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불을 발견한 인간의 삶

4fbe2975062f8f1ec228edbaa14470df.jpg

 

<파울루스 모렐스, 우는 철학자. 인간이 직면한 어둠 때문에 울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Ήράκλειτος)는 거만떠는 성품 때문에 어둠의 철학자라는, 비범한 별명을 얻었다. 그 외에도 수수께끼를 내는 자 · 알쏭달쏭한 사람 · 꾸짖는 자 · 비평가 등등 실로 재미난 별명이 붙었는데, 모두 본인의 심술궂은 행실에서 말미암은 것들이다 : 헤라클레이토스는 지식을 자격 있는 자의 전유물로 생각했고, 본인 이외의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을 매우 업신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저작물을 아무나 읽을 수 없도록 일부러 개떡같이 썼는가 하면, 쉬운 말 놔두고 괜히 어려운 말만 지껄이고 다녔다. 의사한테 "혹시 우기(雨期)를 건기(乾期)로 바꿀 줄 아는가?(= 고름약 있나요?)"라고 물었는데 못 알아듣자 그대로 앓다가 죽었을 정도. 제 딴에는 무식쟁이에 불과한 시민들의 참정 행위를 비웃거나, 함께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산속에 숨어 사는 등 노골적으로 낮잡아 보기도 했다. 이렇게 심보를 고약하게 쓰는데 사람들이 놀부라고 부르는 것도 당연하지.

 

그토록 불가사의한 자부심의 원천은 물론 본인의 탁월한 지적 성취에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독학으로 자연철학에 이바지했는데, 주된 관심사는 단연 원질(原質, Arche)의 탐구였다. 원질이란 만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그 무언가로서, 훗날 원소설 · 원자설의 정립에 큰 영향을 끼친 개념이다. 다만 워낙에 자연철학자들마다 독특하게 정의하여 실체에 대해선 통설이랄 게 없었다. 대표적인 자연철학자 탈레스(Θαλῆς)는 이야말로 세상의 근본이라 했고, 피타고라스(Πυθαγόρας)는 수학적 구조라는 가상물을 그것이라 주장했다. 이들보다 후학인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견해를 밝혔는데, 그는 을 곧 원질로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이란 투쟁을 일컫는 비유적 표현이다 : 헤라클레이토스는 당대 식자층 사이에서 대세였던 물활론에 입각하여, 물질 간의 상호작용을 투쟁으로 생각했다. 마치 불과 땔감의 관계처럼, 서로 대립하는 두 물체는 각자의 존망을 걸고 투쟁한다는 식이다. 그는 이러한 싸움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사물의 변화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즉, 특정 성분이 요리조리 배합되어 우주를 형성했다기보단, 그것들 간의 대립갈등변화를 유발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는 "투쟁은 만물의 왕이다" 와 같이 단호한 선언과 함께 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물질이 벌이는 투쟁을 원질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철학사적 공로는 따로 있다 : 로써 대변되는 세상만사의 변화를 고찰하던 헤라클레이토스는, 문득 어떤 사물이던지 "변한다"는 속성 자체만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상하게 변해버리고 마는 물질 세계에서 오직 변화라는 현상만큼은 희한하게도 영원무궁하다는 소리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처럼 삼라만상으로부터 공통되게 발견되고, 만물에 일괄적으로 통용되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참인 우주적 섭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는 그것이 설정한 우리 우주의 질서이며, 이외에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공통 규범이 있다는 아이디어였다. 그는 이러한 보편 법칙이 온 세상의 생멸을 결정하는 주체였음을 확신하고, 원리(原理, Logos) 또는 이성(理性)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유일한 실존으로 특기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명언 가운데 "만물유전(萬物流轉)"이라는 뜻을 지닌 "판타 레이(Πάντα ῥεῖ)"는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이법(理法)의 확고 · 불멸한 성질을 밝혀냈다는 자신감의 고백이었다.

 

참으로 뜻깊은 성찰이었지만, 별로 유쾌한 진실이라 할 순 없다. 투쟁이 정말로 원질이라면, 우리들도 예외 없이 투쟁의 부산물인 셈이니 말이다. 그리고 만물이 무한하게 변화한다고 했으므로, 변화 = 투쟁의 공식에 따라, 인간의 삶에도 무수한 충돌싸움이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인간은 공동체와 개인을 가리지 않고 싸워대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도 갈등을 빚지 않나. 드물게 화해와 평화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영속을 장담할 순 없고, 국면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어 간다. 결국 세상의 본바탕이 그러하듯, 우리의 본성 역시 투쟁을 거듭하도록 이뤄졌다는 말씀이다. 머리 빠지도록 실컷 궁리한 끝에 내린 결론이 세상천지 전쟁통이라니, 철학할 맛 뚝 떨어지겠네그려.

