사다가 갖다 준 일도 있었으며, 흉년이 들자 가산을 털어서 구휼에 힘썼다. 거란군이 천하를 휩쓸며 아녀자들을 마구잡이로 노획할 적에, 그들을 돈으로 사서 숨겨두었다가 요 태종이 죽자 고향으로 모두 돌려보내주기도 했다. 풍도를 파렴치로 비평했던 사람들조차 인정한 사실이다.

 

이는 풍도가 나라를 갈아타며 거침없이 허리를 숙인 것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풍도는 과감히 이상을 버리고 현실을 택했을 뿐이다 : 만고충신으로서의 죽음보다, 백성의 안녕에 헌신하는 관료의 삶 말이다. 그의 현실주의적 안배에 힘입어 100년도 채 안 되는 시기 동안 열 명의 임금이 갈려나가는 환난 속에서도 신민들의 고초가 덜어질 수 있었으니, 풍도를 마냥 굽힐 줄만 아는 소인배로 보는 관점은 지나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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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 자겸(子謙). 대단히 명철했기 때문에 인조 시절의 브레인으로 통했다. 마땅한 화상이 없어 영화 "남한산성"의 등장인물로 대체>

 

최명길은 최기남의 삼남으로, 부친을 닮아 영민함을 타고났다. 최기남이 선조 때 왕세자를 가르치는 필선(弼善)직을 맡을만큼 학식이 풍부했는데, 최명길도 생원 · 진사 · 문과시를 1년만에 급제한 조선사 통틀어 유일한 천재였다. 그는 이토록 뛰어난 두뇌로 나라를 보전하는데 진력했다.

 

최기남은 윤두수, 이항복, 신흠 등의 인물들과 친했는데,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쳐 보다가 이들에게도 선보였다. 자연히 여러 사람으로부터 수학한 최명길은 아, 다르고 어, 다른 학문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유연한 사고관을 다지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로 그런 모양인데, 똑같은 집 자식인 최명길의 형 최내길(崔來吉)과 동생 최혜길(崔惠吉)은 최명길과 달리 청서(淸西)파에 가담하거든. 반면에 최명길은 공서(功西)파로 분류되어 청서파로부터 지난한 공격에 휘말리지만, 정작 공서파에서도 최명길을 배척했다. 사류에 연연하지 않고 시급한 국정을 논하는 그의 태도가 당색이 애매한 양비론자처럼 보였던 듯 하다. 훗날 조정에서 그의 말마디에 힘입어 사직이 온전히 살아남고 국난을 넘길 수 있었던 걸로 볼 때, 과연 최명길이 비범했다.

 

스무 살의 최명길은 성균관 전적( = 유생들의 스승)으로 임관하여 아버지처럼 똑똑함을 과시했는데, 광해군 대에 이르러 시국 선언 한 번 잘못 했다가 높으신 분들께 찍혀버렸다. 정인홍, 이이첨 등 당대의 실세들은 모두 북인으로, 숱하게 옥사를 일으켜 서인이라면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박살낸 인사들이었다. 최명길은 북인 정권이 지나치게 요직을 독점하고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으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북인 인사들의 표적이 되었다. 게다가 폐모론을 추진하는 북인들에 반대했다가, 끝내 이이첨으로부터 누명을 쓰고 삭직 당하게 됐다.

 

하지만 억눌려 있던 서인들은 북인 정권의 내분과 광해군의 횡포를 틈타 일발역전을 준비하니,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최명길은 반정 세력에 깊이 가담해 크고 작은 계책을 마련했는데, 훈련도감(= 궁궐 수비대. 조총수도 있었음) 대장 이흥립을 사전에 포섭하고 원로대신 이귀를 반정에 참여하도록 했으며, 거사 날짜까지도 본인이 직접 결정했다. 덕분에 반정군은 수월하게 일을 치르고 정권을 탈환할 수 있었다. 최명길은 그 공로로 정사공신 1등에 책봉되니, 동렬인 김류 · 이귀 · 구굉 등에 비해 연배도 어리고 직책도 없이 오직 수완만으로 일궈낸 쾌거였다.

