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플랜 달렛"-2

1948년 2월: 라메드헤 작전

1948년 1월까지 유대인 역시 팔레스타인인의 보복으로 400명이 희생당했다. 유대인 공동체가 66만명 인걸 생각하면 꽤 많은 수치이지만, 비슷한 시기 팔레스타인인들은 1,500명이 유대인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벤구리온은 400명의 유대인 희생자가 생긴 것에 대해 제2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고 묘사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인 전체를 나치로 홍보하려는 의도적인 홍보였고, 유대 군인들이 다른 아랍인이나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할 때 마음의 가책을 덜 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7eed8036fd9f19b067be9b8647887d70395af5f90475431d5d574b95f14014d500df9d4a239cf70b33

이스라엘이 구매한 항공기 중 하나인 체코제 AVIA 199, 다들 이스라엘이 살아남기 위해 독일이나 동구권에서 무기를 산 사실은 알지만, 이 무기 구매의 중계자가 이스라엘 공산당이었다는 사실은 모른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해서 이스라엘 극우 시온주의자와 좌익 공산주의자 모두 힘을 합쳐 무기 구매에 열중한다.

 

 

7eed8036fd9f159f239bd7a31fd52f3c75142b63d10ecf617f763f2e54de937481

이스라엘이 개발한 Davidka 박격포(부족한 물량을 메꾸기 위해 이스라엘에서 개발한 3인치 박격포는 명중률은 기존 박격포보다 떨어지지는 발사될 때 나는 소음과 적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날아오는 폭탄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에게 큰 공포의 대상이 되고, 야파에서 그 악명을 높인다. 참고로 다비카 박격포의 의미는 lIttle david란 의미이다.)

 

벤구리온은 곧 있을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에서 무기를 구입하는데 열성이었다. 영국계 유대인인 사샤 골드버그Sasha Goldberg가 무기를 구입하고 직접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프로젝트의 시작은 영국 런던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엔 텔아비브 남쪽 레호보트에서 진행되었는데, 훗날 이 연구소는 바이츠만 연구소로 변신한다. 훗날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는 에프라임 카치르는 화염방사기와 생물전 개발에 몰두 했다.

 

이제 아랍 해방군은 팔레스타인 마을 하나를 지키는 데 더 많은 군사력이 필요했다. 이스라엘 군은 신형 박격포를 활용하여 인구가 밀접한 마을과 동네까지 박격포를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마을 주민을 민병대로 만들기 위한 시간과 물자, 방어 병력 모든게 부족했다. 아랍 해방군은 2월까지 팔레스타인 마을 겨우 몇 개만 도착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이나 팔레스타인인들은 야파 북부의 레드하우스에서 벤구리온이 꾸미고 있는 계획이 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48년 2월 중순 협의체는 팔레스타인내로 아랍 해방군 병력이 증가함과 동시에 이들이 훈련이 제대로 안되어 있고, 우리가 도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고 아랍 국가들은 더 이상 지원병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엘리아후 사손의 보고를 듣고 이것에 자극을 받은 이갈 알론은 다시 한 번 대규모 청소작전을 찬성하는 발언을 한다. 참모총장 지명자 야코프 드로리Yaacov Drori는 좀더 신중한 반응을 보이며 반대 했지만, 이후 몸에 탈이 나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24bad123e99221a76ab6d8fb06df231d7cdf4f3485e507c2b5f119

부모가 고고학자인 이가엘 야딘은 전쟁 중의 공로를 인정받아 32세의 나이로 이스라엘 2대 참모총장이 된다. 그의 고고학적 지식은 잊혀진 고대의 도로를 이용하여 이스라엘 군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진격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드로리의 직무대행인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은 반대로 호전적인 면을 보여줬다. 그는 이미 갈릴리 북부의 인구 밀집 마을을 침략 대상으로 두었는데, 이런 지나치게 호전적이고 계획은 너무 원대하다는 이유로 협의체가 반대할 정도였다. 대신 야딘은 라메드헤 작전을 세웠는데, 2월 13일 야파와 키사리야Qisarya(오늘날의 카에사레아Caesarea) 주변 마을 가옥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는 공격을 실시했다.

 

야딘의 목표가 된 마을들은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현지나 외부에서 온 지원 세력 조차도 없었다. 야딘의 명령 하에 키사리야는 2월 15일 첫번째로 완전히 쫓겨난 마을이 되었다. 인근 경찰서에 영국군이 주둔해 있지만, 영국군은 지켜보기만 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뒤로 바라트키사리야, 키르바트알부르즈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제는 흔적 조차 남지 않았다. 라메드헤 작전 당시 공격당한 마을은 모두 자정 전후로 공격을 받았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라메드헤 작전으로 35채의 주택이 파괴되었고, 60~80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들 다수는 어린이었다. 반면 유대군의 피해는 부상 2명 이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인의 반격에 다친게 아닌 폭파되면서 생긴 파편에 맞은 부상병들이었다. 유대군은 영국군에게 이들을 같이 병원에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이후엔 하이파 지구에 있는 키라Qira가 함락되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이 섞여서 사는 곳인데, 유대인이 산다는 이유로 이 마을도 목표가 되어 파괴되었다.

