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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의 문학 by 사카구치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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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의 문학
―― 코바야시 히데오론――
 
사카구치 안고

 

 

 

작년에 코바야시 히데오가 스이도바시의 플랫폼에서 추락했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술에 취해 술병 하나 들고 술병과 함께 추락했다는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내 쪽이 가슴 졸였을 정도다. 그것은 내가 코바야시라는 인물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기골차고 치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저 남자만은 자동차에 부딪혀 날아가거나 강에 떨어질 일이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으로, 그것은 또 나라는 인간이 너무 자동차에 부딪혀 날아가거나 강에 떨어지거나 하기 때문이라는 동경심 같은 맹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렇게 맹신한 것은 나의 심한 경솔로, 나 자신의 과거의 사실에서 가장 그렇게 믿을 수 없는 근거가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6-7년전에 에치고의 친척에 불사가 있어 모닝코트를 입고 도쿄의 집을 나섰다. 우에노 역에서 우연히 코바야시 히데오랑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는 니이가타 고등학교로 강연하러 가는 참으로, 우리 둘은 죠에츠선의 식당차에 올라타 내가 하차하는 에치고카와구치라는 작은 역까지 계속 술을 마셨다. 나처럼 위가 약한 사람에게는 식당차에서 먹는 것만큼 쾌적한 술은 없기에, 항상 몸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소화되어 위에도 늘어질 일이 없이 기분 좋게 취할 수가 있다. 나도 취했지만 코바야시도 취했다. 코바야시는 무뚝뚝한 얼굴과 다르게 본심은 상냥하고 친절한 남자니까, 내가 하차하는 역에 오자 “아아 내가 들어줄게” 라며 내 짐을 들고 앞서서 걸었다. 거기서 나는 코바야시가 “영차” 하고 발판에 둔 짐을 “어, 고마워” 라고 들고 내려서 헤어졌다. 산골의 작은 역은 과연 인간이 타거나 내리거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감탄했지만 우선 역무원도 없다. 사람 하나 없다. 이렇게 철저하게 한산한 역이 있다며, 인간이 타거나 내리거나 하지 않으니까 플랫폼 폭도 몇 척 안된다. 등뒤에 바로 화물열차가 있다. 그 사이에 코바야시가 탄 기차가 지나가버리자 기차가 없어진 맞은편에 나보다 한 단 높은 진짜 플랫폼이 나타났다. 인간도 잔뜩 돌아다니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때는 질렸다. 내가 플랫폼 반대측으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코바야시 히데오가 나를 내려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제 16-7년 전 그 때부터 코바야시 히데오가 스이도바시에서 추락할지도 모를 인물이라는 것을 믿어도 된다는 근거가 있었지만, 내가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심히 경솔한 독서가로 코바야시의 문장에 속아서 심안을 어지럽혔던 것 말곤 없다.

 

생각건대 코바야시의 문장은 심안을 어지럽힘에 재능이 있는 문장이다. 나는 코바야시와 바둑을 둔 적이 있는데 그는 5번째 돌을 두고 (사실은 더 둘 필요가 있지만 5번 이상은 보기 흉하다며 안 둔다) 결코 싸움을 하지 않는다. 접바둑의 정석대로의 땅따묵기 전문으로, 옆찌르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이쪽이 억지로 괴롭히러 가는 것이 미안할 만큼 공식적 그 자체의 바둑을 둔다. 바둑은 문장 이상으로 성격을 속일 수가 없어서 문학의 코바야시는 독단 선생 같지만 사실은 공식적인 정통파라고 나는 그 때부터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문장의 문자로부터 오는 박진력은 역시 내 심안을 어지럽히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요컨대 그의 문장을 그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그 문학을 실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임을 그가 신조로 삼고 신조대로 체득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의 옛날 평론, 시가 나오야론을 비롯한 다른 작가론 등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상당히 제멋대로라고 생각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저 무렵은 저걸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그가 유치했다기보단 우리들이, 일본이 유치했기 때문으로, 일본은 코바야시의 방법을 배우고 코바야시와 함께 자라서 요즘에는 거꾸로 선생의 결점이 코를 찌르게 되었지만, 실은 코바야시의 결점을 알게 된 것도 코바야시의 방법을 배운 탓이라는 것을 그가 수행한 위대한 문학적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조금도 먼 시대가 아니다. 왜냐면 나는 거의 그것을 믿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 나는 무리한 관념들이 날뛰지 않는 그러한 시대에, 제아미가 아름다움을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를 생각하여, 그곳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했다. “物数を 極めて, 工夫を 尽して 後, 花の 失せぬ ところを 知るべし” 아름다운 “꽃”이 있다. “꽃”의 아름다움은 없다. 그의 “꽃”의 관념의 애매함에 골머리를 앓는 현대의 미학자 쪽이 홀려 있을 뿐이다” (타에마[当麻])