 

오만했던 헤라클레이토스는 무지몽매한 대다수 사람들이 이러한 절대진리를 알 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알려줘봤자, "자격 없는" 대중들은 이해할 수조차 없다고도. 그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영문도 모른 채 덧없는 분쟁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본인의 절친한 친구가 아귀다툼 끝에 추방형에 처해지는 꼴을 보고는, 그토록 경멸했던 사람들의 무지가 가여웠는지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그는 광장으로 나서서, 매일 같이 서로 다투면서 아무런 자각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제발 투쟁으로 가득찬 우리 세상의 비밀을 깨우치라며 목놓아 울고 소리쳤다. 불행히도 에페소스(Ἐφέσιος) 시민들은 여전히 그의 말귀를 못 알아먹고, 다만 우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하나 더 붙여주었을 따름이다.

 

c35cbdb2f34c4fb6bd4061a4b86f4de1.png

 

<제왕 전건(田建). 가진 권세에 비해 지나치게 순진한 인물이었다. 마땅한 화상이 없어 드라마 대진부(大秦赋)의 등장인물로 대체>

 

사기(史記)에 의하면, 전국시대 말엽에 연(燕)나라의 침공을 받은 제(齊)나라는 기왓장처럼 부서졌다고 한다. 민왕(湣王) 때의 실책으로 군대는 와해됐고 72개에 달하던 성 가운데 70개를 잃고서 몰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양왕(襄王)이 천운을 만나 영토를 되찾고 잠시나마 중흥기를 맞이하긴 했다. 그래도 한 때 천하를 동 · 서로 가를만큼 대단했던 제의 옛 국력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에 그쳤다. 한편, 그 무렵의 진(秦)나라는 백기(白起)를 앞세운 소양왕(昭壤王)이 인접국들을 무참하게 정벌하고, 끝내 주(周)나라까지 멸하면서 명실상부 중원 최강의 자리에 우뚝 섰다. 이러한 진나라의 약진은 거의 망할 뻔 했던 제나라 입장에서 대단히 큰 위협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양왕의 뒤를 이은 전건에게는 호국 군주로서의 막중한 책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권좌에 오른 전건은 수상한 행보를 거듭한다. 그는 대규모 국제 전쟁이 임박한 와중에 외교적으로 고립을 자초했다. 특히 국경을 마주한 조(趙)나라가 다섯 번이나 침공 당하는 사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 조는 진과 제 사이의 이웃 나라로서, 말하자면 진나라와 제나라의 완충지대에 해당했다. 비록 장평대전에서 40만 대군을 말아먹었지만, 조나라는 이촬(李繓)과 사마상(司馬尙)처럼 뛰어난 명장들에 힘입어 수적 열세를 뒤엎는 등 여러 차례 저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건은 조와 긴밀한 연맹을 맺기는 커녕, 숱하게 요청받은 병력이나 물자를 지원해주지 않으며 수수방관했다. 오히려 버티다 못한 조나라가 멸망하자 침략국인 진나라에 축하 사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전국칠웅이 차례 차례 무너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덕분에 진은 손쉽게 나머지 국가들을 각개격파하며 나날이 강성해졌다.

 

하긴, 전력을 심각하게 소모한 제나라로선 섣불리 조나라를 도와주기 어려웠겠지. 그러나 전건은 기왕에 조를 외면했으면서, 딱히 재무장을 서두르려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는 즉위한 이래로 단 한 차례 출군한 적도 없고, 군대를 정비한 적도 없다. 조나라가 망하고 난 이후부터 헤아려보더라도 약 15년의 기간이 주어졌는데, 한결 같이 군사 방면에 있어서는 무관심했다. 당연히 제도 · 전략 · 무기 · 병력 등 무엇 하나 성한 것이 전혀 남지 않았고, 오랜 방임 속에서 군기도 해이해져만 갔다. 반면에 진나라 군대는 매년 4천만 섬의 군량을 수확하고, 해마다 50 ~ 60만 대군을 동원하는 등 제나라의 총력을 까마득히 웃돌았다. 더구나 다년 간의 전투 경험으로 졍예하게 단련되었으며, 여러 차례 승전하여 사기도 충천했기 때문에 양과 질 모두 진작부터 제나라 군대를 압도했다.

 

이윽고 기원전 221년, 구만리 장천 아래 오직 진나라와 제나라만이 남게 되었다. 중원 대부분을 석권한 진의 힘은 이제 동쪽 구석의 제 따위가 넘보지 못 할 수준에 이르렀다. 때문에 전건은 얌전히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 전건이 투항하기 위해 궁문을 나서려는데, 문지기 하나가 길을 막아섰더랬다. 그는 당돌하게도, "나라에 임금이 뭣하러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전건은 "그야 물론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지." 라고 대답했는데,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자기 나라를 저버리고 남의 나라에 입조하려 하십니까?" 하는 일침만 들어먹었다. 이를 잠자코 듣던 전건은 돌연 일행과 함께 환궁했고, 그 바람에 항복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게다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다급하게 진나라 방면에 병사를 배치하는 등 항전할 태세를 갖췄다. 

