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구의 자리 - 5

 

 

 

" 전하께선 뵐 때마다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아 참 재밌습니다. "

 

인회군은 말없이 신유를 바라보았다.

백년만의 만남. 무슨 말로 입을 떼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신유는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 처음엔 발톱을 잔뜩 세운 투견과 같으시더니,

그 뒤엔 두려움에 떨며 짖어대는 강아지. 지금은... "

 

인회군의 미간이 일그러지자 신유는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 긴장은 충분히 풀리신 것 같으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

 

" 대꾸를 할 가치도 없고, 장단에 맞출 기운도 없다. "

 

인회군이 기세 좋게 말했으나 신유는 방석에 앉아

인회군에게 몸을 기울인데 반해 그는 제 자리에 뻣뻣하게

선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 어연 일로 백년만에 증오스런 요괴를 찾아오신 것인지요? "

 

" 너는 질리지도 않느냐? "

 

신유의 말문이 막혔다. 인회군의 목소리엔 분노도, 혐오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막대한 피로감이 차올라 공허만이 있었다.

인회군이 신유에게 한걸음씩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 서른해에 이 나라에 도는 모든 학문에 통달하고,

열다섯해에 궁중의 모든 악기를 익혔다.

열두해에 무술로 도전하는 이가 없어졌다.

세상의 온갖 쾌락과 사치, 향략에 젖었건만

그것도 이제와선 그 어떤 술을 마셔도 취기가 돌지않고,

어떤 노름을 해도 흥이 나지 않으며,

경국지색의 여자 수십과 함께 동침해도

몸에는 희미한 잔향조차 남지 않게되었다. "

 

어느새 신유의 앞에 선 인회군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은 힘이 들어가 사백안이 되고,

꽉 문 이는 떨리며 목에는 핏대가 섰지만

힘을 잃은 그의 목소리는 일말의 감정조차 없었다.

 

" 그럼에도 너는 내가 보낸 시간의 열배를 더 지내놓고도 어찌.. "

 

신유를 보는 인회군의 눈두덩이가 뜨거웠다.

 

" 어찌 웃을 수 있는 것이냐.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 것이냐. "

 

인회군은 겨우 글어모은 목소리로 시기를 토했다.

제 한 몸 살겠다고 가족과 같은 이들을 죽였다.

그들과 함께 바랬던, 나라를 바꾸겠단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나라는 자신이 없어도 부강했고, 태평성대는 계속 되었다.

요괴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신념도 지키지 못했다.

신념도 버린 채 쾌락을 좇았지만, 행복해지지도 못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인회군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 그런데도, 어째서 너는 웃을 수 있냔말이다.

너도 내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고 이 궁 안에서

평생 앉아있어야함에도 어찌 미소지을 수 있냔 말이다. "

 

"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

 

" 뭐? "

 

신유의 즉답에 인회군의 맥이 풀렸다.

그녀는 이치를 깨달은 불상과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가족만큼 기나긴 삶을 함께하는 이는 없습니다.

부모는 과거라는 등불로 우리의 앞길을 안내해주고,

배우자는 대등한 동반자로서 다투기도하고, 돕기도하며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변화합니다.

형제는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다른 목적지로 가니,

그들에게서 자신이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지요. "

 

" 나에겐 어느쪽도 없다. 네게도 없지 않느냐.

나의 형제는 네가 앗아가고, 네 배우자는 내가 목을 베었으니. "

 

" 하지만, 당신에게도 제게도. 자식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

 

" 자식 ... ? "

 

" 자식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하지만 모양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른 각각의 거울은 부모의 여러 일면을 비춰주지요.

인간의 삶은 백년의 절반이나 되니,

스무명만 지켜보아도 천년이 됩니다. "

 

신유는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거의 족쇄에 얽혀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미소였다.

신유에겐 그저 미래에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대감만이 있었던 것이다.