 

그가 말하는 제아미의 방법이 바로 그의 방법이며, 그가 제아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태도가 즉 그가 자신의 문학에 대해서 독자에게 요구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아미의 미에 대한 생각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관념의 애매함 자체가 실재라고 한다. 아름다운 “꽃”이 있다. “꽃”의 아름다움은 없다.

 

나는 그러나 이런 세련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은 말장난 아닌가. 나는 중학생 때 한문 시험에 “일본에 많은 것은 사람이다. 일본에 적은 것도 또 사람이다”라는 문장의 해석을 과제로 받아 짜증이 난 적이 있는데, 이런 세련된 장난 같은 말을 해서 괜한 고생을 시키지 않아도 “일본에 사람은 많지만, 진짜 인물은 적다”고 확실히 말하면 되지 않은가. 이러한 식으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태도를 존중해야 하고 “일본에 사람은 많지만 사람은 적다”는 말장난에 불과한 표현법은 말살하도록 명심해야 한다.

 

아름다운 “꽃”이 있다. “꽃”의 아름다움은 없다는 표현은 사람은 많지만 사람은 적다와는 다르게, 이것은 이걸로 의미에 부합하기는 하다. 그러나 코바야시에게는 애매함을 가지고 노는 버릇이 있어 기발한 표현에 스스로 생각해서 점잔 빼는 태도가 근저에 있다.

 

그가 제아미에 대해서 “아름다움의 애매한 관념도 제아미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즉 “그의 문학상의 애매한 관념을 그 자신이 그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로 지탱해 온 이것들의 오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코바야시류의 오의이다.

 

결국 코바야시는 요즘 오의를 터득해 버렸으니까 인생보다도 한 행의 붓 끝 쪽이 진실한 것이 되어, 즉 무예인도 오의에 이르면 이제 검은 쥐지 않게 되어, 길 한가운데에 거친 말이 묶여 있으면 다른 길로 돌아서 군자 위험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예의 오의라는 깨달음의 도에 이르러서 무슨무슨교의 교조 같은 것이 된다. 코바야시 히데오도 교조가 되었다.

 

그러나 검술은 본래 줘패는 연마이며, 상대에게 줘패지기 전에 상대를 줘패는 기술이지 깨달음을 얻는 도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코바야시 히데오 밑으로 검술을 배우러 가면 검술 따위 공부하지 말고 위험을 가까이하지 않을 궁리를 해라, 그것이 검술이라고 가르쳐 준다. 이것이 코바야시류라는 문학이다.

 

“살아 있는 인간 따위 어쩔 수 없는 존재구나. 뭘 생각하고 있는지, 뭘 말하는지, 뭘 저지를지, 자신의 일이든 남의 일이든 알게 된 예가 있었는가. 감상도 관찰도 참을 수 없다. 그런데 죽어버린 인간은 대단하다. 왜 저렇게 확실히 착실히 하는 걸까. 그야말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살아 있는 인간이란 인간이 되는 중인 일종의 동물이 아닐까” (무상이라는 것) 라고 한다.

 

그러니까 역사에는 망자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물러나지 않는 인간의 상 밖에 나타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아름다운 형태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살아있는 인간을 관찰하거나 가면을 벗기면 벌을 받을 뿐이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코바야시 밑으로 문학을 배우러 가면 인생이나 문학 따위는 구름처럼 가려지고, 그는 이미 오의를 터득한 지체 높은 교조이며 깨달음이 담긴 심원한 한마디를 준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 따위는 뭘 할지 알 수 없어 감상도 관찰도 참을 수 없다는 코바야시는 그러니까 망자의 나라 역사를 신용하여 “역사의 필연”이라는 말을 하신다.

 

“역사의 필연”인가. 과연, 역사는 필연인가.

