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진 많음)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최종해결책-"달렛계획"(완)


 

마무리 단계-히람 작전, 최후의 대학살 다웨이메흐

앞서 말했다 시피 폴케 베르나도트의 노력으로 1차와 2차 정전이 이루어 졌지만,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정전은 사실상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군은 이시기에도 갈릴리 서부를 점령하는 것을 마무리 지었고, 이제는 완전히 마무리 짓지 못한 이집트 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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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레이카트의 이집트군 참호를 점령한 이스라엘군(1948)

 

전쟁 초 이집트군은 준비 안된 상태로 팔레스타인 남부로 진격했다가 이스라엘군에게 해안지역에서 대패를 당하게 된다. 그후로 2차 원정군을 예루살렘 남부로 보낸 일부의 성과 만 빼고 이스라엘군에게 완벽히 밀리게 된다. 네게브 사막 북쪽으로 보낸 3차 원정군은 해안과 이스라엘 남부쪽 이집트 군과 차단되었다. 이제는 올 기미도 없는 요르단 군에게 헛되이 의지하며, 일명 존버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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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격추당한 이집트군 스핏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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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스라엘 군에 의해 노획당한 브렌건 캐리어

 

이스라엘군은 포위를 굳히며 이집트군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하지만 허나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듯이 이집트 군은 악착같이 버텼다. 허나 이집트 군이 묶여있거나, 분열된 탓에 이스라엘 군은 어떠한 방해를 받지 않고 네게브 사막 북쪽을 휩쓸어 버린다. 가자지구와 요르단에게 약속한 요르단강 서부만이 이스라엘군의 공세로부터 온전히 지켜지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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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계를 재검토하는 파루크 1세, 파루크 1세의 암군적인 면모는 나무위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파루크는 이스라엘군을 개판 5분전 쓰레기 군대로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의 군대가 더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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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마을인 타르쉬하는 항복 후 주민들은 추방되고 루마니아계 유대인 이민자들이 마을을 차지한다. 타르쉬하는 말로트타르쉬하Ma'alot-Tarshiha로 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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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직전 타르쉬하 사진

 

9월 중순 갈릴리 중부에서 종족 청소 사건이 일어난다. 무슬림이 대부분인 일라분Ilabun은 이스라엘군과 싸우다 공세가 더 심해지자 마을주민들 전원이 마을을 버리고 도망갔다. 타르쉬하 같은 기독교마을은 항복했지만, 다행히 추방을 면하게 되었다. 9월 와디아라와 요르단강 서안 북쪽 끝을 점령하는 세번째 시도(+칼킬리야와 툴카렘을 점령하란 특별 명령 포함)인 8월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지역을 지키기 위한 팔레스타인인의 노력은 49년 봄 이스라엘이 요르단과의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에 넘어가는 것을 끝났는데, 오늘날에는 와디아라의 팔레스타인 인/구의 증가로 이스라엘에선 유대인 인/구 비율의 붕괴를 걱정하여, 요르단 강 서안 팔레스타인에게 와디아라를 넘겨줘야 하는 고민을 할 정도였다. 와디아라는 이스라엘 종족 청소 기간 중 가장 영웅적인 저항을 한 도시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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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람작전 당시 팔레스타인 마을 사사를 공격하는 이스라엘군 사진 1948년 10월

 

포로: 난민들을 레바논 국경과 시리아 국경에 있는 지점으로 수송하기 위한 차량을 준비할 것임. 포로수용소는 사파드와 하이파에, 단기 수용소는 아크레에 건설 예정. 무슬림 주민은 모두 몰아내야 함.

히람 작전 당시 군부대에 하달된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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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군 폭격 주역인 B-17

 

10월엔 히람 작전Operation Hiram을 통해 파우지 알 카우크지가 이끄는 아랍 해방군과 시리아군을 몰아내고 갈릴리 북부를 초토화 시켰다. 모셰 카르멜Moshe Carmel의 지휘하에 이스라엘군은 갈릴리 북부를 점령하고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을 학살한다. 29일과 31까지 벌어진 작전으로 팔레스타인인 50,000명이 레바논으로 쫓겨난다. 이시기 이스라엘군은 B-17와 DC-5와 같은 폭격기를 활용하여 갈릴리 북부의 마을들을 이잡듯이 폭격하고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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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기구 사무총장으로 임명 된 쉬무엘 라히스(1926~2019)에 대해 비판하는 이스라엘 언론, 도브 이르미야의 폭로로 쉬무엘 라히스의 만행이 알려지자 몇몇 이스라엘 사람들도 쉬무엘 라히스 만큼은 절대 안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쉬무엘 라히스는 훌라 학살로 1년만 복역하고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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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당시 도브 이르미야(1914~2016)의 사진, 2차대전 참전 용사(북아프리카, 중동, 이탈리아 전역 참전)로 쉬무엘 라히스는 그의 부하였다. 101살이 넘는 나이까지 장수했다.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의 동등권 권리를 위해 노력한 활동가였다.

