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쇼스타코비치가 회상한 투하쳅스키의 일화

출처: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 "증언" 솔로몬 볼코프 엮음

 

투하쳅스키는 하룬 알 라시드[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 흉내내기를 아주 좋아했다. 사실 투하쳅스키에게는 군복이 잘 어울렸고 자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군복을 입으면 금방 눈에 띄니깐 시내에 갈 때는 대개 좀 야단스러운 평복 차림을 헀다. 평복이라 해도 역시 좋은 옷이었다.

그는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최고 거물들과 특별 시사실에서 영화를 볼 수도 있지만, 평복 차림으로 허름한 영화관에 가서 보는 편을 더 좋아했다. 보디가드도 없이 혼자서 말이다. 그리하는 편을 더 재미있어 했다.

한번은 투하쳅스키가 극장에 갔다가, 극장의 피아노 연주자가 바로 자기가 다녔던 사관학교의 음악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투하쳅스키도 그에게서 배웠다. 그의 이름은 예르덴코였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미하일 예르덴코(Mikhail Erdenko)의 친척이었다.

노인의 몰골은 비참했다. 투하쳅스키는 그에게 온정을 베풀기로 했다. 그는 노인에게 가서 자기 소개를 하고, 다시 노인에게 배우고 싶다고 청했다. 어렸을 때 받은 수업이 너무나 좋아서 자기, 즉 투하쳅스키 원수는 아직도 그 수업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투하쳅스키가 옛 선생에게서 다시 교습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인은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았다. 1년간의 교습비 정도 되는 금액을 선불로 준 것이다. 그는 노인이 굴욕을 느끼지 않도록 친절하고 품위있는 방법으로 돕고 싶었다. 그는 친절하고 품위 있게 보이는 걸 좋아했다.

한번은 투하쳅스키와 내가 에르미타시 박물관에 그림을 보러 갔다. 물론 그는 평복차림 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끼리 박물관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나중에는 어떤 단체 관람객 뒤를 따라다녔다.

그 그룹에는 안내원이 있었다. 젊은 친구였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인 것 같았다. 투하쳅스키는 안내원의 말을 정정해주기 시작했다. 안내원이 한 마디 할 동안 그는 두 마디 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말에 더 알맹이가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안내원이 아니라 투하쳅스키의 말만 듣기 시작했다. 결국 안내원은 화가 났다. 그는 투하쳅스키 원수에게는 말도 걸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굽니까?"

이는 곧 왜 그가 자기 일에 간섭하느냐는 뜻이었다.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투하쳅스키"

안내원에게는 마치 벼락이 때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처음에 안내원은 내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 자세히 바라보고는 당연히 그를 알아보았다. 투하쳅스키는 유달리 두드러지는 외모였으니까, 교육을 잘받지 못한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이 노동자는 당연히 겁에 질렸다. 그는 해고되지 않을까, 아이들이 굶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투하쳅스키가 그렇게 명령했다면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불평만 했더라도 안내원은 해고되었을 것이다. 그 지역의 군대 사령관으로서, 레닌그라드에서 투하쳅스키의 권력은 막강했으니까.

금방이라도 시비를 걸 것 같던 안내원의 태도는 지독한 공포로 바뀌었다. 그는 귀중한 지적을 해주셔서 고맙다고 투하쳅스키에게 감사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투하쳅스키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공부하게 젊은이. 공부를 하라고. 공부하겠다면 아직도 늦은 건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는 출구로 향했다. 투하쳅스키는 이 사건으로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또 한번은 어떤 사람이 투하쳅스키의 차에 다가서 있는 것을 경호원이 발견했다. 그는 술에 취해 완전히 곤드레 상태였다. 왜 그랬는지 그는 문손잡이를 떼어내려고 낑낑댔다. 손잡이에는 니켈 도금이 되어 있어서 아주 반짝거렸고, 아마 그 때문에 그 시민의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경호원은 이 시민을 '이 사람이 마땅히 마땅히 가야 할 곳(aka. 아마도 굴라그??)'으로 보내려 했다. 덧붙이자면, 거기는 정말 굉장한 곳이고 그리로 끌려가면 아주 끔찍한 지경에 빠지게 되는 그런 곳이다.

투하쳅스키가 끼어들어서는 경호원들에게 술주정뱅이를 그냥 보내주라고 지시했다. 그냥 한잠 자고 잊어버리게 해줘라.

1.png

간신히 한 장 인터넷에서 찾음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작곡가 글라드콥스키(Arseny Pavlovich Gladkovsky)였다. 그는 한창 때에는 꽤나 날리던 작곡가였고 크게 성공한 오페라도 하나 있었다. 그 오페라는 방금, 오랜만에 공연을 재개한 상태였다. 오페라는 군대, 즉 1919년의 페트로그라드 방어 이야기를 주 테마로 다투고 있었던 만큼 글라드콥스키는 투하쳅스키가 듣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글라드콥스키는 투하쳅스키에게 초청장을 보냈으며 자기를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보내지 않은데 대해 감사했다.

