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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초스압] 황금금붕어(2) - 느낌이란 무엇인가?

[철학][초스압] 황금 금붕어(1) - 무자각과 자각의 스케치 - DogDrip.Net 개드립

 

 

거의 졸업 직전이고,

열심히 적었는데 얼마나 읽어주실지는 모르겠네요.

연재를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한 요약은, <제가 만든 철학>에 관한 입문용 총정리입니다.

첫 번째 글부터 읽어주시면

이해가 쉬우니까 알아주시면 되실 것 같아요. (우측 상단에 올려놨어요!)

 

글 그래도 확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빠른 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쭉 내려서, 종 그림부터 읽으심 댑니다.

 

많은 분들이(가 아니고 사실 피드백을 주신 모두) 글쓰기 방식을 지적해주셨는데,

쓰다보니 한계가 느껴져서 주저리로 시작하겠습니다.

 

 

 

 

 

글쓰기 피드백에 관한 주저리

 

 

 

애초에 글을 잘 못 쓰는 편이기 때문에,

문체를 정돈한다고 해서 글이 나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썼다가 위에가 마지막 주의 문구였는데,

결국에 입장을 바꾸기로 했어. 글쓰다가 내 한계를 깨달아버렸어.

그래서 다 지우고 새로 쓸게.

 

무슨 깨달음이냐면,

내가 이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

 

 

아저씨.png.jpg

 

글쓰는 개붕이 : 내가 이해시켜볼게.

 

슉! 퉁퉁.

 

 

 

과녁.png.jpg

 

 

읽는 개붕이 :

8점짜리 이해도 있지만, 10점짜리 이해가 있어서 이해가 잘 되네!

흥미진진한 다음 논의를 위해서 다음 과녁을 바로 보고싶어.

 

 

 

 

아저씨.png.jpg

 

...?? 이해 잘 된게 맞나? 잘모르겠는데?

(사실 누구에게 제대로 설명해본적이 없는 설명 장님이었다. 과녁이 안보이고 칼이 박히는 소리만들린다)

 

 

열심히 많이 던져봐야겠다.

 

슉슉슉슉슉슉... 이 정도씩 박으면 대충 10점 박혔겠지? 다음 과녁으로 넘어가야겠다.

 

 

 

과녁2.png.jpg

 

* 개붕이들이 원하는 글의 상상도

 

해야 할 설명 깔끔하게 딱 마치고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글의 흐름. 

 

 

 

과녁3.png.jpg

 

 

* 개붕이들이 접하게 되는 난잡한 글.

 

읽는 개붕이 : 그만... 그만 이해됏어.... 글이 너무 느려... 제발 다음 설명 넘어가줘....

(이후에도 박아야 할 과녁마다 칼을 여러개씩 던진다. 제발 칼을 한두개씩만 던지라고)

 

 

 

왜?? 이런일이 발생할까?

 

<과거의 개붕이>

이정도면 이해시킬 수 있겠다! → 이해 못했어

이정도면 이해 진짜 시킬 수 있겠다! → 이해 못했어

 

이정도면...

그리고 이 분야의 사람이라면 진짜 이해 시킬 수 있을 거야!

 

이해 못했어

 

 

 

이 과정을 수년간 열 몇차례 정도 반복하자...

 

→ 이정도면 이해 시킬 수 있겠다! ... 정말 이해시킬 수 있는 거 맞나?

 

 

모든 이해시키기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글을 쓰다가 깨달은 점:

 

이 정도면 설명 잘 됐겠지? 했다가 빠꾸먹은적이

수차례라 부족한 자존감이 문제가 아니었고

 

설명이 잘 되었는지 곱씹어보는 감각이,

실패 경험의 반복 탓에 아예 사라졌던 것이었다.

 

 

<저번 글의 피드백을 읽고나서>

 

사람들이 이해해줄수있구나! 그러면 이제 간결하게 써도 되겠다. (저번 글에서 자신감은 생겼지만)

근데 어디를 어떻게 다듬어야 되는거지? (설명 판단 능력이 증발해버려서 똑같은 문제의 봉착)

 

 

────────────────────

 

 

 

 

더불어 <이해를 못 하겠다>만큼은 막고싶다.

읽다가 읽기가 싫어서 도망가는 분들은 몰라도

이해하려다가 이해가 어려워서 도망가는 사람들만큼은 막고 싶어.

 

그래서 도박 안하고 그냥 최대한 쉽게 적을게요.

 

 

 

 

결론 :

문체 점검조차 스스로 아리송하게 되었다. 글을 많이 써보고 보여야 할 필요성을 절감함.

그러니까 재밌게 쓰려는 욕심만 버리고 쉽게 쓰려고하는건 쭉 유지할게.

다른 딱딱하거나, 문학적이거나 그런 문체로 써보는건

이 글 다끝내고 글쓰기 감각 찾은 다음에 해봐야 할 것 같아.

이해시켜야 하는 지금에 바로 적용하기엔 확신도 안서고 섣부른듯

 

따라서 글의 목표는 <글 자체의 난잡함만 뚫고 꾸역꾸역 읽으면 일반인도 이해할수 있을 글>

 

난잡함을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읽기만 한다면 이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를 목표로 잡고 쓰겠습니다.

 

그래서 저번 글의 읽어주신 분들 포함해서

난관을 뚫고 읽어주시는 분들께 정말로 감사드릴게요...

 

결국에 피드백 반영 안됐다는거고

피드백 반영 못하게 되어서 진짜 죄송합니다...

 

*

당장의 글쓰기 피드백은 적용시키고 싶어도 방법을 잘 모르겠어서 적용을 못시킨거고

내용 피드백 외 글쓰기 피드백 같은 것도 다시 주셔도 정말 감사드리니까,

피드백 정말 환영해요! 감상도 좋구요. 반영하려고 어떻게든 노력하다가 글 갈아엎은거임. 이글도...

아모튼 피드백 절대 환영...!

 

 

 

 

글 시작할게요.

 

 

──────────────

 

 

 

1f514.png

 

이제 <자각된 무자각>이라는 무자각성에서 비롯하는

자각성까지의 맥락을 다뤄야 하겠어

 

자각성까지의 맥락이라고? 논의 A를 보았었을 때,

맥락 논의 불충분했다. 언급했던 부분이 있었을 거야.

 

A의 논의로 치부할게. 한 번 살펴보자.

 

 

 

 

맥락 이동에 관하여

 

A-5(-1)

 

 

 

<자각된 무자각>에서의 논의니까, 그러니까 일상적인 논의니까

그냥 가볍게 생각해보자.

 

일단 맥락은 무조건 현재가 중심이야.

왜? 맥락의 논의 편의를 위해서 다양하게 낙서될 가능성을 줄이려고.

 

 

깐풍기.png.jpg

 

뭔소리냐면, 온도의 맥락에서 깐풍기를 두고 과거랑 미래를 포함해서 생각하면

이 깐풍기는, 50°C가 될 수도 있고, 32°C가 될 수도 있고, 갓 튀겼을 때를 생각하면 73°C,

막 모든 온도가 가능하잖아?

 

가능성의 혼재를 줄이고 그나마 일상에서 파악될 현재를 효과적으로 논의하고자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은 죽이겠단 소리야.

 

지금 깐풍기! 하고 온도계 딱 꽂으면 몇 도인지 하나만 나올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현재의 온도만 다루겠단 소리지.

 

 

 

 

A-5(-2)

 

 

온도계를 꽂으면 현재의 온도 한 곳만 찝어주지, 이 온도이면서 저 온도이다.

이렇게 나오진 않잖아? 삐빅 이 깐풍기는 35도, 50도도 될 수있으니까

35도이자 50도입니다. 이러면 이 미친온도계는 뭐지?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릴거아냐.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에서도 똑같은거야. 현재만 보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무자각적 자각성이면, 무자각적 자각성인 거고.

자각적 자각성이면, 자각적 자각성인 거야.

 

 

11 수직선위점.png

예컨대 맥락을 수직선으로 나타내면 이 선 위에서 하나의 점이 움직이는

형태가 맥락인 거고,

위의 그림처럼 빨강 점, 파랑 점 두 가지가 모두 다 존재할 수는 없는 거야.

 

빨강 점만 있던가 파랑 점만 있던가. 그래야만 현재의 맥락이 성립이 되는 거야.

그리고 만약에 빨간 점 하나만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시간이 흐르면서 저 빨간 점이 수직선 위에서 이동하겠지? 맥락 정도의 변화에 따라서?

그걸 <맥락 이동>이라고 부르고 이 말은, 맥락 위에 이동이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는 거야.

 

그 <맥락 이동>이 시사하는 <정도>는, 오락가락한다.

<무자각성-자각성>은 무자각성이었다가, 자각성이었다가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러면서 수직선 위 어느 <위치>에 구애 받지 않는다.

그냥 맥락 위라면 아무데나 위치할 수 있단 소리.

 

잘 설정한 맥락이라면, 저 수직선 범위로 잡은 좌측 극단부터 우측 극단까지만

구애를 받을뿐.

 

 

 

 

 

A-5(-3)

 

 

즉, 저 점이 무엇을 함의하냐? 저 점이 뭐냐? 라고 묻는다면

이 하나의 점이 우리의 판단이자, 평가이자, 파악인 거야.

 

왜냐면 스스로 자각으로써 내가 무자각하고 있는지, 내가 자각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할 테니까 내가 확인해야 하잖아?

 

그러면 우리가 온도계를 꽂고 온도를 보듯이

아, 지금 내가 무자각적이구나, 자각적이구나, 어쨌든 나의 파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

그래서 저 점이란, 내 맥락에 대한 <주관적 수준 평가의 파악> 대상이다.

 

 

 

 

A-5(-4)

 

여담으로 덧붙이면 저 점을 마음으로도 이해할 수 있어.

<마음이 기울다> <마음이 치우치다> 는 관용 어법은

수직선 극단쪽으로 치우친 점에 비유해도 그럴싸하잖아?

 

기타 다른 마음 관용 어법에 대입해도 맞아떨어지는게 몇개 있을텐데,

그러니까 저 점은, 대충 뭉뚱그려서 <내 마음이다>라고 봐도 괜찮다.

 

맥락에 대한 간략한 논의 끝!

 

 

 

<A-5, 끝.>

 

1. 맥락은 논의를 어렵게 하는 혼재된 가능성을 피하고자 현재를 다룬다.

2. 맥락은 수직선으로 비유될 수 있고,

수직선 위의 점은 현재의 관점에 따라 단 하나가 수직선의 한계 범위에서 <맥락 이동>한다.

3. 수직선으로 비유된 맥락 위의 점은 나의 맥락에 대한 주관적 파악 대상이다.

4. 수직선으로 비유된 맥락 위의 점을 나의 마음이라고 이해함이 가능하다.

 

 

 

 

 

 

 

 

 

느낌의 맥락적 논의

 

B-1(-1)

 

 

 

자, 이제 진짜 무자각성과 자각성이 뭔지를 알아봐야 되잖아?

근데 논의 A-2에 따라 일상적 논의를 하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현재의 일상에서 무자각이랑 자각이 대체 뭘까? 이거부터 생각해봐야 하는 거야.

 

* 무자각, 자각이란 무자각성, 자각성의 일상적 용법

(무자각성, 자각성은 맥락의 영역적 측면을 강조하는 맥락적 용법)

 

 

자각? 일단 자각을 살펴보자.

자각... 이 뭔지는 대충 느낌 있지?? 대충 단어 잘 조합하면 설명할 수 있을 거같지?

알아차림? 뭐 이런 말로.

 

근데 무자각? 이건 감도 안잡히지 않아?

엄.... 이러잖어.

 

일단 지금은 자각적이잖아? 그치??

지금 나의 상태를 무자각적으로 바꿔보자고.

 

무자각이 뭔지 잘 모르겠으니까 무자각 알아보려면, 내가 무자각을 체험해보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최대한 자각하고 있는 지금 상태에서 무자각하려고 애써보자.

시간은 필요한만큼 얼마든지 써도 좋아.

 

 

 

미리 얘기해서 어떻게 하게 되냐면, 최대한 생각을 죽이려고 하게 된다?

생각을 죽이려고, 죽이려고 하다 보면......

또, 의도도 죽이려고 하게 되는데, 의도를 죽이려고, 죽이려고 하다 보면......

대충 무자각적이게 되었다 할 만한 상태가 되는데,

 

 

이 무자각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가 없게 돼.

 

 

왜? 생각도 의도도 없는데,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겠어?

그냥 어.............. 말도 못하고 이러는 거지.

그럼 무자각을 논해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나? 무자각에 대한 철학을 전개해야 하는데 말이야.

 

근데 유일하게 남아있는게 있어. 논해볼 게 하나 있는데,

무자각적인 상태에서는 <느낌>이랄 것만 남아.

 

그러니까 앞으로 느낌을 논해보자.

 

 

 

 

 

B-1(-2)

 

 

무자각을 글에서 전개하고 싶다면, 느낌을 분석해야 했고,

나는 나의 <무자각적인 상태에서의 느낌>을 탐구해봤어.

근데 개념화되지 않은 놈들이 튀어나왔고, 얘네가 느낌의 논의에서의 핵심들이야.

 

사람들한테 필요가 없어서 여태껏 개념화되지 않았던 느낌들이었는데,

내 철학에서는 필요성이 굉장히 높으니까 개념화한 거야.

나중에 어떻게 활용되는지 여러곳에서 출몰할거임. 특히 그림상 <C>에서 엄청 나올거임.

일단 이거 느끼고 읽는 개붕이들이 이해하고 자기 느낌에 개념 붙일 수 있다면,

논의 B에서 절반은 이해했다고 해도 마땅할만큼 유의미한 것들이니까 최대한 설명해볼게.

 

 

먼저 <종합감>이 있어. 이건 <무자각적 상황을 느끼는 느낌>이야.

이게 뭐냐고?

만약 너가 <종합감>을 느끼고 표현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거야.

 

<그냥...>, 혹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들어찬 것 없이 <중립적인 느낌>,

숫자에서의 0 같은 포지션이라고 생각해주면 돼.

 

 

또, <분리감>이 있어. 이건 <자각적 상황을 느끼는 느낌>이야.

만약 너가 <분리감>을 느끼고 표현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거야.

 

<...>!, <...>?, <...>앗, <...>음

 

 

 

그리고 이 둘, <종합감>과 <분리감>은 <맥락의 느낌>이다.

 

 

 

 

 

B-1(-3)

 

아직 감이 안잡히지? 예시 들어줄게. 특이 개념이라 예시 많이 들 거니까 감안해줬으면 좋겠어.

 

 

타이머.png

 

<타이머 예시>

 

그냥 해보면 됨. 다 해본 다음에 밑에 읽어봐.

-

지금 스마트폰으로 60초 타이머 잡고, 시작 누르고 타이머 안 보면서

속으로 타이머랑 딱 맞게 60초 세봐. 입밖으로 소리내지 말고.

 

느낌 자체가 개념 잡기 어려우니까 예시 다 체험하고 가는 게 좋을 거야.

 

 

 

 

 

 

.

.

.

처음에 그냥 세기 시작해서 아무 느낌없이 <그냥 초 잴 때는 종합감>

 

미약한 무언가가 느껴지기에 박자가 밀리거나 빠른 듯하여

속으로 <초 조정할 때의 근거가 되는 느낌이 분리감>

 

기억 안나면 다시 해봐도돼.

 

 

 

 

 

 

오륜기.png.jpg

 

<오륜기 예시>

 

원이 다섯개 붙은거 같지?

 

 

 

12. 게슈탈트.png

 

 

근데 (b)의 형태일 수도 있어.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사람이 (a)를 원 다섯개로 지각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b)로 생각 잘 안 한대.

 

(a)랑 (b)를 계속 번갈아 봐봐. 처음 접할 떄 느낌의 차이가 있을 거야.

사실 오륜기가 (b) 의 형태였다면?

(a)를 볼 때가 <종합감>, (b)를 볼 때가 <분리감>

 

번갈아 볼 때마다 느낌이 왔다갔다 했었는데, 나는 너무 자주봐서 무뎌져가지고

지금 맞는 예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예시로 넣을게.

 

 

 

 

 

<말풍선 예시>

 

종합감말풍선.png13 말풍선.png

 

↑이 말줄임표 말풍선이 <종합감>, ↑ 이 물음표, 느낌표 말풍선이 <분리감>

 

 

 

 

 

 

 

 

 

B-1(-4)

 

 

더 있긴 한데, 괜히 헷갈릴까봐 세 개만 넣을게.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종합감>, <분리감> 예시였고.

이게 왜 <맥락의 느낌>인지 말해볼 거야.

 

맥락적인 정의로 얘기할 테니까, 뭐겠구나 감만 잡으면 돼.

 

<종합감>은 맥락상 무자각성에 위치하거나 무자각성으로 맥락 이동하는 느낌.

<분리감>은 맥락상 자각성에 위치하거나 자각성으로 맥락 이동하는 느낌.

 

이 둘을 합쳐서 <맥락감>이라고 불러.

그냥 이렇게 얘기하면 빡세니까 모형으로 가져와서 얘기해줄게.

 

 

 

 

B-1(-5)

 

 

 

14 맥락감.png

 

 

수직선 위 정중앙의 세 번째 선을 기준으로 좌측이 무자각성의 영역이고, 우측이 자각성의 영역이라고 해보자.

빨간 선분 - 파란 선분 / 빨간 화살표 - 파란 화살표, 이렇게 구분되지?

 

선분이 영역을 의미하고, 화살표가 맥락 이동을 함의한다고 할 때,

아래쪽의 빨간 표현은 <종합감>이고,

위쪽의 파란 표현은 <분리감>이야.

 

즉, 맥락적 정의로

<종합감>은 무자각성 영역에 위치하거나 무자각성 영역으로 이동하는 느낌,

<분리감>은 자각성 영역에 위치하거나 자각성 영역으로 이동하는 느낌이야.

 

이거 발견하는 데 굉장히 애먹었어. 근데 이렇게 둬야 여러 설명에서 적합하더라고.

 

 

이 맥락적 정의에서의 의의는,

<분리감>이 든다고 해서 무조건 자각하는 게 아니야.

가령 무자각성 영역에 위치해있어서 <종합감>의 상태일 때, 자각성 영역으로 이동하는 느낌이 들면

맥락적인 정의상 <분리감>이잖아?

 

근데 파란 선분의 자각성 영역까지 안 가고, 이동이 빨간 영역에서 멈춰서 결국에 <종합감>, 무자각성 영역일 수 있어.

 

 

즉, 맥락의 이동을 느낀다고 해서(분리감), 무조건 무자각성→자각성이 아니고,

무자각성-(자각으로 가는 느낌)→(임에도 불구하고)무자각성, 이렇게 위치해서 <무자각>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맥락감>은 성질과 대응하는 맥락의 <영역>을 온전히 대변하지 않을 수 있다.

 

 

변수를 꼭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아.

 

 

 

 

 

 

B-1(-6)

 

 

이러면 문득 이렇게 질문할 수 있지.

기존의 느낌들 있잖아. 웃긴 느낌, 슬픈 느낌, 따끔따끔, 친밀감, 의문감, 허기 등등...

 

 

너가 개념화했다는 <종합감>, <분리감>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종합감>, <분리감>은 원체 맥락으로써 느낌의 형태로 <바탕>이 된다

즉, <종합감>과 <분리감>을 <원초적인 느낌>으로 두는 거야.

그리고 기존에 저렇게 표현되던 느낌들을 원초적인 느낌인 <맥락감>으로부터 파생됐다고 여겨.

 

왜? 일단 내가 무자각하던, 자각하던 해야 느낄 수 있으니까. 동의하지?

근데 <종합감>과 <분리감>이 맥락의 위치나 이동을 그 자체로 느껴서 나의 맥락을 드러내는 <맥락감>이잖아.

일단 느낌이 있으려면 맥락 이동이 있어야 하는데,

맥락감이 맥락 이동에 알림 주니까 기존 느낌들보다 우선해 있는 거임.

 

맥락감이 내면적이기 때문에

느낌이라고 불릴 수는 있을지언정 맥락의 반영 측면에서 기존의 느낌들과 상이한 면이 있는 거야.

 

 

그래서 이 철학에서 나는 다시 개념화해.

나는 일상을 위하여 맥락에 대한 논의를 한다고 논의 A에서 이야기했으니까, 차별을 두자.

<맥락감>을 중시해야만 하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개념화하냐?

 

 

<맥락감>을 <느낌>으로.

<기존의 느낌들>을 <느낌 산물>로 주로 바꿔 말할거야.

 

 

수준의 차이로써 <느낌>, <느낌 산물>.

이렇게 두면, 1단계, 2단계 같잖아. 이렇게 둬보자.

 

 

이 치환의 함의는 <느낌>에서 <느낌 산물>이 파생한다는 것.

그래서 기존의 <느낌>이라고 표현할만한 걸, <느낌 산물>로 말 바꿔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니,

정말 구분 잘 하면서 잘 따라와야 돼. 눈치 잘 재면서 따라와야 된다는 주의사항이었어.

 

아 이때 쓴 <느낌>이란 용법은 <맥락감>을 가리키고 있구나.

아, 이때 쓴 <느낌>이란 용법은 그냥 이해 쉽게 시켜줄라고 <느낌 산물>을 가리키고 있구나.

 

헷갈릴 수 있는데, 철학 전개를 위해서 단어 바꿔서 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개붕이들 <느낌>과 <느낌 산물>을 잘 구분할 것.

 

 

 

 

 

B-1(-7)

 

 

근데 느낌에서 느낌 산물을 파생한다기엔, 너무 엮여있는 거 아니냐고 또 문득 물어볼 수 있겠지.

<구분이 잘 안 간다>는 측면에서 말이야. 그거나 그거나 아니야?

 

 

예컨대 가장 헷갈리는 걸 가져올게.

 

 

<편함>이랑 <종합감>이랑 뭐가 다른데?

둘 다 무자각적인 느낌이자 자각성에서 무자각성으로 이동한 느낌처럼 보이는데?

 

<불편감>이랑 <분리감>이랑 뭐가 다른데?

둘 다 자각적인 느낌이자 무자각성에서 자각성으로 이동한 느낌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규정하고 갈게.

<종합감>이랑 <분리감>은 <중립적인 느낌>이다.

 

 

중립성.png

 

그러니까 편하고, 불편하고, 긍정적이고, 부정적이고 뭣이든 간에 전혀 대응에 관련이 없어.

 

맥락감은, 딱, 맥락의 위치와 맥락의 이동만의 반영이야. 무자각과 자각.

어렵나? 설명해볼게.

 

<무자각성에 위치하거나, 자각성에서 무자각성으로 이동하는 건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어.>

<자각성에 위치하거나, 무자각성에서 자각성으로 이동하는 건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어.>

 

 

편한 건 긍정적이고, 불편한 건 부정적이라고 보통 생각이 들기 마련이잖아.

<종합감>과 <분리감>은 이런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워.

 

 

 

즉, 맥락에 대한 느낌이라고 해서, 느낌에 주목할 게 아니야. 맥락에 주목해야 돼.

<맥락감>을 느꼈을 때, 어떻게 느껴지는가?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맥락의 어떤 상태를 반영하는가? 이게 <맥락감>을 파악할 때 포인트란 소리야.

 

느낌 산물은, 맥락에 주목할 게 아니고 느낌 산물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게 바른 거고.

그냥 느껴졌을 때 봐야 하는 방향이 서로 다름. 맥락감이랑 느낌 산물끼리는.

 

 

정리하면,

 

<맥락>에서 <느낌 산물>이 파생하기는 하나, 그 과정에서 <맥락감>이 있을 뿐이고.

<맥락감>과 <느낌 산물> 간의 직접적인 대응관계 자체는 없다.

다만 <맥락>을 반영하는 <맥락감>으로써 <느낌 산물>의 바탕에 위치한다.

<맥락감>을 파악할 때는 <맥락감>의 느낌보다는 <맥락감>이 반영하는 맥락의 방식에 주목하기 때문에.

 

이해 안가지? 예시들게.

 

 

 


 

B-1(-8)

 

 

애기그림.png


* 글 쓰면서 가장 많이 뱉은 말은 디지게 어렵네이다.