 

" 그랬던 것인가. "

 

그제야 인회군은 자신이 목이 잘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서자들을 궁으로 모았던 이유는.

큰 뜻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서자들에게 큰 업적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신유는 왕의 혈통에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

왕의 혈통만은, 신유 앞에서도 온전히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아버지는 인간으로서 마주할 수 있는 이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 그저 ... 곁에 있길 바란 것이었구나. "

 

 

 

인회군과 동침한 여자는 많았고, 궁밖에 뿌린 씨는 충분했다.

그믐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인회군은 자신의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 이제부터 너는 궁의 일원이다. "

 

어전. 열댓살쯤 되는 사내 아이는 몸에는 맞으나 

평생의 대우에 맞지 않는 비단 옷 탓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선,

높은 곳에 앉아있는 인회군을 벌벌 떨며 올려다보았다.

 

" 예..? 저,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 말 그대로다. 너는 나의 피가 이어진 자식이니

왕가의 일원으로 받아주겠단 것이다.

좋은 것을 먹고, 편한 옷을 입고, 따뜻한 곳에서 자며

뭐든지 하고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면 된다. "

 

" 허면, 전하 어째서... "

 

인회군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으나 소년의 떨림은

그치지 않았다. 소년은 눈물이 가득 고인 빨개진 눈시울을 띈 채

바들거리는 손으로 간신히 어머니를 가리켰다.

 

" 어째서 어머니를 죽이시는 것이옵니까..? "

 

한때 인회군의 침소에 들었던 여자.

소년의 어머니는 목이 매달아져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양손은 목을 조르는 밧줄을 붙잡으려 허우적대고

눈은 뒤짚이며, 입에선 목잘린 암탉같은 새된 소리가 났다.

 

" 미안하구나. 나도 네가 첫 아이라 그런지 실수했다. "

 

인회군은 소년에게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띄웠지만 무정한 눈으로

여자를 보고 있었다. 아니, 여자에게 걸어진 꼬리를 보고 있었다.

어미까지 데려온 것은 실수였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 

자식에게서 신유가 비춰지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 제발, 제발 어머니를 살려주시옵소서 전하! 제발.. "

 

" 다음부터는 이런 추태를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마. "

 

소년에게 대답하는 인회군의 입과 달리 그의 눈길은

혀를 내빼며 죽은 시체에서 빠져나가는 꼬리에 향해있었다.

 

 

 

궁 안에서 서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 일곱이 되었다.

궁 밖에선 기생의 자식, 후미진 가문에서도 말단 후계자.

앵벌이였던 그들에게 '군'의 칭호를 주고 적통과 같이

차별없이, 공손히 대우하라 일렀다.

 

서자들의 하나하나가 신선했다.

신유의 의지가 아닌 인간의 의지라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의 행동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인회군의 눈빛엔 다시 생기가 돌고 목소리가 회복되고 있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직접 가르쳤다.

그들에겐 꼬리가 닿지 않는다. 어떤 것이든 진부한 연기와

조아리는 가축의 반응이 아닌 "인간"의 것이었다.

 

" 전하? "

 

첫째가 책에서 눈을 떼고 인회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 인회군은 놀라며 축축해진 눈가를 쓸었다.

자기도 모르게 기쁨으로 눈물이 흐른다. 이 얼마나 인간다운가.

 

" 너를 거둔지도 다섯해가 지나다니, 감회가 새롭구나. "

 

인회군은 첫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은 자신만큼이나 자랐으나 그저 앙증맞을 뿐이었다.

첫째는 그렇습니까. 하며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으나

그조차도 너무나 인간다워 귀여워보였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동생들을 돌봐주거라.

비록 태어난 배가 다를지라도 너희는 모두 같은 피를

지녔으니 돈독히 지내주길 바랄 뿐이다. "

 

인회군은 형제들을 떠올렸다.

첫째형과 지금의 첫째 자식은 듬직한 것이 똑 닮았다.