 

히람 작전 당시엔 레바논의 훌라Hula에서 80명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살리하Saliha에서는 이스라엘군 제7여단에 의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당했지만, 그 이전 학살에서 아무도 처벌받은 사람이 없듯이 이번에도 처벌받은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이 시기 쉬무엘 라히스Shmuel Lahis라는 사람은 혼자서 35명의 사람을 처형했는데, 이걸 본 도브 이르미야Dov Irmiya란 군 장교가 이것에 충격을 받고 쉬무엘 라히스를 군사법원에 고발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35명의 민간인 처형으로 7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오히려 곧바로 사면받고 이스라엘 정부에서 고위직을 역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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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람작전으로 갈릴리를 떠나 레바논으로 떠나는 난민들

 

히람 작전을 통한 종족 청소는 49년 여름까지 이어졌는데, UN 옵저버들 감시하에 이뤄진 주민 추방 중에서 주민 상당수는 여자와 어린이가 주를 이루었다. 성인 남자들은 사형되거나, 페포되거나, 실종되었다. 이시기 UN 옵저버와 유대인 이주자들은 이런 처참한 광경에 완전히 둔감해졌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48년 11월 이제 이스라엘 최후의 전선은 네게브 남부였다. 네게브 사막에 진출한 이집트 군을 몰아내면서 49년 3월엔 홍해 근처의 어촌 마을인 움라쉬라쉬Um Rashrash(오늘날 에일라트시)에 도착한다. 12월에 들어선 이스라엘군은 네게브 남부의 베두인족과 팔레스타인인들을 모조리 몰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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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라 학살 추모비

 

여러모로 데이르야신 학살보다 훨씬 더 잔인한 이 학살(다웨이메흐 학살)에 관해 알려진 바가 극히 적은 것은 요르단 아랍 군단(이 지역을 통제한 군대)이 만약 소식이 퍼지도록 내버려 두면 데이르야신 사건이 농민들의 사기에 미친 것과 똑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즉 아랍 난민들이 다시 유입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14일 유엔 보고서

 

당신네 용감한 잉글랜드 민족이

유럽과 프랑스가

암흑으로 뒤덮였을때

벽을 등지고 버티고 서서

바닷가에서, 집과 거리에서 싸운 것처럼

우리도 바닷가에서, 집과 거리에서 싸우리라

승리한 영국인들이 우리의 마지막 전투에서 우리를 맞이 하리니

이스라엘 민족 시인 나탄 알터만의 1945년 시

 

지프차를 타고 그는 거리를 가로질렀다.

젊은 청년, 짐승들의 왕자

한 노부부가 벽에 웅크리고 섰고

천사같은 미소를 띠며 그는 말했다.

"기관 단총을 써봐야지"

그의 헬멧에 노인 남자의 피가 흩뿌려졌다.

1948년 나탄 알터만의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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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시인이자 정치인인 나탄 알터만(1910~1970) 사진 그는 처음엔 팔레스타인 인들을 나치 취급하며 시를 썼지만, 히람 작전 이후엔 그 잔혹함과 광기에 질려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현재 이스라엘 200세켈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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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웨이메흐 학살 사진

 

1948년 10월 28일 헤브론시 서쪽 5Km 지점의 다웨이메흐 마을은 2,000명의 주민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족 청소로 4,000명의 피난민이 몰려와 6,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웨이메흐Dawayima에 몰렸다. 촌장 하산 마흐무드 이흐데입 Hassan Mahmoud Ihdeib은 훗날 이스라엘군 보고서에서 28일 정오 기도 이후 1시간 반 뒤 쿠베이바에서 온 장갑차 20대가 마을에 진입하는 동시에 반대 측면에서 이스라엘군이 무차별 사격을 실시했으며, 마을을 지키던 20명의 병력들은 압도적인 화력과 기습 공격에 미처 대응을 못했고, 이스라엘군이 비워둔 한 쪽 면을 향해 수 천 명의 사람이 도주했다고 증언한다. 모스크와 지역의 성스러운 동굴인 이라크 알자그Iraq al-Zagh로도 수백명이 도망갔다고 진술한 촌장은 다음날 과감히 돌아오고서야 거리와 모스크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을 확인했다고 증언한다. 동굴은 사람들의 시체로 입구가 막혔고 촌장이 일일히 세며 확인한 실종자는 455명이며 그 중 170명 정도가 여자와 어린아이라고 증언했다. 촌장의 아버지는 거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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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웨이메흐 학살의 주역 89대대 부대원의 사진, 해당 사진은 1948년 10월 요아브 작전 당시 네게브 사막에서 찍은 것이다.