 

 

무자각성은 도화지, 자각성은 그림이 그려진 도화지.

그림이 그려질 수도, 그림이 그려졌다가 사라질 수도 있는 도화지가 있다고 치자. (맥락)

 

맥락감은 그림을 그리거나 지울 때의 손의 느낌.

느낌 산물도화지를 볼 때의 느낌.

 

 

 

<맥락>에서 <느낌 산물>이 파생하기는 하나, 그 과정에는 <맥락감>이 있을 뿐이고.

<맥락감>과 <느낌 산물> 간의 직접적인 대응관계 자체는 없다.

 

다만 <맥락>을 반영하는 <맥락감>으로써 <느낌 산물>의 바탕에 위치한다.

 

<맥락감>을 파악할 때는 <맥락감>의 느낌보다는 <맥락감>이 반영하는 맥락의 방식에 주목하기 때문에.

* 어떻게 느껴지는가? 보다는, 맥락의 어떤 상태를 반영하는가? 에 초점이 있다.

 

 

 

 

이 문단을 치환해볼게. 아래랑 비교하면서 읽어봐.

 

 

도화지에서 도화지를 볼 때의 느낌이 파생하기는 하나, 그 과정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지울 때의 손의 느낌만이 있을 뿐이고,

손의 느낌과 도화지를 볼 때의 느낌 간의 직접적인 대응관계 자체는 없다.

(볼 때의 느낌은 손의 느낌이 아니라, 도화지 혹은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에서 느낌이 오르므로 직접적인 대응관계가 아니다)

 

다만 도화지를 반영하는 손의 느낌으로써 도화지를 볼 때의 느낌의 바탕에 위치한다.

(손의 느낌으로 그리거나 지워야만, 비워진 도화지 혹은 그려진 도화지를 볼 때의 느낌이 생기기 때문에)

(선후행의 관계로써)

 

손의 느낌을 파악할 때는 손의 느낌에 대한 느낌보다는 손의 느낌이 반영하는 도화지의 모습에 주목하기 때문에.

* 손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세밀한 탐구보다는,

손이 어떤 상태이기에 도화지에 그림이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에 초점이 있다.

 

 

감 잡힘?

 

 

그림2.png.jpg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느낌>과,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을 대하는 느낌> 간의 차이야.

우리가 그림 그릴 때 하하, 손 움직이는 거 재밌다. 이러면서 안 그리지?

우리가 그림을 위해서 도화지를 준비했다면 손은 그냥 움직이고,

손으로 그린 <그림의 느낌>을 느낄 뿐이야. <느낌 산물>을 주목할 따름이지.

 

그치만 손을 움직이는 느낌을 느낄 수는 있다는 거지.

여태껏 사람들이 도화지 혹은 그림만 봐서 무시되던 이걸 개념화해본 거야.

그리고 맥락을 다루는 내 철학에서 이게 정말 필요해.

 

 

왜?

 

손이 움직인다 → 분리감 → 그림이 생기거나 있는 상태이다

손이 안 움직인다 → 종합감 → 그림이 지워지거나 없는 상태이다.

 

이거 판단이 되니까. 맥락을 개인이 판단할 수 있게 되니까.

나중에 나올 텐데,

그냥 그림이나 도화지 보고 자각성인지, 무자각성인지 정확도 높게 판단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아.

 

도화지라고 비유했지만, 실상 맥락은 보이지 않는 놈이니까.

 

 

따라서 <맥락감>은 <느낌 산물>과 달리 <중립적인 느낌>이다.

그냥 <무자각적인 느낌>, <자각적인 느낌>으로 있는 거지. 이게 긍정적인 느낌이다, 부정적인 느낌이다,

딱 잘라서 그런 식으로 규정할 수 없단 소리.

 

그런 규정은 <느낌 산물>에나 적용된다.

 

 

 

 

 

 

B-1(-9)

 

 

근데 잘 생각해봐. 마음속에 도화지란 게 진짜 있어?

뭔가 보이고 느껴지고 떠오르니까 그거에 <바탕> 같이 뭔가 둬야 될 것 같긴 하지.

 

근데 안 보이잖아? 실상 맥락은 보이지 않는 놈이니까.

무자각할 때, 표현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어? 못하지?

 

바탕이라고 할만한 건 <느끼다> 이거 밖에 없었잖아?

그래서 느낌 밖에 없으니, 느낌의 논의 하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맥락감> 자체가 도화지나 마찬가지야

 

 

하트.png.jpg

* 왜 여태껏 마음은 하트 모양이었고, 심장을 표상해야 했는가?

 

 

<마음>이니, <칠판>이니, <맥락>이니 무언가 전체를 지시하는 바탕이 있다고 우리는 가정을 하는데,

사실은 가정의 개념일 뿐이고,

진짜 바탕으로 있다고 내면적으로 치부할만한 건, <맥락감>과 <느낌 산물> 이런 거밖에 없어.

 

 

가령 <지구>라던지 <세계>라던지, <세상>이라던지 무언가 바탕이 있다고 우리는 가정을 하는데,

사실은 가정의 개념일 뿐이고,

진짜 나의 일상에 바탕으로 있다고 외면적으로 치부할만한 건, <환경>과 <상황>만이 있듯이.

 

 

나의 일상적 관점으로 좁힌다면,

 

내가 체험하는 게 지구란 소리야.

내가 체험하는 게 마음이란 소리고.

 

이 현재의 생활이 지구이고 마음의 전부란 소리야. 넓은 지구와 마음은 가정해서 살고 있는 거지.

 

 

 

 

B-1(-10)

 

잘 잡아줄게.

 

내면적 <환경>이 없다는 게 아니야. 내면적 <의식>이 없다는 게 아니고.

다만 일상에서는, 일상과 일상 바깥의 전체를 함축하는 내면적 <바탕>이 없을 수 있다는 거야.

 

전반을 아우르는 <바탕>은 가정된 개념일 수 있다.

 

 

절대로 인생 다 살아서 체험하지 못할, 대상이나 현상의 모든 범위, 지구상의 모든 나라. 또는 인류 사회 전체,

이건 '나'로서 가정된 개념이라는 거임. 좀 더 합리적인 현재의 삶을 위해서.

 

 

또,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저 개인에게 가정되었다는 개념들이 정말 강한 회의주의자로서

세계는 절대 없다! 마음은 절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아닌거 알지?

 

다만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개념이기에 가정되어서 쓸 수 있는 건데,

만약 이 가정을 철회하고 보는 게 더욱 합리적이고 실용적일 수 있다면,

그 경우에는 철회하겠다, 이 소리고.

 

지금이 그 경우이기 때문에 배제하고 바라보겠다. 이 소리이다.

내가 논하는 이 느낌의 논의에서는, 내부 환경에서의 철회가 충분히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다.

 

 

 

맥락이라는 전반의 바탕을 설명하는 <가설적 구성 개념>을 잠깐 버리고

맥락의 존재 근거가 되는 <맥락감>을 맥락의 지위에 위치시키겠다.

 

 

 

 

 

 

B-1(-11)

 

 

테레비.png.jpg

 

 

좁게 잡는 거지.

세상을 파악한다고 뉴스를 보지만,

사실은 나의 일상에서는 뉴스를 보는 상황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걸 세상으로 잡겠다.

뉴스를 보면서 파악하는 개념적 세상은, <가상 개념>으로 삼겠다.

 

실제로 뉴스에 나오는 볼리비아가 없다고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일단은 실용을 위해서 나에겐 뉴스 외부의 볼리비아가 가정되었다고 바꿔 생각한다는 것.

당장의 체험은 티비에서의 볼리비아라고 주장하는 화면과, 화면을 보는 나의 일상 뿐이니까.

 

 

내면적 환경에서 맥락을 파악한다고 맥락감을 보지만,

사실은 나의 일상에서는 맥락감을 보는 상황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걸 맥락으로 잡아도 상관이 없다.

따라서 맥락감을 맥락으로 치부하고,

맥락감을 보면서 파악하는 맥락은, <가상 개념> 삼겠다.

 

그래서 상황이 세상이 되고,

맥락감이 맥락의 자리를 꿰차는데,

이건 잠깐 논의의 편리를 위해서 그 자리에 앉혀놓을 거라는 점.

 

당연히 세상과 맥락의 가정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이게 되면 다시 가정하게 될 거야.

 

 

다시 말할게.

현재의 느낌만 있을 뿐, <바탕>의 마음이나 맥락 따위는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전략적으로 맥락감을 가상의 위치로써 선택해서 실용성 있게 논의를 전개하겠다.

 

 

 

*

그래서 <맥락>이 가정되고, 가정되지 않았을 때의

내면(및 바탕)을 향한 관점 두 가지를 우리는 비로소 획득할 수 있게 된다.

 

*

동어반복 미안.

근데 나의 경우에 대충 이런거겠구나, 하고 넘어갔다가 아예 살짝 어긋난 거 때문에

논의 이해가 꼬여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어서 이걸 아예 차단하고 싶어.

특히 철학이라는 데에서 나중에 갔다가 개념 이해 하나 잘못했다가,

진퇴양난 되면 그거만큼

불쾌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해 단단히 해주고 싶은 나의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싶어...

 

 

 

 

 

 

 

B-1(-12)

 

 

 

색상환.png.jpg

 

 

* 먼셀 색상환

 

 

<맥락감>은 무채색과 같다. (가운데의 기둥) <느낌 산물>은 유채색과 같다.

 

무채색에 밝고 어두움만 있듯이, 맥락감에도 자각적이고 무자각적인 것만 있다.

무채색을 유채색의 색으로써 검정색과 하얀색이라고 부르듯이,

맥락감을 느낌 산물의 느낌으로써 종합감과 분리감으로 부를 수 있다.

 

유채색은 무채색에서 드러난다.

채도(명도)가 높은 파랑도, 채도(명도)가 낮은 파랑도 차갑다.

채도가 높은 빨강도, 채도가 낮은 파랑도 뜨겁다.

 

따라서 무채색만큼은 중립적이다. 단지 어떤 쪽이 자각적이고, 어떤 쪽이 무자각적일 수 있듯,

어떤 쪽이 검고, 어떤 쪽이 하얗고의 차이만 가질 뿐이다. 그 외에는 중립적이다.

 

 

보이는 색채가 빨갛다면, 빨간색을 접하게 된다면 스며있는 무채색은 가려진다.

무채색은 색으로써 알아차리기에 희미하고, 흐릿하고, 미약하다.

 

색으로 판단되어 드러난 것이 <산물>이다. 다음 논의에서 <산물>을 더불어서 다루도록 하자.

(밑에부터 반복이니까

논의 B-2로 넘어가고 이해 안 되는 거 있을 때, 올라와서 참고하면 될 것 같아.)

 

 

 

 

 

 

<B-1, 끝.>

 

1. 무자각의 논의를 위해 <느낌>을 논해보자.

2. <무자각적 상황을 느끼는 느낌>인 <종합감>과, <자각적 상황을 느끼는 느낌인 <분리감>이 있고,

이 둘은 <맥락의 느낌>이다.

3. 타이머의 비유, 오륜기의 비유, 말풍선의 비유.

4. <종합감>과 <분리감>을 <맥락감>이라고 부르자.

5. 

<종합감>은 무자각성 영역에 위치하거나 무자각성 영역으로 이동하는 느낌,

<분리감>은 자각성 영역에 위치하거나 자각성 영역으로 이동하는 느낌이며,

<맥락감>은 성질에 대응하는 맥락의 영역을 온전히 대변하지 않는다.

6. <맥락감>과 기존의 느낌 간 차별을 두어 각각 <느낌>, <느낌 산물>로 이름 붙일 수 있다.

7. <맥락감>은 <중립적인 느낌>이라 <느낌 산물>과 구분된다.

또, <맥락감>과 <느낌 산물> 간 직접적 대응관계는 없다.

8. 도화지의 비유

9. 외부 혹은 내부의 전반을 지시하는 바탕적 개념은 가정된 개념일 수 있다.

10. 내면적 바탕인 <맥락>을 가정 개념이라 둔 뒤 치우고,

 실용적인 논의를 위하여 <맥락감>을 <맥락>의 지위에 놓겠다.

11. 뉴스의 비유.

12. 먼셀 색상환의 비유. <산물>의 언급.

 

 

 

 

 

 

 

 

맥락감의 세 가지 수준과 기타

 

B-2(-1)

 

 

<맥락감>으로부터 <느낌 산물>이 파생하는 거고, 직접적인 관계 지위도 획득할 수 있게 되었지.

<맥락감>이 <맥락>이 되는 거니까.

이제 여기서부터 짤막하게 해수면의 비유로 관계를 알아보자.

 

 

 

17 해수면2.png

 

* 메를로-퐁티에 영향받은 지점.

 

 

느낌을 맥락적으로 가정했지? 느낌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맥락감의 전체일 수 있을 거야.

* 맥락을 배제함으로써 맥락화 풀어놓은 것을 맥락감을 통해 다시 맥락화

 

그렇다면 저 해수면의 그림에 관계를 빗댈 수 있게 돼.

 

 

예컨대 우리가 위에서 해수면을 바라본다고 가정하자. 느낌이 곧 바탕이라고 치부해 보자.

그렇다면 해수면 전반이 <느낌>, <맥락감>이야.

그리고 물결의 주목이 <느낌 산물>이 되고, 이건 해수면의 돌출의 여부 의식하는 거야.

 

그리고 새로운 개념인데,

어쨌든 물결을 주목했을 때, 그 물결을 물결이라고 표시할 수 있고,

따라서 표시한다면 <산물>이라고 치부해. 그림에서는 빨간색 동그라미 쳐놨네.

 

그러니까 <느낌>/<느낌 산물>/<산물> 이렇게 있는 거야.

 

 

 

<느낌>은 해수면이고,

<느낌 산물>은 해수면의 돌출 의식이고, <산물>은 돌출의 지시, 표시, 대상화.

 

 

어떻게 <종합감>과 <분리감>이라는 느낌이 <산물>을 만들어낼까?

 

<맥락감>이 느낌이고, <느낌 산물>과 <산물>의 바탕이라면,

느낌으로

아, 이래서 느낌 산물의 바탕이 될 수 있겠구나,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지?

 

이 체험법을 알려주는 김에,

관계로 지목했던 <느낌>/<느낌 산물>/<산물>을 인용문 통해서 단단하게 잡고 가도록 하자.

정말 느낄 수 있는 체험의 관점에서 설명할게.

 

 

 

 

B-2(-2)

 

 

느낌이란?

 

그중에서 무자각성을 대표하는 <종합감>이란?

 

쉽게 얘기하면 몸을 편하게 하고 특히 눈까지 편하게 한 다음에 그냥 바라보면

<느낌 산물>처럼 돌출되는 게 아니라, 내 눈앞의 장면, 배경 전반이 얇게 펴발린 듯하게 됨.

성질이 지각될지언정 아무 맛 없이 들어와.

 

막연하게

멍 때리는거처럼 초점을 희미하게 방치하는게 아니고, 불필요한 힘만 눈에서 빼버린단 느낌으로.

 

논의 A-2-19 에서 유사하게 나왔지.

<종합감>이란, 배경 전반에 얇게 펴발린 무미의 느낌.

 

 

 

하얀벽.png.jpg

 

 

이것으로부터 만약, 배경에 하얀 벽이 있었다면, 하얀 벽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하얀 벽은 무언가도 아닌 무언가로 느껴진다.

아무 느낌 없는 느낌으로 느껴진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B-2(-3)

 

 

고양.png.jpg

 

 

* (우리집아님! 인터넷에서가져옴)

 

 

고양이 귀엽지?

근데 맨날 일어나서 위와 같은 똑같은 장면을 본다고 생각해봐.

저 장면 자체를 해수면으로 생각해보자. 저 장면 전반이 해수면이야.

 

 

좌측 귀퉁이에 액자 보여?

 

저거 맨날 일어날때마다 자각 못한다니까?

 

지금이야 사각형이고, 테두리가 갈색이고, 안에 사각형 더 그려져 있고, 침대 옆에 있고,

이런 식으로 느낌과 생각이 오를 수야 있는데, 항상 보면 성질 돌출이 안 돼있을 수 있어.

그냥 아무 맛도 없이 하얀 벽지랑 똑같이 느껴질 거야.

하얀 벽지에도 무자각하다면, 주목했을 때 특징 있는 액자나, 하얀 벽지나 똑같은 <종합감>으로 들어오게 돼.

 

그러므로 하얀 벽지는 어떻고?

저거 맨날 일어날때마다 하얀 벽지 자각 못한다니까?

가령 그림이 그려진 벽지더라도?

 

개붕이들 자고나서 일어나는 방의 벽지 생각해봐.

그냥 딱 일어나는거 재현해서 거길 잘 관찰해봐.

진짜 살펴보면 분명히 보여아할게 안보였다니까?

 

사진속 침대 위의 이불 주름도 그렇고, 분명 자각하면

주름이고 구겨지고 그런데 이전까지는 평평한 맛으로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지.

 

 

 

나는 자고 일어나면 진짜 큰 커다란 서랍장이 눈앞에 놓이는데,

생각해보면 눈앞에 커다란 서랍장이 있다고 생각조차 못했어. 지금 글쓰면서 보니까 알았음.

하지만 당시에 못 느끼지만 없다고도 안 느끼지. 이게 <종합감>이야.

 

 

없는 것이 아닌데,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무자각>으로써 느낌으로 느껴질 때의 그 느낌.

너무 흐릿한 거 아니야? 너무 희미한 거 아니야? 느낌이 그냥 없는 거 아니야?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데, 몸하고 눈 편하게 하고

어디에 주목할게 아니고 배경 전반을 바라본다는 느낌으로 마냥 바라보면 느낄 수 있을거야.

그거의 약화가 일상에서의 종합감이고 진짜 일상에 만연해있음.

 

그리고 이 종합감을 바탕으로

하얀 느낌이 오르고, 평평한 느낌이 오르고, 반질거리는 느낌이 오르고... <느낌 산물>이 돌출되고,

이윽고 <산물>로 지시할 수 있게 된다. 하얀 벽지로, 평평함으로, 반질거림으로.

평평하고 반질거리는 하얀 벽지로. 떠올리거나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산물화되는 중에는 <분리감>이, <산물>을 뒷받침한다.

 

저 사진 다시봐봐.

 

딱 일어나면 고양이부터 보일 거 아니야? 그 느낌을 떠올려봐.

일어났는데 침대에 왠 안 올라오던 우리집 고양이 두 마리가 올라와있다.

 

뭔가 <자각> 같은 느낌으로써 쭉 오를걸?

그리고 이후에 <느낌 산물>로써 귀엽다거나, 그러다가 <산물>로써 이름 부르겠지. 너무 귀여워서.

아니면 <귀엽다>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느낌 산물을 더욱 산물화하거나.

 

<자각>을 유발하는 느낌으로써 쭉 오르는게 <분리감>이야.

그러니까 <종합감>과 <분리감>이 <느낌>으로 바탕돼서

<느낌 산물>이나 <산물>을 파생하는 거야.

 

물론 귀여운 고양이가 아니더라도, 아침 딱 일어났는데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침대 위에 올라와있다?

<자각>을 유발하는 느낌으로써 쭉 <분리감>이 오른다음에,

공포를 느끼고, 누구세요???! 하겠지.

 

고양이를 보고 <귀여움>으로 오르든,

낯선 사람을 보고 <공포>로 오르든 <분리감>은 중립적인 느낌으로써 원초적으로 공통된다.

 

 

* 논의 B-1-5에서 언급한 변수에 따라 물론 <귀여움>과 <공포>가 무자각의 수준일 수 있다.

 

 

<종합감>의 쪽에서도 마찬가지. 여기도 중립적인 거고.

그런 거야

 

 

 

* 참고사항 : 사진에 고양이 세 마리 있다.

 

 

 

 

B-2(-4)

 

 

<종합감>이나 <분리감>이나 중립적인 느낌이라고 했지? 에시가 있었으니 다시 설명할게.

정말 딱 맥락만 반영해.

 

정말 <있음의 느낌>, <없음의 느낌> 이런 근원적으로 보이는 규정의 양분조차 아니야.

대충 이런거겠거니 치환하고 넘어가버리면 절대 안 돼.

직접 느끼고 개념 붙일 줄 알아야 돼.  이게 종합감이고, 이게 분리감이겠구나! 그리고 자기가 네임택 붙여야돼.

 

굳이 따지자면 논의 A-2-7에서 얘기됐듯 <있음과 없음>의 측면에서 <종합감>과 <분리감>을 구분하면,

 

 

<종합감>은 <있음+없음의 느낌>이고,

<분리감>은 <있음의 느낌> 혹은 <없음의 느낌>일거야.

 

 

실제 느낌으로도 그렇게 느껴지고.

물론 정확하게 저렇게 규정된다, 그런 것도 아니지만 있음과 없음의 관점에서 볼 때 저렇다는 것.

 

이게 이해하기 힘들면

진짜 그냥 내가 위에서 정의해놓은

 

 

<종합감>은 무자각성 영역에 위치하거나

무자각성 영역으로 이동하는 느낌,

 

<분리감>은 자각성 영역에 위치하거나 자각성 영역으로 이동하는 느낌

 

임을 염두에 두면서 느껴야됨.

 

 

그러니까 다시 설명해서,

 

있음이 아니다? 그러면 없는 거지.

사람들 고정관념 이렇게 박혀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야.

자각의 측면에서만 있음 대 없음인데, 이거는 편협한 거지. 넓혀야 돼.

 

있음이 아니다? 그러면 있음과 없음이 혼용된 무자각이 있을 수 있는 거임.

있음(분리감) 혹은 없음(분리감) vs 있음+없음(종합감) 으로써.

 

각설하고.

 

 

 

 

B-2(-5)

 

 

서랍장.png.webp

 

예컨대 일어나는 장면마다 항상 서랍장이 있다면, 그 서랍장에는 <종합감>을 느끼겠지?

무자각할 테니까.

근데 있던 서랍장인데 <종합감>으로 있는지조차 무자각하던 게 일어나보니 사라져있다?

 

그럼 <있음과 없음이 혼재된 상태>가 아닌, <없음>으로써 <분리감>이 오르는 거야. 쭉 오르지.

이윽고 <없음의 느낌>으로써 <느낌 산물>이 생기고,

뭔가 있었던 거 같은데? <산물>로써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임.

고양이가 <있음>으로써 분리감이 오른다, 이랬었는데, 상반되지?

 

그러니까 오로지 <무자각>과 <자각>에만 관계하고,

맥락에 직접적인 관계 없는 <느낌 산물>이나 <산물>로 정의하려 했다간

혼란이나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특히 종합감/분리감을 한 번 개념 잘못 잡고

<느낌 산물에서의 어떤 것으로> 착각한 뒤에 논의를 이해하려 했다간 극고통 받을 수 있어서)

한 번 더 파트 빼서 넣었음.

 

 

다시 편안하게 이제는 느낌 산물과, 산물에 대해서 알아보자.

 

 

 

 

B-2(-6)

 

 

찐하늘.png.jpg찐이불.png.jpg

 

* 여기는 쉬운 파트라 위에서 이해됐다면 인용문 안 읽고 대강 넘어가도록 하자.

 

 

 

<느낌 산물>이란?

 

 

아직 표현되지 않았거나, 표현되지 않은 느낌 그 자체.

느낌 그 자체의 산물을 <느낌 산물>이라 일컫습니다.

 

느낌으로부터 드러나지만, 일상에서 아직 대상화되어 드러나지 않은 것. 돌출부.

 

 

 

 

언어적으로 재단된 <->, <->, 혹은 <설렘 따위>의 것이 아닌

언어적으로 <A 느낌>으로 뭉뚱그려 표현되나 다른 체험의 <A 느낌>과 미세하게 다를 여지 품을 느낌 또한 <느낌 산물>이겠습니다.

명확한 표현이 모국어에든, 없지만, 당장 돌출되어 돌출됐다고 느끼는 그 느낌 또한 <느낌 산물>입니다.