 

" 예. 전하. "

 

인회군은 떠나는 첫째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첫째는 자신 앞에선 무뚝뚝히 행동하지만

동생들에겐 자상하게 행동했다.

몰래 뒤를 따라가면 가끔씩 훈훈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첫째는 동생들의 방에 찾아가지 않았다.

 

 

 

 

" 전하는 눈치 챈 기색이 없습니다. 누설하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그는 한번 더 설득해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불빛조차 새어나오지 않는 으슥한 어둠 속 구석.

첫째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이와 대화하고 있었다.

둘 사이엔 반역의 말이 오가고 있었다.

 

인회군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음모.

인회군이 너무나도 잘 아는 계획이었다.

백여년 전 그의 목을 노린 칼날이 다시 뽑히고 있던 것이다.

 

이유는 인회군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복수이자, 영원한 권력과 삶에 대한 탐욕.

그렇기에 인회군은 첫째에겐 배신감이나 분노가 들지 않았다.

 

그 분노는 첫째가 아닌 그에게 이러한 행동을 부추기고

작당한 두건의 머리에 이어진 꼬리에게 향해있었다. 

신유. 그 요괴가 인회군의 아이들까지 타락시키려 하고있는 것이다.

인회군은 밀회를 뒤로하고 중전궁으로 향했다.

 

 

 

"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시는군요 전하. "

 

중전궁에 들이닥친 인회군은 곧장 칼을 뽑아들어

신유의 목에 들이밀었다.

그러나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신유는 시치미를 뗄 뿐이었다.

 

" 모르는 척 하지말거라. 네가 죽고싶어 내 아들에 간섭한게냐? "

 

" 전하의 아들만은 아니지요. 저와 전하는 엄연히 부부.

각자 다른 배에서 태어난 서자들도 형제와 같이 지내라 하셔놓고,

저는 그 아이들의 어미 노릇을 못하는지요? "

 

" 목을 자르기 전에 궤변은 집어치워라. 

꼬리를 사용못하니 세치 혀로 내 자식들을 꾀어내려하는구나.

너는 왕의 혈통이 원하는 것만을 이뤄주면 된다. "

 

" 저는 천백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

 

신유는 억울하다는 듯 인회군을 올려다보았다.

 

" ... 무슨 말을 하는거냐. "

 

" 저는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규칙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왕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이루어주었습니다.

영생을 살게해주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게 해주었으며,

태평성대를 이룩시켜 주었고, 외로움 또한 떨쳐주었습니다. "

 

" 무슨 말을 하냐고 물었다. "

 

칼을 쥔 인회군의 손이 떨렸다.

자신만은 다르리라 생각했었거늘 모든 것은 똑같이 흘러갔다.

 

" 본인도 알고계시잖습니까? "

 

자식은 부모의 거울. 자신도 왕의 거울에 불과했다.

다짜고짜 자식을 데려와 보는 눈 앞에서 어미를 죽이고,

거처를 빼앗았으며 그들의 감정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비추는 거울엔, 피에 젖은 검이 떠오르는 게 당연했다.

 

오래 전 온몸을 뒤짚은 죄는 피부에 스며들어

그의 본성을 바꾼 것이다. 피냄새는 지워지지 않았고,

인간을 바라지만 몸은 그가 혐오해마지않던 짐승이 된 지 오래였다.

 

" 주변을 돌보지않은 채 쾌락만을 쫓고, 

이기적으로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짐승 ... "

 

" 네. 그대는 이미 인간이 아니옵니다 전하. "

 

어느새 일어난 신유가 웃으며 인회군의 귀에 속삭였다.

손에는 힘이 빠져 칼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인회군이 신유의 앞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떨구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너무나도 뒤늦은 후회의 눈물이 치솟았으나,

피에 절은 '염치'가 눈물이 새나오는 것을 가로막았다.

 

인회군의 어깨에 신유의 손이 닿았다. 

