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빌라도의 자유-101 경찰 예비 대대의 Judenjagd(유대인사냥) - 2

만약 학살 집행자들이 모두 미친 사람들이었다고 입증할 수 있다면 차라리 한결 안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라울 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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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Reserve_Police_Battalion_101#Commanders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 Wikipedia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 Wikipedia

en.wikipedia.org

 

, 출처↑(1942년 6월 기준) * 여담으로 원전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저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다수의 인물이 가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명은 부대장과 그 밑의 휘하 중대장만 실명으로 기재됨.(공식기록으로 중대장 급까지 기록이 남아서 그리고 율리우스 볼라우프는 2판 발행 후에도 살아 있었음(1913~2002)) 추가적으로 하르트비크가 아닌 하르트비히 그나데가 정확함.

 

워마지

 

루블린 지역 경찰 대대는 유제푸프 학살 전에 이미 루블린 구역으로의 이동 명령을 받았다. 101 경찰 예비대대는 푸와비, 라진(Radzyn), 비아와포들라스카(Biala Podlaska) 등의 북쪽 지역에 할당 되었다. 비아와포들라스카에선 이미 6월부터 3,000명의 유대인이 소비보르로 이송되었고, 작은 촌락들에서 끌려온 수백명의 유대인이 비아와와 비슈니체 사이의 워마지로 끌려왔다. 이들은 트라브니키 부대와 공동으로 임무 수행할 목표로 할당 되었다. 트라브니키 대원들이 사살조로 그리고 대대 2중대원들은 집결 임무를 맡았다. 지난 임무로 충격받은 병력들이 다시 또 심리적 충격을 받는 것을 막고자 한 조치였다.

 

8월 16일 작전 전날, 워마지의 하인리히 베케마이어 병장은 그나데 소위의 전화를 받았다. 그나데는 그에게 다음 날 아침 유대인 "이송"이 있을 것이며, 모든 부대원은 새벽 4시까지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고 통보했다. 베케마이어 병장은 이 통보가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같은 날 그나데 소위는 드루커 소위와 셰어 소위를 보안대 장교가 동석 한 가운데 친위대와 공동으로 함께할 작전에 대해서 설명했다. 작전은 간단했다. 모든 유대인의 사살

 

워마지에서 그나데 소위는 하사관들에게 말했다. 유대인 사살 임무는 트라브니키 보조 부대가 맡을 거고 부대는 평소처럼 유대인 집결 임무를 맡아도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유제푸프에서 보았듯이 이 임무의 진정한 의미는 끌고 갈 수 없는 노인, 어린이, 병자는 그 자리에서 즉각 사살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번 작전에서도 어린이 대부분이 집결장소에 끌려왔다. 또한 고향 함부르크 출신의 유대인도 집결 과정에서 처형되었다. 강제 집결된 유대인들이 많아지자 학교 마당 옆 운동장까지 사용하였다. 사살까지 동원한 집결 임무는 2시간 만에 끝났다.

 

집결 장소에서 추려진 60~70명의 유대인은 트럭을 타고 숲으로 갔다. 몇몇은 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하고 일부는 저항하기도 했지만 금방 제압 되었다. 나머지 상당수의 유대인은 숲에서 커다란 구덩이를 파는데 동원되었다.

 

몇 시간에 걸친 구덩이 작업이 마치고, 보조경찰과 경찰들이 식사를 끝마치자(이들 보조 경찰과 경찰들은 식사와 더불어 술을 퍼마셨다. 그리고 부대의 장교와 하사관도 같이 술을 퍼마셨다.)

 

처음 200~300명의 유대인을 장장 1Km에 해당하는 거리를 무리 지어 끌고 갔는데, 뒤쳐지는 사람은 가차없이 사살했다. 근데, 이 방식이 너무 느리다고 판단되자 인근 폴란드 마을에서 밧줄을 모은 다음 유대인 무리 주변에 둘러 쳤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 밧줄을 들고 숲을 향해 행진했다.

 

이 행렬은 매우 둔하게 움직였다. 추측하건대 앞쪽이 빨리 행진하여 밧줄이 팽팽해지자 맨 뒤쪽에서는 커다란 무리가 좁은 장소에 한데 몰리게 되어 거의 발걸음을 제대로 옮길 틈조차 없어졌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은 넘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무리가 운동장을 이미 빠져나갔거나 거의 다 빠져나가려고 할 때 처음으로 넘어진 사람들은 밧줄에 매달린 채 끌려갔다. ..... 넘어지고 대열의 뒤에 남게 된 유대인들은 무자비하게 재촉 받았으며 사살되기도 했다. .... 첫 총성 뒤에도 변화가 없자 나는 이와 비슷하게 소리쳤던 것 같다. "이 무슨 어이없는 짓인가? 밧줄을 치워라!" 그러자 내 소리를 듣고 보조경찰을 포함한 전체 행렬이 멈추어 섰다. 나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너희들은 무장하고 있지 않은가? 밧줄을 치워!" ..... 내가 두 번째로 외치자 유대인들은 그제야 밧줄을 내려놓았다. 이제 전체 행렬이 정상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곧장 학교 마당으로 돌아갔다. 흥분도 되고 화도 나서 학교에 들어가 술을 들이켰다.