앞으로 있을 서술 중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습니다. 가령 하늘 가만히 보다가 오른 <좋은 느낌>과 막 빨래해서 좋은 향기와 감촉이 중첩된,

이불 안고 오른 <좋은 느낌>은 결이 다르겠으나 둘 다 일종의 <느낌 산물>이겠습니다.

하늘 가만히 보다가 오른 <좋은 느낌>, 이불 안고 오른 <좋은 느낌>이 각각 <->, <-> 따위로써 명확한 화살이 없더라도요.

감수성 더욱 있는 이들에게, 하늘 가만히 보다가 오른 <좋은 느낌>, 캠프 와서 피운 불 가만히 보며 오른 <좋은 느낌>은 또, 결이 다를 수 있겠습니다.

다양합니다. 그러니 <느낌 산물>, 머릿속 사전에 얽매이지 않음을 유념해주십시오.

 

 

 

 

 

 

B-2(-7)

 

 

 

 

짭하늘.png짭이불.png.webp

 

* 여기도 쉬운 파트라 위에서 이해된다면 인용문 안 읽고 대강 넘어가도록 하자.

 

 

<산물>이란?

 

대상화된 것. 대상. (이건 꼭 기억하자)

* 생각, 언어, 형상화

 

 

 

예컨대 산물이란, 드러난 대상입니다. 미약하게나마 의도되어 드러난 대상이자, 대상화된 대상입니다.

언어. ,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형상. 때에 따라 주목. 때에 따라 행동, 때에 따라 비언어적 마음가짐 따위입니다.

더 쉽게 여기면 조금이라도 생각해서 하게 되는 것들을 산물이라고 치부하시면 됩니다.

생각이라고 으깨버려도 됩니다. 정말 잘 안 와닿는다면, 생각이나 대상이 산물이라고 여기시고,

미약한 의도성조차 연계하므로 주목과 행동도 때에 따라 산물에 포함할 수 있다고 용례를 종합하시면 되십니다.

앞으로 산물을 논하게 될 때 <생각> 혹은 <대상>으로 명사를 바꾸어 논의를 이해하시면 편리하시겠습니다.

 

, 이 생각과 의도가 <미약하게나마>라는 언급으로써, 포괄 범위가 예측보다도 넓을 수 있음을 깨달아주십시오.

생각보다 넓게, 산물일 수 있겠습니다.

 

, <때에 따라 행동>도 유사하게, <생각이 관여한 행동>, <의도하는 행동>이 해당하여

<때에 따라>가 덧붙었다고 이해해주시면 되시겠습니다. <때에 따라 비언어적 마음가짐> 또한 마찬가지이겠지요.

일단 언어와 형상화는 몽땅 생각이자 산물이고,

<이외의 상징적이지 않은 것>에서 몇 사례가 산물에 포함한다고 이해해주시면 깔끔하겠습니다.

 

 

 

 

 

 

B-2(-8)

 

 

이제 <느낌>/<느낌 산물>/<산물>의 관계 특징 설명하고,

유의점 설명하면 끝나겠다. 한 번 해볼게.

 

첫 번째로

<느낌 산물>이나 <산물> 아래에는 언제나 <느낌>이 잠재한다.

 

이건 당연하지?

 

<느낌>이 맥락을 반영하면서 맥락 그 자체로 볼 수도 있었으니까,

<맥락>으로부터 산물이 나오잖아.

무자각하고 자각함에 따라서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두 번째로

<느낌>은 <느낌 산물>과 <산물>에 <가려질 수 있다>

 

잠재했기 때문에 가려질 수 있다고 말은 했지만, 왠만하면 가려져.

왜냐면 느낌은 중립적이고 맛도 없는데, 느낌 산물이나 산물은 강렬하고 주목되거든.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을 보게 되지. 손에 펜을 어떻게 쥐고 있는지 안 보게 되잖아?

자꾸 그림만 보고 이 정도면 명백하게 자각이다, 착각하는데 이건 곤란하다는 소리야.

대충 그려놓고는.

 

그런 식으로 습관이나 맥락감의 특성 탓에 잘 못보게 되지만?

최대한 의식하려 하면 보인다. 가려진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의식을 강하게 하면 종합감인지 분리감인지 확인할 수 있어.

아무튼 평상시에는 가려진다.

 

 

 

세 번째로

<느낌>과 <느낌 산물>은 <산물화> 할 수 있다.

 

<느낌>이 <맥락감>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느낌으로든 생각으로든 바꾸어내야만

<맥락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소리야.

 

<맥락감>을 <산물>의 바탕으로써 <느낌>이라고 두었지만,

느낌으로써 <느낌 산물>이고, 생각하고 떠올림으로써 <산물>이 될 수 있는 거.

* 즉, 글에서 표현하는 <느낌>은 절대로 진짜 <느낌>이 될 수 없다. 직접 느껴야.

 

<느낌 산물>도 마찬가지로, 그냥 일종의 <좋은 느낌>이었지만,

<좋은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고, 다시금 떠올릴 수 있는데에서 <산물>이 될 수 있는 거야.

* 즉, 글에서 표현하는 <느낌 산물>은 절대로 진짜 <느낌 산물>이 될 수 없다. 직접 느껴야.

 

 

 

네 번째로

<느낌 산물>과 <산물>은 <느낌화> 할 수 있다.

 

해수면에서 물결을 보고 물결을 말할 수 있듯이,

말해진 물결을 물결로만 바라보고, 해수면을 관조할 수 있어.

 

논의 B-1-10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눈의 이완풀고 배경을 그냥 바라보면 해수면 느끼기 가능.

또, 미술 작품의 설명을 듣고 작품이라고 생각 안 하고 그저 느끼기만 하면 거꾸로 <산물>의 <느낌화>이겠지.

 

역도 된다는 소리야.

이런 점에서 <느낌 산물>은 <느낌>의 성질도, <산물>의 성질도 모두 가지는,

중앙에 위치한 특이한 녀석이겠고.

 

 

 

다섯 번째로

맥락적 과정에서의 단계 전환은 변칙적이다.

 

간과할 수도 있겠는데, 엄청나게 미친 듯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어.

골목에서 고양이 딱 보자마자, 오! 귀여워! 말하는 거 가령 0.3초만에 할 수 있잖아?

보자마자 귀엽다!

 

근데 그 과정에서 느낌 → 느낌 산물→ 산물로의 이행 개빠른거임 그냥.

그러니까 내가 단계적으로 설명한다고, 딱. 딱. 딱. 딱. 이렇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드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륵.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야. 드르르르륵도 아니고 그냥.

정신 차려보면, 딱. 일 수도 있는데 분해해보면 저렇게 나온다는 거지.

 

또 분해할 만한 빈틈이 쭉쭉 보일만큼

엄청 느리게 일어날 수도 있는 거고. 상황마다 변칙적이다.

 

 

 

 

 

 

B-2(-9)

 

 

그리고 파생, <과정>은 이런 식이야.

 

①<느낌> : 맥락감을 느낌.

①<느낌> → ② <느낌 산물> : 맥락감으로부터 느낌 산물을 느낌.

①<느낌> → ② <산물> : 맥락감으로부터 생각함.

①<느낌> → ② <느낌 산물> → ③<산물> : 맥락감으로부터 느낌 산물을 느끼고 느낌 산물로부터 생각함.

 

일단 이 네 가지가 기본이고, 이후에 <산물화>와 <느낌화>가 연계돼서

다양한 과정이 하나의 맥락 이동으로 나타나게 돼.

 

 

①<느낌> → ② <느낌 산물> → ③ <느낌 산물> : 느낌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①<느낌> → ② <산물> → ③ <산물> : 생각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①<느낌> → ② <느낌 산물> → ③<산물> → ④<느낌 산물> : 생각으로부터 느낌을 받을 수 있고,

①<느낌> → ② <느낌 산물> → ③<산물> → ④<느낌 산물> → ⑤<느낌> : 아예 맥락감으로 가라앉을 수도,

 

①<느낌> → ② <느낌 산물> → ③<산물> → ④<느낌 산물> → ⑤<산물>

: 생각으로부터 받은 느낌을 새로운 생각으로 연결할 수도.

 

 

기타 계속된 연결도 가능하겠지.

 

특수한 경우로

①<느낌> → ② <산물> → ③<느낌>,

이것의 연결도 가능한데, 이건 논의 B-2-11에서 설명할게.

 

 

 

 

 

B-2(-10)

 

 

<느낌>의 변화는 없나요? 라고 물어볼 수 있지. 고정돼있잖아.

 

①<느낌> → ② <느낌> → ③ <느낌> 이런 식의 변화 말이야.

얘기할 수 있는 건, 의식 흘러가면서 <느낌>은 게속 변화돼. 그래서 처음 바탕만 전제하고

굳이 더 안 붙이는 거야.

 

지금은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썼지만, 나중에 표기법 마련한 거 보면

변화되는 느낌의 잠재를 반영하니까 일단은 바탕으로 전제해서 굳이 쓰지는 않았다고만 확인하자.

 

 

 

 

B-2(-11)

 

 

①<느낌> → ②<산물> → ③<느낌> 이거 살펴보자.

①<느낌> → ②<산물>

이 기본 과정이랑 같이보자.

 

이 두 가지 과정을 해석하는데 세 가지 관점이 사용될 수 있어. 그냥 중요한 건 아니고

가볍게만 읽어줘.

 

 

 

 

첫 번째로

<느낌>/<느낌 산물>/<산물>의 1단계, 2단계, 3단계, 단계적 진행을 딱딱하게 수용해서

 

사실은

①<느낌> → ②<산물> → ③<느낌> 이게,

①<느낌> (→ ②<느낌 산물>) → ③<산물> (→ ④<느낌 산물>) → ⑤<느낌>

 

알아차리기 어려운 2단계의 <느낌 산물>이,

1단계 3단계 이동의 중간마다 2단계로써 무조건적으로 함축되어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느낌>/<느낌 산물>/<산물>의 단계적 진행을 거쳐가는 지점으로써 해석해서,

 

2단계라고 여기던 <느낌 산물>을, 거쳐가지 않을 수도 있는,

 

①<느낌> → ②<산물> → ③<느낌>, 이게 충분히 수용될 수 있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그냥 <느낌 산물>의 지점을 안 거쳐가고 스킵하고 단계가 진행되는 거지.

 

 

 

 

아니면 세 번째로 둘이 복합되어 있을 수도 있어.

 

가령

<느낌 산물>을 <산물>처럼 쓴다던가

<산물>을 <느낌 산물>처럼 쓴다던가

 

ex)

①<느낌> → ②<(느낌) 산물> → ③<(느낌) 산물>→ ④<느낌>

 

②, ③ : 느낌 산물의 형식에 가까운 산물 : <느낌 산물>처럼 생각하기,

하지만 성질은 느낌이나, 생각의 일종이라 보이므로 산물로 취급

 

 

또, 저런 게 아니더라도 편하게 첫 번째, 두 번째 관점 섞어서

지점을 거쳐갈 수도 있긴 한데,

알고 보니 미약하게 느낌 산물이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으로도 가능하겠고.

 

 

일단 편리하게 두 번째의 관점을 취해보자.

 

* 나중에 세 번째의 관점을 택할 것이나, 어차피 세 번째가 논의상 올바르다고 하여도

두 번째의 관점을 취해도 논의 전개에는 이상이 없으므로 두 번째 관점을 취하겠습니다.

 

 

 

①<느낌> → ② <산물> 이건 되게 쉽게 돼.

그냥 평소에도 별 느낌 없이 생각하기 자연스럽게 할 수 있잖아.

근데 ①<산물> → ②<느낌> 이게 어려워. 생각하다가 맥락 확인하기. 성찰하기.

 

보통 한다면 ①<산물> → ②<느낌 산물> → ③<느낌>이거나,

①<산물> →  ②<산물> → ③<느낌 산물> → ④<느낌>이거나,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편이야.

왜? 그 <산물>에 대한 <의문감>으로의 <느낌 산물>을 가지기 때문에.

 

<의문>조차 없이, 기타의 <느낌 산물>조차 없이 성찰할 수 있어야만

①<산물> → ②<느낌>의 과정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대개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다는 거지.

 

 

 

많이 하다 보면,

①<산물> → ②<느낌> 이게 쉬워지는데,

즉, ①<느낌> → ② <산물> → ③ <느낌> 의 순서로 의식했을 때, 이렇게가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①<느낌> → ② <산물> → ③ <느낌 산물> → ④<느낌>, 보통 이런 식으로 전개하게 된다.

 

 

정말 아무런 의도 없이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맥락 컨트롤이 가능하면,

되긴 되지만 평상시 하기 어렵다.

 

 

①<느낌> → ② <산물> 도 많이 쓰니까 사람들 쉽게 하는데,

①<산물> → ②<느낌> 이것도 많이 쓰면 쉽게 할 수 있다.

 

 

* 애초에 쓰는 사람들은 잘 쓴다.

대화하는 상황에서 무자각하게 무언가를 눈치채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 눈치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지.

다만, 대부분 다른 데에서의 수월한 적용이 미진하다.

주로 대화에 능숙한 사람들에게서만 위의 <과정>이 간혹 드러나는 듯.

 

 

 

 

 

B-2(-12)

 

 

논의 A-2-16 에서, <무>를 <무자각> 옆에다 붙여놨었지. 맥락의 바깥에다가.

만약 <무자각>에서 <무>로 진행한다?

 

이걸 <철회>라고 부르고 주제의 맥락적 배제를 의미해.

나중에 중요하게 쓰이니까, 맥락 안에서만 주제가 도는 게 아니고,

바깥으로 진행할 수 있음도 염두에 두자.

 

 

임포스터.png

 

 

까먹는 것도 일종의 <철회>라고 볼 수 있어.

 

두 가지만 일단 기억하자.

<느낌>은 언제나 <느낌 산물>이나 <산물>의 아래에 잠재한다.

<철회>라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

 

 

 

 

 

B-2(-13)

 

 

중요한 것. 언제나 내가 느끼는 느낌이나 생각에 <맥락감>이 잠재하고 있다.

또 다시.

언제나 내가 생각한 것에는 <느낌 산물> 혹은 <맥락감>이 잠재하고 있다.

또 다시.

언제나 내가 생각한 <산물>에는 <느낌의 것>이 잠재하고 있다.

 

 

* <느낌 산물>, <맥락감> 모두 내면적으로 <느낌의 것>임에 <산물화>되어 일컬어질 수 있기 때문에

ex) "<느낌> 산물" 과 "맥락 <-감>"

 


따라서 맥락 성찰을 위해선 느낌의 성찰이 중요하다.

 

 

 

 

 

 

 

<B-2, 끝.>

 

1. 해수면의 비유. <느낌>, <느낌 산물>, <산물>의 수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2. 느낌이란? <종합감>의 설명.

3. 장면의 비유. <맥락감>은 <느낌 산물>과 <산물>을 파생한다.

4. <맥락감>의 <중립성>을 <규정된 구분>으로 함부로 이해하려해선 안 된다.

5. 서랍장의 비유.

6. 느낌 산물이란? 표현되지 않은 느낌 그 자체이다.

7. 산물이란? 표현 등으로 대상화된 것, 대상이다. 생각으로 치부할 수 있다.

8.  맥락, 세 가지 수준의 다섯 가지 특징.

① <느낌 산물>이나 <산물> 아래에는 언제나 <느낌>이 잠재한다.

② <느낌>은 <느낌 산물>과 <산물>에 <가려질 수 있다>

③ <느낌>과 <느낌 산물>은 <산물화> 할 수 있다.

④ <느낌 산물>과 <산물>은 <느낌화> 할 수 있다.

⑤ 맥락적 과정에서의 단계 전환은 변칙적이다.

9. 세 수준으로의 의식의 흐름, <과정>의 경우들을 설명한다.

10. <과정>의 심화로 <느낌>은 언제나 잠재하므로 생략하여 전제한다.

11. <산물>→<느낌>은 숙련을 통해야만 가능하다.

12. <무>로의 진행을 <철회>라고 부른다.

13. 전반적인 논의를 종합하건대 <산물>의 출현에는

무조건적으로 <느낌> 혹은 <느낌 산물>로의 느낌이 관여하므로 본인의 맥락 파악을 위하여

<느낌의 것>의 성찰이 중요하겠다.

 

 

 

 

 

 

 

 

느낌의 일상적 논의

 

B-3(-1)

 

 

<느낌>/<느낌 산물>/<산물>의 관계와 특징, <과정>을 살폈으니,

<맥락감의 느낌> 말고, 그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느낌의 것>으로써 더 파고들어보자.

 

 

느낌의 논의를 일상적으로 옮겨보자.

 

 

맥락적 논의말고 우리의 일상에서 느낌이란 어떤 건지 논의해보자고.

 

 

보자,

이거 옛날에 글 쓸 떄 커뮤 이곳저곳에서 긁은거임. 내가 생각한 게 아니고.

그러니까 일상에서 이런 용례들이 쓰인다는 건데, 분류한거야.

 

한 번 하나하나 느껴보면서

느낌을 재현할 수 있겠는지 꼼꼼히 따져봐주라.

 

 

 

좋은 느낌, 나쁜 느낌, 새로운 느낌, 무서운 느낌, 사랑스러운 느낌.

느낌은 <기분과 감정>에 연계합니다.

 

푸른 느낌, 까칠한 느낌, 뜨거운 느낌, 차가운 느낌, 매콤한 느낌,

느낌은 <지각과 감각>에 연계합니다.

 

공통을 느낌, 차이를 느낌, 알아차림을 느낌, 모름을 느낌, 사람 같은 느낌을 느낌,

설명을 못 했지만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냐고 물어보는 데에서 느낌, 옳은지 곱씹어보며 느낌,

느낌은 <직관과 경험>에 연계합니다.

 

 

 

.

.

.

 

 

일상에서 쓰이는 느낌을 분류한 건데, 즉, <느낌 산물>의 분류야.

<느낌 산물>이 <맥락감>이 아니라, 기존의 느낌이라고 했으니까.

<느낌 산물>은 <①기분과 감정>, ②<지각과 감각>, ③<직관과 경험>

 

이렇게 세 분류가 가능하다.

 

 

 

감정.png.jpg감각.png.webp경험.png.webp

 

 

* 히든 분류로 하나 더 넣을 수 있긴 한데 이건 나중에 밝힐게.

 

 

 

 

 

B-3(-2)

 

 

 

근데 잘 생각해봐.

저게 어떻게 <느낌>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엮일 수가 있는 거야?

 

일단 아무 문제 없이 느끼고 저런 용어로 쓰이는 거 동의하지?

물론 너가 개인적으로 동의 못할지라도 저거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쓰는 말이거든?

내가 커뮤에서 긁은 거니까?

 

근데 신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다느니, 원래 하나라느니, 느낌은 정신적인 거겠느니 따지면서.

이 느낌의 용례 분류를 종합하니 그냥 성질 분간 자체가 없이 섞여있다?

 

어떻게 좋은 거랑, 푸른 거랑, 옳은지 따져보는 거랑 <느낌>이라는 단어로 똑같이 엮일 수 있냐는 거지.

어떤 건 보는 사람에 따라 신체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어떤 건 보는 사람에 따라 정신적으로 보일 수도 있잖아.

 

근데 어떻게 사람들이 <느낌>이라는 단어로 동의하고 대화에서 무리없이 사용할 수 있지?

무언가 공통점이 있다는 거잖아?

 

 

(1)

가령 한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

느낌은 정신적인 거다. * 신체와는 대립되는 마음 따위에서 벌어지는

 

(2)

다른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

느낌은 신체적인 거다. * 뇌로부터의, 호르몬으로부터의, 세포로의

 

(3)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

느낌은 신체적이기도 하고, 정신적이기도 하다. * 아무튼 어찌저찌 연합

 

그리고 중첩된 의견군들끼리는 막 비율을 따질 수도 있고.

 

 

 

근데 뭐가 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이미 저렇게 쓰고 있고, 저렇게 쓸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애초에 잘 몰라도 느낌이라 이름 붙이고 쓸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

정말로 신체적으로 공통되든, 정신적으로 공통되든 간에

개인적인 신체적 공통, 정신적 공통의 확신 또는 사회적인 합의 없음에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이 말은 신체성/정신성과 관계 없는 다른 공통 속에서 이미 느낌이 일상적으로 일컬어지고 있어왔음을 시사한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냐?

느낌이라고 이름 붙이려면 뭔가 공통하는 걸 무자각적으로 느껴야 되는데,

그 공통성이 뭐일 수 있냐는 거지.

신체성이랑 정신성은 일단 견해 차이 있으니 나가리인데. 

 

나는 이렇게 설명해.

 

 

단순히 무자각성과 자각성이라는 맥락에만 관계하기 때문에,

느낌은 신체적/정신적 성질의 분간 없이 활용될 수 있다.

즉, <느낌 산물>의 세 가지 분류는 맥락적인 것의 모음집이 되는 거야. 

 

<느낌이 오른다>, <느껴진다>의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저것들 전부

<느낌>으로 말해질 수 있음인데,

그 공통분모가 바로 맥락적인 것, 무자각성에서 자각성으로의 진행이다.

혹은 맥락적이므로 자각성에서 무자각성으로의 진행이다.

혹은 자각적이거나 무자각적인 상태의 경험 인지이다.

 

 

 

*

여담으로 느낌을 맥락적인 것으로 여기고 느낌의 신체성/정신성을 무자각성-자각성에 대입하여 궁리한다면

느낌이란, 넓게 본다면 신체성 vs 정신성의 대립이 아닌,  신체성+정신성 vs 신체성 혹은 정신성의 싸움이다.

무자각적으로는 신체+정신적인 것이며,

자각적으로는 신체적인 것 혹은 정신적인 것 혹은 신체적이면서 정신적인 것으로써 분화한다.

 

 

 

 

 

B-3(-3)

 

동시에, '느낀다'고 말한다면, '무자각에서 자각했다'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게 되는 거야.

말함은 표현이고, 느낌의 대상화이므로 말하는 것 자체가 <산물화>잖아.

 

<느낌 산물>보다 <산물>의 자각성이 더 강하고, 이게 <산물화>이기 때문에

'무자각에서 자각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

느꼈는데 말해보겠다(무자각에서 자각한 바를 표현하겠다)(느낌보다 말이 더욱 자각적이므로)

→ 산물화한다 →  무자각했음을 자각했다 → 느꼈다(고 말한다)

 

 

.

.

.

ex)

되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인데

→ 되게 어울리지 않는 무자각이 자각되는데

 

어, 그거 그런 느낌이 있어

→ 어, 그거 그런 무자각이 자각 돼.

 

어떤 느낌이냐면,

→ 어떤 무자각의 자각이냐면, (혹은 어떤 무자각이었냐면)

 

 

 

 

 

B-3(-4)

 

 

여기서 얘기해야 할 건, 그렇다면 <느낌>은 무자각성에 밀접한가?

 

이거야. <산물>과 비교 대상 두지 않더라도 독자적으로 무자각인가?

 

 

가만히 생각해볼 때,

 

어울리지 않다고 느끼는 건, 그것이 어울리지 않다고 자각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치환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무자각>을 자각한다는 건

 

느낌이 원체 무자각하다는 소리 같은데,

 

좀 아니지 않나? 느낌은 무자각보다는 자각과 가까워 보이는데.

 

 

근데 이렇게 말할게.

 

<느낌 산물>을 통해서 자각하는 거지,

<느낌 산물>이 주로 자각성인 건 아니다.

 

 

 

 

 

 

B-3(-5)

 

 

 

내가 논의 A에서 이렇게 무자각성과 자각성을 맥락의 형식에서 구분했었잖아?

<무자각적 무자각성-자각적 무자각성-무자각적 자각성-자각적 자각성>

 

그리고

<아주 약한 자각-약한 자각-강한 자각-아주 강한 자각>

이렇게 구분이 될 수도 있고?

 

 

<무자각적 무자각성-자각적 무자각성-무자각적 자각성-자각적 자각성> 이게 기본인데

<아주 약한 자각-약한 자각-강한 자각-아주 강한 자각>로써

약한 자각의 형태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근데 약한 자각이란 <자각적 무자각성>에 위치하기에, 자각성보다는 무자각성의 비중이 높으니까,

 

무자각성에 가깝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무자각이다 이렇게 추려서 얘기하는 거.

