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북괴는 군사적 도발에 대해 지금껏 몇 번이나 사과 했을까?

 

 

1953년 7월 27일, 공식적으로 휴전 협정이 체결된 남북간의 위기 국면을 안정화하기 위해 유엔군 사령부 산하 군사정전위원회(Military Armistice Commission)이 설치되었다. 군사정전위원회는 북측이 정전협정 백지화를 주장 한 이후 1994년 4월 28일 일방적으로 위원들을 철수시키면서 더 이상 개최되지 않고 있다.

 

정전 이후 2023년 2월 현재까지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횟수는 비공개 자료이기에 확인이 제한된다. 하지만 관련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1999년 기준 유엔사령부 측의 집계에 따르면, 1953년 7월부터 1999년 6월까지 남한의 협정 위반 사례는 16건에 불과한 반면 북한은 총 430,822건이나 위반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북한이 실질적으로 협정 위반을 인장한 사례는 단 3차례에 불과했다. 오히려 북한은 유엔사령부 측이 835,838건이나 위반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당 사항은 아래 표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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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인 협정 위반 건수만 해도 이정도이며 여기에 북한의 실질적 군사적 도발을 따로 놓고 봐도 그 횟수가 적지 않다. 국방부가 편찬한 2020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 침투 및 국지도발 횟수는 2020년 11월 기준 총 3,120회에 달했다. 단순 건수만 놓고 봐도 북한은 일방적으로 협정을 준수하지 않는 행태로 보여왔고 지난 7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차례 한국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해 왔다. 그렇다고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진 도발에 대해서도 북한은 철저히 무시로 일관하거나 남한 측의 조작 행위라는 주장으로 대응해왔다. 뉴스 기사에서 북한이 유감 표명을 한 것을 본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조차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북한의 태도는 후안무치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저 많은 협정 위반과 군사적 도발 중 실질적으로 사과와 유감을 표명한 것은 지금껏 몇 번일까? 

농담 같겠지만 두 손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적었다. 하나씩 알아보자.

 

 

 

1. 1.21 사태(청와대 습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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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 서울 홍제동에서 생포된 김신조 

 

 

1968년 1월 21일 10시경,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 제 124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미군 제 2사단 경계구역으로 침투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으며, 이들의 임무는 청와대 관저 폭파, 요인암살, 교도소 습격 등 남한 사회 정국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국은 즉각 6군단을 주축으로 군경 합동작전을 실시했고 생포 1명, 도주 2명을 제외하고 총 28명을 사살했다.

 

공비 소탕 간 군경 35명이 교전 중 전사했고 민간인 7명이 사망했다. 작전 간 발생한 부상자는 52명에 이른다.

 

심지어 이 사건과 더불어 이틀 뒤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루함이 납북되며 남북 관계는 연일 최악으로 치닫았다. 유엔사령부는 제 261차 군사정전위원회 회담 간 1.21 사태와 푸에블루호 납북을 강력히 규탄하였으나 북한은 오히려 남한은 휴전 당사자가 아니기에 회담 논제가 아니라는 억측으로 일관했다.

 

이후 4년 뒤인 1972년 5월 24일, 김일성은 북한에 방문한 대통령 특사에게 다음과 같이 구두로 유감을 표명한다.

 

 

"그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사건이었다. 사건은 전적으로 우리 내부의 극좌 모험주의자들이 한 것이지, 나의 의도나 당의 의도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2.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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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8월 18일, 미루나무 제거 작업 간 급습하는 북한 측 경비 병력

 

 

1967년 8월 18일 10시 45분, 판문점 제 3경비초소 일대에서 미루나무를 제거하던 노무자와 한미 군 병력을 상대로 북한 측 경비 병력 30여명이 곡괭이와 도끼로 습격하여 미군 장교 2명이 살해 당하고 한국군 5명, 미군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연합사령부는 즉각 데프콘 3단계를 발령했고 전군이 전투 준비 태세에 돌입했다. 사건 발생 3일 뒤인 8월 21일 미군은 7함대를 포함한 대규모 전력을 동원해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 버니언 작전에 들어갔다. 한국군 측은 폴 버니언 작전 간 사전 협의되지 않은 1공수여단 병력 64명을 투입해 북한군 GP를 습격하며 남과 북이 사실상 전면전을 목전에 둔 상황까지 전개되었다.

