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어둑시니 - 2

 

 

 

여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거리에 떨어진 벚꽃들은 흩어지고,

세자의 행차에 대한 들뜬 이야기들도 흩어져

평소의 거리로 돌아왔으나 

여자는 여전히 봄과 남자의 잔향에 취해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여자는 손님을 그리는 시간을 빼곤 항상 남자의 그림을 그렸다.

좀 더 아름답고, 좀 더 섬세하게. 온기를 살리기 위해.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눈을 담기엔 초라한 그림.

그럼에도 이전보단 나아졌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이 미련한 화가는 포기하지 않고 

완성못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 아름다운 그림이네요. "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여자가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아름답고 온화한 표정을 지은 규수가 

옆에 서선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마치 춘화라도 들킨 서생처럼 허둥지둥 숨기려하니

규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웃어보였다.

 

" 절 그림을 방해한 죄인으로 만드실건가요?

한번 그은 선은 마무리 지으셔야지요. "

 

한치의 가식 없는 상냥하고 고운 목소리에 

여자는 눈치를 보며 다시 조각칼을 들었다.

규수는 가까이 붙어 흥미로운 눈으로 그림을 관찰하고 있었다.

 

규수에게선 고풍스러운 꽃향이 풍겼다.

지금까지의 손님들은 그림을 받을 때를 빼곤

가까이 있어본 적 없어 그 향을 느껴볼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과 비교할 것은 그저 깨끗한 외견과

자신감 찬 목소리, 깔보는 눈빛 뿐이었으나.

쓰레기를 뒤지고 쓰레기더미에서 잠을 자는 자신과는

아예 태생부터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임을

향기에서부터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남자의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보고 자란 풍경과 물건, 사람들이 다르니

남자의 고결함을 표현할 힘이 없고,

그를 떠올릴 상상력조차 빈곤하니.

 

비루하고도 미천한 헤진 손으로는 남자를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

 

여자가 그림을 마무리짓자, 빤히보던 규수가 말했다.

 

" 눈이 없는 그림이지만 관자는 유독 선명하군요.

혹시 이것을 가지고 계신건지요? "

 

규수의 말에 여자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엇다.

규수의 말대로 벚꽃이 새겨진 옥 관자는 유독 선명했다.

 

여자는 세상에서 처음 받은 온정을 당연히 간직하고 있었으나,

양반의 물건을 일개 거지가 가지고 있는건 자랑은 커녕

들켰다간 도둑으로 오해받고 맞아죽을 일이었다.

 

" 하긴, 그렇겠지요. 이것은 사라졌다는 세자의 관자이니,

저도 실제로 본 적 없는걸 당신이 알 턱이 있겠습니까. "

 

그러면서도 규수는 여자를 은근히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복잡한 근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이 여지껏 그리고 동경해온 이가 세자라는,

절대로 연이 닿을 일 없는 귀인과 만나선

그의 온정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이 차올랐으나.

 

동시에 차오르는 기쁨 속에는 어긋남의 슬픔이.

올려다보았다간 눈이 멀어버릴 빛에 대한

헛된 갈망을 품게 되었다는 슬픔이 비춰졌다.

 

" 무엇에 근심하는진 모르겠으나 생각을 멈추십시오. "

 

규수의 목소리에 여자의 온갖 잡념이 멈췄다.

기이함에 여자가 규수를 바라보니, 규수는 몇발자국 물러서

양손을 공손히 단전에 모아 피사체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새로운 판자를 꺼내 그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단과 같은 고운 흑색 장발과

티 한점 없는 백옥과 같이 깨끗한 피부.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비롭고 온화한 눈.

규수는 마치 현실에 그려진 아름다움과 같았다.

 

그 모습에 사고는 멈춰 눈은 그녀의 형태를 기록하고

손은 멋대로 움직여 판자를 깎아댔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의 몽롱한 상태로 몸만이 움직였다.

 

홀린듯이 그림을 마치고 규수에게 그림을 건내자 

그림을 빤히 보던 규수가 가벼히 웃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나 싶어 여자가 바라보자, 

규수는 받았던 그림을 들어보였다.

 

" 당신 스스로 그리던 그림엔 눈이 없어, 눈을 그리지 못하는 

화가인가 싶었는데 이 그림엔 눈이 그려져있군요. "

 

규수는 여자를 지나쳐가더니

뒤에 가지런히 정돈되있던 다른 판자를 들어보았다.

역시나 관자가 선명한 눈없는 남자의 그림이었다.

 

" 어째서 완성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눈앞에 그가 없기 때문에? "

 

여자가 당황하며 다가오자 여자는 판자를 되돌려주었다.

 

" 아니면, 고결하고 아름다운 그를 그리기엔 

그를 보았던 당신의 눈과, 그를 그리는 당신의 손,

그가 그려질 도화지가 너무나 비천하기 때문입니까? "

 

여자는 말없이 판자를 안고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맞는 말인지라 고개를 저으며 부정할 수 없었고,

스스로도 알고있는 사실이기에 귀를 막아 듣지 않는다한들

머리속에서 수없이 메아리칠 것이었다.

 

" 그렇다면 보십시오. "

 

규수는 자신이 그려진 판자를 들어 여자에게 나란히 보였다.

판자엔 규수가 양손을 공손히 모은 채 은은한 미소를 짓는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당신이 눈으로 보며 판자에 그려낸 저는, 아름답지요? "

 

섬세히 새겨진 조각엔 옆의 규수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비록 판자의 거칠한 질감과 무뎌진 날 탓에 선의 진함이 달랐으나

고혹적인 곡선과 온화한 분위기가 담겨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고개를 끄덕인 규수는 

판자를 왼팔에 끼곤 오른손으로 주머니의 무언갈 꺼냈다.

 

" 기억은 충격적이고, 황홀하고, 슬프고, 아름답고,

억울할수록 선명히 마음에 기록이 됩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의 모습은 눈앞의 저와 마찬가지로

선명할 터. 마음 속에 피사체가 있으니,

그것을 있는그대로 그저 그리면 되는 것입니다. "

 

규수가 여자에게 무언갈 쥐어주었다.

여자가 손을 펼치니 돈 뿐만이 아니라 

검은 액체가 든 유리병도 있었다.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삯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 "

 

맑은 검은 액체가 찰랑였다. 찰랑일때마다 무언가가

병을 툭툭 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렸으나, 

진한 검정색에 형태조차 알 수 없었다.

 

" 우리가 한 때 태어난 곳이자 돌아가는 곳.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 "

 

규수는 거리를 향해 몸만을 돌렸다.

 

" 쉽게 말해 먹입니다. 먹을 갈아낸 물. 

그림 한 점만을 그릴 수 있는 양이니, 

진정으로 그리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사용하십시오. "

 

그 말에 여자는 놀란 눈으로 다시 유리병을 보았다가,

어째서 자신같은 거렁뱅이에게 이정도까지 

친절을 베푸는지 물으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규수는 이미 사라져있었다.

규수와의 만남이 너무나도 편리하게 여자의 고민을

해결해주었으니, 그것이 그저 자신이 바라기에

멋대로 떠올린 한순간의 꿈이었나 눈을 깜빡이면,

손에 들어있는 병 안의 먹물이 찰랑이며 유리에 부딪혔다.

 

 

거리에서는 세자가 곧 행차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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