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플랜 달렛"-1

나는 강제 이주에 찬성합니다. 강제 이주라고 해서 부도덕한 점은 없습니다.

다비드 벤구리온 1938년 6월 유대 기구 집행 위원회에서

 

 

이스라엘 텔 아비브의 쉐라톤 호텔에 가면 이런 명판이 하나 있다. 내용은 대략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의 지휘부 이자, 이스라엘의 국부 다비드 벤구리온의 본부 였으며, 이스라엘 군의 모태인 하가나(Haganah)의 본부, 그리고 이스라엘 독립 선언이 발표된 장소라는 것이다. 이 건물은 텔아비브 초기 북부 야르콘가 바다 가까이에 있는 건물로서 1920년대, 이 건물을 설계하고 지은, 유대인 건축업자들과 장인들의 노고가 깃든 건물이었다. 원래 하얀색인 건물에 레드하우스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건물이 아마 1947년 말까지 지역 노동자 협의회 본부로 사용되었고, 1970년대 시온주의식 사회주의인 키부츠의 본부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지중해의 태양이 이 건물을 비출 때 건물을 물들인 연분홍색 광경 때문에 레드하우스로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건물에서 있었던 일을 듣는 다면 레드하우스의 의미가 조금은 다르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쉐라톤 명판에는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수 천 명의 사람들을 살해하고, 수십 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는 계획이 이 레드하우스에서 국부 다비드 벤구리온과 소수의 몇몇 정예 장교들의 계획하여 치밀하게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계획을 암호명 플랜 D, 여호수아 계획 등 다양하게 언급하지만, 주로 널리 알려진 이름은 하나이다. 플랜 달렛 Plan Dalet

 

전간기와 건국 준비 운동

 

1878년 팔레스타인에 최초로 건설된 시온주의 유대인 공동체 페타 티크바 Petah Tikva(사진은 1930년대)

 

드레퓌스 사건으로 시온주의가 대두되기 이전이었던 1878년 부터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은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현지 지주에게 땅을 구매하여 농사를 짓고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았고, 그후로 점차 시온주의가 대두되며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촌을 이루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가동된 시오니즘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주의가 결합된 제국주의의 부산물 중 하나였다. 적잖은 사람이 팔레스타인에 이민을 왔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서 유대인이 차지하는 면적은 매우 적었다. 1918년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 인구에서 시온주의자가 차지한 비율은 5%에 불과했다. 이주민이 더 증가한 1920년대에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의 비중은 최대로 잡아도 10% 였다. 1948년 독립전쟁 시작 직전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이 차지한 토지는 고작 5.8%에 불과했다.

 

 

밸푸어 선언을 기념하기 위한 예루살렘에서 만든 그림엽서

 

1차대전 시기, 영국은 오스만 제국에 반감이 강한 아랍인들의 봉기를 이끌어 내기 위해 맥마흔 선언을 발표하여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에 불을 지폈고, 동시에 세계 금융에서 큰 영향을 차지하는 유대인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벨푸어 선언이 발표하였다. 한 패권국에서 이런 모순된 선언들이 서로 충돌되었는데, 우습게도 영국은 패권국의 오만함을 가지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아랍국가의 건설과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이 진심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1929년 예루살렘에 주둔 중인 영국군, 통곡의 벽을 둘러싼 1929년 아랍폭동으로 유대인 133명과 아랍인 116명이 살해되었는데, 이들 모두 서로의 정착지와 종교시설을 파괴했다.

 

이 당시 영국의 총리인 로이드 조지는 친유대인 적이며, 또한 아랍인들을 "무함마드교도"라고 부르며 경멸했는데, 이와 같이 20세기 초에 영국의 지배지인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이 몰려오는 것에 기독교 국가들은 일종의 성스러운 계획으로 여기며 반기고 있었는데, 종교적인 목적 외에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는 민족주의 성향이 점점 강해지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억제하는 일종의 제국주의적인 용도가 있었고, 이 때문에 1929년에는 통곡의 벽을 둘러싼 마찰로 아랍인과 유대인의 다툼이 일어나 수백 명의 인명이 사상 당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1920년대 말에는 유대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할 정도였다.