 

이괄의 난 당시 보여준 최명길의 담략도 대단하다 : 이괄이 공신 책봉 순서에 분노하여 거병하자 조선은 하루 아침에 정예 병력을 모조리 반군 수괴에게 넘겨준 형국이 되었다. 인조는 팔도 도원수 장만을 보내 맞서게 했으나, 이괄의 파죽지세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어가가 몽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최명길이 단신으로 난리통을 뚫고 개성의 장만 군영으로 가서 계책을 논했다. 마침 최북방 평안도에는 이항복 밑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 정충신이 복무 중이었는데, 그 역시도 대단한 기재였다. 장만은 최명길과 의논해 물심 양면으로 정충신을 지원해줬고, 정충신은 기대에 부응하여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성공한다.

 

"최명길"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호란에서의 활약일 것이다. 최명길은 유일한 주화론자로서 조선의 국력이 후금군을 당해낼 수 없다는 의견을 시종일관 견지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3만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자 조정 내에 받아쳐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었는데, 최명길 혼자서만 화의로써 전쟁을 늦춰야 한다고 했다. 이괄의 난이 고작 3년 전에 겨우 진압되고 아직 군사력이 회복되지 못 했는데 어떻게 싸우냐는 뜻이었다. 이 때 인조가 최명길의 손을 들어주어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되었다. 당연히 최명길은 역적이라는 비난이 자자했지만, "아니, 이기지도 못할 것이면서 굴복도 하기 싫다면, 나라는 무슨 수로 보전한단 말이오?" 하고 코웃음 쳤다.

 

마침내 후금은 칭제를 선언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친 다음, 조선에서 왕자 몇몇을 인질로 보낼 것을 명한다. 으리의 사나이인 서인들이 이걸 참으면 갓 쓰고 못 다니지. 대소신료들은 이토록 무엄한 글을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지 않고 가져 온 사신부터 벌해야 한다고 날뛰며 너나 할 것 없이 주전론을 부르짖었다. 오직 최명길만이 "전쟁 준비도 준비지만, 지금은 화친이 우선이다." 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대간들이 "이 새끼 사실 청나라 스파이 아님?" 하고 줄지어 탄핵을 때린 건 뻔한 수순이었다. 사세가 이렇자, 인조는 "병력이 많다는 이유로 형제 나라를 겁박하면서 우리나라가 먼저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하니, 말로 해선 안 되겠네요.(실제로 한 말)" 와 같은 내용의 글로 답장했다. 최명길이 "압록강이 얼어붙고 나면 다 끝장 나게 생겼는데 어쩌자고 도발하셨습니까?" 라고 책망하자,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인조는 사죄하는 친서를 다시 적었다. 그러나 서인들 가운데 누구도 이 비굴한 편지를 전할 마음이 없었고, 시일만 미뤄지다 기어이 전해지지 못 한 채 전쟁이 임박한다.

 

최명길은 여기서도 기지를 발휘한다. 스스로 사신이 되길 자원해서 청군 진영으로 나아가서는 대장을 만나 차일피일 시간만 끌며 임금의 행렬이 남한산성에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최명길은 뻔히 알면서도 쳐들어 온 목적과 요구 조건, 불응할 경우의 계획 같은 것들을 캐물으며 닷새 동안이나 진격을 지연시킨다. 그리하여 임금 뿐만 아니라 주구장창 청나라 놈들을 입으로 씹어댔던 주전론자들도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전쟁하자고 난리 치던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방어 전략을 수립하지 못 했다. 때문에 남한산성은 만전의 상태에서도 이길까 말까 한 수성전을, 식량도 넉넉히 보급 받지 못한 채 치러야 했다. 때는 한겨울, 손발이 부르트는 엄동설한에 한 달 반을 갇혀 있어보니 성곽을 지키는 장병들의 사기가 몹시 처참했다. 김상헌과 같은 충신들이야 옥쇄를 부르짖었지만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는 없었다. 강화도가 함락되는 꼴까지 당하자, 혀 깨물고 죽겠다던 극렬 서인들도 고분고분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인조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며 삼전도에서 항복 의식을 치른다. 마침내 최명길의 뜻대로 된 것이다. 이에 사관들은 "삼한 땅을 오랑캐 소굴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 라는 말로 답례했다.

