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군사첩보 실패의 교과서-욤 키푸르(完)

1편: https://www.dogdrip.net/527019413

2편: https://www.dogdrip.net/527197693

3편: https://www.dogdrip.net/527409921

 

출처: 욤키푸르 전쟁(아브라함 라비노비치), 중동전쟁-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임용한)

영감을 받은 글: https://cafe.naver.com/bitethatbait/115250?art=ZXh0ZXJuYWwtc2VydmljZS1uYXZlci1zZWFyY2gtY2FmZS1wcg.eyJhbGciOiJIUzI1NiIsInR5cCI6IkpXVCJ9.eyJjYWZlVHlwZSI6IkNBRkVfVVJMIiwiY2FmZVVybCI6ImJpdGV0aGF0YmFpdCIsImFydGljbGVJZCI6MTE1MjUwLCJpc3N1ZWRBdCI6MTcwMjEyNTA4NDI3OX0.jteCfVp4PgBAuYqkj-VczwYxl4a_Z_fqnelosBWbH3I

 

 

※ 주의 : 사진에 약간 불쾌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경고합니다.

 

1. 종전 그리고 전황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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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시로 진입하는 이스라엘 전차, 전사자 뿐만 아니라 전차 수십대도 요새화된 수에즈 시에서 펑펑 터져나갔다.

 

1973년 10월 25일 UN의 중재로 교전 당사국인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는 전쟁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한동안 교전은 지속되었다.(시나이 방면은 1974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이스라엘은 국가의 전통인지 수에즈 운하에 위치한 도시인 수에즈를 점령하여 협정에서 유리한 이점을 얻고자 하였으나 수에즈시에 위치한 민병대와 이집트군의 저항으로 80명의 전사자와 3자리 숫자의 부상자를 얻은채로 패배하여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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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초기지를 구하러가다가 이집트군의 대전차 미사일과 RPG를 맞고 격파된 이스라엘의 마가크-3 전차

 

전쟁이 터질 당시 몇몇 장군들이 우려한 바로 바르레브 라인(다른말로 바레브라인)은 전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집트 군의 소방호수를 이용한 모래벽 돌파로 전선은 순식간에 뚫렸다. 바르레브 라인에 위치한 전초기지 중 가장 큰 기지인 부다페스트(Budapest) 기지를 제외한 전 기지가 이집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전초기지의 병사들은 저항 끝에 전사하거나, 항복하거나(재수없던 다수의 이들은 지난 전쟁에 대해 벼르던 이집트군에 의해 즉결처형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력으로 탈출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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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파된 이스라엘군 전차와 전초기지에서 잡은 이스라엘군 포로

 

이스라엘 시나이 사단의 전차부대는 작계대로 바르레브 라인의 전초기지들을 구원하기 위해 갔지만, 대부분의 전차들은 미리 자리를 잡은 이집트군의 대전차미사일에 의해 격파되었다. 전초기지는 시나이 사단의 핵심 전력을 완벽히 분쇄하는 미끼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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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전쟁 박물관에 전시된 격추된 이스라엘군 A-4 스카이호크기

 

시나이 사단의 구원부대가 격파됨과 비슷한 시기에 이스라엘 공군이 대공미사일 포대 선제공격으로 계획했던 타가르와 두그만 작전은 시간의 촉박함으로 인해 완전히 실패되었다. 다수의 전투기들이 격추되면서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키신저는 10월 8일 주미국 이스라엘 국방무관 모르데카이 구르의 보고를 통해 전투기 49대와 전차 500대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공군 전력 1/8이고, 기갑전력의 1/4이었다. 이틀만에 이런 피해가 난 것에 헨리 키신저도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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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됐다.... X됐다..... 쌍방 기습공격으로 이스라엘 군부는 패닉에 빠졌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북부사령부에 방문한 다비드 엘라자르 총참모장(맨 우측)와 엘리 제이라 암만 국장(오른쪽에서 두번째)

 