 

일개 문지기의 말에 항복과 같이 중차대한 국사를 번복할 리 없다는 점, 그리고 상대가 상대인만큼 권고를 무시했을 때의 대가가 무엇인지 모르기 힘들었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그는 애당초 항복할 뜻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간 전쟁 대비를 소홀히 했으며, 판을 벌이다 마는 식의 퍼포먼스를 기획했던 걸까? 또한 동맹국 하나 남지 않은 그 때를 노려서 새삼 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대국을 상대로 부질 없는 도전을 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역설적이게도 일련의 사실과 의문들은 전건이 자기 보신에 연연한 매국노가 아니라, 실은 남다른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내 생각에, 그에게는 어떠한 신념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흥망의 기로에서도 목숨 걸고 관철한 신념이란 바로 평화주의였다.

 

당시 제나라의 권력 구조를 살펴보면, 전건이 품었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친정을 시작한 전건은 외삼촌인 후승(后勝)을 신임하여 재상으로 삼았는데, 그 기간만 30년씩이나 되었다. 즉 전건의 치세 내내 재상은 후승이었던 셈으로, 서로 어지간히 뜻이 잘 맞지 않고선 힘든 일이다. 그런데 후승은 일찌기 진나라 첩자라는 의심을 살 만큼 극성 주화파였던 인물이다. 그는 괜히 진나라가 개입할 명분만 제공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군대를 정비하려는 일체의 행위에 제동을 걸었다. 다른 신하들이 아무리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고 간언해도, 후승과 당여들이 번번이 뜯어말렸다. 심지어는 나름 군사 강국이었던 연나라와 초(楚)나라도 못 버티고 망할 때조차 진을 자극할 수 있다며 군축을 주장했다. 후승과 전건의 밀접한 관계 및 내각 체계 상, 이는 군왕인 전건부터 국방력 재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항복을 거부한 직후, 즉묵(即墨) 땅의 충신들이 몰려와 "아직 진나라가 대륙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지금, 우리가 먼저 남하해서 그 영역을 차지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 라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즉묵은 제나라가 위태로울 때 마지막까지 사수한 2개의 성 중 한 곳으로, 염전이 위치하여 제나라 경제를 책임지는 요충지였다. 귀하디 귀한 소금도 나겠다, 이렇게 열정적인 충신들도 있겠다, 어떻게든 군비를 마련해서 한 판 붙어 볼 법도 하잖아? 그러나 전건은 끝내 피난하여 싸우자는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 바꿔 말해, 나라가 파탄나려는 그 순간조차 싸움을 방편으로 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다만 전건이 군축에는 동의했을지 몰라도, 아예 나라의 자주성을 포기하려는 생각만큼은 없었다. 만약 진나라의 앞잡이 노릇이 하고 싶었다면 최소한의 성의 표시로 뇌물을 바치던지 첩보 작전 정도는 거드는 등, 소위 은퇴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한데, 그는 장장 44년의 재위 기간을 통틀어 한번도 내응하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스스로 귀순할 명분마저 저버리고 방어전을 결행했다. 이를 종합해보면 전건이 전쟁을 단념하여 나라를 끝장내려던 게 아니라, 전쟁 이외의 평화적인 수단으로 국가를 영위하려 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토록 숭고한 결의가 때를 잘못 만났다는데 있다. 전국시대 말은 도처에 전쟁이 빈번하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병탄하는 게 상식으로 통하던 난세였다. 당장 본인의 할아버지 대에 나라가 결딴났던 만큼, 패권주의가 만연한 국제 정세를 전건 역시 익히 알았다. 진나라 입장에서도 대륙 정복까지 겨우 한 걸음 남았는데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도 전건은 정녕 전쟁 없이 나라를 건사할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인가? 하필 이런 시기에 불살 루트를 타겠다니 무척 태평한 노릇이다. 아니나 다를까, 채 1년도 지나기 전에 사령관 왕분(王賁)이 지휘하는 진나라 원정군에 의해 수도를 포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백성들조차 이러한 왕실의 인식을 가망없게 여겼는지, 적군이 밀려오자 무기를 버리고 아예 길을 터주었다고 한다. 

 

진나라는 성곽에 틀어박힌 전건을 꾀어내기 위해, "지금 나오면 땅 500리 떼어주고 왕 시켜줌" 이라며 회유했다. 외통수에 몰려버린 전건은 이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마침내 제나라가 멸망했다. 이후 진나라는 정말로 전건에게 땅도 내려주고, 왕위도 유지시켜주긴 했다. 하지만 전건은 끝내 묘호를 받지 못해 지금껏 본명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진나라가 울창한 숲 한 가운데를 봉토라 주장하며 억지로 그를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진나라는 교통 수단과 식량을 끊어버림으로써 냉혹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명색이 왕이라는 자가 처량하게 굶어 죽고 말았다.