 

하가나의 탄생

 

하가나의 창시자 오드 찰스 윈게이트(Orde Charles Wingate), 시온주의자였던 윈게이트는 2차 대전 중 비행기 사고(1944)로 사망한다. 참고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제정신이 나간 독특한 사람이라고 평했고,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윈게이트가 잘한 것은 그가 비행사고로 죽은 거라고 평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그 수를 점점 불리자 영국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하나의 준군사조직을 만든다. 바로 그 유명한 하가나(히브리어로 방어라는 뜻)라고 할 수 있겠다. 팔레스타인 장교 찰스 오드 윈게이트는 표면상으로 유대인 이주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란 명목하에 하가나를 훈련시키는데, 동시에 하가나에 호전적 분위기를 부대에 정착시켰다., 하가나는 훗날 이스라엘군의 전신이면서 2차대전 전에는 영국군의 보조전력 중 하나로 이용되었다. 아랍지역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하가나는 영국군과 주로 같이 투입되었는데, 이때의 경험과 2차 대전 중에 다수의 유대인들이 영국군에 참여하여 싸움으로써 얻은 전투 경험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과 동해 4월의 달렛 계획에 유용하게 쓰게 된다.

 

건국의 설계자 다비드 벤구리온

1949년 벤구리온의 사진, 60대의 노구에 카키색 군복과 권총, 아랍식 복색인 쿠피야kufiyya를 목에 두른 이 모습은 벤구리온의 상징이 된다. 

여담으로 이 사진에는 제17대 이스라엘 총리인 이츠하크 라빈과 총리대행(1969) 이갈 알론이 벤구리온 주변에 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192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시온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본명 다비드 그루엔 David Gruen으로 태어난 그는 1886년 폴란드 푸옹스크 출신으로 1906년 열혈 시온주의자인 상태로 팔레스타인에 입국한다. 160cm대의 작은 키인 벤 구리온은 항상 카키색의 군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목에 쿠피야를 두른 상태로 그의 휘하의 군부대원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그는 노동 조합 지도자로 권력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후엔 형성되기 시작하는 유대 국가를 설계하는데 골몰 했다. 1937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제안 했을 때 그는 이 조건을 수락하면서도 이것을 좋은 출발점으로 삼아 팔레스타인의 최대한 많은 영토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하기를 열망했다.

 

그는 이후로 계속해서 시온주의 지도부에서 영향력을 높임과 동시에 장래의 국가는 유대인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시온주의 지도부에 그의 통념이 자리잡도록 만들었다. 벤구리온은 다른 시온주의 지도부 동료들과 다르게 장기적인 과정과 종합적인 해법에 초점을 맞춰 독립국가 건설에 골몰했다. 다른 시온주의 지도부 동료들은 단순히 팔레스타인 이곳 저곳에 땅을 매입하고 집 몇 채를 산다면 언젠가는 팔레스타인에 적절한 영토를 획득할 거라 믿었지만, 실제로는 1933년 팔레스타인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와중에도 영토의 3% 밖에 획득하지 못한다.

 

민족적 기획

1945년 캐나다에서 연설하는 요세프 바이츠, 그는 임업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임업에 대해서 누구보다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점차 팔레스타인 전체에 대한 야욕을 가지기 시작했다. 위임통치시기 유대 기금 정착부 부장인 요제프 바이츠Yossef Weitz는 팔레스타인 각 마을에 대한 조사를 민족적 기획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훗날 이스라엘 2대 대통령이 되는 이츠하크 벤츠비와 유대 기구 정치부장이자 나중에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모셰 셰르토크를 포함한 관련자 전원이 기획에 찬성하면서 유대인들은 1930년대 말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각 마을에 대한 막대한 자료를 정보화 시키게 된다.  원래 주장한 바처럼 각 마을의 히브리 민족에 대한 기원부터, 위치, 교통, 토질, 수자원, 종교, 주요 소득, 사회-정치적 구성, 다른 마을과의 관계, 개별 남성의 연령과 촌장의 이름까지 세세한 사항을 기록해 두었고, 이를 유대인 기구의 최고 엘리트들이 참여한 가운데 앞서 이야기한 레드하우스에서 극비에 진행하게 된다.

