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마비노기] 노래하는 나무

- 노래하는 나무 -

Song of the tree

by 셀레스티알/만돌린




#00. Prologue


한 여행자가 에린에 첫 발을 디디던 날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이웨카가 보였던 날이었습니다.


티르 코네일의 남서쪽에는 울레이드 벌목캠프가 있었습니다. 그 곳의 주인은 트레이시. 주변은 나무들로 꽉꽉 채워진 숲들의 즐거운 향연. 처음 온 여행자라면 꼭 한 번은 지나 보았을 그 곳. 울레이드 벌목캠프는 던바튼과 티르 코네일을 잇는 길목에 있었답니다. 처음 오는 여행자들이 잠시 기대어 쉬어 갈 수 있는 커다란 나무와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는 캠프장이 있던 곳.


어느 날, 그 곳에 한 소년이 찾아왔습니다. 집도 없고, 가족도 없었던 소년. 소년은 이 곳 울레이드 벌목캠프에서 나무일을 하며 살길 원했어요. 맘씨 좋은 트레이시는 소년이 나무일을 도와 주는 조건으로 허락했답니다. 소년은 그 날부터 낮에는 나무를 하며 이웨카가 뜨면 캠프장에서 잠을 청하는 그런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소년의 이름도, 과거도 묻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나무를 했던 날의 이야기. 하지만 외로웠던 날의 이야기.




#01. 나무를 하던 날의 이야기


금빛 팔라라가 소년의 머리 위로 가득한 빛살을 내뿜던 날이었습니다. 도끼질에 지친 소년이 땀을 훔치던 날이었습니다.


주변의 나무들은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서로 제 각각의 푸른 기색을 빛내고 있습니다.


'후.. 조금만 쉬었다 할까?'


소년의 옷은 이미 땀에 흠뻑 물들어 버렸답니다. 소년은 도끼질을 잠시 멈추고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갑니다. 추수한 곡식 마냥 풍성한 나뭇잎들이 소년에게 그늘을 선물합니다. 나무를 맴도는 매미들의 울음 소리가 한 모금의 물처럼 상쾌합니다. 소년은 그런 풍경 아래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트레이시 아저씨가 소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어, 일은 잘 되가냐?"


소년은 꾸밈없는 미소로 대답했습니다.


"네! 너무 재미있어요."


"...희한한 녀석."


트레이시 아저씨는 나무일이라면 질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옛다, 점심이나 먹어라. 휴, 마을에서 도시락 싸오는 것도 한 두번 이래야지. 매일 같이 이거 정말 귀찮구먼. 안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말이야."


"........"


소년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행복했습니다.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껴보는게 얼마만인지요.


소년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사로운 햇빛이 소년의 등을 간지럽히던 날의 이야기. 나무 그늘이 한없이 넓게만 느껴졌던 날의 이야기.




#02. 캠프파이어의 이야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찬란한 더위가 하늘을 덮던 날이었습니다. 이웨카가 뜨기가 왠지 모르게 기다려지던 날이었습니다.


"어이, 너도 인제 여기서 일한 지 꽤나 됐으니까 캠프파이어 준비 정도는 혼자 할 수 있겠지?"


걸걸한 트레이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트레이시 아저씨는 또 한 무리의 여행자가 묵고 간다는 소식을 받고 무척이나 귀찮았나 봅니다.


"네, 제가 해볼게요."


하지만 소년은 귀찮다는 표정 하나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기쁘게 말합니다. 어쩌면 소년은 새빨간 장작을 태우며 밤이 깊어 가는 소리를 듣는 캠프파이어를 동경해 왔는지도 몰라요. 소년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열심히 나무를 했고, 정성스레 캠프파이어를 준비합니다.


팔라라의 빛이 더욱 강해집니다, 하지만 소년의 콧노래는 소년을 시원하게 감싸줍니다. 이슬을 머금은 새들의 노래도 소년을 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윽고, 팔라라가 지고 이웨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트레이시 아저씨의 말씀대로,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 멀리 오는게 보였습니다. 에린에 온 지 얼마 안 된 분들이 아닐까,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 곳에서, 따뜻한 불꽃의 손길 속에 그보다 더 따뜻한 추억을 새기고 떠날 것입니다.


