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빌라도의 자유-101 경찰 예비 대대의 Judenjagd(유대인사냥) - 3

사냥(Jagd) 下

 

1941년 10월 15일

 

나치 독일 폴란드 총독부의 총독 한스 프랑크는 게토 밖에서 체포된 폴란드인은 특별 법정에서 재판 후 사형을 받을 것이라 공포했다. 이는 게토 안 유대인이 식량을 구하러 밖으로 나가면 게토 안의 티푸스 등 전염병이 밖으로 확산될 우려 하에 내려진 법령이었다. 바르샤바 구역 보건국장 람브레히트 박사Arnold Lambrecht는 "아사의 두려움보다 교수형에 처해질 두려움이 더 크다."는 논지로 유대인 게토 이탈을 금지를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전쟁으로 가뜩이나 물자나 인력, 시간이 부족한 가운데 재판과정은 번거롭기만 하고 호송 및 경비 인력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히 나왔다. 그냥 모든 법적 절차를 생략하고 게토 밖의 유대인은 모조리 사살하는 것으로 말이다.

 

루블린에서는 한스 프랑크의 조치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101 경찰 예비 대대 이전의 306 경찰 대대가 이따금 마을 외곽의 유대인을 사살 하기는 했어도 체계적이진 않았다. 1942년 9월에서 10월 루블린 북부의 작은 도시와 마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중간 게토의 미엥지제치와 우쿠프로 보내졌다. 이때쯤 되어 유대인에 대한 추적은 더 체계적으로 변했다.

 

10월부터는 명령이 철저하게 집행되기 시작하였다. 게토로 들어가지 않는 유대인들은 모두 사살될 거란 현수막이 곳곳에서 휘날렸으며, 공식명령인 "사살명령"은 경찰들이 순찰을 나갈 때 마다 반복해서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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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 숨은 유대인들을 사살하기 위해 이동 중인 독일 질서 경찰Orpo들

 

대대는 최종 해결의 이 단계를 비공식적으로 유대인 사냥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많은 유대인들이 숲 속에 숨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근접전 대형으로 숲을 수색했으나 유대인들이 잘 숨어 있어서인지 한 명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구역을 나누어 다시 한 번 숲을 샅샅이 수색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땅바닥에 가느다란 환기 파이프가 몇 개 꽂혀 있는 것을 발견 했다. .... 숨어 있던 유대인들이 곧 체포되었다. .... 유대인들은 얼굴을 땅 쪽을 향한 채 엎드려야 했고, 경부 사격neck shot으로 사살되었다. 누가 사살조에 속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옆에 서 있던 대원들이 그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령이나 성별과 무관하게 유대인 약 50명이 모두 사살되었다. 그곳에 전 가족이 함께 숨어 있었다. .... 사살은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사살 현장 바로 근처에 파르체프 폴란드인들이 몇 명 서있지만 봉쇄 조치는 전혀 없었다. 사살 집행 후 아마 호프만(3중대장)이 이 폴란드인들에게 반 쯤 완성된 지하 땅굴 한 곳에 시체를 매장하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3중대원 게오르크 레플러의 증언

 

 

유대인 사냥의 가장 극적인 시즌은 1942년 가을과 1943년 봄에 진행되었다. 1942년 가을 대대는 20~50명으로 이뤄진 유대인 그룹들을 학살했는데, 그들의 회상으로 약 500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1943년 봄엔 경찰 예비 대대는 42년 가을과 다른 상황에 직면했다. 살아남은 소수의 유대인과 폴란드 게릴라, 그리고 도주한 소련군 포로들이 규합했다. 101 경찰 예비 대대는 이들과 무장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 트라프의 부관 하겐 중위가 아군 오사로 불운하게 사망했다. 100~120명의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들이 이때 사살되었다.

 

우리는 대농장과 유대인 숙소가 차로 금방 갈 수 있는 곳일 경우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농장에 갔으며 도착 즉시 경찰들이 뛰어내려 바로 유대인 숙소를 덮쳤다. 숙소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끌려 나와 농장에 있던 짚 더미, 감자 저장용 구덩이나 퇴비 더미 옆에서 사살되었다. 희생자들은 늘 거의 벌거벗은 채 바닥에 엎드려 경부 사격으로 사살되었다.