 

2월 말엔 플랜 달렛의 초안이 완성되었다.

 

3월: 달렛 계획의 청사진 완성

 

 

2ab1df24e0c035a760f2dcba05d9313c1845d83f2d63570307cf3c8e1c5c6c

여호수아 글로버만의 초상, 이 사람이나 원래 이름의 여호수아나 생각해 보면 원래 부터 살던 선주민을 죽이는데 앞장선 이들이었다.

 

달렛 계획의 공식명칙은 여호수아 계획이었다. 성경에 나온 유대인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아닌 1905년 벨라루스 출신의 하가나 사령관이던 여호수아 글로버만Yehoshua Globerman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그는 반공산당 활동을 하다 체포된 후 부모님 친구가 소련의 대문호 막심 고리키인 덕분에 3년만 복역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하가나에서 뛰어난 군사 지도력을 인정받았지만, 플랜 달렛이 시행되기 전인 1947년 12월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암살당한다. 그는 이스라엘군의 차기 참모 총장 후보자로 사실상 낙점이 되어 있었다. 용맹한 군인이라 하가나의 동료들이 그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창건 후 사후에 장성 계급을 수여 받는다.

 

글로버만 살해 후 며칠 뒤 하가나 정보부대는 달렛 계획의 초안을 작성한다. 플랜 D라는 암호명이 붙은 초안에는 미래 유대 국가의 지리적 범위(벤구리온이 탐낸 78%)와 100만 팔레스타인인의 운명이 언급된 내용이 담겨 있었다.

 

 

75ed8036fd9f01a366b0c5bd03d01b1ac0e744e0a9e50aebb0bde4ef42ff82a710dd5b54ba1383b9f428c2f00399e523c8d8b66006

이스라엘 하이파에 있는 여호수아 글로버만 거리의 사진

 

이 작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실행할 수 있다. 마을과 특히 항구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인구 중심지를 (불을 지르고, 폭파하고, 잔해에 지뢰를 심는 식으로) 파괴하거나 다음과 같은 지침에 따라 수색, 통제 작전을 개시하는 것이다. 마을을 에워싸고 내부를 샅샅이 수색한다. 저항을 하는 경우에 무장 세력을 쓸어버리고 주민들은 국가 경계선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이 내용 이후에는 현장부대를 통해 더욱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기존 4개 여단 규모인 하가나는 12개 여단으로 재편되었고, 여단 수에 따라 파괴될 마을이나 동네의 수, 그 마을을 언제 파괴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날짜도 지시 받았다. 일부 지휘관들은 지나치게 의욕을 부리며 명령을 실행했고, 주변의 다른 마을을 파괴하여 목표를 추가 달성할 정도였다. 한편 일부 명령은 무리할 수준의 명령이라, 5월까지 파괴하라고 명시된 마을은 7월까지도 파괴되지 않고 있었다. 와디아라 Wadi Ara 지역에 있는 마을들은 전쟁 내내 유대군의 지독한 공세에도 살아남았지만, 그러지 못한 마을들은 유대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

 

4월: 플랜 달렛의 게시

플랜 달렛은 총 13개의 작전으로 구성되었다. 그 첫번째 시작은 바로 나흐손(나손-아미나답의 아들로 유다 지파의 지도자, 홍해가 갈라질때 처음 건넌 사람이기도 하다.)작전 이었다. 이스라엘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유대기구 협의회는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잇는 회랑을 만드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예루살렘에는 정통파 공동체와 미즈라히 공동체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시온주의에 대한 열정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지만, 어쨌든 같은 유대인이었기에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이들에 대해 걱정했다.

 

75ecd670b1d66ca73aea82e514d32539ac744be954c00b5fc74fc80c39071d260015d9a4a74cb6102afd9efc338e1a73b76bfd14dd5c4fbcadf9

1945년 4월 5일 알카스탈의 이스라엘 군

 

작전을 맡은 모든 연대는 마자브 달렛Mazav Dalet 즉, D태세에 돌입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플랜 D를 실행할 준비를 갖추라는 것이었다. 각 부대에 전달된 첫 문장은 이랬다. "플랜 달렛 작전 실행을 위해 D태세로 전환할 것" 지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각 부대가 공략, 청소, 또는 파괴할 마을은 부대별 아랍 문제 담당 고문 및 정보 장교들과 협의 하에 결정할 것" 즉 이 말은 나중의 이스라엘 독립 전쟁에 견주어 보면 팔레스타인인 마을을 하나도 남겨두지 말라는 의미였다.

 

기존의 플랜 달렛은 이 지시를 계기로 마을 파괴를 개시하라는 군사 명령으로 전환되었다. 지역에 따라 날짜는 달랐다. 알렉산드로니 여단은 해안 지대의 수십 개의 마을을 습격하여 단 두 곳만 남기고 모조리 파괴하였다. 1948년 5월 6일 골라니 여단은 갈릴리 동부를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바로 다음날 해당 지역의 첫 마을인 샤자라Shajara를 소멸시켰다.