 

만약 전건이 일찌감치 온 힘을 다해 맞섰더라도 진나라를 이길 수는 없었겠지. 혹은 여섯 나라가 한꺼번에 덤볐더라도, 기어코 진나라를 넘어서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 칼 한 번 뽑아보는 일 없이 허망하게 지나쳐버린 과거를 지극히 원통해 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MUNICH_1.JPG

 

<영국 총리, 아서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를 선포 하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종이는 히틀러와 주고받은 친필 서신이다>

 

1920년대 중엽부터 영국의 사회 분위기는 혼란 그 자체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이 들이닥친 까닭이다.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았던 영국은 석탄 · 직물 · 철강과 같은 주요 제조업계가 큰 타격을 받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GDP 대비 부채 비율은 180%까지 치솟았는데,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금융위기를 빌미로 외환 거래를 정지하는 바람에 두 나라 은행이 영국의 대외자산 약 7천만 파운드(= 8조 240 억 원) 가량을 저당 잡고 있었다. 또한 집계된 실업자만 350 여 만 명에 달했고, 2 ~ 3년 동안 물가의 30%가 후퇴하는 등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기록했다. 즉, 돈 나갈 구석은 많은데 벌지도 못 할뿐더러 가진 돈마저 못 쓰게 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비상 사태를 수습한 사람은 당시 재무부 장관인 네빌 체임벌린이다. 체임벌린은 쉰 살이 다 되어서야 관료가 된 늦깎이였지만, 긴축정책을 성공적으로 집도하여 주목 받았다. 그는 우선 직 · 간접세를 인상하고, 동시에 실업 수당과 여러 사회정책비 및 공무원들의 임금을 삭감하여 정부의 제반 지출을 줄이도록 권고했다. 고집스레 유지해 온 금 본위제를 폐지하는가 하면, 기준 금리를 낮추고 건설업계를 후원하여 불황에 맞섰다. 소위 블록 경제(Bloc economy)라 불리우는 관세 장벽도 이 사람이 제안했는데, 영연방에 해당하지 않는 외국산 수입품에 10 ~ 30% 이상의 관세를 매겨서 내수 시장을 활성화시키겠다는 아이디어였다. 이는 비록 100년 가까이 이어진 자유무역 기조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였으나, 조국의 몰락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단행되었다. 상당한 출혈이 있었음에도 이러한 조치들은 효과를 보았고, 덕분에 영국의 경기는 서서히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드높은 명성을 얻게 된 체임벌린이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의 총리 자리를 물려 받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때는 1937년, 온 유럽에 암운이 드리워 결코 호시절이 아니었다. 같은 전승국들로부터 홀대 받은 이탈리아는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를 부르짖으며 팽창주의 야욕을 드러냈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데 이어 1937년 중국을 공격한 일본 제국 역시 불온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특히 독일의 경우 1933년 국제연맹 탈퇴, 1935년 베르사유 조약 파기 선언, 이듬해에는 라인란트 재무장을 실현했고, 1936년 ~ 1937년 사이 게르니카 폭격으로 스페인 내전에 간섭하는 등등 유럽 한 복판에서 연이어 말썽을 부렸다. 일련의 사태는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유래 없는 규모의 국제 전쟁, 무수한 희생으로 잠재운 줄 알았던 불길이 다시 치솟으려 하고 있었다. 1938년 들어서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마저 침공하려는 지경에 이르자 형세는 더욱 자명해졌다.

 

서구 세계의 수장 격인 영국 총리로서 체임벌린이 놀고 있을 수만은 없지. 그는 1938년 9월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의 대표들을 불러 모아놓고 매우 야심찬 딜을 제안했는데, 훗날 뮌헨 협정이라 일컬어지는 묘책(?)이다. 본 협정은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독일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떼어줄테니, 전쟁은 하지 말자"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그 밖에 폴란드나 헝가리가 약간씩의 땅뙈기를 받아먹고, 협정 참여국들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도 포함되었다. 마치 동맹국의 땅을 팔아 평화를 구걸하듯 비굴한 모양새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동의는 구한 적 없다는 사실은 사소한 결격이었고, 대의를 위해 협정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귀국한 체임벌린은 기자들 앞에서 득의양양하게 본인이 중부 유럽의 안정에 기여한 성과를 낭독했다.