 

이러한 극비적이고 편집증에 가까운 조사 후에 1947년 11월 시온주의 군 사령부는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적절하게 조직할 만한 지도자가 전무하다"

 

팔레스타인의 조직력은 영국인 1936년 아랍인 봉기를 진압하면서 군사적인 면에서 완전히 분쇄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영향을 끼치던 명가 알후세이니 가문의 압드 알 카디르 알 후세이니는 1936년 봉기 이후 이라크로 도망갔고, 1946년에는 이집트로 이주,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1948년 1월에야 비밀리에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의 친척이자 1936년 봉기의 주도자였던 아민 알 후세이니는 레바논에 갔다가 1940년대엔 아예 독일에 정착하여 나치에 협력했고, 전후에 프랑스에 체포되었다. 이후 프랑스가 그를 석방시키고 난 후에는 이집트 카이로로 망명을 갔다. 1942년 사실상 나치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유대인 기구는 자신들을 방해하는 실질적인 방해자를 영국인으로 낙점했다. 

 

"영국인들만 없었다면 우리는 아랍의 폭동[1947년 유엔 분할 결의안에 대한 반발]을 한 달 만에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42년 5월 뉴욕의 빌트모어 호텔에서 벤구리온은 아랍인과 유대인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고 칼로만 해결이 가능하며,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유대인 이민의 무제한 허용과 밸푸어 선언의 완전한 이행을 촉구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은 빌트모어 회의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빌트모어 회의의 내용은 1939년 네빌 체임벌린 정부가 내놓은 1939년 백서(아랍인과 유대인의 공동통치, 유대인 이민을 5년간 75,000명으로 제한)에 전면으로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친영파이자, 후에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인 하임 바이츠만은 빌트모어 회의의 내용에 반발했지만, 이미 상황은 과격한 시온주의자에게 넘어 갔다. 빌트모어 회의에서 발표된 강령은 훗날 세계 시온주의 협회의 기본 강령으로 자리 잡게 된다.

 

벤구리온을 위시로 한 과격파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영국이 아닌 미국에 맡기기로 결의했다. 이 당시 영국은 나치 독일과 싸우느라 온 국력을 쏟아부었기에 자신들의 강령을 대놓고 거부한 이들 시온주의자들을 제재할 수단이 없었다.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

