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어둑시니 - 4

 

 

뒤숭숭한 분위기에 행차가 끝나고 사람들이 떠나갈 때까지도

여자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앉은 어둠 사이로 민들레만이 달빛에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 불쌍한 사람. 상심이 얼마나 크고 어두울지

가늠조차 할 수 없겠습니다. "

 

익숙한 목소리에 여자가 고갤 돌리니, 

이전의 규수가 달빛 아래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규수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에게 다가왔다.

 

"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걸.

가까운 것을 불태워버리는 빛의 열기를 

온기로 착각해 다가가, 결국 잿더미가 되었군요. "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는 여자의 속을 어루만지는 듯 했고,

몇차례고 쏟아내 메말랐던 마음은 그 따스함에 풀어져 

또 한번 눈물을 흘려냈다.

 

" 그분에게.. 음식이라도, 물이라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제 마음이라도 알리고 싶습니다. 그저 그 뿐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

 

여자는 무례임을 알면서도 규수에게 매달리며 울었다. 

 

" 이렇게 내쳐졌음에도, 여전히 빛을 바라보시는 것입니까. "

 

규수가 말없이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자 속에서부터

울컥하고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누군가라도, 

단 한명이라도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여자는 자신의 별볼일 없는 삶을 규수에게 토하듯 고백했다.

 

" 제겐 오직 그 뿐이었습니다.. 제 삶은...!! "

 

떠듬떠듬 말하던 여자였으나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트어낸 입에선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날 때부터 외로운 탓에 외로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라온 것.

온 핍박과 멸시에도 그러려니하고 받아들이며 살아온 삶.

살면서 처음으로 온기를 느끼고 밝은 빛을 보게된 그 날.

그 뒤로 자신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 바뀐 매일.

허나 여전히 기구하고도 무자비한 운명의 말로.

제발 이 비천한 여자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기구한 운명을 가엽게 보고 도와주십시오.

 

모든 것을 토해낸 여자는 땅바닥에 조아려 흐느꼈다.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삶이었는지 그 모든 것을 말하는데엔

한 시진조차 걸리지 않았었다.

 

" 도와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

 

규수가 입을 떼자 여자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규수는 눈을 살며시 감으며 고개를 저엇다.

 

" 하지만 외면하십시오. 결국 그대는 다칠 것입니다.

순수한 선의와 호의로 시작한 행위일지라도

그 근간은 결과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기대감은 어긋나는 순간 배신감이 되고,

배신감은 여태 가져온 감정들과 해온 일들을

전부 무위로 되돌려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

 

규수는 단호한 목소리로 타일렀으나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비굴하면서도 당당했다.

 

" 저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밑바닥의 기대와 희망은 철저히 짓밟혀 흙이 되고...

그 흙에서 꽃 한송이가 피어난다한들 사람들의 발에

다시 짓밟혀 꺾이고 가루가 될 뿐입니다. "

 

여자는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모든 돈을 모아 얻은 종이는 구김이 일고

흙이 묻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깨끗한 순백이었다.

 

" 저는 돌아갈 가족도, 몸을 편히 뉘일 집도, 

당신과 같은 미모도, 맘놓고 무언갈 살만한 재산도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이 종이 하나 뿐입니다. "

 

여자는 규수에게 엎드려 절했다.

비록 형식도 몰라 엉망인 자세였으나

땅에 머리 박은 애처로운 몸의 절실함만은 전해졌다.

 

" 비록 기대가 어긋나 모든 것이 의미없어진다한들

그를 만난 뒤부터는 그저 그를 온전히 그려내는 것만이

보잘것 없는 이 삶의 모든 것이니, 제발 도와주세요. "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듣던 규수는 

이내 미묘한 표정을 풀곤 부드러히 미소를 지었다.

 

" 돌아가서 준비를 마친 뒤 달이 물러나고 

해가 떠오르기 전. 세상이 창백한 빛이 내린 때에

그 분을 찾아가십시오. " 

 

감격하며 고개를 연신 조아리는 여자에게 

규수는 언듯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 허나 해가 떠오르기 전에는 돌아가셔야합니다. "

 

 

 

달이 지고 해가 일어날 준비를 해 하늘에서 지켜보는 이 없는 새벽.

땅거미가 물러나는 창백함 속에서 여자가 관아로 향했다.

품의 보따리엔 남자에게 줄 주먹밥과 물이 들어있었다.

 

원래라면 지켜지고 있어야할 입구는 비어있었다.

규수가 일으킨 기적에 감사해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니

곧 옥에 갇힌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벽에 기대어 자포자기하듯 주저앉아있는 남자의 몰골은

거리에서 봤듯 초췌했다. 자신이 기억하던 생생한 생기는

온데간데 없이 마른 몸엔 고문당한 듯한 상처들이 보였고

퀭한 눈은 그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하늘께선 어째서 제가 빛을 보려 고개를 드니,

죄없는 빛을 떨구어 억지로 고개를 떨구게하는 것입니까.

 

여자는 죄책감으로 미어지는 가슴에 눈물 짓곤 입을 떼었다.

 

" 이 곳까지 오실 기력은 있으십니까.. "

 

남자가 여자에게 힘없이 고갤 돌리자,

여자는 품의 보따리를 풀어 주먹밥 두덩이를 보였다.