 

팔마흐 부대는 1948년 첫날 나흐손 작전 계획을 명 받았다. 전날밤, 협의체는 벤구리온의 저택에서 팔마흐 부대에 내릴 작전 명령을 최종 승인했다. 부대가 받은 명령은 간단했다. "이번 작전의 주요 목표는 아랍 마을을 파괴하고.... 마을 사람들을 추방하는 것임. 그래야 아랍 군대 전체에 경제적 부담을 안길 수 있음."

 

나흐손 작전은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간의 안전 회랑을 만드는 것 이외에 또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하가나, 슈테른, 팔마흐 등 통일이 안된 수많은 유대계 군사조직을 하나로 엮고, 디아스포라로 흩어졌다 돌아온 전세계의 수많은 유대 동포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또 하나의 목표였다.

 

7ced8272f5ca758d6facc2b41a9f2e2d519a0dbcdcca203323432ceff1

1948년 4월 7일에서 8일 사이 하가나 군 진지가 있는 알카스탈로 향하는 압드 알카디르 알후세이니의 성전군 부대, 이 부대는 예루살렘 산 시몬 수도원의 아랍 군대와 더불어 이스라엘 군에게 위협적인 존재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흐손 작전에 한 가지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압드 알카디르 알후세이니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준군사 조직은 준비는 부족했지만 치열하게 유대군에 맞서 싸웠다. 그의 최후는 영웅다운 행적 답지 않게 어이가 없었다. 48년 4월 7일 예루살렘 서쪽 8Km 지점의 알 카스탈al-Qastal(성채라는 의미)라는 마을에 있는 하가나 부대를 포위했는데, 다음날 4월 8일 새벽 압드 알후세이니는 안개가 자욱한 새벽밤에 정찰을 나가다 하가나 보초의 총에 맞고 어이없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죽은지도 모르고 알후세이니의 부대는 알 카스탈의 하가나 부대를 내쫓고 마을을 점령했지만, 알후세이니가 전사한 것을 확인하자 부대의 사기는 떨어져 버렸고 예루살렘 지구의 다른 마을도 속속 유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마을들은 대개 포위, 공격, 점령을 당하고 주민들은 쫓겨 나갔다. 집과 건물은 파괴되었다. 일부 마을에서는 다른 마을에 대한 본보기로 학살 당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데이르야신이었다.

 

데이르야신

 

그자들은 우리를 한 명씩 끌어냈다. 할아버지 한 명이 총을 맞았고, 그 딸이 울부짖자 딸도 총을 맞았다. 그러고는 내 형 무함마드를 불러내서 우리 앞에서 총을 쐈다.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면서-아직 젖먹이였던 여동생 후드라를 안은 채로-쓰러진 형을 끌어안자 그자들은 어머니한테 총을 쏘았다.

데이르야신의 생존자 파힘 자이단Fahim Zaydan의 증언

 

 

09b8d934dcd32bb567b1e4b01bd4293f54bab0f3a5530e1e1e106c5be0607e5a8dbb22f4

1986년 폐허가 된 데이르야신의 흔적, 현재 데이르야신은 크파르 사울정신건강병원으로 바뀌어져 있다. 그리고 그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데이르야신 마을의 흔적이 남아있다.

 

데이르야신은 플랜 달렛의 철저한 면이 그대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목축을 하던 정 많던 시골마을은 하가나와 불가침 협정을 맺었었다. 하지만 플랜 달렛에 따라 마을은 청소의 대상이 되었다. 일단은 협정을 맺었고 학살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해 이르군과 슈테른 부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마을 청소 가운데 나중에는 이런 요식행위 또한 불필요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유대인 군인들은 마을에 쳐들어 가면서 눈에 보이는 집집 마다 기관총을 난사하여 다수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한 곳에 모아 놓고 기관총으로 무차별 난사하여 살해했다. 한쪽에선 죽은 시체를 훼손하였고, 다른 한 쪽에선 나이든 여성을 River Run 했고 이내 살해했다.

 

 

a65000aa1806b363baff5a40ca5dcffd9fbd8bbc4f378550bfa692b1420d1929da77ee1770af9800fbda50ec155c14

데이르야신 희생자를 수습한 현장

 

이 학살로 93명의 데이르야신 주민들이 학살 당했다. 당초 170명으로 알려진 희생자보단 적은 수치지만 유대인 군인들은 그 수치를 과장했으면 했지 축소하지는 않았다. 주변 마을이 학살의 공포를 느끼고 빨리 도망가게 하기 위해서 였다. 데이르야신은 그것을 위한 본보기였다. 유대인 군인들은 모든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팔레스타인 준군사 조직의 군사기지로 여겼기에 학살과 전투 중 사망을 따로 구분 하지는 않았다.