남부사령관 슈무엘 고넨은 절대로 반격하지말고 전초기지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라는 엘라자르의 명령을 무시하고 반격을 수행하다가 다수의 전차가 격파되고 수많은 병력이 시나이 반도의 사막에서 죽어나갔다. 이때 시나이반도와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 사이를 지키는 병력은 단 2개 사단 밖에 없었고 이 사단들 마저 무너지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 초기 내내 시나이 방면에서 어떻게든 예비군 여단이 모일 때까지 지연전을 수행할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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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비카 그린골드Zvika Greengold 중위는 야간에 단 한대의 전차로 시리아 기갑사단의 수십대의 시리아군 전차를 격파했다. 골란고원 남부 전역이 츠비카의 장판파로 인해 붕괴될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이거 뚫리면 사단본부가 있던 나파크도 뚫리고 시리아 방어전선의 전력이 집중된 북부도 붕괴될 수도 있었다.)

 

골란에서의 아비그도르 카할리니와 즈비카 그린골드의 영웅적인 방어전으로 시리아의 공세를 간신히 막아내고, 시나이에서는 슈무엘 고넨의 사실상의 교체 이후 전열을 가다듬어 욤키푸르 전쟁에서 가장 악명높은 전투인 중국농장 전투(이 전투는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면 피해규모가 불명이라고 나올 정도로 양측은 각자의 최정예 부대를 쏟아부었고, 다수의 위관/영관급 지휘관들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에서 간신히 이겼고 이후에 이스라엘군의 수에즈 운하 도하로 이집트 제3군을 포위하게 되면서 더이상 전쟁이 진행되면 3차대전으로 번지겠다는 미국과 소련의 우려 및 중재로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2. 이후의 상황(아그라나트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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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메이어 다얀 너희 둘 다 나와!!!! 전쟁 이후 전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과 키부츠 친구를 잃은 예비역 군인들이 지금의 상태를 성토하기 위해 시위를 벌였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이겼지만, 이스라엘 사회는 이 전쟁의 승리에 기뻐하진.... 않고 분노하였다. 사회 분위기가 골다 메이어와 모셰 다얀을 쳐죽일 분위기였다. 이스라엘 시민들은 전쟁 당일 요란하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전투기 출격음에 "훈련 시끄럽게 하네"로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전쟁이 터지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많은 아버지와 남편, 아들들이 급히 예비군에 소집되어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전쟁은 국가의 명운을 건 만큼 치열했고 처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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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60 노획 인증샷 찍은 이집트 군인들

 

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이 믿고 있던 신화는 붕괴되었다. 아랍 놈들을 언제 쳐들어 올 지 알 수 있다는 이스라엘 첩보, 언제든 아랍 놈들 뚝배기를 깰 수 있다는 노동당 정권과 천하무적이라는 이스라엘 공군은 이 전쟁에서 없었다.(하도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자주 격추되어 나중에 미국이 준 팬텀 전투기 수에 비해 공군 비행사의 수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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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나트 위원회에서 나온 발언들을 듣고 수기로 작성하는 모습, 해당 내용은 1995년 공개되었다.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메이어와 노동당 정권은 당시 세계 최연소 대법관(42세)이던 시몬 아그라나트를 주축으로 위원회를 설립했다. 

아그라나트 위원회 당시 주요 면담 내용을 정리한 문서: https://m.blog.naver.com/PostSearchList.naver?blogId=ds1jxm&orderType=sim&searchText=%EC%95%84%EA%B7%B8%EB%9D%BC%EB%82%98%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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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이스라엘 총선, 골다 메이어의 노동당은 승리했지만, 위축되었던 리쿠드 당은 창설 멤버인 아리엘 샤론의 활약과 노동당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로 인해 크게 약진했다. 결국 2024년 노동당은 과거의 위세를 찾지 못하고 군소정당으로 전락했으며, 리쿠드 당은 여당이 되었다.

 

전쟁으로 2개월 미뤄진 총선이 12월 31일에 시작되었다. 성난 민심이 선거에 반영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노동당은 총 120석이던 크셰네트(이스라엘 의회) 의석에서 기존의 56석에서 조금 줄은 51석을 차지했다. 보수 성향의 새로 만들어진 리쿠드당은 좌파성향의 노동당을 한자리 숫자로 간격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메이어 정권은 조금씩 변하는 민심의 분위기에 당황하였다. 모셰 다얀은 메이어 총리에게 사임을 표했지만, 메이어는 그것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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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아그라나트 위원회는 예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아그라나트 위원회는 6명의 인물에 대해 사임을 요구했다. 다비드 엘라자르 총참모장, 아만의 국장인 엘리 제이라 장군, 부국장 아리예 살레브 장군, 이집트 국장인 반드만 중령, 남부사령관 슈무엘 고넨 장군과 수석 정보장교인 다비드 게달리아 중령이 그 대상자였다.