 

그를 두고 실록의 사관들처럼 나라 팔아먹은 악당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최명길은 명분만 따져서 체면 치레에 힘쓰는 족속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 이미 광해군 때 권력의 정점인 이이첨을 들이받았을 정도로 강단 있었으며, 몇 번이고 위태로운 적진을 홀몸으로 드나든 바 있다. 민생에도 관심이 많아 환향녀와의 이혼을 금하게 하거나, 백성들의 조세를 감면해주고 양반에게도 군역을 물리는 개혁을 추진했다. 반정 동지인 이괄의 야심과 성정을 꿰뚫어 보고는 중책을 맡기지 말 것을 건의하고, 김상헌처럼 사사건건 부딪힌 정적도 이래야 충신이라며 인정하는 등 균형감 있는 시각도 보여주었다. 특히 본인이 반정공신들로 구성된 공서파의 핵심 인물이었으면서, 공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하니 이를 제어해야 한다고 비판한 사람이기도 하다. 말년에는 청 태종이 출병을 요구하자, 직접 찾아가 면전에다 대고 "당신들이 휘젓고 간 바람에 내어 줄 병력 같은 건 없으니, 댁네가 이해 하쇼." 하고 패기 있게 내지른다.

 

최명길이 서인 정권에서 부여잡았던 명분론에 심취했더라면, 인조가 머리 찧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공로는 당론으로 덮을 길이 없어, 최명길의 졸기에는 "위급한 순간에 앞장 서서 나섰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칼로 쪼개듯 분명하여 미치는 이가 없었으니,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었다." 와 같이 지당한 평가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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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당대의 군주 가운데 누구보다도 파격적인 인물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조실부모한 그는 고작 4살에 시칠리아 영주가 되었는데,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사라센과 그리스인이 드나들던 무역 허브였다.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통념과 달리 이교도 역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비록 부모도 없는 그의 최고 후원자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였지만 말이다.

 

12세기 말엽의 교황은 세속 군주들의 중재자 역할을 도맡으면서 그 권위가 상당했다. 당장 인노첸시오 3세부터가 그 손으로 독일 왕을 세우고 끌어내렸으며, 영국에서 조인된 대헌장을 칙령으로 무효화 했고, 카스티야 왕국에 개입해 이교도를 몰아내자는 명분으로 군대를 소집하는 등 역사 상 가장 강력한 교황권을 휘두른 인물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렇게 기세 등등한 교황들을 상대로 교묘하게 엇나가는 모습을 보여, 일생토록 4번이나 파문을 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총명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어학과 수학, 기하학, 건축학, 법학, 철학, 천문학 등 다방면의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학구열은 대단해서, 궁중에 아카데미를 세우고 지식인들을 초청해서 함께 학술 연구를 진행했으며, 그들을 위해 도서관도 마련해주었다. 또한 나폴리에 대학을 건립하고 신학과 자연학 뿐 아니라 법학도 가르치게 하여 관료 육성에 기여한다. 예술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본인이 직접 시를 지었다. 지중해 무역로의 꽃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시칠리아는 호학군주의 열성에 힘입어, 유럽 일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와 지식을 구가할 수 있었다. 특히 멜피 헌법은 황제의 노력이 맺은 결실 그 자체로, "로마인, 롬바르디아인, 사라센, 유대인 등 그 어떤 나라 사람도 차별하지 않는" 법률이었다. 그야말로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이란 찬사가 아깝지 않은 치적이다.

 

