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마비노기] 캠프파이어, 어느 모험가의 비망록



-캠프파이어-
Campfire
by 레젠/하프



이 검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잊어버린지 오래다. 지친 팔로 겨우 검을 거두었을 때 멀리서 작은 노래 소리가 들렸다. 

"지는 석양에 사랑을 더하고, 뜨는 아침 해로 인생을 보았어요. 꿈을 쫒는 사람에게 쉴 곳은 없는데, 무엇을 원해서 방황하나요?" 

일행이 아니어도 불문율처럼 모여든다. 거리낌없이, 자연스럽게. 모르는 사람과 앞뒤 사정 설명 없이 마주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보잘 것 없이 작은 모닥불의 온기와, 모여든 몇 명의 체온으로 더 따뜻한 밤이 된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온기는 나누어, 푹신한 침대가 아닌 곳에서도 휴식을 얻는다. 어색하지만 따스하게 나누어주는 빵 조각에 작게 미소 짓고, 말없이 내미는 치료의 손길에 비로소 또 하나의 인연을 만든다. 

"부쩍 해가 짧아졌군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긴 흑발을 목덜미에서 느슨히 묶은 예쁜 아가씨가 나뭇가지를 불 속에 던져 넣으며 동년배로 보이는 긴 검을 둘러멘 청년에게 말을 건넸다. 가장 쉽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화제는 언제나 날씨와 계절에 대한 것이다.

"예..."
"어디로 가시나요?"
"..."
"고향을 떠난지는?"
"반 년 쯤..."
"두고 온 여자라도 있나봐요?"
"아, 아니, 뭐... 하하하."

붙임성이 좋은 이 아가씨는 마법사다. 손가락을 튕겨 작은 불덩이를 더 일으켜 띄운다. 따뜻함을 더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언제 저 풀숲에서 늑대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호르르, 흰 입김을 내쉬며 그녀는 무릎을 그러모았다. 그녀는 밤이 좋았다. 마나의 흐름을 익힌 마법사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은 그저 단순하게 올빼미 형인지도 모른다. 이웨카는 어떻게 마나의 흐름을 만드는 것일까. 그녀는 언제나 궁금했다. 

"이웨카는 뭘로 만들어졌을까? 마나 허브? 파란 포션? 이웨카 전체에 스마트 스크롤이 인챈트 되어있는 건 아닐까?"
"보통 여자애들은 바다나 토끼가 있을까 궁금해 하지 않나."
"달은 그냥 하늘에 떠 있는 돌일 뿐이야. 게다가 말야, 있더라도 쥐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왜 꼭 토끼지?"
"삭막하긴... 너한테 달은 그냥 '충전기'지?" 

그렇게 마나가 넘치는 밤에는 그에게서 마법을 배웠다. 새 주문을 익히는 배움의 기쁨에 작은 설레임이 몰래 더해져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희미한 달빛에 글자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선명히 읽을 수 있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사랑의 고백이 아닌데도, 낮게 주문을 읊는 목소리에 괜시리 얼굴이 붉어져 어두운 밤인 것에 감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웨카가 밝던 어느 날 밤, 그는 그렇게 '달의 바다'로 떠나 버렸지. 어느 옛 이야기처럼. 

아 - 이런 생각은 이제 안 하기로 했는데.
괜시리 가슴께의 리본을 만지작거린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어린아이 같은 옷을 입고 있냐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커다란 리본에 짧은 플리츠 스커트, 언더 니 삭스. 안 어울릴만도 하다. 사실 단정한 수트 같은 것을 입어야 할 나이가 아닌가. 단순히 이 귀여운 옷을 입고 싶어 마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하면, 지금 이 시간에도 머리를 싸매고 코피 흘려가며 주문을 익히고 있을 마법사들에게 미안한 일이 되겠지. 그녀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하지만, 여자란 그런 거야. 그리고 이제는 어울리지 않는 이 낡은 옷을 벗지 못하는 것 역시... 여자이기 때문이지. 

"왜... 웃습니까?"
"예? 아 - 아뇨, 그냥 잠깐..."

"마법사들은 정신세계가 특이하다더니 정말이네, 언니."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를 날려버린 것은 맑은 목소리였다. 막 따온 듯한 나무 열매를 한아름 품에 안은 작은 소녀가 다가왔다.

"요 꼬마가, 혼날래?"
"에헤헤헤 - 언니 옷 예쁘다. 정신세계가 좀 이상해도 예쁘니까 봐주지, 뭐."

소녀는 나무 열매를 와르르 쏟아놓으며 마법사 아가씨의 옆에 주저앉았다. 아이 특유의 발랄함에 순식간에 분위기는 바뀌었고, 그녀는 다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은 시큼한 열매의 향기에 약간의 그리움을 느끼면서.

"자, 선물."
"교복...?"
"더 깊은 내용은 학교에서 배우는 게 좋을 거야."
"왜? 이제 안 가르쳐 주는 거야...?"
"달에는 바다가 있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후후후..."
"언니... 정말 이상하네..."

마법사 아가씨의 뜻 모를 미소와 윤기나는 긴 머리칼을 바라보며 청년은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친구를 생각했다. 그녀도 저렇게 까맣게 빛나는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먼 훗날 티르 나 노이를 강림시킨 어느 용사의 전설이 만들어진다면, 그 이야기에 대사 하나 둘 뿐인 단역으로 등장하는 '마을아가씨A'가 되고 싶다'던 희한한 소녀. 모두가 쉴새없이 달리려 애를 쓰는 이 시대에, 한 곳에 멈춰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싶다던 그녀는, 지금쯤 고향에서 어떤 하늘을 보고 있을까. 같은 별을 세고 같은 달빛을 받으며 주고 받았던 이야기는 이제 먼 추억이 되어 버렸다. 나는 달리고, 그녀는 서 있다.

"그 아가씨, 나만큼 예쁜가요?"
"예에?"

넋을 놓고 마법사 아가씨를 바라보던 청년은 그제사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쿡쿡 웃었다.
"이봐요, 거 아가씨가 미인이긴 한데, 너무 자신있는 거 아니오?"
"아하, 그랬나요?"

껄껄 웃는 중년의 남자. 연륜있어 보이는 레인저다. 정성스레 손질하던 석궁을 옆으로 비껴놓고 작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는 점잖게 말했다.