 

체임벌린이 이렇게 화끈한 후원을 주도한 까닭은 마음이 넉넉해서라기보단, 아직 전쟁을 다시 치를만 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영국의 일부 지역은 여전히 제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을 겪는 중이었고, 당대 사회의 중역들은 대부분 참전 세대로서 전쟁이라면 치를 떨었다. 그토록 참혹했던 전쟁터에 이제는 자식들이 끌려가야 한다는데, 대체 어느 부모가 순순히 받아들일까. 하물며 군수품과 무기 등 전쟁에 필요한 물자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당장 체임벌린 본인부터 재무부 시절, 민심에 편승해 연간 7억 파운드(= 80조 1,040억 원 !)에 달하던 군비를 전간기 10여 년 동안 1억 파운드(= 11조 4,400억 원)까지 대폭 축소하는 식으로 재정난을 타개해 왔거든. 이는 사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그만한 전쟁은 다시 없을 것이란 낭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당시 분위기 상, 군축을 당연하게 생각한 시대 배경도 한 몫 했다. 다시 말해, 국내 여론과 여건이 모두 전쟁을 감당하기엔 시기상조였다.

 

문제는 이로 인해 독일의 불순한 야망이 오히려 자극 받았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광기 들린 독일일지언정, 영국과 프랑스 같은 강대국을 동시에 상대하긴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독일은 여러 조약들을 어겨가면서까지 전쟁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일단 침략을 감행하고 나서 협상하려는 척 기만했다가 또 다시 쳐들어가는 식으로 영 · 불을 떠보길 반복했다. 그런데 뮌헨 협정에서 체임벌린이 보여준 양보와 소극적 태도로부터 영국의 투지가 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해 낸 독일은 큰 자신감을 얻었다. 아직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꼴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마음껏 휘젓고 다녀도 괜찮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우쭐해진 독일은 결국 뮌헨 협정이 체결된 지 반 년 만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누가 보더라도 뻔한 전쟁각을 체임벌린이라고 과연 몰랐을까? 혹자는 뮌헨 협정의 어처구니 없는 파국을 두고, 체임벌린의 진정한 노림수가 시간벌이에 있었다는 주장을 한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순순히 던져주는 대신, 독일을 상대할 군사력 재건에 필요한 시간만큼은 확보하고자 했던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그러나 과연 체임벌린이 독일을 적국으로 인식해서 협정을 추진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 독일이 준동하던 시절에 재무부 장관이었던 체임벌린이 군축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총리가 된 이후에도 독일과 외교적 해법을 찾으려는 나머지 타국에 비해 국방비 증액이 늦었던 부분은 묵과하기 어렵다. 체임벌린은 1937년에 이미 이탈리아보다 낮았던 연간 국방비를 이듬해에 약 17조 원 정도로 확대했다는데, 프랑스와 독일이 그쯤 약 50조 원 · 70조 원 단위로 투자하면서 여전히 뒤처진 신세를 면치 못 했다. 전쟁에 대비하겠다는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느긋한 대응이 아닌가.

 

무엇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을 그냥 할양해 준 부분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업국가로 이름 높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주데텐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 내 최대의 공업단지였다. 독일과 접경인 탓에 높은 수준으로 요새화 되어 있었고, 최신예 병기와 군인들이 상주하는 노른자 중의 노른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뮌헨 협정에서 독일이 침 발라뒀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을 덥썩 건네줘버렸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산업 기반의 40% 가량과 대독 전선의 전방 기지, 3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일거에 상실하고 말았다. 만약 독일을 막고자 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사수해야 할 땅이었으며, 하다못해 병력과 공장만이라도 건져왔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주데텐란트 분할에 대한 주민 투표는 거추장스러우니까 생략(!)하자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협정을 이행했으니, 결과적으로 독일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었다.

 

아마도 체임벌린은 호전적인 독일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면, 본인이 능히 독일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영국 총리가 독일의 어리광을 받아줘야 하는 이유는 바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라 하겠다 : 대다수 영국 수뇌부 인사들은 공산주의의 발흥을 극도로 경계해왔는데, 식민지의 공산화로 인한 영연방 축소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 "빨갱이들을 몰아내자"고 천명하는 나치 독일과 파쇼 이탈리아의 두드러지는 확장세를 이용하여 소련에 대항하려 했다. 1935년에 영 · 독 해군 조약을 통해 독일의 군함 건조 제한을 풀어주고,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에 합세하여 스페인 반군을 지원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체임벌린도 마찬가지로 취임하고 나서 줄곧 독일과의 연대를 위해 네빌 핸더슨(Nevile Henderson)과 같은 측근들을 여러 차례 파견했다. 특히 본인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에드워드 우드(Edward Wood)를 보내서는 독일에게 "공산주의로부터 서구 세계를 지켜주는 방벽"처럼 닭살 돋는 찬사를 바치며 당시 영국 정계의 입장을 표명했다. 뒤이어 체임벌린은 유럽끼리 싸우면 소련만 이득을 본다느니, 소련이 뒷세계에서 이간질을 획책한다느니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어 독일의 적개심을 공산주의에 유도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정황 상, 뮌헨 협정 또한 그가 구상한 반공 계획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 마디로, 체임벌린은 이이제이를 실현하기 위해 독일을 살찌운 셈이다.