다만, 프리드리히 2세의 이러한 행동들은 자연스럽게 친중동적인 모습으로 비쳤다. 당대 서구권보다 중동권의 지식 수준이 월등했기 때문에, 언어에 능통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아랍어 서적을 구해다가 읽었다. 또한 5차 십자군 원정대의 영웅이자 이집트의 술탄 알 카밀과 자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적인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알 카밀은 프리드리히 2세가 동물에 관심이 있다고 하자 낙타, 원숭이 같은 짐승들을 보내준 바 있다.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는 아랍인 관료가 드나들었고, 그의 영지에도 온통 사라센 천지였다. 더군다나 프리드리히 2세의 독일 영토 가운데에는 제국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는 대가로 바쳐진 교황청 영지가 많았다. 바꿔 말하면, 신성로마제국이 교황의 재산을 포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때문에 이교도라면 펄쩍 뛰는 교황들에게 있어서 프리드리히 2세의 개방적인 태도는 교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교회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지속적으로 십자군 원정대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당초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지원에 힘입어 제위에 올랐는데, 교황청에서 조건을 내걸었다 :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이 요청하는 즉시 십자군에 참가한다 ! 이 조약을 상기시키며 제국군의 원정을 강요, 이교도는 이교도대로 몰아내고 황제의 세력은 세력대로 약화시키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4차 십자군 원정대의 화려한 트롤링에 유럽이 동 · 서로 양분된 꼴을 본 프리드리히 2세는 사서 고생할 마음이 없었는지, 네 차례나 출병 서약을 어겨가며 미적거렸다. 덕분에 5차 십자군 원정대는 황제가 본대를 이끌고 올 것을 기대하며 무리하게 진군했다가, 알 카밀의 지략에 허를 찔려 궤멸 당하고 말았다.

 

1227년 9월, 프리드리히 2세는 계속되는 압박에 마지 못해 함대를 편성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했지만, 가는 도중 질병이 창궐해 본인 마저 드러눕고 만다. 매우 공교롭긴 하지만, 때마침 장티푸스가 돌아서 일주일도 채 못 가 회군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교황청은 "장티푸스면 킹정이지" 하고 끝내지 않고, "너 사실 이단이지?" 라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파문(破門)에 처했다. 기독교인들에게 파문이란 교인으로서의 권리를 거두는 조치인데,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파문 걸어 봤자 그다지 겁날 일은 없는 게 현실이었다. 단, 어쨌거나 파문된 사람이므로 교황의 눈 밖에 났고, 따라서 교황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다른 세속 군주들로부터 공격 받을 여지가 늘어났다. 다시 말해, 프리드리히 2세에게 현상금이 내걸린 셈. 이듬해 3월에는 한 술 더 떠서, "프리드리히 2세가 머무는 곳도 이단이고, 이끄는 자도 이단이다." 라는 명령과 함께 재차 파문이 선포 됐다.

 

반년 넘게 요양하며 시간을 보낸 프리드리히 2세는 아직 파문 조치가 거두어지지 않은 1228년 6월, 돌연 7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교황에게는 출전에 관해 일언반구도 없었으며, 여전히 파문 상태였으므로 성전 기사단 · 구호 기사단 등으로부터 일절 원조를 기대할 수 없었다. 현지 제후들조차 파문 황제를 달가워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리처드 1세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성지 탈환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계획이 다 있었다.

 

술탄 알 카밀은 혈족들로 인해 늘 문제를 겪었는데, 본인이 살라흐 앗 딘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살라흐 앗 딘은 임종 직전 세 아들들에게 각각 카이로, 다마스커스, 알레포 등 아이유브 제국의 주요 영지를 나눠주고, 알 카밀의 부친 알 아딜에게는 동북면의 변방을 맡겼다. 그런데 알 아딜이 조카들끼리 싸우도록 유도한 다음, 어부지리를 노려 술탄 자릴 빼앗았다. 다행히 알 아딜 치세에는 그럭저럭 억누를 수 있었지만, 한 번 꼬여버린 술탄 계승 서열은 알 아딜 사후 치열한 내전을 불렀다. 그래서 5차 십자군 원정 때는 동생 알 파이즈 이브라힘을 추대하는 반란이 터졌고, 시리아의 사촌들과 협력하는 조카 앗 나시르의 저항이 발발하는 등 알 카밀은 순탄하지 못 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노린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9월, 알 카밀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만고에 길이 남을 딜을 제시한다 : 예루살렘 삽니다. 200년에 걸쳐 기사들의 피를 바친 성지를 돈으로 사겠다는 뜻이었다. 얼핏 들으면 이 무슨 띠용한 소리냐고 묻겠지만, 실은 양측 모두에게 일리 있는 제안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 당해 뒷심이 없고, 교황파가 호시탐탐 빈집을 노리는 게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한편 알 카밀은 다마스커스의 반란이 영 신경 쓰이던 와중,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그 자체로 강력한 적수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최소한 외국과의 전쟁만은 피해야 했다. 만일 이 거래가 결렬 나는 순간,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 모두를 상대하느라 프랑크와 사라센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알 카밀은 프리드리히 2세 만큼이나 대범한 군주였다. 그는 즉석에서 콜을 외치는 대신에, 군대를 소집한 다음 뜬금 없이 시리아 접경 지대인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서 주둔하더니, "신성로마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시리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인근 영주들을 무력으로 제압한다. 당연히 왕권 강화를 위한 술책이면서, 동시에 내부의 무슬림 강경파들을 달래려는 행위였다. 프리드리히 2세도 여기에 장단을 맞춰, 아이유브 변경까지 밀고 들어가서 요새를 정비하는 등 군사 행동을 보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양쪽 군대의 격돌은 시간 문제였다. 그렇지만 이심전심인 황제와 술탄은 싸우는 시늉만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적당한 시점에 타협을 보았다.
 