"모름지기 미인이란 말이 없는 법이지. 그렇잖은가, 청년?"
"아, 예. 하하하."
"그래서, 어떤가? 자네 연인은 저 아가씨만큼 미인인가?"
"예, 예에...?"
"와, 아저씨 최고 - "

수줍음이 많은 듯 청년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타오르고 있는 불꽃만큼 붉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만큼 붉은 얼굴을 하고서 청년은 '저 아가씨만큼의 미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향의 소녀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말은 꼭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 그녀는 그 눈으로 말했고, 그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는 내 손길로 대답을 들었고, 우리는 헤어졌지.

그녀의 바람을 알기에 함께 가자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달리는 자들의 모습을 살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것이 자신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너무나 커다란 자만이다.

"이 오빠 얼굴 빨개진 거 봐."
"자네는 아직 너무 젊군."
"예?"

깊은 생각에 젖어있던 청년은 중년 사내의 갑작스런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사내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은빛 갑옷 번쩍이는 기사가 되고 싶은가? 강인한 눈매와 짧은 브레이드가 포인트인 미남 기사님이? 그러지 않으면 그 처녀는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표정이군. 오... 좋지, 좋아. 번쩍이는 갑옷을 걸치고 붉은 망토를 뒤로 늘어뜨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마이 페어 레이디 - 당신을 위해 세계를 구하고 돌아왔소', 이것이야말로 용사님의 로맨스. 허허."

일부러 극적인 어조를 곁들인 사내의 이야기에 청년은 얼굴을 더 붉혔고, 소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여자들이란 다들 그런 이야기를 꿈꾸는 법이지만, 하며 사내는 이야기를 짧게 끝냈다.

"죽지나 말게."

진실한 말은 단호하고, 짧고, 차갑다.

"그게 그 처녀의 소망일세. ...그나저나, 날이 춥구먼."
"불을 좀 더 피울까요? 어디보자, 나무가..."
"나 키트 있어, 언니."
"요 꼬마 제법인데?"

지나가는 농담이었다는 듯이 은근히 끝내버린 이야기는 새 모닥불의 분주함 속으로 사라진다. 청년은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다시 한 번 그녀를 떠올렸다.

근사한 기사님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쯤은, 사실은 알고 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은 나일 거라는 것도.

"조심해서... 잘 다녀와."
"...미안."

타닥타닥, 온기를 더해 높아지는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에 맞춰 꼬마는 류트를 꺼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얼굴 빨간 오빠에게 한 곡, 이라고 윙크를 날리 것을 잊지 않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그대의 목소리 들을 수 있게

내 귀는 그대 소식 전해주는
서풍에 열려 있으니
작은 목소리라도
내 이름을 불러주오

지금이 이 현실이
깨어나지 않는 꿈이라 해도
당신과 함께 있는 현실이
이 꿈 저 편에 있다면
나 기꺼이 꿈에서 깨어나
그대 곁으로 가리다
이 캠프의 불꽃이 사그라들면

이 캠프의 불꽃이 사그라들면...


손가락이 짧아 류트의 현에 채 닿지 않아 나는 불협화음 쯤은 귀엽고 맑은 목소리로 용서해줄 수 있을 듯 하다. 짝짝짝. 중년의 사내는 다시 한 번 껄껄 웃으며 박수를 쳤다. 꼬마는 장난스럽게 옷자락 한 쪽 끝을 들어올려 우아하게 인사하고는 생긋 웃었다. 그 천진난만함에 사내는 고향에 두고 온 딸을 생각했다. 가장 최근 집을 들렀을 무렵 한창 말을 배우던 아이의 모습이 겹쳐져 사내는 흐뭇하게 웃었다. 무작정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슬퍼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오랜 모험과 그리움이 겹겹이 쌓인 그의 인생에서 얻은 교훈이다.

이 청년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젊음의 치기에 허덕이고 있던 철없는 자신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은 -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옛 동료.

"여신을 알고 있습니까?"
"예...?"

그 사람에게서는 물질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잔뜩 배웠다. 이 세계의 여신을 바르게 믿는 법, 올바르게 사랑하며 올바른 모험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법까지. ...그리고 너무나 무거운 책임을 떠맡았다. 남겨진 인연과 마음, 그리고 함께 꾸었던 꿈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 되었고 커다란 가르침은 무거운 그리움과 같은 크기가 되고 말았다. 배운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올바른 사랑을 알게 되기까지 힘겹고 긴 시간을 보냈다. 결국, 시간이 흘러 상처입는 만큼 경험을 쌓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 고 겨우 깨달았을 때 끝없이 무겁기만 했던 책임감은 바른 사랑이 되었고, 어느덧 딸의 웃음에 어쩔 줄 몰라하는 팔불출 아버지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늘 가족을 두고 정처없이 나돌아다니는 나쁜 아버지가 되고 말았지만.

"아빠, 다녀오쪠요."
"어이구, 우리 딸 - 뭐 사다 줄까?"
"류트! 나도 옆집 언니처럼 노래배우고 싶어!"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의 목표는 단 하나.
지켜야 할 것이 생긴 자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사내는 웃으며 소녀의 벗어놓은 모자 속에 금화를 하나 던져 넣었다. 딸에게 사다 줄 류트는 저 소녀처럼 푸른색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훌륭한 바드의 노래를 들었으면 사례를 해야지."
"우와 - 고마워요, 아저씨."
"아니, 난 정신 세계가 특이해서 그런가 별로 좋은지 모르겠네."
"언니!"
"아하하하."
"잘 들었어요."

중년의 사내가 건네준 한 닢의 금화를 손에 쥔 채로 깔깔 웃는 그녀는 아직 한참 어린 소녀다. 두 손에 쥐면 쏙 들어오지 않을까 싶을만큼 작은 소녀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당돌하다. 

"그건 그렇고, 꼬마는 왜 맨발이니?"
"가난해서요."

소녀는 장난스레 대답했다. 홀로 에린을 걷기에는 너무나 작은 몸집을 한 소녀는 옷은 제대로 갖춰입고 머리에는 세모진 작은 두건도 둘렀음에도 발만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그냥 맨발이었다. 희고 작은 발.