나무가 빠알갛게 타들어갑니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타는 나무의 냄새가 좋았습니다. 매캐하지만 안기고 싶은 냄새. 기대고 싶은 냄새. 곧 붉은 불꽃이 활활 타오릅니다. 조그만 불똥이 까만 하늘을 무대 삼아 어지럽게 춤을 춥니다. 보고만 있어도 너무나 따뜻한 그들만의 추억.


소년의 마음 속까지도 따뜻함이 스며들었습니다.


잠들 수 없던 날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따뜻했던 날의 이야기.




#03. 반짝임의 이야기


이웨카의 숨소리가 느껴졌던 밤이었습니다. 캠프장을 희미하게 밝히던 횃불이 술렁이던 밤이었습니다.


평소 때의 밤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 주변이 너무 밝아서 잠을 잘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너무나 편안한 느낌. 소년은 막 들었던 잠을 밀쳐 내고 일어났습니다.


'또 캠프파이어를 하나?'


눈을 살며시 뜨자, 정말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작지만 밝은 빛들이었습니다. 천천히, 느릿느릿 깜박이는 빛들의 어지러운 움직임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이웨카의 조각들. 소년의 눈 앞에서 넓게 펼쳐져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반딧불....?"


소년은 잠이 약간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밤이 이렇게도 밝아 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된 탓일까요. 들리지 않는 노랫소리가 소년의 귓가에 메아리 칩니다. 반짝반짝하는 그 느낌만으로도 새롭습니다.


소년은 손을 뻗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손에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소년은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손대면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처럼 너무나 연약하게 보였기 때문일까요. 한동안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행여나 숨소리라도 전해질까 조심조심하며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반짝였습니다. 이 멋진 광경을 다른 누구와 함께 볼 수 없었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면서 말입니다.


반딧불의 빛은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너무나 즐거웠답니다.


유난히 이웨카가 일찍 뜨던 날의 이야기. 하지만 밝았던 날의 이야기.




#04. 처음 만났던 날의 이야기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시원했던 날이었습니다. 하이얀 뭉게구름이 양털처럼 포근했던 날이었습니다.


소년은 평소와 다름 없이 도끼질에 열심이군요. 흘러내리는 땀이 보석처럼 구슬져 내기는 한줄기 반짝임이 되었습니다. 나뭇잎에도 구슬 같은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습니다. 도끼질을 한 번 할 때마다 쏟아지는 물방울들이 소년에게는 소나기보다도 더 시원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장작을 몇 개나 팼을까요. 소년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트레이시 아저씨는 아닐 겁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너무나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소년의 마음마저도 슬퍼질 것만 같았습니다. 소년은 도끼질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년과 비슷한 나이 정도의 소녀였습니다. 소녀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너무나 슬픔에 가득찬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소년은 소녀의 슬픈 눈을 보는 것이 너무나 안쓰러웠습니다. 소녀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망울망울 져서 앞이 흐려질 것만 같았습니다.


"넌, 어디서 왔어?"


소년은 용기내 물었습니다. 소년이 부른 목소리를 듣고, 소녀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소녀가 반응을 보인 건 그 때뿐,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집은 어디야?"


소년은 다시 한 번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어쩌면 이 소녀도 옛날의 자신처럼 외톨이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테지요. 소녀는 잠시간의 침묵을 이었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저었습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소녀는 들고 있던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다시 흔듭니다. 그 모습이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어깨가 가냘프게 들썩거렸습니다. 소년은 그런 소녀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서 슬펐습니다. 그래서 소녀가 이대로 울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딱 한번만이라도 소년은 소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소년이 이 곳에서 찾았던 것처럼, 소녀에게도 살아갈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라 소년은 뒤돌아 달리기 시작합니다. 트레이시 아저씨께로,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소녀도 이 곳에서 일을 하며 이 곳에서 같이 살 수만 있다면. 소년은 소녀가 자신처럼 행복을 되찾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라. 대신 걔는 마을에서 내 도시락 챙겨 갖고 오는 일을 좀 시켰으면 좋겠는데..."


소년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갈 곳 없었던 소녀를 도와 준 것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즐거워했습니다.


그 이후로 소녀는 이 곳, 울레이드 벌목캠프에서 소년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만났던 날의 이야기. 망울진 눈물 너머로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던 날의 이야기.




#05. 나무를 심던 날의 이야기


상쾌한 산들바람이 향긋한 꽃내음을 태우고 거닐던 날이었습니다. 나비가 힘차게 날갯짓하던 날이었습니다.