 

훗날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군의 파괴행동은 필요 이상으로 잔학했다. 이스라엘 군 기록에서도 거리마다 머리가 깨져 죽은 아이와 산 채로 불탄 여자, 칼에 찔려 죽은 남자들을 포함 80~100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쓰러져 죽어있었고, 한 이스라엘 지휘관은 병사에게 노파 2명을 집에 가두고 집안에 수류탄을 넣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필요 이상의 잔악한 명령에 경악한 부하는 거부했고, 다행히 그 2명의 노파는 살았지만, 어떤 병사는 한 여성을 River Run 한 후에 쏴 죽였다고 자랑했고, 마을의 생존자 여성을 하인처럼 부려먹은 후 여자와 아이를 둘 다 쏴 죽였다고 기록한다. 학살의 당사자 89대대 소속 아브라함 베레드Avraham Vered는 이 학살은 단순한 학살이 아닌 1929년 헤브론에서 있었던 아랍인에 의한 이스라엘인 학살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같은 피의 보복은 필요 이상으로 심했고, 그 정도를 넘었다.

 

의인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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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중재 대사 폴케 베르나도테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UN 전권 대사였다.

 

이 파괴와 학살, 광란의 현장에서 UN 중재 대사 폴케 베르나도테는 최선을 다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노력으로 1차 중동 전쟁의 1차 휴전과 2차 휴전 이뤄 질 수 있었다. 그는 앞서 말했다 시피 처음 UN 중재 대사로 임명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환영했던 인물이었다. 2차 대전 당시에 수백명의 유대인을 구했던 인물이기에 이스라엘에서는 그가 시온주의자 혹은 친이스라엘주의자란 생각으로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착각한 게 있다면 그는 시온주의자나 친이스라엘 주의자가 아닌 인본주의자였고, 그리고 그는 결코 이스라엘의 살육 행위를 좌지우지 않을 인물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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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을 돌아다니는 베르나도테의 사진

 

1948년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엔 옵저버들에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 수십 명의 유엔 옵저버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펼쳐진 파괴와 학살을 "직접" 관찰했지만 어떤 행위를 할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폴케 베르나도테는 팔레스타인 도착 5월 20일부터 살해당하는 9월까지 팔레스타인에 머물며 여러 방안을 내놓았다.

 

1차 정전 기간 중 베르나도테 백작의 제안(1948.6.28.)

1.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은 "2개의 회원국, 1명의 아랍인과 1명의 유대인으로 구성된 연합"으로 개혁되며, 각 회원국은 대외 관계를 포함한 자체 문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다.

2. 경제 연합 구성

3. 협상으로 경계 수정

4. 자국 국경 내에서의 이민은 2년 동안 각 회원국의 권한 범위 내에 있어야 하며, 그 이후에는 어느 회원국의 이민 정책이 "연합 이사회" 또는 유엔에 의해 무효화될 수 있음.

5. 종교 및 소수자 권리의 완전한 보호

6. 성지, 종교 건물 및 유적지에 대한 보증

7. 갈등으로 쫓겨난 주민들의 귀환

 

첫 제안 당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제안을 제시하였다.

1. 아랍 영토는 네게브 전체 또는 일부 포함

2. 이스라엘 영토은 서부 갈릴리 전체 또는 일부 포함

3. 유대인 공동체를 위한 지방 자치 및 성소 보호를 위한 특별 조치와 함께 아랍 영토에 예루살렘 시 포함

4. 야파의 상황에 대한 고찰

5. 하이파에 정제소와 터미널을 포함한 자유무역항 지구 건설

6. 로드(팔레스타인 지명 알루드) 에 자유 공항 설립

 

이 제안은 이스라엘 정부에게 격분을 불러오는 제안 중 하나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아랍과의 전쟁 상황을 베르나도테가 사건으로 축소시켰다며 격분했다. 당연히 이 첫번째 제안을 실패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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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도테의 2번째 제안, 살구색이 이스라엘이고 핑크색이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녹색은 예루살렘 지역

 

암살 직전이던 1948년 9월 16일엔 기존의 제안을 다듬어 다른 제안을 UN에 제시했다. 베르나도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연합을 포기하고 두 개의 독립 국가를 제안했다. 기존의 7개 제안은 기본적으로 원안은 보존 된 채 심화된 제안을 내놓는다.

 

1.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돌아와야 하며 적대 행위가 재개되지 않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조화로운 관계가 궁극적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팔레스타인 지역의 즉각적 평화 주장)

2. 이스라엘이라는 유대 국가는 팔레스타인에 존재하며 계속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할 타당한 이유가 없다.(이스라엘 국가의 인정)

3. 이 새로운 국가의 경계는 최종적으로 관련 당사자 간의 공식 합의에 의해 결정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유엔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UN이 새로운 두 국가의 경계를 다시 정해야 함.)