 

서행[西行]이 왜 출가했는지를 아무리 밝혀내려 해봤자 수수께끼는 수수께끼, 그런 곳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미나모토노 사네토모[実朝]가 왜 배를 만들었는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우대신이었던 것도 장군이었던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시인만을 보면 된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사카구치 안고라는 3류 문인이 여자에게 반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때로는 스님이 되려고 하거나 5년간 골몰하다 입맞춤했더니 당황해 버려서 절교장을 적고 실연하거나, 요즘은 또 데카당 따위라고 점점 더 뭔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처음부터 감상을 참을 수 없다. 첫번째로 녀석이 뭘 해봤자 그런 것은 녀석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실 것이 틀림없다. 녀석이 무엇인지는 녀석의 3류 소설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교조에게는 3류 문인의 실상 같은 건 농락당하고 휙 던저져버려, 비참 또 비참한 것이다.

 

그런데 3류 문인 쪽에서는 여자에게 반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오직 그 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고, 사후의 명성 따위 전혀 문제로 삼지 않는다. 교조의 스승 계보에 속하는 마리-앙리 벨 (스탕달) 선생의 “나의 문학은 50년 뒤에 이해될 것이다” 같은 건 말도 안 된다. 나는 사후에 애독되어 봤자 그것은 실로 그저 못미더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죽으면 나는 끝난다. 나와 함께 내 문학도 끝난다. 왜냐하면 내가 끝나니까. 나는 그 뿐이다.

 

살아있는 녀석은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다고 하신다. 정말이지 알 수 없다. 현재 이러하니 다음에는 이렇게 할 거라는 필연적인 이치는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없다. 죽은 인간도 살아 있을 때는 그랬다. 인간에게 필연이 없듯이 역사의 필연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과 역사는 같다. 그저 역사는 이미 끝났고 역사 속 인간은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그러나 그들이 온갖 가능성과 우연 속을 누볐을 것은 그들이 인간이었던 한 틀림없다.

 

역사에는 죽은 사람만 등장한다, 그러니까 후퇴할 수 없는 벼랑 끝 인간상을 보여주고 부동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것은 큰 거짓말이다. 죽은 자의 행적이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이라면 살아있는 인간이 저지르는 일도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이다. 만약 또 산 인간이 저지르는 일이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이 아니라면 죽은 자의 발자취도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은 아니었을 것이고, 생사 양자 변함이 있을 리가 없다.

 

즉 교조는 독창가, 창작가가 아니다. 교조는 본질적으로 감정인이다. 교조가 요즘 골동품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미 내가 그 바둑에서 간파한 것처럼 그는 천성이 공식주의자, 정석주의자, 보수주의자, 상식주의자이다. 그렇기에 망자는 어쨌든 죽었기에 이제 발을 헛디뎌 추락할 일이 없으니까 안심이지만 살아있는 녀석은 뭘 저지를지 알 수 없고, 교조처럼 뭘 저지를 기개가 없어도 발을 헛디뎌 플랫폼에서 떨어지는 복병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다. 실로 아무래도 산다는 것은 귀찮다.

 

그러니까 교조의 유의에는 형태, 즉 공식이라든가 약속이라는 것이 필요해서 죽은 놈이나 역사는 이제 발을 헛디딜 일이 없으니 형태 속에서 요리할 수가 있지만, 살아 있는 녀석은 언제 약속을 어길지 감을 잡을 수 없으니 이런 녀석은 감상을 견딜 수 없다. 역사의 필연 따위라는 요괴 같은 조미료를 고안해서 요리 솜씨를 뽐낸다. 살아있는 녀석의 요리는 싫다, 저런 건 끓여도 구워도 안 된다, 감상을 참을 수 없다. 조미료가 듣지 않는다.

 

교조의 요리는 너무 자기 멋대로다. 게다가 이상한 게 둘도 없을 맛이지만, 그러나 요리의 근본은 보수적이며 형태, 공식, 상식 그 자체이다.

 

살아있는 인간은, (실은 죽은 인간도, 그러니까, 즉) 인간은 자신도 뭘 저지를지 알 수 없고 자신이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인간은 덧없는 존재지만 어쨌든 살려고 한다. 어떻게든 손으로 더듬어서라도 뭔가 더 나은 것을 찾아 매달려 살려고 한다. 궁지에 몰리면 전혀 뭔 짓을 할지 스스로도 미덥지 못하다. 의심도 하고 믿기도 하고 믿으려고 마음먹기도 하고, 몸통박치기에 도망도 치고, 정말이지 악전고투이다. 이렇게나 하면서 왜 사는 것인가. 문학이라든가 철학이라든가 종교라든가, 여러가지 사상이라는 것이 거기서 나고 자란 것이다. 그것은 모두 살기 위한 것이다. 산다는 것에는 온갖 모순이 있고, 불가결, 불가해, 전혀 앞을 모르기 때문인 악전고투의 무기인지 장난감인지 어쨌든 거기서 휘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된 막대기 같은 것 중 하나가 문학이다.

