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세 귀족들한테 푸른 피가 흘렀던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OeZ95Gxqt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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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같은 걸 보면 ‘귀족의 푸른 피’ 운운하는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푸른 피를 타고났다는 말은, 은수저 물고 태어났다는 말과 세트로 서양에서 지금도 많이 쓰이는데요, 오늘은 이거의 기원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콩키스타와 푸른 피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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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가 죽은 뒤, 전 세계를 집어삼킬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확장을 거듭하던 이슬람 세력은 마침내 711년,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 해안가에 상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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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여명의 베르베르 족 대군을 이끄는 자의 이름은 타릭tarik. 상륙 지점의 높은 산은 타릭의 이름을 따 제벨 알 타릭 jebel al tariq 으로 불리게 되었고, 지금도 이 곳 해협은 그 이름, 지브롤터로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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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온 침입자들을 격파하기 위해 서고트 왕국의 마지막 임금 로드리고는 군대를 이끌고 돌격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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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살해당해버리고,

 

 

반도의 대부분은 바다 건너온 정복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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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떠나지 못한 기독교도들은 무장을 통제당한 채 개종을 강요당했으며, 개종을 하여도 종교세를 납부하여야만 했고, 이에 반발하는 기독교인은 본보기로 처형당했죠.

 

 

피배한 서고트 군대의 잔당은 울분을 삼키며 북서부 지역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십자깃발 아래 모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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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안개 짙은 산기슭에서 틀어박혀 있는 신세에서 벗어나 정복자들을 몰아내고 빼앗긴 국토를 되찾을 것을 다짐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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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에로의 죽음 계곡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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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492년, 이베리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의 빨간 요새(알함브라)가 카스티야 연합왕국에 의해 함락될때까지 700여년이 넘는 기간동안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 일명 레콩키스타 운동이 벌어집니다.

 

 

무슬림들이 무함마드의 이름을 외치며 지하드를 시작하고, 기독교도들은 산티아고의 이름을 외치며 십자군을 선포하는 등 계속해서 서로에 대한 성전에 성전을 거듭했지만,

 

수백년의 동거 생활동안 그들의 피도, 문화도 점차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정복자들과 피정복자들,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서로 뒤섞여 구별이 가지 않게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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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을 이끌던 무장 귀족들, 일명 이달고들은 이교도들과 그네들을 구별해주는 핵심적 요소가 조상 대대로 그 순수성을 지켜온 고귀한 피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옛 서고트 왕국 귀족들의 ‘푸른 피 sangre azul 을 계승했기에, 햇빛을 받으면 창백한 피부에 푸른 정맥이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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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푸른 피에 대한 집착은 육체노동을 경멸하고 무용을 숭상하는 기질과 함께 사회 전반에 퍼졌고,

 

귀족들이 실내생활과 모자를 통해 창백한 피부와 푸른 정맥을 과시하는 한편, 자연스레 인종적으로 짙은 피부를 가진 이슬람교도 무어인들은 물론이고, 

 

뙤약볕에서 일하는 하층민들 또한 햇볕에 탄 짙은 피부색을 가질수 밖에 없었기에 비천한 혈통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푸른 피에 대한 개념은 점차 스페인 밖으로 퍼져, 

 

유럽 여러 나라에도 수출되어서, blue blood란 영어 표현은 19세기 때부터 나타납니다. 

 

 

여담인데 백마탄 왕자님도 스페인에선 푸른 왕자Príncipe azul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렇듯, 피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은 먼 훗날 유대인 박해와 종교재판, 그리고 스페인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피의 순수령과 유대인 박해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마태복음 27:25

 

“우리 아버지는 농사꾼이기는 하지만 남부끄러운 피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평범한 평민으로 또한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신물이 나도록 오랜 기독교도랍니다.”

돈키호테 1권 28장

 

 

이베리아 반도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아주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습니다. 

 

2세기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 때부터 스페인에 살기 시작하던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믿던 서고트 왕국 시절때부터 극심한 탄압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반가운 무슬림 정복자들이 들이닥쳤고, 정복자들을 향해 성문을 열어가며

(일부 유대인들은 무슬림들에게 기독교 도시 내부의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고함) 

 

 

환영했던 유대인들을 무슬림 정복자들 또한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들’로 여겨 후대해줬고, 

 

 

여전히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해외의 유대인들로 하여금 쉽게 이민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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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탈레반 삘나는) 알모라비드와 알모하데 족의 침략 이후, 이슬람교도를 제외한 모든 이교도들에게 매우 엄격한 정통신앙이 강요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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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대인들은 다시금 추방자 신세가 되어 이베리아의 여러 기독교 왕국 게토를 전전하며 기독교 군주들의 아량에 기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기독교도들은 돌아온 탕아들을 경멸했습니다.

 

부자이자, 신에게 천벌받을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며, 이슬람 세력에 나라팔아먹은 매국노들, 마름 노릇하던 앞잡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린 더러운 핏줄.

 

그것이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무시무시한 흑사병과 기근이 들이닥쳤고, 

 

결국 1391년, 세비야에서 광기가 폭주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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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결국 이와같은 전례없는 재난에 무릎을 꿇고는, 옛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대거 개종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콘베르소converso, 개종자들이 됩니다. 