 

다만 아그라나트 위원회는 골다 메이어 총리와 모셰 다얀 국방장관은 책임이 없다고 보고했는데, 민간 각료의 시점에서 그들은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고 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국방장관은 총참모장이 운용을 책임진 직무 분야에서 총참모장을 지도하는 '슈퍼 총참모장'이 될 의향이 전혀 없었다."

아그라나트 위원회에서 모셰 다얀 국방장관에게 내린 결론

 

그러나 이스라엘 국민들은 위원회의 이같은 결과를 노동당의 입김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 판단하고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셰 다얀은 본인이 국방장관이 될 당시에 자신을 최고의 국방 전문가라 언플을 했기 때문이었으며, 그렇기에 국민들은 모셰 다얀이 전쟁의 책임에서 회피한다고 생각했다. 다얀의 사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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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샤론의 인터뷰가 적힌 뉴욕타임즈의 1973년 11월 12일자 기사

 

다얀 본인도 이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두 번이나 메이어에게 사임을 요청했지만 메이어는 거절했다. 다얀에 대한 결론이 나오자 장군들은 각자도생을 하기 시작했다. 슈무엘 고넨은 언론에다가 아리엘 샤론이 자기 명령을 거부한 월권행위에 대해 고발했고, 샤론은 뉴욕 타임즈 등 유수의 세계 언론에 이스라엘군 수뇌부의 문제점에 대해 고발했다.(모셰 다얀은 샤론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다시 예비역 장군으로 등용할 생각이었지만 이 발표로 인해 다얀은 그 생각을 접는다.)

 

골다 메이어와 모셰 다얀은 군부만 때리는(그래야 실제적인 책임자인 자신들에게 피해가 안오니) 샤론의 행동을 묵인하다시피하고 이스라엘 군부는 살아남기 위해 부총리 이갈 알론을 끌어들이며 승자없는 난타전이 이어지다가 끝났다. 이것이 73년 12월 선거 전까지의 이스라엘 정부의 추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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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하크 라빈의 사진

 

그리고 74년 6월 시리아에 있던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 골다 메이어 내각은 총사퇴를 한다. 후임은 미국 대사를 역임한 이츠하크 라빈 노동부 장관이 총리가 되었고, 전쟁 당시 교통부 장관이던 시몬 페레스는 국방장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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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바드르 작전 당시 이집트군의 모습

 

전쟁을 통해 두국가는 서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6일 전쟁 당시 물자를 퍼주듯 버리고 빤스런 치던 이집트군은 더이상 없었다. 이스라엘 장군들과 장교들은 시나이에서 이집트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달라진 모습에 대해 고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도 진주만 공습 급으로 완벽한 전쟁 초반에서 끝에는 판정패로 끝나게 만드는 이스라엘의 저력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다. 일부 이집트 장교들은 욤 키푸르 전쟁 말이 되면 이스라엘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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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데이비드 협정 당시 안와르 사다트(좌) 지미 카터(중, 아직도 살아계신다!) 메나헴 베긴(우)

 

그리고 1975년 시나이-2 협정과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평화조약을 통해 1982년 이집트는 완전히 시나이반도를 되찾게 된다.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은 댓가로 이집트는 아랍연맹에서 한동안 퇴출되었다.(1979년~1989년) 욤 키푸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최대 적성국과 더이상 외교적으로 적대적이지 않게 되었고, 이집트는 미국이라는 소련보다 더한 든든한 백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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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도 까이는 욤키푸르 전쟁

 

노동당 정부는 6일 전쟁 이후 예방 전쟁 정책을 자제해 왔으나(그만큼 지난번 6일 전쟁이 국제사회에서 욕먹을 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욤 키푸르 전쟁 이후 다시금 분쟁에서 선제공격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아만은 제이라 축출 이후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 Unit)을 만들지만, 06년 레바논 전쟁이나 이번 하마스 전쟁으로 보면 그래도 갈길이 먼 듯 하다.....