 

인간은 뭘 저지를지 모르니까 문학이 있는 게 아닌가. 역사의 필연, 인간의 필연 같은 것으로 구분하거나 감상을 견디거나 할 수 있다면 문학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러니까 코바야시는 그 영혼의 근본에서 문학과는 완전히 연이 끊어져 있다. 그럼에도 문학의 오의를 고안해서 한 종파의 교조가 된다, 이거야말로 사교(邪敎)이다.

 

서행도 사네토모도 지옥을 봤다. 처참한 죄업 깊은 지옥, 슬프고 상냥한 아름다운 지옥. 그리고 서행의 일생은 “내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또, 고독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말없는 고뇌를 멈출 수 없었고, 사네토모는 살해당했지만 그러나 사네토모의 마음은 이것을 자살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고 한다. 정말이지 그 말대로다. 사교도 역시 진리를 설파하는가. 진광[璽光](일본의 신흥종교 교주)이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서행은 왜 출가했는가, 그 원인에 대해서 서행 연구가는 분주하지만 나는 흥미 없다. 보통 시인을 풀이하려면 그 애써 드러내려고 한 바를 파악해야지, 에써 잊으려고 숨기려고 한 바를 파고들어봤자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다” (서행)

 

그리고 근대문학이라는 녀석은 가면을 벗고 민낯을 보여라, 그런 말만 외치며 달려가다 보니 기개 없는 독념이 방향도 없이 펼쳐지고 벌을 받아 버렸다고 말하신다.

 

그렇다, 시인을 풀이하려면 시를 읽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이런 일도 했다, 이런 일면도 있었다고 파고들어서 동류 발견을 기뻐해봤자 시인을 이해한 것도 아니고, 바로 시를 읽는 것만이 시인을 풀이하는 방법이다. 코바야시는 시를 풀이한다고 한다. 그렇다, 감상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감상가라는 자에겐.

 

그러나 여기에 작가가 있다. 그의 독서는 배우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에게는 작품은 쓰는 것만이 아니라 또 사는 것이다. 코바야시가 서행이나 사네토모의 시를 읽는 것도 그들이 살았던 그늘이며, 그들이 살면서 봐야만 했던 지옥을 코바야시도 또 읽음으로써 감동하는 것이다.

 

가면을 벗고 민낯을 드러내라는 것은 그것을 작품 위에서 행했으니까 벌을 받은 것일 뿐, 소설이라는 작품의 경우에는 작가는 사상가임과 동시에 이야기꾼이어야 한다. 가면을 벗고 민낯을 드러내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것을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작가의 사생활에서 작가는 가면을 벗고, 철저히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는 생활을 모르면 그 작가의 사상이나 희작성 따위 뻔한 것으로, 감상을 견딜 수 있는 물건은 아님이 확실하다.

 

소설은 (예술은) 자아의 발견이라고 한다. 자아의 창조라고 한다. 작가가 자신을 알아버리면 작품은 그것에 의해 한정되어 정해진 통로밖에 다닐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진짜 소설은, 그것을 다 썼을 때에 항상 하나의 자아를 창조하고 발견해야 한다는데, 이것은 문학기사 앙드레 지드 씨의 의견이다. 덤으로 지드 씨는 문학에 통달해서 온갖 기법을 익히고 종횡으로 지식을 사용하여 기술을 배우고 어느 때는 틀을 깨고 소설을 만드는 기술자이나 진정한 소설가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드 씨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서 자아를 창조 발견했는지 나는 의문이다.

 

우리 교조 코바야시 씨도 예술은 자아의 창조발견이라고 한다. 종이를 향할 때에는 아무것도 없다. 글을 쓰면서 창조되고 발견되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 나도 대단히 찬성이다.