그것을 내미니 남자는 천천히 다가와 주먹밥을 잡곤

입에 가져가 먹기 시작했다. 남자는 최저한의 음식만을 먹었는지

음식물을 삼키는 목에 전율이 일어나는 듯 떨었다.

 

" 물도 드십시오. "

 

사레까지 들며 주먹밥을 먹던 남자는 물까지 마시자 

어느정도 기운이 회복됐는지

허겁지겁 여자가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자신의 힘으로 점점 기운을 차리는 남자의 모습에

여자는 기뻐 몸둘 바가 없었다.

 

" 그대는 누구이기에 제게 친절을 베푸십니까? "

 

주먹밥을 두개나 헤치운 남자는 그제서야 여자를 보고 물었다.

그 목소리는 여자가 기억하던 그 날의 목소리.

그저 동경할 뿐이었던 빛이 자신에게 직접 쬐여지는

감격에 여자는 쌓였던 모든 울분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 역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괜찮습니다.

저는 그저 당신이 친절을 베푼 미천한 자 중 하나일 뿐이니. "

 

" 저는 이정도의 사례를 받을만큼 친절한 이가 아닙니다. "

 

" 그러하시더라도, 저같은 자를 기억해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제가 바라는 것이라면... "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시간은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였으니.

여자는 품 속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 제 한가지 소원을 이루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

 

그러자 남자는 창에서 손을 꺼내 덥석 여자의 손을 잡았다.

비록 기억보다 마른 손이었으나 그 따스함과 굳셈은 여전했다.

갑작스런 행동에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남자를 보니, 

남자는 확고한 눈빛으로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 지금의 기구한 저에게 빌 소원이라면 

언제든 이루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받은 마지막 친절이

제 삶의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아야 편히 눈을 감을 것 같습니다. "

 

여자의 눈을 응시하는 그의 낙엽색 눈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목소리에는 삶의 밑바닥이자 끝에서

염원하는 마지막 바램에 대한 열망이 느껴졌고,

그 열망은 여자의 손을 꽉 잡고있는 열기가 되어있었다.

 

어찌나 아름다운 사람일까. 어찌나 뜨거운 빛일까.

그런 그의 모습을 앞에 두고 하찮은 자신의 바램은 타올랐다.

여자는 입을 열어 쿵쾅대는 박동 속에서 겨우 말했다.

 

" 비록 스쳐간 인연이었으나 당신은 제게

아름다운 옥 관자를 주셨습니다.

그저 길거리에 쌓인 먼지와 다를바 없는 비천한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관자와 함께 걱정의 말 몇마디를 해주셨습니다.

당신에겐 그저 몸의 치장품 하나와 인사치레와 같은 말이더래도

제 삶에선 처음 받아보는 커다란 친절과 온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당신을 동경하게 된 것입니다. "

 

여자를 기억해낸 듯 남자의 눈이 커졌다.

여자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손으로 느껴지는 그의 박동이

커져가며 그녀와 동일한 박동을 가지게 되었다.

거대한 박동들 사이에서, 여자는 고백을 이어갔다.

 

" 내일이 없이 오늘만을 살아가던 제게 당신의 친절은

내일이 되어주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나아가는 것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비록 바라보는 곳이 너무나도 높고 밝아

제 처지를 비관한 적도 있으나

그저 빛을 동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비록 맺어질 순 없으나, 저는. 저는 당신을 연모해왔습니다. "

 

여자는 눈물흘리며 미소지었다.

꺼냈던 종이가 바닥에 나부끼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을 종이에 새긴 그림보다

서로의 마음에 새기는 그림이 더욱 선명히 남을 것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꽉 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럼.. 지금 그 관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

 

" 아뇨... 그것은 다른 이에게 빼앗겼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주신 것을 저는 지키지 못하고... "

 

남자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내젓고는, 입을 열었다.

 

 

" 여기 세자 마마의 관자를 훔쳐간 도둑이 있습니다!!! "

 

남자의 쩌렁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여자가 당황하며 남자를 보니,

남자는 아랑곳않고 계속해서 외쳤다.

창으로 햇살이 밝아오고 있었다.

여자가 손을 빼려했으나 남자의 손아귀에 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곧 소란에 관군이 들이닥쳐 여자를 끌고갔다.

흙탕물이 끼얹져진듯 혼란해진 머리속과 혼탁해진 시야 사이로

종이는 군발에 짓밟혀갔다.

 

옥에서 꺼내어져 쬐여진 날카로운 햇빛은

여자의 눈을 무자비하게 찔렀다. 사방에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저항하는 손이 내쳐지고 팔이 짓눌리니

여자는 칭칭 감기었다. 의식이 점등될때마다

그녀 앞의 광경은 바뀌었다.

 

 

다시 눈을 뜨고 아비규환인 의식 속에서

보인 것은 묶인 자신과 남자요.

 

들린 것은 낱낱히 고해지는 그들의 죄였다.

 

지고한 정의 앞에 불린 죄인들은

세자의 관자를 훔치고 장물아비에게 팔려했으나 거부당해

길거리의 거지에게 떠넘기고 도망친 남자요.

 

세자의 관자를 지니고도 이를 알리지 않고

품에 지니고 있다 유실한 것으로도 모자라

관아에 침입해 남자에게 밥과 물을 준 여자이다.

 

죄가 매우 중하니, 이는 목을 참수할 죄인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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