두번째 접촉. 그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러나 신유의 손은 부드러히 어깨를 감싸쥘 뿐이었다.

 

" 전하. 전하는 아직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할 수 있습니다. "

 

" 아직 방법이 있다고 ... ? "

 

" 네. 저지른 일들에 대한 속죄이며, 당신과는 달리 

인간인 아이들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것이죠. "

 

신유는 말을 잇진 않았으나 인회군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서자들이 살아갈 목표가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본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서자들이 살아갈 목표는 인회군의 목숨이란 것도

인회군은 이해할 수 있었다.

 

" 알고 있다. 하지만 ... 난 죽는 것이 두렵다. 

백년을 넘게 살고도 죽는 것이 두렵다. 

모든 학문을 익히고 온갖 쾌락에 달하며

모든 이들의 우러럼을 받고, 수많은 자식을 보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죽음이 두렵다. 

현생에 가진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볼 수 없어지는 것이 두렵고,

죽음이 주는 고통이 두렵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이 두렵단 말이다. 

그 어둠 속에서, 난. 나는 ... ! "

 

신유는 인회군을 끌어안아 말의 토악질을 그치게했다.

그녀는 벌벌 떠는 품속의 가련한 사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번도 안겨보지 못한 어머니의 품이 이리 평온했을까. 

몸의 떨림이 그치자 인회군은 부드러히 눈을 감았다.

 

" 걱정마십시오 전하.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여전히 영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양수와 같이 따뜻한 쾌락 속에 빠져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

 

"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 하지만, 어떻게 ... ? "

 

" 손을 잡아드릴테니 따라오십시오. 하지만 제 손을 잡으시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임을 약조해주세요. "

 

그를 내려다보는 눈은 아름다운 보름달빛의 눈동자.

인회군은 펼쳐진 신유의 손을 홀린듯 잡았다. 

신유 역시 인회군의 손을 맞잡아주며 일으켰다.

한때 그가 그토록 밀어내던 요괴의 손은 그를 당겨 일으켜주었다.

 

 

 

" 아바 마마! 어디에 가십니까? "

 

중전궁을 나와 신유와 함께 궁을 걸으니, 

다섯째 재진(再進)이 천진히 다가와 물었다.

자신이 어미를 죽인지도 모른 채 친근히 구는 자식의 모습에

원죄로 몸이 욱신거렸으나, 인회군은 애써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약조에 따라, 그리고 인간의 도리에 따라

자신은 이 아이에게 길을 제시해주어야했다.

 

" 재진(再進)아. 너는 자라서 부디.. "

 

목표를 가진 뒤에야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 내 목을 잘라다오. "

 

 

 

악취가 비강을 쑤셔 들어와 목구멍까지 메케하게 했다.

온갖 피 냄새와, 공포에 질린 인간의 배설물들의 냄새에

익숙한 인회군조차 견디기 힘든 악취였다.

 

" 고통스러워도 속죄라 생각하고 견뎌주십시오. "

 

궁궐의 밑바닥 중 밑바닥. 온갖 쓰레기들이 수레 가득히

실려오는 곳. 인회군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 여긴 ... "

 

" 잊지 않으셨군요. "

 

" 어찌 잊겠는가. 내가 직접 이름을 붙인 곳이니. "

 

신유는 진녹색 폐수를 밟으며 굳게 잠긴 문 앞에 섰다.

신유가 옆으로 비켜서자, 인회군도 문으로 다가갔다.

목화 너머로 축축하고도 뭉글거리는 질감이 발에 닿았다.

 

" 동궁 ... 어째서 이 곳으로 온거지? "

 

동궁. 가축 중에서도 가장 천박한 해수인 세자에게

어울리는 거처였다. 인회군이 왕의 자리에 오르며

죽는 것조차 자비로운 처사라 생각해 세자를 가둔 곳이었다.