워마지 학살 당시 토니 벤트하임 병장의 증언

 

집결된 유대인은 모두 귀금속과 옷가지를 수거 당했다. 남자는 일부를 제외하고 속옷까지 모두 탈의 당했고, 여자들은 속옷만 간신히 입었다. 그나데 소위는 술을 퍼마신 상태로 광분하여 25~30명의 유대인 노인들을 구덩이 앞에서 기게 한 다음 몽둥이를 가져와 이들을 모조리 팼다.

 

유대인들은 탈의한 장소에서 구덩이까지 이동하게 했다. 구덩이 입구까지 오자마자 술 취하여 광분한 보조경찰들은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미 구덩이 입구까지 들어가기도 전에 유대인들의 시신이 쌓이기 시작했다. 뒷편에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이미 죽거나 죽어가고 있는 동포의 시신을 밟고 구덩이로 이동했다. 구덩이가 메워진 뒤에도 유대인의 행진과 학살은 줄을 이어 아예 구덩이 밖으로 유대인들의 시신이 넘칠 지경이었다. 지휘관 그나데는 술 취한채로 광분하여 권총으로 사격하고, 보조경찰들은 취기로 인해 넘어지면서 사격했다. 구덩이에서 솟아나온 지하수가 피에 물들어 50cm를 넘을 정도로 넘실거렸고, 아직 까지도 죽음의 행진을 이어가던 유대인들은 기어가면서 학살의 구덩이로 이동했다.

 

그나데 소위와 친위대 장교는 사격 문제로 서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나데는 하사관들을 불러 보조경찰과 같은 방식의 사격을 지시했지만 그들은 거부했다. 이미 50cm가 넘는 핏물로 시신이 쌓이는게 아니라 떠있을 정도였기에 하사관들은 사격 명령을 거부했다. 대신 그들은 구덩이 가장자리에 유대인이 엎드리면 반대편 언덕에 있는 사격조가 사격하는 방식으로 사격을 했다. 학살은 19시까지 진행되었다. 구덩이를 팠던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사살된 뒤에야 학살은 막을 내렸다.

 

그나데 소위 "자네는 몇 명이나 죽였나?"

토니 벤트하임 병장 "한 명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나데 소위 "그래, 뭐 달리 기대할 수 있겠나, 자네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가."

 

지난번 유제푸프와는 달리 이번 학살은 여러모로 다른 점이 있었다. 유제푸프의 유대인들이 순순히 학살을 받아들이며 살해당한 반면, 워마지는 탈출 시도가 많았다. 워마지에선 학살을 피해 숨은 유대인이 20~30명 적발되었다. 이들은 모두 목을 조준한 경부사살neck shot로 사살되었다. 숲에서 엎드린 채로 살해당한 유대인들과 다르게 더 적은 시간과 인력으로 더 많은 유대인(최소 1,700명)을 학살했다. 대부분의 학살을 술취한 보조 경찰이 수행했기에 경찰 부대원 들은 심리적 부담감이 덜해졌다. 다수의 부대원이 숲이나 거리 이곳저곳으로 도망친 유제푸프와 다르게 단 2명의 대원만이 학살을 거부하고 도망쳤다. 그 중 한 명은 바로 앞의 유대인이 도망치는 데도 그냥 지나가도록 조치했다.

 

이들은 겁쟁이라고 욕은 먹었지만, 부대에서 직접적으로 징계를 받은 적은 없다. 지휘관 트라프 소령은 학살 참여에 거부한 이들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떠한 강요나 징계를 먹인 적은 없었다.

 

강제 이송 열차

 

한편 101 경찰 예비 대대 2중대 3소대는 파르체프에 주둔하면서 유대인들을 친위대가 기다리고 있는 숲으로 인도하거나 유대인들을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맡았다. 파르체프는 게토가 없었지만, 대대가 주둔할 무렵에는 도로가에 유대인 묘비로 포장될 지경이었다. 대규모 강제 이송이 임박했단 소식에 일부 파르체프의 유대인은 도망쳤지만 다수의 사람은 남아있었다. 부대는 이들을 열차에 강제로 실었다. 경찰 예비 대대 인원들은 이들의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랐지만, 이들이 도착한 곳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파르체프의 유대인 이송보다 이들 101 경찰 예비 대대원에게 더 인상 깊은 것은 미엥지제치 16,000명을 트레블링카로 이송하는 일이었다. 지휘관 율리우스 볼라우프는 지휘관이지만 늦게 도착했는데, 임신 4개월차의 자기 아내를 강제 이송이 벌어지는 장소로 데려왔다.(똘기는 있지만 그렇다고 볼라우프가 무능한 것은 아니었다. 부하들과 밑의 소대장들도 볼라우프가 책임감 있고 성실하다고 인정했다.-최소한 알콜중독 사디스트인 그나데보다 훨씬 더)