 

그러나 종이를 향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어느 한도까지는 알고 있다. 자신을 어느 한도까지 알지 못하는 인간이 소설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단 자신, 또 인간에 정통하지 않고서 소설을 쓸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나서 발견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왜냐면 작가는 지금 있는 한도, 한정을 견딜 수 없다 사실이 작가활동의 원동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거의 전부 세간의 시시한 우연의 혹은 부당한 요구에 응해서 분주한 피로 속에 만들어진 것으로 사전에 목적을 정하고 계획을 짜고 작품에 숙려 전념할 시간은 없었지만, 모짜르트는 불평도 하지 않고 부당한 요구에 응하여 대예술을 남겼다. 천재는 외적 우연을 내적 필연으로 터득하는 능력이 갖춰져 있다고 한다. 그것은 비단 모짜르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체호프의 희곡도 부당한 요구에 응해서 며칠만에 만들어졌고 치카마츠 몬자에몬의 희곡도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빚에 쫓기며 마차처럼 글을 써댔고 독자의 기호에 응해서 스타브로긴의 걸음걸이까지 바꾼다는 자신을 버린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정말이지 외적 우연을 내적 필연으로 바꾸는 능력이 천재의 작품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해서 목적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숙려 전념할 시간이 없어도, 적어도 소설 작가의 경우 일단 인간에 정통한 것은 절대적 조건이며, 인간통의 뒷받침은 자아의 성찰로 유지되는 것이고 항상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한 곳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은 발견 창조와 동시에 한계를 가져오므로, 작가는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불만과 자기 반역을 일으킨다. 머무를 때에는 작가활동은 끝이며, 제작 도중에도 작가로 하여금 몰두시킬 수 있는 힘은 한계를 뛰어넘어 발견에 스스로 놀라게 되는 신선한 즐거움에 의한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을 자신의 문학으로부터 몰아내버린 코바야시는 문학과는 절연하고 문학으로부터 실각한 것으로, 하나의 문학적 출가 둔세다. 내가 그를 교조라고 하는 것은 즉흥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는 이제 문학을 감상하고 시인을 풀이할 뿐이다. 역사의 필연이라든가 인간의 필연이라는 자기 멋대로인 각도로 그는 이제 문학이나 시인과 다투고 격투할 수 없다. 다툰다든가 격투한다는 것은 자신을 우연 쪽으로 내거는 일이니까, 그는 이제 우연은 나에게 필요 없다는 깨달음을 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애써 숨기려고 하고 잊으려고 한 것을 파헤치는 것은 감상을 위해서나 시인을 풀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면을 벗기려고 하는 작용이 타인에게 향해졌을 뿐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가면을 벗는 것도 진리를 파헤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벌받은 고뇌 격투, 그런 것은 이제 코바야시에게는 볼일이 없다.

 

항상 사물이 보인다. 인간이 보인다. 너무 잘 보인다. 어떤 사상도 의견도 그를 움직이기에 부족하다. 그리고 보고 적을 뿐이다. 그것이 츠레즈레구사[徒然草]라는 공전절후의 비평가의 작품이라고 코바야시는 말한다. 이것은 즉 코바야시류의 오의이기도 한데, 비평이란 보이는 눈이다, 그리고 코바야시에게는 인간이 너무 잘 보여서 어떤 사상도 의견도 보이는 눈을 흐리게 하지 않고 그를 움직일 수가 없다. 그는 너무 잘 보이는 눈으로 보고 감정한 대로를 쓸 뿐이다.

 

나는 그러나 코바야시의 감정서 따위 전혀 신용하지 않는다. 서행이나 사네토모의 노래나 츠레즈레구사가 무엇인가. 삼류품이다. 나는 조금도 재밌지 않다. 나도 하나 견본을 내보자. 이것은 그저 소박하기 짝이 없는 시일뿐이지만, 나는 그러나 서행이나 사네토모의 노래, 츠레즈레구사보다도 훨씬 좋아한다. 미야자와 켄지의 “눈으로 말하다”라는 유고다.

 

だめでせう / 안되겠네요

とまりませんな / 멈추지 않는군요

がぶがぶ 湧いて ゐるですからな / 샘솟듯이 가래가 끓어올라

ゆふべから ねむらず / 저녁부터 잠들지 못하고

血も 出つゞけな もんですから / 피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そこらは 青く しんしんとして / 주위는 푸르고 조용하고

どうも 間も なく 死にさうです / 아무래도 곧 죽을 것 같습니다

 

けれども なんと いい 風でせう / 하지만 이 얼마나 좋은 바람인가요

もう 清明が 近いので / 이제 청명도 멀지 않아서

もみぢの 嫩芽[わかめ]と 毛の やうな 花に / 단풍 새싹과 털 같은 꽃에

秋草のやうな波を 立て / 가을풀 같은 파도를 일으키고

あんなに青空から / 저렇게나 푸른 하늘에서

もりあがつて湧くやうに / 솟아오르듯이

きれいな風がくるですな / 깨끗한 바람이 부는군요

 

あなたは医学会のお帰りか何かは判りませんが / 당신은 의학회에 다녀오시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黒いフロックコートを 召して / 검은 플록코트를 입으시고