"우리 꼬마 아가씨, 혹시 숲에서 몰래 나온 임프 아니신가? 꼭 요정 같구먼."
"와아, 그래보여요?"
"똑같네 똑같아, 조그맣고 버릇없고 - "
"언니는 정신세계가 이상한 마법사라 내 매력을 모르는 거야."
"아하하하하."


아무 것도 신지 않은 흰 발. 소녀는 다리를 조금 움직여 불을 가까이 쬐었다. 따뜻했다. 신발을 신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할 여러가지 것들을 알 수 있다고, 소녀는 속으로 대답했다. 조금 추운 것과 아픈 것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꼬마 혼자 힘들지 않아?"
"엄마가... 이 에린에는 평생 모아도 못 모을 만큼의 행복이 넘치도록 있댔어. 그러니까... 혼자라도 힘들지 않을 거라고..."
"..."
"에이, 아저씨가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엄마 말대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고, 나는 행복해. 발로 밟는 것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을만큼."
"...그렇구나. 그래도 혼자 맨발로 걷기엔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난 어린 게 아니라 작을 뿐이야, 아저씨."
"아하하, 그렇구나..."

소녀는 '얼굴 빨간 오빠'와 조금 닮은 것도 같은 소녀의 친구를 떠올렸다. 홀로 이 세계로 뛰어들어 처음으로 만났던 친구. 키가 훤칠하고 늘 수수한 긴 로브를 입고 있던 청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녀의 이야기에 대신 침울해하며 억지로 웃음짓던 그의 표정을 떠올리자 조금 우스워졌다.

"...노래, 불러 줄까?"
"응."

아이의 서투른 허세가 담긴 연주를 잠자코 들으면서 그는, 가만히 웃었었다. 연주를 마치면 꼭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가끔은 안아올려 무등을 태워주었다. 소녀의 발을 쥔 손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커다랗고 따뜻해서 잠이 쏟아지곤 했다. 이 새까만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버렸으면 좋겠다 - 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높아, 이 사람은 키가 크니까. 별이 보이지 않냐며 그는 말했고, 팔라라가 이렇게 뜨거운데 무슨 별이냐며 소녀는 핀잔을 주었다. 그런 때의 하늘은 아름다웠고, 그는 조금 슬퍼보였다. 이 사람은, 나를 대신해서 슬픔을 느끼고 있는 거라고 알 수 있었다.

맨발 끝으로 여과없이 느껴지는 에린의 행복은 발에 채일 만큼 많았고, 소녀는 걸으면 걸을 수록 여신의 사랑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축복을 깨달을 수록 점점 더 지울 수 없게 되는 것은, 이 행복한 에린을 차마 다 밟아보지 못한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이 세상은 너무나 행복하기에 그 그리움에 눈물 흘려서도 안된다는 모순된 서글픔. 잔인한 축복을 너무나 일찍 - 아프게 깨달아버린 맨발의 자신을 대신해서 슬퍼해주었던 그녀의 첫 친구는 그렇게나 멋진 사람이었다. 


"요 꼬마, 갑자기 조용하네?"
"으응? 왜? 으엑, 뭐하는 거야 언니 - "
"잔말말고 입어! 애 주제에 이런 밤에 그렇게 얇게 입으면 감기 걸리니까."
"꼬마 아가씨, 한 곡 더 불러봐요."

억지로 입혀진 밝은 빛의 로브는 꽤 따뜻해서, 마음에 들었다. 
...소녀는 다시 류트를 켜기 시작했다.

"아저씨, 엄마라고 불러도 돼?"
"나 남자인데..."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고 류트의 선율이 깊은 밤하늘로 녹아든다.

난방 설비가 잘 되어있는 아늑한 여관은 아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고 찬 이슬이 내리는 밤, 고작 장작개비 다섯 개로 지펴지는 작디작은 불이지만, 모두 더할나위 없는 온기를 느끼고 나눈다. 작은 빵 조각도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되고, 작은 불씨도 팔라라만큼이나 커다랗게 타오른다. 

붉게 타오르는 그 속에서 꿈을 보았고, 미래를 보았고, 
과거와, 과거의 그리운 이를 보았다.

"인사는 하지 않을 거야."

"달에 갈 수 있을까?"

"다녀오세요!"

"어때? 별이 보이니?"


상상했던 미래와는 다른 현실에 상처입고 과거에의 그리움에 비틀거리며 혼자 걷는 에린의 하늘 아래에서, 모닥불이 있는 밤만큼은 마음을 기댈 곳을 찾을 수 있다. 그리움과 허세를 잠시 내려놓고 여린 마음을 조금쯤 털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 지친 밤의 한 구석을 작은 불로 밝히고, 작게 웅크린 어깨를 서로 기댄 채 소근소근 이야기 소리에 마음을 채우는 시간. 

차가워진 손을 조금 내밀어 불빛에 적시면, 류트의 현과 밤바람의 화음에 귀를 기울이면 - 이 불 맞은 편에 앉은 사람에게, 이 밤만이라면 - 잠시 마음을 맡겨둘 수 있을 것 같다. 

"나만큼 예쁜가요?"

"한 곡 더 불러 봐요."

"용사님이 되고 싶은가?"

"언니... 이상하네."


작디작은 모닥불이지만 지친 마음을 기대기에는 더없이 충분하다. 
같은 온기에 같은 감정을 나누어 같은 꿈을 꾼다. 
캠프 파이어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이웨카가 사라지고 조금은 추운 아침 이슬이 내릴 때 - 푸른 번개의 지저귐이 들려올 때쯤이면,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되고 타인이 되어 돌아선다. 털어버리고 싶었던 무거운 그리움은 짧은 밤 잠시 기대었던 것만으로 다시 소중한 추억이 되고, 달릴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리고 푸른 이웨카 아래 다시 한 번 그 작은 불이 지펴질 때, 하나의 옛 그리움 위에 하나의 새 추억을 쌓아 올릴 것이다. 그리움에 추억이 더해질 때 우리는 한 걸음 성장하고, 다시 한 번 인연의 선을 긋는다. 

모닥불에 손을 펼칠 수 있는 밤이 돌아올 때까지, 조금쯤은 - 지쳐도 괜찮다.

"아튼 시미니의 축복이 있기를, 안녕히 - ."



"나 기꺼이 꿈에서 깨어나 그대 곁으로 가리다. 

이 캠프의 불꽃이 사그라들면..."