 

그러나 독일이 반드시 동쪽으로 쳐들어가리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본래 나치 독일은 범게르만주의라는 공상 아래 독일어권 영역이라면 어디든지 차지하려 들었다. 제국일 때부터 러시아와 줄곧 싸워온 견원지간이자 공산주의를 극혐했던 폴란드에 마수를 뻗친 까닭도 그것이다. 즉, 공산주의의 축출은 정권 수립을 위한 명분에 불과하고, 가장 큰 내적 동기는 정복 그 자체에 있었다. 따라서 독일의 재무장이 곧 독일과 소련의 대립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체임벌린만큼은 뚜렷한 확증도 없이 독일을 우방이라 단정 짓고, 무기와 영토를 헌납하면서까지 도와주면 소련과 싸워줄 것이라 믿었다. 그의 막연한 기대는 독일이 소련에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산산조각 났지만 말이다.

 

사실 독일 정도면 꽤나 솔직하고 일관되게 행동한 편이며, 이미 국제 사회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인 전적이 다분했다. 그저 체임벌린이 전쟁을 결심하기 두려운 나머지 외교적 도박수에 매달렸고 애써 전쟁 가능성을 외면했을 뿐이다. 때문에 막상 독일이 폴란드 국경을 밀고들어가자 저지할 수단이 마땅찮았다. 이른바 가짜 전쟁과 노르웨이 전투 등의 졸전, 그리고 체임벌린 자신의 실각이라는 사건들 역시 같은 문제에서 기인했다. 또한 체임벌린은 불운하게도 사임한지 겨우 6개월만에 사망하면서 독일의 배신(?)을 응징하지 못한데다가, 영국 역사 상 최악의 총리로 기억되는 수모까지 겪게 됐다. 평화는 전쟁에 대비했을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대가였다.

 

피터 펜디, 슬픈 소식.JPG

 

<피터 펜디, 슬픈 소식. 여인의 비통한 얼굴과 장교의 난처한 얼굴, 아이의 천진난만한 얼굴 모두 전쟁의 민낯이다>

 

가혹한 세상의 진실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호소는 어딘지 서글프고 무기력해 보인다. 그는 연신 세계가 투쟁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비밀을 폭로하며 사람들이 깨닫기를 당부했지만, 정작 투쟁의 항구성을 긍정해서 공허한 외침에 그치고 말았다. 우리네 삶이 싸움으로 점철된 까닭은 본성부터 그렇기 때문이라는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 무슨 도움이 되었겠어. 헤라클레이토스 본인도 은연 중에 한계를 느꼈던지, 자신의 저서에서 "사람들은 이성이란 걸 가르쳐줘도 못 들은 사람이랑 진배 없이 행동한다" 라고 투덜댔다.

 

과연 그의 한탄대로, 인류는 유구한 세월동안 전쟁을 일으켰다. 분명히 숱한 전쟁을 겪으면서 고통과 파멸만 남긴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현자들이 끊임 없이 질책을 가했을텐데도, 전쟁판을 벌이는 습성은 여전히 남아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인류의 역사를 관조하고 있노라면, 인간이 마치 뉘우칠 줄 모르고 호전적인 본성에 지배 당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인간들에게 품었던 혐오감도 약간은 이해가 되시겠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 본인도 인간이 아니던가. 그의 확정적 세계관에서는 진리를 각성한 보람이 전혀 없다. 단지 자신의 앞날에 덧없는 투쟁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먼저 알았을 뿐,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그것을 피할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알려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홀로 진실을 깨달았다는 고독감과, 기왕에 그토록 참담한 바를 알아버린 이상 차마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 그들보다 괴로운 처지였다. 어쩌면 헤라클레이토스가 쏟아낸 눈물의 참된 의미는 미련한 군중들과 자기 자신 모두를 향한 연민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성의 잔인한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염세적 전망에서 흘린 눈물 말이다. 바야흐로 인류의 어두운 숙명이 교만스러운 그를 슬프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반 세기 정도가 지난 뒤, 불세출의 후배가 나타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인간에 대한 불신을 일갈하고 이후 철학계를 영원토록 바꾸어놓았다.

 

1280px-Alcibades_being_taught_by_Socrates,_François-André_Vincent.jpg

 