4. 경계 협정의 주요 목표가 되어야 하는 지리적 균질성과 통합의 원칙에 대한 준수는 아랍과 유대 영토에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따라서 국경이 11월 29일 결의에서 상정된 영토 협정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어서는 안 됩니다.(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간의 동등한 영토 배분)

5. 현재의 공포와 전쟁의 참화로 고향에서 뿌리를 뽑힌 무고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가 확인되고 효력을 발휘해야 하며, 귀환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보장되어야 한다.(난민의 무조건 적인 귀환 및 보상)

6. 예루살렘 시는 종교적, 국제적 중요성과 관련된 이해 관계의 복잡성 때문에 특별하고 별도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예루살렘의 자유 도시화)

7. 국제적 책임은 특히 국경과 인권과 관련하여 기존의 두려움을 완화하는 수단으로서 국제 보증의 형태로 바람직하며 필요한 경우 표현되어야 한다.(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보장)

 

베르나도테는 위 7개의 제안에 추가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1. 기존의 무기한 휴전은 공식적인 평화 또는 최소한 휴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2.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협의가 없을 경우, 아랍인과 유대인의 영토 사이의 국경은 유엔에서 설정해야 한다.

3. 네게브는 아랍 영토로 정의되어야 한다.

4. 국경은 북동쪽 알팔루자에서 라믈라와 알루드(현재의 로드)까지 이어져야 한다(두 곳 모두 아랍 영토에 있음).

5. 갈릴리는 유대인의 영토로 인정된다.

6. 하이파는 자유항으로, 리다 공항은 자유공항으로 지정되어야 한다.

7. 11월 29일 총회의 결의에 정의된 지역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예루살렘시는 별도로 취급되어야 하며, 성지와 유적지의 보호및 예루살렘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과 종교의 자유를 위한 완전한 보호 장치가 있어야 한다.

8. 유엔은 팔레스타인 조정 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

9. 아랍 난민들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유대인이 지배하는 영토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갈 권리는 유엔에 의해 확인되어야 하며, 그들의 송환, 재정착, 경제 및 사회 회복, 그리고 돌아오지 않기로 결정한 경우 유엔 조정 위원회의 감독과 지원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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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폴케 베르나도테의 사진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무력 충돌의 위험과 전략에 의해 추방된 고향으로 돌아갈 아랍 난민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어떤 해결도 공정하고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피난민의 대부분은 유대 국가에 포함될 영토에서 왔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탈출은 공동체에서의 싸움, 실제 또는 테러 행위 또는 추방과 관련된 소문으로 인한 공황에서 비롯되었다. 유대계 이민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유입되는 동안 분쟁의 무고한 희생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가 거부된다면, 그것은 기본적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폴케 베르나도테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UN 중재자 진행 보고서(1948년 9월 16일) 문서에서

 

베르나도테 백작은 팔레스타인 땅을 다시 반으로 분할하자는 제안과 모든 난민의 무조건 적인 귀환을 주장했고, 시온주의 극단주의자들은 이것을 매우 아니꼽게 여겼다. 이미 1차 정전 기간 동안 베르나도테 백작은 그당시 추방된 모든 난민의 무조건 적인 귀환을 주장했지만, 무시 당했고, 유엔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 송환권고를 되풀이 했다. 베르나도테 백작은 곧이어 찾아올 유대인의 국가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그가 설령 수 백명의 유대인을 나치의 손에서 구한 의인일지라도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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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케 베르나도테와 함께 피살된 앙드레 세로Ander Serot 대령, 그는 2대전 당시 나치에 맞서 싸웠고, 암살 당시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보여준다는 이유로 베르나도테와 세로 둘 다 비무장 상태였다. 그의 이름은 "정보 및 방해 공작 여단"(BRCS)의 이름에 붙혀졌다.

 

 

 

 

폴케 베르나도테의 암살을 최초로 보도한 AP. 보도원, 무살람 브세이소(Musallam Bseiso 1926~2017)의 인터뷰 수록

 