 

여담으로 이스라엘 몇몇 군 관계자들에게 비판을 받은 바르레브 라인은 수에즈 운하 확장을 위해 그레이트 비터 호수의 Lakekan 요새를 제외하고 철거되었다. 이집트는 참고로 욤 키푸르 전쟁의 승전 기념물로 남겨둘려고 했지만 말이다. 이 요새를 짓기 위해 3억 달러의 비용이 3년간 투입되었다.

 

3. 당사자들의 후일담

 

골다 메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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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 메이어의 무덤

 

1974년 6월 골다 메이어는 총사퇴 이후에 그동안의 일에 대한 회고록을 남겼다. 77년 11월 21일 사다트가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당시 의회에서 사다트의 방문이 다음세대 젊은이들에게 평화를 가져오기 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골다 메이어는 78년 12월 8일 림프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골초에 커피중독자인것이 그녀의 건강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모셰 다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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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한 모셰 다얀은 핵옵션을 꺼내 들고 이걸로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가 여기에 진짜로 핵탄두 탑재하고 나간 이스라엘 전투기가 격추된다면?에서 시작한 영화다.

 

모셰 다얀은 욤 키푸르 전쟁 당시 골란 고원 전선을 순시하고 멘붕에 빠졌다. 전쟁 당시 그는 "제3 성전(이스라엘)이 무너진다."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 했으며(물론 이걸 들은 현장 지휘관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 이었다. 아직 예비군이 다 소집되지 않았고 양전선이 붕괴되지 않았는데 국방부 장관 혼자 멘탈이 나가 이런 사기가 저하될 소리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것을 연설하고자 했지만 골다 메이어에 의해서 거부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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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욤 키푸르 초반은 멘붕한 모셰 다얀을 대신하여 엘라자르가 메이어의 지시를 받아 전쟁을 지휘했다. 기록에 따르면 다얀은 핵옵션을 거론하며 사막 한 가운데 핵폭탄을 날려 아랍군의 진격을 막자고 언급한다. 이역시 골다 메이어가 반려하며 없던 일이 되었다. 또한 다얀으로 추정되는 유력한 인물이 바르레브선에서의 철군과 국제사회의 개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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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로마에 방문한 모셰 다얀 외무장관의 모습

 

메이어 내각 총사퇴 이후 모셰 다얀은 77년 선거에 당선되어 크세네트(이스라엘 의회)의 의원 및 메나헴 베긴 내각의 외무장관이 되어 1978년 이집트와의 평화회담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79년 10월 팔레스타인 영토 문제로 메나헴 베긴 내각에서 사임 한 후 텔렘Telem이라는 새로운 당을 만들었으나 1981년 10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의 목표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확신할 수 없지만, 무리하게나마 언플해서 얻은 자리인 국방장관이 이스라엘에서는 총리로 가는 요직임을 생각하면 그는 어쩌면 이스라엘의 차기 총리를 노렸을 수도 있지만, 욤 키푸르 전쟁의 예측 실패로 인해 그의 목표는 물 건너가고 만다.

 

다비드 엘라자르

모셰 다얀이 전선 순시 이후 멘붕하여 제 역할을 못하고 군수뇌부가 혼란에 빠질 시기 골다 메이어의 명령을 받고 이스라엘 군이 정상 반응을 하게 만든 주역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잘못된 군사 첩보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하여 결국 욤 키푸르 전쟁 발발을 막지 못한 책임이 있었고, 전쟁 이후 엘라자르는 군복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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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의 다비드 엘라자르의 모습

 

그에게 이스라엘 정부에선 미국 대사 자리를 주고자 하였지만, 엘라자르는 이스라엘 국영선사 ZIM의 사장이 되었다. 이당시 엘라자르의 일화에 따르면 엘라자르가 문서를 챙기러 육군본부 비서들의 방으로 갈때 방에서는 전쟁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으리'라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다비드 엘라자르는 그 노래를 듣고 얼어붙은 듯이 서 있다가 서류도 찾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갔다고 한다.