<프랑수아 앙드레 빈센트,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 노스승이 애제자에게 불의에 맞서 싸우는 법을 교수하고 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중요한 순간, 조국을 배신하여 스승의 기대를 저버린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 경, 아테네 사회의 타락을 목도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로 한껏 고양된 아테네는 주변국들을 정복 · 약탈하면서 부강해졌다. 이로써 민주정을 자처하는 주제에 명백히 제국화가 이루어진 아테네에서는 패권주의와 팽창주의적 기조가 만연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남의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일체의 행위를 명예롭게 여기게 되었다. 때문에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몰두했고, 민회를 통해 연일 네 편 내 편 나뉘어서 싸워댔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쓸모 있는 재주를 발휘하여 사회에 공헌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무엇이든 표결에 부치는 민회에서는 말 잘 하는 사람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 그러므로 박식한데다 뛰어난 달변가였던 수사학자(Sophist)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도 당연했다. 이들은 대중을 선동하는데 특화된 논변술을 활용해서 본인들 입맛대로 민회의 의제를 좌우했고, 그 모습을 선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혀놀림을 강론해주고 부를 축적했다. 다만 수사학자들은 "어차피 다수결인데, 어떻게든 과반수 이상의 동의만 얻으면 장땡 아님?" 이라는 실용적 생각에서, 몹시 교묘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단발성 화법만 가르치고 구사했다. 상대를 모질게 비방하거나, 논리와 단어를 애매하게 해석하거나, 일부러 사실을 생략 · 수정하거나, 때로는 궤변을 늘어놓아서 당장의 열세를 모면하는 등, 맞은편을 설복시키기 위해 비형식적 오류를 범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수사학자들이 득세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자기 변호와 중상모략의 수단을 갖추게 하니, 뜻밖의 문제가 불거졌다. 무슨 사안이던 간에 찬/반 토론만 열리면 첨예한 언변이 동원되어, 최종 결정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 판가름하기 쉽지 않았던 것. 수사학자들이야 사람마다 제각각의 진실과 정당성이 있으니 존중해주어야 한다며 이러한 아노미 상태를 상대주의적 윤리관으로 포장했으나, 그로인해 서로 자기 말이 맞다며 웅변을 쏟아내느라 난리굿이 따로 없었다. 똑같은 행위라도 지껄이는 사람에 따라 정당해지거나 부당해지기 일쑤였으니, 결국 아테네 사회는 상대적 윤리관의 정착으로 인해 시비를 가릴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상대적 윤리관의 반사회성을 경계하여,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고자 했다 : 소크라테스는 미덕(美德), 즉 인간다움을 유익한 가치로 전제했다. 그러니까 다들 훌륭한 인간인 척 하시려고 민회에서 지껄여대겠지. 다만 작금의 상대주의로는 결코 제대로 된 미덕을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상대적 윤리관에 따른 행실은 누군가에게는 이득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인간다운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올바르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용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익을 얻고, 다 함께 옳다고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모두가 이롭다고 여기는 미덕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데요?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해답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이성 개념에 있었다. 절대진리이자 만물의 공통분모라는 이성이라면,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인간다움의 표상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이는 곧 공동체의 선(善)과 공동의 이익 증진을 추구하는 행위야말로 인간답다는 의미였다. 비록 소크라테스 본인도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나열할 수는 없었지만, 이성에 비추어 숙고해보고 행동한 끝에 점진적으로 깨달을 수 있으리란 점은 분명히 했다. 따라서 아테네 시민들이 훌륭해지고 싶다면, 쓸데 없이 입씨름이나 하고 앉았을 게 아니라, 각자의 직분과 능력을 다 하여 시민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더불어 살아가는데 기여하라고 촉구했다.

 

미덕론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비관적 관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격이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이성으로 통찰한 인간의 삶이 투쟁의 연속인 게 꼭 애통할 일만은 아니다. 이성은 그 밖에도 진실된 가치를 알려주고, 인간다움에 대해서도 가르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본성이 싸움에 이끌릴 수 밖에 없을지언정, 두려워하거나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정의를 위해 싸우고, 부덕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은 공동체의 선에 부합하는 일인만큼 권장할만 하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본인도 세 번이나 전쟁터에 나선 용사였고, 불의에 목숨 걸고 저항한 위인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미덕에 관한 사색과 실천 정신은 후대 철학계에 계승되어, 도덕과 인간적인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8bc98fcd-9cd9-4a12-bae8-aadd887b4690.jpg

<각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대통령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Володимир Зеленський)와 블라디미르 푸틴(Влади́мир Пу́тин). 꾀죄죄하지만 결열한 눈빛의 젤렌스키와 멀끔하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푸틴의 대비가 인상 깊다>

 

소크라테스 사후에도 아테네는 불의한 전쟁을 멈추지 않다가, 결국 위용을 잃고서 몰락하고 말았다. 그 역사와 철인(哲人)의 당부는 인간다움을 상실한 말로가 어떠한지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한심한 야망 때문에 미덕을 손상시키는 싸움은 한결 같이 일어난다. 이전 세대보다 더욱 공동체의 범위가 확장된 오늘날에, 공리를 무너뜨렸으면서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 인간으로 태어나 짐승의 삶을 택하고야 마는 자가 아직도 활보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행위가 무지의 소치임을 따끔하게 일렀다. 인간적 삶을 안다면 차마 자신을 위태롭게 할 부도덕은 저지를 수 없거든. 또한 부정을 상대로 굳세게 싸워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도 했다. 진실된 정의는 언제나 공동선을 수호하는 가치이며,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이 무지렁이에게 한 수 가르쳐 줄 차례다.