3중대장 운전병 알프레트 슈페어리히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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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사냥을 하러 나선 독일 치안 경찰의 모습

 

유대인 사냥은 비단 숲에서의 유대인 사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독일의 폴란드 점령 후 살아남은 다수의 유대인들은 독일 정부 몰수 하의 자체 조직으로 운영된 농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야블론Jablon 농장의 경우 대대는 이들을 트럭으로 싣고 숲으로 가 모두 살해했다. 통보를 전혀 받지 못한 독일인 농장 관리인이 항의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반면, 푸와비Puławy 부근 판비츠Pannwitz 농장에서는 식량을 얻기 위해 숲에서 은신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몰래 농장으로 들어왔다. 농장 측에선 유대인들이 늘어난 것을 알고 3중대 호프만 대위에게 연락했고, 호프만 대위는 늘어난 만큼의 유대인을 경찰들을 보내 살해했다.

 

호프만 대위가 병원에 입원(자세한 것은 후술)하자 후임자 메스만 중위는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푸와비 반경 50~60Km의 소규모 유대인 그룹까지 체계적으로 찾아내서 사살했다. 그들은 교묘하게 차가 눈에 띄는 지역일 경우 도보로 이동하여 습격하였다. 유대인들이 미리 알고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방식으로 경찰 예상보다 많은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나는 어느 날 아침 남편과 함께 숙소 정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소대의 한 대원이 오더니 뻣뻣한 태도로 "소위님, 저는 아직 아침을 먹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남편이 그를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한 술 더 떠 "저는 아직 유대인을 한 명도 죽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도 철면피 같은 말에 기가 막혀 나는 화를 내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형편없는 놈"이라고 거칠게 쏘아 댔다. 남편은 그를 돌아가게 하고는 나를 질책하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자기가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101 경찰 예비 대대 간부 부인의 증언

 

경찰들은 이런 수색이 하도 빈번하게 이뤄지다 보니 유대인 사냥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그것(유대인 사냥)은 매일 먹는 빵과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다른 경찰도 유대인 사냥과 관련하여 "매일 먹는 빵"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유대인 사냥은 대대원의 주된 임무였고 게릴라 소탕 보다 수색이 훨씬 많았다. 대원들은 수색조장의 복장과 행동으로 임무가 게릴라 소탕인지 아니면 유대인 사냥인지 판단 할 수 있었다.

 

유제푸프 학살 몇 달 후 많은 대원들은 점차 무감각하고 냉담한 그리고 어떤 경우는 살인 중독에 빠진 학살자로 변모했다. 소수의 인원들 만이 다수의 대원들로부터 겁쟁이인 것을 감내하던가 아니면 그들 만의 방식으로 학살의 순간에서 빠져 나갔다. 사살의 예민함은 점점 무뎌져 갔다. 한 경찰은 훗날 회고에서 점심 시간에 대원들이 유대인 학살 가지고 하는 농담을 통해 그들이 방금 전에 유대인을 사살 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근데 그 대원이 경악한 것은 한 대원이 '우리는 학살된 유대인의 뇌를 먹고 있다.'라고 농담을 했다. 이 살벌한 농담에 정색한 대원은 본인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통상적인 절차대로 이뤄진 사살(=학살)에 대대 간부들은 지원자를 찾기가 어렵지 않다고 회고했다. 그냥 누가 자원할 것인지 묻기만 하면 되었다.

 

유대인 사냥은 기존의 다른 학살들과 다르게 오랜 기간 동안 집요하고 무정하게 지속되었다. 다른 학살들과 다르게 학살의 경우 학살당하는 유대인 개개인과 대면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최후의 유대인까지도 학살하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과 의도가 드러난 실존적인 조건이 이런 학살을 오랫동안 지탱하게 해주었다.