 

" 이 안에서 저는 전하를 품고, 전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

 

" 그게 무슨 말인가. 잠깐 ... 그렇다는건 세자는 ... "

 

인회군이 생각을 마칠 새도 없이 신유는 빗장을 열었다.

빗장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자

문이 벌컥 열리며 세자가 달려들었다.

각종 오물에 더럽혀진 추레한 모습에 여전히 커다란 갓난 아기인

몸의 세자는 그가 풍기는 냄새만큼이나 역겨웠다.

 

" 으아아악! "

 

인회군이 당황한 사이 세자는 인회군을 덮쳐 쓰러뜨렸다.

인회군은 세자를 밀쳤으나 도사견과 같은 힘은 인회군의 몸을

폐수에 쳐박고, 오물에 매끈한 몸은 밀쳐지지않고 미끌였다.

 

" 멈추게해라! "

 

" 얌전히. "

 

신유의 말에 세자는 움직임을 멈췄다.

인회군은 간신히 고개만 빼든 채 신유에게 소리쳤다.

 

"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었나?!

날 이곳에 데려와 뭘 어쩌려고 한게냐! "

 

" 전하. 저는 처음부터 늘 그랬듯 거짓을 고한 적이 없습니다. "

 

" 그럼 이건 무엇이냐?! 무슨 짓을 하려한거란 말이다! "

 

" 약조한대로 영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동안 옭아매는 죄악에서 벗어나

쾌락만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

 

신유가 인회군에게 한걸음씩 다가왔다.

수많은 검은 꼬리들이 넘실거렸다.

인회군은 세자를 보았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똑바로 마주한 눈.

그저 흐리멍텅할 뿐이라고 느꼈던 기억 속의 눈빛은,

지금에와선 다른 것이 비춰졌다.

 

두려움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고통.

두려움을 잊기위해 절여진 싸구려 쾌락.

긴 시간에 닳고 닳은 빛바랜 인간성.

 

같은 길을 걸어온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질감.

 

" 말도 ... 안돼. "

 

" 처음에는 투견 그 뒤엔 강아지. 지금은... "

 

신유의 꼬리가 인회군과 세자를 휘감았다.

인회군이 무어라 외치려했지만 꼬리에 입이 틀어막혔다.

꼬리를 물려고 했으나, 입안 가득 털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 자신의 운명을 뒤늦게 눈치채고 도망치려하지만.

목에 채워진 사슬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신의 의지는 무시되고 그저 흘러가는 운명에 태워져.

분비물을 뿜는 것이 고작인 가축.

그야말로 구(狗)의 모습입니다. 전하. "

 

눈물을 쏟으면서도 자신을 노려보는

인회군에게 신유는 활짝 웃어보였다.

지금까지 그가 보지 못했던 만개한 웃음이었다.

 

" 자식은 부모를 비추는 거울.

그 어떤 왕 빠짐없이 장성하여 내면의 훌륭한 짐승을 드러내어 주니

어미로서 어찌 즐겁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

 

인회군은 꺼져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은 채

신유의 말 하나하나를 똑똑히 뇌리에 새겨 붙잡았다.

 

' 의식을 붙잡아야한다.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길이 보일지니.  나는 가축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나는ㅡ '

 

 

인회군의 어둑해지는 시야 앞에 왕의,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는 하회탈과 같이 활짝 피어진 웃음을 짓고있었다.

눈조차 보이지 않는 일그러진 웃음.

모든 감각과 생각을 정지한 그저 미소.

 

아버지의 얼굴 주변엔 수많은 얼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국화의 꽃잎들과 같은 얼굴들엔 하나하나 미소가 피어있었다.

웃는 얼굴들이 가까워지며 인회군의 시야를 가득 메워갔다.

 

 

 

 

하나의 왕 아래 천년간 번영한, 번영할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의 왕실엔 특별한 점이 둘 있었는데,

 

첫째로 왕이 영생을 산다는 것이었다.

천년전, 요괴와의 내기에 이겨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왕. 