카타몬(지금의 예루살렘 서부) 지역에서 우리는 유대인 군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 도로 블록에 배치된 유대인 군용 지프에 의해 붙잡혔습니다. 동시에 나는 이 지프에서 무장한 남자가 오는 것을 봤습니다. 나는 이것이 또 다른 검문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을 거의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차 옆 열린 창문을 통해 토미건(후에 MP40 일련번호 2581로 밝혀졌다.)을 꽂고 베르나도트 백작과 세로 대령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총성이 들렸고 상당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세로 대령이 내 뒷좌석에 쓰러졌고 나는 즉시 그가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베르나도테 백작은 앞으로 몸을 구부렸고 나는 그 당시 그가 엄폐를 하려고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쳤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백작은 뒤로 넘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다사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백작을 품에 안고 그를 침대에 눕혔습니다.... 나는 백작이 입은 재킷과 셔츠와 속옷들을 찢었습니다. 나는 백작이 심장 주위에 상처를 입었고 상처 주변의 옷에도 상당한 양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냐고 물었지만 (의사는) 너무 늦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스웨덴 공군 소장이자 베르나도테의 수행 무관인 요한 아우구스트 '오게' 린드스트룀Johan August "Åge" Lundström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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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도테 백작의 암살자를 찾는 현상 수배지, 가장 오른쪽이 베르나도테 백작과 세로 대령을 암살한 여호수아 코헨

 

베르나도테의 이런 행보에 분노한 극우 시온주의자 단체인 리히의 구성원 여호수아 코헨Yehoshua Cohen, 이츠하크 벤모셰Yizhak Ben-Moshe, 아브라함 슈타인버그Avraham Steinberg, 메슈람 마코버Meshulam Makover 4명은 이스라엘군으로 위장하여 1948년 9월 17일 오후 5시 3분 경 카키색 반바지와 뾰족한 모자로 쓴 채 군인으로 위장한 상태로 기관단총을 난사하여 베르나도테 백작과 앙드레 세로 유엔 평화유지군 프랑스군 대령을 암살하였다. 세로 대령은 아내가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수용소에 갇힐 때 베르나도테 백작의 도움으로 아내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백작에게 큰 고마움을 느껴 동행하다. 변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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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도테의 장례식

 

베르나도테의 죽음은 UN 정부를 발칵 뒤집히게 만들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조차 베르나도테 백작의 암살에 대해 비열한 행위라고 규탄할 정도였다. 4명의 암살범들은 현상수배 되었지만, 그들은 근처 하레디 공동체로 숨어들어갔고, 그 누구도 체포되지 않았다. 아니, 베르나도테와 앙드레 세로를 암살한 여호수아 코헨은 말년에 벤구리온의 키부츠 친구가 될 정도였다. 그들이 속한 단체인 리히의 구성원들도 체포되고 조직은 해산되었지만 그 누구도 기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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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도테 백작과 같이 베르나도테 계획 작성에 참여한 랠프 번치Ralph Bunche, 그는 베르나도테 계획 작성 및 1949년 전쟁 휴전 협정에 기여한 공로로 1949년 노벨 평화상에 수상된다.

 

그가 만일 암살의 위협을 피해 더 살았다면 어쩌면 훗날 10월에 있었던 히람 작전이나 이후의 학살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을 것은 당연했다. 베르나도테의 죽음은 이스라엘에 모종의 국제적인 압력을 가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죽은 이후 유엔 옵저버들이 딱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베르나도테와 함께 베르나도테 계획을 만들던 랠프 번치는 그의 뒤를 이어 UN 중재자로 임명되어 1949년에 1차 중동전쟁 휴전협정에 서명하게 만들었고, 194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 결의안 194호를 통해 팔레스타인인 귀환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을 수록하게 만들었다.

 

나크바(النكبة)

우리는 이별을 애도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도 없고 눈물도 메말랐다.

우리는 이별의 순간을 부여잡지 않는다.

물론 그건 이별이고

우리에게는 눈물이 남아 있다.

사푸리야 마을 출신 난민 타하 무함마드 알리(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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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자라마나 난민캠프의 모습, 이 사진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드러낸 사진으로 평가 받는다.

 

49년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계획 모든 작전을 완료하는 데 성공한다. 달렛 작전을 통해 최소 17만 명에서 25만에 이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되었다. 47년에서 49년까지의 기간을 놓고 본다면 팔레스타인 100만 인구에서 70만이 넘는 인구가 기존 팔레스타인 영토 밖으로 추방되었다.

 

10세에서 50세 사이의 군인 연령으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아랍인은 포로로 잡을 것.

1948년 4월 18일 자 유대군의 전쟁 포로를 다루는 문제에 관한 일반 명령

 

1949년 내내 종족 청소가 끝난 와중에도 8,000명의 팔레스타인 남성들은 포로 수용소에서 갇혀 지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휘두르는 폭력적인 지배에 괴롭힘을 당했다. 팔레스타인 시골에서는 열살 어린이에서 쉰 살 나이든 사람까지 마을 남자들이 거대한 우리에 가둬진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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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파에 하다르 지구의 체포 특별 본부는 팔레스타인에게 악명 높은 장소였다.(정확한 위치는 하이파시 다니엘 스트리트 11번지 인데, 최대한 장소를 맞춰가며 찾은 장소가 여기라 100% 확신은 못함.)