1947년 11월 UN에서 제안한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 국제연합은 이렇게 나눠진 영토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의존하고, 융화하면서 잘 살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정 반대였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2차 대전은 끝났고, 세계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런 평화가 깃들지 않은 몇몇 지역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팔레스타인 이었다. 전쟁 이후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유럽에 학을 뗀 수많은 난민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찾아왔고, 그 수가 폭증했다. 영국인들은 불법적으로 들어온 유대인 난민들을 감금하기도 했는데, 유대인 군사조직은 영국군을 무시하고 유대인 난민을 풀어주기도 했다.(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 아틀리트Atlit 수용소에서 이 짓을 했다.) 2년 후 1947년 12월 전쟁 직전 팔레스타인, 그러니까 시온주의 지도부가 미래의 이스라엘 영토로 설정한 지역에는 약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슬람+드루즈+기독교)과 60만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1월 2일 유엔 총회 결의안 채택 한달 전 유대 기구 집행 위원회에서 벤구리온은 종촉 청소가 새로운 국가가 유대인의 배타적인 국가가 보장하는 대안적인 수단이나 보완적인 수단이 된다고 최대한 분명하게 말했다. 벤구리온은 청중들에게 새로 건설된 유대국가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유대국가의 제5열(내부의 배신자란 의미)이 될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그들(팔레스타인인)을 대량 체포하거나 추방할 수 있는데, 이들을 추방하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81)가 통과되었는데, 찬성 33표, 반대 13표, 기권 10표로 유엔의 이 같은 결정에 유대인은 환영했고, 아랍인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운스콥 UNSCOP)의 제안을 반대했다. 내용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그리고 유엔이 관리하는 예루살렘 특별지역으로 분할 했는데, 팔레스타인의 농업 가능 지역의 80% 공장의 40%를 유대인에게 넘기는 것에 상식적으로 찬성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랍 고등 위원회는 분할 결의안을 채택한 유엔의 결정에 항의하는 뜻으로 3일 파업을 선언하고 대중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흔히 보이는 짧고 별 효과도 없는 대응이었다. 이 시위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상점과 시장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유대인 버스를 매복 습격하는 일이 있었는데, 아부 키시크 패거리가 벌인 이 사건은 흔히들 1948년 전쟁의 도화선에 불 붙인 사건으로 기록되는데 기실은 그냥 범죄단체가 벌인 범죄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3일 뒤 시민들 사이에서 항의 시위를 계속하려는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총회 결의안 181호는 내용은 별로지만, 어쨋든 새로운 나라의 구상이 이뤄지고, 보이지 않는 한 구석에서 팔레스타인 민초들의 삶은 변함없이 지속되었기에 잠깐 불타 올랐다가 사그라 들었다. 물론 5달 뒤에 있을 이스라엘의 보복행위를 알았다면 그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 했을 것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공동체는 이제 아랍 연맹의 의장국인 이집트 카이로로 향했다. 처음 유엔 결의안이 통과되었을 무렵, 아랍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개별적이거나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 쪽을 선호했지만, 즉각적인 행동을 원하는 대중의 여론을 의식하여, 아랍 각국의 외무 장관들로 구성된 아랍 연맹 이사회는 아랍 해방군(Jaish al-Inqath)을 조직했다. [*아랍어 동사 "구원하다"(anaqatha)란 단어에서 온 말] 아랍해방군의 일부가 47년 12월 소규모 집단을 이뤄 팔레스타인으로 드문드문 진입했고, 유대 기구 협의체는 이 점을 구실로 삼아 하가나가 이미 진행 중인 작전을 한층 더 확대하는 계획을 논의했다. 벤구리온의 유대기구 협의체는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아랍 각국의 미지근한 반응을 환영했다. 누가 팔레스타인 민중을 지휘할 것인지, 목표가 무엇인지, 단순 지원자가 아닌 정규군을 얼마나 파견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만 분분하지 명확히 정해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분할 결의안 채택되고 처음 3일 동안 협의체의 소수 정예 그룹은 매일 회동을 했지만, 이내 긴장을 풀고, 전문가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정상적인 삶을 계속하고 싶어한다고 보고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보를 모으던 정보 부대의 일원 팔티 셀라Palti Sela는 이들이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면을 보인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 이 시기 유대인 정착촌은 곧이어 찾아올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방어진지로 대피하거나, 지뢰 매설, 철조망 설치, 요새 보강, 울타리 수리 등의 갖은 준비를 한 반면 아직까지도 팔레스타인 마을은 그런 것에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친구처럼 반갑게 맞이할 정도였다. 그가 방문한 마을은 영국군 병원이 있던 아풀라(Afula) 인근 이었고, 아풀라에는 요르단(이들은 영국군 장교의 훈련을 받아 팔레스타인 주변에서 그나마 군대 다운 군대였다.)의 아랍 군단 부대가 주둔해 있었지만, 이들도 재앙의 전초는 미처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오히려 팔티 셀라는 보고서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곧이어 찾아올 팔레스타인 독립에 대해서 지극히 정상인 상태이고 선동은 예외라고, 이들 지금의 팔레스타인인 상대로는 보복이란 수단으로 어떠한 공세를 가할 수 없다고 요약했다.

 

1947년 12월: 무력 정찰

벤구리온 "폭력 행동이란 무슨 말입니까?"

에즈라 다닌 "교통수단(버스, 농산물을 수송하는 트럭, 승용차)을 파괴하고..... 야파에 있는 어선들을 침몰시키고, 상점을 폐쇄하고, 공장에 원료가 들어가는 걸 막는 것입니다."

벤구리온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에즈라 다닌 "처음에는 폭동을 일으킬지 모르지만, 결국 어떤 메시지인지 이해할 것입니다."

 

1947년 12월 10일 레드하우스 회의 내용, 회의의 발언자 에즈라 다닌과 여호수아 팔몬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저항 분자(팔레스타인 민족 단체 활동, 유대인을 공격한 자들)들을 처형하고, 군복무 연령에 해당하는 모든 남성들을 추방하거나 투옥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들을 이 일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여담으로 이 회의에선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이 팔레스타인에 고조되는 가운데, 이런 환경에도 팔레스타인 부유층이 완전히 떠날 기미가 안보이자 실망하는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협의체는 좀 더 협력적인 <아랍인>들을 통합하자는 구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이들 아랍인 역시도 오드 윈게이트가 주창한 보복의 대상에 포함 시켰다.

 

데이르아윱의 과거와 지금의 모습, 유대 협의체의 계획 하에 전주민이 무슬림인 데이르아윱은 이제 무인지대가 되었다. 마을은 숲이 되거나 이스라엘인이 소를 풀어놓은 목축지가 되었다.