 

병사들은 볼라우프 대위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데려 온 것에 충격을 먹었다. 볼라우프 대위는 자기가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권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도주자 및 노약자는 모조리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볼라우프 대위의 부인은 드레스 차림 이었기에 눈에 잘 띄었다. 그녀는 열차로 이송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우는 이 현장에 있었다. 거리는 볼라우프의 명령대로 사살당한 유대인의 시신으로 가득찼고, 수십대의 열차량에는 가축수송된 만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탑승해 있었다. 미엥지제치 게토 이송은 101 경찰 예비 대대가 수행한 최대 규모의 이송 작전 이었다. 11,000명의 유대인이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단 1,000명의 유대인이 게토에 계속 체류하는 것을 허가 받았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거리에 널부러진 유대인 시신이 960명 인 것을 확인했다.

 

비슷한 시기(7~9월) 강제 수용소로 유대인들은 30만 명 이었다, 그리고 이송 도중 살해당한 유대인은 6,687명 이었다. 101 경찰 예비 대대는 다른 어떤 부대보다 강제 이송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9월까지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다음 유대인 사냥(Jagd)를 위해서 말이다.

 

사냥(Jagd) 上

 

1942년 볼라우프 대위의 지휘 하에 1중대는 1940년 이미 독일 교포로 구성된 자위대selbstschutz에 학살당한 전적이 있는 세로코믈라Serokomla로 이동했다. 마을이 보이는 언덕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그들은 200~300명의 유대인을 끌어내렸다. 볼라우프는 통상적인 임무를 수행하라 지시했다. 이것이 학살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을 안 대원들은 200~300명의 유대인을 마을 근처의 자갈 채취장에서 학살 한다.

 

학살은 3시간 동안 이어졌고, 대원들은 학살을 명령한 볼라우프 대위가 사라진 것에 불만을 갖는다. 이들은 임무 종료 후 술을 배급 받는다.

 

세로코믈라 학살 3일 후 1중대 욥스트 병장이 탈친 근처의 폴란드 게릴라를 체포하고 돌아오던 도중 폴란드 게릴라에게 역으로 습격받아 죽게 된다. 살아남은 폴란드인 협력자가 그 사실을 말하자 모두 분개하여 탈친으로 이동한다. 라진에 있는 트라프 소령은 루블린에서의 명령이라는 말로 폴란드인 200명을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탈친의 폴란드인 시장의 선별하에 78명의 폴란드인이 끌려나와 처형된다. 이들은 전쟁으로 잠시 탈친에 잠시 머문 피난민과 빈민들이었다. 근데 200명을 죽여야 하는데 아직도 122명의 폴란드 인을 처형해야 하는데 만약 이들을 무리해서 처형한다면 탈친의 폴란드인과의 협력이 큰 지장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트라프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탈친 주변 코츠크 게토의 유대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한다.

 

약 180명의 유대인이 욥스트 병장 살해의 보복으로 처형되었다. 폴란드인 깡패(101 경찰 예비 대대원들 주장으로) 3명, 폴란드인 78명, 유대인 180명 도합 261명의 사람이 보복으로 처형당했다. 처음 유제푸프에서 민간인 처형에 거부감을 느끼던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소대장 부흐만 소위는 이런 학살 행위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반발했다. 그는 자신에게 직접 내려온 명령이 아니면 수행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절대 이 학살 행위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 앞에서 유대인 처형에 대한 불만과 동시에 독일 본토로의 전출을 요청했다. 트라프 소령은 그의 요청을 즉각 받아들이진 않아도 최소한 학살의 현장에 있는 것은 면하게 해주었다. 트라프의 행위에 대해 동조하는 병사들도 있었고, 트라프의 행위에 비겁하다고 경멸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부흐만 소위 처럼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트라프는 학살 거부자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었다.

 

10월엔 라진, 우쿠프, 미엥지제치에서 추가로 수천명의 사람들을 트레블링카로 이송되었다. 그 와중에 이송이 불가능한 사람은 사살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11월 우쿠프에서 3,000~4,000명의 사람들을 트레블링카로 이송된다는 말이 들리자, 우쿠프 게토에 있는 유대인들은 끈질기게 숨으며 저항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트레블링카로 이송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노래를 불르면서 행진하고는 했다. 이 때 우쿠프에서 최소 29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는데, 이때 만큼은 부흐만도 학살의 압박에서 회피할 수 없었다. 이때 특이한 점으로 베를린 경찰 위문 공연단이 유대인 학살에 대해 듣고는 자신들도 동참하게 해당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그 요청은 즉각 수락되었다. 이들도 경찰 예비 대대의 총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부흐만은 학살 당시 유대인 학살을 거부(어린아이들이 학살 현장에 있었다.)한 최소 4명의 대원들의 요청을 들었고,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그들의 학살 현장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부흐만은 우쿠프에서의 또다른 학살이 있을 당시에는 함부르크로의 재배치 요구가 받아 들어져 방공부대 장교로 있다가 1943년 1월에서 8월까지 함부르크 경찰청장 부관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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