 

팔레스타인 농촌 전역에서 일어난 체계적인 수색-체포작전은 의심스럽다고 평가된 사람들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이 의심스럽다의 기준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갖은 이유로 체포되었는데, 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가엘 야딘이 체포의 체계화를 만들기 전까지 한동안 무절제한 체포는 사회의 혼란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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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이스카 샤드미의 사진, 이스카 샤드미는 56년에도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저 손에 쥔 동전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스카 샤드미의 벌금이었다.

 

체포한 사람들은 이르군과 슈테른 출신의 수용소 간부들에게 심한 강도의 학대를 당했다. 하가나 출신의 수용소 간부인 이스카 샤드미Yisca Shadmi는 팔레스타인 2명을 수용소에서 살해하여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곧 사회에 나와서 56년 10월 팔레스타인 49명을 학살한 크파르카심 학살의 주요 가해자가 되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군 장교가 이런 수용소에 와서 실태를 보고는 "최근의 포로 처우에서 아주 심각한 사례들이 일부 있었다. 이 사례들에서 드러나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동은 군의 규율을 해친다."라고 보고할 지경이었다.

 

적십자는 초창기 수용소에 몇 번 방문하고 1948년 11월 11일에 조심스러운 보고서를 발표할 뿐 베르나도테 수준의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 있었던 학대와 살육을 보면서도 외면한 이들이 팔레스타인에서도 똑같이 외면했다. 적십자의 보고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통이 어느 수준인지 참고할 만한 자료는 되었다. 물론 그것이 수용자의 생활개선에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1955년까지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요르단군이 이스라엘군 포로에 대한 대접은 그것과 정 반대였다. 오죽하면 요르단의 인도적인 대접에 벤구리온은 일기에 불만을 표할 정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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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야파에서의 무슬림 여성과 유대인 이주민이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서 있다.

 

이스라엘군에 점령된 야파는 철저하고 계획된 약탈이 이뤄졌다. 영국이 아랍인들을 위해 보낸 식량은 이스라엘 정부의 지도 하에 털려 유대인 정착촌으로 보내졌다. 유엔 옵저버인 F. 마샬 대위는 "유대인들은 유대 당국이 종교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건물을 존중하겠다고 거듭 보장한 약속을 빈번하게 어겼음."이라 언급하며 절망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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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호르 쉬트리트의 사진, 그는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이스라엘인과의 공존에 동감했던, 이스라엘 정부 내의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아랍인에 우호적인 이유는 아마 그가 모로코계 세파르딤 유대인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야파의 약탈이 너무 심해서 야파 군정장관 이츠하크 히지크Yizhak Chizik는 1948년 6월 5일에 재무 장관 엘리저 카플란에게 현재 야파의 약탈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야파의 약탈은 소위 "무기 수색"을 한다는 이유로 실시되었는데, 수색은 약탈로 이어지고 폭력과 체포로 끝났다. 이츠하크 히지크는 팔레스타인 공동체 파괴에 앞장 선 인물이지만, 야파에 관한 자기의 보고가 모두 무시당한 것을 깨닫고 7월 말 사임했다. 혼란을 막기위해 아랍인들과 친분이 깊은 미즈라히 출신의 소수 민족부 장관베호르 쉬트리트Bechor Shitrit가 야파를 방문하여 약탈방지를 약속했지만 소용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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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 이후 철조망에 막혀 자기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팔레스타인 여성과 아이들

 

하이파의 아랍인들은 점령 당시의 비극과 혼란에도 3,000~5,000명의 아랍인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도시에서 제일 가난한 와디니스나스Wadi Nisnas라는 조그만 동네로 이주하란 명을 받았다. 공산당 소속이 상당수 였던 하이파의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이스라엘과의 분할을 지지했고, 자신들은 그 이스라엘의 보호를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스라엘의 이 같은 대우에 충격을 받았다. 하이파의 이스라엘식 게토로 이주한 아랍인들은 이르군과 슈테른의 약탈을 당했다. 벤구리온은 아랍인들의 약탈에 비난만 할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도 않았다.

 

우리를 에워싼 군대가 여자들을 건드리려고 하다가 거부당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여자들이 굴복하려 하지 않자 그만두더라고요. 우리가 바닷가에 있을 때 여자 둘을 데리고 가서 옷을 벗기려고 했습니다. 몸수색을 해야 한다면서요.