 

김일성은 해당 사건이 미군이 일으킨 계획적 도발이며 북한 병사들이 미군의 도발 혹은 정치적 음모에 걸려들었다고 강변했지만, 결국 북한은 폴 버니언 작전 실시 당일 비공개 군사정전위원회을 요청하고 회담간 북한 측 수석대표를 통해 편지 형태의 사과문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전달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난 사고는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그와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귀측에 도발행위의 중단을 촉 구하는 바입니다. 우리 측은 결코 먼저 도발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도발행위가 일어났을 때에만 자기방어적 조치를 위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3.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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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1월 5일, 인제군 북면에서 최후의 무장공비 2명을 사살한 3공수여단 소속 장선용 원사(당시 상사)의 모습

 

 

1996년 9월 18일, 북한군 특수요원을 태운 상어급 잠수함이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인근 해안에 좌초되었다. 당시 잠수함에 탑승한 북한 인민무력부 예하 정찰국 해상처 22전대 소속 특수요원들은 즉시 육상침투를 강행했고 무려 49일간 군경을 따돌리며 게릴라 임무를 수행했다. 정부는 강원도 전역에 통합방위태세인 '을종사태'를 선포했고 합참은 특전사 3공수여단 2개 대대를 1군 사령부에 작전통제하며 대규모 대침투작전을 개시했다.

 

대침투작전 간 북한군의 특이동향 대비와 전면전 우려로 전방을 비워둘 수 없어 차단작전 부대가 유기적으로 투입, 교대가 이뤄졌음에도 일일 전투병력은 4만 2천명이었으며, 작전기간 전체를 통틀어 총 150만명이 투입된 대규모 작전이었다. 49일간의 작전을 끝으로 군경과 민간인을 포함 총 17명이 전사하거나 사망했고(군인 11, 예비군 1, 경찰 1, 민간인 4) 27명의 전투 부상자가 발생했다. 민간 추산 재산 피해는 약 2천억원에 달한다. 

 

북한은 사건 발생 5일 뒤 9월 23일 인민무력부 담화를 통해 “훈련 중 기관 고장을 일으켜 표류하다 좌초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도리어 사살된 북한군 특수요원들의 시신과 좌초된 잠수함을 본국으로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그 해 11월 18일에도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다시 한번 표명되었다. 북한의 반응에 대해 한국 측은 대북 경제협력 동결과 4자 회담 거부라는 강경적인 스탠스로 맞섰다.

 

사건 발생 102일 뒤인 12월 29일이 되어서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강릉 무장공비 사건에 대해 최초로 공개적인 유감 표명을 전달했다.

 

위임에 의하여 막심한 인명피해를 초래한 1996년 9월 남조선 강릉 해상에서의 잠수함 사건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조선반도에서의 공고한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유관 측들과 함께 힘쓸 것이다.

 

 

 

 

 

4. 서해 교전(제 2차 연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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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21일, 해저에서 인양되는 참수리 고속정 357호정의 모습

 

 

2002년 6월 29일 오전 9시 45분, 북한 측 경비정 684호와 388호가 돌연 NLL 이남으로 침범했다. 당시 해역에 있던 2함대 소속 참수리 고속정 4대가 차단기동을 실시했다. 그 중 357호정이 가까이 접근할 무렵 북한의 684호정이 선제 사격을 가했고 이내 양측이 포격전에 돌입했다. 양측 교전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에 357호정을 제외한 나머지 아 해군 함정들이 지원사격을 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북 측 경비정은 함포와 기관포, 뿐만 아니라 7호 발사관과 저격보총(당시 북괴 해군은 함정에 해상저격여단 병력을 일부 태웠었다.)까지 가용한 모든 화력을 동원해 357호정만 공격했다. 

 

불과 20여분간 이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북측 684호정은 승조원 다수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북한측 함정의 예인을 통해 NLL에서 퇴각했다. 그러나 357호정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결국 침몰했다. 이 교전으로 함장을 포함해 한국군 6명이 전사했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북한은 1996년 발생했던 제 1차 연평해전 당시 주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6월 29일 교전 당일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서해 교전이 '엄중한 군사적 도발'이며 '남조선 군부의 계획적인 군사도발'이라고 주장했다. 북한해군의 선제공격이 정당방위였으며 NLL은 비합법적이라 억측도 펼쳤다. 이후 교전 발생 26일이 지나서야 북한은 남북장관급 회담 김영성 수석 대표의 명의로 한국 외교부장관에게 전화 통지문을 전달했다.