こんなに本気にいろいろ手あてもしていたゞけば / 이렇게 열심히 여러가지 조치를 해주시니

これで死んでもまづは文句もありません / 이렇게 죽어도 일단은 불만은 없습니다

 

血がでてゐるにかゝはらず / 피가 나고 있는데도

こんなにのんきで苦しくないのは / 이렇게 태평하고 괴롭지 않은 것은

魂魄[こんぱく] なかば からだを はなれたのですかな / 혼이 반쯤 몸을 빠져나간 때문일까요

たゞ どうも 血のために / 그저 아무래도 피 때문에

それを 言へないのがひどいです / 그것을 말할 수 없는 것이 가혹합니다

 

あなたの方から見たら / 당신 쪽에서 보면

ずゐぶんさんたんたるけしきでせうが / 상당히 참담한 풍경이겠지만

わたくしから見えるのは / 저에게 보이는 것은

やつぱりきれいな青ぞらと / 역시 아름다운 푸른 하늘과

すきとほつた風ばかりです / 맑고 투명한 바람뿐입니다

 

반쯤 죽어가며 이런 시를 쓰다니 벌받을 이야기이지만, 츠레즈레구사의 작자가 너무 잘 보이는 부동의 눈으로 보고 적었다는 사물의 실상과, 이 벌받을 사람이 피를 뿜어올리면서 본 푸른 하늘과 바람은 전혀 물건이 다른 것이다.

 

사상이나 의견에 의해 움직여진 적 없는 너무 잘 보이는 눈. 그런 눈은 옹이구멍 같은 것으로 사물의 죽은 모습 밖에 안 보인다. 즉 코바야시의 필연이라는 괴물 밖에 보이지 않는다.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작자가 봤다는 달, 멍텅구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코바야시가 말하는 그런 달이 대체 그렇게 멋진 달인가. 헤이케모노다타리가 제1급의 문학이라니, 바보 같은 소리도 쉬면서 말해라. 저런 것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들이 벌을 받는다니 바보 같은 소리다.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독에 당한 녀석, 벌을 받은 녀석이 아니면 쓸 수 없다. 사상이나 의견에 움직여질 일 없는 너무 잘 보이는 눈에는, 미야자와 켄지가 본 푸른 하늘과 맑은 바람 같은 건 볼 수 없다.

 

살아 있는 녀석은 무엇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더듬으며 어슬렁거리며 비원을 담아 아슬아슬한 곳을 기어다니는 벌을 받은 사람에게는, 사물의 필연 따위 전혀 보이지 않지만 자신만의 것이 보인다. 자신만의 것이 보이니까 그것이 또 만인의 것이 된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역사의 필연이라든가 인간의 필연 따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자신을 걸고 손으로 더듬으며 어슬렁거리는 벌받은 사람만이 그 도박으로 볼 수 있게 된 자신만의 세계다. 창조 발견은 그런 것으로 사상에 동요하지 않는 너무 잘 보이는 눈 따위에 비치는 진부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꽃”이 있다, “꽃”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없다, 이런 식의 어정쩡한 것이 아니다. 죽은 인간이 그리고 역사만이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의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무엇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인간이 온마음을 다해 격투하고 뛰어오를 때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의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 작품활동으로써 행해질 때에는 예술이 되는 것이며, 사물이 잘 보이는 눈은 감정가의 눈에 불과하다.

 

문학은 사는 것이다. 보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반드시 행하는 것이 아니어도 될지도 모른다. 서재 안에 틀어박혀 있어도 좋다. 그러나 작가는 어쨌든 살아가는 인간의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면을 한장씩 벗겨내는 고통에 몸을 움츠리고, 거기서부터 인간의 시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살아있는 인간을 쫓아낸 문학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소설은 19세기에 끝났다고 한다, 여기서 교조는 그야말로 사교이며 신의 계시다. 시대는 변한다. 무한히 변한다. 일본의 오늘날은 개벽 이래의 큰 변화다. 별로 크게 변하지 않아도 시대는 항상 변하는 것으로, 온갖 시대에 그 시대 말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있고,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은 코바야시처럼 오의에 달하여 깨달음을 펼치지는 않는 것으로, 무엇보다 살아감으로써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은 저절로 소설을 낳고 또 읽을 터이며, 언론의 자유가 있는 한 만고 말대 끝은 없다. 소설은 19세기에 끝났다는 말은 진광의 문학적 신탁이다.