탄투라에서 있었던 인권유린에 대해 증언 나지아 아윱Najiah Ayyub

 

River Run도 숱하게 일어났다. 달렛 계획 개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 인권 유린 사건들이 이스라엘 군 보고서에 수록 되었는데, 소녀를 겁간하고 그 오빠를 죽인 적십자사의 보고와 야파에서 약탈 행위를 항의했던 이츠하크 히지크는 약탈 보고서와 더불어 River Run 소식을 암시하는 글을 카플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야파에 주둔한 군부대 중 3대대의 경우 너무 River Run이 심해 군 사령부가 3대대를 야파에서 철수를 하는게 최선이라고 결정을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3대대가 너무 심하게 튈 뿐, 1대대와 2대대도 사정은 마찬가지 였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련의 River Run 사건은 1949년 8월 12일 까지도 존재하였다.

 

2003년 10월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의 공개로 생존한 River Run 피해자들이 증언한 범인들 중 총 22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22명의 기소자들은 학살과 River Run 혐의로 재판정에 올랐지만 기껏해야 최고형은 민간인 살인죄로 언도받은 2년 징역형이 전부였다. 팔레스타인 농촌과 도시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된 River Run의 상당수는 여성에 패쇄적인 이슬람권 문화와 피해자 개개인이 수치심을 느끼고 숨기는 바람에 얼마나 피해가 극심했는지 온전하게 추정하기도 어려운 마당이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군이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기에 적어둘 뿐 거기에 따른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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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마을이 이스라엘 유대인 정착촌으로 변하는 순간

 

팔레스타인인들은 추방되면서 제대로 재산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추방되었다. 일부 팔레스타인인들은 자기 재산을 되찾기 위해 몰래 이스라엘로 넘어가다가 이스라엘군이나 민병대의 총에 맞아 죽었다. 130만 팔레스타인에게서 이스라엘 정부가 압수한 금액의 그때나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상당했다. 이스라엘 중앙은행 초대 총재 다비드 호로비츠David Horowitz는 "아랍인이 남기고 간 자산의 가치가 1억 파운드"라고 보고했다. 이 금액은 아랍인이 은행과 금융기관에 투자한 팔레스타인인의 재산을 몰수한 금액인데 2015년 기준 한화 1776억 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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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나사렛 기독교 교회로 피신 온 팔레스타인 난민, 나사렛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으로 나사렛은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이 번성한 도시가 된다.

 

팔레스타인 농촌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추방하고 얻은 토지(농지+주택)는 350만 두남이었다. 벤구리온은 유엔 결의안 194호의 내용(팔레스타인 난민의 무조건적 귀환)에 따른 이스라엘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탁기구를 만들어 압수한 팔레스타인 재산을 관리하게 하였다. 수탁기구라는 어정쩡한 조직을 통해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인의 재산을 유대인들 개개인에게 팔거나 공공에 매각했다. 소유권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팔린 농지는 키부츠 운동에 투입되거나, 신규 이민자, 이스라엘 방위군에게 매각되었다. 압수된 팔레스타인 토지 350만 두남은 유대인들에 의해 탐욕적으로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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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새로 정착하기 위해 야파에 도착한 유대인 이주자들 사진 1949년

 

수탁기구의 주선 하에 350만 두남 중 100만 두남은 유대 민족 기금에 헐값에 팔렸고, 49년엔 25만 두남이 추가로 유대 민족 기금에 넘겨졌다. 하이파와 예루살렘, 그 밖의 이스라엘 주요 도시의 수많은 아랍식 저택들은 이렇게 팔린 후 철거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성지는 오스만 제국과 영국 정부가 인정한 이슬람 증여 재단의 소유였고, 아민 알후세이니가 의장인 이슬람 최고 평의회가 성지를 관리했다. 하지만 48년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 종교 성지와 소속 자산을 모두 압수 했다. 처음엔 앞서 언급된 수탁공사에 넘겼다가 다음엔 정부로 결국엔 유대 공공 기구와 개인에게 이들 성지를 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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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당시 파괴된 모스크

 

이슬람 성지들은 무슬림에게 모욕적으로 훼손되었다. 마즈달과 키사리야의 모스크는 레스토랑이 되고 베르셰바의 모스크는 상점이 되었다. 에인하우드의 사원은 술집이고, 지브의 사원은 리조트가 되었다. 기독교 교회들 상당수가 고스란히 남았지만, 그럼에도 몇몇 교회는 정착촌 건설을 위해서 파괴되었다. 아니면 팔레스타인인들이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현재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이 종교시설에 예배를 보는 것은 법적으로 허락되어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유대인 정착촌을 지나야 하고 그러면 얄짤 없이 사유지 무단 침입죄에 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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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람 작전 당시 학살이 자행된 살리하 마을은 유대인 이주자에 의해 이르온Yir'on이란 마을이 되었다.