 

https://youtu.be/_Ru-ced6v20?si=DL-MRJsDbO_6zeuj

그 강철같던 인물도 울게 만든 노래 Lu Yehi

재밌게도 이 노래는 비틀즈의 렛 잇 비를 히브리어로 번안한 작품이다.

 

비서실장이 그를 찾아왔을 때는 메이어 총리와 다른 사람들이 바위라고 부르던 그 강철같은 성격과 정신의 소유자가 서럽게 우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전쟁과 면직이 엘라자르에게 얼마나 정신적인 타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던 일화였다. 종전 2년 후 엘라자르는 수영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51세 였다.

 

엘리 제이라

이 전쟁에서 가장 욕먹은 사람 중 하나인 엘리 제이라는 전쟁 직전까지 X맨 적인 행동을 했던 것과 다르게 전쟁 때는 놀랍도록 냉철한 분석으로 이집트군의 전황을 분석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첩보를 개판같이 하여 국가 멸망(+3차 대전)을 하마터면 일으킬 수 있었다는 책임이 있었기에 결국 그도 군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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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제이라의 2005년 모습

 

제이라는 미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기업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그럼에도 명예 회복에 대한 욕구는 변하지 않아 여러 책을 냈고, 아슈라프 마르완이 이중 첩자였다는 주장을 하며, 마르완의 신분을 폭로한다. 물론 이스라엘 법정에서는 마르완이 이중 스파이가 아니였다는 결론을 낸다.

 

엘리 제이라는 96세로 지금도 살아있으며, 텔아비브에서 거주하고 있다.

 

즈비 자미르

이 전쟁에서 전쟁 위험성을 꾸준히 언급한 즈비 자미르는 그 전에도 검은9월단 사건에서 당사자들을 집요하게 쫓아 암살한 것을 포함해 이스라엘 첩보 계의 전설로서 활약했다, 이 외에도 전쟁 직전인 73년 4월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파타 간부 3명을 암살하는 작전에도 참여했다. 이스라엘 첩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즈비 자미르의 유일한 실패는 욤 키푸르 전쟁이 곧 일어난다는 것을 골다 메이어 및 모셰 다얀에게 설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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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9월단 사건이 있을 무렵의 즈비 자미르의 사진

 

즈비 자미르는 74년 9월 모사드 국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이후에 그는 여러 국영기업에서 중역으로 참석했으며, 이스라엘의 각종 사건(성전산 폭동,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사건)에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90년대에는 제3지대 정당을 만들기도 하는 등,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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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즈비 자미르의 사진

 

2024년 1월 2일 즈비 자미르는 9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아슈라프 마르완

이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천사Angel인 아슈라프 마르완은 전쟁 이후 74년 외교부 장관이 되었다. 마르완울 향해 사다트의 친분으로 재산을 부정으로 축적했다는 고발이 잇달았고 결국 76년 3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마르완의 인생은 한동안 잘 나갔다. 결국 전에 나온 문제로 인해 물러났지만 아랍 산업화 기구(AOI)의 수장 역할을 맡았고 마르완의 자녀들은 혼인 또는 친구 등으로 아랍 고위층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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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라프 마르완의 모습

 

이후 그는 런던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였고 백만장자가 되었다. 한때 첼시 주식을 150만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2002년 아슈라프 마르완이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국의 이중 첩자라는 책이 나왔고 그가 기자들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한 전날, 런던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추락하여 숨졌다. 목격자는 마르완의 추락 이후 지중해 풍의 남성들이 마르완이 떨어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https://youtu.be/XSX63sLPNAE?si=vLLCc1o87kkuzoXk

아슈라프 마르완의 죽음에 대해 다룬 알자지라 방송의 다큐

 

마르완의 아내 모나는 모사드가 마르완을 죽였다고 하고, 마르완의 자녀들 역시 모사드가 마르완을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가디언지의 추측에 따르면 모사드는 마르완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마르완의 죽음에 대해 모사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리엘 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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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 키푸르 전쟁 당시의 모셰 다얀과 아리엘 샤론(붕대 감은 이), 모셰 다얀은 군부 내에 적만 가득했던 아리엘 샤론의 유일한 아군이었다.