 

이후 수십년간, 이들은 매우 빠르게 기존 기독교 사회에 융화되었고, 일부는 성직에 진출하거나 귀족사회에 편입되는 등, 핵심세력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음에도,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기존의 신분질서를 이들이 위협하고 있었기에) 구기독교도들은 신기독교도 유대인 혐오를 멈추지 않습니다. 신앙에 앞서 피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새롭고도 오래된 논리였습니다. 

 

 

피는 시각적으로도, 후각적으로도 구기독교와 신기독교도를 갈라놓기에 유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러운 피를 가지고 있기에 피부색이 거무튀튀하며, 악취를 풍긴다"고 여겨졌고, 

 

원래 이러한 악취는 세례를 받으면 기적적으로 제거되어야 했으나, 어쩐일인지 세례 후의 콘베르소들한테서도 이러한 악취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기독교도들은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생물학적 열등함'을 제거하기 위해, 즉 피의 순수성(limpieza de sangre)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은 사회에서 배제되어야하는 자들이 되었고,

 

이후 유대인들은 돼지(marrano)나 말(alboraique)로 불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의 눈을 가졌으나 말의 얼굴을 지닌, 인간이되 인간아닌 존재들.

 

전형적인 '비인간화' 현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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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개종자로 지목된 유대인들이 매일같이 화형주에 내걸리자 유대인들은 절규했습니다.

 

어느 유대인은 국왕에게 읍소하며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자신은 돼지구이를 즐겨먹고 (유대 율법상 돼지고기는 금지) 언제나 십자가를 그으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데, 부디 화형의 행렬을 거룩한 크리스마스 시기까지만이라도 멈추어 주실수는 없겠느냐고.

 

 

 

유대인 숫자가 제일 적었던 바스크 지방에서 마녀사냥이 가장 극성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마녀들은 사냥당해야만 하는 공동체의 희생양적 존재들이었고, 스페인에선 그 자리에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일종의 마녀 대체품이었던겁니다. 

 

 

스페인에서의 피에 대한 집착은 계속해서 강해져, 일반 대중들도 “이달고 혈통을 타고나는 것보다 불순한 피를 타고나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여길 정도였고, 

 

 

상술했듯 귀족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흰 피부와 푸른 혈통을 자랑했습니다.

 

 

마침내 1449년 톨레도 시의회에서 유대인 조상을 둔 사람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엄금하는 법령을 반포하며, 인종차별은 법제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른바 피의 순수령(estatutos de limpieza de sangre)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콘베르소 들이 거짓 개종자든 아니든, 다시 말해 그들끼리 몰래 옛 유대교 가르침을 따르든 말든, 그런것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러움은 믿음이 아니라 피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으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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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492년, 마지막 무어인의 왕국이 멸망한 해에,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부부왕은 알함브라 칙령을 선포하여 유대인들을 아예 대대적으로 추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제국의 중추를 떠맡고 있었습니다. 세금을 걷는 자이자, 은행가였고, 상인이자 외과의사였으며, 왕실의 재정담당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각 도시의 은행들은 줄줄이 파산했고, 행정업무는 마비되었습니다.

 

새롭게 팽창할 스페인 제국엔 짙은 암운이 드리웠습니다.

 

콜럼버스가 신세계에 발을 들인 해였습니다.

 

 

(끝)

 

 

 

생각하고 있는 다음 주제들인데 특별히 알고싶으신 주제 있으시면 짚어주세요.

1. 옛날 중국엔 코끼리와 코뿔소와 독있는 새가 살았다고?

2. 오싹오싹 상나라의 인신공양을 알아보자

3. 만주국과 만철과 만주 웨스턴에 대해 알아보자 등등등 

(추천주제도 받습니다)

 

 

 

 

참고문헌

서영건. (2010). 중세 말 스페인의 콘베르소 문제와 ‘피의 순수성’ 법령의 제정. 지중해지역연구

존 H. 엘리어트, 김원중 옮김,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까치글방, 2000).

카를로스 푸엔테스, 서성철 옮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까치글방, 1997).

 

 

 

 

 

*이미 유튜브 영상으로 만든 글이니까 렉카해가지 말아주세요 

11개의 댓글

2021.12.23

오 소설보면서 궁금했는데 유익했음

구독하고싶은데 유튜브 채널어딘지 말하면 홍보로 잡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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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3
@말잘듣는도구

홍보하면 욕먹겠지 한번 잘 찾아보쇼잉~

0
2021.12.23
@냐차니니

티스토리 불편해서 못찾겠다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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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3

투구게처럼 파란색 피 흘러서 연구에 활용하려고 레볼루숑 핑계로 다 잡아들인줄 알았는데 아녔네;;

0
2021.12.23

이집트의 상고시대 역사!!!

 

너어무 오래되서 그때서부터 지금까지보다 그때서부터 처음까지가 더 길다는 이집트 초기왕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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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3

진실은 넷플릭스 드라마 라 레볼루시옹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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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구드류 슈리히의 피의 문화사에서도 요 얘기가 언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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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또 대인이야?!

0
2021.12.24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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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훌늉해욧!

0
2021.12.24

고대지중해의 바다민족 이야기 해줘잉

1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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