 

인생이란 개개가 개개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것이라고 포기하고 오의에 틀어박혀 깨달음을 펼치는 것은 어려울 것 없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 “만사 믿을 게 못된다”며 내다보고 출가 둔세, 잘 보이는 눈으로 츠레즈레구사를 쓴다는 것은 낙제생이 하는 일로, 인간은 반드시 죽으니까 어차피 죽을 거면 빨리 죽어버리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은 반드시 깨지고, 여심 남심은 가을 하늘, 반드시 딴마음이 일어나고 작년의 사랑은 올해는 색이 바래는 것이란 걸 알고 있어도, 그러니까 사랑을 하지 말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완전히 바보 같은 일이지만 어쨌든 힘껏 살아보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

 

인생은 만드는 것이다. 필연의 모습이라는 것은 없다. 역사라는 본보기는 살기 위해서는 허울뿐인 본보기일 뿐, 자신의 마음에 물어보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본보기이다. 가면을 벗고 벌거벗은 자신을 쳐다보고 거기서 뛰어오른다, 형태도 선례도 약속도 없는 자신만의 독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코바야시에게는 이제 인생을 만들어갈 정열이라는 것이 없다. 만사 믿을 게 못된다며, 거기서 그는 잘 보이는 눈으로 사물을 인간을 바라보고, 오로지 죽은 상을 바라보고 거기서 필연이라는 것을 찾는다. 그는 골동품 감정가다.

 

화조풍월을 벗 삼아 골동품을 쓰다듬는 걸로 만족하는 인간에게는 인간의 업과 싸우는 문학과는 연이 없다. 코바야시는 인간 고독의 상이라며 지옥을 본다고 말한다.

 

あはれ あはれ この 世は よしやさも あらば あれ 来む 世も かくや 苦しかる べき (서행)

아 덧없도다 이 세상은 좋고 나쁨도 있지만 앞으로 올 세상도 이렇게 괴로울 것인가

 

花 みれば その いはれとは なけれども 心の うちぞ 苦しかりける (서행)

꽃을 보면 그 까닭은 없지만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네

 

風に なびく 富士の 煙の 空に きえて 行方[ゆくへ]も 知らぬ 我が 思ひかな (서행)

바람에 흩날리는 후지산 연기 하늘로 사라지는 것이 행방도 알 수 없는 내 마음 같구나

 

ほのほのみ 虚空[こくう]に みてる 阿鼻地獄 行方も なしと いふも はかなし (사네토모)

불꽃만 허공에 보이는 아비지옥 행방도 알 수 없다는 것도 덧없구나

 

吹く 風の 涼しくも あるか おのづから 山の 蝉[せみ] 鳴きて 秋は 来にけり (사네토모)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고 산의 매미 우는 것이 가을이 오고 있구나

 

뛰어난 시가다. 확실히 인간 고독의 상을 계속 바라보며 산 사람의 작품임이 틀림없고, 또 순결한 영혼이 본 풍경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고독을 관조하는 것이 대체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한다. 과연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작품은 남는다. 이 시간의 장단은 그러나 인생과 예술의 가치를 재는 척도는 될 수 없다. 작가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일생이고 인생이지 작품은 아니었다. 예술은 작가의 인생에서는 한낱 상품 또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거기에 작자의 수많은 시간이 투입되고 고심 고민이 걸리고, 때로는 작자의 살을 깎고 목숨을 빼앗는 것일지라도, 작자가 그곳에 몰입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은 그것이 작자의 인생의 장난감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을 채우는 놀이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는가. 그리고 또 그것은 “부정한” 거래를 통해 그저 돈을 얻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며, 여자에 반하거나 딴마음을 먹거나 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상품이었다.

 