 

 

 

<느낌 산물>이 무자각 vs 자각 중에 보통 뭐냐?

하면 보통 무자각에 더 가까우니, 무자각이야. 이렇게 얘기하는 거임.

자각성이 아예 없다는 게 아니고.

 

 

약한 자각에 가깝기 때문에, 느낌은 무자각성의 영역 쪽에 위치하고, 그래서

간추려서 무자각이라는 거지? 아예 무자각한게 아니고?

 

잘 알았어.

 

 

그래도 그것보단 더 자각적일 수 있는 것 같은데?

강렬한 느낌들은 엄청 자각되잖아? 말할 수 있지.

 

 

나는 사람들의 편견보다

강렬한 느낌 자체 또한,

그렇게 자각적이지 않다고 결론내렸어.

 

 

 

 

 

B-3(-6)

 

 

 

불.png

 

 

보통 느낌을 떠올리고자 하면, 강렬한 느낌을 떠올리면서 이 정도는 자각적인 거 아닌가?

너무 자각되는데? 이렇게 생각하잖아?

 

엄청 뜨거운 느낌, 엄청 추운 느낌이라던가. 엄청 날아갈 듯이 행복한 느낌.

 

여기서 이야기하는데,

<느낌 산물>의 강도는 직접적으로 무자각성-자각성과 관계가 없어

 

그냥 강도가 셀수록 보기(자각하기) 편하게 드러나있는 거야.

 

그래서 강렬한 느낌 또한 <자각적 무자각성>, 즉, <무자각성>에 속해

 

 

뭔 소린가 싶겠지? 엄청 아픈 느낌을 받으면 자각하기 마련이잖아.

근데 나도 헷갈려서 내가 오랜시간 엄청 고민해봤는데, 강도는 크게 관계가 없는 것 같아.

 

 

다만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러니까 그 강렬한 느낌 그 자체는 무자각성 쪽에 속하는데,

<분리감>으로의 <산물>을 계속해서 유발하는 역할인 거야.

 

잘 보이게 생겨가지고.

 

 

아파! 아파! 할 때 이미 무자각성의 아픈 느낌 탓에 자각성으로 와 있고,

이 자각 탓에 무자각성의 아픈 느낌까지 자각의 것으로 착각한단 소리임.

 

 

존재로써 자각시켜서 행동과 생각 따위의,

<산물> 자각성을 유발할 수 있는 역할인 거지.

그 강렬한 <느낌 산물> 자체가 자각은 아니라는 것.

 

 

강렬한 느낌 자체가 자각성에 위치한 게 아니고,

강렬한 느낌이 분리감을 유발시켜서 자각성으로 끌어올린 다음에

이후에 강한 자각이 되는 거야.

 

 

* 논의 B-2-3에서의 표현 역시 <분리감> 또한 자각(의식)의 유발 역할을 맡음을 시사한다.

  논의 B-1-2에서 <맥락감>은 <무자각적인 상태에서의 느낌>임에, <맥락감> 자체는 무자각이다.

 

 

 

 

B-3(-7)

 

 

화남.png.jpg

 

 

화가 미친 듯이 나도, 나 그때 정신이 없었어. 이러잖아.

다만 그 강렬한 화가 물건을 던질 가능성을 자각케 하고, 물건을 자각케 하고...

자각을 일으키는 동기가 된다는 거지. 화 자체는 무자각적이지만.

 

 

물론 화 많이 났을 때, 물건 던짐이나 이런 것도 무자각일 수 있겠고.

* 논의 B-1-5의 변수와 논의 B-2-11의 세번째 관점에 기반하여

 

 

예컨대 엄청 뜨거우면 손을 딱 떼고,

예컨대 엄청 뜨거운 불이 몸에 붙어서 위협을 느끼면 의도 없이도 불 끄려 하잖아?

이건 자각보단 무자각하게 하게 되지.

 

그 이후에 강하게 자각되는 거야. 엄청 뜨거웠다.

엄청 뜨거운 불이 몸에 붙어서 불을 마구 껐다. 이런 식으로 자각하게 되는 거야.

불 붙은 거 보고 어이씨, 했을 때 난 그때 자각한 거다. 이런 식의 착각.

(약한 자각은 맞는데 당시의 느낌 자체가 강한 자각은 아니고, 무자각에 가깝다는 뜻)

 

일단 여기서 하나 정리하고 가자.

 

 

*

물론 상황에 따라 개인이 느끼는 맥락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실제로 자각했을 수도 있고,

무자각이라 하여 극단적인 무자각을 의미함이 아닌, 자각 쪽에 가깝지만 무자각 쪽에 가까운

약한 자각으로써의 무자각일 수 있음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자.

 

*

헷갈릴 수 있으니 놀람(의 느낌)으로 두자면,

강한 놀람과 약한 놀람이 있을 때, 약한 놀람이나 강한 놀람 자체는 무자각이다.

약한 놀람은 약한 자각으로,

강한 놀람은 더 강한 자각으로 보낼 잠재성으로써 <산물>의 자각성을 유발하는 역할일 뿐.

 

*

놀람을 행위의 <산물>로 두었을 때도 변수에 따라, 무자각일 수도 있고 자각일 수도 있다.

무조건 놀란다고 해서 자각이 아니다.

 

 

 

 

 

 

B-3(-8)

 

 

<과정>을 얘기했잖아?

그 중에 기본으로 놓은 과정이 이랬잖아?

 

①<느낌> : 맥락감을 느낌.

①<느낌> → ② <느낌 산물> : 맥락감으로부터 느낌 산물을 느낌.

①<느낌> → ② <산물> : 맥락감으로부터 생각함.

①<느낌> → ② <느낌 산물> → ③<산물> : 맥락감으로부터 느낌 산물을 느끼고 느낌 산물로부터 생각함.

 

 

논의 B-1-2 에서 <무자각적 상태에서의 느낌>을 통해 <종합감>과 <분리감>을 발굴했다 했으니까,

일단 <종합감>은 그렇다치고

<분리감> 자체도 <느낌 산물>의 논의처럼 자체는 무자각인거야.

 

 

일단 그렇다면 ①<느낌>이 제일 낮은 무자각성이겠지?

그러면 기본의 과정에서는, <자각성>이 점차 차오르는 식일 거야.

 

그런고로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거.

 

 

①<느낌>(무자각성) → ② <느낌 산물>(무자각성) → ③<산물>(자각성),

이렇게 될 수도 있지만 ② → ③ 의 진행 중 자각성이 아주 조금 올라서,

 

①<느낌>(무자각성) → ② <느낌 산물>(무자각성) → ③<산물>(무자각성),

이런 식으로 자각성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으면서 단계적으로 오를 수 있다는 거.

 

 

다른 과정도 마찬가지로, ①<느낌> → ② <산물> 이것 또한

①<느낌>(무자각성) → ② <산물>(자각성) 이게 아니고

①<느낌>(무자각성) → ② <산물>(무자각성), <무자각성>의 영역에서 멈출 수 있다.

 

즉, <느낌 산물>이나, <산물>이라고 해서 몽땅 <자각으로 볼 건 아니다>

 

짚었으니 다시 돌아가자.

 

우리는 왜 강렬한 느낌을 비롯한

일상의 느낌을, 자각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걸까?

 

 

 

 

 

B-3(-9)

 

 

토네이도.png.jpg

 

 

 

만약에 적당히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리에서,

혼자서 엄청 큰 토네이도를 감상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거대함, 웅장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자연을 향한 숭고함과 미약한 공포감.

 

이때 이 강렬한 숭고와 불안은 무자각일까? 자각일까?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테니 무자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너무나도 강렬하기 떄문에 자각일 거야.

 

그럼 무자각인 걸까? 자각인 걸까?

<자각적 무자각성>인걸까? 아니면 <무자각적 자각성> 인걸까?

 

 

근데 생각해봐야 될 게,

 

나나 개붕이들은, 내가 글로 상황을 제시한다면 글을 읽고 상상할 수밖에 없어.

즉, 당시의 진짜 상황에 놓인 존재가 아니야.

 

 

상상과 재현은 <느낌 산물>이 아니고 보통 <산물>이거든? 내적으로 대상화해서 표현하는 거니까.

그래서 <산물>을 보려면 자각해야 해서, 자각이라고 느껴지는 거야.

 

애초에 <산물>로써 글을 읽고 상황을 떠올리면서 상상하고 재현하기 때문에,

 

글을 읽는 당사자로서는 토네이도의 강렬함에 대한

<느낌 산물>까지 자각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느낌의 체험이 어렵고, 재현한 느낌은

진짜 겪을 느낌과는 분류 자체가 다르다.

 

그러므로 당시의 무자각은,

언제나 체험된 당시에 살펴야 한다.

 

 

* 여기서도 자각이라 해서 극단적인 자각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맥락에 따라 무자각에 가까운 자각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자.

또, 실제로 자각일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 그렇다는 것.

 

 

 

 

B-3(-10)

 

 

물론 무자각의 <느낌 산물> 외, 자각의 <느낌 산물> 없다,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야.

다만 강도와 맥락의 반영에서만큼은 <느낌 산물>과 관련이 없다는 거지.

 

방금 얘기했듯이, <재현된 느낌>이 <산물>이라고 볼 법한 <자각성의 느낌>일 수 있어.

 

이미 대상 만들어놓고 바라보고 있으니까.

 

 

저런 토네이도로 재현된 느낌에는 <분리감>이 밑천에 명백하게 깔려있기도 하거든.

(토네이도가 비일상성에 속하는 나 같은 한국인의 경우)

 

그러므로

재현했을 때의 <느낌 산물>은 <자각성의 느낌 산물>일 수 있다.

 

 

 

 

 

B-3-(-11)

 

 

일단 위에 동의할 수 있는데, 이렇게 물을 수 있지.

<종합감>보다 <분리감>이 더 자각에 밀접하겠으니, <분리감>이 <종합감>보다

무자각성으로써 강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느낌 산물>의 강도처럼,

<느낌>의 강도에서

<종합감>과 <분리감>을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식의 물음.

 

<분리감>이 <종합감>보다 강렬하므로, 이 정도의 강렬함이면 <분리감>이다. 이런 식으로.

 

근데  <느낌 산물>과 달리 <종합감>과 <분리감>의 구분법에

강도 차이가 주요하다기엔 결이 조금 달라.

 

 

<분리감>보다 <강한 종합감>이 있는가 하면, <종합감>보다 <약한 분리감>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에 겪어봐야 알 수 있는 문제기도 하고.

 

예컨대 이건 강렬한 <분리감>이다 했더니, <강한 종합감>일 수 있겠고,

이건 강렬하지 않으니 <종합감>이다 했더니, <약한 분리감>일 수 있으니까, 구분 어렵겠지?

 

그래서 정확히는 어떤 식으로 구분해야 하냐면,

약간 내가 <분리감>을 쭉 오른다, 그런 식으로 설명했을 텐데,

맥락 이동적 측면이 아니고, 그냥 맥락 위치적 측면에서 <분리감>을 살피면

뭔가 <종합감>보다는 들떠있는 느낌이야.

 

 

종합감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렇게 잠잠하게 느껴진다면,

분리감은 ===================================== 이렇게 느껴져.

 

 

<종합감>은 쇠젓가락 같은 느낌, <분리감>은 나무젓가락 같은 느낌.

 

뭔 소린지 모르겠지? 근데 느껴서 개념 잡게 되면 아, 이걸 이렇게 얘기하네.

이렇게 생각할걸? 진짜 딱 이래.

 

* 물론 나만의 개념일 수 있으나.

 

 

(1)

예컨대 현실하고 좀 헷갈리게 꾼 꿈을 현실인가?

물어보고 .... 아니구나. 판단 내릴 때의 ....에서 드는 느낌.

 

(2)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가 의도 틀어서 그런 의도 아니었는데?

하며 당시에 없던 거짓 의도 붙여서 거짓인 걸 막연하게 아는데도,

양심의 가책 없이 얘기할 때 느껴지는 느낌. 

 

 

이게 약간 바닥이 있다면 바닥 마감 잘 안된양 들떠있음.

겪어봐야 아는 건데, 저렇게 토네이도 느낌을 <상상>할 때 들떠있는 게 희미하게 느껴져.

 

 

그러니까

<느낌>을 강도로는 구별할 수 없다.

 

 

 

 

 

B-3(-12)

 

 

다시 돌아와서, 자각성의 <느낌 산물>이 있다 하였으니,

 

①<느낌>(무자각성) → ② <느낌 산물>(무자각성) → ③<산물>(자각성)일 수도 있지만,

①<느낌>(무자각성) → ② <느낌 산물>(자각성) → ③<산물>(자각성)일 수도 있는 거고,

 

또, 위에 같은 경우, 기본 과정에서 파생해서,

①<느낌>(무자각성) → ② <산물>(자각성) → / ③<느낌 산물>(자각성)

<산물>의 떠올림 이후에 자각성의 <느낌 산물>이 과정 전개됐다고 해석할 수 있고.

 

 

요약하면 재현할 때의 <느낌 산물>은, <분리감>이 바탕에 있을 수 있으므로,

<자각성의 느낌>일 수 있으며, 따라서 <느낌 산물>이 전부 마냥 무자각인 건 아니다.

 

그 외에 자연적인 <자각성의 느낌>이 있을 수도 있기야 한데,

나는 잘 못 찾겠어. 하지만 있을 수도 있다.

 

 

*

느낌의 강도는 왜 생기냐? 이렇게 물어볼 수 있지.

가설은 있는데 나중에 <감명의 확장>에서 설명하고 일단은 넘길게.

 

 

 

 

 

 

B-3(-13)

 

 

그러면 산물은 자각이냐?

 

논의 B-3-8에서 말했듯이 무자각성의 산물이 있다고 했으니, 느낌보다야 자각적이기야 하겠지만

산물이 다 자각인 건 아니겠지. 

 

 

특이한 건 이거야. 논의 B-3-7 에서,

재현 때문에 <느낌 산물> 자각하며 떠올려놓고 원래 무자각인 것을 자각이라고 착각한다 했잖아?

 

<산물>을 무자각하게 떠올려놓고,

무자각인 것의 무자각성을 자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어.

 

당시에 무자각하게 생각해놓고 자각이라고 착각한다.

재현했을 때는 그 무자각이 자각으로 와야 돼서.

 

근데 왜 특이하냐면, 산물이라기 보다는 <느낌 산물>처럼 생겨서.

생각은 맞는데, 느낌 같이 생각이 되는 경우가 있어.

 

당시에는 느낌 비스무리하게 대충 생각해놓고 회상했을 때 자각하니,

단단하게 생각했다 착각할 수 있다는 거.

 

일상에서 사람들이 흔하게 착각하는 경우 중에 하나야.

 

 

 

 

B-3(-14)

 

 

물론 단순히 재현 탓인 경우도 있지만, <느낌 산물> 탓일 수도 있어.

봐봐.

 

<느낌>은 <느낌 산물>과 <산물>에 <가려질 수 있다>

 

이걸 심화해서 표현하면,

<느낌 산물>과 <산물>은 <느낌의 바탕>을 <대체할 수 있다>

 

 

또,

<산물>은 <느낌 산물>에 가려질 수 있는데,

 

이 말은?

<느낌>이 아니라, <느낌 산물>이 <산물의 바탕>을 <대체할 수 있다>

 

 

 

 

 

 

B-3(-15)

 

 

안대.png.jpg

 

사람들이 <느낌>의 존재를 잘 모르니 <산물>을 일으켰을 때,

<산물> 혹은 <산물>의 바탕으로 대체된 <느낌 산물>을 가지고 판단을 해왔겠지?

 

<느낌 산물>을 위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느낌 산물>이 <느낌>을 대체해서 <느낌> 행세를 하는데,

 

논의 B-3-6에 따라서 강렬한 느낌이 바탕에 있다면,

강렬함은 자각이라고 착각하고,

나 지금 잘 자각하고 있다. 이렇게 착각할 수 있다는 거임. 무자각하면서.

 

생각하면서 슬픔을 느낄 수 있잖아. 아픔을 느낄 수 있고,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슬픈 생각, 마음 아픈 생각, 재밌는 생각... 다 이렇게 일상에서 말해질 수 있지?

 

그냥 흔하게 일상에서 <느낌 산물> 붙은 <산물> 생각할 때,

그 <느낌 산물> 탓에 자기가 자각했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거.

 

 

그 느낌 산물에 따른 판단이 부자연스럽단 소리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게 맞긴 한데,

그 생각에서 느껴지는 재미와 슬픔의 강렬함 혹은 느낌 산물 그 자체로써

무자각한 생각까지 자각했다고 착각하는 건 잘못된 거다.

 

사실은 무자각과 자각의 여부는 <느낌>의 확인에 따라 결정되는데도.

 

 

그래서 내가 아, 이 정도면 잘 알지. 싶은

느낌 뽕 취해서 과신하거나 (무자각해서 좀 더 검토가 필요함에도)

아까 대충 생각해놓고 다시 회상했을 때, 당장 드는 느낌으로 당시의 생각을 정당화하지 말고

제대로 맥락을 잡고 <맥락감>을 들여다볼것.

 

 

감정에 잡아먹혀서 스스로를 과신하지 마세요.

* 차라리 착각의 가능성을 덜어주는 <산물>을 관람하자. <느낌 산물>의 강도를 빼고 보기.

이성적 판단.

 

 

 

 

B-3(-16)

 

사람들 <느낌 산물>과 <산물>의 무자각성/자각성을 자꾸 착각하네.

착각 안 하려면, 어떤 게 무자각성이고 자각성일지 잘 잡아놔야겠지?

 

그래서 아예 느낌 산물, 산물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무자각성과 자각성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자.

 

 

(1)무자각적인 느낌 산물, (2)자각적인 느낌 산물,

(3)무자각적인 산물, (4)자각적인 산물 네 가지로 설명하면 괜히 불어나니까.

 

 

무자각성에 속한다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자각성에 속한다면 어떤 특징을 가질까?

 

* 무자각이라면? 자각이라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두 가지로만 살펴보자고.

 

 

 

 

 

B-3(-17)

 

 

무자각적으로 떠올린다면 전체가 통째로 떠오르는 느낌* (매우 중요) 이야.

 

자각적으로 떠올린다면 무언가에

내면적 지각에 따라 시공간에 구애 받아서 차근차근 떠오르는 느낌이 들어.

* 공간적인 면도 그렇지만 시간적인 면에 특히 구애받는다

 

예시 남길게.

 

 

사과는 영어로?

사과 아랍어로? 

(들어보고 다시 질문에 답해보자. التفاح 한국어로 - Google 검색)

 

코끼리를 그냥 떠올려봐

코끼리를 머릿속에서 그려봐

 

예컨대 <의자>라는 게 있으면, 이게 기의랑 기표랑 쪼개지잖아?

보통 기의를 생각할 때 그게 무자각적인 생각이고,

기표를 생각할 때 그게 자각적인 생각이야.

 

 

 

기의는 의자의 의미를 생각하니까. ....... 하면 (의자) 으징ㅈ, 읮.

그냥 흐릿하게 뭉뚱그려져서도 떠올릴 수 있잖아?

 

근데 기표는 의자의 표기, 소리 이런 걸 떠올려야 하니까. 의. 자. 이렇게 읽혀야만 돼.

아니면 제대로 무언가 보이던가.

 

기표 떠올림과 유사한, 내면적 시공간에 의존하는 떠올림 경우를

<형상화>라고 부르는데,

형상화되면 그 형상화된 생각은 거의 무조건 자각성이야. 이거는 왠만하면 백퍼.

 

 

쉽게 얘기해서 내면에서

<무엇인지 지각적으로 선명할수록> 무자각성과 자각성의 차이가 생긴다고 보면 돼.

 

 

다들 ①번보다 ②번이 확연히 오래 걸릴거야.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지만 대체로 ①이 무자각성이고 ②가 자각성.

 

이 파트는 나중에 저번 글의 그림상 <3>에서 자세하게 다룰 거니까

이 정도로 대강 파악하고 넘어가자.

 

 

* 물론 이해 쉽게 하려고 한 거고 지각적으로 선명한 무자각이 분명히 있긴 있음. 대체로 이렇다는 것.

무자각성-자각성을 떠올리는 데 있어,

통째로 떠오르는 느낌이 바탕에 있다는 설명이 가장 무자각성에 적합함.

 

(지각적으로 선명케 하는 과정에서 왠만하면 시공간에 구애받기에,

근데 지각적으로 선명하게 통째로 떠오른 경험도 분명히 있었기에, 약식의 구분법으로 그러하다는 점.)

 

 

 

 

 

B-3(-18)

 

 

<문장>으로 떠올릴 때가 있잖아?

B-2-7에서 언어와 형상화(상상으로의 지각적 구현)는 몽땅 <산물>로 취급하자, 고 인용에 적혀있는데,

하물며 <문장의 떠올림>의 <산물>조차 <무자각>일 수 있어. (느낌처럼 생각하기)

 

일상 살면서 잘 판단해봐.

문장처럼 떠올랐는데? 느낌마냥 통째로 떠오를 수가 있는데 그건 무자각의 떠올림이야.

그리고 하나하나 읽히듯이 떠오를 수 있거든?

완전히 언어를 존중하는 마냥? 그건 자각의 떠올림이야.

 

 

가스밸브.png.jpg

 

아, 가스밸브 안 잠궜다. 이렇게 말로 할지언정

 

무자각하게 번뜩 떠올렸을 때는

문장이 통째로 떠오르거든?(상상해서 안 되고 평소에 직접 경험해봐야 앎)

암ㄴㄳㅂㅂㅂ안줌ㄱㄷ, 이런 식으로 혹은

흐릿하게 그냥 언어적으로 완성되지 않거나 형상화 덜 된 채로 통째로 떠오름. 무자각하단 소리고,

 

한 번 떠올린 뒤에 자각해서

아, 가스밸브 안 잠궜다, 머릿속으로 재현할 때는, 이때는 이미 자각하고 있는 거임.

아. 가스밸브. 안 잠궜다. 이런 식으로 완성되면서 떠오르면 자각하는 거.

형상화로써 머릿속으로 제대로 그리거나. 이러면 자각하는 거.

 

 

그러니까 정말 내가 숙련되게 무자각과 자각을 구분하려면, 자각하기 전에

무자각한 의식이 벌어짐과 동시에 무자각을 캐치할 줄 알아야 됨.

 

이미 자각하고 나면 당시의 제대로 된 무자각은 물건너간다.

 

 

 

 

* 영어 사과:  앱읍ㅂㅇㅂ, ㅇ뱅ㅂㅇ뱅ㅂ, 앱ㅃ, .....(흐릿하게 떠올리기), (완성 안 되도 대충 다 애플로 생각됨)

 아랍어 사과 : 엣투파호, 엣투파호, 엣.투.파.호.

(구글 음성에서 들은 목소리가 내면에서 지각적으로 들리거나,

외워서 내면적인 언어로 완성해내야만 아랍어의 사과로써 엣투파호 생각됨)

 

 

 

 

 

B-3(-19)

 

그래서 개빡쎈게, 하나의 예시를 둬도 다들 이런 말 하잖아.

사람마다 하나를 두고도 생각하는 게 다르고, 느끼는 게 다르다.

 

논의 B-1-3 <오륜기의 비유>에서도 이미 난 느끼는 방식이 과거에 비해 아예 달라졌고.

 

 

이래서 이 논의 보편적으로 만들기가 정말 빡쎈거야.

 

 

사람마다 각자의 삶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를 두고도

어떤 사람은 무자각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각할 수 있어서

설명하기에 딱 뭐라고 편하게 말을 하기가 참 어려움.

 

ex) 토네이도, 게슈탈트 심리학을 일상에서 숱하게 접한,

가스밸브를 안써서 괜히 다르게 생각해보려다 이상하게 착각하는, 혹은 심하게 이성적인 사람 등 

 

 

물론 <상호주관성>을 전제하니, 다들 받아들일 수 있겠거니 하면서 쓰고 있긴 한데,

논의 A에서 말했듯, 맹신하지 말 것. 절대로.