 

마지막 집단 학살 "추수감사절 작전 Aktion Erntef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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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빌헬름 크뤼거Fridrich-Wilhelm Krüger의 모습

 

1942년 10월 28일 총독령의 친위대, 경찰 고위 지도자인 빌헬름 크뤼거Wilhelm Krüger는 루블린 구역의 유대인 게토 8군데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게토 중 4곳은 101 경찰 예비 대대 담당 구역 안에 있었다. 하지만 가을 강제 이송 후 실제 남은 게토는 우쿠프와 미엥지제치 2곳 만 남았으며, 그외 루블린의 다른 지역에 피아스키, 이즈비차, 브워다바 게토가 남아 있었다. 한편 강제 이송 시기 숲으로 도망간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게토로 돌아왔다. 혹독한 겨울 추위는 생존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식량은 부족하고 땔감을 구할 수도 없으며, 쌓인 눈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겨 추적의 여지를 남겨 주었다. 차라리 게토 밖에서 사냥을 당하느니 생존을 허용한 게토로 돌아가는 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 이었다.

 

지난 4개월(늦겨울~봄)은 평온히 지나갔다. 물론 이 시기에도 우쿠프 게토 관리소장인 요제프 뷔르거가 유대인 500~600명을 처형했고, 1942년 12월 30일 브러시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유대인 500명이 트라브니키 절멸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다음날은 제야 분위기로 술 취한 채로 흥분한 보안경찰들이 동료 보안 경찰들에게 쫓겨나가기 전까지 미엥지제치에서 장난삼아 유대인을 사살했다.

 

1943년 5월 1일 지난 42년 가을에 수많은 유대인들을 강제 이송 시켰던 2중대가 미엥지제치 게토를 포위했다. 5차 작전이란 이름 하에 최소 추산치 700명(이것도 당시 경찰 대대원의 어림짐작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은 그나데가 설치한 천막에서 철저한 몸수색을 당한 후 화물차에 실려 수용소로 갔다. 화물차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빽빽히 실린 유대인들은 일부는 마이다네크 수용소로 갔지만 대부분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가스실로 갔다. 5월 26일 6차 작전으로 1,000명의 유대인들이 마이다네크 수용소로 갔고, 1943년 마지막 7차 작전 당시 170명의 유대인들이 사살되었다. 이 때 적잖은 유대인들이 최후를 눈치채고 도주했다.

 

추수감사절 작전으로 루블린에서 유대인 42,000명이 학살되었다. 키예프 인근의 바비야르 학살(33,000명)을 능가하는 수치였다. 그것을 능가하는 학살은 1941년 10월 오데사 유대인을 5만 명 이상 집단 학살한 루마니아의 사례 밖에 없었다.

 

이런 무자비한 학살에 영향력 있는 기업가들과 군 장교들은 힘러에게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유대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힘러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친위대의 수장 힘러는 이런 항의를 단지 공연한 트집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가 생존을 허락한 유대인은 수용소와 게토의 일부 유대인들이었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동의하면서도 힘러는 총통의 뜻에 따라 수용소와 소수의 게토 유대인들도 언젠가는 청소해야 할 존재라는 것이라 마음 먹었다.

 

루블린에서 생존을 허가받은 유대인들은 오딜로 글로보츠니크 노동수용소의 유대인 45,000명 이었다.

 

한편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노동력을 제공하면 생존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자기들을 학살하는 것 만큼 비합리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노동을 통한 구원"이란 것에 집착하며 제3제국에 굴복했지만, 조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학살에 그들도 제3제국이 엄청 비이성적인 존재 임을 깨닫고 바르샤바, 비아위스토크 게토 등에서 저항했다.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같은 수용소에서도 체계적인 조직하에 독일군에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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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작전을 최종 지휘한 야코프 슈포렌베르크, 그는 전후 이 작전을 실행한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힘러는 천천히 수용소를 소각하는 것이 어렵고, 또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루블린의 수용소는 일시에 소멸시켜야 했다. 글로보츠니크의 후임인 야코프 슈포렌베르크Jakob Sporrenberg는 크라쿠프에서 상관 빌헬름 크뤼거와 협의 하에 다양한 지시를 내렸고, 마이다네크, 트라브니키, 포니아토바 수용소 근처에 수용자들을 동원하여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구덩이의 크기는 지그재그 모양으로 깊이 3m, 폭 1.5~3m 수준으로 파헤쳤고, 공습을 대비하기 위한 대피소란 그럴듯한 이름으로 수용자들을 속였다.

 

1943년 11월 2일 경찰 예비 대대 대원들은 다수가 마이다네크 수용소 경비를 맡았다. 그들 옆으로 루블린 전역의 유대인들의 끝없는 행렬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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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이같은 방식으로 처형 당했다.