 

다른 글 보러가기

16개의 댓글

2022.09.26
1
@krrr
0
2022.09.26
1
@00원짜리
0
2022.09.26

판타 레이!! 데바림 !!

1
@여왕벌사냥꾼

그러고보면 데바림들은 모든 것이 흐른다는 판타 레이를 격언으로 차용하면서, 미래를 단정 짓거나 본인들의 의사대로 고정하려는 행보를 보이곤 했지요. 어쩌면 데바림 역시 이성이라는 큰 틀을 통해 세상을 관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

0
2022.09.26

정보추 헤라클레이토스 오랜만에 들어보는구만유 ㅋㅋ

1
@령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난해한 사상은 더욱 그를 가까이 하기 어렵게만 만드는 듯합니다. 다른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

1
2022.09.26

평화유지하기위해서는 싸움이 필수인듯

잘보고 갑니다

1
@합격가즈아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전쟁을 경계하며 평화에 힘써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
2022.09.27

변증법 전에도 저런 이해를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라떼는 학교에서 그리스철학 자세히 배워주는 선생님이 없어서(쌤탓아님.. 교과범위가 아니었음) 헤라클레이토스를 이 글보고 처음 알았음 ㄱㅅ

다같이 캡슐에 선꽂고 누워있지 않는 한 완전히 전쟁없는 세상이 오긴 어려울 것 같기는 하지만,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전쟁 데이터가 쌓일만큼 쌓였는데다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의 평균 교육 수준과 정보 접근 기회도 늘어난 만큼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텐데 안타까움...

글재주가 없어서 영양가없는 뻘댓이 횡설수설 길었네요 아무튼 읽을거리 ㅊㅊ

2
@다람쥐귀여워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립과 합일 논리를 선구적인 변증법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저 역시 사람들이 전쟁을 반복하는 게 슬프고 두렵습니다만, 그래도 희망을 품고자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들이 나아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또 하루를 살아야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0
2022.09.27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레프 트로츠키

 

이는 이번 동원령을 보며 생각나기도 하네

1
@선장입수

제국주의자이면서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러디어드 키플링은 일찌기 명예롭게 싸워서 야만스런 유색인종들을 정복하라는 주장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스무 살도 안 된 외아들이 전사하자, 뒤늦게 반전주의자로 돌아섰습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우리가 왜 죽었느냐고 묻거든, 우리 아버지들에게 속아서 이리 되었노라고 전해주오" 라는 추모시가 전쟁의 속성을 간결하게 드러내주는 듯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
2022.10.04
1
@개드립꿀쨈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847 [유머] 웃는 자에게 복이 오는 삶 10 한그르데아이사쯔 8 23 일 전
846 [유머] 부산에서 초보 운전이면 이렇게까지 해야함 8 콧물닦아 5 2024.01.16
845 [유머] 인생 7대 쪽 팔림 15 heyvely 10 2024.01.04
844 [유머] 넷플과 ocn의 차이점 19 콧물닦아 39 2024.01.02
843 [유머] [고전] 이무기와 교장 1 매드마우스 0 2023.12.15
842 [유머] 인스타 팔로워 팔로우 (인스티즈 펌 ! 가관이네) 1 Taetae 0 2023.10.01
841 [유머] 카페가서 여자친구 만드는 법 24 콜라개붕이 11 2023.09.26
840 [유머] 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아이스크림은? 11 베댓전문가 8 2023.09.24
839 [유머] 뜨겁지는 않지만 따가운 불은? 6 알로에맨 4 2023.09.23
838 [유머] 노래 시작하기 전에 들리는 도시는? 3 알로에맨 5 2023.09.22
837 [유머]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이가 몇이게? ㅋㅋ 21 최씨아닌최씨아닌 28 2023.09.04
836 [유머] 여권 3개나 가지고 있는 연예인.jpg 57 상큼한귤탱 34 2023.08.11
835 [유머] 음료수병 뚜껑의 비밀 ㄷㄷ.JPG 15 상큼한귤탱 41 2023.08.10
834 [유머] 기안84의 씨볶음밥 ㄷㄷ 16 상큼한귤탱 21 2023.08.09
833 [유머] 결혼지옥에 나온 역대급 빌런 ㄷ..JPG 43 상큼한귤탱 42 2023.08.09
832 [유머] 라스트 제다이 안 본 눈 삶 35 한그르데아이사쯔 8 2023.08.09
831 [유머] 나루토의 모든 것이 담긴 짤 12 qowlgh 11 2023.05.17
830 [유머] 딱밤 맞고 안울면 5만원에 도전한 잼민이.mp4 9 알라티 4 2023.04.20
829 [유머] 흔한 직장인의 저녁 김비밀 6 2023.03.28
828 [유머] 스포츠카 구매한 남성 xx 사이즈 작을 가능성 높아! 6 해와달의마녀 6 202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