 

철학 전체를 맹신 안 할 수도 있겠지만,

예시 하나하나에서 나와 너가 다르기 때문에 예시가 잘못될 수 있다.

세밀하게도 맹신하지 마셈

 

내 개인적인 철학일 수 있으니. 또 각자의 개별성이 있으니까.

디지게 어렵네.

 

지금 쓰는 글쓴이의 생활이나 감수성에서 크게 차이 있을수있으니,

다들 각자의 일상에서 검토하며 발견해보아요.

 

 

 

 

B-3(-20)

 

근데 봐봐.

 

사과는 영어로?

사과 아랍어로?

 

코끼리를 그냥 떠올려봐

코끼리를 머릿속에서 그려봐

 

 

두 예시만 뒀을 때 말이야. 떠올리는 재현의 것은,

논의 B-3-10에서 자각에 가깝다고 했는데 어떻게 내면적 재현인 ①과 ②가

무자각성/자각성으로 구분돼서 설명될 수 있는 거야? 물어볼 수 있지?

 

재현했을 때의 <느낌 산물>은 <자각성의 느낌 산물>일 수 있다.

 

그러니까 '일 수 있다' 여서 그럼.

 

 

그래서 재현이더라도, <무자각성의 느낌 산물>일 수도 있는 거야.

 

당연하지?

그럼 재현의 어떤 점이 자각성과 무자각성의 차이를 가져다 줄까?

 

그건 다시 나와버렸는데, 일상성과 비일상성의 차이야.

그냥 일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게 무자각성인 거고, 비일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게 자각성인 거야.

 

 

 

 

 

B-3(-21)

 

 

그러니까 일상적인 떠올림은 주로 무자각성이고,

비일상적인 떠올림은 주로 자각성이겠네?

 

 

논의 B-3-17에 연계하자면,

 

<무엇인지 지각적으로 선명할수록> 무자각성과 자각성의 차이가 생긴다고 보면 된다고 했는데,

일상적인 떠올림은 지각적으로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으니 덜 선명하게 되는거겠고,

 

비일상적인 떠올림은 익숙지 않으니 지각적으로 세밀하게 구성해봐야

어떻게 떠올려볼 수 있을 테니 선명하게 되는 차이를 가지는 거겠군!

 

*

그래서 정말 일상적 떠올림일 경우 선명하고 세밀한데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경우가 존재

말했듯 약식.

 

 

왜 일상성과 비일상성에 관계하냐? 이거 나중에 나오긴 해.

그리고 일상적 떠올림과 비일상적 떠올림이라고 구분했는데, 여기도 석연찮은 부분이 있을 수 있고.

 

ex)

특이한 사건 하나가 각인되어 자꾸 강렬하게 무자각하게 떠오른다.

경험적 떠올림/비경험적 떠올림이라고 봐야되는 거 아니냐? 같은.

 

 

이건 나중에 일상성과 비일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면서 제대로 개선할 테니,

일단 대충 나아가서 이걸 살펴보자.

(어차피 나중에 개선하더라도 문맥은 크게 어긋난 데 없이 유사하게 흐르니까

그냥 전개해도 괜찮은 점에서 <일상성-비일상성>에서 얘기하는 중.)

 

 

 

 

 

 

B-3(-22)

 

 

근데 평소에 일상을 살지, 우리가 주로 비일상을 살아가진 않잖아?

그럼 일상을 살아가는 것도 그렇지만 비일상적 떠올림보다 일상적 떠올림이 훨씬 많겠지?

 

근데 일상적 떠올림이 주로 무자각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일상적 떠올림/비일상적 떠올림이라고 구분하고 좁혀서 논의했지만,

곰곰히 생각해봤을 때,

 

일상적 행동/비일상적 행동에 적용해도

무자각성/자각성의 여부는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

 

예컨대 자전거 잘 타면 무자각하고, 자전거 연습해야하면 자각해야 할테니까.

 

다른 데에서도 <일상성-비일상성>에 따라 <무자각성-자각성>이 대응되네.

 

 

말1.png.webp

 

 

그러므로

일단 우리는 굉장히 무자각하게 살아가고 있다.

 

 

왜? 일상을 살기 때문에. 이건 논의 A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의의겠지.

아무튼 지금의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해서 자각을 정말 정말 안 한다.

(약한 자각만을 위주로,

또, 약한 자각을 위주로 살아가는 것 또한 약한 자각의 기반만을 둔 채로 살아가고 있다)

 

 

 

 

 

B-3(-23)

 

 

여기서 큰 문제가 생긴다! 논의를 모아오자.

B-3(-6), B-3(-10), B-3(-15)

 

<느낌 산물>이 가지는 강도, 맥락 간의 관계 착각과

<산물의 바탕>으로 대체하여 <느낌>을 가리는 탓에,

 

B-3(-9), B-3(-12)

 

스스로 무자각한지, 자각한지를 착각한다.

 

 

 

이 말인즉슨

일단 우리는 무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맞는데?

 

 

말2.png

 

 

생각을 하고도 스스로 무자각하다고 생각을 못한다.

 

 

* 성찰의 아이러니

 

 

 

 

 

B-3(-24)

 

 

논의 A-1-20에 따라서

판단 실패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겠지만,

 

 

정밀한 자기 성찰을 위하여

<맥락감>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B-3, 끝.>

 

1. <느낌 산물>은 ①<기분과 감정>, ②<지각과 감각>, ③<직관과 경험>의 세 분류가 가능하다.

2. 일상에서 <느낌>이란, 신체성-정신성의 보편적 합의 없이 쓰이는데,

이는 신체성-정신성에 무관한 단어 자체의 어떠한 공통을 시사하며, 이것이 맥락성에 관계한다고 추리한다. 

3. 느낌의 표현을 맥락적인 표현에 연관하여 치환할 수 있다.

4. 느낌이 <무자각성>인가 살폈을 때, 느낌은 <자각성>을 유발하는 <무자각성>이다.

5. <느낌 산물>은 약한 자각으로써 무자각성의 영역에 가까우므로 무자각이다. 강렬한 느낌은 어떠한가?

6. 느낌의 강도는 <산물>의 자각성을 더욱 강하게 유발하는 역할일 뿐, 강렬한 느낌 자체는 자각성이 아니다.

7. <산물>의 자각성이지, 강렬한 <느낌 산물>의 자각성이 아니다. 더불어 <산물> 또한 무자각성일 수 있다.

8. <느낌>, <느낌 산물>, <산물>의 과정 설명.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과정을 간과하고 자각성으로 착각하는가?

9. <산물>의 자각성으로 <느낌 산물>의 무자각성을 자각성으로 재현하여, 재현된 <느낌 산물>로써

당시의 <느낌 산물>의 무자각성을 자각성으로 착각한다.

10. 재현된 <느낌 산물>은 <자각성의 느낌 산물>일 수 있다. <분리감>이 깔려 있다.

11. 덧붙여 <느낌> 중 <종합감>과 <분리감> 또한, <느낌 산물>의 강도로써 구별할 수 없다. 

12. 아무튼 모든 <느낌 산물>이 전부 <무자각성>에 위치함은 아니다.

13. 논의 B-3-6에 따라 <산물>도 무자각성일 수 있는데,

거꾸로 <산물>의 무자각성을, 자각성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14. <느낌>이 아니라, <느낌 산물>이 <산물>의 바탕을 대체할 수 있다.

15. <느낌 산물>로써 함부로 과신하지 말 것.

16. 착각하지 않으려면, 무자각성과 자각성 자체를 잘 살펴야 하겠다.

17. 무자각성은 통째로 떠오르는 느낌이며, 자각성은 시공간에 구애 받아 차근차근 떠오르는 느낌이 있다.

18. 재현하면 맥락적 성질이 바뀔 수 있기에, 당시에 깨달아야 한다.

19. 사람마다 느끼는 바,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논의 예시 짜기 개빡친다.

20. 각설하고 재현에서조차 <일상성>과 <비일상성>이 관여한다.

21. 지각적 선명도의 차이는 <일상성-비일상성>와 깊은 관련이 있음이 밝혀지지만,

약식의 구분법이겠다.

22. 일상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무자각하게 살아간다.

23. 문제는 논의 B-3-6, B-3-10, B-3-15의<느낌 산물>이 유발하는 강도와 맥락 관계 착각 탓에

논의 B-3-9, B-3-12,

생각을 하고도 우리는 무자각한지, 자각한지조차 착각함에,

특히 성찰을 하고도 각자는 스스로 무자각하다고 생각을 못한다.

24. 스스로의 판단 실패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정밀한 자기 성찰을 위하여 <맥락감>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

 

아니 임시저장 됏댓는데... 계속 날라가서... 둿다가심호흡하고 나중에 올리고싶은데

저장이 안되니까 어쩔수없이 올린다음에 슬금슬금 수정해야겟네요

너무 많이써서 임시저장이 안되나??

하지만 다썻으니 만족합니다

 

<느낌 산물의 강도>는 사실 안 무거운 파트인데, 분량조절하다가

바탕만 설명하고 끝나면 너무 밋밋하고 지루하니까

논의 B-3-23으로 글쓰면서 새롭게 끌어내봤어

 

여튼 저번 글에서 <B> 부터 실용적이라 했는데?

분량이 점점 늘어나서 결국에 다음이나 다다음부터 실용적인 파트 진행될 것 같아.

 

너무 스압일 것 같아서 그만 썼어.

문제는 이거 아직도 극초기 분량이야... 아직 집지으려고 지반 평탄화하고 있는거임

아니 근데 이게 실용적이면 뭐해

내가 사회적 실용이 없는데...

취업하려고 알아보니까 맨날주구장창 이것만 몰두하고 그외에  띵가띵가하고

철학과라서 전공 이점도 못살리고 너무 게을르게 살아왔다

 

 

ㅠ.png

 

사실 어떻게든 되겠거니 살아가고는 잇지만

취업해야될때에 취업준비 안하고 글쓰고잇는 제가 불안해서 적어봣어요

여튼 빈틈 정리하고 마칠게요.

 

 

 

1. 자기성찰 중요한 것처럼 마지막에 써놨는데 정밀한 자기성찰이 왜 필요해??

 

무자각성과 자각성의 판단이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아직 안 밝혔지만 나중에 줄줄 튀어나올 거에요

일단 대충 성찰이야 좋은 거니까, 하시면서 그런가봅다 해주세요

 

 

 

2. 너가 뭔데 혼자 자각을 규정해?

너가 어떻게 사람들중 다수가 그것은 자각이라고 말할수있는 문제에

개인적으로 틀렸다고 말할수있는거야?

(특히 느낌의 무자각성 파트에서)

 

자각성을 저렇게 규정하는게 나중의 설명들에 적합하게 맞아떨어져서여

물론 언제든지 당연하게 수정될 수 있는 문제이고,

전에말했듯이 모든 논의는 100% 확신으로 가정하거나 규정하지 않으니까,

정말 다른 견해가 있으시면 그 견해로 입맛 바꿔 수정하셔서 읽어가셔도 제가 오히려

아주 권장하는 읽기 자세이겠습니다.

 

논의를 따라가려면 글쓴이를 향한 신뢰가 있어야겠지만은 너무 맹신하진 말아주세요

철학 글이잖아요

그리고 실제로 오래간 박힌 생각들일지라도 저는 엄청나게 수정합니다 절대로 맹신하지 말아주세요

 

 

 


3. 맥락감이 희미하다면서, 어떻게 맥락감에 맥락의 파악을 의지할 수 있어?

그냥 수련하면 다 된다는 독자를 향한 책임 전가야?

 

 

소신껏 밝히겠습니다!

사실 저도 잘 구분못합니다 있긴있는데 정말 흐릿해서요

다만 맥락감이 잘 안 보일 때 이건 알수있는데요?

 

첫 번째로

강렬한 느낌이 들 때 절대 방심해선 안 되고, 오히려 침착해져야 한다는 걸 알수있어요

 

그리고 두번째로 <산물>의 형태면, 최소한 <느낌 산물>보다는 자각적이겠지요?

얘네 둘은 잘 보이기때문에 이 둘의 관계로써 아 그나마, 얘가 얘보단 자각적인 생각이겠구나

이렇게 유추는 가능합니다.

그게 정말 무자각성인지 자각성인지는 좀 곱씹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그리고 수련... 이나 단련이라기보다는... 그렇게 거창한건 아니고

눈치채기가 가장 비슷한 말이겠네요 눈치 키우면됩니다

습관처럼 해서 별생각없이 눈치 차려왓지만, 느낌을 발견한다면 이거구나 하실수잇겟어요

근데 무자각하게 살다보니 아무리 자각을 잘해도 사람이라서 놓칠수가 있다

 

그러니까 책임 전가 아니고요. 그냥 맥락감이란게 있고, 얘네가 키포인트다

딱 이정도...?

자각한다고 해서 실수를 안한다가 아니고, 실수를 하려하지 않으려한다가 핵심입니다.

저도 혼자 착각해서 피드백 반영 못햇잖아요... 사람은 실수할수잇고 그게 당연합니다

언제든지 판단 실패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4. 논의 B-2-7, <산물>의 예시에 주목, 행동, 비언어적 마음가짐 따위? 이건 뭐야?

 

앞에 쟤네들, <때에 따라>가 붙어있는데요. 보통 무자각성이에요.

근데 때에 따라서 쟤네가 자각성이 될 수도 있어요.

예컨대 행동이라 함은, 보통 일상에서 무자각하게 행동하잖아요?

몸 동작을 <연습>할 때라던가 그런 자각성의 행동을 생각하시면 돼요.

 

<주목>, <비언어적 마음가짐> 이것도 말만 어렵고 예시찾기 어려워보이는거지,

여튼 그런 류에요.

 

다른 것도 약간 의도 쪽에 관련있다. 이렇게 여기시면 되겠어요.

 

 

 

5. <느낌 산물>의 재현이 무자각성/자각성에 관계있다면 <느낌>의 재현은?

 

<느낌>은 <느낌 산물>과 달리 나에게 솔직해서, 재현해도 정직합니다.

꾸며지지가 않아요. 정말 중요합니다.

 

일상적 재현이면 <종합감>이고, 비일상적 재현이면 <분리감>이 올라요.

다음에 은근하게 나올 얘기니, 굳이 강하게 설명하진 않겠지만,

여튼 <무자각성-자각성> 쪽이 아니라 대응하는 <일상성-비일상성> 쪽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실 <종합감>, <분리감>이 재현에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해서

당시의 <무자각성-자각성> 판단 위한 재현에서 <맥락감>의 구별이 만능은 아니라는 점.

 

다만 <느낌 산물>로 구별하는 것보다는 훨씬 정확하다.

이정도면 쓰고 넘어가면 될듯.

 

 

 

──────────────

 

 

끝이구요. 원래 <종합감>, <분리감>하고

<느낌>, <느낌 산물>, <산물> 구분 얘네만 중요하고

느낌 강도나 이런건 중요하게 안다뤘는데 어찌저찌 쓰다보니까

딴길로새면서 비중을 크게 가져가버렷네요 분량이 이상해져버렷습니다

 

논증에 치명적인 데가 있다거나 아무도 안읽어주셔서

글이 망해버리면 그래도 쓰던글 아까우니까 3편까지는 쓰고 갈게요...

 

다음 글부터 자각성이니, 무자각성이니 왜 중요한가?

살이 점차 붙으니까

읽으시는 분들 좀만 인내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희망적인 말로는 이 글이

밑바탕인만큼 이 글 전체가 그냥 전부 떡밥인거라는점만... 꼭 회수다할게요

 

별로 안읽어주실거같고 얼마나 읽어주실지는 전혀모르겠지만

읽어주신분들, 미천한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황붕어.png

 

* 질문받아욧 다음글은 1~1.5주안에 써올게요!

생선좋아!

 

 

 

 

 

 

 

 

 

 

 

42개의 댓글

2022.07.08

개드립철학자추

1
2022.07.08
@ckmin
0
Wae
2022.07.08

첨부 이미지 몇개 안보임

0
2022.07.08
@Wae

전부 png로 갈았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0
2022.07.09

개추개추개추

0
2022.07.09
@DeusExMachina

고마워오

0
2022.07.10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0
@불뿜는지렁이

정말 상관없고 말나눔이야 환영인데

메신저 아이디 올리면 친목벤으로

글이 통째로 날라가서요...

간단한 용건이시라면

답글로 알려주실수 있으실까요??

 

일단 읽어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려요!

0
2022.07.10
@제준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0
@불뿜는지렁이

방법을 아무리 찾으려해도 제가 활용하는게

메일밖에 없는지라

규정 피하기가 어렵네요...

실례가 안 되시면 덧글로

정리하셔서 남겨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니면 누구에게 보여주기 부득이하다

싶으시면 제가 읽은뒤에 바로 삭제하셔도

되실것 같으세요

어제부터 코로나걸려서 쉬다왓는데 잠은 지금

다 자고와서 혹시 알림 오는지

쭉 보고잇을게요 늦게봐서 죄송해용

0
2022.07.11
@제준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1
@불뿜는지렁이

나도 이거땜에 신경쓰여서 나머지를 대충 읽음

근거없이 뒤집어서 선결오류를 만들고 스스로 거기에 의문을 제시하는게 맞나싶음

인지되는 현실을 왼쪽에두고 오른쪽에 무자각을 뒀으니 원리가 같다는 이유로 좌우를 바꾸면 안되는건데..

 

물론 거기서 도출된 종합감, 분리감, 맥락감과 무자각은 흥미로움.. 마치 맥락감과 무자각을 설명위해 나머지를 끼워맞춘 느낌임 아니 찾아냈다는느낌?

 

첫편에서 개념들이 확립되니 명쾌해졌다 머 그런 썰이 있던데 아직 나오지않았지만 종교적인 뭔가 있었고 그걸 유물론적으로 풀어내려고 하는거같음

0
2022.07.11
@아멜리아왓슨

일단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이게 개인적으로 철학을 만들면서 생긴 과정이나 배경이,

좀 복잡해서 저런 식으로 글을 쓰게 되어버렸는데,

끼워 맞춘 느낌을 받는 게 오히려 정확히 읽으신 거에요.

<스케치>라는 명목 하에 빈틈을 열어두고 그냥 휘갈긴 논증이거든요.

 

이게 사정이 복잡해서 몇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다른 사항은 위에 올리신 분 답글과 연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후에 올라갈 답글 참고해주시면 되실 것 같으세요.

 

뒤에만 어떻게 답하고자 해보면,

<나는 이해할 수 있지만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으로 쌓아낸 철학>으로써

수년 동안 고착돼있었는데,

<나도 이해할 수 있고 남들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쌓아낸 철학>으로 전환되었다, 가

<무자각>의 개념이 확립됨으로써 가능해졌고,

이걸 명쾌해졌다고 표현한 거라고 이해해주시면 되실 것 같으세요.

다만 종교적인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논의 B-3-2 의 통찰이 제 철학의 전체를

업데이트한 계기라고 확인해주시면 되실 거에요. 거쳐가듯 덜 중요한 척 하긴 했지만...

 

다른 건 추상적인 걸 개념화 하려는 몸부림에서 생겨난 부작용들이라고

이해해주심 되세요.

 

변명은 안 하고 싶지만 몸이 맛이 가서 정신이 없어 가지고

글이 잘 안 써지는데 양해 바래요...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뭔가 글 수정하거나 보충해야 될 것 같긴 한데, 글쓰기에 집중이 안 돼서 일단

이렇게 써 두고 나중에 정신 차리면 개선할게요...

 

*

일단 요약하면,

물론 거기서 도출된 종합감, 분리감, 맥락감과 무자각은 흥미로움.. 마치 맥락감과 무자각을 설명위해 나머지를 끼워맞춘 느낌임 아니 찾아냈다는느낌? ← 정확함.

 

너무 익숙해져버린 몇 개념들을 쥔 채로

내가 만든 철학의 전체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의 전체를 설명할 일이 평상시에 없으므로)

그냥 한 번 시도해보듯이 <즉흥적으로>

의식의 흐름처럼 줄줄줄 적어낸 글이기 때문에

0
2022.07.11
@불뿜는지렁이

와, 너무 핵심만 가져오셔서

어떻게 답글을 달아야 할지부터

행복하게 고민 되네요

확실히 메신저 대화가 소통하고

다듬어나가기엔 훨씬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드는데,

당장 안 되니까

하루 들여서 천천히 답해보겠습니다.

 

어떤 말씀을 주시든,

건설적인 이야기는 환영이라서요

무례하다고 생각 절대 안 하니,

이런 질 높은 질문이라면 좀 무례하셔도

괜찮으십니다

 

한 시간 동안 쓰다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싹 지웠는데

글 쓰는 게 느린 편이라 조금만

양해 구할게요

 

오늘 내로 전부 답하겠습니다

0
2022.07.11
@불뿜는지렁이

1)

논의 A는 말 그대로 철학적 사유가 낯선 이들을 위한 계단의 마련이었습니다. 살면서 당연한 걸 넣어야 거부감 없이 읽으실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한참 뒤에 있던 걸 앞으로 빼왔습니다.

 

(1) 어떤 철학적 통찰이 보이지 않는다.

 

맞습니다. 당연하다 – 당연하다 – 당연하다 – 당연하다, 로써 당연함을 바탕으로 제가 말하고 싶던 대목을 끄집어내고 싶었습니다. 저 <당연하다>를 담당하는 논의들은 중요할 수도 있긴 하지만 크게는 중요치 않습니다. 징검다리에요. 더불어 나중에 그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다고 쪼개버려서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바도 있겠습니다. 예컨대 한 인간이 같은 환경에서 수년간 일상적으로 고문 받아도 무자각하겠는가? 와 같은 물음에서요.

 

(2) 저자는 아마 <비일상>이 <비현실>을 포함하는 더 큰 개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말해보려다가, 아닐 수도 있고, 막상 또 나중 가면 뒤바뀌기도 하니 강하게 주장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실 뭐가 더 우선이냐, 그런 논의는 통상 저의 철학에서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 말은 나중에 가서 또 나올 이야기이겠지만, 일상이니, 현실이니보다, 결국에 무자각과 자각이 핵심이게 됩니다.

 

(3) 저자는 A-1-1의 주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기에,

 

사실 논의 A-1-1의 그 <당연함>만 챙길 수 있다면, (1)에서 이야기한 말하고 싶던 곳까지 누구라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즉, 논의 A에 국한한 중요성을 이야기함입니다. 치과의사가 시술 중에 환자가 손들면 이제 다 끝났다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 다 끝난 게 아니듯이, 저도 이것만 알면 반을 아는 거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정말 반을 아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초보 독자를 위한 독려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던 곳, 가장 중요한 논의를 언급하자면, 논의 A-1-18의 <무자각적 무자각성-자각적 무자각성-무자각적 자각성-자각적 자각성>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맥락의 판단 실패 가능성이랑요. 애초에 논의를 뒤에서 빼와서 앞에다 세워 놓은 점에서, 다른 논의들은 당장은 <자각>, <무자각>, <맥락> 개념을 친숙히 하는 도구로 쓰일 뿐입니다. 편하게 쓰는 글이면서 초반부로서의 특성상 중요성이 과장됐다고 이해해주시면 되시겠습니다. 철거할 건설 현장의 비계의 역할입니다.

 

(4) '자각', '일상' 등의 용어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것처럼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고,

 

따라서 당장의 당연한 논의에서 새로운 개념은 아니겠지만, 이후에 전개되면서 개념이 확장됩니다. 그리고 철학 전체가 시사하는바 중요한 개념이기에 강조하고 싶었던 마음씨도 있고요.

<일상>은 끝까지 가야 개념의 중요성이 드러나겠지만, <자각>만큼은 중반부부터 다양하게 활용되기에, 당장 <주목>으로써 해석할 수는 있지만, <주목>의 해석으로 그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무 부연 없이 멀쩡한 용어를 그럴싸하게 계속 사용하는 건, 이후에 중요하며, 특히 자각은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이전에 친숙하게 먹이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5) 만약 필자가 이해한 바가 옳다면, A-2-18에서 저자가 아주 어렵다고 평하는 <무자각적 무자각성-자각적 무자각성-무자각적 자각성-자각적 자각성>은

 

아주 어려<울 수 있는> 개념이라고 말했으니 결이 좀 다르긴 한데, 어쨌든 어주 어려운 개념이 맞긴 합니다.