- fin -





-어느 모험가의 비망록-
A Memorandum found in Dungeon
by 얀토

서문

나는 라비 던전이 왠지 마음에 든다. 
던바튼에서 가까운 데다가, 내부의 분위기도 다른 던전과는 좀 다르달까. 써놓고 보니 이유치고는 참으로 빈약하지만, 어차피 던전이라는 곳이 사람들의 모험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장소이고 보면, 라비 던전에는 다른 던전에는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닌 모양인지, 이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곳에 먼저 들어왔던 사람들이 떨어뜨리고 간 잡동사니를 다른 던전에서보다도 더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몇 개월 전에는 던전의 각 방을 조사하던 도중에 여행자들이 흔히 들고다니는 조그만 여행수첩 하나를 거미줄 가득한 구석에서 주웠다. 그것은 놀랍게도 꽤 오래 전에 이 장소에 들어온 사람이 남긴 듯한 기록이었는데, 역시나 라비 던전을 탐험하는 과정이 적혀져 있었다. 내가 그리하였듯이 그 기록의 첫머리는 어떤 책을 줍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었지만, 여기저기 낡고 축축해 보관상태가 좋다고 할 수 없는 수첩인데다, 침침한 던전 안은 책을 읽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어서, 일단은 그냥 짐 사이에 넣어두고 집에 돌아와서야 그 수첩을 마저 읽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 수첩을 읽어본 가장 주요한 감상은 커다란 충격과 뭐라 이야기할 수 없는 전율의 감정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생각했다. 이 기록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나 혼자서만 알고, 가지고 있는 것이 옳은 길일까... 하지만 어느날, 나는 그 기록이 가지고 있는 문헌적인 가치에도 생각이 미쳤고 결국 이 기록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려 이렇게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어법과 다르게 쓰인 문장 같은 것을 사소하게 손보는 것을 제외하고 나는 원래의 기록에 어떤 변형도 가하지 않을 생각으로 나는 이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기록을 책으로 옮기는 과정은 처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첩을 바로 책으로 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만큼, 필사를 통해 수첩의 내용을 옮기는 과정에서 원전이 가지고 있는 모험의 흔적들 - 수첩 자체에 묻은 얼룩이나 글씨체의 미세한 흔들림 같은 것 - 을 미처 반영할 수 없었다는 점은 수없이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고, 책이 다 만들어진 지금은 이런 점이 이 기록에 깊게 배인 모험가의 정신과 공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모쪼록 현세에 부활한 이 기록을 읽는 이들에게 모리안의 축복이 같이 하기를... 

-알반 에일레르 3일. 얀토







던전에서 발견된 여행수첩

(단정하고 멋을 부린 글씨체로)

인생은 한방이다. 아까 관청 앞에서 만난 아가씨는 이런 내 말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세상 사는 법에 대해 뭘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반응을 보이는 거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그래 봐야 결국 인생은 한방이다. 잘 사는 놈은 계속 잘 살게 마련이고, 못 사는 놈은 계속 못 살기 마련이다. 나무하는 놈은 언제나 나무하기 마련이고, 양털깎는 놈은 언제나 양털만 깎는다. 애인 있는 놈은 주변에도 미녀들이 득실거리고, 애인 없는 놈은 언제나 혼자다. 이런 굳어진 질서를 깨는 것은 개인의 실력과 노력이라기보다는 운이다. 운이 앞에 왔을 때 놓치지 않는 안목이다. 그게 바로 한방이란 거다. 

며칠 전 팔라라가 뉘엿뉘엿 질 무렵, 책을 한 권 주웠다. 마른 진흙 속에 파묻혀서인지 먼지가 켜켜이 앉아 표지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자칫 하면 그냥 넘어갈 뻔한 그 책의 제목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놀랍게도 아직 뜯지 않은 인장이 걸려 있었다. 

인장... 그것은 이 책이 담고 있는 마법적인 기운이 아직 흘러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기와는 달리 꽤 값나가는 물건이라는 얘긴데, 이런 물건이라면 새끈한 옷으로 쫙 빼입고도 식당에 가서 제법 거드름을 피워가며 고급 음식을 배불리 먹고 팁까지 줄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나온다. 

이런 책을 줍는다는 것은 정말 하늘에 별을 따는 것 만큼이나 운이 좋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래서 인생은 한방이란 거다. 

하지만 표지의 상태가 너무 심각한데다, 솔직히 내 옷차림은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 치고는 남루했고, 이 물건이 만에 하나 장물이나 분실물일 경우에는 나중에 이 도시에 다시 와 물건을 사고 파는 데 애로사항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던바튼의 소문이란 건 사실 부엉이보다도 빠르니까. 

결국, 이 책을 판다는 건 꽤 힘든 일이 될 거라는 판단을 내린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책을 읽는 쪽을 택했다. 비록 이래보여도 나는 스스로 읽고 쓰는 법을 깨우쳤고, 내 지적인 능력에도 웬만큼 자신이 있다. 열 아홉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우칠 정도면 괜찮은 편 아닌가? 

저녁 무렵 나는 누가 보지 않는가 확인한 뒤에 건물 뒤 으슥한 골목 사이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인장을 뜯어내고 탄웬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읽은 책은 파이어볼트 마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솔직히 재미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내용이었지만, 마법의 사용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럭저럭 흥미진진했다. 

그 일은 바로 그 때 일어났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는 순간,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내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마나에 대한 감각인가... 머리 뒤쪽에서 밝은 무언가가 퍼져나가는 느낌, 퍼져나가는 그 빛이 사지를 통해 흘러내려오며 몸에 전율을 일으키는 느낌... 내 몸안에 내재된 마나에 대한 자각과 함께 우주 속의 질서 중에 공명하는 자신을 깨닫는 느낌... 그 순간, 나는 마치 다시 태어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그렇다면 파이어볼트 마법을? 나는 마나를 집중시켜 한 점을 응시했고, 곧 그곳에는 조그만 불꽃이 생겼다. 야호! 

읽을 때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 아니, 표현을 바꾸자 - 기대하지 않았다면 이런 비싼 책의 인장을 함부로 뜯을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만, 솔직히 내가 정말로 이렇게 쉽게 마법을 습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이건 틀림없이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증거다. 나는 의기양양해졌다.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 시골 청년이 자신에게 마법사의 재능을 발견하는 순간의 기쁨...