"어이, 빨리 빨리 하지 않으면 보수는커녕 국물도 없다우."


오랜만에 들어보는 트레이시 아저씨의 고함소리였습니다. 오늘은 일도 많고 일하는 사람도 많은 가봐요. 울레이드 캠프가 아르바이트 생들로 북적입니다.


"나무는 베기만 해서 다가 아니다. 그만큼 나무를 심는 것도 중요한 법."


오늘은 울레이드 벌목캠프의 나무를 심는 날입니다. 많은 아르바이트 생들이 모종을 가지고 나무를 심느라 분주히 오갑니다. 그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욱 후덥지근한 걸요. 물론 그들 중에는 소년이 껴 있었습니다.


"어이, 너에겐 조금 특별한 나무를 줄 테니 네가 열심히 가꾸어 보지 않으련?"


트레이시 아저씨가 소년을 부릅니다. 소년은 기대에 가득 찬 눈망울로 물어 봅니다.


"특별한 나무요? 혹시 열매라도 열리나요?"


트레이시 아저씨는 그건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열매? 글쎄, 열매는 열리는지 안 열리는지 잘 모르겠는걸."


"에이."


소년은 풀죽은 모습으로 실망의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런 소년을 달래듯이 트레이시 아저씨가 다시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나무는 정말로 특별한 나무야. 이건 노래하는 나무란다."


소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습니다.


"나무가 노래를 한다구요? 정말로요?"


"그럼."


하지만 트레이시 아저씨의 손에 들려있는 나무 모종은 아무리 보아도 다른 나무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트레이시 아저씨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왠지 그 나무를 심고 싶어졌습니다. 왠지 그 나무를 좋아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소년은 꽃에 물을 주고 있던 소녀를 불러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얼떨결에 영문도 모르고 소년의 손에 이끌려 온 소녀의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동동 떠있습니다. 소년은 소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습니다.


"이건 우리들의 나무야. 노래하는 나무지."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노래하는 나무라고? 소녀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떠다닙니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향해 미소지었습니다.


"우리, 이 곳에서 이 나무가 자랄 때까지 함께 있자. 그리고 이 나무의 노래를 함께 듣는 거야. 자, 약속."


"......약속."


소녀는 소년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소년과의 약속이 보석만큼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소녀도 미소를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곤 힘차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소년과 소녀는 그 자리에서, 나무와 함께 사랑을 심고 함께 키워 나가길 약속합니다.


나무를 심었던 날의 이야기. 하얗고 작은 새끼손가락 두 개가 이어졌던 날의 이야기.




#06. 이름을 묻던 날의 이야기


상냥한 들꽃이 팔라라의 미소를 닮아가던 날이었습니다. 푸른 잔디가 이웨카의 은은함을 닮아가던 날이었습니다.


나무를 심던 날 이후로, 소년의 마음 속에서 소녀의 존재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소녀가 트레이시 아저씨의 도시락을 가지러 마을로 가서 소년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때면, 소년은 항상 소녀의 생각만 하게 됩니다. 소년은 소녀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소녀가 먹고 싶어하는 음식은 어떤 것인지, 소녀가 좋아하는 동물은 무엇인지 와 같은 지극히 사소한 것들까지도 소년은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가장 중요하면서도 아직까지 물어 볼 수 없었던 것. 만난지 꽤나 지난 지금까지도 한번도 불러 볼 수 없었던 것.


"그 애 이름은...."


소년은 왜 이름 묻는 것을 지금까지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걸까요. 소년은 갑자기 슬퍼졌습니다. 어째서, 어째서 소년은 소녀의 이름을 묻지 못했던 것일까요. 소년은 지금껏 소녀를 부를 때는 항상 '저...' '저기...' 로 불렀음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소년은 오늘에서야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소년은 이런 딱딱한 말 말고 소녀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고 싶었습니다. 소년은 소녀의 이름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저기... 넌 이름이 뭐야?"


지금까지 쭈욱 함께 생활해왔던 소녀에게 하기에는 너무나 어색하고 이상한 질문. 소년은 조금 부끄러운 듯이 소녀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소녀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소녀는 놀란듯이, 아니 마치 그런 사람은 처음 본다는 듯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설마 지금껏 아무도 소녀에게 이름 같은 건 물어본 적 없었던 걸까요. 소녀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없어."