 

 

전화통지문의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통일부는 북측이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무력충돌'에 유감을 표하며 재발 방지 노력을 기울이자는 내용을 전달한 것으로 밝혔다.

 

 

 

 

 

5. 연평도 포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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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3일, 해상사격훈련 간 잠시 정비하던 포7중대 4포상이 최초로 북한군 포탄에 피격되는 순간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북한군이 개머리에 배치된 방사포와 무도에 배치된 해안포로 연평도에 무차별 포격을 실시했다. 단 10분에 걸쳐 북한군은 150여발을 발사했고 이중 60여발이 연평부대와 민가지역에 착탄했다. 연평부대 포7중대(K-9 자주포 1개 포대)는 즉각 반격에 나섰고 무도 해안포 진지에 50발 대응 사격을 실시했다. 해병대가 반격하는 동안 북한군도 2차 타격을 가했고 연평부대 지휘소와 레이더 기지 일대에 대해 다시 20여발 포격을 가했다. 해병대는 마지막으로 적에 대한 30발의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포7중대는 당시 정례적 해상사격 훈련을 실시 중이었기에 적재 탄약이 거진 소모된 상태에서 반격에 임해 해병대원들이 직접 탄약고에서 탄을 날라 수동 장전을 해야했다. 또한 대포병레이더가 고장난 상태에서 대포병 사격에 임해 교전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당시 교전 간 북한군 측 피해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총 1시간 넘게 이어진 교전으로 해병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민간인은 2명이 사망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건물 133동이 파손되었다. 

 

한국은 군 뿐만 아니라 민간인 주거 지역까지 무차별적으로 포격한 북한에 강력히 요구하며 북한의 무력도발행위 규탄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교전 이후로도 한동안 영해 보호를 위한 자위적 조치였으며, 해당 사건의 책임은 남조선에 의해 발생한 '악랄한 동족대결과 전쟁책동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항변했다. 이와 동시에 북한은 11월 27일 조선중앙통신 통해 모순적인 유감 표명을 남겼다.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 사실이라면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 책임은 이번 도발을 준비하면서 포진지 주변 군사시설 안에 민간인들을 배치하여 ‘인간방패’를 형성한 적들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있다."

 

 

 

 

 

6. 목함지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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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4일, MDL 기준 남 440m, 한국군 GP 기준 북 2km 지점 추진철책 통문에서 발생한 목함지뢰 1차 폭발 모습

 

 

2015년 8월 4일 오전 7시 35분, 경기도 파주 DMZ 인근 GP 추진철책 통문 하단에서 목함지뢰가 폭발했다. 폭발은 당시 현장에 있던 1보병사단 수색대대 1개팀 8명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통문을 통과하던 중 발생했다. 뒤이어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해 이동한 수색대원 한명이 목함지뢰를 밟으며 2차 폭발이 발생했다. 이 당시 목함지뢰는 GP 추진철책 통문하단 북측 40cm지점(1차 폭발, 목함지뢰 2발 매설 추정)과 남측25cm지점(2차 폭발, 목함지뢰 1발 매설 추정)에 매설되어 있던 상태였다. 사건 발생 5분 뒤 부상자들은 신속히 아측 GP로 옮겨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두 차례의 폭발로 인해 한국군 2명이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사건 발생 6일 뒤, 한국군은 사건조사를 통해 조사를 거쳐 8월 10일 해당 사건은 북한이 매설한 목함지뢰가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군은 북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함과 동시에 당일 오전 6년 간 중단되었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북한은 8월 14일 국방위원회 정책국 담화를 통해 지뢰매설을 전면 부인하고 해당 사건을 남한의 자작극이라며 날선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는 ‘천안함 사건의 신통한 복사판’이라는 발언까지 쏟아냈다.

 

당시 북한 측의 주장과 합조단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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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21일이 지난 8월 25일, 북한은 조선중앙통신과 로동신문을 통해 유감을 표명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폭발로 남측 군인이 부상을 당한데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마치며

 

 

단순히 개인 대 개인의 마찰이나 분쟁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따금 사과를 표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하물며 국가 대 국가라면 국민 전체를 대변한 국가적 자존심과 존엄이 걸린 문제로 그 무게는 결코 가벼울 수 없다. 그렇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사과와 유감을 표하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껏 수 많은 군사적 도발을 시도하면서 단 한번도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에 노력한 적이 없었다. 사건 규명에 대해 북한은 적극적인 자세로 협조에 임한 적이 아예 없었다. 