음, 좀 더 잘 설명해보고는 싶지만, 귀찮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적으련다.

(어제와 비슷한 글씨체로)

어제 저녁 이후로 나는 마법사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한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제 난 더 이상 양털이나 나무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니다. 관청이나 모험가들의 의뢰를 받으며 고가의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귀한 몸이시다. 

게다가 내게 생각 외의 마법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이 재능을 밑천삼아 소중히 키워나가야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다른 마법을 배워야겠지. 

나는 학교에 가서 내게 있는 마법적인 재능을 설명하고, 마법선생에게 내가 한 시간 정도 들여 깨우친 파이어볼트 마법을 시연했건만 안경잡이 선생은 그가 내게 말하는 듣기 좋은 칭찬과는 어울리지 않는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한 표정으로 내게 천문학적인 수업료를 요구했다. 

... 이렇게 되면 책을 읽어서 혼자 공부하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파이어볼트 마법도 어제 이런 식으로 얻었으니까. 다른 마법이라고 이렇게 얻지 못할 이유가 없지. 

근처의 서점을 찾아갔다. 
흥미를 끄는 마법책이 몇 권 있었는데 아까 그 쫌생이 마법선생에게 관심이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서점 아가씨가 만만찮을 만큼 책값을 비싸게 부르길래 좌절했다. 뭔가 잘 안풀리는 느낌이다. 

뭐 어떠랴. 그래도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데. 일단 이걸 사용해서 모험가들을 도와주고 보수를 받으면 마법책 두어 권 살 수 있을만한 돈은 금방 모일 게다. 

뭐, 오늘은 헛걸음을 했지만, 내일은 마을 광장쪽으로 가 보려 한다. 운이 좋다면 마법사를 필요로 하는 파티에 합류할 수도 있겠지.

(글씨가 조금 떨려 있다)

오늘은 어제와는 달리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새로운 친구들도 꽤 많이 만났다. 지금 나는 라비던전 입구에 친구들과 함께 캠핑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친구들은 던바튼 광장에서 파티를 모집하고 있던 모험가들인데, 다들 꽤 멋진 사람이다. 딱 가니까 벌써 파티 모집 피켓이 이거다. 
'라비 던전 탐험대 대모집! 어차피 인생은 한방. 인생역전에 뜻을 둔 용사 모십니다.' 
후후... 뭔가 아는 사람들이라니까. 

일단 가서 나는 파티에 마법사가 필요하지 않은지 리더격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브로드소드를 옆에 차고 있는 검은 피부의 근육질 전사였는데, 제법 눈매가 부리부리한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험한 세파에 단련된 듯한 인상이었다. 

그는 남루해 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 잠깐 인상을 찌푸렸지만, 내가 대답 대신 파이어볼트를 만들어보이자 삼색 로브를 입고 있는 주근깨투성이의 비쩍 마른 청년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돌렸다. 아이몬이라는 이름의 그 청년은 잠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내가 만든 불꽃을 보더니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것으로 된 거였다. 바로 나는 일행을 소개받았다. 

일단 말수 적은 리더의 이름은 럴. 세계를 모험하는 30대 초반의 남자인데, 반호르의 주점에서 만난 아이몬으로부터 라비 던전에 있는 보물의 이야기를 듣고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꼭 필요한 방어구에 짐도 간략한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구애되는 걸 싫어하는 실용적인 성격인 사람으로 보였다. 

아이몬은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마법사로, 어눌한 말투에 여유있는 행동에서 엿볼 수 있듯이 꽤 마법 사용에 능통한 사람 같았는데 (그러니까 내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거라 생각한다)굳이 단점을 골라내라면 로브가 좀 답답해보였다. 

타마라라고 하는 이름의 나보다 두어 살 더 먹었음직한 바드도 있었다. 꽤 높은 수준의 응급치료 스킬을 갖추고 있는 그녀는 럴의 여자친구처럼 보였는데, 딱 좋을 나이임에도 정작 몸매가 빈약해서 내 타입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다리만큼은 사슴의 그것처럼 쭉 뻗은 데다 옆구리가 터진 치마를 입고 있어 잠깐씩 일행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지만. 

그녀가 비상시 사용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잠깐 비우자 조금 후 펑퍼짐한 남자가 클럽을 들고 합류했다. 자신을 월레스라고 한 30대 초반의 이 남자는 두터운 목에 꽉 끼는 토크를 걸고 있었는데, 덩어리 같은 외모임에도 힘만은 좋아 보였다. 

이것으로 파티의 인원은 다섯 명. 우리는 이대로 라비 던전에 들어가기로 했다. 

타마라가 달걀을 통에 하나 가득 구해오는 동안, 우리는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좀 사고 해질녘이 되어서야 던바튼을 나왔다. 라비 던전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고, 우리는 그 앞에서 노숙하기로 했다. 

... 그래서 지금은 준비해 온 장작으로 불을 피운 뒤 간단히 요기를 하고, 타마라의 노래를 듣고 있는 중이다. 타마라, 악기는 잘 타는 거 같은데 고음에서 목소리가 갈라지네. 

요 며칠 사이에 나는 큰 변화

(삐뚤삐뚤한 글씨로)

후후후 역시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아이몬

(제법 장식적인 조그만 글씨체로)

아 이런 걸 기록이라고 썼냐
진짜 재미없다. 
-타마라

(글씨체가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다)

어제 기록을 쓰다가 잠깐 존 모양이다. 많이 돌아다녀서인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던 거 같다. 

오늘은 던전 탐험의 첫 날. 긴장과 스릴의 연속이다. 돈도 좀 모았다. 이렇게 한 일주일 정도 있으면 그 비싼 마법책도 한 권 정도 더 살 수 있을 거 같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적어야 할 거 같다. 라비 던전의 입구로 내려가자 대리석 같은 것으로 된 거대한 여신상이 보였다. 

근처의 제단에 물건을 바치기 위해서 럴이 다가가 여신상을 쓰다듬었다. 그는 그 상이 모리안이라는 전사들을 보호하는 여신의 석상으로, 화강암으로 된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대리석이든 화강암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냐만)

뒤이어 아이몬은 여신상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어떤 아이템을 바치느냐에 따라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원리를 묻고 싶었지만 머리만 아파질 거 같아서 참고, 일단 제단 근처로 다 모여서 올라갔고, 그 다음엔 타마라가 자신이 들고 다닌다는 시집을 제단에 올렸다. 