 

에인제이툰(에인 알제이툰이란 아랍식 이름을 히브리화 시킨 이름)은 이 휴양지에서 손꼽히는 매력적인 장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커다란 피크닉 테이블과 장애인용 주차장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과거 중세 시대 이래 18세기 까지 유대인들이 살던 정착촌 에인제이툰이 있던 자리입니다. (유대인들이) 정착하려는 시도가 네 차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주차장에는 생태친화형 화장실과 놀이터가 있습니다. 주차장 바로 옆에는 6일 전쟁에서 스러진 병사들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유대 민족 기금 웹 사이트의 에인 알제이툰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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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현장이었던 탄투라는 마을이 싹 밀려버리고 테마파크 공원과 숲으로 되었다.

 

마을은 유대 민족 기금 정착부에 의해 숲으로 조성되었는데, 정착부장 요세프 바이츠는 팔레스타인 마을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유대인 정착촌이나 숲을 세웠다. 이 조림사업 같은 경우도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는데, 비옥한 토지는 앞으로 세울 유대인 정착촌과 이민자들을 위한 몫으로 두었고, 그러지 못한 땅은 척박한 토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 숲으로 지정해 두었다. 오히려 48년 이후 유대 민족 기금 정착부는 이런 땅들에 대해 팔레스타인인들보다 키부츠 단체들과 싸워야 했을 정도였다. 일부 운좋게 파괴를 피하고 남아있는 집들은 70년대에 학자들이 팔레스타인 풍습을 위해 연구하겠다고 하자 파괴해 버린 사례도 있었다.

 

현재 이스라엘은 1948년 당시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에게 했던 잔혹한 짓을 잊은채로 행동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미처 다 풀어내진 못했지만, 단순히 유대인이 잘못한 게 아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중동지역에서의 유대인과 아랍인의 서로 간의 끝없는 반목과 다툼이 있었고 그 응어리가 터져버린게 바로 이스라엘 건국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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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대표 야세르 아라파트와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총리인 이츠하크 라빈이 오슬로 평화 협정에서 서로 손을 잡았다. 이후 이츠하크 라빈은 배신자라는 이유로 이스라엘 과격파들에 의해 암살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한 행위는 복수 그 이상을 넘어선 무언가 임은 분명했다. 이츠하크 라빈이 야세르 아라파트와 맺은 오슬로 협정도 좋은 관계로 향하는 하나의 이정표로 보이지만 그 안에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나크바가 부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인들은 오슬로 협정을 통해 자신들이 책임이 커질지 두려워 했고, 결국 독립전쟁의 영웅 야빈을 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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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8월 알제리 콘스탄틴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나 유대인 25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친다. 위의 사진은 해당 내용에 대한 뉴스보도로 비슷한 시기 터키 트라키아에서도 동유럽 식 포그롬으로 15,000명의 유대인이 재산을 버리고 도망가야 했다. 전간기와 2차대전 추축국 동유럽에서도 포그롬은 흔한 폭동의 한 형태였다.

 

팔레스타인이 희생자임을 인정하는 건 이스라엘의 이 같은 뿌리깊은 공포와 결부된다. 만약 이스라엘이 1948년에 자신들이 한 짓을 인정하면, 1948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이스라엘인들의 자기 인식에 의문이 제기된다. 이스라엘의 대중적인 주류 역사관은 영국 위임령 당시에 허허벌판인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자들이 정착을 하며 건국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팔레스타인을 희생자로 인정하면 기존까지 나치에 의한 희생자로 포장한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흔들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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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앵글로-이라크 전쟁에서 영국이 이기자 이라크인들은 최소 175에서 수천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명 파르후드Farhud를 벌인다. 기원전부터 존속했던 유대인 공동체는 이 시기 개박살 난다.

 

하지만 역사는 흘러간다. 언젠가는 이런 사실에 대해 다수의 이스라엘인이 그것을 마주봐야 하는 현실이 다가 올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세대를 거듭한 피의 복수는 계속될 것인지 아니면 지속되더라도 조금은 덜 줄이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3자인 한국이 판단할 게 아닌 이스라엘인 선택의 문제다.

10개의 댓글

2022.10.28

예아 오버 맨

0
2022.10.29

글씨;; 왜 파란색..?

0
2022.10.29
@블랙호오올

어 그러네... 보기 힘듬?

0
2022.10.29
@綠象

ㅇㅇ..

0
2022.10.29
@블랙호오올

좀 있다 수정할게 미안

0
2022.10.29
@綠象

ㄱㅅ

0
2022.10.29
@블랙호오올

감기 걸려서 골골 대다가 이제야 씀 지금은 어때????

0
2022.10.30
@綠象

굿 감사

0
2022.10.29

파란색 뭔데

0
2022.10.29

이스라엘은 피의 대가를 받는 게 맞지. 우리 입장에서야 가난뱅이 무슬림보단 쓸모가 많으니까 친하게 지내야 하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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