소녀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소녀에게 이름 따위는 붙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녀는 작게 소리내어 울먹입니다. 귀여운 입술이 조금씩 들썩입니다.


".....저기....흑... 네가... 흐흑.. 처음.."


소녀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있어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소년은 소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소녀의 이름을 물어본 건 소년이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울먹이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소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후, 울음이 조금 그친 목소리로 소녀가 묻습니다.


"저기...네.. 이름은...?"


소년은 소녀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녀가 소년의 이름을 물었던 것입니다. 울음 섞인 슬픈 목소리였지만, 소녀는 분명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네 이름은?'


소년 역시 처음으로 들어 보았던 질문. 그리고 여태껏 소녀의 이름을 물어 보지 못했던 이유.




"......없어."






이름을 물어 보았던 날의 이야기. 그리곤 둘 다 말이 없었던 날의 이야기.




#07. 밤을 지새웠던 날의 이야기


머얼리 마을 쪽에서 자장가가 어렴풋이 들려오던 밤이었습니다. 새까만 하늘에 별빛이 물감처럼 물들던 밤이었습니다.


소년은 오랜만에 캠프파이어 세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밤엔 여행자가 온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어찌된 일일까요. 이미 이웨카가 하늘의 가운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각이었습니다. 오늘 도끼질을 많이 하신 트레이시 아저씨의 코고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옵니다.


소년은 낮 동안 준비해 놓았던 장작을 보기 좋게 한 쪽에 쌓아 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나무가 빠알갛게 타들어가는 소리가 듣기 좋았습니다. 이윽고 불길은 활활 타오릅니다. 보기만 해도 너무나 따뜻한 붉음의 물결이 파도칩니다. 소년은 몇 개의 장작을 불길 속에 더 던져 넣었습니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냄새가 좋았습니다.


소녀는 소년이 준비해 둔 캠프파이어 주변에 앉아서 작은 불똥들이 마치 반딧불처럼 날아다니는 모습을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가 들립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불길이 춤을 춥니다. 소년은 소녀의 옆에 앉았습니다. 어색한 듯,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들릴 뿐,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캠프파이어만 바라봅니다.


노래하는 나무.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제 막 새 잎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그들의 바로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 했습니다. 소년은 나뭇잎을 한 장 떼었습니다. 그리곤 그 잎을 솜씨 있게 접기 시작했습니다. 소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소년을 지켜봅니다. 이윽고 소년은 그 잎을 입에다 갖다 대었습니다. 그리곤 눈을 감았습니다.


"삐-삐-삐리삑 --- 삐삐삑삑 - 삐리리 ---"


조금 어설프지만 분명하고도 맑은 외마디 멜로디가 캠프파이어 주변을 은은하게 감싸줍니다. 소녀도 눈을 감고 외마디 선율에 몸을 맡깁니다. 이 순간 만큼은 소년의 풀피리 소리가 아닌 다른 어떤 소리도 소음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그들은 음악의 향기에 젖어 들었습니다.


한참 후, 소녀가 발그스레한 얼굴로 조그맣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름..다웠어... 잘... 부는구나."


소년은 뜻밖의 칭찬에 조금은 쑥스러워 졌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이내 말했습니다.


"이건, 나무의 노래야. 이 나무는 노래하는 나무라고 했잖아. 난 나무가 노래하는 것을 들려줬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습니다. 소년의 마음 속에서 소녀의 존재가 더욱 커져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타닥타닥. 불길은 여전히 활활 타오릅니다. 초록의 잎새들도 단풍처럼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소년은 어쩌면 자신의 마음이 저 불길과도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순간 소녀는 대답 대신 소년의 작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습니다. 소년은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내 소녀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어깨에 닿는 포근하고도 폭신한 감촉. 소년은 조금 부끄러워 졌습니다. 소녀는 소년의 가슴이 콩닥콩닥 작게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밤이 깊어 가는 소리가 머얼리 들려옵니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나무 타는 냄새가 좋았습니다.


나무가 처음으로 노래하던 날의 이야기. 별빛이 쏟아져 소녀의 뺨을 발그스레하게 물들였던 날의 이야기.