바깥 광경이 점점 뿌옇게 변하더니 빛 속에 휩싸였고, 그리고 우리 일행이 정신을 차리자 우리는 어둑한 던전의 또 다른 여신상 앞으로 와 있었다. 

습기가 가득하고 눅눅한 냄새가 나는 것이 확실히 기분이 나쁜 장소였다. 바깥에서는 몰랐는데 몸도 으슬으슬 춥다. 원래 땅 속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온도가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월레스는 그런 나를 보고 던전이 처음인지 계속해서 짖궃게 물어보았는데, 동료만 아니었다면 파이어볼트를 날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누구는 처음 던전 들어가던 때가 없는 건가. 날 때부터 던전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면서 거드름은... 

게다가 이 사람은 타마라가 럴의 여자친구라는 걸 알고 꽤나 노골적으로 친절하게 굴었다. 왜 있잖은가. 나이가 훨씬 적은 타마라에게 극존칭을 쓴다던가, 타마라의 짐을 들어주겠다며 자기 가방 속에 타마라의 짐을 아예 다 넣어버린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분명 나중에 파티 분배를 하게 되면 럴에게서 한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수작이겠지. 아마도 아이몬이 슬그머니 내게 눈치를 주지 않았더라면 불쾌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낼 뻔했다. 

좌우간 오후 늦게 우리는 던전 입구를 벗어나 첫 방으로 발을 딛었다. 그곳에서는 우리 일행의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쳤는데, 여기에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섞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몬스터가 근처에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하라는 아이몬의 잔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입구 근처부터 샅샅이 수색했다. 

조금 후 아이몬이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그 중에 오래된 보물상자가 있었다. 럴이 자신의 두터운 칼끝을 이용해서 그것을 열었고, 우리는 그 속이 꽤 되는 금화로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역시나 보물을 보고 껄떡대는 월레스를 보고 얼굴을 찌푸릴 뻔 했지만, 럴의 주도 아래 공평하게 분배를 마치고 저마다 주머니에 금화를 챙겨넣었다. 역시 내가 사람은 잘 보고 파티에 들어온 것 같다. 던전 탐험 초장부터 이런 횡재를 하다니, 그 뒤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보물이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역시 인생은 한 방.

(글씨체가 떨려 있다)

호사다마라던가... 
역시 좋은 일은 계속되지만은 않는 것 같다. 월레스가 심하게 다쳤다. 타마라 말로는 죽을 지도 모른다고 한다. 지금 나는 불침번을 서면서 오늘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몇 시간 전, 우리는 던전의 거대한 방을 하나씩 하나씩 넘으며 전진하고 있던 중이었다. 

월레스가 척후 역할로 일행과 떨어져서 맨 앞에, 그 뒤로 럴을 필두로 하는 본진이 따라가고, 아이몬이 후방을 경계하는 형태로 말이다. 아무도 나올 거 같지 않은 적막한 분위기였지만 우리는 마음을 놓지 않고 주의깊게 경계하면서 이동해나갔다. 

일은 그 때 일어났다. 월레스가 바로 던전의 그 다음 방 - 우리가 지금 자리잡은 이 방의 입구 - 에 발을 딛는 순간, 커다란 박쥐떼들이 마구 튀어나와 그를 덮친 것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 무식해 보이는 클럽을 마구 휘둘렀지만, 박쥐의 수는 너무 많았고, 그는 곧 박쥐떼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둘러 월레스쪽으로 달려갔지만 박쥐들은 생각보다 훨씬 잽쌌다. 이미 놈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져버린 상태였고, 월레스는 전신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타마라가 응급처치를 하려고 했지만 월레스는 타마라의 짐을 다 들은 채로 이동하다 박쥐의 습격을 받았고, 혈투를 벌이는 와중에 붕대를 비롯한 응급처치에 꼭 필요한 물건은 더럽혀졌거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래서는 뭔가 제대로 된 치료를 하기는커녕 목숨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버거운 상황이 되어버린다. 

내가 배운 파이어볼트 마법도, 아이몬이 알고 있는 아이스볼트 마법도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자리에서 불을 피우고 그에게 비상용 포션을 먹이는 길 뿐이었다. 물론 포션은 그의 꺼져가는 생명력을 잠깐 동안 유지시켜 줄 수는 있겠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좀 이른 감이 있긴 했지만, 일단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고작 박쥐 따위에 이렇게 허무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정말로 어이가 없었지만, 앞으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더 강한 몬스터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공포의 감정이 몰려오기도 했다. 

럴은 매 시간마다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세우기로 했다. 일단 나, 타마라, 아이몬, 럴의 순서대로 쉬기로 했다. 하지만 불침번을 서면서 모두의 뒤척거림을 여러 번 느꼈다. 하긴 바로 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법이겠지. 

월레스가 저렇게 부상을 입은 채로 우리와 함께 던전에서 모험을 할 수 있을까? 데리고 간다면 파티에 얼마나 부담이 될까? 아니면 어제 얻은 수확으로만 만족하고, 돌아서 던전에서 나가는 것이 좋을까? 

내게도, 그들에게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물음이었다. 월레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글씨도 심하게 떨려 있고,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악몽과 같은 하루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타마라가 악을 쓰는 소리였다. 흐릿한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려보니 강아지만한 쥐떼들이 몰려나와 우리 일행과 맞싸우고 있었다. 

나도 정신없이 뛰어들어 파이어볼트 마법을 사용했고, 불덩어리에 탄 쥐들은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이놈들은 상당히 영악해서 일단 물어뜯기가 성공해 상대방이 허점을 보이면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덮치는 식으로 공격을 해 왔는데 파이어볼트 마법을 시전하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려서 내 힘으로 이놈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더러 이빨을 드러내고 내게 뛰어드는 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럴이 중간에 막아서서 한꺼번에 놈들을 때려눕혔고, 나는 럴에게 덤비는 쥐를 파이어볼트로 날려보냈다. 