1229년 2월, 향후 10년 간 전쟁을 멈추는 대신에 예루살렘과 해안선을 따라 서방으로 이어지는 베이루트, 야파, 나사레 등의 거점들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내어주고, 무슬림 성지와 예루살렘 인근의 다미에타 등지는 알 카밀이 갖기로 하는 합의가 드디어 성사 됐다. 이로써 6차 십자군 원정대는 역대 십자군 원정대 가운데 두번째로 예루살렘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원정대이자, 최초로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성지를 탈환한 원정대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또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몸으로 예루살렘의 왕위에 오른 유일무이한 인물로 기록 됐다. 비록 파문이 여전히 철회되지 않아서 대관식은 스스로 거행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업적에 서방 사회 전체가 대경실색했다. 예루살렘을 되찾아 온 부분이 아니라, 이단 놈들 하고 거래를 맺은 부분에서 놀란 것이다. 무슬림을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았던 당대 통념 때문에 벌어진 헤프닝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교도 뚝배기가 터지는 꼴을 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중세 서양인의 전형이었고, 평화롭게 예루살렘을 획득한 공이 있는 프리드리히 2세의 영토를 공격함으로써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군을 이탈리아 내로 깊숙이 유인한 다음, 후방을 급습해 포위망 안으로 던져 넣고서 교황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서로 다른 교인들끼리도 좋게 좋게 끝냈는데, 같은 그리스도교인들끼리 피를 봐서야 되겠느냐는 논리였다. 그레고리오 9세는 별 수 없이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취소하면서 화해의 물꼬를 튼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죽을 때까지 교회와 대립했다. 그레고리오 9세는 롬바르디아 동맹국들을 은밀히 지원하면서 싸가지 없고 신심 없는 황제를 치도록 했고, 마침내 프리드리히 2세가 패배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이 물건너 가자마자 또 파문을 때려버렸다. 대노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령을 군대로 둘러싸고, 파문의 철회를 종용했다. 교황이 아예 프리드리히 2세를 폐위 시키려고 주교급 이상의 교회 간부들을 소집하자, 황제는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부수거나 추기경을 납치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결국 그레고리오 9세가 먼저 죽으면서 상황은 일단락 났지만, 이대로 가다간 삼중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적대하겠다고 여긴 프리드리히 2세는 친제국적 인사를 교황으로 앉히려는 수를 썼다. 콘클라베에 아예 교황 내정자를 들이밀었거든. 이는 결과적으로 실패해서, 교황청이 1년 반 동안의 긴 회의를 거친 끝에 세운 반제국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황제를 한 번 더 파문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다행히 영주들은 "황제를 파문한 교황은 꼭 일찍 죽더라"며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천수를 다 할 때까지 파문의 효력은 미미했다.