투하쳅스키는 그 오페라를 보았지만 마음에 별로 들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내게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사람을 그냥 보내주었다니 내가 실수했나?' 물론 농담이었다.

중략.....투하쳅스키 숙청 후 레닌그라드 공방전 시기

나는 1941년 7월, 레닌그라드 외곽에서 참호를 파면서 투하쳅스키를 생각했다. 우리는 포렐리 병원 저편으로 가서 삽을 하나씩 지급 받고 몇 그룹으로 나뉘었다. 우리는 '음악원 그룹' 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음악가들은 비참한 몰골이었고 일솜씨도 아주 형편없었다. 그때는 무더운 7월이었다. 어떤 피아니스트는 새 양복을 입고 왔다. 그는 바지 자락을 조심스럽게 무릎까지 걷어 올려 비쩍 마른 종아리가 드러났지만, 곧 허벅지까지 진흙 투성이가 되었다. 아주 존경받는 음악사 학자도 있었다. 그는 책을 가득 넣은 책가방을 들고 왔다. 그늘진 숲으로 가게 되면 그는 가방에서 두툼한 책을 한 권 꺼내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열심히 일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가 참호를 팠으면 얼마나 팠겠는가? 이런 일은 진작에 해놓았어야 하는 일이다. 훨씬 더 일찍 했어야 하고 훨씬 더 전문적으로 했어야 하는 일이다. 그랬더라면 효과가 더 있었을 텐데, 조금이라도 미리 대비되어 있던 방어 시설은 전부 투하쳅스키가 해놓은 것이다.

 

tmi1) 투하쳅스키의 숙청 당시 투하쳅스키의 어머니는 자식을 비난하라는 당국의 요구를 받았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 역시 자식처럼 총살되었다.

tmi2) 이 파트는 아예 투하쳅스키와 메이예르홀트라는 제목으로 자신을 변호하면서 동시에 시대의 흐름에 쓸려나간 두 거물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참고로 메이예르홀트는 독일계 러시아인으로서 혁명 후에 독일식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개명했을 정도로 러시아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그런 그가 숙청 당한 이유로는 "형식주의자"라는 죄목이었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메이예르홀트가 아내 지나이다 라이크의 조언으로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와 어울린게 화근이라고 생각한다.

5개의 댓글

2023.05.21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만한 사람이구나

0
2023.05.21

간만에 왈츠 2번이나 듣고와야지

0
2023.05.21

쇼스타코비치는 주변사람 죄다 숙청되고 스탈린에게 찍히기까지했는데도 숙청 안된게 신기함

0
[삭제 되었습니다]
2023.05.23
@펠릭스제르진스키

근데 임마 좀 똘갱이임. 보병한테도 자국산 제식소총 보급못해주는 막장 소련 상태에서 어마무시한 전차랑 비행기를 내놓으라고 하니 내가 스탈린이어도 이놈은 숙청각임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14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3 FishAndMaps 3 1 일 전
1213 [역사] 인류의 기원 (3) 3 식별불해 6 4 일 전
1212 [역사]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ver2 19 FishAndMaps 15 10 일 전
1211 [역사] 군사첩보 실패의 교과서-욤 키푸르(完) 1 綠象 1 11 일 전
1210 [역사] 아편 전쟁 실제 후기의 후기 3 carrera 13 13 일 전
1209 [역사] 왜 사형수의 인권을 보장해야만 하는가 72 골방철학가 62 24 일 전
1208 [역사] 세계역사상 환경적으로 제일 해를 끼친 전쟁행위 17 세기노비추적꾼 13 29 일 전
1207 [역사] 송파장과 가락시장 5 Alcaraz 9 2024.03.28
1206 [역사] 미국인의 시적인 중지 4 K1A1 17 2024.03.26
1205 [역사] 역사학자: 드래곤볼은 일본 제국주의사관 만화 17 세기노비추적꾼 13 2024.03.23
1204 [역사] 애니메이션 지도로 보는 고려거란전쟁 6 FishAndMaps 6 2024.03.13
1203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3 FishAndMaps 4 2024.03.08
1202 [역사] 지도로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동안의 기록 9 FishAndMaps 12 2024.03.06
1201 [역사] [2차 고당전쟁] 9. 연개소문 최대의 승첩 (完) 3 bebackin 5 2024.03.01
1200 [역사] [2차 고당전쟁] 8. 태산봉선(泰山封禪) 3 bebackin 4 2024.02.29
1199 [역사]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이야기 3 에벰베 6 2024.02.28
1198 [역사] [2차 고당전쟁] 7. 선택과 집중 bebackin 4 2024.02.28
1197 [역사] [2차 고당전쟁] 6. 고구려의 ‘이일대로’ 2 bebackin 4 2024.02.27
1196 [역사] [2차 고당전쟁] 5. 예고된 변곡점 1 bebackin 3 2024.02.26
1195 [역사] [2차 고당전쟁] 4. 침공군의 진격 1 bebackin 3 2024.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