싸움이 끝난 뒤는 난장판이었다. 게다가 월레스의 상처는 더 악화된 것 같았다. 그의 목에 새로 깊게 난 상처는 닦아도 닦아도 금빛 토크를 이내 붉게 물들이곤 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월레스를 제외하고는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난리중에 우리가 가져온 물건이 많이 없어지거나 망가졌다. 특히, 첫 날 나누었던 금화 중 럴의 것이 사라졌고, 남은 식량도 대부분 사라져서 우리를 우울하게 했다. 특히 어제 박쥐 때문에 달걀이 다 깨진 참에 식량이 더 사라졌다는 것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어쩌다 쥐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 싸움이 끝나고 나서 타마라에게 들은 바로는 불침번을 서던 아이몬이 심심해서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바로 옆 방에 있는 유적을 건드렸고, 그 결과 쥐들이 몰려온 것이라고 한다.이 일로 아이몬과 럴이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바로 정리하고 계속 전진했는데, 길은 점점 복잡해졌고, 나중에는 우리가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기도 곤란해졌다. 

던전 탐험 처음의 설레임은 간 데 없고 지금은 피곤함이 몸을 짓누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타마라의 되돌아가자는 의견과, 이대로 모험을 계속하자는 럴과 아이몬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아 잠 좀 자자 제발.

(대강 쓴 글씨체다)

오늘 아침 월레스가 죽었다. 
우리는 근처에서 돌을 모을 수 있는 만큼 모아서 일단 월레스의 시신을 묻었다. 
모두가 착잡한 심정이었다.

(글씨가 크게 망가져 있다)

점점 우리의 모험은 어려워지고 있다. 오늘은 아이몬이 쓰러졌다. 
스켈레톤 울프였다. 말로만 듣던... 

놈들은 던전의 방이 열리는 순간 튀어나왔다. 마치 월레스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박쥐떼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난 번의 경우를 교훈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스볼트와 파이어볼트를 바로 시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상태였고, 스켈레톤 울프가 튀어나올 때마다 럴과 함께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특히 아이몬의 아이스볼트는 공격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놈들이 이런 사실을 눈치챈 것일 지는 모르겠지만, 스켈레톤 울프는 집중적으로 아이몬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결사적으로 아이몬을 보호했다. 하지만 나나 아이몬의 마나는 이미 상당히 줄어 있는 상태였고, 마법을 시전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그가 행낭을 더듬어 마나포션을 꺼내 마시려고 했지만 스켈레톤 울프는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럴과 다른 스켈레톤 울프가 대치하고 있는 틈을 타 다른 녀석이 달려들어 아이몬을 땅바닥에 눌러 쓰러뜨렸고, 그의 목줄기를 마구 물어뜯었다. 
악몽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나는 공포에 짓눌려 마법조차 쓸 수 없었다. 럴이 서둘러 검을 휘둘러 스켈레톤 울프를 박살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나는 덜덜 떠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는데, 오히려 타마라는 냉정하게 아이몬의 짐 중에서 쓸만한 것을 골라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자리를 대강 수습했다. 

우리는 아이몬을 묻어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방을 도망치듯 나오고야 말았다. 
돌아갈 생각은 전혀 나지 않는다. 이런 내 자신이 너무도 우습다. 

월레스가 죽은 이후, 파티의 이동 속도는 확실히 빨라졌지만, 그것이 우리 모험의 안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왜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되돌아갈 수 있다면 되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우리가 너무 깊이 들어온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비교적 반듯한 글씨체로)

피곤하다.
지금 피우고 있는 모닥불로 장작이 떨어졌다. 이제 더 이상 모닥불은 없다. 
먹을 것도 차츰 떨어져가고 있다. 지금 타마라는 우리가 모험을 중지하고 왔던 길을 반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럴에게 설명하고 있다. 럴은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기 때문에 빨리 봉인의 방을 여는 것만이 우리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공간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의견이던지 찬성이다. 

럴은 오늘 팔을 다쳤다. 나 역시 그런 주도면밀한 전사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는 별다른 부주의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보물상자를 칼끝으로 비틀어 열려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칼이 미끄러졌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가 발견한 보물상자가 몬스터였다는 데 있다. 보물상자의 흉내를 내는 몬스터 말이다. 바로 부숴버리긴 했지만 역시 럴의 상처는 의외로 깊었다. 세상 오래 살다보니 별 이상한 몬스터도 다 있다 싶었다. 

하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보물상자가 하나 가득 모여 있는 방이라니 좀 수상하긴 했다. 처음에 우리가 그것을 보았을 때는 비록 많은 희생을 치루긴 했지만 우리가 가지게 되는 보상으로서는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그 생각에 가려 우리의 경계심이 흐트러진 것 같았다. 

타마라는 럴이 돈주머니를 잃어버린 탓에 갑작스럽게 욕심이라도 들었던 모양이라고 타박하고 있다. 그러잖아도 상황 우울한데 여자한테 저런 이야기까지 들으면 성질날텐데도 럴은 별 이야기 없이 잘 참고 있다. 그보다는 상처를 한숨쉬며 만지는 것으로 보아 상자 따위의 모습으로 여행자를 유혹하는 하급 몬스터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훨씬 더 분한 모양이다. 

이제 따뜻한 불과도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파이어볼트를 사용해서 몸을 녹이는 방법에 대해서 궁리중이다.

(제법 단정한 글씨지만 손이 곱은 듯 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몸이 군데군데 굳어 있었다. 장작이 떨어져 불을 끝까지 피우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던전의 냉기가 몸에 박인 탓인지 먹은 것도 잘 소화가 되지 않고 자꾸 몸을 떨게 된다. 

럴의 의견을 따라 봉인이 있는 마지막 방으로 가기로 한 까닭에, 우리의 고단한 여정은 계속되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그 봉인의 방 앞까지 가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거대한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은 커다란 자물쇠와 치렁렁하게 감겨 있는 굵은 쇠사슬. 자물쇠를 열 열쇠 같은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굵은 쇠사슬을 끊어 내는 것은 양 팔이 다 성한 럴이라고 해도 무리처럼 보였다. 

도대체 저 방 안에는 무엇이 있길래 저리도 튼튼한 자물쇠로 봉인을 해 놓은 것일까. 우리가 운이 좋다면 보물이 그 속에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이 나쁘다면 그 안에는 정말 우리가 여지껏 접하지 못했던 무서운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방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위험을 피하기로 결심한다면, 우리가 이 던전을 나가기 위해서는 여태까지 왔던 길을 돌아 나가는 방법 뿐이다.