 

처음 파문 맛을 보고 직접 교황에게 쓴 편지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심정을 살펴 볼 수 있다 : "너희 성직자 놈들은 거머리떼처럼 탐욕스럽도다. 잉글랜드를 보아라, 교황이 귀족들을 선동해 왕에 대항하더니, 종국에는 귀족들을 버리고 왕을 택하지 않았더냐? 양의 탈을 쓴 채 세속 권력자들을 파문하고 내치는 너희들은 늑대다. 하느님 말씀의 씨를 뿌리는 자들이 아니요, 뿌린 적도 없는 것을 거두려 드는 늑대란 말이다." 그에게는 천부적 권위를 앞세워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기독교 무리가, 그토록 악의적으로 오도하는 이단자들보다 흉측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양심과 합리성을 지닌 이교도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탐심으로 가득 찬 동포에겐 가차 없이 굴었다.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는 옅었지만, 당대 누구보다도 신실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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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도레, 우상을 부수는 모세. 십계명의 첫 계율은 유대 사회의 전통과 법도를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사실 상식이나 관습 같은 가치관에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준거들은 일부 세력이 다른 세력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헤게모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고 체계로서의 헤게모니는 교육을 통해 각인 되므로 자기부정 없이는 벗어나기 어렵다. 만일 찍먹이 옳다면, 탕수육은 찍어먹으면서 어떻게 양념치킨을 용인한단 말인가? 부먹이 옳다면, 어째서 감자튀김은 케첩에 버무려먹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고 이력서에 쓰지도 못할 것을 지키느라 인생의 절반 손해 볼 수는 없잖아? 이럴 때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더 유리한 법이다. 때문에 비범한 방법을 택한 사람들이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려면 사회를 이루어야 하고, 그 사회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질서가 필요하다. 개개인의 파편화된 동기는 충동적이고 상충하기 마련이어서, 같은 현상을 두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며, 심지어는 동일인물조차 그 날 기분 따라 달리 생각한다. 그로 인해 매사에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스스로도 이전의 행위와 현재의 행위 간 모순을 겪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고사하고, 가족 공동체와 같이 기본적인 사회 조차도 형성되기 어렵다. 사회라는 인간의 무리가 존속하려면, 구성원끼리 이견의 여지가 없으면서 지속 가능한 해석 체계를 도입해서 공동체의 관점에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는 질서로서의 사회 규범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힘 센 사람이 주먹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돈 많은 사람이 매사에 돈을 휘둘러 제멋대로 사는 게 옳다면, 경쾌하긴 하겠지. 그러나 그 삶에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정점에 서지 못 하는 한, 임자 만나는 순간 제삿날이 될 테니까. 결국 서로 잘났음을 입증하기 위해 모두가 영원토록 투쟁하는 길만이 그 앞에 놓여있다. 어지간히 실력에 자신 있지 않은 다음에야, 뒤통수가 근질 거려서 더불어 살 수 없겠지? 따라서 실력 지상주의처럼 호혜적 관계망을 해치는 원리가 규범으로 작용해선 안 된다.

 

우리 선조들은 이를 내다보고 파괴적인 싸움을 멈추는 대신 스스로 가진 걸 내려놓고, 기꺼이 서로 간의 불편을 참으며 다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 했다. 다행히도 인간에게는 보편적이고 변치않으면서 발전적인 준칙이 존재한다. 희생에 대한 감사, 고통에 대한 연민, 불의에 대한 증오, 탐욕에 대한 경계, 과오에 대한 반성, 약자에 대한 관용 등등.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 묶어 부르는 것들 말이다.

 

물론,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인간은 내면의 악성을 억누르지 못 하고 스스로 지은 도덕률을 스스로 무너뜨려왔다. 그러나 반드시 다시 세워 올렸다. 치열하게 반성하고, 처연하게 뉘우치며, 끝끝내 질서를 회복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 위대한 노력이, 마침내 양심에 기초한 고해와 책임 의식, 향상성의 순환 체계, 즉 도덕이란 결실로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의적 가치들은 법조차 없던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구하게 이어져 온 인류의 생존전략이자, 인간의 자격에 해당한다.