이는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알고 있기 때문에 아주 어렵다고 평함인데, 의식에 수준이 있다는 의의를 넘어, 나중에 각 항마다의 직접적인 느낌 판단을 독자에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만의 이해가 아니라요. 가령 어떤 생각이 들 때, 나는 저 네 가지 중 어떤 수준으로 무자각하거나 자각하는가? 판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음 편에서 유사하게 드러날 건데, 또 당장에 네 가지 구획이 있어 보이겠으나, 정석이라면 최대 아홉 가지의 수준을 <느낌>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필요에 따라 <갈등의 확장> 파트에서 무수하게 늘어날 수도 있고요. 또, 모형화하고 유연성을 부여해서 (여러가지 방법론으로) 다분야의 해석에 활용하는데 이해를 구한다면 독자는 느낌으로 재현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문맥상 아주 어려울 수 있는 개념이라고 말함은, 이전 논의에 비해서 난이도가 조금 올랐다고 생각함에, 초보 독자들을 위한 우려의 언급이겠습니다. 또, 혼자 생각해낼 때, 머리로의 이해가 아닌 느낌만으로 검토해가면서 짜놓은 것이어서 당시에 어렵게 만들었던 회상이 섞여서 그리 표현된 게 아닐까 싶네요.

 

(6) 이는 달리 말하자면 의식이 ‘고차 상태(high-order state)’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 글인 황금 금붕어(1)에서, 그림상 <3>이 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 드렸는데, 이게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입니다. 논의 A-1-1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3>을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설명하니, 중요하긴 했네요. 새로운 관점 획득 및 다분야 해석 활용 등에 기여합니다. 스포일러를 원치는 않았지만, 활용성이 없다고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네요. 변형하면 다양한 통찰이 가능합니다.

 

(7) 저자는 우리의 (가능한) 경험을 크게 둘로 나누고 있다. 익숙해진 사건들 그리고 새롭게 느껴지는 사건들이다. 그리고 새롭게 느껴질 수 있는 사건들에는 현실적이지만 내게 반복되지 않은 것과 정말로 비현실적인 것이 있다.

 

여담으로 두 가지로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단일한 <맥락>에 따라 최소 네 가지 구획을 가지며, 편리한 논의를 위할 때 둘이라는 관점을 취할 뿐이겠습니다. 크게 둘로 나눈 건 맞지만, 저나 남이 이해하기 편하도록 할 때만 극단의 두 가지로 쪼갤 뿐이고, 철학적 입장은 맥락으로써 단일하되 구획할 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메인이겠습니다.

0
2022.07.11
@제준

그 현실성이 무자각성에 대응하는 연원이 궁금함

 

윗게이가 " <무자각>이 <일상>에 '대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불분명해 보인다. "는게 같은 뜻이라 생각됨

 

인지와 추론등을 통해 경험가능한 현실은 이해되도 거기에 대응하는 4단계의 무자각이 왜? 존재해야되는지 모르겠음

 

일상적으로 수년간 고문받던말전 아픔과 현실뿐이라면? 아니면 의식과 무의식과 선택적 집중에 의한 자각밖에 없다면?

아니라 하더라도 윗게이말대로 인지과학적탐구일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혼재영역을 지정한다는것은 이후 전개될 무언가에 끼워맞추기위한 발판이라고 밖에 생각안되니 의심스러울수밖에.. 그래서 내가 종교적인 뭔가 있는지 짚어본거고

 

맥락감과 느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혼재구역이 필요하고 혼재구역을 만들기위해 현실과 자각을 비례배치시킨거 아닌가? 주장이 역순이 된거같은데

0
2022.07.11
@아멜리아왓슨

이게 원래 어떻게 전개되냐면, 일단 첫 번쨰 글이 순서에 원래 없었으니 버리고 생각했을 때,

원래의 전개와 다음 글들에 대한 스포를 할게. * 일단 아주 독실한 무교

 

1. (현재 글)

<느낌>, <느낌 산물>, <산물>에 대한 소개.

 

2. (다음 글)

<느낌(맥락감)>, <느낌 산물>, <산물> 어떤 테마로 쪼갠 다음에 얘네를 줄 세우면,

네 가지가 나와. 이 네 가지로의 인지적/인식적 의의를 살피고 나면 미진한 데가 남는데,

 

3. (다다음 글)

이걸 해결하면서 무자각/자각을 극단으로 둔 네 가지 수준의 단일한 맥락으로 새롭게 치환

가능케 되고

(이게 뒤에 있던 걸 앞으로 끌어온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

논의 전체를 종합해서 모형화할 수 있게 돼. 이 과정에서 세 가지의 혼재 구역이 주요함.

(그림상 <3>의 끼워맞추기를 위해서 <1>에서 부자연스럽게 등장시키긴 했음)

 

4. (다다다음 글)

그리고 그림상 <A>,

이 모형화를 바탕으로 응용의 한 갈래로 형이상학적인 적용을 하는데,

형이상학이라면 더이상 주관적 맥락이 아닌 객관적 맥락이 되어야 하니까

다시 관점을 넓은 세계로 가져옴으로써 무자각이 단순히 개인의 상황이 아니라

공적인 현실에 대응될 수 있어야 하는거야. 그래서 일상이나 현실 구분해놓고

구분 자체야 당장 쓸 데가 없다고 말하지만

나중 가면 일상 아닌 현실로만 뽑아서 고려해야 되는 거. 그래서 미리 무자각이 현실에도 대응된다고

언급했던 거야.

 

근데 3, 4 에서 뽑아가지고 2, 3, 4의 문맥 없이 사람들 이해시킨다고

1에다 부자연스럽게 모아놔서 이상하게 된 거.

1
2022.07.11
@제준
0
2022.07.11
@아멜리아왓슨

ㅠ...... 글갈아엎어야되나...

0
2022.07.11
@불뿜는지렁이

2)

줄줄 적다가 코로나 탓에 여간 쓰거나 읽거나 어느 것 하나에 집중이 안 되어서

가볍게 적겠으니 양해 바랍니다

다만 이건 알아주시면 사고 정리에 편리하실 텐데, 제가 이번 글을 쓰다가 느낀 점은,

저번에 썼던 논의 A 중 <무자각성>,<자각성>,<맥락> 개념만 먹으시고

나머지는 날려버려도 된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면 그림상 <3>에서 <무자각적 무자각성-어쩌구...>만 조촐하게 끌어온 뒤

즉흥적으로 짜맞춘 거라 논증 검토 제대로 안 했습니다.

 

애초에 <2><3><A><B><C>의 순서이고, <1>은 즉흥적으로 사람들의 이해를 위하여

스스로도 부담 없이 적은 글이면서 사족과 같은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밑바탕의 역할이라 멋있는 재료를 가져와서 기둥을 놓는 등

어떤 통찰을 보인다기 보다는 이후의 논의들을 위하여

재미없게 바닥을 갈아놓는 작업인데, 그래서 아예 이해에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파격적이지만 기억을 지워버리시고 이번 글부터 주목하셔도 괜찮으십니다.

이번 글도 사족이 있긴 한데, <맥락감>, <느낌>, <느낌 산물>, <산물> 네 가지와

<철회>까지만 기억하시면 이후의 논의 이해에 전혀 문제 없으시겠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제가 적은 글일 텐데,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 적었겠지요?

사실 저도 까먹었습니다. 다 하고 나면 중요한 것 아닌 이상 기억에서 버리는 스타일이라서요.

그래서 기억을 뒤지면서 무슨 생각으로 썼겠는지 탐색해보겠습니다.

 

(1)

A-2-1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물음을 던진다. 내 앞에 의자가 있다. 나는 내 앞에 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으며 내 앞에 의자가 있다는 사실은 현실적이다. 그런데 ‘자각하지 않음’과 ‘현실적임’ 중 어떤 것이 먼저인가?

그러나 저자는 ‘일상적임’과 달리 ‘현실적임’을 설명하지 않았다. 저자는 ‘등에 다리 세 개가 나 있고 등쪽으로 거꾸로 서서 걷는 코끼리’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분명 이 이상한 코끼리는 가능possible하다. 형이상학적 불가능성이나 논리적 불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 논의 A-1-4에 따라 <일상성>이나 <현실성>이나 구분이 크게 중요치 않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실 아무거나 잡고 이해하셔도 상관 없으세요.

사실 구구절절 쓰자면 그 <비현실>의 지시란, <현실에 절대 있을 수 없음>의 <불가능>을 지시함이 아닌,

<불가능할 수 있음>의 <비현실성>의 지시이겠습니다.

또, 다시 이야기하여 <약한 현실성>의 지시이겠습니다.

제가 논의 B-3-5에서 무자각성이니 무자각으로 편리하게 이야기하겠다. 했는데

유사한 문맥에서 적어낸 것으로 추론됩니다.

 

구분이 중요치 않은데 굳이 왜 일상과 현실을 구분하냐? 물으실 수 있는데,

나중에 일상을 이야기함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때 활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 설명해놓았으니, 바로 형이상학적인 얘기 들어가겠다.

이런 전개로요.

그래서 은연중 떡밥처럼 흘려놓은 것이고,

당장의 논의 A에서는 구분이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

따라서 필자는 A-2-1의 물음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자각하지 않음’과 ‘일상적임’ 중 어떤 것이 먼저인가?

그러나 앞서 보았듯 ‘일상적임’을 ‘자각하지 않음’을 통해 이해한다면, 이는 이상한 질문일 수 있다. 마치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인데, 총각이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남성인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은 남성이기 때문에 총각인가 묻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 솔직하게 잘 와닿지 않은 비유인데, 왜냐면 분리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글에서, 이렇게 적었거든요.

<현실이고 비현실이기 때문에 내가 무자각하고 자각하는 걸까?>

현실과 비현실을 똑같은 선상에 두고,

무자각과 자각을 똑같은 선상에 둔 채로, 순서에 의구심을 가진듯이 적었습니다.

따로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현실이니 일상이니 중요치 않으니 바꿔보겠습니다.

 

<일상이고 비일상이기 때문에 내가 무자각하고 자각하는 걸까?>

 

여기에서의 일상과 비일상은 현실하고 큰 차이가 없으니

외부의 세계, 외부의 것을 상정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가령 일상이란 논의 B-1-11의 개인의 좁은 세계와 같겠네요.

현실이란 논의 B-1의 좁은 세계에 상반되는 넓은 바탕의 가정된 개념이라고 둘 수 있겠고요.

 

대략 바꾸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외부세계이기 때문에 내가 무자각하고 자각하는 걸까?>

<내가 무자각하고 자각하기 때문에 외부세계가 있는 걸까?>

 

따라서 문맥상 이어서 나오는 <의자가 먼저냐? 생각이 먼저냐?>는

무자각이나, 자각이나 <의식>의 일종으로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점이고,

결국에 철학에서 자주 나오는 그런 문제가 됩니다.

 

이해하기 쉬우시게 으그러뜨리면

① 세계가 먼저 있어서 내가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거냐?

② 아니면 내가 생각으로 (가령) 시뮬레이팅 (따위 등이 이루어져서) 해서 세계가 있는 거냐?

 

(무자각과 자각을 분리하지 않고 약한 의식, 강한 의식으로써 묶어놨다

당장의 질문 만들기를 위하여)

.

.

.

근데 이후의 논의에서, 무자각에서는 저런 생각 자체가 없다고 이야기하죠.

저런 구분의 생각 자체가 없을수록 무자각에 가까울 테니까요.

 

그래서 무자각에서는 저런 구분 자체가 없다. 무자각하기 때문에.

자각하면서 구분이 생기는 거다.

이런 이야기였고.

그래서 무자각에서는 구분의 질문 자체를 벌일 수가 없으므로,

분리하셔서는 안 되셨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의 질문 만들기를 위하여 하나의 의식으로써 묶어놓았지만,

더욱 무자각하다보면 무의식적이게 되기에, 무자각만 가지고 순서를 따짐은 실상 불가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

 

(3)

따라서 A-2-1의 물음이 적절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유망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일상적임’은 우리의 심적 상태와 무관하게 외부 사실들 만으로 결정된다. 가령 어떤 사건이 계속해서 유사함을 가지고 반복된다면, 그 사건은 객관적으로 ‘일상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적’이기 때문에 ‘자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는 정 반대의 해석을 주장한다.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심적 상태, ‘자각’과 ‘무자각’이 사건들의 상태인 ‘비일상임’ ‘일상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각’이 무엇인지 불분명하게 만든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왜 사건들을 ‘자각’하는가? 우리가 어떤 사건에 의식을 주목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필자가 보기에, 우리가 어떤 사건에 의식을 주목하는 것은 이전에 일어난 사건들과 비교하였을 때 그 사건이 실제로 새롭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훨씬 설득력 있다.

 

→ 이것에 동의합니다. 그 사건이 실제로 새롭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훨씬 설득력 있다고 동의합니다.

착오가 생기신 부분은 이 부분 같으신데, 논의 전개하며 은연중에 이렇게 두었습니다.

은근슬쩍 무자각과 자각을 양분해놓음을 보실 수 있으십니다.

전체집합과 / 내부의 집합, 칠판/낙서, 즉, 맥락적인 무자각성과 자각성을 상정함이 아닌,

<의식이라고 볼 수 없는 완전한 무자각>/<약한 자각이라고 볼 수 있는 무자각성을 포함한 자각>

그리고 왼쪽의 아무 생각 없음을 가정하면, 비일상성, 일상성조차도 없다, 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비일상성, 일상성인지 따져보려면 미량의 자각이라도(약한 자각으로의 무자각성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중에 철회하죠.

모든 걸 난해케 만드는 좌측을 <무>로 두고, 우측을 <자각된 무자각>이 함유된

<무자각성-자각성>으로 두겠다고.

논의 A-2-16의 구분처럼

무-/<아주 약한 자각-약한 자각-강한 자각-아주 강한 자각>=<무자각성-자각성>

이렇게 논의 내내 잘려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무자각적 무자각성-자각적 무자각성-/-무자각적 자각성-자각적 자각성>이렇게 잘린 게 아니고요.

 

그래서 결국에 정반대의 해석을 주장함이 아닙니다.

저도 말씀하시는 주장에 동의해요.

심적 상태가 외부 세계를 결정하는 건 <무>, 맥락의 바깥을 꿋꿋하게 고려했을 때,

그렇게 된다는 거고, 논의는 <무>를 버리고

<자각된 무자각>, <무자각성-자각성>에 따라 논의 전개하겠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딱히 답을 내린 게 없습니다.

 

정리하면 최소한 생각할 수 있어야 일상인지, 비일상인지 구분할 수 있을 텐데,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선 구분할 수 없으니,

생각은 해야 하나의 상황을 두고 일상인지, 비일상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근데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선 그것이 일상일 수도 있고, 비일상일 수도 있으므로,

또, 둘 다 아닐 수 있고, 뜬금없이 구분에서 벗어나 코끼리라고 떠올릴 수도 있으므로,

(아무 것이나 관계가 없으므로)

일단 이건 맥락 바깥으로 밀어놓고 맥락만 얘기하자. 이런 얘기였습니다.

(자각이라고 해서 전부 합리적인 듯이 두는 건 편견이므로)

 

1. <무자각성-자각성>이 먼저냐? <자연성-부자연성>이 먼저냐? 둘 다 가능해 보인다.

2. 근데 애초에 완벽한 무자각에선 그런 가능성의 출현조차 없었다.

따라서 사실 둘 다 무자각에서 가능성으로 잠재해있고 가능성이 파생하는 식이겠다.

 

해당 글 우측 마지막 요약본에 이렇게 적혀있는데,

분리하지 않고 맥락으로 묶어서 궁금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완벽한 무자각>이라는 말로써

이전 논의와 다르게 은근슬쩍 양분해놓은 것을 파악하실 수 있으시겠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4)

즉 ‘자각’의 필요 조건이 ‘비일상적임’이라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어떤 사건에 의식을 주목하는 것이 그 사건을 새롭게 만드는 충분 조건이라는 저자의 해석은 그 근거를 찾기 어렵다.

만약 우리가 ‘자각’하는 것이 어떤 사건을 ‘비일상적’으로 만든다는 저자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일상적임’ ‘비일상적임’이 사건들 자체가 갖는 속성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귀속시키는 2차 속성이라는 것이다.

만약 ‘일상적임’ ‘비일상적임’이 2차 속성일 뿐이라면, 저자는 세계에 대해 어떤 흥미로운 것을 밝혀내는 작업을 하고 있지 않다. 저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언제 ‘자각’이라는 심적 상태를 갖게 되는지에 대한 인지과학적 탐구일 뿐이다.

(또한, 저자는 A-4-2에서 ‘무자각’이었던 것을 ‘자각’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하이데거의 탈은폐 개념과 너무 유사하다. 만약 영향을 받았다면 명시해주기 바란다.)

 

논의 A-2에서의 자각의 <일상성-비일상성>으로의 필요 조건은 없습니다. 무를 대척점으로 두고

무자각성까지 자각으로 잡아놓았기 때문이죠.

완벽한 무자각과 대립하는 자각 간의 관계만을 이야기할 뿐,

기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자각성과 비일상성의 관계는 전제로써 그저 <가정된 상태>입니다.

튼튼한 전제가 전혀 아니에요.

그리고 <무>를 완전히 무자각하니 알 수 없다고 두었으므로,

그냥 알 수가 없습니다. 언제 <무>로부터 논의 A-2 에서의 <자각>이 드러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자르기도 어렵고요. 따라서 논의의 무자각을 <무>가 아닌,

자각하여 알 수 있을 <자각된 무자각>으로만 논한다가 논의 A-2의 가장 큰 핵심이 되겠네요.

 

세계에 대해 어떤 흥미로운 것을 밝혀내는 작업은 그림상 세계의 확장이라는

주제 아래, <A>에서 이루어지며, <자각된 무자각>으로 전제한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으로 나중에 밝혀냅니다.

인지적 탐구도 다음편부터 나오고, A-4-2에 하이데거의 탈은폐 개념 4학년 때 들은바있는데,

그 전에 이미 다 생각해뒀던 것이라 확실하게 말씀드리건대 메를로퐁티 외

타 철학에 직접적으로 영향 받은 바는 없습니다.

0
2022.07.11
@불뿜는지렁이

3)

 

필자가 이해하기에 A-1-5에서 저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어떤 물체가 t1 시점에 뜨겁고, t2 시점에 차갑다면, 두 물체가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한 물체가 두 상태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어떤 상태라도 아주 미세하게 다른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상태가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리고 저자는 아마 <자각>과 <무자각>이 인식 주체가 갖는 상태라고 보는 것 같기에) 저자는 A-1-7에서 인식 주체가 어떤 사건에 대해 <자각>과 <무자각> 사이를 오갈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사건을 무자각하다가 점점 자각하게 되고, 또 점점 무자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저자는 A-1-9에서 어떤 상태와 다른 상태를 구분하는 기준선은 찾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핵심적으로, 저자는 A-1-10에서 아마 다음을 주장한다. 만약 어떤 상태인지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지점이 있다면, 그 지점과 가까운 지점들은 역시나 어떤 상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따라서 모든 상태는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1)

(저자는 이를 '애매하다'고 하는데, 철학에서 애매함ambiguity은 모호함vagueness와 구분되는 technical term이다. 애매함은 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므로 지금의 논의에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필자는 저자의 표현 대신 '어떤 상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감사합니다! 꼭 앞으로 모호하다고 바꿔 적을게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

 

저자는 비록 명확한 논증은 제시하고 있지 않으나, 필자가 이해하기에는 다음과 유사한 논증을 제시하는 듯 하다. 만약 0도가 차갑고 100도가 뜨거울 때, 50도는 차가운지 뜨거운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50도를 가령 미지근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50도에 대해, 45도나 55도 역시도 미지근한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만약 45도나 55도가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이라면, 40도나 60도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모든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들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저자가 원하는 결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당연히도, 50도는 '뜨거움과 차가움에 대해'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그리고 45도와 55도는 '미지근함에 대해'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따라서 50도와 45, 55도는 구분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기준이 되는 상태'가 다르다. 따라서 저자의 논증은 타당하지 않다.

 

 

 

이게 뒤에 나올 철학을 생각하면서 짠 건데, 위의 논증은 그거에요.

극단과 극단을 가르는 구분선이 있다. 그리고 이 구분선에 이름 붙이더라도

맥락적으로는 결국에 모호하다.

 

근데 온도계로 비유해서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두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①<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 등은 비가시적이다.

② 극단과 극단을 가르는 구분선을 다시 극단의 일종으로 삼을 수 있다.

 

다른 비가시적 맥락에서는 <구분선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50도라고 딱 보이는데, 아무튼 없어요.

온도계라고 했기 때문에 50도라고 중앙값을 둘 수 있는데, 일단 완벽한 중앙값이 없다고 둡시다.

그러면 이 중앙값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될지 모른다는 논증이었습니다.

모든 상태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뒷받침 위한 논증은 아니었어요.

 

이게 논의 A-1-14의

현실성인지 비현실성인지조차 결정할 수 없는 모호함… ① 의 논증이었습니다.

 

그리고 논의 A-1-10, 밑에 군고구마 나오는데,

차가움과 미지근함, 미지근함과 뜨거움, 하나의 맥락에서

맥락을 두 가지로 쪼갰을 때, 하나였을 때의 모호함이 똑같이 적용 되어서

 

무조건적 현실성을 확신할 수 없는 현실성 안에서의 모호함 … ②

무조건적 비현실성을 확신할 수 없는 비현실성 안에서의 모호함… ③

 

두 가지가 또 도출된다는 이야기였고,

따라서 이 세 구간에서는 적어도 판단 실패 가능성을 절대 부정할 수 없다가

핵심이었습니다.

 

 

왜냐면 판단 모호하니까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3)

 

아마 저자는 A-1-12 ~ 14에서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린 듯 하다. 한쪽 극단을 <현실성>, 다른 한 쪽 극단을 <비현실성>이라고 하자. 그리고 양 극단 각각으로부터 어딘가 까지는 <무조건적 현실성>, <무조건적 비현실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 대해 우리는 판단을 실수할 수 있다.

 

 

아닙니다. 맨 끝만 무조건적 현실성이고 무조건적 비현실성입니다. 그리고 얘네가 <극단>이에요.

이건 어딘가까지라고 부를 게 아니고 이론적으로 정해져있어요.

<극단>은 이론적으로 맨 끝으로부터의 범위가 아닌, 맨 끝입니다.

길다란 사각형의 나무 도막에서 양끝에 빨간 물감을 바르면, 거기가 <극단>이고

무조건적 현실성이고 무조건적 비현실성이겠습니다.

(딱 온도계상 0도(0.0000001도 아닌)와 100도(99.9999999999998도 아닌))

 

만약에 모호함을 가진다면, 무조건적 현실성,

무조건적 비현실성이라고 절대 확신해서 말 못하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모호한 위치가 어디냐?

정말 이를 악 물고 스포일러 하고 싶은데요. 굉장히 중요한 언급이라 참겠습니다.

그림상 <C>에서 나중 논의에서 나와요. 정말 궁금하시면 속상해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4)

 

그러나 이를 온도 예시에 적용해 보자. 0도는 차갑다. 100도는 뜨겁다. 50도는 미지근하다. 50도에서 우리는 차가운지 뜨거운지 판단을 실수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45도에서 미지근한지 차가운지 판단을 실수할 수 있고 55도에서 미지근한지 뜨거운지 판단을 실수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차갑다’ ‘뜨겁다’ ‘미지근하다’가 모호한(vague)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각한다> <일상적이다> 역시도 모호한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로부터 철학적으로 어떤 흥미로운 것을 이끌어내는지 필자는 전혀 알기 어렵다.

 

말씀드렸듯이 밑바탕 까는 작업이라 무언가 이끌어내지는 않았습니다.

이곳 또한 <당연하다> 류의 논의입니다.

그냥 판단 실패할 수 있으니 자각합시다. 가 끝이었구요.