 

이후 데이르야신 주변의 칼루냐Qalunya, 사리스Saris, 베이트수리크Beit Surik, 비두Biddu는 데이르야신과 같은 운명을 겪지 않았지만, 유대군은 한 마을 당 한 시간의 시간을 줘서 짐을 꾸릴 시간을 준 후 집을 폭파하고 사람들을 내쫓았다. 수세기에 걸쳐 살아온 집을 한 시간 안에 비워야 했기에 이들이 살았던 집에는 아직 물건들이 많이 남았고 장교들과 병사들이 전리품으로 물건을 약탈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무사한 마을은 아부가우시Abu Ghawsh와 나비사무일Nabi Samuil 단 두 곳이었는데, 마을 촌장들이 그 지역 슈테른 지휘관들과 비교적 다정한 관계를 쌓았기에 살아남았다. 오히려 하가나 부대가 이 두 마을을 때려 부수려 하자, 슈테른 부대가 마을을 구하러 오기까지도 했다. 어디까지나 이건 특별한 경우에 속했고, 예루살렘 주변 마을 수백개는 칼루냐와 사리스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도시 파괴

4월 초 데이르야신과 같은 학살사건과 수백개의 마을이 순식간에 파괴되는 와중에 위임통치령의 당사자 영국과, 국제연합은 이런 막장 상황에 수수 방관했고, 유대 지휘부는 더욱 거리낌이 없어졌다.

 

데이르야신 학살 3일 뒤 티베리아스 인근 키르바트나스르알딘Khirbat Nasr al-Din이란 마을이 골라니 여단에 저항했다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자 수많은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랍인 5천 명과 유대인 6천 명이 조화롭게 살던 이 도시는 곧이어 도시 주변 언덕에 이스라엘 군이 포대를 차리고 포격을 하자 혼돈의 상태가 되었다. 아랍 해방군이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왔지만, 영국이 도시를 차단하여 겨우 30명 만 도시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유대군은 거리낌이 없어졌다. 하가나 부대는 언덕에서 드럼통 폭탄을 굴러대고 확성기로 소름끼치는 소음을 틀어 주민들에게 공포를 유발했다.

 

 

 

1ea9df25eec53daa6280fea011d91b1eec2e39149587734f0dbbb8133bf8752ed0d6eb2d

당시 하이파를 지키던 영국군 최고 지휘관인 휴 스톡웰의 사진

하이파에서 그나마 사람을 찾아 뽑은 팔레스타인 사절 들을 향해 휴 스톡웰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후회하기 전에 재고하시지요. 당신들은 유대인들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은 꽤 공정하거든요. 삶이 파괴되도록 손을 놓지 마세요. 이 싸움은 당신네들이 시작했고, 결국 유대인들이 승리할 겁니다.

 

영국은 티베리아스에서 알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처음 그들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보호하겠다고 말했지만, 곧이어 말을 바꿔 유대군과 협약을 맺고 도시를 비우라는 재촉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요르단의 압둘라 1세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자와 아이들을 수송하기 위해 트럭 30대를 보낸 것이다. 압둘라 1세는 후일 제2의 데이르야신을 막기 위해 인도주의적 행동 했다고 주장하지만, 후에 언급하겠지만, 2차 대전 후 보인 압둘라 1세의 행보와 이스라엘과의 밀약, 그리고 압둘라 1세 개인의 사정을 보면 완전한 선의로 트럭을 보낸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47년부터 이르군의 테러행위로 하이파는 혼돈에 빠졌다. 하이파의 부유층 최소 15,000명이 도시를 빠져나갔고, 도시의 경제는 붕괴되었다. 부유층이 하이파를 빠져나갔다는 의미는 그 밑에 딸린 식솔들을 포함하여 최소 55,000명에서 60,000명에 이르는 하이파의 시민들이 도망친 것이다. 하이파의 부유층이 탈출한 것은 숫자 이상으로 더 심각했다. 혼란에 빠진 팔레스타인인들을 지도할 사회지도층이 소멸한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무장한 아랍 해방군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상황에서 48년 4월 하이파의 주민들은 유대군의 손아귀에 놓인 상태 였다.

 

이론 상 영국군이 있었지만, 앞서 티베리아스와 나흐손 작전 당시의 영국군의 태도에 비추어 볼때 이들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하이파에는 다수의 영국 군대가 있었고, 이들은 하이파시 치안에 대한 법적, 도덕적 책임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영국의 정치인들이 인정했지만, 하이파에서 보여준 영국군의 무관심은 대영제국 중동 진출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48년 4월 18일 영국인들은 당초에 8월 아니 앞당겨서 5월 까지 하이파에 머물 예정이었지만, 2일 후에 영국군은 하이파와 유대군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포기하고 철수할 것이라고 통보한다. 하이파의 영국군은 그나마 유대군의 공격을 막던 유일한 장애물이었지만, 이제 완전히 그 역할을 상실한다.