 

살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도덕적 도전에 직면하고, 충동과 모범이 반목하는 사태와 마주한다. 건물을 집어 삼키는 불길을 앞둔 소방관은, 뒤돌아 나올 수도 있고 일렁이는 화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이처럼 편한 길과 옳은 길 사이에서 결단을 요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옳은 길을 고집 하는데는 대가가 따른다. 조금 불편하고, 손해도 감수해야 하고, 능히 해내고도 칭찬 하나 못 받는 등, 만만치 않은 고통을 수반한다. 윗집에서 시끄럽게 구는 노인네도, 나한테 갑질한 손님도, 다음번엔 꼭 갚겠다고 도망다니는 김씨도, 칼춤 한 번 추면 깔끔하게 해결날 텐데. 하지만 그 한 번을 참음으로써 평화가 찾아오고, 세상이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소방관의 경우, 그러다가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삶은 거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단연코 굴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걷겠다는 그 의지야말로 진정 영웅적인 용기다.

 

제정일치 사회에서 종교는 삶의 근본이었다. 지금도 구성원 전반의 이익을 골고루 반영할 만큼 정교한 법을 만들기 어려운데, 당시에는 오죽했으랴. 때문에 그 시절의 사람들은 전통적 가치, 사회 특유의 규칙을 계율이라 부르며 법처럼 따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계율을 어기면 천벌을 받는다는 제정일치 사회 규범의 일반성은, 사실 율법에 경외감을 새겨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고대인 나름의 방편인 셈이다. 만일 욥이 불운을 이유로 배교했다면, 신심을 잃고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신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그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역사에서 욥을 지워버렸을 일이다.

 

그러므로 욥은 인간으로서 따라야 마땅하며, 나처럼 잔꾀나 부리는 놈보다 훨씬 용감한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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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14.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투쟁에 맞서 초코바를 흩뿌리며 폭식투쟁을 하는 모습 . 2019년 11월 19일자 서울 신문 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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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예" 표현에 이용수 할머니가 항의하자 Daum 뉴스에 달린 댓글. 2020년 5월 31일자 뉴시스 기사 에서 발췌>

 

반면, 편한 길을 고른다면 가뿐하게 고충을 해결하겠지만 그 결단으로 말미암아 사회로 재편입 되는 것은 대단히 난처해진다. 법적 책임을 지는 건 물론이고, 사회 구성원들의 비난과 배척을 받아 하려는 일마다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마치 우리가 우유를 사먹을 때 벌어지는 일처럼 말이다. 결국 약간의 일탈에 필요한 용기는 잘못된 용기이며, 작은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도덕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이다. 도덕이야말로 범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이며, 여전히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도덕이 사라진 사회는 평화를 상실하고 끝내 야생과 다를 바 없는 무저갱에 빠지게 된다. 고작 제 기분 따라 군답시고 도덕을 짓밟고 비겁하게 행동한 사람이, 인간의 윤리보다도 엄혹한 자연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이러한 연관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 손으로 우리 사회의 질서를 훼손하는데 정력을 낭비해선 안 될 일이다.

 

우리는 보답을 바라고 선행을 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행해야 마땅한 것이다. 이는 욥이 우리에게 보여준 길이다.

47개의 댓글

2020.06.17

선추 후감상

1
@lIlIlIlIlIlIlIlI

항상 감사합니다 :)

0
2020.06.17

좋은 글이로다.

1
@Mr.Soong

고맙습니다 :)

0
2020.06.17

좋은 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1
@차카게삽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0
2020.06.17

다들 쟁쟁하구나

1
@냥냥왈왈

하루 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저들 못지 않게 훌륭합니다 :)

0
2020.06.17

한가지 주제에 대해서 동서양 인물 예시로 들고 현대까지 끌고올 수 있는 지식이 참 대단하다...

1
@maino

과분하신 말씀 부끄럽습니다. 메시지를 지나치게 복잡한 방식으로 담지 않았나, 고민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0

진실로 읽판에 어울리는 글이로다

1
@바른말만해야지

너무 길죠? 죄송합니다;

0
@한그르데아이사쯔

중언부언이 아니라 하나하나 다 읽을거리에 어울리는 사례를 엮어 긴 글을 쓰는 재주가 훌륭합니다.

1
@바른말만해야지

부끄럽습니다. 간결하고도 재미난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0
2020.06.18

미쳤죠~ 동.서양 역사, 인물예시에서 현재까지...