굳이 말씀드리자면 나중에

<혼재 구역>의 판단 모호성은 사람들의 맹신을 방지하는 안전 장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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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1
@불뿜는지렁이

4) A-1-11에서 저자는 ‘본질’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또한 A-2-10에서 저자는 ‘가능’ ‘필연’ ‘현실’ ‘최고의 본질’ 등을 언급한다. 필자는 절의 세부 내용에 대해 비판하기 보다, 개념적 혼란이 가중되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예를 들어, 철학적으로 본질essence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A-1-11에서 저자는 매우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본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예컨대, 저자는 ‘본질에서 비본질이 나오는 건 용법과 직관상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사례에 따르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계가 아이스크림보다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저자는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계는 아이스크림보다 인과적으로 앞선다’ 혹은 ‘시간적으로 앞선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인과적 앞섬 혹은 시간적 앞섬이 ‘더 본질적이다’고 말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용어 사용이다. 보통, 본질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립된 기존의 논의에 따르면, 본질적 속성은 어떤 대상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속성을 가리킨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본질은 어떤 대상을 그것이게끔 하는 것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과적 / 시간적 앞섬은 본질적 속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만약 저자가 완전히 새로운 의미에서 ‘본질’을 도입하였다고 한다면, 저자는 그것을 반드시 명시해야만 한다.

 

교수님께서 말씀 해주셨던 피드백하고 같습니다.

부담 없이 쓰는 글이라 혼동이 있는 채로 편하게 쓰니, 또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문득 대안이 떠올랐는데 <근본>이라는 말로 바꿔 써도 괜찮을까요?

 

 

*

나중에 자연스레 도출되는데, 뒤에서 문맥과 함께 있던 걸 앞으로 빼오니

배움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개념적 혼란의 큰 원인이 되지 않았겠는가,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5) 이후 저자의 논의는 앞서 필자가 언급한 문제적인 논의들을 바탕으로 진행되기에 이해하기 쉽지 않으며 그 철학적 의미 역시 알기 어렵다.

 

 

뒤에 있을 철학들을 고려하면서 적었기 때문에 전부 떡밥들입니다.

너무 떡밥만 던지면 읽는 분들이 지치실까 어떻게든 통찰의 일종을 적어내긴 했는데,

ex) A-1-22, A-2-13,14,15, B-3-22,23,24

 

자세하고 엄밀하게

설명하면 할수록 되려 난이도가 올라가서, 지금의 설명들도 이해에 도움 될 수 있으셨겠는지 잘 모르겠네요...

다음 글에서 블로그 판 다음에 글 마지막에 짤막하게 주소 남길게요...

읽으시다 보면 왜 이렇게 표현했는가 싶은 부분들이 점점 풀리도록 만들고 싶은데,

설명 능력이 좋지 않아서 잘 될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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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1
@불뿜는지렁이

(1)

무례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다음의 세 가지를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철학에서 기존에 사용되는 개념들에 대한 기본기를 쌓을 필요가 보입니다.

 

단순한 이유로 재밌게 퍼즐 푸는 느낌이라, 혼자 해왔었는데, 맞는 말씀이십니다.

근데 이미 졸업해버려서 늦은 것 같아요...

 

(2)

둘째, A와 B의 관계는 마치 C와 D의 관계와 같다. 이를 반복 적용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본인의 사색 그리고 그 함축들에 대한 감정적 고양은 이해하지만, 주장을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정리하는 것이 먼저로 보입니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첫 시도였는데, 쓰다가 뭔가 잘못된 걸 깨달았습니다.

그냥 원래 혼자 해왔던대로 <2>부터 시작으로 잡는 게 좋아보이네요.

다음부터는 절대 같은 실수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3)

저는 비록 제준님께서 탐구하시는 분야를 전공하지 않으나, 철학적으로 좋은 글에는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준님의 아이디어는 분명 큰 아이디어라는 점에서 몹시 흥미롭다고 생각하기에, 제가 함께 이야기 나누며 도움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기를 바라며 댓글 남깁니다.

 

사실 도움이랄게 읽어만 주셔도 도움이라서요... 저 진짜 몸은 힘든데

보이지는 않으시겠지만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파했습니다... 하루종일 웃고있어요

저는 진짜 저만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최소 누군가를 이해시키지 못하더라도 공적인 공간에 제가 생각한 모든 것을 풀어놓고 떠나고 싶은 바도 있구요

하여간 공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실례가 안되시면

철학적으로 좋은 글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요소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불편하시면 굳이 말씀 안해주셔도 되시구요...

 

아무튼 진짜 감사드려요... 첫 단추 잘못 꿴 게 후회 있긴 한데

그래도 원동력 삼아서 다 적고 갈게요

진짜 덧글 남겨주시기 전까지 제가 잘 못써가지고 별로 안 읽어주시는 것 같아서

엄청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진짜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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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2
@불뿜는지렁이

변호 하지 않겠습니다. 글이 잘못된 게 맞고 지금의 글을 가지고

늘어지기엔 전혀 생산적인 일이 아닐 테니까요. 모두 수용하겠습니다.

대신에 사견 몇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어떤 악의 하나 없이

단순히 궁금한 점 몇 가지 질문드려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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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제준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2
@불뿜는지렁이

첫 번째로 다른 질문 쓰다가 제일 궁금해서 다 지우고 적는건데

어떤 점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으셨던 건지요?? 단순히 호기심이셨나요?

왜냐면 제 입장에서 처음 뵀을 때 최근 가입에다 레벨 1이시길래

이 글 하나 때문에 개드립 가입을 하셨나 싶기도 하고...

 

처음 글 봤을 때 어떤 인상을 받으셨길래

소통을 원하셨던건지... 궁금하네요...

다른 이유가 있으셨나요? 물론 저는 지금도 정말 과분한 관심에

엄청 질 좋은 피드백까지 해주셔서 행복하게 느끼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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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2
@불뿜는지렁이

질문을 드렸던게 좋은 구성이라서 고집하고 미련을 가지는건 아니었고,

약간 찜찜한 관점 차이가 있는 것 같아서

글과의 별개로 해결하고 넘어가는 게 좋아보여서 적어보고자 했습니다

 

이 글로 시작해서 이어붙여보겠습니다.

 

셋째, 저자가 제기하고싶은 통찰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며, 글의 나중에 가서도 발견되지 않고, 그 이유 중 하나는 애초에 핵심 개념들을 불명료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가 오해인가 싶은게, "글의 나중에 가서도 발견되지 않고"란 말이,

제가 말씀 드린 글의 나중은 적은 글에서의 글의 나중을 이야기함이 아닌,

앞으로 쓸 철학 전반의 나중, 즉, 지금 두 편을 적어냈는데

만약 전부 열 다섯 편 분량이 있다고 치면 4편, 5편쯤부터, 혹은 13편, 14편부터. 이런 언급이었습니다.

 

또, 관점 차이가 하나 더 있는게,

저는 통찰이라는 단어를 조금이라도 의미 있다면, 유의미하다는 말로써

결론의 역할로 사용했는데,

새롭지 않고, 독창적이지 않고, 예리하지 않기에 <통찰>이 아니다.

<철학의 핵심>으로써 바라보시며 통찰에 다른 접근을 벌이고 계신 게 아닌가.

그럼으로써 말했듯이 그런 류의 통찰이란 극초반부부터 등장을 요구하시기엔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구요. 논의를 그냥 논하는 말로써 이해하면 될 문제인데, 논의도 <여기에 대체 어떤 논의가 있냐>고

높은 기대치로 되물으시는 건, 이것 또한 가혹하지 않나 싶구요.

(그게 어떤 점에서 유의미를 가지냐, 물으실 수 있는데,

유의미함에 너무 높은 허들을 적용하고 계신 게 아닌지. 어린이가 떠올린 <밥을 잘 먹어야 한다>조차

개인적인 통찰의 일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통찰은 애매함/모호함 같이 그렇게는 쓸 수 없다.

대화로의 융통성을 적용하지 않은 채 말씀을 주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글>의 명료성은 동의합니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 단어의 명료성 챙기는 것 역시 동의합니다.

명료하지 못하였고 다른 분이 말하였듯이 <선결 오류>로 글을 시작한 점은

크게 잘못 되었음을 저번 글 쓰면서부터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학적이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나 다름 없는)

사적인 철학으로써 좋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일상적인 해석 융통성에 기대는, 틀렸는지만 확인하고 싶은, 재미로 사견 붙이고 아님말고 식의)

제가 글을 개선하겠다 말함은, 학적이지 않은 철학으로써도 좋지 못한 글쓰기이기 때문에

새로 글을 쓰고 싶은 점입니다.

물론 좋은 글쓰기에 절대적으로 학적인 엄밀성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건 당연합니다.

철학적 글쓰기로써, 기본만 지켜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겠죠.

 

문제는 학적이지 않은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단어에 대한 명료성>에서 빚어진 글의 이해 부족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논증 역시 부실하다고 판단을 이어나갈 수 있으셨는지, 의문이 있습니다.

(군더더기가 없다고 말함이 아닙니다. 나중의 글을 위한 욕심으로써의 군더더기투성이며,

이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아는 바이고, 고칠 것이며,

다만 논증의 공격이 정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단순히 독해력의 부족을 꼬집기 위해 드리는 말씀이 절대 아니며,

물음입니다.

 

학적인 글쓰기가 아니라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현실/자각/일상으로써

개념의 설명 없이 일단 진행했는데,

대화에서 무리 없이 쓰일 현실/자각/일상을 <분석>을 하고 계시길래

저는 되려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의 물음 없이도 이해했습니다.

또 학적이지 않은 글로써 그렇게 읽히도록 의도하였습니다.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은 글쓰기로써, 좋은 논의로써는 중요하죠.

하지만 그냥 사적인 글쓰기, 사적인 논의로써는 <분석> 자체가 필요없는 글입니다.

너무 어렵게 접근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무자각을 <체험>해야 한다 계속해서 언급하였는데,

<일상은 어떤 것> 등으로써 계속하여 분석하고 계시더라고요.

제가 써 놓은 글에만 갇히셔서요.

(물론 글인데 써 놓은 글을 읽고 판단하는 게 뭐가 이상하냐?

말씀하실 수 있는데, 무자각과 자각을 경험하시면서 읽으시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논의 A-2는 완전히 무자각함을 가정함으로써 타당성-개연성으로의 관점을 버리셔야 읽힙니다.)

 

계속 현재의 논의에서 이 개념들이 어떤 쓸모가 있는가? 에만 갇혀있으십니다.

그리고 저는 계속해서 현재의 논의에서 이 개념들은 이 현재의 글들이 아닌 나중의 논의에서

쓸모가 있다,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근데도 (명료성과 별개의 문제로) 계속 현재의 논의에서 왜 이렇게 어렵게 설명하지?

현재의 논의에서 왜 그럴싸한 개념들을 사용하지?

왜 굳이 이렇게 주장하지? 현재의 논의, 현재의 글에만 주목하고 집중하십니다.

(아마도 좋은 글쓰기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셔서 그러신 것 같은데,

이미 망한 글이자 저런 군더더기의 글쓰기가 좋지 못한 글쓰기라고

저 또한 생각하기 때문에 폐기할 글에 의문을 거두셔도 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생깁니다.

아무튼 현재의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 뒤의 것을 보여달라.

그렇다면 뒤의 것을 보여드리면 깔끔하죠. 당연합니다.

 

근데 첫 번째로

당연해보이는 개념에 변화가 있고, 중요성을 바르려면

맥락이 필요합니다. 질문하심이 이러합니다.

제가 정말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맥락의 고려 없이 철학의 통찰을

<분명하게 정의하여 제시하기>를 계속해서 요구하시는데요,

덧글의 한정된 공간에서 짧은 분량으로써.

납득이 가능하게 해내는 일, 어려운 일 아닌가요? 너무나도 쉬운 것처럼 요구하시는데,

솔직히 이게 쉬울 수 있는 일인가? 굉장히 헷갈립니다.

느끼기로는 정말 어렵게 느껴지는 입장입니다.

 

5분뚝딱철학 유튜브도, 채널명 5분이라 해놓고 한명의 철학을 그나마 압축터라도

20분에 걸친 영상으로 설명함, 같은 데에서 기인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개념은 글로써 접하면 길처럼 보이지만

막상 파헤치고 머릿속에 넣으면 길이 아니라 개념들끼리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거미줄처럼 얽혀있어서

어떤 철학을 깊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함부로 뚝 떼어내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생각하는데 혹시나 틀릴 수도 있으니 견해가 다르시다면

다른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리가 안 되어있다 여기실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긴 합니다.

능력 부족으로 여기셔도 됩니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괜스레 어색함을 느끼면서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3>이 제일 중요해. 쟤만 알면 위로도 아래로도 전부 이해가 가능하거든.

 

이라고 첫 글에서 적어놓았으니, 위도 요약하고 아래도 요약한 다음, <3>이 어떤 것인지

친절하게 설명드리면 어떤 점에서 독창적인가? 확인 끝나는 문제겠죠.

 

근데 두 번째로

 

<2><3><A>,<B><C>로의 개념을 위하여 쌓아나가는 과정이 분명히 있다고 말씀을 계속 드리는데도,

문맥 없이 독창적 개념을 일단 제시하라는 요구 자체가 일단, 또한 가혹합니다.

철학을 소개하고자 하는 저는, 하물며 글을 굉장히 못 쓰는 사람이더라도,

어떤 글을 만들어서

재밌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지, 여태껏 생각한 과정에 관계없이

뚝뚝 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평가를 위하여 맹목적이게 달라고하시는 점은,

영화감독이 구상한 영화의 초반부가 이해할 수 없고 뻔하다며,

빨리 평가해줄테니 결론을 내놓으라고 말씀을 주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당연히 관객으로서 그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고,

영화감독이 앞에 있다면 영화감독의 영화를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프라이드를 부리는 게 꼴사나워 보이실 수 있지만, 저는 지금의 활동이 재미에 의하기 때문에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으로써 가장 중요합니다.)

 

의심스러우실 게 맞습니다. 하지만 당장의 의심 해소를 위해서

뒤의 독창적인 통찰을 봐야만 하신다는 건

철학을 소개하고 싶은 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한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의심 해소 안 시켜주는 게 오히려 입장 고려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신데,

왜 그래야 하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이건 글을 봐준 감사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중요하게 집중했으면 좋겠을 문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잘못되었던 현재의 글쓰기 방법 지적

(2) 좋은 글쓰기로써 다음 글에서 개념을 명료히 하는 게 좋다.

(3) 당장의 논증 토의 (온도계 등)

 

저는 여기서 생산적인 피드백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강합니다.

정말 논증을 납득하실 수 없겠는지 자신이 쓴 글을 설명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건전하고 진득한 토의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근데

 

(1) 아직 소개되지 않은 글

(2) 아직 소개되지 않은 정말 중요한 어떤 통찰

(3) 별다른 분석이 필요없는,

또 폐기하고자 마음먹은 글을 이해하기 위한 단어의 분석 요구

 

(3)은 파고들어서 그럴 수 있다쳐도,

밑의 (1), (2)는 잠재성을 보는 명목이라 하여도,

<과대포장, 잉여적>이라는 말로써 당장 함부로 재단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요.

안 보여드렸는데...

또, 돕는다는 관점으로도 (1), (2)를 판단하건대 굳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저보다 훨씬 똑똑하시고 글쓰기 스타일에서 내심 정말 존경하고는 있으나,

그래도 제 입장은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입으로 내 작품에 하는 스포일러의 개념으로써 꺼내놓기 죽어도 싫은)

 

정말 내공이 있으신 게 느껴져서

놓치고 싶지 않은 분이시긴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는 <커뮤니티>이고

징징거리는 거 안좋아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시간 짧게 짧게 쏟고 싶은데요... 그래도 너무나도 감사드리고,

너무나도 이상적이고, 너무나도 정갈하게 글쓰기를 잘하셔서 저도 끝까지 매달리고 있으므로

절대 오해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아까 썼다가 지운 답글처럼

ABABABAB 이렇게 대화하고 싶지,

A~~~~~~~~~~~~~ B~~~~~~~~~~~~~~~ 이거는 좀 심한 것 같아요

글 쓰는 게 능숙하셔서 쭉 적으실 수 있으시겠는데,

저는 능력이 없어서 몇 시간을 붙들고 있어야 적어져서요...

물론 권유드린거지 변경하기 힘드시면 감수하겠습니다

 

당연히 제가 이상한 주장이란걸 깨달으면 수용하고요.

만약에 명백하게 이상한 주장인데,

우기고 있는 거면 제가 똑똑하지 않아서 그런거니까 양해 바랄게요...

방어기제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아무튼 수용할 수 있는데 수용하여서,

 

저자의 주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개념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글의 구성을 수정할 것.

 

받아들여서 명심할게요.

정말 질문으로 어떤 책 참고하면 좋을까요? 여쭤보려했는데,

먼저 알아차리시고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꼭 읽어볼게요.

질문 몇가지 드리고 싶은 거 있는데, 오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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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3
@제준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3
@불뿜는지렁이

짤막짤막하게 짤라주시지...

 

일단 드리고싶은 핵심으로 드리고싶은 말씀하고

이후에 질문으로 보충해서

다른걸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아무튼

말씀드리면

 

첫번째는 철학이 꼭 중대해야 되나요?

이거는 여쭤보고 싶었고

 

두번째는 주장이 생각나길래

줄줄 썼는데 방어기제였어서

그대로 쓰면 어떻게 대답하실지 궁금해서

긴글 쓰다 지쳐가지고 그대로 뒀어요

수정하면서 또 쓸데없는 소리가 몇개있길래

다시 전부 삭제할라다가

시간 너무 많이 쏟는것같아서

감정적인거만 쳐버리고 주장같은거

그냥 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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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3
@불뿜는지렁이

세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게

오해가 있으신것 같은데 여기는 솔직히

부담없이 편하게 쓴다는 말을 몇번

드렸던거 같은데 그래서 이 글만큼은

중대한 작업이라고 전혀 생각 안했어요

이렇게 써도 되나? 사람들 반응 확인하려고

일반 커뮤니티에다가

그냥 줄줄줄줄 적은거죠

 

그리고 이게 오해신데

이제 아 이거 글 잘못 썼구나 하고

폐기할 생각을 가졌잖아요?

이제 본격적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먹어서

만약 도움을 받을수 있다면

다음글부터는 이제 말씀주셨듯이 추천해주신

글도 읽어보고 기존에 썼던 글 중에

이런 식으로 쓰면 명료한 개념 설명이 잘

되었냐고 할 수 있겠냐?

혹시 논증 이렇게 구성해도 되나요?

학적인 필요가 있다면 기꺼이 수용하고

여쭤보면서 천천히 하려고했는데

또 이번 글에 대한 의심 과 그래서 다음 내용이

뭐냐라고만 하시고 계시거든요

(물론 A-1-5 논증은 틀렸다고

말씀하시니 이건 해결하고 넘어가야하므로

다시 읽어보고 오겠습니다)

 

결국에 군더더기가 맞다 폐기하고 개선한다 로

끝날문제가 맞고

두번째로 다음내용이 뭐냐는

의심 가시고 답답하신거 이해는 하는데

제가정말 교수님들 피드백도 받았다고 말하고

분량도 극초반부, 다른분들 덧글스포에

그래도 뭔가를 주장하고있고

(다른분 덧글에서 썼듯이 <맥락감>,

<느낌 산물>, <산물> 얘네 셋만 먹으면

괜찮다 말씀드리고 넘어갔는데 <맥락감>만큼은

뭔가를 주장한다의 기준에 맞나요?>

그러니까 믿어달라 까지도 아니지만

뭔가 있을수있지 하고 그냥 넘기시면 안되는건지요

 

제가 쓰고있는게 논문도 아닌지라

초록을 요구하듯이 자꾸 뒤를 주고

철학적인 의의가 있는지 확인하겠다 그러시는데

진짜 그냥 제표현대로하면

개노잼이에요... 설마 제가 진짜로

이 두글 가지고 아 뒤에는 뭐가 더 없는데...

자꾸 추궁하니 큰일났네 하면서

안절부절하고 있진 않을거아니에요

 

결국에 답답하게 만들어드리는거맞고

답답함이 해결되어야

신뢰의 일종으로써 도움을 줄수있다

이러면 할말 없긴한데

철학하고 별개의 문제 아닌가요?

저는 기승전결의 철학적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철학이므로 전결을 뜯어와도 괜찮다는

아예 학문으로 보고계신것 같으셔서요

철학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아예 간과하고 계신게 아닌가요...

(계속 말씀드렸듯이 대단하단 소리 아니고

엄밀하단 소리 아니고

다만 작품으로 인식하는 감독 작가 같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여기는 관점 차이인데 이해가

필요한 영역이라면 이해해주시면 안되나요?

만약에 깔끔하게 끝내고 제가 너무

존경하고있고 그러니 도움 받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하면 그때부터는 오픈할수도

있는거고, 너무 학문으로써 접근하시는게

여기가 관점 차이가 있는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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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3
@제준

요약하면 대담하게 쓸 포부야 있는데

이번글은 오롯이 피드백용이었다

(저번 쓰다만글 복붙가능)

 

이번글이 그랬다는거고 다음글에서는

당연히 잘 써야하므로 수용할 마음이 있다

 

근데 철학이 꼭 작법조차 중대하고 대담해야하나?

다시 쓰더라도 무겁고 딱딱하게는

쓰고 싶지 않거든요

 

여쭤보려했는데

그렇게쓰면 학자들이나 읽지 다른 커뮤에도

철학글쓰면 아무도 안읽어주던데

그냥 사람들한테 소개하는 입장에서는

유연하게 글써도 되는거 아닌가요?

(지금의 글이 아닌 이상적인 글쓰기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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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3
@제준

기타 답변

1) 학자로서 불필요하게 갇혀계신거같은데

단순한 대화잖아요 4원소설 당연히 학적일 수 있죠

근데 융통성을 발휘해주시면 어떠신지

학적으로 그런 주장은 위험하지만

사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중 아닌지요

만약에 학자로의 프라이드로 그건 못넘어간다를

건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5) 스트로우 맨 어택 이런것도

편한 대화 하고싶은데 편하시고 맞는표현이라

쓰시는건 알겠지만

좀 내려놔주시고 착한 설명 해주실수있나요?

커뮤니티의 사람대 사람으로서?

불편감이 들면 어쩔수없는데 수준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 아니라서...

 

철학은 원래 설명이 길다가 아니라

명료하게 말하는 영상이더라도 길어질수밖에

없는데 피력은 개인적 영상 채널이 아닌 덧글의

한정된 공간에서 해야하므로 더욱 어렵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분량을 길게 쓰면 되지 않냐? 하시는데

이건 결국에 다음글에 관계돼있고

도움을 주고받기로 확정난 관계도아닌데

굳이 그런 노력을 불편한 덧글에서

왜 쏟아야하는지의 의문

물론 쏟고계셔서 감사드리긴한데...

자기가 쏟고있는데 넌 왜 안해주냐는

또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무자각을 체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냥 무자각하세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으심 되요

(말씀이 바르다는 전제하에)

스님 예시 들었는데 설마 스님도

누가 그렇게 물어보셨을때

언어분석 하시겠습니까 또 손가락 드시겠죠

그냥 진짜

말그대로 의식을 버려보시면서 읽어보세요

(이 과정에서 분석은 없지만

이 상황을 접한 누구라도 이것이

철학적이지 않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쉬운 얘기라 할필요가없어서 말씀을

안드리는거였어요

생각에 갇히면 이해할수없고 말했듯이

표현을 하면 오히려 잘못된거라고 논의중

언급했는데 이게 궤변이아니고

말하려하면 오히려 말할수없는 문제라

독자가 관점을 바르게 잡아야되는데...