 

천년의 세월간 그가 익힌 지혜는 그 자체로 논어였고,

그것을 통해 펼친 정책들은 반론조차 없었다.

왕은 그 지혜와 무너지지 않을 왕권으로 실책도 없이

영원한 태평성대를 일궈냈다.

 

둘째론 왕의 옆엔 같은 천년의 세월을 산 요괴가 있다는 것이었다.

왕과의 내기에서 패배해 어떤 것이든 이루어주기로 약속한 요괴.

신유(宸遊).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을 한 그녀는 배우자로서 왕을 보필해왔다.

동시에 누구에게나 미소를 짓고 친절히 대하니, 

누구도 그녀가 요괴라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었다.

 

 

단 한명. 서자 재진군(再進君)을 빼곤.

 

 

" 전하께 아침 문안을 드리려하는데,

앞을 가로막으시면 곤란합니다 동궁 마마. "

 

재진군은 자신의 앞을 빙글빙글 뛰어다니는 세자를 보며 말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며 뛰어다니는 세자의 아래엔

그가 먹고있는 과자 가루로 어지러웠다.

 

" 송구하오나 비켜주십시오. "

 

재진군은 세자에게 말을 걸었지만 눈만은 왕의 옆에 서있는 요괴.

신유를 향해있었다. 재진군의 노골적인 시선에 신유는

가벼운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 세자. 수라간이라도 다녀오세요. "

 

신유의 허락에 세자는 기쁜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재진군이 온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노골적으로 불쾌한 시선을 보내는 재진군과 달리

신유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신유는 세자를 볼때마다 천년하고도 백년전,

자신을 내기에서 이긴 남자를 떠올렸다.

자신의 온갖 꾀와 술수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굳건함.

앞을 또렷히 바라보는 눈빛과 힘찬 목소리.

 

' 짐승은 본능을 좇고, 인간은 이상을 좇기 때문이다.

끝없이 나아가는 고결함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다. '

 

그 대단하다는 인간성의 고결함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래서 신유는 남자에게 붙어 영생을 주고, 왕으로 만들었다.

넘치는 호의는 방심을 불렀고, 방심은 틈을 만들었다.

그렇게 벌어진 인간성의 틈새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엔.

 

' 그대들은 이미 나보다도 훌륭한 짐승을 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

 

그러니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고결한 그대들이기에.

나보다 훌륭한 짐승이자 가장 우둔한 짐승들인 그대들이기에.

 

' 구(狗)의 자리야말로, 그대들이 있을 왕좌가 아니겠는지요. '

 

신유는 나날히 자라는 사랑스러운 자식에게서 눈을 떼고

절을 하고있는 재진군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구의 자리에 오를 다음 번뇌의 왕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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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의 댓글

2022.07.22

미친 개꿀쟘

0
2022.07.22

ㄹㅇ

0
2022.07.22

미쳤네 개재밌다

 

0
2022.07.22

왕을 살찐 세자로 만들어버렸다는 거지?

0
2022.07.22
@로스트5

역대 왕들의 정신이 전부 세자에게 옮겨짐

3
2022.07.22

와 오후부터 시간가는줄 모르고 정독했네

0
2022.07.22

그럼 왕의 영혼이 세자에게 이동되서 기존왕이 영혼이 빠저서 행동을못햇던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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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2
@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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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2

잘 읽었다 진짜 잘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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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2

1화부터 숨도 안쉬고 읽었음.

내가 평소에 글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로써 어떤말을 해야 글쓴이가 기분이 좋아질지 모르겠지만 그냥.. 고맙다너무 재밌게 읽었고 이렇게 올려줘서 고맙다. 복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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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2
@육식토끼

고마워 정말 큰 힘이 된다 글 쓰면서 처음 받는 과분한 관심과 말들에 몸둘바를 모르겠어

1
2022.07.22

진짜 재미있다

잘읽었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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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3

아 재밌었다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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