이거 쓰신분은 어떤보배이신지

1
@PainkilleR

취미로 끄적인 것뿐인지라 칭찬 받기 쑥쓰럽습니다 :)

0
2020.06.18
@한그르데아이사쯔

취미로 이정도 쓰는건 못해도 철사문 석사 하고 계실거같은데

 

1
@PainkilleR

전문가 분들께 누를 끼칠까 걱정입니다. 이 글이 유머인 이유입니다 :)

0
2020.06.18
@한그르데아이사쯔

진짜다 이분은 진짜다.

1
2020.06.18

글이 일단 시작부터 흥미를 쫙 끄네 재밌다

1
@모닥뿔

다른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

0
2020.06.18

드렁칡타이거(본문안봄)

1
@찹쌀맨

드렁삵타이거

0
2020.06.18

어떠하리

1
@깁기

순하리

0
2020.06.18

드렁칡타이거(본문안봄) 22222222222

1
@응아잇

백골이 진토닉 되어 취한다 캬

0
2020.06.18

길이가 유머다 좀 있다가 읽어볼게 ㄱㄷ

1
@EndorsToi

빨리 나 급해

0
2020.06.18

방금 다 읽음. 휘둘리지 않고 정도를 걷는 심지 굳은 사람이 되자.

1
@EndorsToi
0
2020.06.18

일단 첫 문단만 읽었읍니다

좋은글은 개추입니다

1
@스위트콘

고맙습니다. 다른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

0
2020.06.18

자식과 아내를 죽인 뒤 두배로 보상=아내와 자식은 인권을 가진

인간이 아닌 가장의 소유 재산

1
@제석

고견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짧은 생각을 말씀 드리면, 욥기가 쓰여진 시대와 오늘날의 생명 윤리관이 대치되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시절의 관점에서는 자손이 일종의 재산 개념으로 취급되는 게 당연했을지도 모르지요. 중요한 점은, 당대에 옳다고 여겨지는 질서가 지켜져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기를 실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닌, 문학적 비유로 해석할 때, 저자가 등장인물 욥에게서 자손과 재물을 앗아가놓고 다시 두 배씩 불려준 것은 유대 사회 유지에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0
2020.06.19

분명 들어올 때는 만수산 칠과 삵이었는데.... @,@???

1
@헤븐릴리링

사실 삵이었는데 고쳤음 :)

0
2020.06.19

글빨돋네 님 박사학위 있죠

1
@착한말착한말

당치도 않습니다; 박사님들은 이 글을 보며 코웃음 치실겁니다 :0

0
2020.06.20

잘봤습니다

1
@년째섹스안함

감사합니다. 다른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

0
2020.06.21

裂之者도 可요, 拾之者도 可라. 최명길이 청에게 화친을 주장하는 문서를 적어 보이자 김상헌은 대번에 달려가 그 문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裂). 그런데 최명길, 화를 내긴 커녕 허리를 숙이고 김상헌이 찢은 그 종이조각을 전부 다시 모아(拾) 붙이고 있더라. 우리 힘이 미약하다고 한들 무릎꿇고 사느니 적과 제대로 한 번 싸워라도 봐야 옳지 아니하겠냐며 종이를 찢은 사람의 말도 옳고, 그 찢어진 종이를 모아 붙이며 당장 살아남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옳다는 고사입니다. 김상헌과 최명길 양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충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상헌은 청나라 땅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 돌아와야 했고, 최명길은 온갖 오욕을 뒤집어 쓴 채 살아야 했죠. 옳지 못했던 것은 김상헌도 아니고 최명길도 아니요, 다만 강대한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낼 길 없는 약소한 우리 조국의 현실 뿐이었던 것입니다.

 

글을 읽다보니 퍼뜩 생각이 납디다.

1
@Volksgemeinschaft

저도 두 사람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충절에 감복하곤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0
2020.06.22

쭉 잘읽었고

정도를 걷는 , 인간으로 사는데에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게ㅡ

공감이된다 좋은글이다

1
@다람쥐귀여워

고맙습니다. 다른 글도 잘 부탁합니다 :)

0
2020.06.23

생업이 무엇이간데 이런글을 쓸 수 있읍니까?

1
@0x1101000101F

저는 하루 하루 떼우며 살 뿐입니다. 그저 많은 분들이 한번쯤 생각해보셨을 일을 글로 옮겨봤습니다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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