이래서 논의 A-2가 난이도 더럽다고

적은거였습니다

0
2022.07.13
@제준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3
@불뿜는지렁이

오 이런 답을 기대했어요 감사합니다 답해볼게요

 

먼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취해야 할 존중이 없다고 말씀드린게 아니고,

존중은 정말 가득하시고 좋은 분인걸 빈말이 아니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짚는 문제가 뭐냐면

철학이라면 철학으로서 기대하시는 게 있으신 것처럼

저로서는 커뮤니티 대화라면 커뮤니티 대화로서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게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거에요

 

이런 의문이있는거에요

이렇게 말하는거 오히려 불편하지않나? 물론 본인은 불편을 못느끼시는 것 같지만요

왜냐면 술자리에서 편하게 안부묻고, 주변분들이랑 평소의 어투로 연락도 잘 하실 테고 문제는 지금

엄청 길게 대화하고 있고, 만약 길게 대화하려면 피로감 없이 전개돼야 하는데

악의 없이 말씀드리기를, 완전 교수님 메일처럼 계속 접근하시길래

학자시니 익숙하시면 본인의 덧글 작성에 있어서는 상관이 없겠으시지만,

저는 학자 신분이 아닌데도 쏟아주신 노력에 대한 예의상, 말투에 맞추게 되는게

굉장히 피로한 작업이라서요

(그 말투에 맞춘다, 이런것보다도 덧글이 가지는 긴 호흡이 고통스럽습니다)

 

<서강올빼미>https://forum.owlofsogang.com

라는 철학 커뮤니티였으면 학술적인 교류로써, 그리고 그곳의

커뮤니티 분위기로써 제가 당연히 수긍하겠지만

이런 그냥 편한 커뮤니티에서는 말투에서 좀 내려놔주실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신공격을 하고싶었던건 아니고 커뮤니티에서 흔히 보이는 분들처럼

그냥 편한 대화를 하고싶다. 이런얘기였습니다

근데 또, 저런 식의대화가 어떤 생산적인 이득을 이끌어낼수 있다면 제가 감수하겠다

이런 뉘앙스였고요.

(근데 진짜 딱 이정도 답글 길이 정말 편해서 이정도면 아무런 불편없이 괜찮아요

사실 무슨 커뮤니티의 터줏대감인것마냥

말투를 교정하고 싶었던게 아니고 대화처럼 좁게좁게 집중하고 싶었어서요)

 

둘째는 견해 차이 아닐까요? 자신이 동의할 수 없어도 남들이 그렇다고 한다면

철학적일 수 있다고 보여서요 철학을 넓게볼수있지 않나? 저 비유도 불교철학 시간에

들은거라서요 근데 이건 안중요하니까 넘길게요

결국에 핵심은 이해시키기 위한 글에서 제가 이해못시켰다는 책임이 있는거니까요

그리고 당장 이해못하셔서 설명을 못하는 지금도, 어떻게하면 설명드릴수있겠는가

궁리해봐야 할 문제고

 

중대한 함축...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창하게 느껴지는데요

제 철학이 가진 함축이 중대한 건 아닌거같은데...

중대하다고 쓰셔서 얼떨결에 대담하게 쓸 포부라고 저번 덧글에서 쓰긴썼는데

제가 바라는 기준은 쓰인것보다 많이 낮아서요 (글의 목표 : 그냥 인터넷에 다썼으면 좋겠다 등)

만약에 제 기준을 폐기하고 쓸, 다음 글에서 기준을 높인다면 중대할수도 있다...?

근데 어떤게 중대했던건지 알려주실수 있나요?

이번글은 정말 책임감 없이 쓰던거라 별 생각이 없었는데요... 감을 못잡겠습니다

철학이라고 붙여놓고 글썼는데 생각보다 포부 없는 사람이어서 죄송해요

 

+

(아이거 다시읽어보니까 논리 유지하고 일상으로 끌어와서 사이비를 때린다느니

흐릿한 구상만 가지고있으면서 자극적이게 쓴게 문제가 된거네요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이렇게 안쓰고 무조건 솔직하고 담백하게쓸게요 제가 기대를시키는 말을 했네요)

 

인신공격처럼 느껴지는부분들은 제가 좀 많이 지쳐서 편한 단어를 고르다보니 그런거고

그 단어들을 사용하는게 커뮤니티에 은연중에 절여져서 그런거니까 나쁜 의도는 있는게 아니겠구나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릴게요

진짜 비꼬는게아니고 존경할만큼 수준이 높으신 분이셔서

제 수준 낮은 말하기에 상처 안받으셨으면 좋겠네요...

0
2022.07.13
@제준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3
@불뿜는지렁이

1. 맞습니다. 이해를 바란 건 아니었고 가능하실 수 있으시다면 용서를 바라는 의도였으나,

잘못이 명백하므로 사과가 먼저 맞습니다.

단어 선택도 태도도 잘못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2. 중간에 추가하였듯이 긴 호흡의 장기적인 대화라는 점에서 굉장한 피로감을 가졌습니다.

무언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말투의 문제인가 싶었으나, 길게 적은 데에서 기인함을 뒤늦게 깨닫고

괄호 쳐서 추가한 바입니다.

정말 이 정도 길이의 말씀으로 주신다면 피로감 문제 없이 아주 괜찮습니다.

 

3. 본인이 편한 말투로 비판에 대응하기는 후술하겠습니다.

 

4. 인과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투를 지적한 점에 사과드립니다.

다만 글의 긴 분량 탓에 답을 하지 못함이 아닌, 장기적인 소통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저에게 불편을 유발하는 요소로써 분량을 개선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점입니다.

주장의 정리 자체에 고통을 느낌이 아닌, 여러가지의 질문을 한 데 엮은 <하나의 템포>에서

주장을 정리해야 함이 고통스러웠습니다.

 

ex) 지금과 같은, 이래서 이런데 어떻게 생각하냐? / 이래서 이런데 어떻게 생각하냐? 가 아닌,

이래서 이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되고 이래서 이러니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느냐?

(절을 나누었다 하셨고, 가독성을 위한 배려인 점도 체감하지만,

지금의 답문과 다르게 제 수준에서는 난이도 높게 다가왔습니다.)

 

5. 논의 A-2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차단한다기 보다는

이미 인식적인 차단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설명을 드림으로써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설명 아닌 차단을 제안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설명하는 글 시도 자체가 본디 무의미하게 되므로,

설명하는 글로써 인식의 차단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스스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는지, 앞으로 궁리해보겠다,

일단 이런 의견을 드립니다.

 

또 논의 A-2 아닌 글에서의 문답은 그대로 해드렸습니다. 단어 분석이 불필요하다.

학적이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입니다.

 

또,

철학의 관점 차이가 있을까 싶어 질문 드리는데, <인생관>으로써도 철학은,

철학을 만들었다 주장하는 자와 철학의 주장을 듣는 자와의 문답의 과정이 필수라고 여기시는지요?

자기 문답으로 조성한 <인생관>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자기 문답으로 조성한 타 철학자들의 철학 또한 철학이라고 당장은

말할 수 없다 생각하며,

(가령 니체는 어떤 말을 했다, 라는 사회적 문답 없는 한 마디의 말은 그것만으론

사회적 소통에서조차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는 학자(혹은 훈련된 자)들의 학적인(훈련된) 검증에 의해서 철학으로 말해질 수 있을 뿐이고,

따라서 학적인 전유물로써 <철학>이라는 단어를 소장하려는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혹시 저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면 부담 없이 타박하여 주십시오.

 

6. 거창하진 않은 듯 한데,

스스로에게 미심쩍어 다시 읽었을 때, 흐릿한 구상으로 자극적이게 쓰려 한 게 맞겠습니다.

위에 덧글에 깨닫고 추가하였듯, 무책임한 글쓰기에 사과드립니다.

 

혹시나 여쭙건대 중대한 함축이 글쓰기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것이 철학이라고 불릴 수 없겠다면

철학적 글쓰기에 중대한 함축이 있어야 하는 점은

철학의 어떤 점으로부터 중대한 함축이 있어야 하는지

여쭤볼 수 있겠는지요. 지금까지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 주신 데에서는

왜 중대한 함축이 있어야 하겠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기호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이전에

중대한 함축은 글을 쓴 사람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며,

글을 읽는 사람이 판단해줄 수 있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중대한 목표는

때에 따라 붙일 수 있을지언정

함축이 있냐고 묻는 것에서부터 이질감을 느낍니다.

또, 중대성을 판단하기 위하심에 함축을 달라고 요구하시는데, 본인이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3번의 것과 덧붙여서 예고한 후술을 적습니다.

 

만약에

출판사에서 원고를 요구한다면, 그리고 담당자가 함축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면,

저라면 정리해서 드립니다. 친구가 물어봐도 알려줍니다.

문제는 글을 써주시는 분께서 드러난 바, <철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의 신분>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오해하실까 말씀드리면 모든 숨김은 <사회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합니다.

출판사의 담당자, 신뢰할 수 있습니다. 친구, 신뢰할 수 있습니다.

<권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왜 노력을 들여서

제가 생각하는 (하찮게 여기실 수 있으시나) 철학의 보석을 보여드려야 하나요?

커뮤니티의 익명성과 커뮤니티에서 드러난 당장의 관계를 간과하시는 것 같습니다.

수준과 능력이 뛰어나신 것 맞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이런 느낌입니다.

 

영화를 잘 모르는 아마추어(B)로서 10년동안 만든 4시간 분량 중 극초반부만 영화 유튜브에 게시

 

A : 안녕하세요. 영화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요.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B : 와, 감사합니다. 피드백 주실 수 있으신가요?

A : 초반부가 문제 있네요. 이해하기 힘들어요. 영화로써 매력이 없는데 너무 포장하신 것 같아요.

B : 맞네요.(실제로 격한 공감) 꼭 고칠게요.(실제로 반영하기로 마음먹음)

A : 근데 이게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B : 어... 뒤에 그래도 유의미한 게 나와요

A : 제가 평가해드릴테니까 뒤에도 요약해서 보여주세요.

B : 아니, 그래도 저는 작품으로 내고싶은 입장이 강한데요... 제 입장을 이해해주실 수 있나요?

A : 좋은 영화일 수 있는지 봐주겠다는데, 굳이 왜 안 보여주세요? 지금 초반부보면 가망 없는데

후반부를 보여주셔야 제가 평가를 하죠.

B : ??? 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렇게 뚝 떼어서 보여드리게 되면

영화로서 독창적인 편집 과정의 재미가 사라지는데요...?

제가 재밌어서 보여드리려는 건데 그렇게 재미없게 보여드릴수있는 거였으면 제가 앞으로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죠.

제가 재밌어서 영화를 만들어온 건데요??

B : (만약에 차라리 그냥 친구라면, 혹은 만약에 사회적 신뢰가 보장될 수 있을 영화사 관계자였다면 보여주었고

알려주었다, 또,

새로 만들 다음 영화의 극초반부 방식이 적절한지

좋은 수준으로 검수받는 관계가 된다고 확정되면 이후의 내용까지 보여드릴 의향이 있다.)

(근데 왜 굳이 수준 높고 능력은 있어보이시고 열정은 있으시지만

처음보는 분이 남의 영화에 이런 요구를?)

(스스로 쓸데없는 자존심이야 없는 건 아니지만 일절 어떠한 관계 형성 없이 유튜브에서

좋은 영화인지 평가하겠다는 명분으로 계속하여 요구하는 점을 이해하기 힘들다)

 

A : 그냥 보여주시면 끝날 일인데 왜 자꾸 안 보여주세요? 아무튼 초반부는 이런 식으로 분석되는데

이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죠?

B : 네? 그거 아무 의미 없는데? (아마추어이다.) 당연한거에요. 그냥 쭉 보시면 되세요.

A : 아뇨, 분석해주세요. 잘 이해가 가지 않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영화라고 볼 수 없어요. 이걸 영화라고 보는게 잘 이해가 안가요.

B : (오히려 그냥 봐도 되는 영화인데 이해가 안 간다는 데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니, 그 극초반부는 의미 담을 수 있게 새로 만들 구간이라 당장 분석 하는거 불필요하신데요...

머리 안쓰시고 봐도 되시고, 지금 이해 안되는건 제가 잘못 만든 제 탓 맞으니까

궁리해서 나중의 영화에서 의미를 담게됐을 때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

A : 왜 끝까지 안알려주시고 회피하세요?

B : .....

 

이렇게 온전히 제 입장에서 정리해봤는데 혹시 너무 비약한 게 있을까요?

저는 영화(철학)를 그냥

가벼운 편집의 영상(가벼운 논증의 논의)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서 중대한가? 이거에 대해서 큰 생각이 없고

(다만 아마추어로서 자극적이게 홍보하였다는점에서 문제점을 인식하긴 함)

(또, 가벼운 편집이라도 개연성은 갖추어야 하겠으니, 개연성이 모자라다는 온도계 씬의 피드백을 받고 싶음)

뭔가 영화(철학)으로서 더 높은 필수요소가 있는것처럼 말씀하시길래 공감이 안 되고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제가 아마추어라고 하여 아마추어에만 머물겠다가 아니고

정말로 말씀하신게 그게 좋은 글쓰기의 요건이면 앞으로 책임을 가지고 잘한다로 끝내고

실례지만 도움 받을 수 있을까요? 시작해서

다음 글을 위한 건전한 이야기 나누기 시작하면 되는 건데

자꾸 이번 글에서 의심으로 머무르시며 캐물으시는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움을 주겠다는 명분 하에서도 이해가 안 되요

어디까지 도움을 주시려고 그러시는건지 감도 안 잡히고요

 

현재의 글에 대한 피드백은 당연히 선의이시고,

나중의 글을 위한 현재의 글 다시 쓰기 조언과

그로써 드러나는 나중의 내용 토의 역시 명백하게 생산적일 터이지만

현재의 글에 대한 캐묻기나 현재의 글에 대한 나중의 내용에 대한 요구는

의심 보이기 외 전혀 생산적이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0
2022.07.13
@제준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3
@불뿜는지렁이

괜히 착한 교수님을 계속 괴롭히는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1) 인생관에 핵심적인 개념들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면, 그 인생관에 동의하거나 그 유의미함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글부터 잘 정리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이번 글은 단어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색 없이 진행하였기 때문에, 현재의 글과 논증에서 비롯한 단어 분석의 요구가 곤란하게 느껴진 점입니다. 필요성은 있을 수 있으나, 필요성을 생각치 못하고 글을 적었기 때문에 단어의 의미를 말씀드리기 어려웠고, 따라서 애초에 불가하며, 다음의 시도에서 해보겠다는 말씀을 드렸기에 이번 글에서 단어 분석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심은 불필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의견을 수용해주셨으니 넘어가겠습니다.

 

2) 이유를 묻고 답하는 과정을 차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비판들에 답하고 반박들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주장한 이와는 다른 개인이 비판을 실제로 제기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비판에 대하여 대처할 방법을 각각 제시한 것이

세 가지가 있겠습니다. 마무리가 되어가는 것 같으므로 전반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단어 분석, (2) 논의 A-2 설명, (3) 뒷 내용의 근거 제시.

 

(1)은 위에서 이야기하였고, (2)는 저의 부족한 설명력에 기인함이 맞으며,

(또, 당장 설명할 방법이 못 찾겠음이 맞음에 다시 부족한 설명력에 기인함이 맞으며,)

(3)을 잠깐 짚고 넘어가면

아직 이야기하지 못한 뒤의 내용을 비판의 답으로 요구하심은, 뒤의 내용을 통해서만 비판을 해결할 수 있다는 유일한 방법 제시이시며, 따라서 유일한 해결책으로써 뒤의 내용을 가지고오기엔 개인적으로 불편한 감이 있어, 계속하여 거부해왔던 점을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거부해왔기에, 답을 하지 못함에 대하여 비판받는 것과 그것을 감수해야함이 당연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소통이 지지부진하기에, 괴로움이 있었던 점입니다. 비판들에 충분히 대답하지 못한 것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궁금증을 해소해드리는 게 맞겠으나, 결국에 그 어떤 것 하나도 해소해드리지 못한 점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시간 낭비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궁리해보겠다고 하니 일단은 알겠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3) 제가 다른 분들께도 피드백을 받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며, 글을 시작한 점은, 글과 저의 철학에 대한 확신이 아주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중대한 함축인지 판단하려고 하면 마음이 꺼려집니다. 따라서 글이 모두 진행되었을 때, 과연 제가 제시하거나 판단할 유의미들이 타인들에게도 그러하겠는가, 그것 또한 피드백으로써 독자들에게 판단을 요구하고 싶었던 마음입니다. 그래서 중대한 함축을 목표로 잡음이, 사람들에게 과연 이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전혀 모르기에, 꺼려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철학적 의의보다는, 의의가 있겠는지 객관적인 시각에서 각자의 발굴을 요청하는 요청글에 가까웠겠습니다. 단지 초반부의 글들은 발굴의 목적으로 적은 게 아니고, 아직 발굴을 위한 땅을 만들고 있었던 시점이라 통찰을 요구하셨을 때 당혹스러움이 있었고요.

 

저는 본 작업의 내용을 보았을 때 어떤 철학적 의의를 목표로 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 역시 비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의합니다.

 

생산적인 논의를 전개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부터, 그 논의를 바탕으로 어떤 생산적인 내용이 나온다는 것에 대한 의심은 따라나옵니다. 비판에 답하지 않는 한, 의심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다만 제가 거부 의사를 명확히 표명하였기에, 생산적일 수 있는 의심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게 됩니다.

전혀 잘못됐다고 말씀드림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일이건대, 제가 그 자연스러운 생산성을

그러한 방법으로는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견해로써 그러한 의심은 생산적이지 않은 일이 되고,

계속하여 지속하심이 부자연스럽게 된다는 입장입니다. 부당하지 않고 오히려 건전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특수하게 거부하여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만큼은 계속된 요구가 부당함과 비슷하게 되지 않겠는가, 의 물음입니다.

실제로 대화의 진전이 많이 느린 상태이고요.

당장의 비판에 제대로 반박할 수 없음을 감수하되, 다음의 글의 방향과 내용 구성 방식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여쭤보고 견해를 듣는,

다른 방식의 생산적인 대화를 전개하고 싶었던 것이 저의 입장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저자가 새로운 글을 잘 제시하면 모든 문제는 dissolve될 것입니다. 그러겠다고 하니, 일단은 알겠습니다

 

양해해주셨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4) 글의 막바지라, 호흡이 딸려서 지친 탓에 막 적었습니다. 그래서 과장이 좀 있었습니다.

불청객, 불친절한 인간으로 상황의 비유를 조성하여

불필요한 상처를 드렸으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곡해 맞습니다. 제가 편하게 이기적으로 적고 검토하지 않았던 것이

맞으니까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만 <평가>가 명분과 주안점이 아니더라도,

평가의 과정 자체가 그 대화에서 중요치 않았을 것이란 점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좋은 글쓰기일 수 있겠는지 판별하는 작업으로써

평가하시겠다는 의도는 있었다고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평가가 아니고서라도

꺼내놓는 데에서 불편을 느끼던 점이었으므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중요치는 않고, 다음의 글로부터 이해해주신다고 말씀 주시는 데에서

굳이 더 파헤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므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을 읽겠습니다.

 

현재까지의 분량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지금의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저도 당시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고착보다도

다음의 글에 대한 구상을 진행하고 싶었던 것이겠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은 '좋은 영화를 만들기를 바란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제가 당시에 알고 있었다는 일입니다. 어떤 누가 이만큼씩 시간을 투자해서

많이 부실한 변두리 커뮤니티 속 변두리의 글에다가 그 귀한 전문인의 눈을 빌려주나요?

그래서 이 고착을 계속해서 못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가 어휘력이 낮고 컨트롤이 미숙해서 함부로 곡해하고 비난을 섞고 그러하지만,

저 또한 좋은 피드백을 해주시려는 그 사이버 상에서의 바램을 절감하기 때문에

주신 피드백에 며칠 간 매달려왔음을

알아주셨으면 바랍니다. 너무 대화 진전이 되지 않길래

커뮤니티적 관계를 간과하시는 게 아닐까 싶은 의혹을 과장하여

그렇게 적었으나, 대가 없이 행하시는 선의에 명백한 무례가 되었으므로 사과드립니다.

 

그러므로 저를 마치 예의없는 불청객처럼 묘사하는 것과 '커뮤니티적 관계를 간과한다'는 것을 취소하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묘사에 반성하며, 간과의 기술을 취소하겠습니다.

 

5) 저자의 최종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아 보입니다. 나는 영화 전체를 한번에 상영하길 원한다.

 

근데 말씀 나누며

스스로 당장은 그릇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아버려서 취업부터 하러가고 자투리에 공부 병행해보겠습니다.

이 깨달음은 대처에서 계속하여 미진함이 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상적인 융통성에 기대려 한 게 학적인 철학을 존중하는 듯 글에 써두긴 했지만,

아무쪼록 건방졌다 생각이 드네요.

주어진 시간을 아끼고자 졸업했는데, 결국에 잘 되지 못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냥 천천히 하겠습니다.

 

6) 마지막으로 학적인 작업과 무관한 감상을 붙입니다. 만약 다음 글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쓰인다면, 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글은 내용도 형식도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저 또한 동의합니다.

 

본인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으나,

온정에서 첨언하건데 글 쓰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을 권합니다.

 

많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의례적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진심으로 피드백 공들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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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삭제 되었습니다]
2022.07.12
@불뿜는지렁이

하ㅏ니 이렇게 좋으신 분이신데... 솔직히 굽신거리면서 따르고 싶을 정도로 좋은 분인데

찜찜한게 있으니 해결하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서 구구절절 적었네요...

만약 제가 정말로 잘못된 이야기를벌이고 있다 하시면 치기로 여겨주시고 아량을 베풀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마워하는거 진짜 진심이니까 오해없으셨으면 좋겠어요

말씀드리는 생각하고 감정은 별개로 분리해서 생각해주세요

꼭 읽어볼게요 진짜 진짜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불편하시게 되시면 신경버리고

좋은 일상 보내주셨으면 좋겠네요 관심 많이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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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7 [기타 지식] 아무리 만들어봐도 맛이 없는 칵테일, 브롱스편 - 바텐더 개... 3 지나가는김개붕 1 3 일 전
5246 [기타 지식] 일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칵테일들 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 2 지나가는김개붕 6 4 일 전
5245 [기타 지식] 중국에서 안드로이드 폰을 사면 안되는 이유? 10 대한민국이탈리아 22 5 일 전
5244 [기타 지식] 최근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국내 항공업계 (수정판) 15 K1A1 23 8 일 전
5243 [기타 지식] 도카이촌 방사능 누출사고 실제 영상 21 ASI 2 12 일 전
5242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지구 2부 21 Mtrap 8 13 일 전
5241 [기타 지식] 100년을 시간을 넘어서 유행한 칵테일, 사제락편 - 바텐더 개... 5 지나가는김개붕 1 15 일 전
5240 [기타 지식] 오이...좋아하세요? 오이 칵테일 아이리쉬 메이드편 - 바텐더... 3 지나가는김개붕 2 16 일 전
5239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지구 1부 31 Mtrap 13 16 일 전
5238 [기타 지식] 칵테일의 근본, 올드 패션드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야기 15 지나가는김개붕 14 17 일 전
5237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2부 22 Mtrap 14 16 일 전
5236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1부 13 Mtrap 20 17 일 전
5235 [기타 지식] 서부 개척시대에 만들어진 칵테일, 카우보이 그리고 프레리 ... 3 지나가는김개붕 5 22 일 전
5234 [기타 지식] 모던 클래식의 현재를 제시한 칵테일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4 지나가는김개붕 2 23 일 전
5233 [기타 지식] 브라질에서 이 칵테일을 다른 술로 만들면 불법이다, 카이피... 5 지나가는김개붕 1 24 일 전
5232 [기타 지식] 럼, 라임, 설탕 그리고 다이키리 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 2 지나가는김개붕 6 25 일 전
5231 [기타 지식] 1999년 도카이촌 방사능누출사고 대량 방사능 피폭 피해자들 ... 9 ASI 5 25 일 전
5230 [기타 지식] 진짜 레시피는 아무도 모르는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편 - 바텐... 3 지나가는김개붕 2 25 일 전
5229 [기타 지식] 통계로 보는 연애 상황에서 외모의 중요성 8 개드립에서가장긴... 11 28 일 전
5228 [기타 지식] 추울 수록 단맛이 유행한다, 위스콘신 스타일 올드 패션드편 ... 1 지나가는김개붕 8 29 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