 

이 전쟁의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어 낸 아리엘 샤론은 영웅이 되었다. 그는 전쟁 직전 전역하였다가 전쟁이 터지자 다시 예비역으로 참전하여 극적인 도하와 과감한 기동성(안그래도 예비대가 없는데 기동방어란 명목으로 과감하게 기동해서 다얀에게 이 롬멜 새끼란 소리를 들었다.)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쟁 이후 고별사나 언론을 통해 이스라엘 상층부를 사정없이 두들겨 안그래도 분노한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사이다를 안겼다.(교활하게도 샤론은 군만 건들여서 다른 쪽으로 태클이 들어올 여지를 막았다. 이 때문에 모셰 다얀은 그가 다시 군 예비역으로 편입하는 것을 고려하다가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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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라-샤틸라 학살은 아리엘 샤론이 대놓고 욕먹는 이유이자, 욕먹어도 되는 사건 중 하나였다.

 

여담으로 군 수뇌부와 샤론과의 관계는 전쟁 전이나 전쟁 당시에도 최악이었는데, 군 수뇌부는 예비역 출신인 ㅇㄱㄸ(전역 직후 샤론은 현 여당인 리쿠드 당을 창설하는 멤버로 활동했다.) 샤론이 리쿠드당 대표인 메나헴 베긴의 빽을 믿기에 병사들의 안위를 무시하고 너무 과감하게 기동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고, 샤론의 경우 실질적인 남부 사령관인 바르레브의 얼굴을 보면서 허여멀건한 샌님새끼란 생각을 하며 한 대 칠까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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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의 죽음에 기뻐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

 

이후 각료로서 차근차근 루트를 밟다가 2001년 총리가 되었다. 그 이전에 기독교인 민병대에 의해 일어난 사브라-샤틸라 학살을 방관 & 수시로 팔레스타인인들을 구금하거나 팔레스타인 땅을 폭격해서 팔레스타인에선 최악의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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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아리엘 샤론, 그 잘생긴 얼굴도 단 것(도넛)만 먹다보니 살에 파묻혔다.

 

하지만 그런 그도 성전산 위의 알아크사 사원을 허물고 유대교 성전을 짓겠냐는 질문에는 정색하며 반대했다. 알 아크사를 허문다면 욤 키푸르 전쟁을 따위로 만들 거대한 전쟁이 또 온다는 것이기에 그리고 이스라엘이 진짜로 멸망한다는 것을 알기에 최소한의 선은 지켰다.

 

아리엘 "아리크" 샤론은 2014년 1월 11일에 사망했다.

 

슈무엘 고넨

욤 키푸르 전쟁에서 엘리 제이라와 투톱으로 욕을 먹은 슈무엘 고넨은 한순간의 실수로 역적이 되었다. 반격 실패 이후 바르레브가 총참모장 대리인 자격으로 고넨에게 왔고, 고넨은 바르레브를 보자마자 자신이 사실상 해임된 것을 알고 낙담했다고 한다. 반격 때까지 폐급 짓으로 전력을 깍아먹던 슈무엘 고넨은 바르레브가 들어오자마자 그나마 상식적인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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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전쟁 당시의 슈무엘 고넨(우측)의 사진, 욤 키푸르 전쟁 이전까지 슈무엘 고넨은 최초로 수에즈 운하까지 쾌속 진격한 이스라엘의 군사영웅이었다. 이때까지는.....

 

고넨은 전쟁 이후 아그라나트 위원회에서의 모셰 다얀의 변명에 분노하며 기자들 앞에서 권총을 들고 모셰 다얀을 죽일려고 생각했다 말했고, 결국 그는 아그라나트 위원회의 요구로 군문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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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슈무엘 고넨의 모습, 아프리카에서 땅만 캐느라 고생했는지, 살이 다 빠진 모습이다.