 

오드 윈게이트의 전술(무력정찰)을 부활시켜 유대기구는 무슬림 인구가 대부분인 데이르아윱Deir Ayyub과 베이트아파Beit Affa를 시범적인 보복 대상으로 선정했다. 1947년 12월 데이르야윱은 얼마전에 새로 학교를 개교하였다. 학생 수는 51명 이었고, 주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학교를 새로 짓고, 선생까지 고용했다. 밤 10시 경 20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중대가 마을에 나타나 마을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 마을은 결국 1948년 4월 달렛 계획에 의해 주민들은 모두 쫓겨났고, 라믈라시 동남쪽 15km 지점에 있는 이 평범한 마을은 돌 울타리 흔적만 있는 폐허로 변했다. 가자지구의 베이트아파는 다행히 성공적으로 이들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당신네 마을로 전쟁이 번지면, 마을 사람들과 부녀자들이 대규모로 추방될 것이다. 이런 운명에 처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이 전쟁에서는 어떤 동정도 없이 무자비한 살상이 벌어질 것이다. 이 전쟁에 낑어들지 않는다면, 당신네 집과 마을을 떠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1948년 12월 시리아, 레바논 국경에 뿌려진 유대군의 전단

 

 

유대계 군사조직 팔마흐의 공격으로 파괴된 키사스, 평화로운 농촌 마을은 파괴되어 이스라엘의 키부츠가 되었다. 현지 에미르의 저택은 지금은 키부츠의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데이르아윱과 베이트아파 이후 다음 목표는 키사스Khisas로 정해졌다. 무슬림 인구 200~300명과 기독교인 인구 100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로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 인상적인 자연광경을 뽐내는 장소였다. 키사스 인근 키부츠 주민이 사적인 원한으로 살해당하자 이를 정치적인 의미로 곡해한 인근 유대계 군사조직 팔마흐Palmach 사령관은 1947년 12월 18일 주민들이 자고 있을 무렵 유대군은 마을에 들어와 닥치는 데로 총질과 집을  폭파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최소 10명의 민간인들이 유대인 군대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당시 상황을 주시하던 뉴욕 타임즈 기자가 놀라 하가나군 사령관에게 물으니 처음엔 작전을 부정했다 나중엔 인정했다. 벤구리온도 처음엔 이 작전 자체를 부정했지만 해를 넘겨 4월에는 성공적인 작전 중 하나라고 기록했다.

 

유엔 결의안이 채택된 1947말 이후 협의체의 군사 조직인 이르군과 하가나는 하이파를 첫 목표로 팔레스타인인과 팔레스타인인 소속 재산에 대한 갖은 테러를 일삼았다. 12월 초부터는 이런 공격을 빈번하게 가하기 시작했다. 유대 군대가 폭발물이 가득 찬 드럼통과 거대한 철제 구슬을 아랍인 주거 지역으로 굴리고 연료를 섞은 기름을 도로를 따라 쏟아 붓고는 불을 질렀다. 놀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그 불을 끌려고 하면 유대 군대가 기관총 세례를 쏟아 부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아직 교류를 하는 곳에서는 하가나가 폭발물과 신관을 잔뜩 실은 자동차들을 팔레스타인 측 자동차 수리소에 맡기고 폭발 시켜서 인명피해와 혼란을 초래했다. 이런 테러 공격의 배후에는 하가나의 특공대인 하샤하르(히브리어로 "아랍인이 된"이란 뜻)가 주축이 되었다.

 

유대측의 공격으로 아랍인과 유대인이 비교적 오랫동안 협력을 맺었던 하이파는 갈등의 공간이 되었다. 하이파에 있는 이라크 석유 회사 IPC에서 이르군 패거리는 공장에 출근하려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폭탄을 던졌다. 이르군은 이 같은 테러행위를 앞서 아랍인들이 유대인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은 폭동을 일으켜 유대인 노동자 39명이 사망했다.

 

마을을 포위하고, 최대한 많은 남자를 죽이고, 재산을 파괴하되 여자와 아이들을 공격하는 것은 삼가라.

발라드알셰이크 공격 당시 지역 하가나 사령관 하임 아비노암이 받은 명령

 

 

발라드알셰이크 학살 이후 사진

 

1947년 12월 31일 하가나 최고 사령부는 자기들의 행동에 영국이 얼만큼 반응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발라드알셰이크Balad al-Shaykh란 마을을 공격했다. 1930년대 영국에 의해 살해당한 팔레스타인의 존경받는 지도자 셰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Shaykh Izz al-Din al-Qassam이 묻힌 곳으로 약 3시간의 공격으로 60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그래도 훗날 4월의 참극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을 할 때 남녀구분은 했었다. 이후 유대군은 아랍인 동네 중 하나인 와디루쉬미야 Wadi Rushmiyya로 가서 거주민들을 쫓아내었다. 유대군들이 이런 만행을 벌이는 동안 영국군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방관했다.