 

한편 유대군은 유엔 결의안에서 할당된 이 항구도시를 손에 넣기 위해 작전명 가위Misparayim란 이름 하에 하이파시를 완전히 차단한다. 하가나 최고의 정예부대인 카르멜리 여단Carmeli Brigade을 투입하고 영국군이 사라지자, 작전명을 가위에서 누룩 청소bi'ur hametz 작전으로 대체하였다. 유월절 전날 집에서 빵이나 밀가루의 흔적을 없애는 유대인의 전통을 의미하는 건데, 팔레스타인인들을 이 유월절 전날 밀가루처럼 완전히 지워버리겠다는 의도로 지은 이름이었다. 작전 개시일은 유월절 전날 4월 21일 이었다.

 

 

7fef8036fd9f15a97cbbd3b61ed02d0217971682688114ba0a1b20b6fbba39e81d10f442ccdda58a6705

하이파에 살고 있는 민간인들을 향해 무차별 살육과 포격을 명령한 모르데하이 마클레프의 사진

 

작전 당일 하이파 주둔 영국군 사령관 휴 스톡웰 Hugh Stockwell은 하이파시 팔레스타인 대표 4명과 만나 회담을 가진다.그들은 혼란의 와중에 하이파 시 팔레스타인인 대표가 된 사람들로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떠한 준비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휴 스톡웰의 자비를 믿었지만, 스톡웰은 냉정하게 팔레스타인인들이 도시를 떠나면 좋겠다고 조언을 한다. 그들은 그 말을 듣고 최악의 상황임을 직감하고 스톡웰에게 질서정연하게 도시에서 나가고 싶다고 스톡웰에게 청했지만, 도시의 운명은 이제 스톡웰의 뜻이 아닌 유대군 정확히는 카르멜리 여단의 뜻에 달렸다.

 

도시는 혼돈 그 자체였다. 점잖은 사람이라 알려진 유대인 시장 샤브타이 레비Shabtai Levi는 시민들에게 집에서 그대로 있을 것을 간청하며, 아무 피해가 없을거라 말했지만, 카르멜리 여단의 작전 장교 모르데하이 마클레프Mordechai Maklef는 휘하 부대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마주치는 아랍인은 전부 죽일 것. 불이 붙는 물체는 모조리 태우고 폭약으로 문을 딸 것."

 

하이파의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카르델리 여단의 살육행위에 공포에 떨며 살기 위해 해안가로 달려 갔다. 다른 도시나 마을들과 다르게 이들은 짐조차 꾸리지 못하고 허겁지겁 항구로 도망쳤다. 일단 항구엔 배가 있고 배나 보트, 뗏목을 구해서 타면 유대군의 살육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이파에 그나마 자체적으로 임명된 지도부는 광기의 도가니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했다. 한편 카르델리 여단은 주민들이 항구에 모여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현재 하이파시 로스차일드 병원이 있는 언덕 일대에 3인치 박격포를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이 한 곳 몰리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들은 하이파시 시장을 목표로 사격을 실시했다.

 

 

38b3c231e49f3aa36fbcde8a449c7573cdd7afd2bfd8c202a513696a9dcb81

하이파에서 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바닷가로 뛰어들고 있다. 이후 골다 메이어를 포함한 수많은 이민자들이 하이파로 들어왔는데, 갑자기 사람이 증발해 버린듯한 기괴한 도시 풍경에 서유럽 난민들은 홀로코스트를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은 자기 부모가 겪었던 포그롬이 생각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남자들은 친구들을 밟고, 여자들은 자기 아이를 밟고 도망쳤어요. 항구에 있던 보트들은 금세 살아 있는 화물로 가득 찼지요. 보트마다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끔찍했습니다. 여러 대가 뒤집어져서 승객들과 함께 가라앉았어요.

하이파시 팔레스타인 생존자 증언

 

결과는 끔찍했다. 수많은 사람이 밟혀 죽고, 과적으로 단체로 수장당했다는 끔찍한 광경에 보고를 받은 영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몇몇 관리들은 자기들이 손을 놓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어떤 재앙을 몰고 왔는지 깨닫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영국 외무 장관 어니스트 베빈은 모든 문제에 손을 놓은 휴 스톡웰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스톡웰의 상관이자 대영제국 참모총장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스톡웰을 옹호했다.

 

우리는 영국 당국에 부상자 지원을 요청했음에도 영국 쪽이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은 데 대해 비통한 감정을 느끼며 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이파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휴 스톡웰에게 보낸 편지

 

 

19b5d519d6c73dbc5190c6b004d030341a251518bd16a8edf4366f249bbe34aa0ebc71047fc60ddaaac42e28fe0d5a953f972a3f1a4e20ad3feb683eab37d5ed7c

휴 스톡웰은 하이파에서 유대인의 살육을 방관하여 수많은 팔레스타인인 희생자가 내도록 만들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팔레스타인 복무를 공적으로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연상케 하는 하이파의 함락 이후 팔레스타인 도시 가운데 곳은 아크레, 나사렛, 사파드 만이 남았다. 사파드는 아랍인 9,000명에 유대인 2,400명이 살던 도시였는데, 시온주의엔 관심이 없는 초정통파가 대부분인 도시였다. 4월 중순 부터 시작해 5월 1일 까지 시리아 출신의 카리스마 장교 이하슨 캄 울마즈Ihasn Qam Ulmaz가 팔마흐의 공격에 맞섰지만, 팔라흐는 사파드의 외곽 농촌부터 차근 차근 점령 했고, 결국 병력의 부족으로 사파드 역시 함락되고 만다. 5월 6일엔 아크레와 베이산(베이산 점령은 골라니 여단의 기드온 작전Operation Gideon으로 알려져 있다.)이 함락 당한다.