 

고넨은 실력있는 변호사를 고용하기 위해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서 다이아몬드 캐는 일에 자신의 재산을 투자했다. 한 두번 재미를 보았지만 결국 적잖은 재산을 잃었다. 고넨은 짤막하게 방문하는 것만 제외하고 13년 동안 이스라엘에 방문하지 않았다. 그는 앞서 말한 모셰 다얀 암살 드립으로 사라질까 두려워했던 군인은 1991년 유럽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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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무엘 고넨의 장례식 사진(1991년)

 

슈무엘 "고로디쉬" 고넨의 유품엔 그의 인생 전부를 망가뜨린 시나이반도의 지도와 유대교 신비주의 종파인 카발라 경전이 들어있었다. 전직 신학생이던 고넨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던 이런 시련을 종교의 힘으로 이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트 만들러

10월 13일 부다페스트 전초기지를 제외하고 최후까지 저항하던 메자크 전초기지가 저항할 여력도 없다는 보고를 하자 만들러는 항복을 허락한다. 수 천 명의 이집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기력하게 자기의 병사들이 항복하는 것을 생각하던 만들러는 스트레스를 받아 사단본부를 떠나 전선 순시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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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만들러의 사진

 

순시 도중 만들러가 고넨과 통신을 할 무렵, 통신을 감청한 이집트 군의 포격이 만들러의 반궤도 장갑차에 쏟아졌다.(미사일이라고도 한다. 어떤게 정확한지는 모르겠음. 참고로 본인은 원전을 참고함.) 만들러와 부관, 이스라엘 라디오 방송국 기자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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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만 마겐Kalman Magen의 사진

 

전쟁이 온다는 것을 직감하고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요청했지만 상부의 희망회로에 결국 실패하였다. 만들러의 전사 이후 시나이 사단은 원래 이임하기로 한 마겐이 즉시 지휘권을 인계했다.

 

안와르 사다트

이 전쟁에서 사다트는 졌지만, 승리한 사람이 되었다. 사다트의 놀라운 기습과 성과에 아랍이 전율했다. 사다트보고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던 헨리 키신저도 사다트가 매우 현실적인 인물임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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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 10일 사다트 대통령을 대리하여 노벨상을 수상받는 대통령 고문 사예드 마흐메드 마레이Sayed Mahmed Marei

 

그는 이후에 1976년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기술자 및 고문관을 추방하고 본격적인 친미파로 전향한다. 그리고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한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모색한 공로로 메나헴 베긴과 같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 받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아랍세계에서는 안와르 사다트를 배신자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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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트:  "만약 자네가 또 한 번 수에즈의 서쪽 기슭에 도하하려고 한다면 난 자네를 감옥에 쳐넣겠어"

샤론: " 아,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농업 장관입니다."

1977년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 당시에 한 말 중에서

 

1977년 11월 20일 사다트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크세네트(이스라엘의 국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한다.

 

 

https://youtu.be/I3fvNMJEkUs?si=a7h1wDZt-bsryd1N

 

"아랍인이건 이스라엘이건, 전쟁에서 잃은 생명은 똑같은 생명입니다. 우리는 흉금을 털어놓고 전 세계에 우리의 동기와 목적을 이해시키고 실제로 우리가 정의와 평화의 구현자라는 사실을 믿어주기 바란다고 호소했습니다. 우리는 영속적인 평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  여기서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며, 당신들(이스라엘)을 우리 안으로 기꺼이 환영한다고 ... 우린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당신들과 만나는 것을 거부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는 당신들과 전 세계를 향해 항구적인 평화 속에서 함께하는 삶을 받아들인다고 선언합니다.  ...... 나는 평화를 달성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타인인의 권리 승인을 요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장을 환영합니다. 평화란 쓰인 문자의 나열을 단순히 승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화란 역사를 바꾸어 쓰는 일입니다."

 

https://youtu.be/cKu-u-W5J84?si=JcQxeidlOFSqu4lL&t=11

 

1981년 안와르 사다트는 광신 이슬람주의자인 이스람불리 중위와 그의 부하들에게 다수의 총탄과 수류탄을 맞고 사망한다. 사다트도 자신을 죽일려는 자들이 있는 것을 알기에 철저하게 경호망을 짰지만 욤 키푸르 전쟁 승전 기념 열병식에 방심한 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다.

 

후임으로 이스라엘 공군에 큰 피해를 끼친 영웅으로 알려진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되었다.

1개의 댓글

12 일 전

6살 적에 사다트 암살되고 무바라크가 대통령되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나는데 그 무바라크가 내가 회사 취직하고도 이집트 대통령일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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