우리는 먹을 것도, 불을 피울 장작도, 다쳤을 때 치료할 도구도 없는 형편이다.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릴 텐데, 과연 우리는 그런 것 하나 없이 돌아갈 수 있을까. 

고심 끝에 우리는 이 방을 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 방을 열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저 자물쇠에 맞는 열쇠를 과연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파이어볼트 마법은 야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좀 밝아지는 효과가 있긴 했지만. 아마 파이어볼트 마법이 없었더라면 이 어둑한 공간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알아보기 힘든 글씨다)

아아, 너무나도 참담한 심정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쓰는 게 좋을 거 같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확실히 불을 피울 수가 없으니 잠도 더 얕게 자게 되고, 전날의 피로가 그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단은 저 방만 통과하면 다시 팔라라의 빛이 비치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가졌다.
오늘은 그렇게 시작했는데...

남아있는 몇 개 안되는 빵조각을 모두 모아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우리는 일단 저 거대한 봉인을 풀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지만, 우리가 이 던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봉인을 풀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일단 봉인을 풀만한 도구를 찾아보기 위해 여태까지 그냥 지나쳐 왔었던 유적 같은 것을 살펴볼 생각으로 내가 제일 먼저 뒤로 돌아 이전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대여섯, 혹은 그 이상 되어 보이는 한 무리의 스켈레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뼈끼리 부딪히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스켈레톤 무리들이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해골의 눈구멍에서는 인이 타는 듯한 불꽃이 기분나쁘게 빛나고 있었다. 

다행히 타마라와 럴이 곧 달려와주긴 했지만 그래봐야 이쪽은 딱 세 명.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타마라가 활을 쓰긴 했지만 스켈레톤은 잘 맞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리 충격을 받는 거 같지도 않았고, 럴의 칼솜씨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이전보다 확실히 무뎌진 상태였다. 

나의 마나는 때때로 불을 밝히느라고 마법력에만 의존해 전투를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충분한 상태도 아니었다.

우리는 점점 구석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싸워서 이들을 물리치기보다는 파티의 힘을 집중해 포위망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우리는 신호와 함께 스켈레톤이 가장 적은 쪽으로 질풍처럼 달려나갔고, 럴이 길을 뚫고 타마라와 내가 나머지 스켈레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를 엄호해서 포위망을 빠져나오려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다리를 다쳤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군데군데 핏자국이 어린 스켈레톤 하나에 눈길이 간 것은... 떡 벌어진 펑퍼짐한 체격... 짧은 목... 그리고 월레스가 차고 있던 토크... 

우리 셋 모두가 그것을 보았고, 말을 잃었다. 곧 타마라가 스켈레톤 무리에 휩쓸렸고, 럴이 곧장 달려갔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곧 주문을 외워 파이어볼트 마법을 사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스켈레톤이 너무 많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결국 나는 혼자 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방을 나올 때쯤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죽는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파티가 온 길을 되짚어 나가면서 가급적 안전해 보이는 곳을 찾아 지친 몸을 쉬게 했지만 저 질문에 대한 답을 눈 앞에서 똑똑히 본 탓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내가 위험할 때 달려와줬지만, 나는 그들이 위험할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괴롭다. 

스켈레톤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다리를 다친 까닭에 움직이려 할 때마다 통증이 느껴진다. 젠장. 

그러고보니 나는 완전히 빈몸이다. 먹을 것도, 치료할 것도, 아무 것도 없다.

(글씨가 마구 흐트러져 있다)

춥다. 배가 고프다. 며칠 동안 이 속에서 헤멘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이 수첩의 종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파이어볼트 마법을 사용한 불빛도 마나가 다 떨어져가고 있다. 
너무 춥고 온 몸이 으슬으슬하다. 습기와 한기가 뼛속까지 깊이 스며들어와 병을 일으킨 것 같다. 입에서 우물거리고 있던 가죽조각도 이젠 너덜너덜해졌다. 무언가 먹을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 차분해진 글씨지만 떨면서 쓴 흔적이 있다)

열은 좀 내렸다. 하지만 그 일 이후로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써도 오한이 가시지 않는다. 얼마 되지 않는 마나로 파이어볼트 마법을 썼지만 그것도 잠시, 곧 꺼져버리고 말았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주기적으로 마나의 기운이 차오르는 때가 밤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다리가 부어서 걷기 힘들다. 이대로 남아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대안인 것 같다.

(마구 날려서 쓰여진 글씨체다)

무섭다. 내 주위를 둘러싼 어둠이 무섭다.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던전의 몬스터가 무섭다. 그리고 사후의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원망할 럴과 타마라가 무섭다. 

누군가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이 깊은 미궁의 한복판에 과연 우리를 찾아낼 사람이 있을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이 기록만이라도 발견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격리된 세계에서, 내가 저 위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어떤 증거도 없이 죽어간다는 것은 너무도 허무하다. 내가 없더라도 저 위의 세계에서는 나를 찾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너무도 두렵고 무섭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구조되기 힘들다 하더라도, 이후에라도 이 기록만큼만은 발견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 다음에 이 던전에 들어오는 사람이 반복하는 일 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부디 이 기록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는 우리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누군가 이 기록을 발견하게 되면 나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내 소식을 알려주길 바란다. 물론 걱정할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에라. 한방이고 두방이고... 
될대로 되라. 

(이후의 기록 없음. 다음 장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다)

후기

기록은 여기까지다. 아마 이 글을 쓴 사람은 내가 적는 몇 글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절망과 고독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으리라. 
빛나는 모험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족한 준비와 정보, 그리고 다듬어지지 않은 팀웍 때문에 결국 죽음을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을 소개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모쪼록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라비 던전이 아니라 다른 던전이라도 모험의 앞에 준비 대신 젊은이의 객기를 두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모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오래도록 오르내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맺음말을 대신한다.



한줄요약
Campfire.JPG A Memorandum found in Dungeon.JPG
끝!
마비 단편글 모와둔거 있는데 그거까지 올리면 글이 너무 길어질거 같아서 말이야
이제 마비노기 글은 안올릴테니 비추는 안줘도 돼..

1개의 댓글

2013.05.22
아...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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