나의 작품은 50년 후에나 이해될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을 전혀 신용하지 않는다. 가령 마리-앙리 벨 선생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런 진부한 같은 문구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으로 실생활에서는 전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죽어버리면 인생은 끝이다.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아이는 살아 있고 어느 시대에도 항상 인간은 살아 있다. 그러나 그런 인간과 자신이라는 인간은 다른 존재다. 자신이라는 인간은 단 한사람밖에 없다. 그리고 죽으면 없어져버린다. 확실히 그 뿐인 인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은 길다느니 자신의 인생보다도 길다느니, 자신의 인생보다 더 긴 시간은 확실히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다. 다른 인간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항상 단 하나뿐인 별개의 인간으로 개개의 인간이 그러하며, 역사의 필연이라든가 인간의 필연이라든가 그런 이상한 잣대로 비교하거나 요리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 일반은 영원히 존재하고 그곳에 영원이라는 관념은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라는 인간에는 영원 따위 관념은 조금도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자신이라는 인간은 지극히 고독한 슬픈, 덧없는 생물이며 죽어버리면 없어진다. 자신이라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사는 것, 인생이 전부로 그의 작품 예술은 그저 손때 묻은 것 중 가장 그가 사랑한 유품이라는 것 말고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 고독의 상은 뻔한 것, 너무 당연한 것,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것이야말로 특별히 의식할 필요 없다.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가면을 벗고 벌거벗은 근대가 독에 당하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고독의 상이라는 것을 파헤쳐 심각한 척하고 있는 코바야시 히데오 쪽이 독에 당하고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라는 인간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인간이며 죽으면 없어지는 인간이니까, 자신의 인생을 힘껏 보다 좋게 살도록 궁리를 짜내야만 한다. 인간 일반, 영원한 인간, 그런 초상으로 임시변통하거나 얼버무릴 수는 없는 것으로, 단순 명쾌하게 보다 좋게 사는 것 외에 다른 게 있을 리 없다.

 

문학도 사상도 종교도 문화 일반도 뿌리는 그것뿐이며, 인생의 주제 안목은 항상 그저 자신이 산다는 것뿐이다.

 

잘 보이는 눈, 그리고 인간이 잘 보이고, 너무 잘 보인다는 겸호[兼好] 스님은 어떤 인간을 봤다는 건가. 자신이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으면 인간이 아무리 잘 보인다고 해봤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자신의 인생으로의 이상과 비원과 노력이 보이지 않으면.

 

인간은 슬픈 존재다. 덧없는 존재다. 슬픈 존재다. 불행한 존재다. 왜냐면 죽어 없어져버리니까. 자신 혼자만이 그러니까. 개개인이 그러한 자신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이것은 이제 인간끼리의 관계에 행복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래도 어쨌든 살아가는 것 말곤 방법은 없다. 살아가는 이상은 나쁘게보다 좋게 살아야만 한다.

 

소설 따위 그저 상품이고 장난감이기도 하고 또 꿈을 쓰는 일이다. 제2의 인생 같은 것이다.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 지금 있는 한계를 뛰어올라, 소설은 항상 발돋움하고, 달리고, 그리고 뛰어오른다. 그러니까 추락도 하고 엉덩방아도 찧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사물에 부합하는 것, 사물 그 자체이자 살아남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버팀목이 되는 것으로, 잘 보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슬픈 것이다. 고독한 것이다. 끔찍한 것이다. 불행한 것이다. 인간이 그러하니까.

 

코바야시는 이제 슬픈 인간도 불행한 인간도 아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 고독의 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고뇌와는 이제 인연이 없다. 그리고 만족하고 있다. 골동품을 사랑하면서. 감정하면서. 그리고 오의를 펼치고 달관하고, 너무 잘 보이는 눈으로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다. 사상에도 의견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제 살아있는 인간들처럼 무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짓을 저지를 일은 없다. 그런데도 그는 스이도바시의 플랫폼에서 떨어졌는데, 그의 너무 보이는 눈, 고독한 영혼은 무엇을 보았을까. 뭐 재미없어, 설령 죽어봤자 나 자신의 마음은 자살이라고 봐도 되지 않겠어. 아무것도 아니야.

 

자살이란 뭘까. 그런 것이야말로 이치도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바람처럼 무의미한 일이다.

 

여자의 종아리를 보고 구름 위에서 떨어졌다는 쿠메 마사오 선인의 추락에 비해서 코바야시의 추락은 이 무슨 차이인가. 이것은 그저 이제 물체의 낙하에 지나지 않는다.

 

코바야시 히데오라는 낙하하는 물체는 그 고독이라는 시혼으로 낙하를 자살로 보고 허무라는 시를 노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된 문학은 쿠메 선인 쪽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 진정한 아름다움, 진정으로 비장한 아름다움은 쿠메 선인이 봤다. 아니, 쿠메 선인의 추락 자체가 아름다움이 아닐까.

 

낙하하는 코바야시는 지옥을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낙하하는 쿠메 선인은 그저 꽃을 봤을 뿐이다. 그 꽃은 그대로 지옥의 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코바야시가 본 지옥은 종이에 적힌 떡 같은 지옥이었다. 그는 이제 무엇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인간이 아니라 교조니까. 인간만이 지옥을 본다. 그러나 지옥을 보지 않는다. 꽃을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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