 

슈포렌베르크가 경비행기를 타고 학살 현장을 관찰했다. 희생자들은 구덩이 안에서 엎드린 상태로 보안대로 이뤄진 사살조가 그들을 사살했다. 사살조가 그들을 사살하면, 다른 보안대원들이 탄창을 교체해 주었고, 다음 유대인들은 죽은 동포들 위에서 엎드렸다. 트라브니키를 중심으로 소규모 수용소들의 유대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학살되었다. 포니아토바 수용소는 학살을 담당할 독일인 병력들이 없어서 전화선을 끊어 놓았고, 그래서 수용자들은 주변의 수용소들이 어떻게 학살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11월 4일 사전 경고를 듣지 못한 수용자들은 불시 기습이 이뤄진 가운데 학살되었다. 많은 대원들은 하도 이런 잔혹한 학살이 진행되니, 마이다네크와 포니아토바에서 일어난 학살을 단일한 작전으로 생각하며 기억했다. 몇몇 한 두명의 대원 만이 마이다네크와 포니아토바의 학살을 각각 구분지어 회상했다.

 

포니아토바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목뒤에 두 손을 깍지 낀 상태로 행군 한 후 구덩이에서 처형되었다.

 

나와 우리 조는 구덩이 바로 정면에서 경비 임무를 맡았다. 구덩인는 폭 3미터, 깊이 3~4미터 되는 커다란 지그재그형 참호들로 구성되었다. 나는 내가 서 있던 위치에서 (중략) 유대인들이 어떻게 맨 끝의 막사에서 옷을 벗도록 강요 받고 모든 귀중품을 압수 당하는지, 그러고 나서 우리가 형성한 인간 울타리를 지나 경사진 입구를 거쳐 참호로 밀려 들어 가는지 목격할 수 있었다.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 있던 보안대 대원들에 의해 사살이 집행되는 지점으로 계속 몰린 유대인들은,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 있던 다른 보안대 대원들에 의해 자동 소총으로 사살되었다. (중략) 나는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이 앞서 사살된 희생자들의 시체 위에 엎드리고는 마찬가지로 자동 소총의 집중 사격으로 사살되는 것을 보았다. 이때 보안대원들은 사살된 유대인들의 시체가 층층이 쌓여서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이 3미터 높이까지는 그 시체 위에 엎드릴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중략)

이 작전 전체는 내 평생 보았던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집중 사격을 받았음에도 죽지 않고 부상을 당한 유대인들이 이른바 확인 사살 없이 사망한 희생자들과 함께 산 채로 묻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부상자들이 시체 더미 속에서 친위대 대원들을 저주했던 것을 기억한다.

마르틴 데트몰트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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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작전 당시 루블린에서 마이다네크 수용소 방면으로 찍은 사진

 

학살된 시체는 소각되었다. 루블린 전 시내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이 타면서 낸 냄새가 진동을 했다. 101 경찰 대대원들은 시체가 구덩이에서 꺼내고 유대인 수용자들을 동원하여 시신을 마차에 싣고 소각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부패한 시체의 냄새와 몰골에 일부 대원들은 구토를 하기도 했다. 3중대 신임 중대장은 그런 끔찍한 일이 있던 것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신임 중대장 하슬라흐(이 사람 이름도 가명이다.)는 친위대의 협조 하에 가로 4미터 세로 8미터의 소각로를 직접 목격했다. 이미 모든 소각은 다 끝난 상태였다. 이런 끔찍한 상태에서 조차도 상당수의 101 경찰 예비 대대원들은 이 학살에서 데트몰트 만큼의 충격과 인상을 받지 못했다. 루블린 전역은 실제로도 유대인이 없는 지역이 되었다. 101 대대는 최소 38,000명의 유대인을 직접 학살하고, 최소 45,000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안내 했다. 경비대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학살 당한 이는 최소 83,000명 이었다.

 

이 학살을 마지막으로 대대가 수행한 학살극은 일단락 되었다.

2개의 댓글

유대인 차별 안하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다면 학살당할뻔했던 유대인들을 독일군으로 편입시키고 학살에 들어갔엇을 탄약 무기 등을 이용해 소련 정벅이 가능햇을까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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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2

아흐 이시대 이야기는 어디든 광기 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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