 

유령도시 예루살렘 그리고 저항의 불씨 야파

 

유대군이 48년 4월 도서 서부의 아랍 동네를 포격하고 데이르야신에서 계획적 학살 사건을 벌이자, 예루살렘은 순식간에 유령도시로 바뀌게 된다. 이미 부유한 팔레스타인인들은 몇 주 전부터 유대 군사조직의 폭력에 도시를 떠난 상태였고, 나머지는 집에서 쫓겨 나갔다. 예루살렘에도 영국군이 있었지만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며 방관했다.(다만 알후세이니와 나샤시비, 칼리디 등 팔레스타인 명문가문이 자리 잡은 구시가 성벽 바깥의 셰이크자라 지역만은 현지 영국 사령관이 개입했다.)

 

1948년 예루살렘 점령 당시 유대군에 내려진 명령은 명확했다.

"동네를 점령하고 주택을 모두 파괴할 것"

예루살렘에 대한 청소 공격은 1948년 4월 24일에 개시되었다. 영국군은 여기서 악랄한 역할을 했는데, 예루살렘에 그나마 무장을 가지고 있던 주민들을 무장해제 시키면서 이들을 영국군이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유대군이 오면서 개같이 깨져버리고 만다.

 

 

05a8c335e0db369945b7d7b91fd52d0242dfc9e24897971080cd51f9dacbd66852c08cda1b0bd3

유대군의 살육으로부터 외부로 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애를 쓴 사람인 후세인 알 칼리디Hussein al-Khalidi 박사 그는 후에 요르단에서 총리를 역임하게 된다. 그는 명문대학인 베이루트 아메리카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이미 1월부터 있었던 유대군의 폭격으로 예루살렘에 있던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했다.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아랍 고등 위원회 서기 후세인 칼리디 박사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 앞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시위했고, 병원의 의사들은 본인에게 와서 시체를 덮을 덮개도 떨어지고 병원에 부상자들로 가득하다고 호소했다. 영원의 도시였던 예루살렘은 끝없는 포격으로 인해 무정부의 도시로 바뀌었다.

 

유대군은 셰이크자라에 대한 공격이 영국군의 저지로 인해 무산되자 하이파에서 쓰던 것과 같은 3인치 박격포를 동원하여 예루살렘 북부와 서부를 포격했고, 4월 말 카타몬이 함락되고 슈파트Shu'fat란 동네만이 유일하게 함락당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하가나 정보 국장 이츠하크 레비는 카타몬 함락 당시 유대군과 시민들이 약탈과 강도행위를 저질렀다고 회고했다.

 

1948년 5월 중순 요르단 아랍 군단이 참전하자 예루살렘에 대한 이런 청소 작전은 중단되었다. 앞서 언급하다시피 요르단 군대는 그당시 중동에서 영국군의 훈련을 받은 군대다운 군대였고 카타몬 공격당시 요르단 군의 개입으로 함락이 잠시 늦어질 정도였다. 일부 요르단 군은 그 전부터 예루살렘에 들어와 방어군에 들어가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유대군은 이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나는 지휘관의 브리핑에 대해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목표는 거의 모든 대가를 치르고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전투가 계속되어야 했고, 끔찍한 부상과 인명 손실이 있더라도 계속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 우리들은 “거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라는 말이 무섭고 검은 산처럼 우리를 괴롭힐 순간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가나 하렐 여단 소속 우리 벤아리Uri ben-Ari의 회고

 

 

3ebcde6bf6db35a960f2dbba18d03729f0b4e35b083f9c718a9f12d377eb2946da4c00c5e33d588255697e

산 시몬 수도원의 전경, 나흐손 작전 당시 압드 알카디르 알후세이니의 병력이 유대인에게 위협적이었다면, 산 시몬 수도원을 둘러싼 일련의 전투는 나흐손 작전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전투였다.

 

예루살렘 서부 카타몬 지역의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인 산 시몬San Simon 수도원은 치열한 공방전의 중심이었다. 4월 22일부터 시작된 산 시몬 수도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에서 대략 40명의 팔마흐 부대원이 아랍군의 반격에 전사했다. 하지만 이들이 이 수도원을 점령하지 않으면 나흐손 작전의 핵심 목표인 예루살렘 내의 유대인의 구원에 실패한다는 의미였다. 젊은 장교들이 앞장서서 요새화된 수도원을 뚫었고 26일에 많은 유대군이 전사하고 서야 산 시몬 수도원은 함락되었다.

 

이런 치열한 혈투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주변 마을은 초토화되고 예루살렘 또한 점령 당하고 말았다. 8개의 동네와 39개의 마을이 작전 와중에 청소되었고, 사람들은 예루살렘 동부로 쫓겨나갔다. 마을은 사라졌고, 팔레스타인인들이 버리고 떠난 집은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의 몫이 되었다.