 

이 외에도 현지 하가나 사령관이 로메마Romema란 지역의 주유소 주인이 유대인 차량을 공격하자는 발언을 빌미로 살해하자, 주유소 주인의 고향인 리프타Lifta 마을은 유대인 버스를 공격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 지역은 야파(오늘날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주민 대부분이 무슬림에 소수의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이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45년에는 동네에 여학교를 세울 정도로 활력이 넘치는 동네였다, 1947년 12월 28일 하가나 군대는 리프타의 커피하우스에 닥치는 데로 총질을 하고 유대인 군사조직 중 하나인 슈테른Stern은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닥치는 데로 총질을 했다. 이 공격으로 약 7명의 사람이 사망하고, 이후 48년 2월엔 마을 주민 전체가 유대인 군사조직의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을을 버리고 도망쳤다.

 

 

1948년 1월 6일 사미라미스 호텔 파괴 이후의 모습, 압드 알카디르 알후세이니의 지프가 보였다는 이유로 유대인 측에서 벌인 테러였는데, 정작 목표인 후세이니는 안잡고, 지역 명사와 유럽인들이 이 테러로 사망했다.

 

1948년 1월은 이런 테러 행위가 더욱 과감해 졌다. 1월 첫주엔 야파의 지역 민족 위원회 소재지인 사라야하우스Sarraya House에 폭탄을 터트려 26명이 사망했다. 예루살렘 서부 카타몬의 사미라미스 호텔도 테러하여 스페인 부영사 마누엘 아옌데 살라사르Manuel Allende Zalazar가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의 마지막 팔레스타인 고등 판무관인 앨런 커닝햄Allen Cunningham이 벤구리온에게 불만을 표할 정도였다. 하지만 벤구리온은 사과를 하지 않았다. 왜나면 이때에는 하이파에선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유대기구 협의체의 이같은 행동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공포를 심어 그들이 고향에서 더 빨리 도망치게 할 목적으로 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이파의 팔레스타인 명사들은 이같은 혼란에 고향을 떠나 도망쳤다. 대략 최소 1만 5000명이 도주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부유한 상인들이다 보니 하이파의 경제는 붕괴되었고, 도시의 빈민지역은 더 많은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47년 12월엔 아랍 비정규 병사들이 유대인 호위대를 공격했지만, 유대인 정착촌을 공격하는 것을 삼갔다.

 

유대인 협의 기구는 영국의 무신경함과 아랍 각국 정부의 기민치 못한 반응, 유대 군사 조직의 도발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팔레스타인의 모습을 보며, 성과 그 이상을 거둔 것에 기뻐했다. 이제 협의기구의 수장 벤구리온의 목표는 하나였다.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 의거 이스라엘에 할당된 영토 내 인구의 80%를 유대인으로 채우는 것. 그리고 아직 까지도 남은 사람들을 이제 완전히 쓸어버릴 때Tihur가 왔다는 것. 이제 달렛 계획은 코 앞으로 다가 왔다.

5개의 댓글

2022.10.23

암덩어리마냥 늘어나서 지들이 다 처먹었는데 이팔 분쟁에 어느 한쪽편만 들면 안된다는 새끼들은 국내에 참깨들 대거 이주해도 악으로 깡으로 버텨봐라 ㅅㅂ.

5
2022.10.23

유대 나-치

0
We
2022.10.23

2천년 전에 자기들 조상 살았었다고

다 나가라는게 말이나 되는지…

0
2022.10.23

신기한점은 유대인의 '최종해결'과 나치의 '최종해결'이 닮은 부분이 많단 말이지ㅋㅋㅋㅋ 나치를 벤치마킹 한 건가 싶기도 함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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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같은 유대인들도 출신 성분 따라서 차별하는 애들임.

3차 세계대전 일어나고 아포칼립스 시대 오면 이스라엘 놈들이 중동인들을 다 알라 곁으로 보내던가 중동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을 죄다 야훼 곁으로 보내버리던가 둘 중 하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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