#08. 울었던 날의 이야기


평소와는 달리 팔라라의 미소가 보이지 않던 날이었습니다. 어둑어둑한 먹구름만이 하늘을 꾸역꾸역 메우던 날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소녀는 소년과의 약속이 깃든 노래하는 나무 앞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소녀는 멍하니 그 나무만 쳐다보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최근 들어 볼 수 없었던, 아니 보고 싶지 않았던 소녀의 슬픔이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소녀의 달라진 모습을 놓칠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뭐, 고민이라도 있어?"


소녀는 등 뒤에서 들린 소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봅니다. 그 곳에는 가장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흐린 노을을 등지고 서서 미소짓는 소년의 모습은 너무나 포근해서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품에 와락 안겼습니다. 그리고 이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왜,,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소녀의 머리 위에서 소년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역력합니다.


"엄마가... 엄마가...."


소녀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던 데다가 소년의 옷 속에 파묻혀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엄마라니..? 엄마가 왜?"


"엄마가.... 아주 멀리... 멀리.. 갔어... 갔어.."


"........"


소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소녀의 슬픔, 소년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요. 소녀의 울음 소리가 소년의 가슴에 울립니다. 소년은 소녀를 더욱 끌어안았습니다.


소년은 다시금 소녀의 소중한 존재가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소년의 앞에서 울고 있는 소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소년은 울었습니다. 지금 소녀의 슬픔을 덜어 줄 방법이 없었기에, 소년은 함께 슬프기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울어 주었습니다. 매미의 울음 소리도, 찌르레기의 울음 소리도 이보다 슬플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품에 안고 울었습니다.


소녀도, 소년도 울었던 날의 이야기. 울음 소리가 구름까지 닿을 듯 하던 날의 이야기.




#09. 비가 오던 날의 이야기


엊그제 꼈던 먹구름이 부슬부슬 비를 뿌리던 날이었습니다. 캠프파이어 때 타다남은 장작들을 싸늘하게 식히던 날이었습니다.


오늘은 비가 오네요. 이곳에 비가 내린지는 꽤나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빗방울이 제법 거셉니다. 궂은 날씨에도, 소녀는 오늘도 트레이시 아저씨의 도시락을 가지러 마을로 갑니다. 빗방울은 조금씩 굵어져만 갑니다. 노래하는 나무도 빗줄기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잎사귀마다 굵은 빗방울이 뚫을 듯한 기세로 떨어집니다.


얼마 안 가서 비는 '쏴아~'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많이 옵니다. 하늘은 심술궂은 먹구름으로 가득합니다.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도 칩니다. 빗소리가 무척이나 시끄러운데도, 울레이드 벌목 캠프에는 알 수 없는 정적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소년은 이 빗줄기 속에서 흠뻑 젖은 채로 돌아올 소녀를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혹 감기라도 걸리지는 않을 지, 돌아오기만 하면 따뜻하게 해줘야겠다, 따위의 생각들로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몇 번이나 데리러 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소년은 마을로 가는 길도 모를 뿐더러 소녀가 올 때쯤이 다 된 시각이었습니다. 비는 점점 더 거칠어만 갑니다. 트레이시 아저씨의 커다란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바람도 거세어져 나뭇잎이 가루처럼 흩날립니다. 멀리서 '딱'하고 노래하는 나무의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년은 초조한 눈으로 발을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녀를 기다리던 날의 이야기. 계속, 계속 기다리던 날의 이야기.




#10. 소녀가 돌아오지 않았던 날의 이야기


나무도, 풀잎도, 캠프장도, 그리고 소년도 흠뻑 젖었던 날이었습니다. 먹구름의 심술이 그치지 않던 날이었습니다.


소년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트레이시 아저씨가 소년을 말렸지만, 소년은 듣지 않고 뛰쳐나왔습니다. 소년은 달렸습니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마을 쪽이라고 짐작되는 쪽으로 무작정 달렸습니다. 소년의 옷은 마치 금방 빨래를 한 것처럼 완전히 젖어 버렸습니다.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빗물에 거칠해진 잔디가 발을 가로막는 감촉이 기분 나빴습니다. 소년은 이따금씩 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닦아내며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함께 나무의 노래를 듣기로 한 약속을 잊지 않았지?'


소년은 힘이 닿는 곳까지 달렸지만 결국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소년은 그것을 너무나, 너무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큰 소리로 소녀를 부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소녀에게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은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언제나 함께였는데. 이름이 없어도 언제나 함께였는데.