 

심지어 도발의 주체가 북한군이었음에도 모든 의혹 제기와 사과 요구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거나 조건반사적으로 남한 측의 자작극을 주장하며 회피했다. 그나마도 내놓은 입장문 또한 도발의 소행이 명확히 밝혀지거나 적잖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지못해 '유감'을 표명하는데 그쳤다. 이조차도 대부분은 한국 측의 과실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빼놓지 않았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은 북한을 상대로 때로는 강경하게, 때로는 온건하게 대응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북한은 번번히 한국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며 모든 책임을 부정해왔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리는 애초에 대화가 불가능한 적을 상대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걸까?

 

서독 총리 시절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던 와중에도 나토 이중결정(Double-Track Decision)을 이끌고 동독의 게라 요구(Geraer Forderungen)를 단호히 거절했던 헬무트 슈미트의 말에서 어쩌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타협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니, 타협할 능력이 없는 자는 민주주의와 함께할 수 없다.”

 

 

 

 

 

<참고자료>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1220039001

 

https://m.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091014160117A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135844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50825000048

 

https://www.ytn.co.kr/_ln/0101_201011272247457439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19961106004002

 

https://www.yna.co.kr/view/AKR20150809037700043

 

https://www.yna.co.kr/view/AKR20150814067600043

 

https://www.korea.kr/news/issueQAView.do?newsId=148702433#issueQA

 

https://nkinfo.unikorea.go.kr/nkp/term/viewKnwldgDicary.do?pageIndex=1&dicaryId=192&searchCnd=0&searchWrd=

 

https://nkinfo.unikorea.go.kr/nkp/term/viewKnwldgDicary.do?pageIndex=13&dicaryId=67&searchCnd=0&searchWrd=

 

https://nkinfo.unikorea.go.kr/nkp/term/viewKnwldgDicary.do?pageIndex=1&dicaryId=225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6320&pageFlag=&sitePage=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9721&sitePage=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10260&sitePage=1-2-3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6326&sitePage=

 

https://www.kinu.or.kr/brd/board/634/L/menu/371?brdType=R&thisPage=506&bbIdx=33616&searchField=&searchText=

 

백진현, 2000,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문제",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제41권 2호

 

국방부, 2020, "2020년 국방백서", 국방부 정책기획관실 국방전략과

 

김상범, 2020, "북한의 무력행위에 대한 대남 사과·유감 표명 사례 연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IFES 정책보고서 2020-02

 

 

11개의 댓글

2023.02.13

모아놓고보니 더 씹새끼들이네

 

3

병신들이 ㅋㅋ 저정도로 지랄하는대.

협정이고 뭐고 의미가 있긴 한거임?

괜히 우리만 발목잡힌거지, 쟤들은 구속력이 전혀 없는대.

2
2023.02.14

옳그떠 아니냐. 저런 놈들이랑... 아니다...

0
2023.02.14
@Kju0112

정치적인 부분 거의 다 빼고 적었고 솔직히 금강산 관광객 사살이나 서해 공무원 피살도 넣으려다 뺐음.

0
2023.02.15
@K1A1

읽을거리판은 옳그떠 적용안되니 걱정 ㄴㄴ

0
2023.02.14

1,3 빼면 딱히 사과 같지도 않네. 유감이긴한데 니들이 잘못해서 벌어진 일임 ㅎㅎ 이런 느낌

0
2023.02.14

유감이란 말조차도 단 한번도 없을거같았는데 의외긴 하네

0
2023.02.14

ㅎㅎ;;ㅈㅅ...ㅋㅋ!!! 이런느낌인디

1
2023.02.17

아마 북한의 입장은 이럴거다

남한과 정전협정을 맺은적 없다

유엔군 중공군 북한군 세집단끼리만 정전협정을 했지

한국과 정전협정 한적없다는 논리기 때문에

세번만 인정한다는 논리임

 

그리고 유감표명의 경우

정전협정위반으로 인한 유감표명과

그냥 유감표명과 구별해야됨

정전협정위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우발적인 무력충돌이라고 주장하는 것 까지

억지로 카운팅 할 필욘 없음

0
2023.02.17
@원한

제목이 저럴 뿐 사실상 사과한 적이 없다는게 지론임

0
2023.02.17

저런데도 합의를 유지하고 지원해줘야한다?

평화 주장하는 새끼 가족들 칼빵 놔도 평화 운운하는지 보자.

화해를 주선하는 그새끼가 배신자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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