 

청동기 시대부터 역사가 시작된 유서깊은 도시 야파는 국제적인 도시 답게 다양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야파를 지키기 위해 모였다. 현지 기독교도인 미카엘 알이사Michael al-Issa가 아랍 지원병의 지도자를 맡은 가운데, 독일에서 건너온 성전 협회의 2세대 정착자들과 보스니아계 무슬림들도 참여했다. 대략 1,500명의 군대(저항다운 저항을 한 사파드의 방어군이 400명인걸 감안하면 야파의 방어군은 정말 많은 것이다.)가 5,000명의 이르군, 하가나에 맞서 3주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4월 부터 시작된 전투는 5월 중순까지 이어졌는데, 영국의 중재로 하이파와 같은 혼란을 겪지 않고 5만의 야파 시민 전체가 추방당한다. 물론 상대적으로 하이파와 같은 참극은 없을 뿐이지 과적으로 인해 살아있는 화물이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7febd17eb6d76aa73fba8eb41382253bc09599957ce5ab68eb5e1bf5c03f16f6daa1c5d0beaeacc9edc923faaf7e2c17c9f90f447851f6ba27994fc3419ffa1d3bc3fd4d64fddfe3f18f95a93a7c07e4c0e33333c1bb978589e61949521c35a1965cfb236e4f3e7b7a91348c209322a069916546e979480e4f2143a3acab58e4280b5933a78937b200cb00e8dae3b58ec465cd4d518a7be804ec129ee54e10c49db2b63e71e70305a2358a6a0dcea801781e410f633a351abd1b15bd07163b09db2699dd48015000929dfeb5bb67e8

이스라엘에 대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의 원한은 매우 극심했고, 이스라엘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테러행위를 하는 PLO가 탄생하게 된다. 어쩌면 PLO의 탄생은 이스라엘 건국과 그 과정에 대한 유대인의 업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야파가 함락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주요 도시와 마을들은 모두 정리가 되었다. 야파 주변엔 24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흔적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모조리 파괴되었다. 17개의 무슬림 사원 중에서 1개의 사원 만 빼고 모조리 파괴당했다. 쫓겨난 사람들은 이후 다시는 고향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몇몇 피난민 가운데 정치의식이 싹튼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조직을 만들게 되는데 바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였다.

 

계속되는 청소

달렛 작전 당시 앞서 언급한 것 처럼 하가나는 세세하게 하달된 명령을 받고 그것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고 하가나의 보조로서 이르군이 동원되었는데, 하가나가 핵심 목표를 정리한다면 이르군은 주변의 보이지 않는 세세한 목표들을 정리하는 데 치중했다. 완전히 분업화된 방식으로 하가나와 이르군은 서로 협업을 하며, 마을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런 파괴에서 살아남은 마을은 너무 작아서 있는 줄 조차 몰랐던 마을들 만이 살아남았다.

 

1948년 4월 7일 수요일 협의체는 다시 회동을 하여 텔아비브-하이파 간 도로, 제닌-하이파간 도로, 예루살렘-야파 간 도로상의 모든 팔레스타인 마을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협의체의 명령에 따라 3월 30일부터 5월 15일 사이에 해당 목표의 마을 200곳이 점령당하고 주민들은 쫓겨났다. 그리고 독립전쟁 직후 5월 15일부터 6월 11일 사이에 90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일을 이스라엘 건국 전쟁 시작 당시 아랍인은 도망가고 유대인은 맞서 싸웠다고 기술했지만, 실제의 기록은 이스라엘의 주장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에인 알제이툰 학살

데이르야신 학살과 마찬가지로 유대군은 도시 주변의 마을을 하나 골라 마을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는 마을 주변의 도시와 소도시 그리고 주변 마을이 이 참극을 알고 도망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벌인 학살이었다. 대표적으로 티베리아스 인근은 나스르알딘, 사파드의 에인알제이툰, 하이파 인근의 티라트하이파가 대표적인 예시 였다. 이중 에인 알제이툰 학살이 가장 유명하다.

 

08b4de19e4de759c6bb6c2a0189f2e2da75fd5b713021c77afef4a32

유대계 군사조직 팔마흐에 의해 작살난 에인알제이툰의 전경

 

에인 알제이툰이 학살의 목표가 된 건 지역 유대인들이 에인 알제이툰의 아랍인들이 1929년 아랍 폭동에서 유대인을 죽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략적 목표 이전에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또다른 보복의 차원에서 유대인들은 해당 학살을 벌였다. 사실 에인 알제이툰은 땅이 비옥하고 온천이 있어 현지 유대인 정착민이 가장 탐내는 마을이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땅을 사면서 현지 팔레스타인인들과 마찰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서로 공존하며 지내던 다른 지역과 다르게 이 지역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사이가 극도로 냉담한 지역 이었다.