왠지 오늘만큼은 소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러 줄 이름이 소녀에겐 없다는 사실이 더욱 아프게만 느껴집니다. 비구름은 더욱 세차게 빗물을 끼얹습니다. 요란하게 울리는 천둥번개 소리가 소년을 책망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소녀가 죽어가며 자신을 부를 때, 소녀 역시도 부를 이름이 없어 부르지 못하며 싸늘하게 식어가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소년을 때리는 빗방울은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년의 볼을 타고 흐르는 빗물만은 뜨거웠습니다.


소년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지 못했던 날의 이야기. 빗방울이 가슴속을 차갑게 파고들던 날의 이야기.




#11. 풀피리의 이야기


먹구름이 물러가고 다시금 팔라라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뭇잎이 머금은 빗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던 날이었습니다.


소년은 소녀와 함께 심었던 노래하는 나무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전히 기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새 잎이 한창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부러진 한 쪽 가지의 흔적이 소년의 마음 한 구석을 또다시 아프게 합니다. 소년은 나뭇잎을 한 장 떼었습니다. 그리곤 그 잎을 솜씨있게 접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소년은 그 잎을 입에 갖다 대었습니다. 그리곤 눈을 감았습니다.


"삐삑 - 삐-삐-삑 --- 삐리리삑 - 삑-삑.."


그것은 나무의 노래. 소년에 의해 연주되는 나무의 두 번째 노래였습니다. 첫 번째 노래와 같은 소년이, 같은 나뭇잎으로, 같은 곡조를 불고 있었지만 첫 번째 노래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다른 노래. 그것은 너무나 쓰라린 아픔. 그것은 듣는 이의 슬픔의 인내심을 끊어 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애절한 노래였습니다. 풀피리 소리가 소년의 귓가에도 메아리 칩니다.


소년은 소녀와의 약속을 떠올려 봅니다. 소년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반짝입니다.


나무가 다시 한 번 노래하던 날의 이야기. 가슴 시리도록 슬픈 소년의 사랑 이야기.




#12. Epilogue


나는 여행자입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음악을 연주하는 음유시인이죠.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도착했던 마을, 티르 코네일로 돌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가는 도중, 울레이드 벌목 캠프에 들렀습니다. 내가 에린에 첫 발을 내디딘 날, 이 곳 캠프장에서 캠프파이어를 즐겼던 날을 기억합니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너무나 평화로운 표정으로 우리의 캠프파이어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그 날의 추억은 아직까지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소년은 그 벌목캠프에서 일하는 소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 소년이 보이지 않는군요.


확실히 벌목캠프라서 그런지 주변은 모두 잘리고 그루터기만 남아버린 나무들로 가득합니다. 나는 그루터기에 앉아 한 숨 돌렸다가 다시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참 낭만이 많이 깃든 곳이죠. 순간 나는 그 곳을 쭈욱 둘러보다가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한 그루터기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심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밑둥만 남아버린, 앉기에는 너무 작은 그런 그루터기였습니다. 하고 많던 그루터기 중에서 어째서 나는 그렇게 앉기도 불편하고 볼품도 없는 그 그루터기가 마음에 끌렸을까요? 마치 마법에라도 홀린 양, 그곳에 앉았습니다.


나는 류트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곳에 앉아 즉흥 연주를 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나의 류트의 현에서 너무나도 구슬픈 곡조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슬픈 곡을 연주할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말이지요. 아무리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해 보아도 그 곡 말고는 연주되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슬픈 곡만 자꾸 연주하게 되는 것일까요?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노래하는 것 처럼....




한줄요약

Song of the tree.JPG


브금 재생이 안된다..생략해야지 ㅜㅜ

4개의 댓글

2013.03.28
마비노기 얘기 너무 재미있게 읽고있어! 읽고있으니까 나도 마비노기 하고싶어진다 ㅠ
0
2013.03.28
@로션
고마워..ㅜㅜ이과성님이 올린 글에 비해 반응이 없길래 소심해져있었음
0
MWL
2013.03.28
마비노기 하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이것저것 시도만 하다가 접었었는데...
이런거 모으러 다니는 것도 재밌을 것 같구나.
추천 추천.
0
2013.03.28
마비노기도 스카이림처럼 뭔가 스토리가 참 많은거 같애ㅎㅎ 재밌당ㅋㅋ 마비노기는 한번도 안해봤지만ㅋㅋ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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