 

일명 빗자루 작전이란 이름하에 벌인 이 작전은 모셰 칼만Moshe Kalman이 이끄는 팔마흐 부대가 주축이 되어 벌어졌다. 모셰 칼만은 그 근방의 키사스, 사사, 후세이니야에 잔혹한 작전을 벌인 걸로 유명한 지휘관 이었다.

 

 

08b4de19e4de759c6bb6c2a018ee2d349c8e17a53905d5685789359e48b345

에인알제이툰의 전투 이후 포로가 된 아랍인들

 

마을에 포격이 시작되자 마을을 지키던 시리아 방어군은 모조리 도망갔다. 시리아 자원병이 도망가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노인, 여성, 아이들, 소수의 젊은 남성들은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그리고 팔마흐 대원들은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공식기록으로는 70명이 죽었다고 했지만, 그 마을에 있었던 몇몇 팔마흐 대원들은 실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호나탄Yehonathan은 계속 소리를 질렀고, 갑자기 메이르케Meirke를 등지고 돌아서는 화를 내며 걸어 나왔다. 그러면서 계속 불만을 쏟아냈다. "그자는 제정신이 아냐! 수백 명이 거기 묶인 채 엎드려 있다고! 가서 그 사람들을 죽여! 가서 수백 명을 해치우라고! 미친 놈이 이렇게 사람들을 묶여 놓고 죽이지. 미친 놈이나 이 사람들한테 총알을 모조리 허비하는 거야! ....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누가 그 사람들을 조사하러 올지 모르겠지만, 일이 급해진 건 알겠어. 갑자기 이 전쟁 포로들의 손하고 발을 묶은 매듭을 풀어야 되는데, 다들 죽어 있더라고. '문제가 해결된 거지'"

팔마흐 대원 네티바 벤예후다의 증언, 그녀는 처형당한 사람의 수가 500~600명이라고 말한다.

 

1948년 5월 말 나는 복무하던 군부대에서 임시 펌프장을 건설해서 "버려진 마을"인 에인알제이툰의 개울물로 대대에 물을 공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을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고, 파편들 사이로 시체가 널려 있었다. 특히 우리는 지역 사원 근처에서 여자와 아이와 갓난 아기들의 주검을 많이 발견 했다. 나는 시체를 태우자고 군대를 설득했다.

한스 레브레히트Hans Lebrecht의 회고The Palestinians, History and Present에서

 

에인알제이툰 이후에도 1948년 5월 15일 이후 탄투라Tantura와 다웨이메흐Dawaymeh에서도 대량 학살은 일어났다. 사파드시의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의지를 꺽기 위해 유대군은 비리야Biriyya를 비롯한 사파드 주변의 마을을 소각했다. 이 광란의 학살과 파괴에서 살아남은 마을은 단 두 곳밖에 없었다.

3개의 댓글

2022.10.23

이정도면 전범 재판감인데 ㄷㄷ

0
2022.10.25

미친놈들;;

0
2022.10.26

아랍인들이 이 사건을 가리켜 '알 나크바(재앙)' 라고 부르는 게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14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3 FishAndMaps 3 1 일 전
1213 [역사] 인류의 기원 (3) 3 식별불해 6 3 일 전
1212 [역사]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ver2 19 FishAndMaps 15 10 일 전
1211 [역사] 군사첩보 실패의 교과서-욤 키푸르(完) 1 綠象 1 10 일 전
1210 [역사] 아편 전쟁 실제 후기의 후기 3 carrera 13 13 일 전
1209 [역사] 왜 사형수의 인권을 보장해야만 하는가 72 골방철학가 62 24 일 전
1208 [역사] 세계역사상 환경적으로 제일 해를 끼친 전쟁행위 17 세기노비추적꾼 13 29 일 전
1207 [역사] 송파장과 가락시장 5 Alcaraz 9 2024.03.28
1206 [역사] 미국인의 시적인 중지 4 K1A1 17 2024.03.26
1205 [역사] 역사학자: 드래곤볼은 일본 제국주의사관 만화 17 세기노비추적꾼 13 2024.03.23
1204 [역사] 애니메이션 지도로 보는 고려거란전쟁 6 FishAndMaps 6 2024.03.13
1203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3 FishAndMaps 4 2024.03.08
1202 [역사] 지도로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동안의 기록 9 FishAndMaps 12 2024.03.06
1201 [역사] [2차 고당전쟁] 9. 연개소문 최대의 승첩 (完) 3 bebackin 5 2024.03.01
1200 [역사] [2차 고당전쟁] 8. 태산봉선(泰山封禪) 3 bebackin 4 2024.02.29
1199 [역사]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이야기 3 에벰베 6 2024.02.28
1198 [역사] [2차 고당전쟁] 7. 선택과 집중 bebackin 4 2024.02.28
1197 [역사] [2차 고당전쟁] 6. 고구려의 ‘이일대로’ 2 bebackin 4 2024.02.27
1196 [역사] [2차 고당전쟁] 5. 예고된 변곡점 1 bebackin 3 2024.02.26
1195 [역사] [2차 고당전쟁] 4. 침공군의 진격 1 bebackin 3 2024.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